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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리 기자의 사람 속으로

대한민국을 불편하게 하는 남자, 진중권

‘과성숙’과 ‘미성숙’의 절묘한 동거

  • 글: 이나리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byeme@donga.com

대한민국을 불편하게 하는 남자, 진중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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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대화를 나누다 보니 재미있는 게 있다. 보통 사람들은 자기 얘기를 할 때, 특히 글 쓰기를 업으로 삼는 경우 나름의 ‘구성’을 하게 마련이다. 묻지 않아도 가장 아팠던 일, 독특한 이력, 강렬한 체험 같은 것들이 말머리로 풀려 나온다. 과거를 자주 곱씹는 류의 사람일수록 더욱 그렇다.

그러나 진중권에게는 그런 게 없다. 묻는 말에 답할 뿐, 시간과 사건들은 같은 상자에 담긴 똑같은 모양의 유리잔처럼 무감(無感)하고 매끄럽다. 그러고 보니 그의 글에 간혹 등장하는 ‘체험’들은 대부분 공적인 것이었다. 사적 영역이라 해도 뭔가 공적인 문제의식을 자극하는 테마들이었다. 왜일까. 그만큼 정제된 인간이란 뜻인가, 아니면 ‘나’와 ‘상황’ 사이에 범부에겐 없는 어떤 미지의 완충막이라도 갖고 있는 건가. 그도 아닐진대 그저 말재주가 없을 뿐인가. 어쨌거나 그의 얼굴에선 친절한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그는 서울대에서 미학을 공부했다.

-왜 하필 미학이었나요.

“이름이 예쁘잖아요. 누나한테 ‘김지하도 미학과 나왔다, 너도 잘 어울릴 거다’ 그런 말도 들었구요.”



-누나들 말을 잘 듣나봐요.

“우리 형제는 그렇게 친하지 않아요. 일년에 한두 번이나 볼까말까. 만나면 괜히 짜증나니까. 그저 그런대로 친한 친구 사이 정도라고나 할까요.”

-입학하자마자 시위부터 했겠군요.

“1학년 겨울방학 때까지는 조용했어요. 친구들이 뭐라 그러면 니체 갖고 딴지 걸구요, 시니컬하게. 그러다 친구 하나가 하도 권해서 ‘공산당선언’이랑 ‘정치경제학 원론’을 봤는데, 아 눈이 확 트이는 느낌이더라구요. 마치 세상을 엑스레이로 찍어 보여주는 것 같았어요. 2학년이 되면서 지하 서클에 들어갔죠. 책 읽고 시위에도 참가했어요.”

-열성적인 편이었나요.

“그 때는… 운동 그 자체보다 지식에 끌렸던 것 같아요. 선배들이 참 똑똑하잖아요. 뭘 물어도 답이 척척 나오고. 저도 그렇게 되고 싶었어요. 영문판 ‘자본론’을 구해다 읽고 그랬죠. 근데 갈수록 고민되데요. 시위하고 감방 가고 현장 들어가고, 그게 어떤 공식 같은 거였는데 전 감방 갈 자신이 없었거든요. 상상도 못 했어요. 얘기 들어보니 주거환경이 상당히 안 좋더라구요(웃음). 제 미래, 그러니까 학문에 대한 꿈, 안락함, 어떤 가능성, 그런 것들을 희생하고 싶지 않았어요. 갈등이 클밖에요.”

-어떻게 해결했죠.

“결국 군대로 도망갔죠. 4학년 때요. 끝나면 현장이 아닌 대학원에 가겠다, 그래서 이론으로 봉사하겠다고 결심했어요.”

-비겁하다는 생각은 안 했어요?

“했죠. 그런데 전 뱅가드(전위·선봉)는 아니었거든요. 그저 선진적 대중, 그 이상은 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 거랑은 별 상관없는 얘기지만, 전 MT 가서도 남들 운동가 부를 때 빌리 조엘 노래 부르고 그랬어요.”

-튀고 싶었나요.

“아뇨, 정말 좋아하는 노래니까.”

-감옥과 현장을 피했다는 것이 어떤 열등 의식으로 자리하고 있진 않나요.

“그런 건 없어요. 회색이었던 친구들이 지구전에는 오히려 강하잖아요. 아주 열심이었던 사람은 확 피었다 가라앉고. 일종의 역할 분담이라 생각해요.”

-대학 때는 뭘 잘했나요.

“어학이요. 대학원 다니면서는 영어, 독어, 불어, 일어, 러시아어를 했어요. 몇 개는 능통한 편이었고 나머지도 읽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죠.”

-군대 생활을 어땠어요?

“마초가 다 됐죠. 욕이 막 나오고. 처음 3일 동안은 아주 죽겠더니 곧 적응이 되더라구요. 거기서 ‘현장’에 대한 자신감도 생겼어요.

군대 가서 인간이 얼마나 드러운가를 알게 됐어요. 김치 쪼가리 갖고 싸우잖아요. 뭐 먹을 거 사면 절대 안 나눠주거든요. 첨 훈련받을 때 전 빵을 사면 옆의 놈한테 꼭 나눠줬는데, 제 돈 다 떨어지고 나니 그 친구는 자기 돈으로 빵 사 먹으면서 나한테 한 번도 안주더라구요(웃음).”

견딜 수 없는 것, 무식·타락·촌티

-그러고 보니 그 때쯤 운동 진영에 NL(민족해방)이니 PD(민중민주)니 하는 갈림이 생겨나기 시작했겠군요.

“복무중 한 여학생을 소개받았는데 김일성 신년사를 들으면서 눈물을 흘렸다는 거예요. 무슨 종교집단도 아니고. 또 막 대학 들어간 동생이 제게 ‘김일성장군항일무투사’라는 책을 내밀며 이제 토론할 때는 형제끼리도 존댓말을 쓰자 하데요. 너나 하라 그랬죠.”

대학 시절 정통 마르크시즘과 독일 고전 철학에 대한 폭넓은 교양을 쌓은 그에게 민족, 품성, 신심을 강조하는 NL의 주장이 먹혀들 리 없었다. 대신 그는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소련식 사회주의, 그러니까 마르크스레닌주의 학습에 몰두했다. PD 라인이 된 것이다.

“교조적이었죠. 일종의 강령이니까요. 하지만 그 때는 그런 게 중요치 않았어요. ‘운동’을 해야 하잖아요.”

그러면서도 ‘우리나라에 사회주의 혁명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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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나리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byem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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