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0월호

“‘생활글’ 쓰게 해야 아이들이 산다”

우리말글 바로 쓰기 외길 걸어온 이오덕 선생

  • 김진수 jockey@donga.com

    입력2002-10-06 07: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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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활글’ 쓰게 해야 아이들이 산다”
    이오덕(77) 선생은 지난 7월30일 두 권의 평론서를 나란히 냄으로써, ‘우리말 살리기’ 운동가답게 또 한번 당대의 어린이문학계에 따가운 일침을 가했다. 그중 하나인 ‘문학의 길 교육의 길’(소년한길)은 이오덕 선생의 견해를 비판한 문학평론가 김이구씨의 논문 ‘아동문학을 보는 시각’에 대한 반론을 비롯, ‘돈벌이 장사판’을 벌이는 출판사들에 경도(傾倒)돼 작품을 제대로 평가하지 않는 어린이문학 평단에 대한 비판이다. 평론가들이 곧잘 ‘잘 팔리는 책’들을 중심으로 이론을 전개하고 있는 현실에 철퇴를 가한 것이다.

    또 구체적인 작품평론인 ‘어린이책 이야기’(소년한길)에서는 베스트셀러 동화 ‘괭이부리말 아이들’과 ‘마당을 나온 암탉’ 등에 대한 꼼꼼한 분석과 함께, 평단에서 좋은 동화로 평가한 몇몇 작품들을 ‘사실성이 없고 어지럽게 읽히는 글’ 혹은 ‘허황하고 괴상한 이야기들’로 가득찬 ‘너절한 상품’이라고 강도 높게 질타하고 있다.

    좀처럼 그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일지라도 20여 년 전 출간돼 한국 아동문학의 고전으로 뿌리내린, 1950∼70년대 시골 어린이들의 시를 모은 아동시집 ‘일하는 아이들’이나 ‘개구리 울던 마을’ 등을 떠올리면 그 책들을 엮어낸 ‘이오덕’이란 이름 석자를 곧 되새길 수 있을 터다.

    이오덕 선생은 1965년 4월 출간한 글쓰기 교육 이론서 ‘글짓기 교육의 이론과 실제’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동화, 아동시집, 수필, 어린이문학 평론 등 50여 종의 관련저서를 통해 우리말글 바로 쓰기를 한결같이 역설해왔다. ‘아동시론’(1973), ‘삶을 가꾸는 글쓰기 교육’(1984), ‘삶 문학 교육’(1987), ‘참교육으로 가는 길’(1990), ‘우리 문장 쓰기’(1992), ‘글쓰기 어떻게 가르칠까’(1993), ‘무엇을 어떻게 쓸까’(1996), ‘우리글 바로 쓰기 1, 2, 3’(1997) 등 익히 알려진 이론서들도 많다. 모두 우리말글에 대한 순수한 사랑만이 우리 아이들과 우리 겨레를 살릴 수 있다는 신념의 결과물이다.

    선생은 또 1983년 ‘한국글쓰기연구회’를 창립해 바른 글쓰기 운동을 펼쳤고, 1989년엔 ‘한국어린이문학협의회’를 결성해 아동문학이 나아갈 길을 찾는 한편 참된 작가정신을 가진 신인작가 및 작품의 발굴에 힘써왔다. 1998년 5월엔 ‘우리말 살리는 겨레모임’을 만들어 공동대표를 맡기도 했다. 특히 그가 1989년 출간한 ‘우리말 바로 쓰기’는 1990년대초 외국말법에 오염된 우리의 글과 문장을 지적하고 이를 바로잡는 전범(典範)이 됨으로써 자기도 모르게 오염된 말에 젖어 살아온 많은 이들에게 얼굴이 홧홧 달아오르는 부끄러움과 충격을 동시에 안겨준 바 있다.



    그러나 지병으로 4년 전부터 요양해온 이오덕 선생은 한동안 펜을 놓고 있었다. 다행히 1년 전부터 건강이 호전돼 집필활동을 재개, 평생의 화두인 우리말글 사랑을 전파하는 데 진력하고 있다. 그의 서재는 충주시 신니면 광월리에 오롯이 자리한 50여 평짜리 단층 시골집. 침실 하나와 거기에 딸린 욕실을 제외하곤 온통 책들로 빽빽한 ‘서해(書海)’와도 같은 그곳에서 9월3일 선생을 만났다. 성성한 백발과 뿔테안경 너머 강단 있는 그의 눈빛에선 올곧음이 묻어났다. 먼저 우문(愚問)부터 던졌다.

    글쓰기는 바른 인격 형성의 필요조건

    -선생님께서 주창하시는 교육관인 ‘삶을 가꾸는 글쓰기 교육’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말합니까.

    “요즘 초등학교 교과목이 대략 15가지쯤 될 텐데, 글쓰기는 그중 국어과목에 속합니다. 더욱 세분하면 국어의 4개 분과인 읽기·쓰기·말하기·듣기 중 하나지요. 외형상으로만 보면, 전체 교과목 가운데 극히 작은 부분입니다. 그러나 이 글쓰기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교과서 혹은 다른 책들을 읽거나 남의 이야기를 들어 얻은 지식을 단순히 풀어쓰거나 정리하는 건 글쓰기가 아닙니다. 이를테면 대학입시의 논술고사같은 거지요. 그런 게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진정한 글쓰기입니다. 실제 삶 속에서 스스로 몸을 움직여서 하는 모든 체험행위에서만 자기의 진솔한 모습과 마음이 우러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생활글’로 정직하게 옮기는 겁니다. 그런 뒤에 그 글을 읽으며 ‘아, 내 모습이 이렇구나’하면서 자신을 객관화하면, 그게 또 거울을 보고 매무새를 가다듬 듯 자신의 인생을 가다듬는 하나의 계기가 됩니다. 또 같은 글을 교사나 친구들한테서 비판받고 자기반성도 하는 과정을 한 단계씩 차근차근 밟아나가야 인격을 올바로 세울 수 있습니다. 그런 만큼, 아이들이 진실된 사람으로 자라고 그들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세계를 만들어주기 위해 가장 중요한 필요조건이 글쓰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그런 글쓰기 교육을 외면하는 요즘의 교실은 완전히 ‘폭력교실’일 뿐입니다.”

    선생은 ‘방안에 갇혀 숨쉴 하늘을 잃어버린 아이들’을 한번 생각해 보라고 반문한다. 날마다 실내에서 책 읽고 쓰고 외우는 걸 공부라며, 머릿속에 갖가지 잡동사니 지식을 쑤셔넣는 것이 아이들을 절대적으로 지배하는 우상(偶像)처럼 돼버린 현실이 비참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때문에 그는 ‘우상의 억압’에서 벗어나 아이들의 숨통을 틔워줘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다. 아이들로 하여금 세상을 올바른 눈으로 보게 하고, 자연의 소리를 듣게 하고, 사람다운 감정과 생각을 갖게 하고, 사람다운 행동을 하게 하는 바른 글쓰기 교육이야말로 ‘인간교육’이란 게 그의 지론이다.

    -선생님의 주장이 옳긴 하지만 너무 이상론적이진 않나요. 현실과는 큰 괴리가 있고, 실제 지나치게 근본주의적인 국어운동이라고 비판하는 이들도 있는데….

    “글쓰기 교육이 잘 안되는 까닭이 뭘까요? 제가 1965년에 낸 ‘글짓기 교육의 이론과 실제’에서 아이들에게 이른바 ‘생활글’을 쓰도록 가르쳐야 한다는 이론을 제기하자 당시 많은 교사들이 공감했어요. 그런데 그뒤 실제 지도하는 걸 보니 그렇질 못해요. 어른글 흉내를 내도록 여전히 방치해둡니다. 하지만 아이들의 글쓰기는 부모나 교사에게도 매우 중요합니다. 아이들이 써놓은 정직한 글들은 좋은 ‘교육자료’입니다. 일상에서 아이들의 마음을 일일이 들여다보기는 불가능하지만, 그들의 진솔한 글을 대하면 그것이 최대한 가능합니다. 아이들을 가장 잘 알 수 있게 하는 수단인 셈이지요. 아이들의 그림도 일정 부분 같은 기능을 하지만 글보다는 훨씬 제한돼 있지요. 대화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왜 그런 글쓰기 방식이 좀처럼 정착되지 못하는 걸까요.

    “아이들이 글을 정직하게 쓰지 못하게 하는 장벽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하루중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에서 보냅니다. 그러다보니 담임교사와의 관계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때문에 담임교사의 권위는 절대적입니다. 아이들이 집에 가서 하는 얘기들 대부분이 수업시간에 어떤 일이 있었다는 등 학교생활과 관련한 것들이잖아요?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어요. 아이들이 정직하게 글을 쓰면 칭찬해줘야 마땅한데, 행여 내밀한 가정사가 담긴 글이나 교사나 학교에 대한 비판적인 내용이 섞인 글이라도 나오면 그야말로 ‘문제’가 되는 겁니다. 있는 그대로, 느낀 그대로 쓴 글인데도 말이죠. 정말 너그러운 교육자라면 오히려 반가워해야 할 일인데…. 그런 문제로 한번 아이들을 꾸짖잖아요? 그러면 그 뒤로는 교사가 좋아하는 글만 쓰게 돼요. 기껏해야 저축 장려 글짓기, 웅변 원고, 위문편지같이 그때그때 행사 있을 때만 ‘모범답안’이 쏟아집니다. 남들에게 보여 상 받기 위한 그런 글들만 쓰는 게 글쓰기의 목표가 되는 거죠. 그런데도 이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없어요. 한마디로 태무심한 겁니다.”

    -그야말로 아이들이 ‘표현의 자유’를 박탈당하는 셈이네요.

    “그렇죠. 우리나라에선 아이들의 글에 대한 ‘간섭’이 지나쳐요. 일기만 해도 부모들이 몰래 보는 경우가 흔합니다. 이러니 아이들이 솔직한 글을 쓸래야 쓸 수가 없습니다. 때문에 자기를 제대로 표현하는 법을 터득하지 못해요. 가까운 일본만 해도 그렇지 않습니다. 시집을 발간해 유명해진 한 일본 아이가 있었는데, 그 애가 중1 때 자살한 사건이 있었죠. 그런데 그 부모가 자식의 죽음을 설명하지 못하는 겁니다. 나중에 소학교 시절부터 써온 그 애의 일기장이 뒤늦게 발견됐는데, 그동안 부모는 단 한번도 자식의 일기를 훔쳐본 적이 없어 자살동기를 알 수 없었던 거죠. 극단적인 사례이긴 하지만, 일본만 해도 그만큼 아이들의 인격을 존중해 글쓰기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방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글쓰기 과정에서 우리말이 바로 쓰이지 않는 경우도 많지 않습니까.

    “엄밀히 말하면, 입말과 글이 100% 일치할 순 없어요. 하지만 그 정도가 심합니다. 요즘 일반도서는 물론 신문·잡지에서조차 깨끗한 우리말을 살려 쓴 경우를 찾기 힘듭니다. 아이들이 읽게 돼 있는 책 가운데서 그나마 그들을 덜 괴롭히는 책이 어린이문학책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도 기성세대가 오염시킨 그릇된 말, 어려운 한자말, 서양말과 일본말이 난무합니다. 한자말을 쓰면 대개 90% 가량은 일본식 어투가 돼버려요. 방송언어도 마찬가지예요. 예를 들어 볼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흔히 쓰는데 이는 완전한 일본식 표현입니다. ‘그런데도’가 맞습니다. ‘-에 있어서’란 말도 그냥 ‘~에서는’이라고 하면 시원스럽게 의미가 통하잖아요? 될 수 있는 대로 말글을 하나로 쓰는 게 좋습니다. 이런 말글을 자꾸 쓰다보면 우리말의 낱말이 풍부해지지 않습니다. 넋 빠진 겨레가 됩니다.”

    쪽지로 가르친 시작(詩作) 수업

    -말씀을 듣다보니 제 개인 체험이 생각나는데요. 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 6학년 겨울방학 때 급우들이 쓴 동시를 모아 학급문집을 만들었습니다. 등사원지를 철필로 직접 긁어서요. 아직도 나름대론 소중한 경험으로 남아있는데, 이처럼 학급문집을 만들거나 문예반에서 특별활동을 해보는 것도 글쓰기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물론 그런 경험들이 뒷날 글쓰기에 일정 정도 도움은 되겠지요. 더구나 학급문집은 졸업 후에 좋은 기념이 되기도 하지요. 지금까지 보편적으로 행해온 글쓰기 교육방식 중 하나이기도 하고…. 일괄적인 글쓰기보다야 확실히 자유스러우니까. 그러나 문제는 있어요. 담임교사가 글쓰기 교육에 좀더 열의가 있다면 한 학기나 일년에 한번뿐인 학급문집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야 합니다. 일본에 좋은 사례가 있지요. ‘일본작문회’란 단체인데 그 역사가 100년 가까이 됩니다. 이 단체는 일주일에 한 편씩 아이들의 좋은 글을 가려뽑아 감상하고 비평합니다. 아이들의 글이 곧 교재인 거죠. 문예반 이야길 하셨는데, 문제는 마찬가집니다. 백일장 등 교외행사가 있으면 곧잘 문예반에 부탁하곤 하잖아요. 결국 똑같은 거예요. 게다가 문예반 담당교사들의 ‘글짓기 교육관’이란 게 아이들의 삶을 가꾸기보다는 근사하게 문장을 꾸미는 기교를 가르치는 데 치중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그러다보니 문사(文士)를 꿈꾸는 아이들조차 국어교과서에 나오는 기성 문인들의 시나 수필, 단편소설을 흉내내게 되는 겁니다. 깨끗한 우리말을 먼저 배워야 할 국어시간이 되레 어려운 문장부터 배우는 시간이 돼버렸어요. 어느 문인의 수필 제목에 ‘○○차를 마시며’란 게 있어요. 아이들이 무비판적으로 이런 정형화된 틀을 따르곤 합니다. 그러나 바른 글쓰기의 전제조건은 어디까지나 정직과 정확입니다.”

    -선생님께서 우리말글 바로 쓰기 운동을 펼치시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을 텐데요.

    “이렇다할 ‘사건’은 없었어요. 다만 교직생활을 하다보니 학생들에게 솔직한 글쓰기를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생겨났어요. 그래서 동시부터 가르쳤습니다. 시에 대한 이론을 아는 사람은 적지 않지만, 아이들에게 시를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에 대해선 모르는 사람이 의외로 많습니다. 제 경우는 이랬습니다. 수업시간에 16절 갱지를 4등분한 쪽지를 아이들에게 나눠준 뒤 자연 속에서 ‘그 무엇’을 가만히 보고 어떤 느낌이 저절로 떠오를 때 그것을 곧 글로 옮기라고 했습니다. 쪽지를 나눠준 건 긴 글을 쓰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어요. 그중에서 괜찮은 것들을 골라 칠판에 적은 뒤 ‘이런 것이 시다’라고 알려줬지요.”

    이오덕 선생은 1925년 경북 청송 태생이다. 일제 말기 소학교를 졸업한 그의 생활은 전형적인 농촌 아이들의 그것이었다. 방과 후 소를 먹이고 틈틈이 농사도 거들었다. 그러다 기숙사 생활을 하는 영덕농업학교(2년제)에 진학했다. 그곳에서는 농한기인 겨울을 제외하곤 농사일만 가르쳤지만, 그는 무척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아직까지도 자신이 다녔던 영덕농업학교와 같은, 농사꾼을 기르는 3∼4년제 농업학교를 만들고 싶은 바람을 간직하고 있을 정도다. 그런 어린 시절의 체험은 교직생활을 하면서 제자들에게 그대로 ‘전수’됐다.

    농업학교를 졸업하면서 교원자격 검정시험에 합격한 선생은 추천에 의해 영덕군청 사무원으로 잠시 일하다 20세 때인 1944년 주왕산 인근의 경북 청송군 부동국민학교에서 교사생활을 시작한다. 이후 43년간 그는 경남 함안군, 경북 북부지역 등 농촌의 초·중학교를 돌며 줄곧 우리말글 사랑을 제자들에게 실천해오다 62세 때인 1986년 사표를 내고 퇴직했다.

    교육당국 등쌀에 사표 제출

    -사표는 왜 쓰셨어요. 당시는 정년이 65세일 때인데….

    “교육당국의 눈총을 견디다 못해 냈어요. 동료교사들은 뭐라고 안했지만, 교육장이나 장학사들은 내가 하는 글쓰기 교육에 불만이 많았습니다. 가난한 농촌의 아이들 이야기가 ‘명랑하지 못한’ 것들이니까. 게다가 수시로 교육잡지에 기존의 글쓰기 행태를 비판하는 글도 기고했고….”

    선생은 현재 장남·손자 내외와 함께 산다. 장남 정우(55)씨는 선생의 거처 인근에서 유기농업에 종사하며 우리밀 칼국수집을 경영한다. 손자 역시 포도농사를 짓는다. “정우가 일찌감치 기술을 배워 서울에서 장사를 했었는데, 10년 전쯤 시골로 내려와 농사지으라고 내가 권했어요. 잘한 선택인 것 같습니다. 사실 나도 건강만 허락한다면 농사 짓고 싶어요. 농사꾼의 아들답게.”

    부전자전이란 옛말이 어김없는 것일까. 정우씨의 가게 앞엔 ‘농산물판매장’이란 축약형 단어 대신 ‘농사지은 것 파는 곳’이라고 풀어쓴 큼지막한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가게 안에도 선생이 오래전 청계천 헌책방에서 구해왔다는 헌책 수백권이 책꽂이에 꽂혀 있어 오가는 손님들을 반긴다.

    -농촌에서의 생활은 어떻습니까.

    “대만족입니다. 농촌엔 이야깃거리가 엄청나게 많아요. 제가 사는 이 동네에 20여 가구쯤 사는데 기막히는 이야기들이 널렸어요. 그러나 요즘 동화작가들이나 수필가, 시인, 평론가들 중 상당수는 농촌과 자연의 생태를 너무 몰라요. 어릴 때부터 책만 읽고 지식만 쌓아 자연을 직접 체험하지 못했으니 그들의 글이 생활과 격리된 관념으로 흐를밖에요. 아이들의 현실을 제대로 알고 이를 정확하게 그리기보다는 그저 책상에 앉아 근사하고 어렵게 쓰려고만 하는데 그게 다 엉터리예요. 흔히 언론에서 말하는 팩트(fact)라는 게 부족합니다. 생생한 감정 표현도 없어요. 생생한 표현을 하려면 사투리를 그대로 살려쓰는 등 말부터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별난 건지는 몰라도, 적어도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투박하지만 진솔한, 오염되지 않은 가장 깨끗한 말이 바로 사투립니다. 서울말엔 일본말법이 뒤섞여 있어요.”

    “제대로 된 어린이책이 없다”

    그러나 이오덕 선생은 현재 자신이 살고 있는 마을에서도 일요일에마저 아이들을 구경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라고 탄식한다. 이농현상이 극에 달해 워낙 농촌지역에 아이들이 적은 탓도 있지만, 사교육 바람이 불어닥쳐 학교수업이 없는 날에도 예외없이 학원차량이 들어온다는 것. 그는 아이들이 이런 상황에 처해있는 현실을 ‘재앙’이라 부른다.

    게다가 그는 요즘 어린이문단이 전에 없이 활기를 띠는 듯하지만, 실상을 살피면 시대 조류에 편승해 아이들을 상대로 돈벌이 판을 벌이고 있을 뿐이라고 지적한다. 선생은 저서 ‘어린이책 이야기’의 머리말에서도 ‘오늘날 학교 공부를 했다고 하는 사람들, 바로 오염된 책으로 머릿속에 앎을 갈무리해두고 있는 사람들이 실업자 신세가 되지 않고 밥벌이를 할 수 있는 가장 넓은 자리가 아이들 상대로 책을 만들고, 글을 쓰고, 책을 읽히는 일을 하는 자리’란 혹평마저 서슴지 않았다.

    -제대로 된 어린이책이 없다는 말씀인가요?

    “그렇습니다. 예전엔 흔히 삼다법(三多法)이라 해서 글을 많이 읽고, 많이 써보고, 많이 생각하는 게 좋은 글쓰기의 조건이라고 무조건 권장했는데, 저는 이것을 부정합니다. 좋은 글쓰기는 기껏 남의 글을 통한 간접경험과 지식을 머릿속에 마구잡이로 집어넣는다고 해서 이룰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책에 빠지면 아이들이 병들어요. 아이들은 일하면서 직접 배워야 합니다. 여기서 ‘일’이란 과거처럼 노동에 종사하는 것만을 지칭하는 게 아닙니다. 아이들은 끊임없이 몸을 움직이며 무엇인가를 만들고 관찰함으로써 체득(體得)한 것들로 자기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을 풀어놓아 일과 놀이와 공부가 하나로 된 삶을 어릴 때부터 즐기도록 해줌으로써 건강한 생활인이 되도록 돕는 것, 이것이 제가 지금껏 해온 ‘삶을 가꾸는 글쓰기 교육’입니다. 아이들을 책에서 해방시켜야 아이들이 삽니다.”

    -평소 어린이문학이 크고 작은 온갖 문제들을 안고 있다고 지적하시는데….

    “요즘 동화책 펴내지 않는 출판사가 거의 없어요. 판매부수도 크게 늘었어요. 가히 ‘어린이책의 황금기’라 할 만해요. 그럴수록 제대로 된 책이 나와야 하는데, 지금처럼 사교육이 급팽창하지 않았던 10여 년 전과 비교하면 지금의 책들이 오히려 질이 떨어집니다. 아동교육에 대한 부모들의 관심이 예전보다 훨씬 커지면서 수요에 비해 공급이 달리다보니 외국 번역동화도 넘쳐납니다. 하지만 우리 정서에 부합하는 내용은 찾기 힘듭니다. 이런 현상을 두고 내가 ‘식민지문학’이라 비판했는데, 아마도 어린이책에 대한 최초의 혹평일 겁니다.”

    -그렇지 않은 어린이책도 있지 않나요.

    “물론 다 그런 건 아닙니다. 하지만 대다수가 그래요. 감각적 재미는 있어도 교훈이 빠져 있어요. 아동문학은 당대의 아이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가 하는 점을 짚어야 하는데, 이 점을 간과하고 있으니 아이들이 옳고 그름조차 제대로 분간할 줄 몰라요. 더욱이 어린이책들이 이런 현상을 부추기기까지 합니다. 판타지동화란 거 있잖아요? 왜 그런 글을 씁니까? 현실 이야기를 쓰는 게 힘드니까 동화작가들이 편법을 쓰는 겁니다.”

    -지난 5월 최초의 남북합작 과학학습 그림동화인 ‘령리한 너구리’ 시리즈(두리미디어)가 출간돼 관심을 모았는데요. 당시 선생님께서 ‘구수하고 아름다운 우리 토박이말로 돼 있는 이 책을 통해 남북 어린이들이 정다운 한 형제, 한 겨레가 되길 바란다’고 추천사를 쓰신 걸로 압니다. 그러나 북한의 언어와 표현이 거의 여과 없이 전달된 경우여서 아이들에게 다소 혼란을 줄 수도 있지 않을까요. 북한말도 분단 이전에 비해 적잖이 변질되지 않았습니까.

    “남북 어린이들이 함께 읽는 책을 만든다는 목표로 평양에서 글과 그림을 맡고, 서울에서 출간했죠. 물론 지적대로 다소 혼란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는 잘 풀어야 할 과제입니다. 남한의 경우 어려운 한자말과 외국말법이 많이 섞여 있습니다. 반면 북한엔 한자말과 함께 일본말법이 많습니다. 하지만 해결책이 전혀 없는 건 아닙니다. 통일이 되면 깨끗한 우리말 위주로 공통된 말글을 찾고, 그 이외에 새로 생겨난 말은 남북간 논의를 통해 규정하면 됩니다. ‘령리한 너구리’의 경우에도 제 개인적으론 그렇게 했으면 싶다는 바람이 있었는데 뜻밖에 책이 빨리 나왔습니다.”

    -좋은 책을 읽히고 싶은 게 부모들의 공통된 바람입니다. 어떤 책이 가치있는 어린이책일까요.

    “어른들이 주로 쓰는 글말로 돼 있지 않아 아이들이 쉽게 읽을 수 있는 책, 자기만 잘살면 된다는 생각이 들지 않게끔 하는 책, 남들과 같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가르침을 주는 책이 아이들에게 바람직한 책 아닐까요.

    -앞으로의 활동계획을 말씀해주시죠.

    “어린이문학에 관한 이론서와 평론집을 1∼2권 더 내려 합니다. 그리고 자서전 출간 계획도 있고요. 어쨌든 제 글쓰기 교육을 세상 사람들에게 더 널리 알리고 싶어요. 남은 생 역시 우리말을 살리는 데 힘쓸 생각입니다.”

    그는 어린이문학과 우리말 살리기 운동에 힘쓴 공로를 인정받아 제2회 한국아동문학상(1976)과 제3회 단재상(1988), 참교육상(1999)을 수상했다.

    언론도 우리말 살리기 동참해야

    -언론에 대해 하실 말씀도 많으시죠.

    “신문·방송도 우리말을 죽이는 것은 아닌지 자성해야 해요. 보도행태에도 문제가 많습니다. 이번에 낸 저서 두 권에 대해서 여러 신문에서 기사화했어요. 그런데 일부 기자들이 제 책은 읽어보지도 않고 전화로 몇 마디 묻고는 그냥 기사를 쓰더라고요. 나중에 기사를 보니 제 생각 근처에도 못 갔어요. 어떤 기자는 또 이렇게 묻습디다. ‘선생님, ‘일하는 아이들’이 무슨 뜻입니까, 노동을 의미하나요?’ 그래서 답해줬어요. ‘일하는 아이들’은 상징적 의미를 담은 것이다. ‘노작교육(勞作敎育: 공작·원예·요리 등 신체활동에 의한 작업을 통해 아동의 자발적·능동적인 정신과 신체의 조화를 꾀하는 교육)’이라고 하면 이해되느냐고 반문했더니 그제서야 ‘아, 노작교육!’ 하더라고요. 쉬운 우리말로 그냥 말하면 못 알아듣고 꼭 어려운 한자말로 해줘야 뜻이 통한다는 점, 문제입니다. 또 어떤 신문은 이번에 낸 ‘어린이책 이야기’를 다룬 기사에서 ‘아동문학 실명비평 단행본으론 최초’라고 했더군요. 실명비평이란 단어는 존재할 수 없지요. 특정 작품을 거론하는 비평엔 저자 이름이 나오니 당연히 실명비평 아닙니까? ‘실명비평으론 최초’라면 그동안 비평은 전혀 없었나요? 그러고보면 아동문학에 관한 한 제대로 된 비평이 없기는 한 것 같네(웃음).”

    -이야기를 계속 듣다보니 선생님 인터뷰 기사 쓰기가 상당히 부담스러워지는데요.

    “기성 언론인은 언론 문장을 가득 메운 표현공식들에 집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토록 오래 묵은 기사체가 하루 아침에 바뀔 수 있나요? 다만 조금씩이나마 바로잡아보려는 그 마음이 무엇보다 중요하지요.”

    이오덕 선생의 글쓰기 교육관은 어쩌면 대자연 속에서 자연의 신비와 생명을 느끼고, 그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고자 했던 이른바 ‘자연주의’와 맞닿아 있는지도 모른다. 그의 서재 한 귀퉁이엔 프랑스 자연주의 화가 밀레의 유채화 ‘이삭줍기’와 고흐의 작품 ‘감자 먹는 사람들’의 모작(模作)이 걸려 있다. 그는 농민에 대한 깊은 애정을 보인 밀레의 작품들이나 육체노동을 통해 정직하게 수확한 ‘감자를 먹는 사람들’처럼 ‘일하는 사람들’의 자연스런 일상을 표현한 ‘인간적’인 그림들만 보면 마음이 훈훈해진다고 했다. 그는 그런 소박한 마음으로, 급박하게 흐르는 시대의 뒤안길로 흩어져버린 우리말글의 편린들을 한톨한톨 소중히 주워 모으는 ‘이삭줍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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