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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어찌 국가원수와 맞담배를 하느냐”

  • 이만섭·전 국회의장

“네가 어찌 국가원수와 맞담배를 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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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아차 싶었지만, 엎질러진 물이었다. 나는 아버지께 정중하게 사과를 올렸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감히 고개를 들 수가 없다.

나는 아버지에 대해 죄스러운 마음과 함께 마음속 깊이 존경심도 갖고 있다. 아버지께선 특별한 학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서당에서 한학만 공부하신 분이지만 평소 생활이 깨끗하고 바른 분이셨다.

아버지께서는 한평생 나에게 ‘정직하라’ ‘겸손하라’고 가르치셨다.

당신께서 살아온 길을 생각하면 내가 8선 의원에다 국회의장까지 지냈다고는 하나 아버님에 비할 바가 못된다.

아버지께서는 평범한 가운데서도 민족의식과 애국심이 강한 분이셨다. 본래 합천 출신으로 결혼 후 대구에 정착했는데, 1932년 내가 태어날 땐 정미소를 경영하고 있었기에 우리 집은 비교적 부유한 생활을 했다.



당시 대구시내에서 정미소를 경영하던 사람을 조합원으로 하는 양곡조합 이사장은 동암(東菴) 서상일(徐相日) 선생이 맡고 있었는데, 동암 선생의 사무실이 대구시내 달성공원 앞 조양(朝陽)회관에 있었다.

동암 선생은 1910년대에 광복단(光復團)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펼쳤는데 가끔 우리 집에 들러 아버지와 뭔가 밀담을 나누곤 하여 나는 무슨 일인가 몹시 궁금했다. 그 의문은 해방이 되자 곧 풀렸다.

해방 후 아버지께서 들려주신 바에 의하면 동암 선생은 일제시대에 믿을 수 있는 사람들로부터 비밀리에 독립운동자금을 거출하여 상해 임시정부로 보냈는데 아버지께서도 동암 선생을 만날 때마다 많은 돈은 아니지만 독립운동자금을 드렸다는 것이었다. 내가 민족학교인 대륜중학교에 들어간 것도 아버지의 권유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독립운동과 신앙심

아버지께서는 신앙심 또한 매우 깊었다. 대구 서문교회(당시 목사 李聖獻)의 집사로 계셨는데 1964년 돌아가시는 날 아버지께서는 “나는 오늘 밤 12시에 하느님 곁으로 간다”고 말씀하시고는 정말로 그날 밤 12시 정각에 두 손 모아 합장기도를 하신 채 조용히 눈을 감으셨다.

아버지께서는 돌아가시면서 “내 전재산인 저금통장이 서랍 안에 있으니 그대로 교회에 갖다바쳐라”는 말씀을 남기셨으니 참으로 신앙심이 깊으신 분이셨다. 아버지께서는 돌아가시는 그 순간까지도 내 걱정을 하셔 내 집사람에게 “네가 꼭 아범을 성공시켜야 한다”는 유언도 남기셨다.

요즘도 부친의 산소에 갈 때면, 난 속으로 ‘제가 불효자식입니다’라고 뉘우치며 눈물을 흘리곤 한다. 자식으로서 걱정만 끼치고 서울 구경 한번 제대로 못시켜 드린 불효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다. 이렇게 아버지께서 환갑도 되기 전에 돌아가셨으나 나의 어머님(朴順今)은 1907년 12월26일 출생하여 1997년 3월10일 90세의 일기로 돌아가셨으니 장수를 하신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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