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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그곳에 가고 싶다

배창호가 떠나려 한 그 바다가 보고 싶다

남애항과 ‘고래사냥’

  • 글 · 오동진 | 영화평론가 사진 · 김성룡 | 포토그래퍼

배창호가 떠나려 한 그 바다가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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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설의 정치학, 변방의 정치학

남애항 부둣가는 지금 공사가 한창이다. 이런저런 편의시설을 새로 만들고, 부두 정비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한쪽에 즐비하게 늘어선 횟집도 아직 본격적인 휴가철이 아니어선지 다소 한가해 보였다. 정박한 배들이 뱃머리를 살짝살짝 흔들어대며 망중한을 즐기는 듯한 표정이 재밌다. 나중에 하조대에 가서 더 탄성을 지르기는 했지만 남애항에도 그에 준할 만한 전망대가 제대로 갖춰져 있다.

하조대나 남애항이나 전망대 바닥은 대형 통유리로 돼 있어 바닥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미국 애리조나 주 그랜드캐니언을 미니급으로 살짝 베껴온 것 같은데, 그런대로 스릴이 있다. 발밑 유리 저 아래로 한가한 바위들과 그것들의 궁둥이를 철썩철썩 후려치는 파도가 보인다. 방파제 테트라포드도 누군가가 툭툭 던져놓은 듯하지만, 그 나름 질서를 지니고 해변 마을을 지킨다. 저 멀리 등대가 보이는데, 거기에 이르는 길이 오후의 느슨한 햇빛을 받고 게으름 피우듯 연결된다.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배창호 감독이 ‘고래사냥’을 찍은 때는 남애항 풍광이 이렇지 않았을 것이다. 전망대는 언감생심이고, 등대로 이어지는 길도 지금처럼 신작로 같은 느낌은 아니었을 거다. 횟집들은 남루하고 동해의 물길도 차갑고 음흉했을 것이다.

시대가 그랬다. ‘고래사냥’이 만들어진 때는 1984년이다. 대학가는 ‘광주사태’라 불리던, 광주민중항쟁의 여파가 계속되고 있었다. 녹화사업이니 학원안정법이니 뭐니 해서 연일 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배창호는 그 혹독한 군사독재 시절 일탈과 방황이라는 화두를 통해 젊은이들로 하여금 세상과 맞서게 하려 했다. 당시 그의 영화엔 영국과 미국이 1960~1970년대에 유행시킨 앵그리 영맨, 비트 제너레이션의 문화적 트렌드가 깔려 있다. 이른바 ‘배창호 식’으로, 그러니까 우회적으로 그 시대를 비판하고 풍자하려던 그의 의지가 담겨 있다.



모두들 기억하는 ‘고래사냥’의 줄거리를 복기하면 이렇다. 포주들에게 착취당하던 벙어리 창녀 춘자(이미숙)가 있고, 이 여자를 구하려고 아무 상관없는 병태(김수철)가 끼어들게 되는데, 그를 돕는 사람이 자칭 거리의 도사라 불리는 거지로, 병태의 멘토가 되는 민우(안성기)다. 어쩌면 아무런 현실적 개연성이 없어 보이는 이 영화의 줄거리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탈(脫)정치’를 통해 정치를 얘기하려 하는 배창호 감독 특유의 ‘역설의 정치학’이 읽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배창호의 눈에 당시의 정치나 사회는 한마디도 얘기할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정치의 정(政)자는 꺼내지도 말되, 세상에서 가장 소외된 인간들을 통해 이 사회의 모순을 보여주자는 것이다. 때론 코믹한 이미지이긴 하지만 그의 영화에 거지가, 창녀가, 왕따가 나오는 것은 그 때문이다. ‘변방의 정치학’을 구현한 셈이다.

표류하는 듯, 좌초하는 듯

영화는 기억하지 못해도 송창식의 노래는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송창식이 동명 타이틀 곡으로 부른 노래 가사는 지금 봐도 강력하게 체제저항적이다.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 / 가슴에는 하나 가득 슬픔뿐이네 / 무엇을 할 것인가 둘러보아도 / 보이는 건 모두가 돌아앉았네 /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 / 삼등삼등 완행열차 기차를 타고

이 노래는 나오자마자 한동안 금지곡이 됐다. 암울한 1980년대를 생각하면 이 노래를 영화에 쓸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놀랍다는 생각도 든다. 고(故) 최인호 작가가 만든 이 노랫말은 마치 최인훈의 소설 ‘광장’ 속 주인공처럼 무정부주의적인 냄새를 물씬 풍긴다. 독재자라면 반드시 금지했을 노래다. 다분히 불온하고 불순하다. 영화 ‘고래사냥’ 자체가 사실은 아나키스트적인 영화였던 셈이다.

흔히 배창호의 작품 세계를 상업영화를 만든 전반기와 급격하게 독립영화로 기운 후반부로 나누는 경향이 있다. 꼭 그럴 필요는 없다. 전반이나 후반이나 배창호는 늘 새로운 것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는 늘 한결같았다.

한국 영화는 1980년대에 이르러 이장호-배창호-이명세로 이어지는 길목에서 바야흐로 새로운 감각과 스타일을 갖추기 시작했다. ‘고래사냥’을 두고 앞뒤로 만들어진 배창호의 ‘적도의 꽃’(1983)과 ‘깊고 푸른 밤’(1985)이야말로 1980년대 영화의 백미 중 백미다. 그 시대를 대표하는 작품들이다.

배창호는 이후 ‘황진이’와 ‘꿈’ ‘기쁜 우리 젊은 날’ ‘안녕하세요 하나님’ 등을 통해 마치 표류하는 듯, 그래서 때론 좌초하는 듯했지만 끊임없이 자기 실험과 새로운 미학의 추구를 시도했다. 결국 그는 1인 시네마의 방식으로 자신을 귀결시켰으며 그 결과가 바로 ‘러브 스토리’ ‘정’ ‘길’ 같은 독립영화였다.

어찌 보면 그는 지난 30여 년의 영화 인생에서 줄기차게 자신만의 ‘길’을 찾으려 한 셈이다. 중견 감독 가운데 배창호처럼 스무 편에 가까운 영화를 연출한 사람은 드물다. 그는 심지어 자신의 조감독 출신인 이명세 감독의 초기 걸작 ‘개그맨’에 주연급 배우로 출연하기도 했다. 독립영화 ‘러브 스토리’ 등 3부작에서는 모두 직접 주연을 맡았다.

배창호의 ‘길 찾기’는 계속된다

영화계는 그의 고집불통 예술주의를 비난하고, 매도하고, 결국 등을 돌렸지만 그는 굴하지 않고 영화를 만들어왔다. 다만 이번 사고로 그의 예민한 정신세계가 언제든 와르르 무너질 수도 있다는,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음을 보여줬다. 그 또한 어쩔 수 없는, 날카롭고 연약한 지적 예술가인 것이다.

그의 마지막 작품 ‘여행’에서 매 편의 에피소드가 주인공들이 길을 떠나는 장면으로 마무리되는 것은,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의 영화적 의지가 읽히는 대목이다. 이 뛰어난 중견 감독이 여전히 길을 찾고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배창호는 지금 몹시 외로운 상태다. 그는 죽음의 문턱을 다녀왔다. 그가 찾았다고 생각하는 영화의 길은 또다시 저만큼 멀어진 상태가 됐다. 그는 지쳤다. 삶에 지쳤고 영화 만들기에 지쳤다. 왜 그러지 않겠는가. 아마도 그건 ‘고래사냥’을 찍던 1984년 남애항에서도 느낀 감정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배창호를 돌려받을 수 있을까. 그는 여전히 열아홉 번째, 스무 번째의 영화를 만들어야 하고 만들 수 있는 나이다. 그는 지금 예순둘밖에 되지 않았다. 누가 그를 죽음의 망상으로 몰아넣었을까. 그가 가려고 한 곳은 과연 동해 바다였을까. 그 순간 그는, 삼등삼등 완행열차를 떠올렸을까. 아, 배창호 우리의 배창호. 그를 위해 모두가 기도하는 마음이 돼야 할 때다.

신동아 2015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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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오동진 | 영화평론가 사진 · 김성룡 | 포토그래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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