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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시인 高銀

“다시는 내입으로 미당을 말하지 않겠다”

  • 황호택 < 동아일보 논설위원 > hthwang@donga.com

“다시는 내입으로 미당을 말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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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는 어떤 인상을 받으셨습니까? 나쁜 평을 하면 초청이 취소될 테니 조심스럽겠습니다만….

“남한에서 김정일 위원장은 일단 낯선 존재죠. 분단의 이쪽에 있는 우리에게 좋은 의미를 부여하는 대상은 아니었잖습니까? 그 동안 적대관계에 있었으니까. 김정일 위원장에 대한 인상도 그런 점이 작용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북한에 가서는 단순히 낯선 것을 넘어 있는 그대로 인간의 얼굴을 봤습니다.

그분은 뭔가 면밀히 구상을 해 새겨서 이론적으로 따져 들어가는 어법이 아닙니다. 속에 있는 말이 바로 나오는 직설적인 화법을 가졌습니다. 직선적인 인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매우 예술적인 취향도 지녔습니다. 시를 좋아하고 특히 영화 예술에 전문가적인 식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정치인을 만났다는 느낌보다는 어떤 예술가를 만난 느낌을 받았습니다. 개인적인 인상이 그렇습니다. 하지만 내가 받은 인상으로 모든 걸 읽었다고 할 수는 없죠.”

―북한 문인들도 만나봤을 것 아닙니까. 북한의 문학과 문인들에 대해 말해주시죠.

“남북 문학의 교류를 통해 공통성 내지 동질성을 만들어가야 하고, 이질성은 이질성대로 그 시대의 소산인 만큼 인정함으로써 문학사에 기본 텍스트로 놔둬야 합니다. 북한의 문학은 남한 문학과 분명한 차이가 있죠. 남쪽의 문학은 개인에게서 나옵니다. 북한은 국가적 혹은 주체적인 규범을 통해 나온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문학 발생 근거가 우리하고 전혀 다릅니다.



북한 작가에게는 북한의 현실이 요구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는 마음대로 문학을 하잖습니까. 개인이나 세상을 노래할 수도 있고, 다른 세계를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자유입니다. 북한은 규범화되어 있습니다. 좋은 의미든 그렇지 않은 의미든 타율을 통한 자율을 지향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평안북도에 시를 쓸 만한 소재가 있다고 하면 자기 의지로 혼자 가는 것이 아니라 여럿이 토의해 그걸 노래하는 것이 어떻게 기여를 할 것인지를 판단한 다음에 행동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아주 많이 다르죠. 이렇게 다른 것 자체가 한국문학사에서 특별한 시대의 문학으로 서술될 것이라고 봅니다.”

―북한의 문화재는 전쟁통에 크게 파손됐다고 들었습니다. 두 차례나 문화재 탐방여행을 다녀오지 않았습니까. 북한에 다녀온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고구려 역사의 정통성을 많이 강조한다고 들었습니다.

“한국의 문화재는 대개 있을 자리에 있잖습니까. 문화재는 그 자리에서 보존해야 할 것이 있는데 전혀 다른 데 옮겨놓은 것들도 있더군요. 우리도 전쟁 때 문화재가 많이 없어졌습니다만 북한은 특히 미 공군의 융단폭격을 받았습니다. 우리하고 비교가 안 되죠.

평양만 해도 대동문과 일제시대 은행 건물 등 몇 군데밖에 안 남고 전부 잿더미가 됐습니다. 전후에 노동집약적으로 기계도 없이 부다페스트를 본으로 하고 민족 형식을 가미해 옛날 일제시대의 평양과 전혀 다른 도시를 만들어놓았습니다. 추억을 가진 사람들은 섭섭하겠지만 지금 평양은 도시계획으로 인해 아주 아름다워졌습니다. 나는 서울보다 낫다고 생각합니다. 서울은 조선시대부터 조금씩 변모해 이렇게 됐기 때문에 강남말고는 옛날의 기본 도시구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셈이지요. 평양은 완전히 폐허가 됐으니까 새로 만들 수 있었겠죠.

백두산 묘향산 구월산 금강산 칠보산 낭림산, 이렇게 유명한 산은 잘 보존돼 있습니다. 그 밖의 야산에는 나무가 없어요. 땔감이 모자라니 나무를 베고 경지면적을 넓히느라 다락밭을 개간했습니다. 비라도 한번 크게 오면 토사가 깎여 내려갑니다.

공군 장교한테 들었는데 1960년대는 휴전선 이남이 벌거숭이고 이북은 녹음이었대요. 그런데 1970, 1980년대 와서는 거꾸로 저쪽이 벌거숭이고 이쪽이 퍼렇대요. 남북이 바뀐 거죠. 농경지 주위에 있는 산악들은 민둥산이에요. 다락밭 시책은 일단 실패했으니 다시 그것을 산으로 되돌려줘 자연환경을 가꿀 필요가 절실합니다.”

―북한이 고구려 역사를 강조하는 것은 어느 정도입니까.

“고구려를 강조하는 건 남한에도 필요합니다. 북한이 고구려를 강조하는 것은 고구려 고토이기 때문이지요. 식민지 시대에 단재(丹齋) 신채호는 우리 민족사가 고구려를 상실해 이렇게 처참하게 실패한 역사를 되풀이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나도 이런 단재 사관에 대해 1970년대 이래 지지해오고 있습니다.

고구려가 멸망하고 나서 발해가 건국되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삼국통일시대라고 하지만 엄밀하게 이야기하면 고구려가 있던 자리에 발해가 들어섰습니다. 역사에서는 고대 후기 남북조시대라고 합니다. 분명히 발해도 우리 역사이고 통일신라도 우리 역사죠. 두 나라가 있었으니까 삼국 시대를 두 개로 정리해 2국 시대, 말하자면 오늘의 분단시대가 고전적으로 형성됐다고 할 수 있죠.

북한은 고구려와 발해를 북방 영토의 정신적인 근거지, 혹은 정통성의 공간으로 설정한 것이겠죠. 평양을 수도로 한 북한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 1980년대 후기에 단군릉을 발굴합니다. 역사학자들은 단군릉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쪽도 있고, 무시하는 쪽도 있습니다만 해답이 완전히 나온 것은 아닙니다. 단군릉을 장대하게 조성해놨습니다. 멕시코 아즈텍 문명의 자취를 떠올렸습니다. 고조선의 수도가 나중에 평양이었고 고구려도 압록강 북쪽에 있다가 평양으로 내려오잖습니까. 역대 국가의 고도로서의 위상이 오늘날 북한 수도의 정통성의 배경이 돼주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고시인을 이해하고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 인터뷰 협의과정의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겠다. 고시인은 인터뷰에 응하면서 “말은 글에 비해 정합성(整合性)과 완결성이 떨어진다”며 질문을 보내오면 답을 직접 쓰겠다고 제의했다. 만나서는 사진이나 찍자는 것이었다. 대통령 인터뷰가 가끔 이런 식으로 진행된다.

고시인이 권위를 챙겨서가 아니라 당대의 문장가로서 남의 문장을 통해 표현되는 자신의 말이 못 미더웠을 것이다. 인터뷰는 그의 장기인 문학장르와는 다른 언론의 장르이며 서면 인터뷰는 현장감 생동감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인터뷰 기사는 인터뷰이(interviewee)의 글이 아니라 인터뷰어(interviewer)의 작품이라는 논리로 고시인을 설득했다.

▶ “다연방제로 통일하자”

자정 무렵 인터뷰를 마치고 고속도로를 달리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고시인이었다. 자신의 통일방안 구상에 관한 이야기가 빠졌다는 것이다. 다음날 통일방안 구상을 팩스로 보내왔다.

“내 통일관은 다연방제입니다. 2연방제가 아니라 한반도 각 지역 또는 도 단위를 공화국 정부로 발전시켜 그 공화국의 수상으로 당선된 사람들이 국가위원회를 구성해 윤번제로 국가원수를 추대합니다. 그러면 지역감정이 소멸되고 지역경제의 특화로 진정한 자치자립 정부가 출현할 수 있습니다. 중앙정부는 군사 외교 등만 담당하고 무역도 각 지역 공화국이 임의로 추진합니다. 국내외 문화교류도 활발하게 될 것입니다. 말레이시아 연방, 스위스 연방에서 배울 바가 있고 미합중국 연방체제에서도 좋은 경험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은 통일국가는 늘 내부의 사회갈등을 지속시킬 것입니다.”

고시인이 생각하는 통일 방안이 독특하다. 서울공화국 평양공화국, 함경도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 공화국, 이런 식으로 나누어 러시아 연방 또는 미합중국 스타일로 통일하자는 발상이다.

북한 이야기를 여기서 멈추고 세인의 관심이 쏠리는 쪽으로 화제를 바꾸어 보면 어떨까 해서 조심스럽게 친일 논쟁을 끄집어냈다.

―프랑스는 비시 정부(1940∼1944)에서 부정축재로 백만장자가 된 사람에게는 5년 정도의 감옥살이를 시키고 200자 원고지 6장 정도의 친독(親獨)행위를 한 사람은 사형에 처했다지요. 고시인의 글에서 읽었습니다.

미당담론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 질문을 꺼내자마자 고시인은 말 허리를 자르고 “그 얘기는 왜 합니까? 그것은 우리가 오늘 하지 않기로 한 얘기와 연결되는 것 아닙니까?”라며 얼굴을 찌푸렸다.

조금 당황스러워서 “쓰지 말라면 안 씁니다”라고 하자 목소리가 다소 풀리며 “인터뷰용이 아니고 둘이 사담 나눈 것으로 하면 좋습니다”고 말했다.

―하여튼 저는 ‘쓰지 말라’는 내용은 안 쓰기로 한 약속을 지킵니다. 비시 정권 치하에서 부역한 문인이나 언론인에 대한 처벌이 가혹했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비시 정권은 단명한 정권이었지만 한국은 일제 점령 기간이 너무 길어 신중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지 않습니까. 이런 주장에 대해 현실적으로 이해가 되는 점은 없으십니까?

“프랑스에는 드레퓌스 사건이 있었습니다. 제가 1998년 프랑스 정부의 초청을 받아 갔을 때 마침 그해 프랑스 최고 법원에서 100년 전 사건의 재심을 해 피고인 드레퓌스에게 무죄를 선고합니다. 이건 실정법이 전혀 아니에요. 실정법이 자연법으로 된 것으로 역사 실정법은 현실의 실정법과 다른 것임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거짓이 밝혀지는 데 100년이 걸린 것이죠. 우리 50년은 이에 비해 짧습니다. 그렇게 얘기할 수 있죠. 우리 36년은 길었고 프랑스 페탱 원수가 집권한 비시 정부는 짧았다는 형식논리로 따질 일이 아닙니다. 프랑스에서는 독일이 100년을 통치했더라도 그대로 두지 않고 역사를 청산하는 작업을 진행했을 겁니다. 루소와 볼테르의 계몽철학이 그렇게 사회발전에 힘이 된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문민정부 때 갑오농민전쟁 100주년 기념식을 처음으로 열었습니다. 정부의 장관이 갑오농민운동의 기념사를 하는 데 100년 걸렸습니다. 그러기 전까지는 가령 농민운동을 연구한 역사교수들도 동학농민운동이라고 못 하고 ‘동학란 연구’라고 했습니다. 1980년대에 민중운동이 사회적으로 확대되면서 비로소 힘을 얻어 갑오농민전쟁이라는 역사용어를 만들었습니다. 재야 사학에서 떠돌아다니던 것이 문민정부 들어와 100주년 되어서야 합법이 된 것입니다. 한국 근대사에서도 민족운동이 역사에서 좀더 적극적으로 역량을 발휘했다면 오늘날과 같이 사회가 분열되고 역사가 정체되는 일은 피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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