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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가 있는 풍경

벌교 가면 ‘부용산’ 빼곤 노래 얘기는 꺼내지도 마라

안성현 ‘부용산’

  • 글·김동률|서강대 MOT대학원 교수 yule@empas.com 사진·권태균|사진작가·신구대 교수 photocivic@naver.com

벌교 가면 ‘부용산’ 빼곤 노래 얘기는 꺼내지도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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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용산’은 본디 1947년 목포 항도여중에서 교사로 재직하던 시인 박기동(1917~2004)이 24세에 요절해 전남 벌교 부용산 자락에 묻은 누이를 추모해 지은 시였다. 여기에 같은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던 음악교사 안성현이 열여섯 살 여제자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선율을 붙였다고 전한다. 우연히 두 여자의 죽음이 겹친 것이다.

작곡가 안성현은 일반 대중에게는 낯선 음악가다. 그러나 그가 김소월의 시에 가락을 붙인 저 유명한 ‘엄마야 누나야’의 작곡자라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일제치하에서 우리 민족의 슬픔을 애절하게 노래했던 ‘엄마야 누나야’의 작곡가가 일반에게 알려진 건 얼마 되지 않는다. 오랜 세월 교과서와 노래집에는 김소월 시, 작곡가 미상으로 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전남 나주 출신인 그는 6·25 당시 월북했으며 북한 국립교향악단 단장을 지냈다고 전한다. 그런저런 이유로 노래 ‘부용산’의 작곡자는 지난 권위주의 시대, 그 오랜 세월 동안 수면 아래로 사라지고 작곡자 이름은 백지로 남게 된다.

1960~80년대 저항가요

그러나 노래는 해방 공간의 폐허가 된 시대적 정서에 맞물려 호남 전역에서 소리 소문 없이 인기를 끌며 퍼져 나갔다. 특히 전라남도에서 유행했던 이 노래는 ‘좌익’들에게는 자신들의 군가처럼 받들어지며 애창된다. 실제로 지리산, 회문산 일대 골짜기의 달 밝은 밤이면 두고 온 고향을 그리워하는 빨치산들이 워낙 구슬프게 불러대는 바람에 인근 마을 사람들까지 밤잠을 설쳤다고 한다. 애초 이념과는 무관했던 이 곡이 금지곡이 된 데에는 이처럼 빨치산이 즐겨 불렀다는 이유가 한몫한다. 사실 빨치산들도 노래에 이념성을 넣어서 불렀다기보다는 자신들의 처지가 고달파서 불렀겠지만 여순 사건 등을 거치면서 노래는 당국에 의해 엄격히 금지된다.

이 여파는 작곡자 안성현에게 옮겨져 1949년 안성현은 면직처분을 받았고 6·25 전쟁이 발발하자 월북해버렸다. 난데없이 유탄을 맞게 된 박기동 시인 역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이 ‘부용산’의 작사자임을 철저히 숨겼다. 하지만 계속되는 당국의 가택 수색, 연금 등을 피해 호주로 이민 가게 된다. 이 같은 연유로 지하로 깊숙이 숨었던 노래는 1960~80년대 운동권, 진보 지식인들에게 작자 미상의 구전 저항가요로 은밀하게 전해졌다. 권위주의 시대, 극히 일부에게 전해지며 겨우 명맥을 이어오던 노래는 1980년대 후반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계기로 드디어 대중에게 존재감을 드러내게 된다. 그 뒤 가수 안치환이 음반을 낸 것을 기점으로 한영애, 윤선애, 이동원, 국소남 등 여러 가수가 경쟁하듯 불렀지만 실체를 아는 일반인은 여전히 손에 꼽을 정도다.



호남인의 애창곡인 ‘부용산’의 실체가 일반 대중에게 알려지면서 노래는 연고를 주장하는 지역 간 갈등의 씨앗이 되는 또 다른 기이한 운명을 만난다. 전술한 바와 같이 노래는 목포 항도여중 음악교사 안성현이 당시 사랑에 빠졌던 미모의 여제자 죽음을 슬퍼한 나머지 작곡했다는 일부의 주장에 따라 한동안 목포의 노래로 인정받게 된다. 당연히 목포지역 사람들은 자신들의 노래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뒤늦게 벌교번영회가 중심이 된 열혈 벌교 주민들이 이에 반발, 벌교의 노래로 선언한다. 노래 한 곡을 두고 두 지역이 ‘원수’가 된 상황이다. 벌교 주민들의 정성은 뻗쳤다. 목포에 빼앗긴 노래를 되찾기 위해 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이어 꼬막 팔아 번 돈으로 성금을 모아 호주로 떠난다. 호주로 이민 간 작사자 박기동 선생을 만나기 위해서다.

박기동 시인의 증언으로 폐병으로 사망한 누이동생을 벌교의 뒷산 부용산 자락에 묻고 오며 시를 지었고 항도여중 재직 당시 동료 교사 안성현이 노랫가락을 붙였다는 실체적 진실을 확보한 벌교 주민들은 마침내 ‘부용산’을 벌교의 노래로 선언한다. 그 뒤 해마다 벌교꼬막축제 등 크고 작은 벌교 행사에는 반드시 노래 ‘부용산’을 의무적으로 부르도록 했다. 박 시인은 1987년 ‘부용산’이 해금되고 그 뒤 노래 ‘부용산’이 재조명되자 2002년 일시 귀국해 산문집 ‘부용산’을 출판했고 노래가 벌교의 노래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해준다. 이후 2003년 호주 생활을 청산하고 영구 귀국했으나 이듬해인 2004년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쳤다.



부용산 산허리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 사이로

회오리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 마디 없이

너만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붉은(병든) 장미는 시들었구나

부용산 산허리(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그리움 강이 되어

내 가슴 맴돌아 흐르고

재를 넘는 석양은

저만치 홀로 섰네

백합일시 그 향기롭던

너의 꿈은 간 데 없고

돌아서지 못한 채

나 외로이 예 서있으니

부용산 저 멀리엔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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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김동률|서강대 MOT대학원 교수 yule@empas.com 사진·권태균|사진작가·신구대 교수 photocivic@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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