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0월호

냉정과 열정 사이, 深淵이 있다

우리 시대의 ‘아름다운 남자’ 설경구와의 하룻밤 이틀 낮

  • 이나리 byeme@donga.com

    입력2002-10-06 08: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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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냉정과 열정 사이, 深淵이 있다
    어둡다. 밤. 기차역이다. 앳된 신병, 다리에 총 맞은 줄도 모른 채 헐떡이다 선로 위에 주저앉는다. 핏발 선 고요.

    누군가 다가온다. 겁에 질린 여고생이다.

    “아, 아저씨…. 살려주세요… 나, 학생이에요.”

    “학생이 여기서 뭐하고 있어!”

    “죄송해요, 아저씨. 용서해주세요…. 보내주세요, 네?”



    망설이던 신병, 소녀를 보낸다.

    “빨리 가, 군인들한테 잡히면 큰일나니까 빨리 가.”

    고참이 다가오자 당황한 신병, 빨리 뛰란 뜻으로 소녀를 향해 총을 발사한다. 한 발, 두 발.

    소녀, 고꾸라진다.

    시간이… 흐른다. 짧지만 영원처럼 긴 시간이다. 절뚝거리며 소녀에게 다가간 신병, 천천히 허리를 굽힌다. 축 늘어진 소녀를 안아 일으켜 조금씩 흔든다.

    “얘, 일어나. 빨리 일어나서 집에 가……. 일어나, 빨리…… 집에… 가야지….”

    멀리서 다가오는 플래시 불빛. 먹먹한 공포에 사로잡혀 숨조차 쉴 수 없는 신병. 집어던질 듯 시체를 세차게 흔들며 정신없이 중얼거린다. 그의 손, 그의 얼굴, 피에 젖었다.

    “빨리… 집에 가…… 빨…리……”

    마침내 짐승 같은, 짐승의 그것인 목젖 눌린 피울음, 터진다, 흔들리는 불빛 속, 시뻘겋게.

    몇 발 떨어져 플래시 비추며 배우들의 열연 지켜보던 이창동 감독. 한 손으로 입 가리고 목이 아프도록 눈물 참는다. 꺽꺽 숨막히는 울음소리, ‘신병’ 설경구의 절규에 묻혀 땅속 깊이 잦아든다.

    여기는 영화 ‘박하사탕’의 광주역 촬영현장. 1980년 5월 어느 날로 돌아가, 그들은 울었다. 검붉은 밤이었다.

    배우 설경구(36)를 만나러 가는 맘은 불편하다. 방금 전 조조할인 요금으로 본 영화 ‘오아시스’는 기이하게 아름다웠다. 설경구가 연기한 사회부적응자 ‘종두’도 갈수록 어여뻣다. 그가 사랑하는 뇌성마비 장애인 ‘공주’(문소리)도 사랑스러웠다. 그런데 속이 개운칠 않다. 그를 너무 많이 알아 더 물어볼 말이 없을 듯도 하다.

    사실은 지금 긴장하고 있는 게다. ‘박하사탕’의 ‘김영호’가, ‘공공의 적’의 ‘강철구’가, ‘오아시스’의 ‘홍종두’가 눈가를 어지럽힌다. 그들 모두이면서 또한 그들이 아닌 이 배우는, 독하고 낯을 가리며 입조차 무겁단다. 시시콜콜 사생활 따져 묻는 걸 무엇보다 싫어한단다. 그를 만나기 위해 읽어치운 다섯 권의 시나리오와, 단행본 두 권 분량의 지난 기사들과, 몇몇 지인들의 ‘증언’이 머릿속에 엇비슷한 정보를 계속 입력시킨 탓이다.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그는 싫은 건 분명하게, 그냥 싫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그런 인간은 무섭다. 강하고 독종이다. 사실, 새 영화 캐릭터에 맞춘다고 두 달 만에 몸무게를 20㎏씩 늘였다 줄였다 하는 이가 어디 보통 사람인가.

    설경구는 지금 ‘주유소 습격사건’ ‘신라의 달밤’의 김상진 감독이 연출하는 영화 ‘광복절 특사’ 촬영을 위해 전주에 가 있다. 차로 3시간을 달려 도착한 촬영 현장은 시 외곽에 있는 전주공고다. 웬만한 초급대학 뺨치게 넓은 학교 저 안쪽에, 8억원을 들여 세웠다는 교도소 담장 세트가 제법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먼저 도착한 사진기자가 막 촬영을 시작한 참이다. 한껏 친근한 웃음을 날리며 다가섰건만 돌아오는 눈빛에는 감정이 없다. 인사 삼아 고개를 끄덕인 것도 같은데…. 모르겠다.

    사진기자가 장소를 바꾸잔다. 아무래도 얼굴이 굳어 있다. 미리 읽어둔 기사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사진 찍히는 게 영 어색하다는, 자신은 모델이 아니라 배우인데 그런 것까지 다 잘할 수 있겠냐는. 지금 딱, 그 심정인가보다.

    몇 컷 찍지도 않았는데 그만했으면 한다. 때마침 스태프 한 명이 뛰어와 감독이 부른단다. 그를 따라 영화 촬영현장으로 간다. 40~50명은 족히 될 듯한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그가 자기 몫의 연기를 하는 동안 카메라 뒤쪽에 우두커니 서서 구경을 한다. 주변의 잡풀숲 때문인지 모기가 정말 많다. 누군가 옆에서, 이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밤이 되면 입안까지 날아 들어올 지경이라고 귀띔해준다.

    옆에는 톱 모델 출신의 톱 배우 차승원이 자기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팔도 길고 다리도 길다. ‘광복절 특사’는 탈옥한 두 죄수가 광복절 특사 명단에 자신들이 끼어있는 걸 알곤 다시 감옥으로 돌아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다. 차승원은 무식하고 힘만 센 ‘무석’ 역을, 설경구는 애인의 결혼 소식에 광분하는 사기꾼 ‘재필’ 역을 맡았다. 얼른 보기에도 두 배우는 사이가 무척 좋아 보인다.

    전주시내 한 호프집 구석자리에 앉는다. 알아보는 사람이 없다. 생맥주에 마른 안주 날라다주던 아르바이트생 하나가 겨우 알아본다. “진짜 좋아하는 팬”이라며 사인을 부탁한다. 팬이라는데도 그는 활짝 웃어주지 않는다. 이 사람 진짜, 세상 눈치 볼 줄을 모른다. 기자에게 잘 보이려는 생각 또한 눈곱만큼도 없다.

    “어디까지 했죠? 아, ‘처녀들의 저녁식사’. 일단 건배부터 하고.”

    어느날 ‘영원한 제국’의 박종원 감독이 보자고 했다. 사무실을 찾은 그가 옆에 앉아있는데도 박감독은 몰라보고 딴 사람에게 “‘처녀들의 저녁식사’의 만화가, 그 친구 좋더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제가 설경군데요” 하니까 깜짝 놀랐다. 그렇게나 그는 평범한 얼굴이었다.

    “참 웃겨요. 신인 때는 평범하다, 샌님 같다, 그래서 줄 배역이 없단 얘길 참 많이 들었어요. 근데 지금은 또, 무슨 역을 맡겨도 다 괜찮을 얼굴, 천의 표정을 가진 얼굴, 그래요. 사람이 사람 잡아가면서 사람을 다치게 하면 안되는 건데. 세상이 그래요.”

    박감독은 “살 좀 뺄 수 있겠냐”고 했다. 일주일 동안 서울에서 일산까지 걸어다니며 꽤 많이 뺐다. 그리고 박감독의 신작 ‘송어’에 캐스팅됐다. 흥행은 잘 안됐지만 설경구에게 ‘송어’는 배운 게 참 많은 영화였다. 강수연, 황인성, 이은주 등의 배우, 스태프들과 강원도 삼척 산골에서 3개월을 버텼다.

    “오전 9시에 촬영 시작이면 7시부터 스태프들이 나가 양어장 얼음을 깨요. 어떤 날은 하루 종일 그 물속에 들어갔다 나왔다 하며 촬영했어요. 날이 너무 추워 얼어죽은 송어들을 배가 위로 오도록 뒤집어야 하는데 촬영부 사람들이 물속에 들어갈 엄두를 못 내요. 이왕 젖은 거 내가 하지 싶어 뛰어들어가 하나씩 뒤집었죠. 덕분에 감독님께 촬영부 사람들만 혼났어요.”

    계곡에서 좌욕하는 장면을 찍을 때였다. 젖은 머리카락이 얼어 부러질 지경이었다. 자정 넘도록 계속된 촬영은 새벽 5시가 돼도 끝나지 않았다. 감독이 또 한번 컷 사인을 날리자 배우들이 외쳤다.

    “아이 씨발! 오케이, 오케이!”

    ‘송어’를 찍으며 처음 영화 찍는 재미를 알았다. 촬영 현장의 끈끈하고 열정적인 분위기가 좋았다.

    “연극도 연습할 땐 재미있어요. 관객과 호흡 같이하고 그들의 감정을 ‘따먹는’ 과정도 행복하고요. 근데 장기공연에 들어가면 솔직히 많이 지치지요. 그렇다고 한참 관객 드는 연극을 중간에 내릴 수도 없고. 장기공연이 힘든 건 매너리즘에 빠지기 때문이에요. 한두 달쯤 되면 몸이 로봇처럼 저절로 움직인다니까요. 연기하면서 관객 수가 몇 명인지 셀 정도예요. 긴장? 그런 거 절대 없어요. 대사가 타이밍보다 막 먼저 튀어나오고. 7시30분 공연 끝나면 스태프들이랑 밥 먹고 술 먹고, 그러다 새벽 5시쯤 집에 들어가 오후 3시나 돼야 눈뜨고. 택시 값 무지 나와요. 그러다보면 어떤 순간 자기가 싫어지죠. 파이팅이 없으니까.”

    그러저러한 무기력감에 빠져 있던 그에게 영화판에서의 러브 콜은 가뭄 속 단비였다. 그는 지금도 연극이 그립다, 예술 하러 소극장 무대로 돌아가겠다, 그런 생각은 하지 않는다. 연극이 싫어서가 아니라 영화판의 활기와 목적의식적인 열정이 좋기 때문이다.

    ‘송어’ 후 최민수·정우성 주연의 잠수함 영화 ‘유령’에 잠깐 출연한 뒤 전수일 감독의 ‘새는 폐곡선을 그린다’에 주인공으로 캐스팅됐다. 1999년 베니스영화제 초청작이기도 한 이 작가영화에서 그는 늘 저 멀리 풍경 속에 한 점으로 서있는 정물이었다.

    “작가영화인 거 다 좋은데 배우가 할 몫이 너무 없는 게 속상했어요.”

    그래도 ‘카메라 발’이 뭔지 감을 잡는 데는 큰 도움이 됐다.

    그즈음 ‘운명’이 찾아왔다. ‘박하사탕’을 준비중이던 이창동 감독과의 만남이었다.

    “감독님이 부르셔서 갔죠. 어른이시니 묻는 말에 예, 아니오만 했어요. 저 돌아간 다음 감독님께서 옆사람한테 그러셨데요. ‘설경귀(鬼)다, 설경귀. 말도 안하고 자기 얘기도 안하고.’ 나중에 연락이 왔는데 ‘당신 쓰기 힘들겠다, 그러면 파이낸싱을 못할 것 같다’고 하세요. 그럴 수 있다 생각했고, 시나리오 읽어보니 보통 어려운 역이 아니라 차라리 잘됐다 싶기도 했죠.”

    곧이어 ‘박하사탕’ 주인공 공모를 위한 공개오디션이 열렸다. 신인은 물론 쟁쟁한 유명 배우들도 여럿 오디션에 응했다는 소문이었다. 그는 원래 공개오디션을 보지 않는다. 긴장 ‘당하고’ 선택 ‘당하는’ 게 싫어서다. 자그마치 5단계의 과정을 거쳐 2명의 후보가 선정됐다는 소문까지 들었을 즈음, 뜬금없이 이창동 감독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처음 보고 3개월쯤 지난 후였다. 이감독은 제작을 맡은 명계남씨와 함께 집 근처까지 찾아와 그를 불러냈다. 자정이 다된 시간이었다.

    “설경구씨, 이거 하고 싶어요?”

    “뽑으셨다면서요.”

    “그래도 한번 말해봐요.”

    “하고는 싶은데 능력이 없어요.”

    “능력 없는 건 없는 거고…. 대본 보고 내일 한 장면만 해보여줘요.”

    이튿날 이감독 사무실로 찾아갔다. 주인공 김영호가 제 머리에 총 겨누는 장면을 요구했다. 엉망으로 해놓고 복도에 나와 담배만 줄창 빨아댔다. 다음날 이감독으로부터 다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이 역을 할 사람은 설경구씨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어요.”

    당시 경기도 화정에 살던 설경구는 제 동네 지나 이감독 집이 있는 일산 백마마을까지 함께 버스를 타고 갔다. 어른보다 먼저 내리는 게 마음에 걸려서였다. 그러면서도 “시켜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 말은 전혀 하지 않았다. 솔직히 맘이 무거웠다. 당시 그는 이미 영화 ‘해피엔드’에 전도연의 내연남 역으로 캐스팅 돼 있는 상태였다. 할 수만 있다면 그 쪽을 택하고 싶었다. ‘김영호’ 역은 무서웠다. 배우가 처음부터 그렇게 제 밑바닥까지를 다 까 보여줘도 되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실력도 없이 덥석 물었다 여러 사람 ‘조지면’ 어떻게 하나.

    “그러다 결론 내렸죠. 안하면 후회할 지 모르니 일단 하자. 해서 다 조져버리자.”

    나중에 이감독으로부터 이런 얘길 들었다. 이감독의 부인은 드라마 작가 이란씨다. 최근작으로는 원미경, 유인촌, 정선경이 열연한 MBC 미니시리즈 ‘고백’이 있다. 설경구가 개인 오디션을 본 날, 이감독은 집에서 그의 연기를 모니터하고 있었다. 4000여 명이나 되는 오디션 응시자들의 얼굴을 다 보고도 아무말 없던 이란씨가 설경구의 얼굴을 보더니 한마디했다. “김영호네.” 이감독, 소름이 쫙 끼쳤다고 한다.

    “사실 촬영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감독님은 자신이 없었대요. 카메라 발도 없고, 아 이거 안되겠다, 그런 생각까지 하셨대요. 근데 맨 처음 촬영이 그거, 김영호가 기차에 치여 자살하는 장면이었거든요. 거기서 제가 완전히 돌아버리더래요. 저러다 그냥 철교에서 뛰어내리는 거 아닌가 싶어 리허설하는 내내 스태프 두 명 보고 제 허리춤을 꼭 잡고 서있으라 그러실 정도였어요. 저 그때, 정말 미쳤거든요.”

    기차가 달려온다. 절망의 끝에 선 남자, 깊이 상처 입어 눈물 젖은 야수의 얼굴로 절규한다.

    “나, 돌아갈래-!”

    그 장면을 찍다 설경구는 정말 죽을 뻔 했다. 기차가 바로 코앞까지 달려왔는데도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지 않은 것. 카메라로 보고 있던 참이라 거리감각이 무뎌진 탓이었다. 기차에 치기 직전의 순간에야 비명처럼 다급하게 “오케이! 오케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몸을 날려 간신히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형사가 돼 처음 사람을 고문한 날, 첫사랑 여자마저 떠나보낸 ‘김영호’가 식당에서 난동 부리는 장면을 찍을 때였다. 액션 장면 촬영 때 다 그렇듯 ‘합’을 맞추고 나섰는데 아무래도 감이 오지 않았다. ‘김영호’ 속으로 완전히 들어가지 못했다고 느낄 때마다 설경구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통스러워했다. 감독은 그를 냉정히 버려두었다.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짜고 치면 ‘진짜’가 아닐 것 같았다.

    “감독님께 그냥 가자 그랬어요. 합이고 뭐고, 내 감정 가는 대로 하겠다고. 슛 들어가자 미쳤지요. 마구 때려부수고 고함 치고 욕설 퍼붓고 발광을 했어요. 연기가 아니었죠. 모두 공포에 질렸어요. 끝내고 보니 박스 채 갖다놓은 술병은 다 깨져 난장판이고, 그 파편에 맞아 스태프 하나는 눈 밑이 찢어지고, 옆에 서있던 여배우 김여진은 기가 질려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하고. 오케이 사인 떨어진 다음에도 저랑 김여진은 각기 돌아서서 대성통곡을 했어요. 정말 여기가, 가슴이 찢어지게 아팠어요.”

    광주역 장면도 그렇게 찍었다. 너무 고통스러워 껴안고 있던 여학생 몸을 집어던질 뻔했다. ‘오아시스’ 촬영이 끝난 다음에 이감독이 누구에겐가 이런 말을 했단 소릴 들었다.

    “내가 일하면서 운 게 딱 두 번이에요. 소설 쓸 때 한 번, 그리고 광주역 장면 찍을 때 한 번.”

    술 몇 잔이 들어간 탓일까. 당신들만 운 게 아니다, ‘박하사탕’ 보고 운 사람 너무 많다, 그런 얘기를 한참 하고 있는데, 이상하다. 이 남자, 눈이 발갛다. 또 울고 있는 것이다.

    촬영이 종반에 접어들 즈음이었다. 이감독에게 처음으로 이런 말을 했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원하시는 대로 잘 안되는 것 같아서.”

    이감독이 말했다.

    “여기 스태프가 100명이야. 이중 나 도와주는 사람이 딱 한 명 있어. 그게 너야.”

    이제 와 이창동 감독과 설경구는 서로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이가 됐다. 배우로서, 감독으로서뿐만 아니라 인간으로 좋아한다.

    “감독님이 그러세요. 넌 꼭 나 같다고, 우린 참 많이 닮았다고. 촬영현장 담은 비디오를 보면 감독님하고 저, 마주보면서 히죽히죽 웃거나 괜히 삐친 척하거나 그런 장면이 꽤 많이 나와요. 말은 별로 안하면서. 바보 같죠. 그렇게 서로 통해요. 그냥 알아요, 어떤 마음인지. 징그럽게 정들었죠, 감독님이랑.”

    ‘박하사탕’으로 9개나 되는 연기상을 받았다. 백상예술대상, 대종상, 춘사영화제, 황금촬영상, 영평상…. 시간이 제법 흐른 후에도 ‘김영호’로부터 빠져 나오기가 쉽지 않았다. 아니, 주변에서 못 빠져 나오도록 난리를 쳤다. 인터넷에는 ‘박하사탕을 사랑하는 모임’이 만들어지고, 기자들은 아무 상관도 없는 영화 기사를 쓰면서도 ‘김영호가 지금 내 앞에 있다’는 식의 언급을 빼놓지 않았다. 가히 집단중독상태였다.

    안되겠다 싶어 새 영화는 아주 다른 걸로 골랐다. ‘단적비연수’였다. 부족을 배신하면서까지 절망적 사랑에 목숨 던지는 족장 ‘적’을 연기하기 위해 설경구는 말을 달리고 근육을 단련했다. 아쉽게도 영화에 대한 평가는 좋지 않았다. 그렇더라도 그는 만족했다. 무엇보다 좋은 동료들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누가 저한테 어떤 배우 좋아하냐 그러면, 다 하는 대로 로버트 드 니로다, 잭 니콜슨이다 그랬어요. 지금은 그냥 나랑 같이한 배우! 전 그 사람들이 제일 좋아요. 그 사람들이 최고 배우고 그 사람들이 진짜 인간이에요. 제가 화를 잘 내지 않는데 누가 저랑 공연한 배우 두고 근거 없는 험담을 하면 절대 못 참아요. 용납이 되지 않아요.”

    ‘단적비연수’에 이어 박흥식 감독의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를 찍었다. 결혼을 꿈꾸는 숫기 없고 고지식한 은행원 ‘봉수’를 연기한 이 영화에서 그는 자기 안에 숨은 또 하나의 얼굴을 수줍게 꺼내 보였다. 일상을 사는 보통 남자. 이전 영화들에서 절망하고 소리 치고 처절히 죽음 맞는 모습만을 보아온 관객들은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감탄했다. “감독이 너무 착한 사람이라 책(대본)도 안보고 결정했다”는 이 배우는 영화 속에서 그 누구 못지않게 착하고 어리숙해 보였다.

    그러나 반전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강우석 감독의 ‘공공의 적’이 개봉한 것이다. 주인공 ‘강철중’은 세상 때와 오물에 푹 절은 남자다. 말이 형사지 마약 팔고 폭행 일삼는 저질 중에서도 최하질이다. “욕 잘하고 잘 때리고 헛소리 잘하지만 지 나름대로는 심각하고 진지한” 그 인간을 설경구는 귀신처럼 체현해 냈다.

    “언뜻 보면 ‘김영호’랑 비슷해 보이지만 사실은 아주 다른 놈이에요. ‘영호’는 순진하고 순수하고 안으로 자꾸 쌓아가고, 그래서 결국 제 손으로 목숨 끊을 수밖에 없는 놈이고, ‘강철중’은 판단도 안해, 죄책감도 없어, 생각나면 그냥 질러버려…, 그렇게 다 밖으로 내뱉는 놈이거든요.”

    세상만사 다 귀찮은 부패형사 ‘강철중’이 되기 위해, 설경구는 무려 20㎏의 살을 찌웠다. 감쪽같았다. 독기는 빠져나가고 미끌미끌 불어난 지방덩이로 그의 배와 다리와 엉덩이는 완전히 망가졌다. ‘강철중’, 그 인간처럼.

    ‘공공의 적’에서의 연기로 그는 다시 백상예술대상과 대종상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그리고 곧 이창동 감독의 세번째 영화 ‘오아시스’ 촬영에 들어갔다. 체중을 다시 20kg 줄였다.

    “‘오아시스’가 제일 힘들었어요. 제가 맡은 ‘홍종두’요, 그 녀석이 아주 종잡을 수 없는 놈이에요. 바보도 아니고 일반인도 아니고, 멍청한가 하면 또 눈치는 빤하고, 그런데 세상에 그런 사람이 아주 없냐하면 그건 또 아니거든요.”

    ‘오아시스’ 속의 설경구는 ‘홍종두’ 그 자체다. 감독도 찍기 전엔 도대체 어떤 인간인지 감 잡기가 힘들었겠구나 싶을 정돈데, 바로 그 ‘감 잡는 일’, 몸 있는 인간으로 만드는 일을 설경구가 해냈다. “감독이 아무리 게거품을 물어도 배우가 20%밖에 못 보여주면 20% 예술한 것밖에 안돼요. 배우는 그렇게 중요하고, 또 멋있는 직업이에요.”

    ‘홍종두’가 ‘공주’(문소리)를 강간하려는 장면이 있다. 누가 봐도 ‘섹시하지 않은’ 뇌성마비 장애인 ‘공주’를 ‘종두’는 예뻐서 어쩔 줄 모른다. 강간이야 물론 극악무도한 짓이고, 사실 ‘종두’는 그럴 만큼 독한 놈도 못되지만, 어쨌거나 그 장면에 가득 묻어나는 건 극한의 폭력성이 아닌, 한 여자를 미치도록 예뻐하는 한 남자의 투둥거리는 심장 소리, 그 여자의 발가락마저 다 먹어버리고 싶은 한 남자의 고통스럽기까지 한 욕정이다. 정치적으로 전혀 올바르지 않은 이런 감정을 가차없이 이끌어내는 이창동 감독이, 또 그걸 진짜 제대로 연기해낸 설경구가 징그럽고 밉살스러울 지경이다.

    “어쩌면 그렇게 배역에 빠져들 수 있어요? 그런 순간 당신 자신은 어디에 가 있나요?”

    “저는… 빠져드는 거 잘 못해요. 어떤 극한의 상황에도 그 인물 속에는 나 설경구가 있어요. 나와 그 놈이 만나 하나가 되는 거죠. 내가 그 놈을 느끼는 거예요. 그러면서 내 꼴리는 대로 가는 거예요. 전 분석할 줄 몰라요. 분석은 감독이 하는 거죠. 감독은 영화 갖고 예술 하지만 배우는 그냥 ‘사는’ 거예요. 그럼 영화는 감독 거냐, 아니면 배우 것이냐. 아니죠. 영화는 관객 거예요. 전 그렇게 생각해요.”

    정말 그렇다. 혹자는 그를 두고 ‘변신의 귀재’라 하지만 그는 변신한 적이 없었다. 그도 말한다. “변신은 무슨 개뿔, 배우가 무슨 변신로봇인가.” 전혀 다른 삶들 속에서 길 잃음 없이, 본연의 자아를 완전히 녹여낼 줄 아는 저 진기한 능력. 설경구가 무서운 배우인 건 그에게 연기란 ‘연기’가 아니라 본능이기 때문일 게다.

    노래방으로 자리를 옮긴다. 그가 부르는 김광석의 노래를 듣는다. 부드럽지만 힘있는 목소리다. 기교 없이 주욱 뻗어나와 담배연기 자욱한 허공으로 물감처럼 번져간다.

    노래 한 곡 끝내고 한숨 돌리는 그의 옆얼굴을 바라본다. 비로소 그가 아름답다는 생각을 한다. 잘생긴 것도, 남자다운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마음 가득 애잔함이 밀려온다. 저 백지(白紙) 같음이 그를 우리 시대의 페르소나로 만들었나. 한 인물을 만나면 그 인간의 가슴 밑바닥까지 곧바로 몸 던져버리는 저 무구함.

    그의 얼굴에 강물이 흐른다.

    바다가 멀지 않다.

    오후 6시20분, 어스름녘이 되니 누군가 밥 준비 다 됐단다. 저녁식사를 포기하고 그와 마주앉는다. 운동장 스탠드에 자릴 잡더니 담배 연기 한 모금 깊숙이 빨아들인다(그는 촬영현장에서도 자기 신만 아니면 담배부터 꺼내고 보는 체인스모커다). 가만 보니 이 사람, 무뚝뚝하지만 거만하진 않다. 스타 연 하는 ‘곤조’가 없다. ‘뜨기’ 전이나 뜬 다음이나 똑같을 사람이라 생각하니 왠지 마음이 편안해진다.

    “김광석 노래 좋아한다면서요.”

    “네. 그 사람 CD만 7장 갖고 있어요. 차에 싣고 다니며 줄창 들어요.”

    “뭐 좋아하세요? ‘이등병의 편지’ ‘서른 즈음에’ ‘부치지 않은 편지’…. 많잖아요.”

    “다 좋아해요. ‘서른 즈음에’는 내 노래라 다른 사람이 부르려고 하면 마이크 바로 빼앗아버려요. 지난번에 이창동 감독님 부르려고 하실 때도 제가 그랬어요. 친하니까.”

    처음 김광석을 알게 된 건 김민기 연출의 뮤지컬 ‘지하철 1호선’에 출연할 때였단다. 어느 날 우연히 김광석 콘서트가 한창인 대학로 소극장에 들렀다 엉겁결에 공연을 보게 됐다. 다 좋았지만 특히 오프닝 곡인 ‘서른 즈음에’가 어떻게나 맘속 깊이 스며들던지, 그 날부터 공연 끝날까지 첫 곡 부르는 시간만 되면 콘서트장으로 달려가 그 노래를 듣곤 했다.

    “‘박하사탕’ 홍보하려고 ‘이소라의 프로포즈’에 출연했어요. 노래를 하라길래 ‘이등병의 편지’를 불렀죠. 나중에 스태프들한테 핀잔 꽤나 들었어요. ‘공동경비구역 JSA’랑 한참 비교 될 때였는데, 그 영화 띄워주는 노래를 부르면 어떡하냐구요. 왜, 그 영화에 ‘이등병의 편지’가 삽입돼서 인기 많이 끌었잖아요.”

    사랑하는 가수 이야기가 나오니 말이 술술 풀려나온다. 언제 그렇게 낯가리며 딱딱하게 굴었나 싶을 정도다.

    설경구의 고향은 충남 서천군 한산면이다. 태어난 곳이라지만 가슴 아린 추억 같은 건 없다. 지금에 와서는 모시 짜는 사촌누이 한 분이 살고 있을 뿐이다.

    철도 들기 전 서울 마포구로 이사했다. 지금의 ‘홀리데이 인 서울’ 호텔 뒷동네에 자리잡았다.

    “거기 마포아파트라고 있었어요. 그게 우리나라 최초의 아파트거든요. 하여튼 비싸고 좋았어요. 우리집은 그 마포아파트… 옆에 있는 한옥이었어요. 거기 살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집을 사 이사했죠. 역시 부근 어디였어요. 덕분에 초·중·고등학교를 다 그 동네서 나왔어요. 마포초등학교, 마포중학교, 마포고등학교요.”

    ‘마포맨’ 설경구의 아버지는 마포구청에 근무했고 거기서 정년퇴임을 맞았다. “뿌리 깊은 가문인 만큼 국회의원 출마라도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했더니 “어, 나 지금 일산 사는데…?” 하며 눙치고 든다. 누나 하나, 남동생 하나가 있다.

    학교 다닐 땐, 그의 표현대로라면 ‘어리버리한 아이’였다. 특별한 사건도, 기억에 남는 일도 없다고 했다. 그런데 가만 얘기를 듣다보니 꼭 그런 것만도 아닌 것 같다.

    “어릴 적 기억이라…. 글쎄요, 요렇게 단추 딱 끼는 넥타이에 양복 빼입고 창경원 놀러갔던 거요. 버스 타면 왜 운전기사석 옆에 엔진통 있잖아요. 거기 앉는 걸 좋아했어요. 기사 아저씨 발 움직이는 거 보려고. 그게 너무 재미있어서 장래 꿈도 버스운전사였잖아요. 동네에 꼭 엔진통처럼 생긴 난간 같은 게 있었는데, 심심하면 그걸 타고 앉아 발을 들었다 놨다 하며 운전연습을 했어요.”

    “어린 시절에도 그렇게 독했냐”고 물으니 픽 웃으며 “저 안 독해요” 한다. 재차 “애들 꽤 울렸겠다”니까 이번엔 좀더 심각한 얼굴로 “저 싸움 안해요” 그런다.

    “때리는 게 싫어서요. 사교적이진 않지만 그런대로 분위기에 묻혀 사는 정도는 됐어요. 그렇다고 애들한테 먼저 다가가는 일은 없었고. 오는 애들도 다 받아주진 않았죠. 정리해서 받았어요. 전 싫으면 꼭 티가 나거든요. 냉정해져요. 좋은 척, 착한 척, 이런 척, 저런 척, 그런 거 못해요.”

    알고 보니 그가 독해 뵈는 건 거짓말을 못하기 때문이다. 호적에는 1968년생으로 돼 있지만 실제로는 1967년생인 그는, 일곱 살 나던 해 동네 친구들이 하나둘 초등학교에 입학해버리자 어머니를 힘껏 졸라 억지로 학생이 됐다. ‘동사무소에 돈 좀 써서’ 4월쯤 1학년에 편입을 한 것. 정식 취학 통지서는 3학년이 되어서야 나왔다.

    냉정과 열정 사이, 深淵이 있다

    '광복절 특사' 촬영 현장에서 스태프들과 담소를 나누는 설경구. 현장에서의 그는 듬직한 맏형 같다.

    “이름도 쓸 줄 모르고 갔어요. 어머니가 공부할래 맞을래 그러면 그냥 맞았으니까. 나이 어리다고 애들이 “야, 이 68년아” 하면서 꽤 놀렸죠. 시작이 그런 바람에 전 친구들하고 지금도 ‘개족보’예요.”

    이런. 드디어 악명 높은 설경구식 어투의 등장이다. 아닌게아니라 그는 입이 걸다. 욕을 달고 다닌다. 그런데 이상한 건 그다지 상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거다. 무엇인가를 표현하기 위한 비어·속어의 사용 외에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존대어를 사용한다. 우리말에서 적절한 존대어법의 구사만큼 힘든 부분도 없다. 물론 친한 후배들에게는 꽤 ‘쎈’ 호칭을 쓰기도 한다. 위악(僞惡)이라기보다 애교에 가까운 친밀감의 표시다. 한편으로는 강한 보스 기질이 느껴진다.

    “학교 다닐 때는 범생이었어요. ‘바른생활 사나이’ 있잖아요. 집이랑 학교만 왔다갔다하고, 친구들도 다 착했어요. 술? 담배? 에이- 그런 걸 왜 해요. 우리 땐 그런 애 별로 없었어요. 얼마나 조용히 살았냐 하면, 고등학교 졸업하고 처음 서울역 찾아가는데 어디서 내려야 할지 몰라 시청까지 갔어요. 아차 싶어 다시 돌아오려다 보니 또 지나칠 거 같더라구. 불안해서 서울역까지 걸어갔죠. 어쩌다 미도파백화점 같은 데 가긴 했는데, 샤프 사러. 뭐 먹는 거나 좋아하고…. 진짜 특징 없는 애였어요. 있으나마나 한 녀석.”

    공부는 중간 안쪽, 아니면 그보다 좀 잘하는 수준…. 어쨌거나 초·중·고 12년 동안 지각 한번 하지 않았다. 밋밋하고 숫기가 없는 탓인지 좋아하는 여자애도, 좋아해주는 여자애도 없었다.

    초등학교 몇 학년 땐가는 5일만 되면 가슴이 벌렁거렸다고 한다. 담임선생님이 5번, 15번 하는 식으로 책읽기와 문제풀이를 시켰기 때문이다. 수학을 지독히도 싫어했고 고등학교 땐 물리, 화학까지 합쳐 ‘양’ ‘가’를 밥먹듯 받았다. 대신 국사, 세계사, 지리, 사회 같은 인문계 과목은 넘치도록 좋아해 성적표는 늘 극심한 불균형의 연속이었다. 언제인지 모르게 사춘기가 지나갔고, 중학생 무렵부터는 집에 가면 제 방문 꼭 닫고 들어가 안에서 뭐 하는 지 알 수 없을 만큼 속모를 소년이었다.

    “역사 과목 좋아하면 특정한 시대나 인물이나 사상이나 그런 데 관심이 가잖아요. 그런 거 없었어요?”

    “없었어요.”

    “수학은 어느 정도 못했는데요.”

    “숫자 자체가 싫어요. 전화번호도 잘 못 외워요. 이사할 때 돈 받잖아요. 지난번 전셋집 옮길 때도 부동산에서 잔금 세 보라고 하는데, 아휴, 정신이 하나도 없더라구요. 쪼꼼 하다 말아버렸어요. ‘뭘 세요, 맞겠죠’ 했더니 상대편이 더 당황하던데요.”

    그렇다고 설경구의 암기력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다. 그는 영화판에서도 집중력 뛰어나기로 유명한 배우다. 대본 분석, 인물 연구, 이런 거 하고 담 쌓고 사는 그는 현장에 나오기 전 대본을 암기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자기 차례 오기 전 눈에 힘주고 딱 보면 그냥 외워진단다. 어떤 때는 슛 들어가기 직전 감독에게 “대사 한번 읽어달라”는 염치없는 부탁을 하기도 한다. 그러고도 일단 촬영을 시작하면 어느새 대사가 입에 착 달라붙어 있다. 놀라운 능력이다.

    유일한 취미는 학교 중창단 활동이었다. 또래 7명이 아카펠라 팀을 꾸려 방과 후 음악실에서 노래연습을 하곤 했다. 연말연시에는 제법 바빴다. 특히 교회 공연이 많았는데(멤버 중 기독교인이 있어서) 하루 세탕을 뛰기도 했다.

    “어, 다음 어디야? 지금 몇 시야? 그러면서 무슨 연예인들처럼 몰려다녔죠. 재밌었어요. 제 포지션은 테너였는데, 왜 그걸 했냐하면 새 멜로디를 외우지 않아도 되니까. 베이스 같은 거 하면 밤밤밤밤…, 뭐 그런 새 곡조를 익혀야 하잖아요. 제가 그래요. 되게 게을러요.”

    교회는 초등학생 때, 그리고 고등학교 1학년 때 좀 다녔다. 일요일만 되면 집에 찾아와 예배 보러 가자고 문 두드리는 친구녀석이 있었다. 역시 기독교인인 어머니는 헌금하라고 100원짜리 동전 한 닢을 쥐어주며 등을 떼밀었다.

    “교회 그만 다닌 거요? 맘에 안 들어서요. 어느 날 집사님 한 분이 돌아가셨어요. 교회에 한바탕 신축헌금 바람이 불 때였는데, 그 집사님도 1984년 당시 돈으로 200만원이라는 거금을 헌금하셨죠. 정작 자신은 간장 하나 놓고 식사할 정도로 힘들게 사셨으면서. 이게 뭔가… 하는 생각이 들데요. 교회 주보 보면 맨 뒷면에 헌금한 사람들 이름이 주욱 실리잖아요. 그것도 싫었어요.”

    또 하나 그를 교회에서 멀어지게 한 건 기도 시간이었다. 어쩌다 지명당해 큰 소리로 기도를 할라치면 할 말은 없고 창피해 죽겠는 것이 얼굴만 자꾸 빨개졌다.

    “종교는 맹목적이어야 하는데 빠져들지가 않더라고요. 통성기도라고, 사람들이 몸 흔들면서 막 큰 소리로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 확 질리고. 예수님은 가공 인물 아냐? 그런 벼락 맞을 생각도 했죠. 그 주제에 사실 저 세례까지 받을 뻔했어요. 세례 전에 ‘학습’이란 과정이 있는데 그것도 다 마쳤거든요. 세례식 직전 목사님이 한명 한명 불러 일종의 심사를 해요. 저도 불려갔죠. 목사님이 물으시데요. ‘믿냐.’ 솔직히 대답했죠. ‘안 믿는데요’. 가만 보시더니 ‘가라’ 그러세요. 조용히 나왔어요.”

    수학은 지지리도 못하면서 이과를 선택했다. 한창 공대 인기가 치솟던 때라, 그리 가야만 대입도 쉽고 취직도 쉽다는 주위 어른들의 강권 때문이었다. 어영부영하는 새 대학입학 시즌은 닥쳐왔는데 그는 원서를 내지 않았다. 학력고사 성적도 맘에 차지 않았지만 무엇보다 이공계에는 가고픈 과가 없었다.

    “재수했어요. 학원 왔다갔다하다 불쑥 PD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죠. 멋있어 보였어요. 못 감은 머리, 핏발선 눈, 까칠한 수염에 마이크 들고 호령하는 모습. 남자답잖아요. 글쎄요, 막연하지만 책상머리 붙잡고 앉아있는 직업은 제몫이 아니다 싶었어요.”

    신문방송학과에 가야겠다 생각중인데 누군가가 “거기 가면 책만 파야 된다, 정말 연출가가 되고 싶으면 연극영화과에 가라”고 조언을 해줬다. 맞는 말이다 싶어 덜컥 실기점수 비중이 가장 낮은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에 원서를 냈다. 눈치 보고 말고 할 것도 없어 원서 받는 첫날 여섯번째로 쑥 밀어넣고 털레털레 집으로 돌아왔다.

    “연영과 가겠습니다, 했더니 고3 때 담임선생님께서 기막혀 말씀을 못하세요. 너처럼 숫기 없고 뻣뻣한 놈이 무슨 연영과냐고. 부모님한테는 아예 말씀을 안 드렸어요. 나름대로 교육열이 높은 분들이신데 그러면 될 일도 안되겠다 싶었지요.”

    아닌게 아니라 평생 공무원 생활을 한 그의 아버지는 엄하고 고지식한 어른이다. 지금껏 아버지 앞에서 다리 한번 편히 뻗어본 적 없다고 한다. 그렇게 좋아하는 담배도 본가에 가면 피우지 않는다. 불편하면 조용히 일어나 옆방에 가서 낮잠을 잔다. 엄격한 아버지, 대범한 어머니는 그에게 어른 공경하는 마음과, 바른 존대어 구사법과, 지각 한번 않는 성실성과, 대찬 성격을 물려주었다.

    얘기가 이쯤 가자 운동장 스탠드에 땅거미가 짙게 깔리기 시작한다. 몰려드는 모기를 훠이훠이 쫓으며 자동차과 실습장 안으로 들어선다. 마음의 나사가 완전히 풀린 설경구는 어느새 유쾌한 남자가 되어 있다. 스물넷, 아니 열아홉 살 언저리 어디쯤의 청신함이다. 어린애 같은 미소에 괜히 손 한번 잡아주고 싶어진다. 무장해제당한 건 이쪽인가 보다.

    다시 16년 전. 대학별 경쟁률이 발표될 즈음 그가 연영과에 지원했다는 사실을 안 집안에서는 ‘난리’가 났다. 그는 조용히 제 방으로 들어가 문 꾹 닫고 버티는 것으로 환란을 이겨냈다. 무턱대고 원서는 냈는데 실기시험이 만만치 않았다. 연기 시험은 정말 자신이 없었다.

    냉정과 열정 사이, 深淵이 있다

    설경구에게 영화'박하사탕'은 '운명'이었다. 주인공 '김영호'가 자살 직전 절규하는 모습.

    “해본 적이 있어야죠. 소극장 무대에 올라섰는데 꼭 구름 위를 걷는 것 같고, 제가 듣기에도 목소리가 막 떨리는 거예요. 딱 세 음절 말했는데 어디 앉았는지 보이지도 않는 심사위원이 그만 들어가래요. 떨어졌다 싶었죠.”

    혹시나 싶어 서울신문사에 전화를 걸었다. 학력고사 몇 점, 무슨 대학 무슨 과 하니 의외로 “축하합니다” 하는 답이 돌아왔다. 너무 좋아 입이 절로 벌어졌다.

    “그런데 부모님께선 전혀 기뻐하지 않으셨어요. 어머니께서는 그후로도 한참 동안 누가 ‘경구 대학 어디 갔냐’ 물으면 ‘한양대 국문과 갔다’고 하셨어요. 창피했던 거죠.”

    우여곡절 끝에 입학한 대학은 생각만큼 멋들어지지 않았다.

    “기대에 절대 못미쳤죠. 작품 하나 하려면 개인 돈이 200만원씩 들었거든요. 창고 같은 극장도 그렇고…. 어쨌거나 선배들이 작품 올린다고 1학년생은 무조건 오디션 보라 그래서 엉겁결에 무대에 섰어요. 1학년 중 2명이 ‘간택’됐는데 한 명이 뮤지컬 스타가 된 전수경, 또 한 사람이 저였어요. 둘 다 역도 되게 컸어요. 전수경은 동네아낙3, 저는 동네아저씨, 하하. 2학년생인 개그우먼 박미선씨가 동네아낙2였고 한지승 감독이 경찰역을 맡았죠.”

    처음 해본 연극 공연은 의외로 재미있었다. 선배들과 동고동락하며 치열하게 작업하는 분위기가 너무 좋았다. 1주일 공연 끝나고 무대를 뜯어내는데 저도 몰래 눈물이 났다.



    설경구는 ‘눈물의 왕자’다. TV 다큐멘터리 보다 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책 보면서도 잘 운다.

    “지난해 일본 NHK 드라마에 출연했거든요. 거기 호텔에서 ‘가시고기’라는 소설을 읽었어요. 와, 눈물이 주체가 안돼. 진짜 쌈마인데, 알긴 알겠는데, 책장에 눈물이 후두둑 후두둑 떨어지는 거예요. ‘국화꽃 향기’ 보면서도 그렇게 울었고. TV 프로그램도 ‘병원 24시’ 같은 건 직빵이에요.”

    최근 몇 년간 그가 가장 많이 운 건 영화 ‘박하사탕’을 봤을 때다. 스크린에 비치는 제 얼굴이 지금도 쑥스러운 그는 웬만해선 출연 영화를 보지 않는다. 특히 ‘박하사탕’은 너무 부대끼며 찍어서인지 더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1999년, ‘박하사탕’이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됐을 때다. 외신기자단 특별상영이 있으니 끝날 때쯤 극장으로 오란 얘기를 들었다. 영화 시작 1시간 30분쯤 지났을까. ‘손님’이 몇 명이나 들었나 보러 슬쩍 커튼을 들췄다 그만 보고 말았다. 광주 장면이었다.

    “모르겠어요. 그냥 막 눈물이 나더라고요. 아주 맘먹은 사람처럼 엉엉 울었어요.”

    그는 네티즌들이 올린, ‘박하사탕’이나 ‘오아시스’를 보고 울었다는 글만 봐도 운다. 연극배우 시절에도 객석에서 누군가 “흑-” 소리만 내면 울컥 눈물이 솟았다. 설경구는 그런 상황을 “관객 것을 배우가 뺏어먹는 거”라고 표현한다. 해파리 같은 감수성이다.

    한편으론 남들 다 우는 일도 자기 감정선에 닿지 않으면 표정 하나 바뀌지 않는다. 그래서 냉정하다, 심지어는 냉혹하다는 평을 듣기도 한다. 그렇게 두 얼굴인 것, 냉정이면서 열정이고, 눈물이면서 강철이고, 흰눈이면서 뺑끼통이고, 미풍이면서 식칼인 그 사이 어딘가에 설경구가 있다. 우리 시대의 얼굴이 있다.

    1학년. 첫 연극이 끝난 뒤 연출을 맡았던 선배로부터 편지가 왔다. “무대에 있는 네 모습이 참 보기 좋더라”는 것이었다. 2학년이면 전공을 결정해야 할 상황. PD가 되겠다고 연영과에 들어오긴 했지만 마음 가는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연극 인생의 시작이었다.

    대학에 들어오면서 그의 생활에는 ‘코페르니쿠스적 전이’가 일어났다. 사흘, 나흘씩 집에 들어가지 않는 건 보통이었다. 술도 엄청나게 먹고 담배도 막 피워댔다. 고등학교 때 못 논 게 억울해 더 파괴적으로 살았다. 그래도 연영과 학생입네 티내고 다니지는 않았다. 머리는 늘 단정했고 친한 친구 중에는 이른바 운동권도 여럿 있었다. 소극장에만 처박혀 사는 그인데도 ‘권’ 친구들과는 희한하게 죽이 맞았다.

    “2학년 1학기 때 휴학했어요. ‘내가 무슨 생각으로 연극을 하나’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재미로 하면 안될 것 같았어요. 확신이 없었던 거죠.”

    거짓인 것, 진짜가 아닌 것은 못 참아내는 성격인 그에게 확신 없는 열정이란 재앙이었다. 이유를 발견하고 사람살이의 치열함에 눈뜰 시간이 필요했다.

    “1년 동안 노가다를 뛰었어요. 인터콘티넨탈 호텔, 미아리에 있는 한 소극장, 연립주택 공사현장 같은 데서 일했어요. 그리고 군대에 갔는데 당연히 문선대였죠. 군대생활, 웃겼어요.”

    총을 다루지 않는 만큼 오히려 군기가 센 곳이 문선대다. 그래도 담 훌쩍 넘어 개구리 잡아 구워 먹고, 인근 민가 장독 구멍 파주고 밥 얻어먹고, 그렇게 할 짓은 다하며 살았다.

    “군대요? 진짜 싫었어요. 나를 따르라, 그런 거 무지하게 싫어하거든요. 제가 왕고(병장 말년)가 된 다음부턴 제 마음대로 끌고 갔어요. ‘X 까, 다 담배 펴.’ 내무반 내에선 고참 두 명만 담배를 필 수 있었는데 무조건 다 피게 했어요. 길들임이란 무서운 거여서 그런데도 누구 하나 들어와 피질 않아요. ‘야, 안 들어와, 이 XX놈들, 앉어, 펴.’그렇게 막 난리를 쳤어요. 나중에는 완전히 너구리굴이 되데요. 좋았죠. 라면도 고참순 아니라 선착순으로 먹게 했어요. 병장만 입는 ‘컬러 팬티’를 이등병한테도 입히고 집합도 딱 한번밖에 안 걸었죠. 개판이었어요. 썩 괜찮았죠.”

    제대 후 6~7개월 쉬다 복학을 하고 보니 아는 얼굴이 없었다. 다행히 좀 있다 군대 갔던 1년 후배들이 복학하면서 ‘분위기’가 살기 시작했다. 후배들은 벌써부터 설경구를 알고 있었다. 선배들이 “그 자식 복학하면 니들 다 죽었다”고 잔뜩 겁을 줘놓은 때문이었다.

    ‘악명’ 그대로 설경구는 후배들을 이끌었다. 하이타이로 소극장 바닥 청소시키고 연극 연습도 독하게 했다. 4학년 때인 1993년 5월에는 전국 연영과 학생들이 실력을 뽐내는 제1회 ‘젊은 연극제’ 출품작 ‘달아 달아 밝은 달아’의 연출을 맡았다.

    “좋아서 한 게 아니고 교수님들 강권에 밀렸어요. 그때 KBS 공채 탤런트 3차 시험을 앞두고 있었는데, 그냥 무조건 하라는 거예요. 할 수 없이 탤런트 시험을 포기했지요. 86학번은 저 하나고 87학번이 5명, 나머지 30여 명은 그 아래 후배들이었어요. 애들은 놔두고 87학번만 조졌지요. 첫날 87학번 한 놈이 늦었길래 몽땅 운동장 500바퀴를 돌게 했어요. 전 미동도 없이 스탠드에 턱 괴고 앉아 몇 바퀴째 뛰는지를 정확히 헤아렸지요. 너무 독하고 무서워 보였대요. 어쨌거나 안하면 안했지 일단 시작한 거 다른 학교에 질 수는 없으니까. 다행히 결과가 괜찮았어요.”

    아르바이트로 덕성여대 약대 연극반 연출을 맡아 하기도 했다. 입시철이면 “연기 좀 가르쳐 달라”는 요청이 들어오곤 했는데 그때마다 “난 가르쳐서는 돈 안 번다”며 점잖게 거절했다. “사실은 그럴만한 능력이 못됐거든요.”

    대학교 4학년 때는 ‘올(all) A’ 학점으로 전액장학금을 받았다. 매 학기 2.0 간신히 넘는 학점을 유지해온 그였다. 마지막 학기를 앞두고는 140만원이나 하는 등록금이 못 견디게 아까웠다. ‘초치기’에 돌입, 단번에 과수석으로 올라섰다.

    졸업 전 교수들로부터 연극원에 가거나 대학원에 진학하라는 권유를 많이 받았다. 연출을 한번 해보라는 거였다. “그랬어요. ‘저 공부 안해요.’”

    그는 연극으로 돈을 벌고 싶었다. 부모님, 일가친척들에게 연극으로도 먹고 살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렇게 했다.

    “4학년 2학기 때 한양대 연영과 출신들로 구성된 극단 ‘한양레퍼토리’ 단원이 됐어요. 첫달 월급이 50만원이었죠. 그 정도면 아주 양호한 거였어요. 다음해 2월 대학 졸업하면서 극단을 그만뒀죠. 프리 선언을 한 거예요. 하하, 프리는 무슨-, 찾는 사람도 없는데…. 어디 묶이는 게 싫었고, 무엇보다 교수님부터 애들까지 학교 때랑 똑같은 게 갑갑했어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거든요. 뭐 아웃사이더 기질이 발동한 거죠. 저 원래 성격파탄자거든요. 어떤 순간이 되면 내 속의 나를 파괴시켜버려요. 복잡다단하달까. 뭐, 인간이 다 그렇죠.”

    한양레퍼토리 초창기, 배우들은 ‘삐끼’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대학로 지나는 사람들 소맷부리를 붙잡고 매표소까지 동행해 기어코 표를 팔곤 했다. 배우 이정섭씨와 게이 역에 더블 캐스팅이 됐던 연극 ‘심바새메(심야에는 바바라와 새벽에는 메리와)’ 때는 제 공연이 없는 날마다 오후 7시40분이 되도록 리어카에 표 좌판을 벌여놓고 ‘장사’를 했다.

    “진짜, 엄청 추웠어요. 게이 역은 안 해도 매일 사진기자 역으로 잠깐씩 무대에서야 했거든요. 리어카 부리나케 갖다놓고 옷 갈아입고 무대 나가 셔터 누르고…. 사실 기분 드러웠죠. 나도 배운데.”

    얘기가 이쯤 나갔는데 현장에서 또 부른다. 밤 촬영 시작이다. 그는 자리를 털고 일어서며 “여기서부터가 정말 재미있다”고 기대감을 부추긴다. 영화 ‘박하사탕’과의 운명적 만남을 말할 때가 됐음이다.

    촬영현장은 무리 지어 날아다니는 모기떼로 어지럽다. 현장에 설치된 블루 스크린에는 족히 수천 마리는 돼 보이는 모기들이 도배하듯 내려앉아 있다. 짜증이 날 법도 한데 그저 무덤덤한 얼굴이다. “이젠 별로 안 물어요. 친해졌으니까.”

    그가 등장하는 장면을 찍고 난 후 다시 얼굴을 마주한다. 손가락 사이에선 계속 담배 연기가 피어오른다.

    “술 잘 하세요?”

    “그냥 좀 마시죠. 소주에 삼겹살이 딱이에요. 폭탄주는… 한 열다섯 잔? 사람들이 좋아 마셔요.”

    그의 단골 술친구는 배우 최민식, 송강호, 김석훈 등이다. 이창동 감독, 강우석 감독과도 간혹 마신다. 기자들과도 마시고 스태프들과도 잔을 기울인다. 워낙 인터뷰하길 싫어하는 그는 새 영화 나와 기자들이 귀찮게 굴라치면 이렇게 말한단다.

    “알아서 써줘요. 왜 있잖아, 소름 끼치는 연기-.”

    1994년 5월 ‘학전’의 김민기 대표를 만났다. 한양레퍼토리 월급 50만원으로는 부모님께 낯이 안 서 ‘학전’의 포스터 붙이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던 때였다.

    “‘지하철 1호선’ 주인공을 맡았어요. 거기 80개의 배역이 등장하는데 그 중 스무 개는 족히 섭렵했죠. 신났고 재미있었고 많이 배웠어요. 매달 고정급에 성과급까지 받았는데 그게 처음에는 100만원, 3년 후 ‘모스키토’란 연극을 할 때쯤엔 200만원까지 올라갔어요. 김민기 대표보다 제가 돈을 더 가져갔을 걸요. 연극판에서 그 정도면 억대연봉이에요. “

    대학로 무대에 서는 한편 TV 드라마에도 얼굴을 내밀었다. ‘큰언니’라는 아침 드라마였다. 제법 비중 있는 역이라 매달 300만원쯤이 꼬박꼬박 들어왔다. 무엇보다 어머니가 기뻐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더이상 일거리가 없었다. 얼굴이 너무 평범하다고 했다. 외꺼풀 눈이 원망스러워 눈두덩에 풀 발라 가짜 쌍꺼풀을 만들기도 했다. 연극판에서는 1인 14역도 너끈히 소화해내는 스타였지만 TV, 영화판에선 개성 없고 밋밋한 얼굴의 ‘지망생’에 불과했다.

    “1995년 첫 영화에 출연했어요. 장선우 감독의 ‘꽃잎’이요. 미치광이 소녀를 찾아 헤매는 운동권 청년들 중 하나였죠. 내레이션도 맡았고요. 재미없었어요. 그냥 돈 때문에 했죠. 카메라고 앵글이고 모르니 연기도 별 볼 일 없었어요. 지금도 그 영화가 내 데뷔작이란 생각은 안 들어요.”

    그럼에도 ‘꽃잎’은 그에게 중요한 영화였다. 일 파한 후 가진 술자리에서 지금은 작고한 유영길 촬영감독이 이런 말을 했다. “경구야, 나 너 같은 얼굴 참 좋아해.” 큰 힘이 됐고 두고두고 고마웠다.

    1996년 결혼했다. 연극하는 친구의 여동생이었다. 첫눈에 반해 ‘겁나게’ 밀어붙여 20일 만에 양가의 결혼 승낙을 받아냈다. 오빠를 통해 연극인의 삶이 어떤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신부감은 “아침밥 안 해줘도 되니 좋다”며 선뜻 청혼에 응했다.

    “연애라는 거 자체를 많이 해보지 않았어요. 군대 가기 전 한 번, 복학하고 나서 한 번. 사랑은… 좋은 거예요. 판타지고 절정이고. 짝사랑도 괜찮아요. 활력의 원천이죠. 그렇게 누군가를 향해 애 타는 맘이 없다면 인생은 한참 더 재미없을 거예요. 사실 이렇게 말하는 저도 여자 사귀는 데는 별 재주가 없지만.”

    그에게는 여섯 살배기 딸이 있다. “어떤 아버지냐”고 물으니 “무심하죠 뭐” 한다. 아이한테 미안할 때가 많지만 한편으론 그것도 그 녀석이 헤쳐나가야 할 삶의 조건이라 생각한다. 누군가 말하지 않았나. 상처받지 않는 어린 시절이란 없다고.

    “연기할 때 상대 여배우가 너무 매력적이면 어떻게 해요?”

    “처음부터 마음에 장막을 치는 거죠. 불필요한 감정이 생기면 영화고 뭐고 다 망치니까. 사실 여자로 보이지도 않아요. 같이 고생하는 동료잖아요.”

    1998년, 영화 쪽으로 드디어 돌파구가 생겼다. 사실 그 전에도 기회가 아주 없었던 건 아니었다. 홍상수 감독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의 주인공으로 캐스팅될 뻔했다. 홍감독이랑 여자 주인공이랑 술 한잔을 했는데 다음날 홍감독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미안해요, 경구씨. 그 역 맡기에 경구씨는 너무 착해요.” 아내에게 미안해 한참동안 집앞 놀이터를 맴돌았다.

    새 돌파구는 영화 ‘처녀들의 저녁식사’였다. 주인공 네 명 중 하나인 진희경과 하룻밤 사랑을 나누는 만화가 역이었다. 몇 장면 나오지도 않았는데 반응이 괜찮았다. 여기저기서 “그 배우 누구냐”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참 이야기에 물이 오르는데 누군가의 화난 음성이 터져나온다. 앰뷸런스가 교도소 담장을 들이받는 장면을 찍는데 쉽지 않은가보다. 미술, 스턴트, 감독, 촬영 할 것 없이 잔뜩 예민해져 있다. 결국 새벽 서너 시까지 계속될 예정이던 촬영은 자정쯤 끝이 난다. 잘 된 일이다. 그와 술집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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