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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리 기자의 사람 속으로

냉정과 열정 사이, 深淵이 있다

우리 시대의 ‘아름다운 남자’ 설경구와의 하룻밤 이틀 낮

  • 이나리 byeme@donga.com

냉정과 열정 사이, 深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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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시내 한 호프집 구석자리에 앉는다. 알아보는 사람이 없다. 생맥주에 마른 안주 날라다주던 아르바이트생 하나가 겨우 알아본다. “진짜 좋아하는 팬”이라며 사인을 부탁한다. 팬이라는데도 그는 활짝 웃어주지 않는다. 이 사람 진짜, 세상 눈치 볼 줄을 모른다. 기자에게 잘 보이려는 생각 또한 눈곱만큼도 없다.

“어디까지 했죠? 아, ‘처녀들의 저녁식사’. 일단 건배부터 하고.”

어느날 ‘영원한 제국’의 박종원 감독이 보자고 했다. 사무실을 찾은 그가 옆에 앉아있는데도 박감독은 몰라보고 딴 사람에게 “‘처녀들의 저녁식사’의 만화가, 그 친구 좋더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제가 설경군데요” 하니까 깜짝 놀랐다. 그렇게나 그는 평범한 얼굴이었다.

“참 웃겨요. 신인 때는 평범하다, 샌님 같다, 그래서 줄 배역이 없단 얘길 참 많이 들었어요. 근데 지금은 또, 무슨 역을 맡겨도 다 괜찮을 얼굴, 천의 표정을 가진 얼굴, 그래요. 사람이 사람 잡아가면서 사람을 다치게 하면 안되는 건데. 세상이 그래요.”

박감독은 “살 좀 뺄 수 있겠냐”고 했다. 일주일 동안 서울에서 일산까지 걸어다니며 꽤 많이 뺐다. 그리고 박감독의 신작 ‘송어’에 캐스팅됐다. 흥행은 잘 안됐지만 설경구에게 ‘송어’는 배운 게 참 많은 영화였다. 강수연, 황인성, 이은주 등의 배우, 스태프들과 강원도 삼척 산골에서 3개월을 버텼다.



“오전 9시에 촬영 시작이면 7시부터 스태프들이 나가 양어장 얼음을 깨요. 어떤 날은 하루 종일 그 물속에 들어갔다 나왔다 하며 촬영했어요. 날이 너무 추워 얼어죽은 송어들을 배가 위로 오도록 뒤집어야 하는데 촬영부 사람들이 물속에 들어갈 엄두를 못 내요. 이왕 젖은 거 내가 하지 싶어 뛰어들어가 하나씩 뒤집었죠. 덕분에 감독님께 촬영부 사람들만 혼났어요.”

계곡에서 좌욕하는 장면을 찍을 때였다. 젖은 머리카락이 얼어 부러질 지경이었다. 자정 넘도록 계속된 촬영은 새벽 5시가 돼도 끝나지 않았다. 감독이 또 한번 컷 사인을 날리자 배우들이 외쳤다.

“아이 씨발! 오케이, 오케이!”

‘송어’를 찍으며 처음 영화 찍는 재미를 알았다. 촬영 현장의 끈끈하고 열정적인 분위기가 좋았다.

“연극도 연습할 땐 재미있어요. 관객과 호흡 같이하고 그들의 감정을 ‘따먹는’ 과정도 행복하고요. 근데 장기공연에 들어가면 솔직히 많이 지치지요. 그렇다고 한참 관객 드는 연극을 중간에 내릴 수도 없고. 장기공연이 힘든 건 매너리즘에 빠지기 때문이에요. 한두 달쯤 되면 몸이 로봇처럼 저절로 움직인다니까요. 연기하면서 관객 수가 몇 명인지 셀 정도예요. 긴장? 그런 거 절대 없어요. 대사가 타이밍보다 막 먼저 튀어나오고. 7시30분 공연 끝나면 스태프들이랑 밥 먹고 술 먹고, 그러다 새벽 5시쯤 집에 들어가 오후 3시나 돼야 눈뜨고. 택시 값 무지 나와요. 그러다보면 어떤 순간 자기가 싫어지죠. 파이팅이 없으니까.”

그러저러한 무기력감에 빠져 있던 그에게 영화판에서의 러브 콜은 가뭄 속 단비였다. 그는 지금도 연극이 그립다, 예술 하러 소극장 무대로 돌아가겠다, 그런 생각은 하지 않는다. 연극이 싫어서가 아니라 영화판의 활기와 목적의식적인 열정이 좋기 때문이다.

‘송어’ 후 최민수·정우성 주연의 잠수함 영화 ‘유령’에 잠깐 출연한 뒤 전수일 감독의 ‘새는 폐곡선을 그린다’에 주인공으로 캐스팅됐다. 1999년 베니스영화제 초청작이기도 한 이 작가영화에서 그는 늘 저 멀리 풍경 속에 한 점으로 서있는 정물이었다.

“작가영화인 거 다 좋은데 배우가 할 몫이 너무 없는 게 속상했어요.”

그래도 ‘카메라 발’이 뭔지 감을 잡는 데는 큰 도움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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