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2월호

변화의 달인 김윤환 딸각발이 선비 김윤식

  • 정혜신

    입력2005-05-06 15: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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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윤환 민국당 대표는 1932년생, 김윤식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는 1936년생으로 두 사람 모두 60대 중반을 넘긴 나이다. 지금도 각자의 영역에서 젊은 사람 못지 않게 왕성히 활동하지만, 노(老)정객이나 노(老)학자라는 말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이 시대의 원로들이다.

    김윤환대표는 여러 이질적인 정권에서 요직을 두루 거친 ‘양지의 정치인’이고, 김윤식교수는 소설가의 꿈을 접고 문학평론가가 되어 평생을 ‘쓰고 읽는’ 일에만 전념해온 전형적인 학자다.

    하는 일이 달라서도 그렇겠지만 두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이나 스타일은 전혀 다르다. 필자는 정신과 의사의 입장에서 두 원로의 성향을 유추해보며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성향에 맞는 직업을 잘 선택했구나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좀 실없는 짓이긴 하지만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보자. 김윤환대표가 평생 학자로서의 길을 걸었고 김윤식교수가 정치를 직업으로 삼았다면 어떠했을까. 정치인 김윤식과 노학자 김윤환. 실없는 웃음을 터뜨리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역사에서 ‘만일’이라는 가정법을 사용하는 것과 같은 허망함과 우리에게 익숙한 이미지를 떨쳐버려야 하는 혼란스러움에 대부분의 원인이 있겠으나, 필자는 그 어색함의 이유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개인적 성향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두 분의 원로가 정치인 김윤식과 학자 김윤환으로 진로를 변경했어도 그 세계에서 나름의 독특한 영역을 구축할 수 있는 성향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주장도 있을 수 있다. 맞는 말이다. 사람의 성향이나 적성이란 다분히 다면적인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메이저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실제로 김윤식이 1962년 ‘현대문학’에 ‘조연현론’을 발표, 문단에 등단해 평론 뿐 아니라 시와 소설을 함께 쓰고 있을 바로 그때, 김윤환은 시인 허만하씨와 ‘시와 비평’이라는 시 전문 계간지를 발행하고 있었다. 심심풀이가 아니라 문단에 정식으로 데뷔한 시인으로서였다. 시인 조병화씨는 당시 신문 월평에서 김윤환의 시를 가리켜 ‘낭만풍의 지적인 시’라고 평했다. 그러나 김윤환은 시인이 되지 않고 정치인이 되었으며 김윤식은 소설가가 되지 않고 평론을 하는 학자의 길을 걸었다.

    김윤환이 명분을 중시하는 스타일리스트라면 김윤식은 인간의 내면에 천착하는 애널리스트다. 김윤환은 그의 시 ‘광장에서’처럼 넓게 열린 공간에서 많은 사람들과 수없이 많은 악수를 나누는 반면, 김윤식은 등단 소감에 쓴 대로 ‘노예선의 벤허처럼’ 자신만의 공간에서 눈에 불을 켜며 산다.

    두 사람이 결정적으로 다른 부분은 김윤환이 ‘유목민 스타일’이라면 김윤식은 ‘농경민 스타일’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김윤환이 ‘변화와 적응의 달인’이라면 김윤식은 전형적인 ‘딸각발이 선비’다. 이 대목이 ‘변해야 살아 남는다’고 숨가쁘게 외치는 이 시대에 필자가 하필이면 두 원로에 주목하는 결정적인 이유다.

    잘 알려진 것처럼 김윤환은 3공화국의 유정회 국회의원을 시작으로 5공과 6공 그리고 문민정부의 핵심요직을 두루 거쳐 현재 민국당 대표로 있는 정치인이다. 물리적 시간으로만 따져도 20년이 넘는 세월이었고 그와 영욕을 함께 한 최고통치권자들만 해도 4명이나 된다. 박정희 전대통령은 그의 정계입문을 도운 사람이었고 전두환, 노태우 전대통령은 그의 친구들이었으며, YS는 킹메이커 김윤환의 도움으로 대통령이 되었다. 정치부 기자들에 따르면 김대중대통령과도 관계가 나쁘지는 않은 모양이다.

    변화의 시대를 사는 두 원로

    변화에 적응하는 특별한 비결이 있지 않고서는 쉽게 납득할 수 없는 놀라운 행적이다.

    반면 김윤식은 1959년 서울대 사범대 국문과를 졸업한 이후 1년 정도 도쿄대에서 수학한 기간을 제외하면 현재까지 서울대 한 곳에서, 평생 써본 감투라곤 순번제로 맡는 국문과 학과장이 유일할 정도로 30년 가까이 문학비평의 외길을 걷고 있다.

    대학자로서 김윤식이 가지고 있는 업적과 경외심을 잠시 접어놓는다면 40대 이상의 남자들은 대부분 김윤식과 비슷한 삶을 추구했거나 그렇게 살아온 사람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많은 남자들은 변화가 대세인 시대의 흐름에 떠밀려서 지금까지의 자기를 부정하는 것이 좋다는 강박관념을 갖기에 이르렀다. 변하지 못하는 것은 무능의 다른 표현에 불과하다. 세계 100대 기업 중 한 세기 이상 수성(守成)에 성공한 기업은 17개에 불과하며 그 생존과 쇠퇴를 가른 조건이 바로 ‘자기변혁’이라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지난 3년간 30대 재벌 중 대우를 포함한 14개 재벌이 망하거나 오너가 바뀌었는데 이 또한 변화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한 결과란다.

    이런 사실이 수많은 직장인들을 압박한다. 올 한해 ‘동아일보’가 내건 슬로건도 ‘변해야 한다’이다. 원래는 ‘나부터 변하자’는 표어였는데 일방적인 변화만을 강요받아온 일반 시민에게 또 다시 변하라는 주문은 짜증만 나게 할 뿐 호소력이 없다는 외부 전문가 그룹의 자문을 수용한 결과란다. 주제넘은 얘기지만 언론사의 독선적이지 않고 겸허한 심정적 배려가 더없이 고맙다.

    사회의 한쪽에서는 분사를 비롯한 슬림화가 우리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다른쪽에서는 기업합병의 시너지효과를 주장하며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거대 공룡기업으로의 변화가 한창이다. 모순이 따로 없다. ‘변화’라는 화두에도 이러한 양면성은 그대로 존재한다.

    변해야 할 이유가 있다면 당연히 그래야 하겠고 또 그렇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변해야만 살아 남을 수 있다’는 식의 맹목적인 주문은 인간적이지도 않고 너무 극단적이다.

    김윤식은 외견상으론 답답할 정도로 변화가 없는 삶을 사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는 글쓰기나 비평작업의 접근 방법에서 놀랄 만큼 다양한 변화를 추구한다.

    그런 점에서 김윤환과 김윤식은 소위 ‘변화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은 인물들이다. 그들을 통해서 삶에서의 ‘변화’라는 것이 가지는 의미를 천천히 음미해 보자. 먼저 김윤환에 대해서 살펴보자.

    김윤환의 좌우명은 중용상덕(中庸常德)이라고 한다. 김윤환의 정치철학과 그가 추구하는 삶의 스타일이 그대로 담겨있는 듯한 좌우명이다. 그는 정치도 시를 닮아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인데,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의 표현을 빌리면 지난 20년간 무위(無爲)와 낙관(樂觀)으로 한국 정치 무대의 한쪽을 차지해온 인물이 김윤환이란다. 그는 자신이 실무형도 보좌형도 아니며 늘 중용을 걷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182cm의 훤칠한 키에 잘 생긴 얼굴, 격식을 따지지 않는 행동거지, ‘선비탈’이라고 표현되는 특유의 미소에서 비롯하는 친화력은 마력이라고까지 불린다. 거리낌없이 사람들을 대하고, 상대를 압도하기보다는 감싸안으며 이해시키는 게 그의 최고 무기다.

    그의 인간적 매력이나 독특한 스타일은 그대로 정치인 김윤환의 탄탄한 정치적 자산으로 이어진다. 김윤환은 이 막강한 무기를 바탕으로 도저히 하나로 엮일 수 없는 인물들을 하나로 만들어내고, 한 목소리가 되도록 하는 아교가 되고 디딤돌이 된다. 타협과 조정의 명수라는 별명이 괜한 소리가 아니다.

    대통령제 아래에서 대권도전의 깃발을 든 적이 없는 그의 주위에 사람이 몰리는데 대해 그를 따르는 한 의원은 “허주는 합리성과 상식을 바탕으로 정치를 물흐르듯 한다”며 “그를 따라가서 최소한 손해보지는 않는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에 주변에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 같다”고 평가한다.

    40대 후반의 나이에 정계에 입문해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언제나 권력의 핵심부에서 ‘킹메이커’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나름의 확고한 입지를 구축한 게 단지 ‘노련한 처세술’만으로 가능했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소위 ‘정치공학’이라고 불리는 그의 탁월한 ‘정치적 능력’이 단단히 한몫을 했으리라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 사회에서 ‘정치적 능력’이 뛰어나다는 말은 대부분 부정적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적어도 일반인의 시각으로는 그렇다. 정치를 직업으로 삼고 있는 정치인에게 그런 수식어가 붙어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자산 증식에 놀랄 만큼 뛰어난 실적을 보이는 자산관리 전문가에게 다 좋은데 지나치게 이재에 밝다고 손사래를 치는 꼴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정치’에 대해 가지고 있는 지나친 애정과 지나친 혐오는 모순의 극단이라 할만하다. 우리나라 정치는 일종의 블랙홀이다. 그 안에만 들어가면 고매한 인품도, 전문가적인 안목도, 사회적 명성도 모두 컴컴한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리고 입뭇매에 시달리는 정치인의 모습만 남는다. 아마 김수환추기경이나 법정스님이 정치를 해도 블랙홀의 흡인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지도 모른다. 견뎌낼 장사가 없다.

    우리나라 정치의 구조적 결함이 그 첫번째 원인이겠지만, 정치를 바라보는 일반 국민의 모순된 감정이나 인식 때문에 그렇게 되어버리는 측면도 분명히 있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윤환이란 인물은 아직 블랙홀에 완전히 잡아먹히지 않고 빛을 발하는 부분이 잔존하는 흔치않은 정치인 중의 한 사람인 듯하다.

    필자처럼 정치평론을 업으로 하지 않는 정신과 의사가 정치문제를 언급하는 건, 김윤환이란 인물이 일반인들의 정치인식에 대한 빛과 그림자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정치인이기 때문이다.



    마음을 사로잡는 정치인

    지난해 초 필자는 한 잡지에서 중앙 일간지 30대 정치부 기자가 했다는 말을 인상 깊게 읽었다. 정치인 김윤환에 대한 인간적인 느낌을 말한 것인데 내용은 이렇다.

    “솔직히 정치판에서 없어져야 할 구악 1호가 허주라고 생각했었다. 도대체 몇년째 정치판에 머물고 있고, 그것도 권력의 핵심만 찾아다니느냐. 킹메이커랍시고 이 땅에 금권정치의 폐해를 가져온 대표적인 인물이 아니냐는 생각이었다.”

    정치인 김윤환에 대한 일반인의 시각도 이와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 기자의 말은 계속 이어진다.

    “그런데 허주를 몇 번 만나보고 나서는 그의 팬이 되어 버렸다. 밖에서 알던 것과는 너무나 큰 차이가 있었고 그나마 정치의 멋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란 것을 깨달았다.”

    그에 대해 별반 좋지 않은 선입관을 가지고 있던 사람까지도 몇 번 만나고 나면 은근한 팬으로 만들어버리는 게 김윤환의 장기라던데 그 말이 틀리지 않은 모양이다. 날카로운 시각과 풍부한 정보 그리고 훈련된 균형감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기자들일텐데, 그들의 고백이 이러하다면 다른 사람은 더 말해 무엇할 것인가. 김윤환의 무엇이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것일까.

    이 기회에 필자의 사적인 얘기를 좀 토로해야겠다. 김윤환을 보는 시각과 관련된 내용일 수도 있으므로 너그러운 양해를 바란다. 오래 전부터 필자가 남성탐구에서 다루어보고 싶은 대중예술인이 한 명 있는데 아직 그러질 못하고 있다. 이유는 단순하다. 우연히 그 사람과 한두시간 가량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 그에 대한 글을 쓰려고 하면 그의 얼굴이 떠오른다. 긍정적 내용은 어쩐지 낯이 뜨거워서, 부정적 내용은 또 그가 마음에 걸려서 쓰지를 못한다. 남성탐구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필자는 일면식조차 없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철저하게 자료에 의존하는 인물평전인 셈인데, 한계 또한 명백하게 두드러지는 작업방법이다.

    예를 들어 김윤환에 대한 인물평전을 쓰기 위해 수많은 자료를 섭렵한 후 그에 대해 대단히 부정적인 인식을 갖게 되었는데, 보강 취재를 위해 그를 직접 만나보니 자료와는 달리 그 기자처럼 인간적 매력에 깊이 끌려 전혀 다른 평가를 내리게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김윤환에 대한 정확한 인식의 실체는 과연 어떤 것일까. 양자가 균형있게 조화될 수 있다면 최선이겠지만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인간적’이란 끈끈한 실체감이나 유대감은 너무 쉽게 ‘있는 그대로’의 실체적 진실을 압도해 버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필자는 동일한 인물에 대해 서로 다른 관점에서 접근한 자료들을 동시에 정독하는 것으로 나름대로의 한계를 극복하려고 노력한다. 김윤환에 대해서는 그런 노력이 더 많이 필요했다.

    지난 10년간의 중앙 일간지 기사 자료를 검색할 수 있는 사이트에 ‘김윤환’이란 검색어를 입력했더니 검색건수가 1만건으로 표기되었다. 아마도 용량의 한계치라는 표시일 것이다. 정치경력이 훨씬 더 오래된 3김씨도 그 정도의 분량은 아니었다. 신문사 편집국장 출신이라 기자들 사이에서 더 호의적으로, 더 자주 거론될 수도 있었겠지만 우리나라 정치인 중 언론계 출신이 어디 김윤환 혼자 뿐인가. 그건 그만큼 김윤환이 정치사의 주요 고비마다에서 빠지지 않고 일정한 정치적 역할과 영향력을 유지해 왔기 때문일 것이다.

    김윤환은 9대 국회의원 선거때 고향인 경북 선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다가 낙선한 경험을 시작으로 정계에 입문한다. 시작은 순탄치가 않았던 셈이다. 그러나 다음 선거를 위해 지역구를 갈고 닦던 그에게 고향선배인 박정희 전대통령이 유정회 국회의원 자리를 배려한 이후 그의 정치인생은 늘 순풍에 돛단 격이었다. 아마도 지난해의 공천탈락 충격이 그의 정치역정에서 가장 큰 시련이 아니었을까. 그의 정치이력은 화려하다.

    23년간 5선의 국회의원 경력에 정무장관 3회, 원내총무 2회, 집권당 사무총장 2회, 집권당 대표위원을 2번 지낸 후 지금 현재는 비록 미니정당이지만 민국당 대표로 재임 중이다. 정치를 직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절로 시샘이 날만한 경력일 것이다.

    자신을 향해 ‘양지만을 쫓아다니는 정치인’이라거나 ‘기회주의자’라고 비난하는 것에 대해서, 자신은 유신헌법을 만들지도 않았고 쿠데타를 하지도 않았으며 이당 저당을 옮겨 다닌 적도 없다고 항변한다.

    필자가 보기에 그의 정치경력 중 가장 특이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정무장관을 3회나 지냈다는 것이다. 정무장관이란 최고통치권자의 절대적 신임을 바탕으로 여야의 정치적 가교 역할을 하는 자리인데, 김윤환은 그런 직책을 전두환정권, 노태우정권, 김영삼정권에서 각각 1번씩 역임한 것이다. 그는 3번째의 정무장관을 맡으면서 어떻든 정치적으로 필요한 사람이 오래 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유명한 경구(警句)를 남겼다.

    그는 우리 정치사에서 가장 ‘타협과 절충’에 능한 정치인이란 평가를 받는다. ‘변신의 천재’라거나 ‘물렁뼈’ ‘소신없이 양지만을 쫓는 킹메이커’ ‘구시대 정치인의 전형’이란 비난도 있지만 그의 정치스타일은 여야를 가리지 않고 일정하게 평가를 받는다고 한다.

    김대중대통령은 야당 총재 시절 “허주같은 사람이 여당에 있기에 대화가 통한다”고 했으며, 김근태 최고위원도 사석에서 “암울했던 시기에 여권 내부에 김 선배(허주)같은 분이 있었기 때문에 그래도 정치가 조금씩이나마 발전할 수 있었던 것 같다”고 말할 정도다.

    그는 특유의 ‘굴신성(屈身性)’을 무기로 정치사의 주요 고비마다 자신의 욕망을 최대한 누르며 ‘대세를 쫓아’(그 자신은 ‘대세를 만들어 간다’고 표현한단다)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해왔다. 줏대도 없이 ‘되는 쪽‘을 따라가서 킹메이커를 자처하며 손을 들어준 후 정권을 넘어선 부귀영화를 누린다는 비판에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젓는다.

    자신은 되는 쪽을 뒤따라 간 것이 아니라 92년 김영삼 후보때와 이회창 후보때 모두 다수파의 반대속에 ‘되어야 하는 사람’을 어렵게 만들어낸 것이라고 말한다.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고려하면 그의 말이 전혀 틀린 것은 아니다. 흔히 대세몰이로 표현되는 정치세력간 제휴에 김윤환만큼 능란한 정치인이 또 어디 있겠는가. 이 부분에 절충과 타협의 명수, 변화와 적응의 달인이라는 김윤환의 비밀의 열쇠가 담겨져 있다.

    허주(虛舟), 빈배라는 아호가 함축하듯 그의 정치스타일에는 여백이 있다. 그는 누구나 부담없이 탈 수 있도록 늘 배를 비워 놓는다. 자타가 공인하는 킹메이커이지만 정권이 창출된 후에도 그는 경쟁자들의 표적이 되는 법이 없다. ‘무늬만 실세’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나서질 않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말처럼 개인적 축재를 하거나 권력을 남용하지 않는다지만 권력핵심으로서의 파워행사에는 에누리가 없긴 했다.

    지난 95년 신한국당 대표로 그가 임명되자 여권의 핵심브레인이었던 당시 이영희 여의도 연구소장은 ‘5,6공을 주도했던 인물이 당을 이끌 수는 없는 일’이라는 발언으로 파장을 일으켰다. 당 차원에서 이영희 소장에게 경고처분을 내리자 김윤환은 특유의 부드러운 표정으로 한마디 한다.

    “그런 언행을 하면 내가 대표자리에 어떻게 있겠나. 경고만 가지고 되겠느냐.”

    결국 이영희는 여의도 연구소장직에서 해임된다. 지난 96년 15대 공천과 관련된 발언도 김윤환의 파워를 잘 보여준다.

    “솔직히 공천을 전원 내 의사대로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내 의도에 어긋나는 공천은 없다.”



    ‘계영배(戒盈盃)의 철학’

    그러나 그는 무리하게 배를 가득 채우는 어리석은 짓은 절대로 하지 않는 사람이다. 92년 당시 민주계의 맏형이었던 최형우 의원은 한 모임에서 김윤환의 도움에 눈물을 흘리면서 ‘허주선생’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만큼 김영삼대통령 만들기에 일등공신이라 할만한 사람이 김윤환이었다. 하지만 문민정부가 들어선 이후 그의 정치적 위상은 조금 심하게 말하면 ‘찬밥’신세였다. 그는 ‘과거 기득권 세력으로서 역사의 검증을 받는 기간이 필요하다’며 스스로 몸을 낮췄다. 자리보다도 총재가 하는 일에 서로 의논할 수 있는 기회가 더 있었으면 좋겠다는 아쉬움 정도만 표현했다. 그러니 적이 있을 리 없다.

    최인호의 소설 ‘상도’에 보면 계영배(戒盈盃)라는 신비의 술잔이 나온다. 말 그대로 꽉 채우는 걸 경계하는 잔이다. 술잔의 7부까지만 술을 부으면 계속 술이 남아 있지만 술잔 가득 채우면 술이 한 방울도 남지 않고 빈 잔이 되어 버리는 신기(神器)다.

    김윤환은 ‘계영배의 철학’이 몸에 배인 사람이다. 자신의 빈배에 7부 이상 가득 채우는 법이 거의 없다. 이 원칙이 김윤환을 변화와 적응의 달인으로 만들어준 심리적 근간이 된다. 정치기술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봐도 거의 예술의 경지다. 정치란 ‘상대가 있는 게임’ ‘가능성의 예술’이라는 그의 정치철학도 그와 무관하지 않다.

    그는 정치가 제도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확신하는 사람이다. 그동안 여권핵심에 있을 때 그걸 위해 나름대로 기여했다는 자부심도 가지고 있단다. 그가 주장하는 정치적 화두는 두 가지다. 동서화합과 제도적 민주정치의 실현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동서화합이라는 대목에서 마음이 무거워진다. 이제는 전설처럼 되어버린 김윤환의 ‘우리가 남이가’라는 선동적 발언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일부 정치학자들은 그의 정치술의 요체를 ‘지역주의 패권론’이라고 평가한다. 실제로 선거때마다 지역주의 망령이 등장하곤 하는데 그 중심에는 어김없이 김윤환이 있었다.

    국민회의측은 그를 가리켜 “킹메이커로 위장한 희대의 지역감정 메이커”라며 격렬하게 비난했고 자민련은 “92년 대선 당시 ‘우리가 남이가’로 김영삼후보에게 TK몰표를 주더니 이번엔 이회창후보에게 붙어 PK에 ‘우리가 남이가’를 선동하고 있다”며 맹렬하게 규탄했다. 그런 그가 지난 97년 대선정국을 앞두고 뜻밖에도 ‘영남후보 배제론’의 운을 띄운다.

    “61년부터 97년까지 무려 36년간 영남에만 정권이 돌아갔는데 또다시 TK에, 정권이 돌아가 41년을 집권하게 된다면 국민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정치인의 한사람으로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이러한 주장을 제기한 것은 ‘나는 직접 나서지 않지만 누구도 나를 무시하면 후보가 될 수 없다’는 메시지를 던진 것이라는 게 당시 언론의 분석이다.

    “그는 말은 잘하지 못하고 어눌한데 그것을 역으로 잘 활용해요. 특히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발언은 허주가 단골이죠.”

    한 정치부 기자의 진단이다. 김윤환은 대선 등 정치일정의 주요 고비마다 정국방향을 돌리는 발언으로 언론의 주목을 받았는데, 그 발언의 대부분은 지역주의에 근거한 것들이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지난 97년 말 한 시사주간지의 분석을 인용해 보자.

    ‘TK배제론’은 자신의 위상을 강화할 시점이 되면 언제든지 ‘TK주도론’내지 ‘TK주체론’으로 모양새를 바꾼다. 대선후보 경선정국에서는 ‘TK배제론’으로 유력주자 편을 들고, 총선정국에서는 ‘TK주도론’으로 자신의 위상강화를 꾀하며 대선정국이 되면 ‘영남대동론’을 외치는 게 김윤환이라는 정치인이다.

    그런 지역감정의 족쇄는 지난번 4·13총선에서 김윤환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한나라당 공천을 받지 못하고 민국당으로 출마한 김윤환은 자신이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자신의 지역구에서 낙선한 것이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솔직히 말하지요. 내가 한나라당 공천을 못 받는다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그래서 내 선거구민들은 선거 막판까지 ‘김윤환이는 한나라당 아니가? 그런데 왜 1번이 아니고 4번 찍으라카노?’라고 했다는 것 아닙니까? 이런데 선거가 되겠습니까? 한나라당 공천에서 탈락한 민국당 후보들이 한나라당 후보로 나왔더라면 전부 당선되었을 겁니다. 나도 한나라당 후보로 나왔더라면, 장담하건대 전국 최고 득표율도 했을 겁니다.”

    이게 그가 주장하는 동서화합의 정치고 제도적 민주정치의 실현인가.

    지난해 김윤환은 한나라당의 2·18공천 파동을 겪으면서 정치입문 이후 최대의 시련기를 맞이했다. 아직도 이회창총재 얘기만 나오면 그답지 않게 몸을 부르르 떤다고 한다.

    “어떻게 지가 나에게 그럴 수 있나. 대권후보 만들어 주고 총재 만들어 준 게 누구냐. 이 허주가 도와주지 않았으면 어떻게 자기가 지금까지 올 수 있었겠나. 그런데 나를 팽시킨단 말이야?”

    그는 이제까지 권력을 잡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권좌를 만드는 정치, 다시 말하면 정치를 있게 하는 사람도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정치를 해왔다고 말한 정치인이다. 그런데 얼마나 충격이 컸는지 그러한 ‘권력관’에 회의가 오는 모양이다. 역시 권력은 자신이 가져야지, 남에게 권력을 만들어 주는 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2석의 민국당 몸값을 올리기 위해 이리저리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다. 오랜 세월을 대기업의 전문경영인으로 탁월한 경영능력을 보이다가 처음으로 자기 사업을 시작하는 사람처럼 강한 의욕을 보인다.

    그러나 필자는 ‘권력은 뭐니뭐니해도 자신이 가져야 한다’는 허주의 최근 결론에 대해서 불길하다는 느낌마저 갖게 된다. 권력의 속성이란 게 본래 그렇다 하더라도 어쩐지 허주와는 어울리지 않는 발언이라는 느낌 때문이다. 계영배에 7부를 넘어 술을 꽉 채우려는 불가능한 시도에 도전하는 뭇 인간들의 비장한 대열에 그도 마침내 끼어든 것인가. 과욕을 부리면 그는 더 이상 빈배가 아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기반에서 이루어지는 일은 어떤 경우에도 성공하기 어렵다는 것이 정신의학의 제1 법칙이다.

    변화와 적응의 달인 허주. 그는 지난 11월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정치권과 언론계 일각의 ‘김윤환의 시대는 끝났다’는 시각을 완강하게 부인했다. 더 이상 빈 곳이 느껴지지 않을만큼 결연한 의지와 전투적 태도가 감지된다. 김윤환 특유의 유연함이 복원될 수 없을 만큼 절박한 상황이 된 것일까. 정치라는 게 꼭 국가와 민족같은 거창한 구호를 앞세워야만 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 안에 사람 사는 여러 모습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어서 그 자체로도 드라마틱한 게임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정치인이 한명쯤 있는 것도 좋을 텐데, 아쉽다.



    인간문화재급 학자

    이번에는 김윤식에 대해서 살펴보자. 김윤식의 이력은 너무나 간단하다. 현재의 직업과 직함이 그 이력의 전부인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문학평론가이면서 현재 서울대 인문대 국문학과 교수다.

    특별히 문학에 관심이 많지 않은 사람이라면 그의 이름을 처음 들어본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가 하는 연구작업이나 개인적 성향이 대중적이지 않아서 더더욱 그렇다. 구수한 입담으로 대중매체를 이용해 문학을 알기 쉽게 설명해 주는 스타일도 아니며, 그의 연구라는 게 당장 우리의 실생활에 유용하게 쓰이는 분야도 아니니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러나 김윤식은 ‘인간문화재급 학자’인 동시에 작가 이문구의 표현처럼 ‘아파트 관리 사무소의 열쇠처럼 사람들이 앓고 있는 모든 문제에 답을 줄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다. 한마디로 이 사회에 흔치 않은 ‘어른’이다.

    그의 개인적 삶은 성실하고 치열하다. 하루에 적어도 10시간 이상 공부하고, 1년에 평균 3.7권씩 책을 내며, 30여년 동안 100권이 넘는 책을 쓴 학자다. 지난해 8월 그의 100권째 저서를 낸 문학사상사에 의하면 ‘한국문학 100여년 역사에 초유의 기록’이란다. 2000년 8월 현재 김윤식의 이름으로 출간된 책을 살펴보면 정확히 순수저술 101권, 편저 24권, 번역 5종, 감수 7종 등이다.

    지난 99년 서울대학교에서 1895년부터 1994년까지의 한국문학 관련자료 12만 항목을 데이터베이스로 구축했는데, 평론부문은 김윤식이 332편으로 가장 왕성한 필력을 과시한 것으로 나타났으며 평론집 출간도 63권으로 으뜸이었다.

    역설적이게도 양이 너무 많아 독자들이 그의 업적을 이해하기 힘들다는 지적이 있어 그의 제자들은 96년 김윤식 전집을 출간했다. 이때 그가 했다는 말이 재미있다. 평생 남의 힘을 빌려 책을 내기는 처음이라며 쑥스러워했다는 것이다.

    근·현대 문학연구의 본격적 데뷔작이면서 동시에 그의 박사학위 논문이기도 한 ‘한국 근대 문예 비평사 연구(72년)’는 3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학계와 문학계에서 나침반 역할을 하는 명저로 꼽힌다. 복사기도 없던 60년대 말 대학노트와 카드에 일일이 자료를 베껴가면서 완성했다는 이 책에 쏟은 연구열은 고단하고도 선구자적인 것이었다. 이 책 하나만으로도 ‘비평가 김윤식’의 이름값을 할 수 있을 정도라는데, 김윤식은 데뷔곡이 곧 유일한 히트곡이 되고 마는 반짝 가수가 아니라 아직까지도 왕성한 생산력으로 히트곡(?)을 쏟아내고 있다.

    시인 고은은 그의 시 ‘만인보’에서 김윤식을 이렇게 노래한다.

    “저 교양학부가/ 태릉에 있던 시절이래/ 그곳 전임이래/ 날이 날마다 읽고 썼다/ 밤마다 읽고 썼다/ 혼자서 영화보러 가는 일 말고는/ 읽었다/ 썼다/ 온통 그의 의식 속에는 박물관 지하실 명제들이 줄 서있다”

    그의 작업은 크게 두줄기다. 전공인 한국 근현대 문예비평사 연구와 소설 현장비평이다. 그의 책을 김윤식 자신은 크게 세가지로 분류한다. 비평사 연구같은 학술적인 것, 창작품에 대한 현장비평 즉 평론, 그리고 학술 예술 문학 방면의 기행 등이다. 김윤식은 넓고 깊고 고르다. 근현대 문학을 전공하는 문학도들은 한숨까지 내쉬며 이런 우스갯소리들을 한단다.

    “김윤식교수는 좋겠어. 당신이 쓴 책을 안 사도 되고 안 읽어도 되니까 말이야.”

    근현대 문학을 논하려면 그를 피해갈 방법이 없는데, 안 건드린 주제도 없고, 다룬 주제마다 자료의 넓이와 해석의 깊이, 높이가 너무나 엄청나기 때문이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그 심정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이 대목에서 김윤식에 관련된 글을 쓰게 된 필자의 입장에서 부끄럽고 솔직한 고백 두 가지를 해야겠다. 필자는 김윤식에 관련된 자료들을 섭렵하면서 얼핏 국보급 투수라고까지 불리던 전성기 시절의 선동렬 투수를 떠올렸다. 당시 그와 한팀이었던 동료 타자가 한 말이 생각나서였다. 자신이 선동렬과 한 팀이어서 그의 공을 맞상대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너무나 다행스럽다는 것이다. 그 자신도 걸출한 타자라고 평가받고 있었지만 당시 선동렬의 구위가 너무나 좋아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고백이다.

    필자도 김윤식과 관련된 자료를 보면서 국문학을 전공하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스러웠는지 모른다. 그를 극복하기 위해서 치뤄야 할 시간적 노력과 학문적 고단함을 끔찍할 정도로 실감했기 때문이다.

    두번째 고백은 필자의 첫번째 고백과 맞닿아 있다. 특정 인물의 평전을 쓸 때 적어도 그가 쓴 책이나 논문, 관련 자료 등은 다 섭렵해야 한다는 게 필자 나름의 원칙이다. 지금까지는 그런 대로 소박하게나마 그 원칙에 충실한 편이었는데, 이번에는 부끄럽게도 그러지를 못했다. 그의 저작물을 다 구할 수도 없었거니와 필자의 소양 부족으로 그의 글을 100% 이해하지도 못했고 더구나 죄송스럽게도 그의 글쓰기 스타일이 필자의 개인적 취향과 많이 어긋나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의 글은 지나칠 정도로 단문(短文)이며 ‘일’ ‘것’ 따위의 명사형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고 또 결정적인 것은 산문집에서조차 ‘자기를 드러내는’ 글쓰기를 극도로 절제하는 스타일이라서 그의 내면세계에 흥미가 있는 필자 같은 사람은 인내가 필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글을 읽는 시간 내내 필자는 즐겁고 또 든든한 느낌이 들었다. 김윤식 같은 노학자에겐 좀 죄송스런 비유를 한가지 들어야겠다. 공부에 한이 맺힌 일자무식의 부모가 있다. 아들이 대학생이 되었다. 가끔 아들의 책상에서 내용을 알 수는 없지만 묵직한 책들이 펼쳐져 있는걸 보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는 그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 오르고, 사는 보람같은 걸 느끼게 된다. 그런 심정이었다면 무례한 비유가 어느 정도 양해가 될까. 유쾌한 존경심(?) 정도로 표현해도 별 무리는 없을 듯하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이런 허술한 ‘김윤식 평전’이 그에 대한 결례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우리나라 평전문학의 ‘태두’이자 최고봉이라고 일컬어지는 사람이 바로 김윤식이기 때문이다. 그의 평전문학은 독특한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발바닥으로 글쓰는 사람이란 말을 들을 만큼 실증적 접근을 중시하는데, 그는 한 작가의 연구를 위해 족보에서 학적부, 성적표까지 확인한다.



    ‘발바닥 쓰기’의 치밀함

    그는 염상섭, 채만식, 김동인 등 근현대 소설가에 대한 평전을 많이 썼는데 그 백미는 아무래도 전 3부작으로 구성된 ‘이광수와 그의 시대’라는 이광수평전일 것이다.

    그가 춘원에 관한 글을 쓰고자 마음먹은 것은 69년부터 1년간 하버드 장학금으로 도쿄대에 유학하면서부터다. 근대문학을 이룩한 문인들 대부분이 도쿄 유학생 출신이라는데 착안하여 그들의 ‘현해탄 콤플렉스’를 캐보기 위해서 떠난 유학길이었다. 이때의 구상을 시작으로 10여년간의 자료조사와 기초연구를 마친 후 80년 10월부터 두달간 오로지 춘원에 관한 미발굴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다시 일본으로 건너간다. 와세다대 서고에서 하루 종일 자료를 조사 발굴하고 점검하는 과정에서 그는 세검정을 무대로 쓰여진 춘원의 소설 한편을 발견한다.

    귀국 후 그는 춘원 소설의 무대가 되었던 세검정을 세밀히 답사하기 시작한다. 그때부터의 세검정 승가사와 문수봉 산행이 지금까지 일요일마다 이어지고 있단다. 그는 이 평전의 입체적 연구를 위해 ‘춘원연구’를 쓴 바 있는 김동인을 동시에 연구하기도 한다. 이광수 평전을 쓸 당시 김윤식은 하루에 20매씩 원고를 썼는데 하루 70장을 써도 사흘을 앓았고, 하루 3장밖에 쓰지 못하면 춘원이 살던 세검정을 다녀온 후 또 사흘을 앓았다고 한다. ‘이광수와 관련된 일이라면 누구에게라도 무릎 끓고 배울 마음가짐이 되어 있다’고 말할 정도였으니 그의 집념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김윤식은 그렇게 또박또박 정자체인 사람이다. ‘이광수와 그의 시대’는 86년에야 3부작이 완간된다. 한 평론가는 그 책을 이렇게 평가한다.

    “우리는 한 사람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살았던 시대와 장소에 대한 대단히 구체적이며 감각적인 이해와 공감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닫게 된다. 이른바 ‘발바닥 쓰기’로 일컬어지는 철저한 실증적 태도와 치밀하기 이를 데 없는 심리학적 연구의 행복한 만남이 바로 김윤식 평전문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광수와 그의 시대’는 춘원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바이블이다. 김윤식은 그 많은 저작물들을 이런 식으로 집필한다. ‘넒고 깊고 고르다’는 평가는 그래서 나온다. 이런 식의 접근방법은 ‘작가’라는 직업에 대한 김윤식의 깊은 애정과 독특한 태도와 깊은 관련이 있다.

    김윤식은 어렸을 때 원래 작가가 되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서울대 국문과를 선택한 것도 작가가 되려면 국문과에 가야 되는 줄 알고 그랬단다.

    “그러나 대학은 학문, 과학하는 곳이었다. 잘못 온 거다. 작가가 된다는 생각을 때려 치우고 연구의 길로 나섰다. 창작은 못하고 중간적인 비평을 하게 됐고, 창작에 가까이 다가가는 마음으로 많은 기행문을 썼다. 나름대로 유려한 문장을 실컷 쓰고자 했다.”

    마산에서 작가의 꿈을 안고 서울로 올라왔던 한 순박한 청년의 귀여운(?) 고백이다. 그는 작가란 미련한 인간과 전지전능한 신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존재라고 규정한다.

    “작가들이 어떤 작품을 쓸 때는 어떤 의도가 있는데 신기한 것은 완성된 작품은 작가가 처음 의도한 그런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작가도 모르는 것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작가는 보통사람들이지만 그들의 작품은 보통이 아닌 것입니다. 가치가 있고 나아가 인류의 유산이 됩니다. 작품 속에 내가 필요로 하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작가는 내 스승인 것입니다.”

    인간이 인간다운 위엄과 기품을 지키며 살 수 있도록 하는 게 문학인데 작가란 그러한 문학을 창조하는 사람들이니 존중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그의 독특한 ‘작가관’은 김윤식 특유의 ‘감싸안기 비평론’으로 이어진다. 그는 비평을 ‘남을 칭찬하기 위한 교묘한 술책’이라고 정의하며, 비평가란 작가에게 부채를 진 사람이라고 말하는 비평가다. 자신의 말에 이의를 다는 사람도 많겠지만 자신의 생각은 땅처럼 굳건하다고 말한다. 비평은 인생의 스승인 작가를 극진히 보살피는 제자의 수발과 다름없다는 것이다.

    김윤식 비평의 출발은 그의 성향 그대로 정열적이고 성실한 작품읽기에 있다. 작품을 정밀하게 읽지 않고서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비평적 신조다. 그는 어떤 작품을 평하려면 적어도 3번은 읽는다. 초벌 읽고, 다시 깊이 읽은 뒤 평을 쓸 때 또 읽는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소설을 가장 많이 읽는 사람으로 통하는데, 요즘도 16개 문예 계간지와 2개 문예 월간지에 수록된 작품들을 단 한편도 빼놓지 않고 읽고 있다. 문예지에 수록된 작품들을 통해 신인이 탄생하고 작가의 작품세계가 여러 모습으로 변해가는 것을 보는 것이 너무나 즐겁다고 한다. 물론 읽은 결과는 꾸준히 월평형식으로 발표한다. 김윤식 같은 대가가 아직도 월평 나부랭이나 쓰고 있느냐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도 있지만 그는 조금도 개의치 않는다.

    “나는 월평이 진짜라고 생각한다. 소설가들이 아무리 열심히 쓰더라도 누군가 읽어야 한다. 읽고 그 표시를 해서 그들을 칭찬하고 고무하고, 작품에 책임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한국소설의 뒤켠에서 태산같은 버팀목이 돼주는 거인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되새겨 보며 소설을 읽다보면 소설읽기의 또다른 재미가 있을 것이다.

    김윤식은 시냇물처럼 빠르지 않지만 천천히 흘러가는 강물같은 사람이다. 그는 평론가로서, 죽은 작품이 아닌 살아 있는 작품을 읽는데 주력한다. 동시대에 그와 함께 살아 숨쉬는 사람들의 작품을 읽고 평가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천천히 끊임없이 흐른다.

    10년 이상 살고 있는 그의 집은 한강이 바로 내려다보이는 강변 아파트다. 유유하게 흐르는 강물이 한눈에 들어오는 서재에서 그는 하루를 보낸다. 강의하러 1주일에 두 번 학교에 가는 것 외에는 이곳에서 새벽 3시반부터 밤 10시까지 거의 모든 시간을 독서와 집필에 몰두한다.

    그 많은 학문적 업적과 강단생활에도 불구하고 ‘김윤식사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어느 학파에도 끼지 않고 오직 단독자로서만 활동하는 특이한 사람인데 무슨 소신 때문이 아니라 자기 일만 아는, 자기 일에만 몰두하는 ‘고약한 유형’이기 때문이라고 자신을 진단한다. 그는 밤낮 ‘곰처럼 헤매고, 강아지 모양 보채고, 사자 모양 낮잠을 자면서’ 글쓰기 방식의 규칙을 찾아내기 위해 하루하루 평생을 건 싸움을 하고 있다.

    “나는 명민하지도 천재성을 타고 나지도 않았다. 남들이 한 시간 일할 때 나는 두세 시간 씨름했다. 나는 발바닥으로 살았다.”

    지난 회갑 때 그가 한 말이다. 확실히 그의 성실성은 거의 초인적이다. ‘자료 더미 속의 삶이 진실이고 일상생활이 환각으로 보이는 세월’ ‘작품 속의 삶이 진짜이고, 일상적 삶이 가짜로 보이는 참담한 질병’을 앓고 있다고 까지 고백한다.

    “나같이 사는 게 뭐 그렇게 바람직한 게 아니예요. 사람이 살다보면 사람 사귀는데도 힘을 들이고, 공부에도 힘을 들이고 해야 하는데 외곬으로 살았으니까. 내 보기엔 사람이 일생 동안 한 열권 정도 책을 쓰고 열명 정도의 사람에게 투자하면 좋은 거 같아. 다시 살라면 나는 이렇게 살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한 가지 일에 몰두하는 사람에 대한 그의 애정이나 관심은 초지일관이다. 그는 자신의 일요 산행 동료인 한 지인에 대해 이렇게 평가한다.

    “그는 사무실만 아는 사람이다. 일만 아는 사람이다. 그것만이 소중하고 나머지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것만, 한가지만 일관하는 일이 모든 일에 일관하는 것이다. 달인인 까닭이다.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하고 있는 김윤식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는 잠깐 잊고 있는 모양이다. 그에게는 아주 단순한 삶의 원칙이 있다. 누구나 자기가 아는 아주 좁고 사소한 범위에서 출발하고 또 끝내기가 그것이란다. 자신은 다만 자신이 공부한 범위에서 자신이 말할 수 있는 것만을 말한다는 것이다.

    그는 지나칠 만큼 겸손하고 과묵한 사람이다. 자신의 업적에 만족하여 안주하는 법이 없다. 지금도 그는 문학에 대한 자신의 열정이 식어간다는 느낌이 들면 지체없이 앙드레 지드의 ‘지상의 양식’을 꺼낸다고 한다. 군복입고 대학을 다니던 궁핍한 시절에 그의 ‘젊음의 순수욕망’에 불을 댕긴 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책을 읽고 나면 다시 20대의 문학청년이자 신입생의 자리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이 사람의 나이가 지금 60대 중반이라는 게 믿어지는가.



    자신의 실수를 겸허히 인정

    지난해 10월 이명원이라는 젊은 학인은 자신의 석사과정 논문에서 김윤식에 대한 표절 의혹을 제기한다. 김윤식의 ‘한국 근대 소설사 연구’가 일본 비평가 가리타니 고진의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이라는 저서의 압도적인 영향력 아래 쓰여진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에 대해 김윤식은 즉각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는 입장을 밝힌다.

    “지적한대로 가리타니 글 가운데 일부가 옮겨졌다. 이는 내 실수다. 이명원이 나를 비판한 것을 높이 평가한다. 앞 세대에 대한 비판을 통해 학문적 발전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명원이 자신의 논문을 책으로 발표하는 과정에서 김윤식의 제자이기도 한 이명원의 스승이 ‘어떻게 자식이 아버지를 죽이려 드느냐’며 이명원을 제도적으로 매장시키겠다고 협박했다는 사실과 너무나 대조적인 태도다.

    김윤식은 ‘고도의 정보입력장치’라고 불린다. 한편 나나무스쿠리의 음악을 좋아하고 영화감상과 여행하기를 즐기며 그림에 대한 안목이 남다르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필자가 알고 있는 잡지사의 한 기자는 김윤식교수의 강의를 들으며 학창시절을 보낸 사람인데, 언젠가 사석에서 필자에게 김윤식의 사생활에 대해서 얘기를 한 적이 있다. 김윤식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꽁생원같은 학자가 아니라 낭만적이고 로맨스도 많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 말을 기억하고 있던 필자는 눈에 불을 켜고 그 기자의 말을 증명할 만한 자료들을 찾아내려고 애를 써봤지만 ‘자기를 드러내는 글’을 극도로 절제하는 김윤식의 글쓰기 스타일과 필자의 역량 부족으로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그래서 필자에게 김윤식은 성실하고 치열하며 진지한 대학자로서의 인식이 더 강렬하다.

    이런 식이다. 지난 85년 김윤식은 평일 오후 2시30분에 ‘람보2’를 보았다. 그런데 극장 안이 대학생들로 가득했단다. 대학생들은 낮에 공부를 해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이상하고 어지럽기 짝이 없는 생각에’ 머리가 어지러웠다고 말하는 사람이 김윤식이다.

    필자는 이 글에서 거인(巨人) 김윤식의 행적을 쫓기에 급급했던 느낌이다. 그의 인간적 면모를 입체적으로 보여줄 수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필자가 기억하는 김윤식의 가장 흐트러진 모습을 하나만 얘기하자. 그가 상록수의 고장 당진을 답사 여행할 때의 일이다. 작가 김주영, 시인 이근배 등과 일행이 되어 서울로 돌아오다가 삽교천 방죽에서 잠시 쉬게 되었다. 이때의 풍경을 그의 글로 표현해 보자.

    “하늘은 이미 흐려 비가 뿌렸고, 하늘과 바다의 구별이 사라졌던 시점. 우리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오줌(?)을 누었는데(다르게 표현할 말이 없지 않은가) 아무도 우리를 구경하는 자 없었다.”

    노학자의 너무도 귀여운(다르게 표현할 말이 없지 않은가) 표현과 행동이 아닌가. 숨가쁠 정도로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태산같이 버티고 서서 중심을 잡아 주는 김윤식같은 거인이 동시대에 있다는 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그는 자신이 한국문학이나 문학사를 위해서 소설을 읽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모든 작가들은 내 스승입니다. 작가가 잘나서가 아니고 작가가 작품을 쓸 때는 항상 자신의 의도를 초월하기 때문입니다. 역사에 묻혀 있는 작품이나 현재 창작돼 나오는 무수한 작품들에서 좋은 작품을 보면 신바람이 나요. 그리고 그것을 알리기 위한 견딜 수 없는 용솟음이 나를 글쓰기로 내몹니다. 훌륭한 작품을 다시 창작자의 마음으로 돌아가 내밀하게 읽어 내는 것이 제몫 아니겠습니까? 나는 그렇게 생산된 텍스트들을 보면서 세상과 인간을 배웁니다.”

    갑자기 어느 소설에서 읽은 한 장면이 생각난다. 스님이 된 아들을 만났다가 헤어지는 속가(俗家)의 어머니가 있다. 다시 바랑을 메고 깨달음의 험한 길을 떠나는 아들의 등뒤에서 어머니는 합장을 하며 “스님, 성불(成佛)하세요”하고 기원한다. 종교적 색채를 거둬내고 생각해 본다면 ‘완전한 하나의 우주가 되라’는 간절한 소망일 터다. 이제 ‘묵언정진’의 자세로 삶을 살아가는 김윤식에 대한 글을 마무리하면서, 대가(大家)에 어울리지 않는 미진한 김윤식 평전에 대한 아쉬움을 경건하게 옷깃을 여민 필자의 기원으로 가름하련다.

    “선생님, 성불하십시오.”

    히브리 사람들 사이에서 전해 오는 이야기 한 토막. 한 나라에서 추수를 했는데 왠지 모르게 그 곡식을 먹기만 하면 사람들이 미쳐 버린다. 임금이 만조 백관을 모아서 대책을 의논했다.

    “올 농사가 무슨 탈이 났는지 모르겠지만 곡식을 먹는 자마다 미쳐가니 이 일을 어찌할꼬? 그렇다고 해서 달리 먹을 것도 없으니 이 난감한 일을 어찌하면 좋겠는가?”



    변화의 시대를 살아가기

    오랜 숙의 끝에 그들은 결정을 내린다. 곡식을 먹으면 미치고 먹지 않으면 죽는다. 미치지 않고 죽는 것보다는 미쳐서라도 사는 게 낫지 않겠느냐, 그러니 모든 백성으로 하여금 곡식을 먹고 미친 상태로나마 살아남게 하자. 그러나 한 대신을 뽑아 “우리는 지금 미쳐 있는 상태다” 하고 끊임없이 백성들에게 일러주는 책임을 맡도록 하자. 우리 모두가 지금 미쳐 있는 상태라는 걸 스스로 알고 있으면 언젠가 다시 제 정신으로 돌아올 날이 있지 않겠느냐고. 그래서 한 대신은 계속해서 우리는 지금 미쳐 있다고 말하고 다녔다.

    변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세상이라고 한다. 그러나 자칫 그것 때문에 삶의 목적이 훼손되고 왜곡될 위험은 없는 것인가. 변화라는 게 절대진리인가. 도도한 변화의 물결 속에 몸을 맡기되 적어도 ‘미쳤다’라고 외칠 수 있는 자기 내면의 한 부분은 남겨 놓아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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