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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함께하는 우리 산하 기행

단절의 땅에 귀 대면 들린다, 외로운 발소리가

충북 보은

  • 최학 │우송대 한국어학과 교수 hakbong5@hanmail.net

단절의 땅에 귀 대면 들린다, 외로운 발소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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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간 고승들의 ‘뻥치기’ 얘기는 언제 들어도 재미있는데 그것이 시로 옮겨지니 한결 맛깔스럽기까지 하다. 더욱이 세속과 이별했다는 속리에서 이런 측간 얘기를 듣고보니 삼라만상이 죄 유쾌하고 통렬하다. 초월적 이적(異蹟)을 굳이 능글맞은 뻥치기로 전해주는데 불교 언어의 진정한 묘미가 있다. 거기에 시인이 한 수 거듦으로 해서 문학의 외연(外延)이 어디까지인지 가늠케 해준다.

산을 오를 일은 아니다. 속리의 어여쁨은 다른 곳에서도 얼마든지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왔던 길로 되돌아 나와 말티고개를 앞두고 왼편 길로 꺾어든다. 삼가저수지, 만수계곡으로 가는 길이다. 구병산의 산 그림자를 수면에 담은 산중 호수는 맑고 고요하며 둘레의 풍경은 한 폭의 그림과 같다. 예전 한때는 나 스스로 이곳 물가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곤 남들이 이 비경을 알면 어쩌나 걱정을 한 적도 없지 않았다. 속리산 천왕봉에서 발원한 삼가천의 물줄기는 십여 리 골짝을 흘러 저수지에 드는데 무성한 숲으로 가려진 그 골짜기가 만수계곡이다. 더위를 피하려 찾아온 소풍객이 붐비는 여름철 풍경도 좋지만 분분히 낙엽 지는 가을철의 그 소슬한 경치 또한 잊을 수 없는 것이 된다.

삼가저수지에서 터널을 빠져 나오면 서원계곡이다. 저수지에 머물렀다 나온 물이 이 계곡을 흘러내려 이윽고 보은 들판을 적신다. 골짝 중간에 상현서원이 있어서 이런 계곡 이름이 붙었다. 조선 명종 때 건립된 서원은 당초 이 고을 출신 명현 김정의 위패를 봉안했으나 뒷날 의병장 조헌과 우암 송시열도 함께 추향했다. 바위가 많은 이 계곡은 여름철 물놀이터로 인근에 소문이 나 있는데 근래 서원 아래 위편으로 고시원이 들어서면서 공부하기 좋은 장소로 알려졌다.

계곡이 끝나는 자리쯤에 선병국 가옥이 서 있다. 나무들이 우거진 드넓은 터에 궁궐 같은 고옥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이곳은 속리산에서 흘러내리는 삼가천 물이 삼각주를 이룬 곳인데 일설에 의하면 집터가 하회마을처럼 연꽃이 물에 뜬 형국의 연화부수형이어서 자손이 번성하고 장수를 누리는 명당이라고 한다.

위안과 치유의 공간



집은 안채와 사랑채, 사당 세 공간으로 구획되며 안담이 그 각각의 공간들을 두르고 바깥 담이 전체를 크게 둘러싼다. 1919~1921년에 지어진 이 집은 전통적 건축기법에서 벗어나 건물의 칸이나 높이 등을 크게 하던 시기의 대표적 건물로 알려졌다. 따라서 잔디가 깔린 마당이며 붉은 벽돌로 축대를 쌓은 모습 등은 전통의 고택에서는 볼 수 없는 이색적인 것이 된다.

이 집을 지은 선병국의 부친 선정훈은 전남 고흥에서 크게 부를 쌓은 뒤 굳이 타향인 이곳에 이런 큰 집을 지었다고 전한다. 그는 구례의 99칸 고택 운조루를 벤치마킹하고 경복궁을 중수했던 당대 최고 목수들을 뽑아 지었다고 하니 당시 그의 재력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짐작이 간다.

마을 앞에서 만나는 큰길이 청원상주고속도로가 놓이기 이전까지만 해도 충청도 보은과 경상도 상주 땅을 잇는 유일한 도로였다. 이 길을 따라 상주 방향으로 가다가 만나는 마을 하나가 바로 마로면 관기리인데 이곳에도 참 좋은 시의 목청을 가진 시인이 살고 있다. 무심히 골목을 들어서도 쉽게 시인의 집을 찾는다. 하지만 나는 수수하고도 정감 있는 그 집 앞에서 곧 걸음을 돌린다. 예전의 안면 하나로 시인을 번거롭게 할 마음은 없다. 대신 길 건너 들판에 섬인 양 외따로 숲을 두르고 앉은 고봉정사의 숲 그늘에 앉아 시인의 시 한 편을 되뇌어본다.



이곳에 숨어산 지 오래되었습니다

병이 깊어 이제 짐승이 다 되었습니다

병든 세계는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황홀합니다

이름 모를 꽃과 새들 나무와 숲들 병든 세계에 끌려 헤매다 보면

때로 약 먹는 일조차 잊고 지내곤 한답니다

가만, 땅에 엎드려 귀 대고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를 듣습니다

종종 세상의 시험에 실패하고 이곳에 들어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몇 번씩 세상에 나아가 실패하고 약을 먹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가끔씩 사람들이 그리우면 당신들의 세상 가까이 내려갔다

돌아오기도 한답니다

- 송찬호 시 ‘이곳에 숨어산 지 오래되었습니다’ 중에서

단절의 땅에 귀 대면 들린다, 외로운 발소리가
최학

1950년 경북 경산 출생

고려대 국문과 및 대학원 졸업

197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창작집 ‘잠시 머무는 땅’ ‘식구들의 세월’ 등

장편소설 ‘서북풍’ ‘안개울음’ ‘미륵을 기다리며’ ‘화담명월’ 등


누구에게나 고향은 위안과 치유의 공간이 될 수 있을 듯싶다. 단절의 땅에 숨어 사는 탓에 이편의 소소한 것들 모두가 아름답고 황홀하다. 하여 바깥세상에서 실패하고 돌아오는 이들의 그 외로운 발소리도 들을 수 있다. 문득 그 보은 땅에서 내가 나에게 묻는다. 지금 내가 있는 세상은 ‘당신들의 세상’인가? 어딘가?

신동아 2013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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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학 │우송대 한국어학과 교수 hakbong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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