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7월호

‘보물선’ 돈스코이호 발굴 주역 한국해양연구원 유해수 박사

“암호명 흑장미 … 보드카로 원혼 달래며 5년 사투”

  • 글: 박윤희 자유기고가 gogh1028@hanmail.net

    입력2003-06-24 13: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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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년여의 끈질긴 노력 끝에 돈스코이호 발견에 성공한 한국해양연구원 해저유물팀. 팀의 리더 유해수 박사에게 돈스코이 탐사는 22년 전부터 꿈꾸어온 숙원이었다. 그가 처음으로 털어놓는 지난했던 탐사 과정과 학문적 의의, 150조원 ‘보물’은 정말 있는가.
    ‘보물선’ 돈스코이호 발굴 주역 한국해양연구원 유해수 박사

    돈스코이호 모형을 들고 있는 유해수 박사. 이 모형은 ‘신동아’에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흑장미로 보이는 게 있다!”

    지난 5월20일 울릉도 저동 앞바다 2km지점. 선체확인 탐사중이던 바다 밑 유인잠수정으로부터 이런 소리가 날아든 순간, 태평양호(98t) 위에서 해저지형도를 보고 있던 한국해양연구원 유해수(48, 해저유물·자원연구센터장) 박사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흑장미는 바로 러시아 침몰선 ‘드미트리 돈스코이(Dmitri Donskoi)호’를 지칭하는 암호명.

    “그때 기분이요? 다리가 확 풀리더라고요. 현장연구원들 앞에서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제 표정이 아무래도 이상했나봐요.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연구원들에게만 ‘돈스코이호일 가능성이 높다’고 발표했죠.”

    한국해양연구원은 지난 1999년부터 ‘밀레니엄 2000 프로젝트’란 이름으로, 유해수 박사의 지휘 하에 심해탐사기술개발 및 침몰선 돈스코이호의 발굴·연구를 진행해왔다. 그 결과 지난 5월20일 울릉도 저동 앞바다 약 2km지점 수심 400m에 해당하는 곳에서 돈스코이호로 추정되는 침몰선이 뱃머리를 계곡 쪽으로 둔 채 똑바로 서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침몰선의 선체는 상당히 부식된 상태였지만 심해 해양생물 서식이 적고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라 보존상태는 양호한 편이라고 한다.

    이어 지난 6월3일 ‘밀레니엄 2000 프로젝트’ 발주처인 동아건설산업(사장 김시웅)과 한국해양연구원은 서울 플라자호텔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탐사에 이용된 무인잠수정, 유인잠수정 등의 최첨단 해양탐사장비와 소이탄을 맞아 불탄 흔적의 조타기, 총알 및 파편 흔적이 보이는 단검, 속사포 지지대 등 침몰선 잔해물 현장사진을 공개했다. 이날 공식발표에 쓰인 표현은 ‘돈스코이호 추정 침몰선체’라는 것이었지만 엿새 뒤 한국해양연구원에서 만난 유박사는 돈스코이호 발견을 기정사실화했다.



    “처음 밝히는 거지만 동아건설산업에서 ‘밀레니엄 2000 프로젝트’를 저희 연구원에 위탁한 게 아니에요. 1998년 말 IMF 경제위기의 여파로 국내 분위기가 침체돼 있을 때 ‘타이타닉호’를 연상하고, 우리도 돈스코이호를 찾아 국민에게 새로운 꿈과 희망을 주자는 취지에서 제 손으로 직접 기획한 거지요.”

    해양유물을 연구하는 사람들 사이에 돈스코이호는 하나의 신화로 존재한다. 전사(戰史)기록에 의하면, 돈스코이호는 러시아 발틱함대 소속의 철갑 순양함으로 러·일 전쟁중이던 1905년 5월29일 울릉도 근해에서 침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83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진수된 돈스코이호는 5800t급 수송용 군함으로 배 이름은 몽골을 격파한 러시아 전쟁 영웅의 이름을 딴 것이다.

    러·일 전쟁 당시 38척으로 구성된 발틱함대는 발트해를 떠나 대서양에서 인도양을 거쳐 대한해협에 도착했지만 미리 기다리고 있던 일본 해군의 포격을 맞고 괴멸했다. 이때 돈스코이호에는 군자금을 수송하는 배 ‘나히모프호’에서 옮겨 실은 금괴와 골동품이 가득 실려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 해군이 포위망을 좁혀오자 함장은 돈스코이호를 일본군에 넘기지 않으려고 일부러 배에 구멍을 뚫어 침몰시켜버렸다고 한다.

    소문의 진원이 어딘지는 모르지만 돈스코이호에 실린 금괴와 골동품은 현 시가로 50조∼150조원 규모에 이른다는 말이 오래 전부터 돌았다. 때문에 군함 돈스코이호는 ‘보물선’으로 둔갑, 개봉되지 않은 ‘노다지 신화’로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들뜨게 했다.

    지난 1981년, 유박사는 돈스코이호를 탐사한 경험이 있다. 과학기술원 연구원으로 있으면서 도진실업의 요청을 받아 4개월간 대한해협 지형조사에 나섰던 것. 그러나 해양탐사장비 및 기타 연구장비가 열악해 중도 포기하고 말았다. 이때도 보물선이 화제가 되면서 최소 24조원 상당의 금괴가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1998년, 그때 중단된 사업을 다시 추진해보고 싶어 해양수산부에 건의를 했어요. 하지만 IMF 상황이라 흐지부지 된 채 시간만 흘렀죠. 그런데 어느 날 일본 NHK가 KBS에 ‘100억원을 지원할테니 한국·일본 공동으로 돈스코이호 탐사 다큐멘터리를 제작해보자’는 제안을 해온 것입니다. KBS는 이 사실을 해양수산부에 알렸죠.”

    KBS의 이 같은 제안에 해수부는 부랴부랴 전문가집단을 꾸렸다. 그러나 일본과의 공동작업으로 돈스코이호를 찾았을 경우 이에 고무된 일본이 군국주의 부활을 꾀할 수 있다는 점과 지분 분배로 인한 외교적 마찰을 우려해 국내 독자 발굴 쪽으로 결정을 봤다. 그러나 기획예산처에 제출한 사업추진계획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다시 일이 암초에 부딪혔을 즈음 동아건설산업이 총 사업비 70억원을 지원키로 하고 사업에 뛰어들었다.

    “러시아·일본·미국 등에 가서 러·일 전쟁 기록을 수집했는데, 각 나라 기록자마다 침몰 위치를 다르게 표시해 놓은 거예요. 탐사 범위를 정하기조차 어려웠죠. 타이타닉호는 침몰지점에서 해류에 의해 3km 흘러갔다는 정확한 기록이 있어 탐사가 용이했는데 돈스코이호 찾기는 정말 막막했어요. ‘포기하자’고 말하는 연구원들도 적지 않았어요.”

    해양탐사에는 탐사대원 15명과 온누리호(1440t), 이어도호(359t), 올림픽호(16t), 태평양호(98t) 등 네 척의 배가 투입됐다. 각 배마다 장착된 장비가 조금씩 다른데 가장 비싼 장비가 4억원 남짓한 해저영상탐지기 멀티빔이고 자력기도 한 대에 1억원이 넘는다.

    “주요 탐사과정에서 중천해용 다중빔 음향측심기를 이용해 해저면을 3차원으로 영상화하고 해저지형, 사이드 스캔 소나, 자력 탐사 등의 자료를 정밀 분석해 침몰선 예상지점을 선정했습니다. 이어 심해용 카메라, 무인잠수정, 유인잠수정을 투입해 침몰선의 잔해와 선체 일부를 확인할 수 있었지요.”

    한 전사(戰史) 기록에는 돈스코이호가 수심 200m 지점에 침몰했다고 돼 있는데 실제 돈스코이호로 추정되는 배는 400m 지점에서 발견됐다. 이 지점은 험난한 해저산이 많고 2m 전방도 내다볼 수 없을 만큼 캄캄한 암흑세계라 고가의 탐사장비도 많이 잃어버렸다.

    “미국에서 수입한 100만달러짜리 센서도 분실했어요. 돌출암반에 무인카메라가 부딪혀 고장나기 일쑤였고…. 갑자기 어마어마하게 큰 문어가 나타나 카메라를 끌어안는 바람에 작업을 중단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 전 해역에 걸쳐 침몰된 배는 약 2500척. 음파 조사를 통해 돈스코이호로 추정되는 침몰선의 범위를 좁혀나가는 것이 무엇보다 난제였다. 처음 70개부터 시작해 36개로, 여기서 다시 20개, 10개로 서서히 범위를 좁혀나갔다. 각종 정밀조사를 거쳐 지역당 최종 3∼4개만 남으면 그 때부터 무인카메라, 유인카메라를 투입해 촬영을 시작했다.

    카메라 한 대가 바다 속에 들어갔다 나오는 데 걸리는 시간만도 4∼5시간. 하루 1시간 정도의 심해 촬영을 위해 연구원들은 5시간 이상 바다 위에 떠 있어야 했다. 동해 한복판이니 해수면이 잠잠할 리 없었다. 파도가 엄청나게 심해 밥 먹을 때도 흔들흔들, 잠을 잘 때도 흔들흔들…. 고생이 말이 아니었다. 게다가 배가 해류에 떠밀려 엉뚱한 곳으로 흘러가기 일쑤여서 하루하루가 바다와의 전쟁이었다.

    소액주주들의 ‘엽기적’ 훈수

    “매일 ‘이번에 결과가 없으면 끝내겠다’고 마음먹었죠. 겨울에는 날씨도 안 좋고 또 얼마나 추운지. 여름에는 반대로 너무 더워 죽을 맛이었고요. 폭풍 때문에 피항을 할 때도 문제였어요. 하루 피항하는 데 온누리호가 1200만원, 이어도호가 580만원이 드니까요.”

    누적된 피로와 배멀미로 쓰러진 한 연구원은 1개월 남짓 병원 신세를 지기도 했다.

    “환자를 육지 병원으로 옮겨야 하는데 배들이 안 태워주는 거예요. 배에서 사람이 죽으면 문제가 시끄러워진다는 거였죠. 승강이 끝에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는 각서를 쓴 후에야 환자를 이송할 수 있었습니다.”

    탐사 착수 전, 바다에 보드카와 꽃잎을 뿌리고 전사한 러시아 군인들의 넋을 위로한 덕분일까. 다행히 이렇다할 안전사고나 불미스러운 일은 없었다. 대신 전혀 예상치 못했던 훼방꾼들이 나타났다. 동아건설의 일부 소액주주들이 스토커처럼 따라다니며 ‘시어머니’ 노릇을 톡톡히 한 것이다.

    “유박사님, 지금 어디 있습니까? 에이, 거기 아닙니다! 등대에서 좌측방향으로 배를 옮기세요.”

    유박사가 탐사대원들을 지휘해 한참 현장조사에 몰두하고 있을 시간, 소액주주들은 줄기차게 유박사의 핸드폰을 울려댔다. 그러고는 ‘위치가 잘못됐다’ ‘왜 일 안 하고 놀고 있냐’ 등 갖은 참견을 다 했다.

    “울릉도까지 원정 와 탐사대가 뭘 하는지 망원경으로 매일 감시해요. 제 얼굴 사진도 찍어 소액주주들이 모이는 인터넷 게시판에 올려놓고요. 작업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촬영해 인터넷으로 실시간 동영상 방송까지 했습니다. 어떤 날은 일 끝내고 술집에서 맥주 한 잔 하고 있으면 거기까지 따라와 감시를 해요. 스트레스 많이 받았죠.”

    ‘흑장미’ ‘성인봉’ ‘해당화’…. 보물 발견 여부를 궁금해하는 소액주주들의 감시 탓에, 암호명도 이처럼 매일 다르게 정해 조심조심 수중통신을 주고받아야 했다.

    “침몰선은 일종의 ‘타임캡슐’이에요. 지질학 하는 사람들한테도 귀중한 자료죠. 시간 연대 측정을 통해 100년간의 기후와 환경 변화를 날짜, 시간대별로 다 알 수 있어요. 그야말로 30년 한국해양연구의 꽃이 핀 거죠.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것에는 관심이 없어요. 지금도 일부 소액주주들은 ‘유해수는 사기꾼이다’ ‘가족을 몰살시켜버리겠다’는 등 별별 말을 다 하며 제가 선체 인양을 미룬 채 보물을 뒤로 빼돌리고 있다고 비난합니다. 바다 속 신비를 모르고 하는 소리죠. 선체 인양 작업만 해도 몇 년이 걸릴지 모를 일인데…. 아무튼 저희 연구원들은 국가적으로 획기적인 해양탐사기록을 세우고도 칭찬은커녕 욕만 얻어먹고 있는 꼴이라 보통 허탈한 것이 아닙니다.”

    아닌게아니라 유박사는 몹시 지쳐 있었다. 태평양호에서 돈스코이호 추정체 발견 사실을 확인했을 때도, 샴페인은커녕 환호성을 지르는 연구원조차 없었다 한다. 서로 발견 사실만 확인하고 맥이 풀린 채 침묵을 지켰다. 그만큼 지난한 작업이었던 것이다.

    엄청난 과학적 성과, 왜 무시하나

    유해수 박사는 인터뷰 내내 “보물이 중요한 게 아니다. 100년 가까이 된 침몰선을 찾아낸 우리 해양탐사기술에만 시선을 집중해달라”는 주문을 했다. 그럼에도 일반의 관심은 온통 ‘보물’의 유무에 쏠려 있다.

    솔직히 총 6년의 사업기간과 70억 원의 사업비(현재 27억원 집행)를 상정하고 시작한 프로젝트를 단지 ‘침몰선박에 관한 역사적 자료조사’를 위한 것이었다 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유박사가 이 프로젝트를 기획할 당시 참고했다는 1981년 12월6일자 ‘조선일보’ 기사를 보자.

    ‘울릉도로 파견된 조사팀은 100세가 된다는 할머니로부터 당시의 해전상황을 생생히 들을 수 있었다. 할머니는 러시아 함대가 일본 함대에 쫓겨 울릉도 앞바다에서 침몰되던 때에 13세였으며, 10여 명의 러시아 군인이 울릉도까지 표류해와 주민들이 구조했다는 목격담을 들려주었다. 당시 러시아 군인들은 금화가 가득 들어 있는 주머니를 내보이며 저 배엔 엄청난 금은보화가 실려 있다는 말을 몸짓으로 했었다고 말했다.’

    같은 기사 속에는 150조원 상당의 금괴 이야기도 나온다.

    ‘당시 러시아 해군제독 크로체스 도엔스키 중장이 남긴 기록에 의하면 발틱함대의 회계함이었던 나히모프호 등엔 발틱함대의 군자금 및 일본정벌 후의 평정자금 등 현시가로 150조원어치의 금괴가 실려 있었으며 그 중 상당량 금괴가 나히모프호 침몰 직전 돈스코이호에 옮겨 실렸다고 되어 있다. 더구나 일본 해전사의 기록은 대마도 부근의 첫 해전 이후 유독 돈스코이호는 싸울 생각을 하지 않은 채 피해만 다녔다는 사실을 전해주고 있어 돈스코이호에 막대한 금괴가 실려 있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케 했다.’

    요즘 ‘울릉도 보물선 돈스코이를 찾는 모임’을 표방한 동아건설산업 소액주주들의 인터넷 사이트 ‘돈스코이닷컴(www.donskoiclub.com)’에는 이런 글들이 올라오고 있다.

    ‘서로가 동상이몽. 처음부터 동아건설은 보물에 관심이 있었고, 학자는 학문적 성취에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 SBS 백만불을 보고

    ‘유씨아찌!! 맨날 입으로만 나불대지 말고 다이빙으로 들어가서 금덩이라도 한 개 갖고 나와봐요! 나 울화병으로 죽기 전에…’ -과부댁

    ‘돈스코이호 원형복원. 하루 한번은 봅시다…머지않아 뜰 것 같은데…운영자가 돈스코이호 모형 의장권을 이미 오래 전에 특허청에 등록해놓았으니 주주님들 돈스코이호 뜨면 하나씩 소장하쇼…비싸게 팔테니…^^’ -운영자

    다음은 보물 유무에 관해 주고받은 유박사와의 일문일답이다.

    -이번에 찾은 침몰선에 금괴가 있나.

    “모른다.”

    -많은 전사 기록을 수집했다고 했는데 수집한 자료에 금괴나 골동품에 관한 기록이 있을 것 아닌가.

    “말할 수 없다. 사회적 파장이 걱정된다.”

    -소문대로 돈스코이호에 150조원 규모의 금괴가 실려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금괴의 무게만 최고 1만4000t에 이를 것이다. 어떻게 5800t 군함에 1만4000t의 금괴를 실을 수 있나. 돈스코이호에 보물이 실렸다는 것은 거짓말 아닌가.

    “왜 150조원어치가 모두 금괴라 생각하나. 금괴보다 무게가 덜 나가도 그만한 가치를 지닌 작은 골동품들이 있다고 가정하면 150조원을 예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왜 선체 인양을 서두르지 않나?

    “선체가 발견된 지점은 화산지형의 급격한 경사와 계곡이 발달해 있어 쉽게 접근할 수 없다. 어쨌든 당분간 어렵다. 해저유물에 관한 국제법이나 국내법, 외교적 절차에 대해서도 더 알아보고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한다.”

    -만일 보물이 발견되면 동아건설산업과 한국해양연구원에서 지분을 반씩 나눠 갖기로 했다던데 사실인가?

    “그렇지 않다. 해양연구원은 보물에 관심이 없다.”

    -러시아는 왜 이렇게 조용한가?

    “원래 조용하다.”

    -죽 쒀서 뭐 준다는 속담도 있는데, 만일 보물이 발견될 경우 러시아가 소유권 주장을 하면 어떻게 되나?

    “선체를 인양하지 않고 바다 속에 그냥 묻어버리면 된다.”

    -막대한 사업비를 들였는데 금괴가 아니고 납덩이만 잔뜩 들어 있으면 낭패 보는 것 아닌가?

    “선체가 잘 보존돼 있는 편이니까 수중박물관을 만들면 된다. 보물보다 해양탐사 자체에 의의가 있다.”

    유박사는 시종일관 보물의 존재 여부를 긍정도 부정도 안 하면서 무언가 완급을 조절하는 듯한 애매한 태도를 취했다. 그러면서 넌지시 ‘보드카’이야기를 들려줬다.

    “돈스코이호에는 보드카가 많이 실려 있었다고 해요. 러시아 군인들이 침몰한 돈스코이호에서 보드카를 들고 탈출했다는 기록이 있어요. 100년이 넘는 보드카니까 그 값어치만 해도 상당하겠죠.”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면 득과 실은 누구에게 돌아갈 것인가. 보물의 유무를 떠나 푸른 동해 수심 400m 지점에는 지금 거대한 욕망의 덩어리들이 들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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