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월호

“초국적 투기자본 통제해야”

  • 김학준 (동아일보 편집·논설상임고문)

    입력2005-05-11 14: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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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론에 매우 비판적인 한 프랑스 국제정치학 교수를 만났다. 한국정치학회가 12월2일 서울 프라자호텔에서 마련한 간담회에서였다. 파리8대학 국제정치학 교수이면서 프랑스의 대표적 일간지 ‘르 몽드’가 발행하는 월간지 ‘디플로마틱(외교)’의 편집-논설위원인 필립 골럽(Philip Golub) 박사가 바로 그 사람이다.

    우선 그가 살아온 발자취를 살펴본다. 1955년 미국에서 미국인 부모 아래 태어난 그는 부모가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바람에 초등학교를 프랑스에서 다녔고 부모가 다시 미국에서 활동하게 됨에 따라 중고등학교를 미국에서 다녔다. 대학 학부 과정은 뉴욕의 사라로런스대학 인류학과에서, 석사과정은 프랑스의 메츠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서, 박사과정은 프랑스의 소르본대학교 국제관계학과에서 각각 마쳤다. 따라서 영어와 프랑스어를 동시통역할 수 있을 정도로 프랑스어에 익숙하다.

    부모는 모두 화가로, 베트남전 반대운동과 반폭력운동에 적극 참여했으며 이 공로로 두 사람은 일본 히로시마(廣島)평화상을 수상했다. 정치적 성향이 이런 부모가 그에게 끼친 영향은 아주 컸다. 그래서 미국의 ‘제국주의적’ 대외정책에 일찍부터 눈을 떴으며, 1990년대 후반 이후 일관되게 미국 주도의 세계화 또는 신자유주의론을 비판해왔다. 그의 얘기를 들어본다.

    “오늘날 전개되는 세계화의 두드러진 특징은 금융의 세계화다. 폭넓은 개념의 세계화를 두고 축복인지 재앙인지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금융의 세계화만 놓고 보면 분명히 재앙 쪽에 가깝다. 금융의 세계화란 결국 ‘금융자본의 국경을 넘는 무차별적 이동’을 뜻하는데, 이것이 앞으로 계속된다면 세계 곳곳에서 외환금융 위기를 불러일으키게 될 뿐만 아니라 종국에는 세계금융시스템의 총체적 붕괴를 낳을 위험이 따르기 때문이다.

    금융의 세계화, 무엇이 문제인가



    그것뿐만이 아니다. ‘금융자본의 국경을 넘는 무차별적 이동’에 따라 우선 북반부의 잘사는 나라들과 남반부의 못사는 나라들 사이에는 빈부격차가 극심하게 나타나고 있다. 동시에 같은 나라 안에서도 빈부 격차가 극심하게 벌어지고 있다. 유엔발전계획(UNDP)의 조사에 따르면, 잘사는 나라에 사는 세계 20%의 인구와 아주 못사는 나라에 사는 세계 20%의 인구 간 소득 격차는 1960년에는 30 대 1이던 것이 오늘날에는 70 대 1로 벌어졌으며 2015년 경에는 150대 1로 그 차이가 더 커질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전개될 때, 인류 사회 전체가 직면할 위험의 수준은 매우 높을 것이다. 그 점을 깨닫기 위해 우리는 잠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사이에 유럽을 휩쓸었던 시장 신봉과 자본 자유화를 다시 새겨볼 필요가 있다. 그 사조 아래 국내에서는 계급간 갈등이 날카로웠고 국제적으로는 강대국이 약소국에 대해 제국주의적 침탈을 강화했으며 그러한 복합적 대결구도 속에서 유럽에서는 혁명과 전쟁이 일어났던 것이다.

    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혁명이라는 커다란 희생을 치르고 나서야 시장 신봉과 자본 자유화에 대한 반성이 뒤따랐던 역사적 사실을 우리는 결코 잊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론의 이름 아래 국내적으로나 국제적으로 약육강식이 확대되고 계급갈등이 심화되면 결국 인류는 또 한 차례 커다란 사회혁명과 국제전쟁이라는 불행한 재앙에 빠져들 수 있다.

    그는 이러한 안목을 가지고 한국 경제를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소련과 대결하던 냉전시대에 미국은 친미 우호 국가를 하나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 한국에 대해서도 독자적이거나 보호주의적 산업정책과 자본통제정책을 허용했다. 그러나 소련이 해체되면서 냉전이 끝나자 미국은 그렇게 할 필요가 없어졌고 자연히 한국을 동북아시아의 경제적 경쟁자로만 인식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미국은 한국이 미국에 유리한 정책인 ‘초국적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받아들이도록 압박을 가한 것이다. 이 시점은 한국이 김대중 대통령의 철학에 따라 경제민주화를 달성하고자 재벌의 해체를 추진하는 시점과 일치하게 됐다.

    김대중 정부는 이 두 과제를 동시에 추진하는 것을 개혁에 두 기둥으로 삼아왔다. 한국의 경제 위기는 여기서 불가피하게 발생한다. 결론을 말하자면, 미국이 그 중심에 서 있는 초국적 자본이 한국의 경제주권을 압박하는 가운데 강도 높게 진행되는 재벌 개혁 및 금융 개혁은, 개혁의 필요성은 인정하더라도 결과적으로 기업 및 은행의 해외 매각에 따른 초국적 자본에 대한 종속, 그리고 실업자의 양산에 따른 중산층의 붕괴와 빈곤층의 증대를 가져오게 된다. 김대중 정부의 장래는 바로 이 경제 위기를 어떻게 관리하고 극복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렇다면 김대중 정부는 어떤 정책 대안을 검토해야 할 것인가. 골럽 교수의 처방은 이렇게 이어진다.

    “말레이시아가 그랬듯이 자본통제책을 도입해야 한다. 특히 초국적 단기 자본의 유출입은 통제해야 한다. 1998년에, 금융세계화의 폐해를 고발하고 특히 단기적 투기자본의 국제규제를 위해 투기자본에 대해 세금을 물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전세계시민사회운동체로 투기자본과세연합(ATTAC)이 발족했는데, 내가 이 단체의 특별고문으로 일하는 까닭은 이 단체의 취지에 전적으로 동의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 단체는 내가 관여하고 있는 ‘르몽드’가 주도적으로 참여해 만든 것이다.”

    그가 말하는 세금을 학계에서는 그 아이디어를 내놓은 제임스 토빈(James Tobin) 교수의 이름을 따서 ‘토빈세’라고 부른다.

    투기자본과세연합의 영향은 꽤 크다. 우선 캐나다가 토빈세 취지에 동의해 입법조치했다. 유럽연합의 유럽의회도 토빈세 채택 여부를 놓고 격론을 벌였다. 비록 3표차로 부결됐으나 머지 않은 장래에 채택되리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유엔 경제이사회도 특별위원회를 구성해 이 문제를 심의하고 있다. 앞으로 10년 안에 이 제도를 채택하는 나라의 수는 적지 않게 늘어날 것이다.

    골럽 교수는 이어 “한국은 지나치게 높은 대외 경제의존도를 낮춰야 한다”고 제의한다. “한국 경제의 대외의존도가 너무 높다 보니 외부의 충격에 자주 노출되고 만다”고 분석한 그는 “이제 한국은 내수 중심으로 돌아설 수 있을 만큼 성장했기 때문에 내수를 부양하는 전략으로 선회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렇게 하지 않을 경우 한국은 미국 경제의 침체와 같은 대외 환경의 변화로 말미암아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된다”고 경고했다. 그는 이어 생산적 복지제도를 폭넓게 채택해야 한다고 제의한다. 마지막으로 그는 아시아통화기금(AMF)의 창설을 제의했다.

    골럽 교수는 원래 운동권 출신이다. 부모의 영향으로 고등학생 때부터 진보적 학생운동에 참여했고 하버드대 면접시험 때 입학한 뒤에도 학생운동을 계속하겠다고 답변한 탓에 입학이 거부됐다고 회고했다. 미국의 대외정책에 대해 그가 비판적인 이유를 이해할 만했다. 그는 오늘날의 국제정치를 이렇게 보았다.

    “미국은 정치 군사 경제의 모든 분야에서 세계의 단독적 패권국가로 확실하게 자리잡았다. 이 지위는 앞으로 상당기간 계속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미국이 이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라는, 겉으로 보기에 그럴 듯한 새로운 지배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 전세계에 전파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로 포장된 이 이데올로기는 모든 국가로 하여금 시장경제 모델에 매달리게 하는 대신에 국가 주도의 산업화 모델을 포기하도록 유도하며, 그리하여 많은 나라가 그 유효성이 역사적으로 이미 입증된 국가주도의 산업화 모델을 너무도 쉽게 버리고 있어 안타깝다.”

    중국은 지역강국

    미국 정부의 일부 전략가들은 중국 위협론을 강조하고 있다. 이 점에 대해 골럽 교수는 이렇게 비판한다.

    “나는 중국이 21세기에 세계강국으로 자리잡고 미국과 경쟁을 벌일 것이라는, 그리하여 21세기는 미-중 대결의 시대가 되리라는 조셉 나이(Joseph Nye) 미국 하버드대 교수 등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중국이 과연 현재의 속도로 고속 성장할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갖고 있다. 중국의 해안지역과 내륙지역 사이의 소득 격차가 너무 크고 실업률이 20%선을 넘어서면서 사회적 갈등이 깊어지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중국이 분열되지는 않겠지만 공산당 1당 독재체제는 강력한 저항을 받을 것이다. 나는 이러한 중국의 내부적 문제점들에 유의하면서 중국이 결국 지역 강대국으로 남게 되지, 세계 강대국으로 도약하지는 못하리라고 본다. 그러므로 앞으로 약 20년 동안만 놓고 볼 때 중국위협론에 대해서는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

    한반도 정세는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골럽 교수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나는 남북 정상회담을 계기로 한반도는 군사적 긴장을 완화시키는 쪽으로 방향을 잡을 것이라고 본다. 그것은 남과 북 모두에 절실하기 때문이다. 북한은 결국 변화한다. 그렇지 않고는 북한은 국가로서의 생존을 위협받게 될 것이다. 생존을 위해 서방세계와, 남한과 협력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남과 북은 우여곡절을 겪기는 하겠으나 평화공존과 ‘연합’의 단계를 밟아 아마도 앞으로 15년 안팎의 시점에 재결합 기회를 맞이할 것으로 기대된다.

    북한은 당분간 주한 미군의 주둔을 바랄 것이다. 중국이 뒤에 버티고 있으며 한국에 비해 경쟁력이 뒤지므로 북한은 미사일 외교와 핵 외교를 지렛대로 미국을 최우선 협상 대상자로 삼으려 할 것인데, 미군의 남한 주둔은 이러한 북한의 전략을 유효하게 하는 조건이 된다고 생각한다.” 김학준 (동아일보 편집·논설상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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