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1월호

“부자될 욕심에 눈이 멀었댔지요”

조선족 체류자 안정순씨

  • 글: 이계홍 언론인·용인대 겸임교수 khlee1947@hanmail.net

    입력2002-11-05 13: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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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자될 욕심에 눈이 멀었댔지요”
    청계고가도로가 시작되는 서울 종로구 관철동 삼일빌딩 옆 거리. 날이 저물자 인도는 어느새 포장마차 천막들이 점령해 통행이 불편할 정도다. 영업이 시작될 무렵인 밤 9시경 필자가 찾은 한 포장마차에 10개의 탁자가 놓여있고, 한 구석에는 회사원인 듯한 손님 두 명이 앉아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다.

    포장마차 뒤켠에서는 두 여인이 바쁜 손을 놀린다. 침침한 조명 아래서도 능란하게 파전을 다듬고 있는 이가 이 달의 주인공 안정순씨(50). 필자가 안씨에게 다가가자 옆에 서서 안씨를 지켜보고 있던 주인 아주머니는 불안한 눈초리로 필자를 훑어본다. 여인 특유의 경계심일까, 험한 세상을 살며 쌓인 불신일까. 때문에 안정순씨를 따로 불러내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여전히 주인 여자는 불만스런 시선으로 이쪽을 살핀다.

    “포장마차가 불법이어서 (이런저런 이야기 하기가) 불편합니다. 제가 언론에 나가는 것을 주인이 좋아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나라도 들춰지면 사업하기가 곤란하다는 걱정이 있겠지요.”

    분명 조선족이라는 데 경상도 어감이 섞인 한국말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전혀 조선족 같지가 않군요. 언제 한국에 오셨는데 그렇게 말을 잘하십니까. 혹시 경상도 쪽에서 살다 오셨습니까.



    “아니라요. 제 고향 지린(吉林)성 창춘(長春)시 선봉촌은 경상도 사람들이 촌락을 이루고 삽니다. 옌볜(緣邊) 지역은 함경도 사람이 많이 살지만 창춘시는 경상도 출신이 많아서 경상도 말을 쓰지요. 서울에 나온 이후에 한국말을 잘하게 된 것이 아니라 중국에서부터 잘했어요. 다롄에서 한국 사람들을 상대로 민박집을 하면서 근래(요즘 쓰는) 한국말을 많이 익혔댔지요.”

    고향을 휩쓸고 간 ‘한국 태풍’

    안씨를 소개받은 것은 서울 구로동 조선족교회 최황규 목사로부터였다. 최근 조선족 체류자들의 항의시위가 잇따라 무엇이 그들을 분노케 하는지 궁금해진 필자가 마땅한 취재원을 찾는 중에, 최목사에게서 “딱한 처지의 여인이 있다”며 안씨 연락처를 건네 받았다.

    한국 사람에게 속아 재산을 다 날리고, 남편과 이혼하고,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고, 지금은 서울 관철동 한 포장마차집에서 조리사로 일하고 있다는 중년의 조선족 여인. 직함은 그럴 듯해 조리사지만 사실 식모나 다름없다. 남편이던 오미룡씨(52)는 고향인 선봉촌에서 공산당 서기로 일한 엘리트였고, 고래등 같은 기와집에서 살 정도로 부유한 생활을 하던 그녀가 모든 것을 잃고 바다를 건너 싸늘한 도시 한켠에 서게 된 것은 마을을 휩쓸고 간 ‘한국 태풍’ 때문이다.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먼저 그의 서울생활부터 물었다.

    -서울살이에 만족하세요?

    “지금처럼 돈벌이를 해서 빚을 갚았으면 좋갔시오.”

    불편하지만 대략 만족한다는 뜻으로 들린다. 일당은 6만원 가량. 그러나 액수는 기사에 쓰지 말았으면 하는 눈치다. 오후 6시에 출근해 다음날 아침 7시나 8시 퇴근할 때까지 안주를 만드는 노동량이나 강도에 비하면 누가 봐도 비싼 일당이 아니다. 닭똥집부터 멍게에 이르기까지 모든 안주를 도맡아 만들고, 때로 주인이 나오지 않을 때는 대신 장사까지 한다는 설명을 듣고 보면 더욱 그렇다. 대신 손님들로부터 몇천원에서 최고 3만원까지 팁을 받은 적이 있다고 한다. 말하자면 안씨는 포장마차를 통해 팁 문화 같은 자본주의의 단맛을 느껴가고 있는 셈이다.

    -몇천원은 그렇다 쳐도 2만~3만원씩 팁을 주는 사람들은 무슨 뜻일까요.

    “제 신세를 아는 분들이지요. 사는 모양이 안 좋아보이니 동정심에 주는 것이겠지요.”

    종로구 이화동에서 단칸방을 얻어 살고 있는 그는 일터인 관철동까지 걸어 나온다. 30분 이상 걸리지만 교통비를 아끼자는 ‘또순이’ 기질 탓이다. 손님들이 더러 팁을 주고 가는 것은 그의 이런 사정을 알기 때문이다.

    “한국 사람들 씀씀이에 놀랄 때가 있지요. 포장마차에서 10만원어치를 거뜬히 먹고 가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대단히 부자인 줄 알았는데 그중에는 끼니도 제대로 잇지 못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아요. 결국은 빚으로 술을 사먹는 셈이지요.”

    -하루 매상은 어느 정도 되나요.

    “어떤 집은 100만원도 번다고 해요. 보통 60만~70만원 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가게 수입에 관해서도 섣불리 말하기가 쉽지않은 모양이다.

    -길거리에서 장사를 하다 보면 불편한 게 많지요?

    “대신 집세를 안 내고 장사를 하니 그런 고생을 내색해서는 안되지요. 혹간 위생에 문제가 있지 않으냐고 묻는 이들이 있지만 그렇지 않아요. 물을 마음껏 사용할 수 없으니 걱정이 없을 수는 없지만 아직 우리 안주 먹고 배탈난 사람은 없시오.”

    황급히 기우라고 강변하는 안씨. 괜한 질문을 했다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얘기가 우르르 쏟아져 나올 질문을 고르기가 쉽지 않다.

    -어떻게 해서 한국에 나오게 됐는지 말씀해주세요. 안정순씨 역시 불법체류자죠?

    “본의 아니게 그렇게 됐시오.”

    -‘본의 아니게’라는 게 무슨 뜻입니까.

    “빚을 받으러 왔는데 상대방이 이리저리 도망만 다니니 그 사람 쫓아다니다 불법체류가 된 거야요.”

    고향에서는 손꼽히는 부자로 살던 안정순씨가 하루 아침에 찬바람을 맞게 된 사연은 대략 이렇다.

    “남편하고 저는 1993년 겨울 창춘에서 무역업을 한다는 한국인 송씨를 우연히 알게 됐어요. 중국 땅을 밟은 송씨는 영화 촬영사업을 한다면서 비디오로 이곳저곳을 찍어 한국에 상품으로 판다는 말을 했어요. 그런 그가 어느날 우리에게 ‘한국에서 사업을 할 의향이 있느냐’고 물어오더라고요. 아는 것도 많고 세상 돌아가는 풍정(물정)도 꿰고 있는 사람인 듯해서 우리 부부는 매일 그에게 매달리다시피 하며 중국 사업을 도와줬댔지요.”

    1990년대 초반 조선족 동포들에게 한국은 ‘천국’의 동의어나 진배없었다는 게 안씨의 설명이다. 안씨 부부에게 송씨는 ‘천국으로 가는 연줄’ 같았다는 것. 송씨는 “한국에 중국 본토식 식당을 하면 큰돈을 벌 수 있다”면서 개업 수속을 맡아주겠다고 자청했다. 개업자금은 중국 돈으로 약 100만위안(한화 1억5000만원). 한국에 나간 뒤 송씨는 일이 잘 진행되고 있다는 연락을 보내왔다. 서울 송파구에 식당을 차릴 가게를 확보해 가계약을 맺었다는 연락이었다.

    “그런데 1994년 7월에 때마침 창춘시 정부에서 주최한 무역교류 상담회가 서울에서 열렸어요. 향(饗 : 우리의 면과 군의 중간 단위) 정부 령도(지도자)들과 남편이 대표로 한국으로 가게 됐지요. 그때 송씨는 우리 대표들을 잘 인도하고, 특히 남편에게 각별한 신뢰를 보냈어요. 자기 집도 데리고 가고 전라도 무주에 있는 별장과 땅을 보여주면서 ‘나를 믿고 같이 식당을 해보자’고 거듭 확언을 했댔시오.”

    식당을 운영하려면 자신들만으로는 어렵다는 생각에 종업원으로 일할 다른 조선족들의 초청장 수속도 요청했다. 송씨는 쉽게 응했다. 사업이 구체적으로 확대되면서 안씨 부부뿐 아니라 향 정부도 참여하기로 했다. 안씨 부부가 30만위원, 향 정부가 70만위안을 투자한다는 조건이었다.

    “1995년 1월에 송씨가 다시 중국에 왔어요. 이때 향 정부에서 40만위안을 송씨에게 내주었습니다. 60만위안은 종업원 7명의 초청장을 보내주면 내주기로 약정했습니다.”

    서울로 돌아간 송씨는 몇 달이 지나도 초청장을 보내오지 않았다. 대신 그해 7월 연락도 없이 중국에 들어와 “하얼빈에서 가스관을 수입하려는데 도움이 필요하다”며 남편에게 동행을 청했다. 가스관공장측은 계약서를 쓰면서 예약금 6만위안을 요구했다. 송씨는 미처 자금을 준비하지 못했다며 안씨 부부에게 ‘나중에 두 배로 갚는다’는 조건으로 돈을 빌려달라고 했다. 가스관 수입이 늦어지면 그나마 40만위안도 돌려 받지 못할 수 있다는 반협박에 남편은 급전을 얻어 예약금을 대신 내줬다.

    그러나 그걸로 끝이었다. 가스관 수입을 마치고 돌아간 송씨에게서는 더 이상 전화가 오지 않았다.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았다. 도리 없이 남편이 한국으로 건너왔지만 어렵사리 만난 송씨는 양복 몇 벌이 들어있는 보따리만 던져주고는 사라져버렸다.

    빚 독촉에 쫓겨 떠난 고향

    그해 가을 서울에서 종업원으로 일하기 위해 안씨 부부에게 투자했던 사람들이 일이 잘못됐다는 것을 눈치채게 되자 사정은 걷잡을 수 없었다. 돈을 돌려달라고 거칠게 말하는 사람들이 두려워 사정을 잘 모르는 이웃 마을에서 돈을 빌려와 갚았지만 이자는 계속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시간이 지나자 이웃 마을 사람들까지 가세해 집 마당에 몰려와 날이면 날마다 고함을 질러댔다.

    안씨 부부는 상의 끝에 서류상의 채무자인 부인 안씨가 몰래 집에서 도망친 것처럼 꾸미기로 했다. 그 길로 안씨는 랴오닝성 다롄시로 갔다. “부부가 짜고 사기를 친다”며 분노한 채권자들은 남편의 목에 칼을 들이댔다.

    “초등학교 5학년인 막내딸이 놀라서 정신이 이상해졌어요. 아무나 보고 막 욕을 해대고, 눈이 뒤집히는 거예요. 학교에서도 외면당하고, 으름장을 놓는 빚쟁이들한테 놀라고, 결국은 학교도 다니지 못하게 되었지요.”

    가끔 집으로 전화를 걸면 막내딸은 “엄마 언제 오느냐”며 울부짖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견디지 못하고 쓰러졌다. 참혹한 마음에 술과 담배에 의존해 하루하루를 버티던 그녀는 우연히 한국인들을 상대로 하는 민박집에 들어가게 되었다.

    “우연히 만난 한국사람이 송씨 거처를 알려줬어요. 내 손으로라도 송씨를 잡아 돈을 받아내겠다고 마음먹었지요.”

    “부자될 욕심에 눈이 멀었댔지요”

    오후 6시에 시작해 다음날 아침 8시까지 계속되는 포장마차 일. 그나마 일자리가 있는 것만 해도 다행이다.

    안씨가 어렵사리 한국에 나온 것은 지난해 5월. 처지를 딱하게 여긴 사람들의 도움으로 송씨의 거처를 찾아내고 서울지검 동부지청에 고소했다.

    “막상 송씨가 사는 집을 찾아가 보았더니, 원래 못살았는지 사업에 실패했는지 조그마한 주택 지하방에서 살고 있더라고요. 본인은 만나지도 못했어요. 대신 며칠만 참아달라는 연락을 받았지요. 약속한 기일이 지나니 이번에는 ‘다른 급한 일이 생겼다’며 피하는 거예요. 찾아가면 어느새 도망가버리고, 날짜는 하염없이 흘러가고, 그러다 결국 불법 체류자가 됐어요. 아마 내 비자가 만기될 때를 기다리고 있었나봐요. 어떻게 그렇게 야비할 수 있나싶어요.”

    이야기를 하다 보니 감정이 북받쳐오르는 듯 안씨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어쩌면 수많은 중국 동포들이 당한 피해의 한 사례일 뿐이라고 넘길 수도 있다. 혹자는 초기에 사정을 잘 모르고 중국에 건너간 한국 업자들이 조선족 동포에게 속아 당한 피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안씨는 이 일로 남편과 이혼했고, 아이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다시는 중국 하늘 아래 발붙이고 살아가기도 쉽지 않은 신세가 된 것이다.

    -돈도 못 받고 쫓기는 불법체류자 신세라면 서울살이가 만만치 않을 텐데요. 어쩌면 약점을 빌미로 더 큰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지난 6월 구로동 조선족교회를 중심으로 조선족 동포들이 항의시위를 벌였어요. 그 덕분인지 내년 3월12일 전에만 중국에 가면 된다는 도장도 여권에 받아뒀어요. 하지만 이 상태로는 돌아갈 수가 없지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검찰에 낸 탄원서는 다음과 같은 ‘진정사건 처분결과 통지’가 되어 돌아왔다.

    ‘진정번호 2002 진정 제371호. 처분 일자 2002. 9.16. 처분 내용: 이 건 진정 관련 사안은 당청 2001형제 28181호로 수사, 2001. 7.24. 기소중지 처분되었고, 2002. 1.3일로 공소시효가 도과되어 이미 종결된 사안이므로 재수사할 필요성이 없다고 판단되므로 진정인에게 통지하고 공람 종결하였습니다.’

    한 가정을 완전히 망가뜨린 사건을 두고 내린 결정치고는 너무 메마르고 무책임해 보인다. 사회적 약자가 법의 유용성에 회의를 갖는 것은 바로 이런 순간일 것이다. 갑갑한 마음에 엉뚱한 질문을 던져봤다.

    열혈 공산주의자가 자본가로

    -돈을 벌겠다고 욕심 부리지 않고 조용히 살았다면 아무일 없었을 것 아닙니까.

    “남편이 공산당 지역 간부였지만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이해하고 있었시오. 오래 전부터 공산주의는 안 맞다고 말해 왔지요. 일 벌이기 좋아하는 남편이 ‘앞으로는 돈을 벌어야 사람대우를 받는다’고 해서 기회를 잡자고 생각한 거야요.”

    18년 전부터 중국 정부는 국유 전답을 개인에게 분배했다. 말하자면 자본주의 시스템을 적용해 개인이 땅을 분배받아 경작도록 한 것이다. 이때 분배사업을 주도했던 안씨 남편은 겁이 난 농민들이 반납한 땅을 모아 선봉촌 논밭 3분의 1을 차지하게 됐다.

    “국유전답에서 농사를 지어 나라에 바치면 먹고 살 식량을 충분히 배급받으니 모험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농민들이 많았어요. 시키는 대로만 하면 사는 데는 지장이 없다는 거죠. 농토를 거저 줘도 받지 않고 반납한 농토를 남편이 대신 받아 농사를 지었지요. 농기구 관리까지 맡았기 때문에 엄청나게 많은 쌀을 생산할 수 있었지요.”

    농토의 개인불하는 생산량을 엄청나게 늘렸다. 옛날로 치면 매년 대풍작이었다. 국유였을 때는 논 1쌍(1만㎡)에 1만근이 나오던 벼가 불하 이후에는 1만8000근으로 늘었다. 기후가 변한 것도, 비료나 농기구가 개선된 것도 아니었다. 안씨 남편이 자본주의의 매력에 빠져든 것은 이때부터다.

    엄청난 생산량이 쌀값 폭락을 가져와 판로가 막혔지만 부부는 기민하게 적응했다. 농토를 반으로 줄이는 대신 양계장을 차리고 사료공장을 만들자 재산은 자꾸 불어났다. 양계장이 커지면서 닭은 5000마리로 늘어났다. 돈 벌기는 땅 짚고 헤엄치기나 다름없었다. 이 와중에 송씨를 만난 것이었다.

    “송씨가 처음 우리집을 방문하여서는 이렇게 잘사느냐고 놀랄 정도였으니 말 다했지요. 우리는 문화혁명 세대야요. 저도 중학교 때(1966년 무렵) 문화혁명 전사(홍위병)가 되어 이 집 저 집 많이 털러 다녔댔시오. 옛날책을 집에 두고 있는 사람을 끌어내 족치고, ‘지주 부농 타도하자’며 지주 계급들을 잡아 족쳤댔지요. 뭐가 뭔지도 모르고 그렇게 지내다 학교가 폐쇄되고, 젊은 청년들이 길길이 뛰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학교가 폐쇄되었다가 다시 문을 여니 밑에서 올라오는 학생들 때문에 공부한 것도 없이 한 학년 훌쩍 뛰어넘어 복학을 했지요. 그러니 공부는 너나없이 엉터리였댔지요. 이때 남편은 리더로 활약을 했댔시오. 그래서 일찌감치 지역 공산당 간부가 된 것이지요.”

    열혈 공산주의자에서 자본주의자로 변신한 안씨 부부의 이념 스펙트럼과 과격한 사업욕으로 인한 불행에는 중국대륙이 거쳐온 격변의 역사가 고스란히 스며 있었다.

    -다롄(大漣)에서 한국 업자들을 상대로 민박집을 하셨다고 했는데 송씨 같은 사람들이 많던가요.

    “1996년 봄 다롄에 머물 때는 다행히도 좋은 분을 많이 만났어요. 사람 보는 눈이 생겼지요. 한국에 돈이 많은 것처럼 허풍을 떠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사기꾼이고, 묵묵히 일하는 이들은 알고 보면 속이 꽉꽉 찬 분들이었습니다. 따지자면 좋은 사람이 더 많았지만 꼭 이런 이들이 중국 사람이나 조선족에게 사기를 당해요. 한국 사람에게 당한 제게는 이런 것만 보였댔지요. 속고 속이고 참 아수라판이었어요.”

    ‘한몫’을 잡으려고 한국에서 건너간 사업가들이 분주히 누비던 당시 다롄은 숨가쁘게 혼란스런 도시였다. 사업이 잘돼 만족하는 이도 많았지만 사기극을 연출하는 이도 적지 않았다. 안씨가 다롄에서 보고 느낀 한국인들의 실상은 초라했다. 대단해 보이던 한국 사업가들이 중국인들에게 속아 큰돈을 날리고 망연자실해 있는 것을 자주 접했다. 힘겹게 하루하루를 견뎌나가는 모습은 중국이든 한국이든, 조선족이든 한국 사람이든 다를 게 없었다. 쌀을 도정하는 정미기를 수출하려다 현지 주민에게 사기 당한 인천의 어느 무역업자, 중고 포클레인을 수출하려다 결국 물건만 날린 젊은 기업인 등 안씨가 직접 보고 들은 사연만 해도 끝이 없다.

    “포클레인을 날린 분의 사연은 옆에서 보기에도 딱하더라고요. 대구의 김사장이라는 젊은 분이었댔지요. 중국에 중고 포클레인을 팔기로 하고 16대를 다롄에 들여왔는데, 회사 일정 때문에 본국에 잠시 들어간 사이에 동업자가 일부를 몰래 팔아먹고 중간 상인들이나 농민들이 중요한 부속품을 뽑아내 팔아먹었어요. 앉은 자리에서 포클레인 값만 날린 거지요.”

    한국인들에 대해 갖고 있던 안씨의 환상이 부서지게 된 또 하나의 계기는, 사업한답시고 건너와 바람을 피워대는 사업가들 때문에 눈물 흘리는 중국 여성들을 여럿 만난 것이다. 그 와중에 안씨는 잠시 남의 아이를 맡아 기른 적도 있었다.

    “김씨라는 한국사람이 민박집 방을 하나 빌리더니 술집에 나가는 스무살짜리 처자하고 동거하더군요. 자식이 없어 씨를 얻으려고 한다는 거지요. 묘족의 젊은 색시는 얼마 후 달덩이처럼 예쁜 딸애를 순산했어요. 그런데 한국 남자는 귀국한 뒤 연락을 딱 끊었어요. 본성이 나빠 보이는 사람은 아니었는데 사업이 잘 안돼서 그랬던 것 같아요.

    스무 살짜리 엄마가 혼자 남아서 아이를 키우려니 제대로 될 리가 없지요. 밤에는 일을 나가야 하니까 건사할 수가 없는 거예요. 견디다 못한 여자가 아이를 팔아먹겠다고 한국에 연락을 하니까 김씨가 부랴부랴 다롄에 왔어요. 그러더니 나한테 ‘보육비로 월 200위안(한화 30만원)을 줄 테니 맡아 키워달라’고 부탁을 해요. 맡아 키우다 보니 나중에는 친엄마한테 잘 안갈 정도로 정이 듬뿍 들었지요.”

    그러나 보내준다던 보육비는 1년이 다 되도록 소식이 없었다. 안씨는 결국 보육비 한푼 받지 못한 채 친엄마에게 아이를 보냈다. 이미 남자와는 연락이 끊어진 애 엄마에게서는 보육비가 나올 리 만무해 보였다.

    “한국에 나와서 김씨가 산다는 의정부를 찾아갔어요. 가서 보니 슈퍼마켓을 하고 있는데 부인이 가게를 지키고 남자는 나타나지 않더라고요.”

    보육비를 안주는 김씨를 상대로 법원에 소액재판을 청구해 이겼지만 한동안 돈을 받지 못했다. 강제집행에 들어가 가재도구에 압류 처분이 내려지고 나서야 겨우 일부를 받았지만 나머지를 언제 받을지는 기약이 없다.

    -중국에 현지처를 둔 한국 남자가 많습니까.

    “옛날에는 부지기수였지요. 결혼해서 한국에 나온 여성들도 있지만 한국 남자에게 속아 살다가 버림받은 여자가 많아요. 대개 그런 남자들은 허풍선이가 많지요. 돈을 잘 번다며 물쓰듯하는 사람들 말이에요.”

    다롄은 위험한 도시였다. 안씨처럼 평범한 사람도 마약거래 같은 대형범죄를 주변에서 자주 목격할 수 있었다. 민박집에서 누나·동생 사이로 지내던 김씨라는 사람이 마약거래로 체포되는 것도 목격했다. 하마터면 그녀 자신도 의심을 받을 뻔한 사건이었다.

    “하루는 배 타고 웨이하이(威海)로 나간 김씨가 ‘지금 다롄으로 들어가니 부두로 나오라’고 연락을 해 왔더라고요. 나가 기다리고 있자니까 배는 왔는데 그 사람은 안 왔어요. 대신 공안이 배를 덮쳐 김씨와 접선하기로 했다는 옌볜 사람을 붙들어갔어요. 김씨에게 건네줄 마약을 2kg이나 갖고 있었던 거예요. 김씨는 낌새를 채고 배를 안탄 거죠.”

    그러나 결국 김씨는 체포됐고, 접선하려던 옌볜 사람은 사형당했다. 김씨는 지금 랴오닝(遼寧)성 형무소에서 무기징역형을 살고 있다.

    “중국 공안국에서 여러 차례 와서 심문도 하고 뒷조사도 했지만, 나는 그 사람이 마약을 밀매하는 사람인 줄 몰랐기 때문에 무사할 수 있었어요. 나쁜 짓을 한 건 분명하지만, 한 건 하려다 성공 못하고 저런 신세가 되었으니 한편으로는 불쌍하기도 해요.”

    안씨는 그 후에도 이런저런 범죄사건에 연루돼 고초를 겪었다. 빚을 갚겠다는 일념으로 몸부림치다 보니 남들 보기에 떳떳지 못한 일에 개입한 적도 있다. 그러나 사정은 어느것 하나 달라지지 않았다. 창춘 집으로 돌아갈 수 없던 그녀는 지난해 5월 한국에 입국해 그녀와 남편을 속인 송씨를 찾아 헤맸지만 비자 만기가 돼 귀국해야 했다. 용케도 그녀 거처를 알아낸 채권자들의 험한 욕설에 시달리다 못해 ‘이번에는 반드시 송씨를 찾아 사생결단을 내리라’ 결심하고 다시 한국땅을 밟은 것이 지난해 9월이다. 3개월짜리 비자는 이미 올해 초 만기가 됐지만 맨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다롄에서 알게 된 한국인들의 집을 전전하던 그녀가 처음 잡은 일자리는 월급 70만원짜리 청소일용직. 이 돈을 모아 동대문구 회기역 주변에 보증금 100만원 월세 10만원짜리 지하방을 얻었다. 그나마 사정이 조금 나아져 지금 살고 있는 집은 보증금 300만원에 월세 13만원이다. 얼마 전부터는 스무 살이 된 막내딸이 함께 지내고 있다. 막내딸은 엄마가 인터뷰하는 것도 못내 싫어했던 모양이다.

    -한국에 왔을 때의 인상은 어떻던가요.

    “처음에는 한국이나 한국 사람들을 우러러 보았댔시오. 잘사는 나라, 돈많은 나라라서 한국 사람 사귀면 금방 부자가 될 것 같았시오. 그런데 입국 때부터 우리를 사람 취급도 않더군요.”

    인천항에 입항하자 조선족만 한쪽으로 모아 가두다시피 했다. 세관원의 말투 하나, 행동 하나가 견디기 힘들었다. 동포 대우까지는 바라지도 않지만 최소한 사람 대우는 해줘야 할 것 아닌가. 마치 짐승 몰듯 하는 그들을 보고 한국에 대한 기대는 산산이 무너져내렸다. 대신 ‘아무리 모국이라고 떠들어대지만 중국보다 못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렇지만 오래 생활하다 보니 사람은 다 천차만별이더구만요. ‘한국 사람, 서울 사람들은 이렇다’고 잘라 말하는 게 우습더란 말입니다. 포장마차에서 보면 사람들은 다 제각각이에요. 나쁜 사람, 좋은 사람, 허풍선이, 진실한 사람이 모두 함께 어울리는 건 중국이나 한국이나 다를 리가 없지요.

    그래도 속삭이듯 말하는 서울말씨는 정말 정감이 묻어나지요. 지금은 한국 땅을 처음 밟았을 때보다는 느낌이 많이 좋아졌어요. 나는 문화혁명 세대여서 공부를 제대로 못했지만 서울은 조그만 아이들도 지식이 대단하더라고요. 생각을 많이 바꾸게 됐어요.”

    -혹 팁을 많이 받아서 생각이 바뀐 것은 아닌가요.

    장난삼아 던진 질문을 그녀가 화들짝 놀라며 받는다.

    “팁을 매일 받는 것도 아니야요. 어쩌다 한번씩 받는 거라요. 며칠 전에는 3만5000원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김치 맛이 좋다며 나중에 김치를 담가달라고 하더만요.”

    서울에서 그녀가 가장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외국어로 된 간판들이다. 그중 5분의 4는 이해할 수 없다는 것. 필자가 “다른 한국인들도 비슷할 것”이라고 했더니 “왜 그런 어려운 말로 선량한 사람을 골탕 먹이냐”고 역정을 낸다.

    안씨는 하루 세 끼를 모두 포장마차에서 해결한다. 일을 시작한 후로 단 하루도 결근한 적이 없다. 일요일이든 국경일이든 그녀는 언제나 포장마차 안에 있다. 남들이 출근하는 아침 8시에 집에 가면 오후 4시까지 잠을 잔다. 그리고는 저녁 6시에 출근해 다시 도마질을 시작하는 것이다. “내가 만드는 중국식 계란찜을 손님들이 잘 먹어 특별요리로 서비스하고 있다”고 말하는 안씨의 표정에 흐뭇함이 어린다.

    -술 먹고 행패부리는 사람은 없습니까.

    “왜 없갔시오. 피 터지게 싸우다 잡혀가는 취객도 있고, 술이 취해 토하면서도 끌어안고 키스하는 젊은이들도 있고, 별 사건이 다 벌어지지요.”

    -창춘시도 큰 도시인데, 중국과 한국 청년들에 차이가 있다면 어떤 것이 있습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한국 아이들은 ‘발랑 까진’ 것 같고, 조선족 아이들은 아직도 순진해요. 조선족 젊은이는 표현에 소극적인데, 한국 아이들은 속엣말을 참지 못하는 것 같아요. 대신 한국 아이들의 좋은 점은 술값이 잘못되었어도 절대로 시비를 걸지 않는 점이지요.”

    최근 몇 달 사이 안씨는 조선족 취업자와 불법 입국자의 신변보호를 위해 구로동 조선족교회에서 주관하는 행사에 열심히 나가고 있다. 그것이 유일한 사회 활동이고 여가 활용인 셈이다. 이유는 단 하나, 바로 자신의 일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중국에서는 상상치도 못했던 종교도 갖게 됐다. 최황규 목사를 비롯한 많은 사람이 조선족 동포들을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보고 여러모로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중국에는 개방 이전엔 종교가 아예 없었댔시오. 사람이 죽어도 100% 화장 해버리기 때문에 귀신도 믿지 않지요. 한국에 나와서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이 교회 십자가였으니 호기심은 있었지만, 가볼 생각은 안 했습니다.

    처음 교회에 간 건 조선족 일 때문이었는데 막상 가보니 가슴이 트이는 것 같더라고요. 한국 정부나 법원 등 그 어느 곳도 우리를 인정해주지 않았는데 교회만은 따뜻하게 받아줬으니까요.”

    -교회에서는 어떤 주제로 기도하세요?

    “흩어진 가족이 한데 모여 살기를 기원하지요. 남편은 지금 다른 여자랑 살고 있거든요. 그 생각만 하면 가슴이 답답하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돌아오리라 생각하지요. 그 여자도 내가 다시 돌아오면 양보하겠다고 언약했으니까요.

    막내딸을 위해서도 기도할 것이 많지요. 집이 험한 꼴을 당했을 때 사춘기였고, 옌볜사범학교를 나와 한국회사 현지공장에 취직한 언니와는 달리 그뒤로 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해 가슴이 아파요. 빚쟁이들 등쌀에 가출도 여러 번 했는데 지금은 마음 다잡고 미용학원에 나가 기술을 배우고 싶은 모양이에요. 한국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역시 애들은 적응이 빨라요. PC방에 가서 놀이를 즐기고 워드 작업도 잘하지요.”

    -한국에 정착해 살고 싶습니까.

    “아니오. 중국이 살기가 좋지요. 빚 문제만 해결하면 돌아가야지요.”

    사람을 잘못 사귀어 겪는 고생이지만 결코 그 사람을 원망하지는 않는다고 안씨는 말한다. 욕심이 과했던 죄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는 것. 미움과 분노를 끌어안고 살기엔 타향에서 버텨나가기가 너무 힘든 탓이었을까.

    “빚 갚을 때까지 신경 안 쓰고 일할 수 있게만 해주면 좋갔시오.”

    그것이 안정순씨의 가장 간절한 소망이었다. 나쁜 짓을 하는 것도 아니고, 이 넓은 서울바닥 한 귀퉁이에서 도마질을 해대는 게 무슨 잘못이라고 굳이 쫓아내려 하는지 안씨는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다.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아침이면 왠지 모를 쓸쓸함이 밀려오지만, 빚을 갚는다는 목표를 세워놓고 하루하루 지내다 보니 서울살이도 결코 괴롭기만 한 것은 아니라며 안씨가 애써 웃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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