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9월호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만화가 박재동

“질투는 나의 힘, 사람은 나의 꿈”

  • 글: 이나리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byeme@donga.com

    입력2003-08-22 18:2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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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만화가 박재동
    박재동(52)은 손가락이 길다. 곱고 하얀 손가락이다. 그 손으로 종종 머리카락을 쓸어 올린다. 여성적인 몸놀림이다. 앞에 종이가 있으면 가만두질 못한다. 입으로는 말을 하고, 손으로는 그림을 그린다. 말과 함께 가는 그림. 그래서 그는 만화가다.

    만화가인 그는 ‘한 컷’으로 이름을 얻었다. 1988~96년 ‘한겨레신문’에 연재한 그의 만평(漫評)은, 슬픈데 웃기고 통쾌하면서 절절했다. 아침나절 그의 만평을 보지 못하면 꼭 해야 할 일을 거른 것처럼 뱃속 한 쪽이 더부룩했다.

    “오늘 ‘박재동’ 봤니?”

    그렇게 친구들과 수다를 떨며 그는 쌈꾼일 거라고, 똑똑해서 거침없는 사람일 거라고 지레 짐작을 했다. 그러다 그를 다시 ‘봤다’. 1991~93년 같은 신문에 연재한 콩트 형식의 만화를 통해서였다. 잘 나가는 사람 얘기는 없고 하나같이 못난 놈, 힘든 인생, 당하는 이들뿐이었다. 분노와 비애가 칸칸이, 꾹꾹 눌려 뭉쳐 있었다. 그런 날은 밥을 먹다가도 문득 마음이 무거웠다. 남들 아픈 것이 이렇게 다 아픈 이는 또 얼마나 사는 게 고단할까.

    하지만 비로소 얼굴 마주한 그는 소년 같다. 어리지도 삭지도 않은, 고등학교 딱 1학년. 고민도 열망도 사명감도 정의감도, 자존심과 명예욕까지도 활활 타오르나 얼굴 하얗게 고개 숙인, 내가 누구인지 자꾸 궁금한 2차 성징기의 어린 사내. 더하여 조곤조곤 나직한 부산사투리는 긴 은발, 가는 몸체와 더불어 지나치게 ‘예술’스럽다. 쌈꾼도, 똑똑이도, 날 선 냉소주의자도 아니다. 박재동은 찬(滿) 사람인가, 오히려 빈(空) 사람인가.



    ‘날것’의 사랑, 열정

    1996년 박재동은 신문사를 그만뒀다. 제주 4·3항쟁을 소재로 한 장편 애니메이션 ‘오돌또기’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로부터 7년. 그는 아직 ‘오돌또기’를 완성하지 못했다. 장선우 감독과 손잡고 해보마 했던 또 다른 장편 ‘바리공주’도 돈줄이 막혀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다.

    그렇다고 논 것은 아니다. 1998년 8월부터 1년 동안 MBC 뉴스데스크를 통해 ‘박재동의 시사만평’이란 시사 애니메이션을 발표했다. ‘우리만화 발전을 위한 연대모임’의 이사이며,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애니메이션과 교수이기도 하다. 지난 대선 때는 노무현 대통령을 청소부에 비유한 TV CF를 제작, 당선에 적잖이 기여했다. 최근에는 ‘박재동의 실크로드 스케치 기행’이라는 두 권짜리 책을 펴냈다. 그 그림들로 서울 소공동 롯데화랑에서 전시회도 열었다.

    어쨌거나 그는 자꾸 부끄럽단다. “그렇게 소문 내놓고 아직 ‘오돌또기’를 못 만들었기 때문”이란다. “그래도 하자” 하니 “쓸만한 게 뭐 있겠느냐”며 또다시 걱정이다. 영상원 수업에 만화·애니메이션, 단체 일까지, 바쁜 시간을 쪼개고 쪼개 만날 날들을 골라낸다. 겸손한 듯도 하고 까다로운 듯도 하다. 꼼꼼하고 자기욕심 많은 사람이다, 라고 미리 생각해버린다.

    처음 만나 인사하고, 밥 한 술 뜨고, 그의 작업실이 있는 서울 양재동을 향해 가는데 그가 말한다.

    “인터뷰 컨셉트를 어떻게 잡았나요. 이왕 하는 것 생산적이면 좋겠다 싶어 생각해 봤는데 ‘열정, 사랑, 콤플렉스’는 어떨까요. 그런 것들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거든요.”

    사실 쉰 넘은 이가 열정, 사랑, 콤플렉스를 얘기하는 건 생각보다 어색하지 않다. 오히려 쑥스러운 순간은 그 발설자가 10대, 20대일 때다. 그들의 사랑, 열정, 콤플렉스는 ‘날것’이다. 붉고 뜨겁고 비릿하다. 반면 중년이 입에 담는 그것은 경험으로 탈색된 일종의 ‘장식품’이기 십상이다. 그런데 박재동은 정말 ‘사랑’과 ‘열정’을 담아, 순진해 보일 만큼 진지하게 말하고 있다. 자기를 숨길 줄 모르는 사람이다, 라고 또 제멋대로 생각한다.

    첫 날 이야기 장소는 작업실 근처 찻집이다. 그의 양손이 번갈아가며, 오른쪽 갈빗대 근처 어딘가를 꾹꾹 누른다. 십이지장 궤양을 앓았다 한다. 담배 끊고 술조차 멀리하는 데도 한번 다친 속은 쉬 달래지지 않는 모양이다. 그에게서 찾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년(長年)의 징후다.

    -쉰이 넘었다는 게 실감나나요.

    “아니지요. 언제 벌써 이래 됐나 싶고. 아직 하고 싶고 배우고 싶은 것이 너무너무 많은데…. 앞으로 하면 되죠. 할 수 있을 거예요.”

    박재동은 1952년 생이다. 3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다. 밑으로 남동생 하나, 여동생 하나가 있다.

    -고향이 울산이죠.

    “시내에서 20리쯤 떨어진 모랫골이라는 강변 마을이에요. 외갓집은 울산 읍내에 있었고. 친가와 외가를 오가며 어린 시절을 보냈지요.”

    -부친께서 초등학교 교사셨다고요.

    “그랬죠. 하지만 오래 못 하셨어요. 폐결핵을 앓은 후 다시 간이 몹시 나빠져, 예순 넘어 돌아가실 때까지 늘 환자였으니까요.”

    -부친은 어떤 분이셨나요.

    “피부가 곱고 몸이 가볍고 책 읽기를 좋아하는 천생 선비 타입이었어요. 할머니께선 ‘니 아부지 어릴 적엔 책에 푹 빠져 비가 와도 마당에 널린 고추 걷을 줄을 몰랐다’고 하셨어요. 고등학생 때던가, ‘그거 참 선비들의 좋지 않은 점이구나’ 싶어 나는 안 그러마 했는데, 웬 걸요. 저도 똑같은 거예요. 그래서 제가 누굴 존경하느냐, 책 보다가도 누가 오면 탁 덮어버리는 사람이요. 사람 중심으로 산다는 게 그런 거거든요.”

    -살림은 살만 했는지요.

    “할아버지는 머슴 출신 농부였어요. 피나는 노력 끝에 말년에는 중농 소리를 듣게 됐죠. 하지만 아버지 아프고, 그래서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게 되면서 가세도 점차 기울었죠. 할아버지 돌아가신 뒤로는 아주 어렵게 됐어요. 그래도 초등학교 2학년, 그러니까 부산으로 이사가기 전까지는 제법 괜찮았지요.”

    -선생이 쓴 글들을 읽어보면 어린 시절부터 ‘나는 그림을 잘 그린다’는 자의식을 갖고 있었던 듯합니다. 8, 9세 때 그린 그림까지 모아두고 있구요.

    “그렇죠. 제일 어릴 적 기억도, 만으로 두 살 땐가, 석 달쯤 아버지가 카투사로 근무하는 부대 옆에서 생활했거든요. 잠자리비행기가 날아다녔는데 그걸 땅바닥에다 그리곤 했어요. 지나가던 사람이 보곤 절 어머니께 데려가더니 ‘애가 하도 그림을 잘 그려 그 말 해주러 왔다’고 하더군요. 그 때 그린 그림이랑 그 사람이랑, 또렷이 기억나요. 그때부터 알고 있었던 거죠. 난 그림을 잘 그린다, 나 그림 그리는 거는 아무도 못 말린다.”

    -시골 선생 점잖은 체면에 장손이 그림쟁이라…. 집안어른들이 혹 싫은 소리는 하지 않았던가요.

    “아뇨, 그런 거 없었어요. 오히려 다들 칭찬하고 자랑스레 생각했죠. 여섯 살 때 파도 그린답시고 송곳으로 장판을 다 뚫어놨을 때도 아버지는 ‘잘 그렸다’ 한마디만 하셨어요. 입에 겨우 풀칠할 만큼 힘든 시절에도 책, 물감은 떨어지지 않았어요. 2학년 때는 외갓집 새로 칠한 마루 회벽을 온통 자동차그림으로 채워놨는데, 다들 화는 못 내고 어쩌나 고민하는 눈치더라구요. 늦게 들어온 외삼촌이 비로소 막 야단을 치는데, 그 양반이 미대생이란 말이에요. 속으로 생각했죠. 그림 그리는 사람이 이런 일로 화를 내다니, 큰 화가는 못 되겠구만….”

    -맹랑하네요.

    “맹랑하지요. 어렸을 적 제 속엔 영감탱이 하나가 들어앉아 있었어요. 일곱 살 때 담임 선생님을 좋아했는데, 선생님이 절 그냥 어린아이로만 보는 게 참 마음 아팠어요. 슬프지만 할 수 없는 일이겠구나, 그런 생각도 했죠.”

    강한 척, 남자다운 척

    일단 발동이 걸리니 고향 살던 어릴 적 기억이 한정 없이 풀려 나온다. 그의 기억력은 놀랍다. 말을 따라 움직이는 손놀림도 정교하기 이를 데 없다. 추억의 줄기는 집이나 학교 생활이 아니라 그림, 자연, ‘나 자신에 대한 나의 느낌’이다. 특히 천둥벌거숭이로 뛰놀았던 고향 마을의 그 물과 산.

    “가죽 냄새를 맡으면 국민학교 입학 때 받았던 멜빵가방이 생각나고, 밭에서 막 딴 고추 냄새를 맡으면 여름 들녘이 생각나죠. 어머니가 끓인 된장찌개 첫 술을 뜨면 고향 산천이 확 지나가고. 학창시절엔 ‘고향’ 자 들어간 노래만 불러도 목이 메였어요.”

    그는 “너무너무 사랑해서 그런 것 같다” 한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소설가 박완서 선생으로부터도 똑같은 얘길 들었다. “기억은 사랑이다.” 하여 사람은 기억하는 그것대로 살게 되는 걸까. 아니, 절절이 기억나는 그것을 향해 살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행복한 걸까. “문학(예술)이 기댈 곳은 오직 자신에게 각인된 기억입니다. 같은 경험을 하더라도 사람마다 기억은 다 다르지요. 어쩌면 바로 그것이 ‘소질’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박완서 선생은 그렇게도 말했었다.

    -콤플렉스 얘기하자 했지요. 뭐가 걸리던가요.

    “남자답지 못한 거. 대여섯 살 땐가, 새참 먹는 자리에 따라붙었다 막걸리를 마시게 됐어요. 벌컥벌컥 한 사발을 다 마셨는데 집에 돌아오려니 세상이 빙글 도는 거예요. 그 때 생각했죠. 난 술에 약하구나. 그러니 남자답지 못하구나. 나무를 하러 가도 또래 애들보다 짐이 적고, 알밤 줍기를 해도 나만 빈손이고, 운동회날 달리기도 못하고, 소풍날 보물찾기도 못하고. 그런 게 나한테는 콤플렉스였어요. 아마 전생에 일 안하고 글만 쓰거나 뭐 그런 사람이었나 봐.”

    -그래서 더 남자다운 척, 강한 척하며 살았다는 건가요.

    “그런 게… 있었겠지. 중3 때 담배를 배운 것도, 남자는 모름지기 이 때쯤 담배를 피워야 한다 했던 거고. 어른이 되는 고통이라 생각하며 ‘독학’으로 마스터했으니까요. 싸움을 무지 싫어하면서도 중고등학교 시절 슬쩍슬쩍 건달 짓하고, ‘짱’한테 덤비기도 하고, 무서워도 도망치지 않은 건 그 때문일 거예요. ‘키 큰 놈이 도망간다’ 그 소리가 죽기보다 듣기 싫었거든. 사실 전 여리고 섬세하고 여성적인 사람이에요. 그런 쪽이 더 강한데 사회는, 또 거기가 경상도니까, 남자다워야 한다는 요구를 많이 하잖아요. 거기 편승해 오버한 거지.”

    -지금은 어떤데요.

    “많이 자유로워졌죠. 솔직해졌다고 해야 하나.”

    초등학교 3학년 때 부산으로 이사를 했다. 부산 큰 병원들을 전전하며 입·퇴원을 반복하던 아버지와 더 이상 떨어져 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거동이 불편한 아버지를 단칸방에 모셔두고, 어머니는 집 앞에서 오뎅이며 풀빵이며 팥빙수 장사를 했다. 그것만으로는 호구가 어려워 월세집 1층을 빌려 하꼬방만한 만화가게를 열었다. 존경받던 교사 아들이 졸지에 ‘빵집 아(아이)’ ‘만화방 아’가 된 것이다.

    -가난이 상처가 됐나요.

    “그 때는 만화방이 최하질이었어요. 백정보다 더했다니까. 학교에서 ‘불량식품 먹지 맙시다’ ‘만화방 가지 맙시다’ 하는 포스터를 그려 칭찬받고 온 날은, 우리 이 장사 그만하면 안 되나, 그런 생각에 괴롭기도 했지요.

    사실 그 때문에 꽤 커서까지도 남모를 수치심에 찌들어 살았어요. 근데 중2 때 한 친구 집에 가보고는 생각을 고쳐먹었죠. 자기 집에 놀러가자 해서 갔더니, 아 이거 우리 집은 양반인 거라. 기가 딱 막히게 못사는데, 그 아이 얼굴에는 그늘이 없었어요. 감동 받았지요. 그 날 부로 가난에 대한 콤플렉스가 사악 사라졌어요. 그리고는 서서히 가난을 사랑하게 됐죠. 가난이 떳떳하다는 생각을 하고, 부자들에 대해서는 심하다 싶을 만큼 시니컬해지고. 물론 그것도 돌아보면 지나친 극단이었지만.”

    -그렇다면 부산에서의 어린 시절은 불행했나요.

    “아뇨, 아니죠. 제가 만화를 얼마나 좋아했는데. 남들이야 뭐라건, 멋진 상상과 그림으로 가득한 만화책들을 매일매일 원 없이 볼 수 있다는 게 너무너무 행복했어요. 그 만화들에서 받은 영향이라는 건 이루 말할 수가 없지요. 전 지금도 그 때 절 열광케 했던 만화가들을 아버지처럼 생각하고 있어요. 시골에서 고향 들판이 차지하던 무엇을 이젠 만화가 채워주기 시작한 거죠.”

    -만화는 언제부터 그렸죠?

    “뭐 표지 따라 그리고 하는 건 초등학교 2학년 때쯤부터 했고. 본격적인 ‘작품 그리기’는 4학년 때 시작했어요. 제목이 ‘다리 밑의 소년들’이었는데, 57쪽이나 되는 데다 스토리도 제법 진지했어요. 학교 미술반에 들면서 혼자 스케치북 들고 여기저기 그림 그리러 다니는 일에 익숙해졌죠. 상도 많이 탔구요.”

    -꿈이 화가였나요.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그냥 ‘나는 화가다’ ‘이미 화가다’…. 그림 그리지 않는 나는 있을 수 없으니까.”

    -부모님도 지지해 주시던가요.

    “나중에 대학 원서 쓸 때쯤 아버지가 ‘니 꼭 미대 가야겠나’ 하고 물으신 적은 있어요. 그 때 그랬죠. ‘아부지, 지는 그림 못 그리면 죽을 것 같심더’. 그러고는 끝이었어요. 아버지는 제가 판·검사 되길 원하셨던 것 같아요. 하지만 전 참 이상하다 생각했죠. 세상 제일 멋있는 게 예술간데, 그걸 못하는 사람들이 할 수 없이 판사도 되고 검사도 하는 건데 아버지는 왜 저러실까.”

    그는 “난 뭘 하든 내가 지금 하는 일이 최고인 줄 안다. 선생 할 땐 선생이 최고인 줄 알았고 시사만화 그릴 땐 그게 또 최고라고 생각했다. 그런 것이 내 장점이라면 장점”이라고 말했다.

    -부산중학교에 합격한 걸 보니 성적이 썩 좋았나봅니다.

    “그때까지는 괜찮았죠. 반에서 1~4등은 했으니까. 다른 애들은 과외하고 난리였는데 저는 그냥 들어갔어요.”

    30년을 연탄가스에 몸이 삭아

    -중학생 땐 어떤 아이였나요.

    “굉장히 웃겼어요. 왜 학교마다 되게 웃기는 애 하나씩 있잖아요. 원래 수줍음도 좀 타고 하는 성격이었는데, 제가 무슨 공연이랄까 행사랄까, 그런 거 꾸미는 걸 좋아하거든요. 오락도 잘하고 이야기도 잘하고, 만남집이나 만화책을 직접 만들기도 했으니까요. 그게 재미있다고 선생님들까지 돌려보고 그랬어요. 국어선생님은 아예 수업시간 일부를 할애해 제가 맘대로 떠들도록 밀어주시기도 했구요.”

    -미술은 물론 계속 했겠죠.

    “미술반에 들어갔죠. 그런데 문제가 좀 생겼어요. 무슨무슨 대회가 꽤 많았는데, 수업 빠지고 거기 한번 갔다오면 다음 진도를 따라잡지 못하겠는 거예요. 그런 일이 자꾸 쌓이다 보니 성적은 자꾸 떨어지고. 중3쯤 되니 어느새 제가 ‘공부 못 하는 애’가 돼 있더군요. 그래도 미술반 생활은 기막히게 재미있었어요. 입시 위주로 숨막히게 돌아가는 학교에서 전 일종의 ‘해방구’에 자리하고 있었던 셈이죠.”

    1999년 박재동은 책 한 권을 엮어 냈다. ‘천리 도망은 해도 팔자 도망은 못한다더니’라는 제목의 이 책에는 ‘시사만화가 박재동 화백 어머니 신봉선 여사의 21년 만화방 아지매로 살아온 이야기’라는 긴 부제가 달려 있다. 어머니가 5년여에 걸쳐 대학노트 8권에 풀어놓은 이야기를 간추려 엮은 것이다. 신여사의 글은 골골이 눈물이요 갈피마다 한숨이다. 맏아들 재동이 대학 졸업 후 교사 생활을 하도록, 막내딸이 시집가고, 다시 남편이 세상을 떠나 홀로 남겨지기까지, 그의 어머니는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생활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했다.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만화가 박재동
    그러나 그저 고생만 한 얘기라면 재판까지 찍지는 못했을 터. 이리 모질게도 살 수 있나 험난한 인생살이에도, 그의 어머니는 밝고 강하고 정직하고 따사로웠다. 전통 가부장사회가 여성에게 요구하는 부덕, 남편을 하늘같이, 자식 훈육을 목숨같이, 시부모 공경을 내 몸같이 하라는 그 계율에 완전히 합치되는 삶을 살았다. 특히 지아비를 향한 지극한 사랑, 자식에 대한 가없는 믿음에는 혀가 내둘러질 정도다. 옛이야기 읊듯 현재형으로 진솔하고 유장하게 흐르는 글 솜씨 또한 예사롭지 않다. 박재동의 8할을 만든 건 아무래도 그의 어머니였나 보다.

    -책을 읽다 보니 모친 고생이 작심해, 그 와중에도 그림 그릴 생각에만 빠져 있었을 맏아들이 왠지 미워지더군요.

    “그러게나 말이에요. 어쩌면 어머니가 워낙 밝은 분이라 더 무심했던 건지 몰라요. 빙수 갈고 떡볶이를 만들면서도 어머니는 늘 웃는 모습이셨거든요. 30년을 연탄가스에 몸이 삭고 하루 서너 시간밖에 못 주무셨는데, 어쩌면 그렇게나 항상 다정했을까요.”

    -고등학교 입시에 실패했죠.

    “1차, 2차를 다 떨어졌어요. 인생의 쓴맛을 알게 됐죠. 낙오자의 심정이랄까, 계층 의식이랄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때 그 재수 시절이 제 인생의 황금기였어요. 이전만 해도 전 크게 자존심 상하거나 고통스런 상황에 처해 본 적이 없었거든요. 엘리트 의식에 젖어 있었고. 그런 것들이 많이 깨져 나갔죠.”

    -다음 해 부산고에 합격한 걸 보면 재수 생활을 제법 열심히 했나봐요.

    “아니에요. 만날 친구들이랑 술 먹고 담배 피고 농땡이 치고 그랬는데….”

    그의 어머니 책을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재동이가) 10월쯤 저녁에 집에 오지 않았다. 웬일인가 하고 밤새도록 기다리고 걱정하다가 아침을 먹고 독서실로 찾아갔다. 3층 자취방에 가보라 한다. 방문을 열어보니 학생 세 명은 잠자고 머리맡에는 라면 냄비가 뒹굴고 발치에는 탁주 주전자가 뒹굴고 있다. 초당방 냄새가 난다. 상상 외 사건이다. 두말 않고 재동이 손을 잡아끌고 왔다.’

    “그 엉망인 방에 어머니가 나타나셨으니 깜짝 놀랐죠. 크게 혼날 줄 알았는데 어머니는 ‘가자’ 한마디 뿐이었어요. 그 날 부로 공부를 시작했어요. 두세 달 열심히 하고, 시험 20일 전부터는 매일 새다시피 했죠. 일이 그렇게 된 거예요.”

    -고등학생이 돼서도 만화를 계속 그렸나요.

    “아니에요. 재수 시절까지만도 ‘내 가슴에도 봄은 왔습니다’ 그런 제목의 장편 만화를 그리고 했는데, 고등학교 입학하고부터는 손을 뗐어요. 내게는 만화나 풍경화나 정물화나 아무 갈등 없이 공존할 수 있는 거였는데 세상 인식은 달랐지요. 이젠 만화를 그려서는 안될 것 같았어요. 무엇보다 대학을 가야 했으니까요. 근데 만화를 못 그리게 되니 스토리를 만들고 싶은 욕구를 해결하기 힘들더라구요. 그래서 단편소설을 쓰기도 했죠.”

    -이야기를 좋아하지요? 이야기를 하고 이야기를 만드는 것.

    “사람 사는 이유가 결국 ‘이야기하기 위해서’ 아닌가요. 나는 이렇게 산다, 나는 이렇게 살았다…. 소통이야말로 삶이죠. 예술도 소통이에요. 소통을 거부하는 것조차 소통의 한 방식일 수 있거든요. 인간은 누구나 혼자인 것 같아도 사실은 무리 속에 있는 거예요. 완벽하게 개인일 수는 없어요.

    땅속에서 보석을 캔다 쳐요. 그건 나만의 것이 아니죠. 왜냐하면 누군가가 봐줘야 비로소 보석이니까. 맛있는 거 혼자 먹어봐요 재밌나. 더운데 시원한 곳 발견하면 말을 하게 되죠. 그렇게 뭔가를 발견하고 전하기를 좋아하는 것, 그런 사람이 바로 예술가예요. 사랑하는 것을 표현하지 않고는 못 견디는 마음. 저도 한때 사람이란 각기 외떨어진 섬 같은 존재라는 생각을 하던 때가 있었어요. 이제 아니란 걸 알죠. 겉으로 보기엔 떨어져 있어도 사실은 다 한 땅덩어리인 걸요. 최후의 한 사람이 행복하기까지는 모두 다 행복할 수 없다, 그런 말도 있잖아요.”

    얘기가 이쯤 갔는데 찻집 종업원이 문 닫을 시간 다 됐단다. 작업실로 가보니 자정이 넘은 시간인데도 일손들이 바쁘다. 짐 몇 가지를 주섬주섬 챙겨 택시를 잡아탄다. 장승백이 근처 한 아파트 앞에서 그가 먼저 내린다. 무심코 뒤돌아보니 그가 멀어져 가는 택시를 가만히 바래고 있다. 고마운 마음씀씀이다.

    둘째 날. 바로 그의 작업실로 향한다. 그 사이 며칠 동안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단다. 그가 작업을 마무리하는 동안 사진기자와 함께, 여기저기 널린 만화책들을 하릴없이 뒤적인다. 자장면 한 그릇씩 시켜 부랴부랴 쓸어 넣고, 기타 쳐보시라, 얼굴 좀 돌려 보라, 후닥닥 사진 몇 장 박은 후 예의 그 찻집으로 향한다. 어느새 밤 9시30분. 일찍 끝나기는 글렀다.

    -재수 거치며 생각 바뀐 부분도 적지 않을 테고, 고교 시절은 이전과 많이 달랐지 싶네요.

    “약간 ‘막가파’ 비슷하게 됐달까요. 껄렁대고 건들거리고, 하여튼 공부에만 묻혀 사는 녀석들을 보면 ‘공부가 좋아 그러냐, 일류대학 가 제 한 몸 잘살자고 그러는 거지’ 하며 속으로 꽤나 비웃었죠. ‘검은 옷을 입은 송장들’ 어쩌구 하면서.”

    -성적이 좋을 리 없었겠군요.

    “1학년 때 전교 꼴등도 해봤어요. 그거 사실 쉽지 않거든요(웃음). 미술실에 눌러 앉아 만날 담배 피고 여학생 얘기나 했으니까. 하지만 대학생이 못 된다, 그건 또 너무너무 두렵더라구요. 참 생각이 이중적이죠. 그래서 졸업반 때는 노트에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 자체가 아름답다’ 뭐 그런 말을 써놓고 잘 해 보려 노력도 했어요.”

    -효과가 있었네요. 서울대 회화과에 합격했으니.

    “파고들어 열심히 하는 타입은 아니었어요. 고3 때 서울에서 전학 온 미대 지망생이 제 데생을 보더니, ‘재동이 니 선은 촌스러워 안 통할 것 같다’ 하는 거예요. 그래? 이건 내가 사랑하는, 내 삶이 담긴 선이다. 근데 이 선을 인정 안하겠다면 나도 그 대학 인정 안 한다. 그래 놓고 시험 치러 가선 그 친구 말 좀 참고로 했지(웃음). 뭐 이러구저러구 (서울대 회화과가) 17명을 뽑으니 대강 그 안에는 들지 않겠나, 그런 은밀한 자신감은 있었어요.”

    -학교와는 끝내 친해지지 못했나요.

    “그 시스템에 전혀 들어가지 않았어요. 맘 한구석에 불안감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내 살고 싶은 대로 살았어요. 인간적인 것들은 미술반에서 다 경험했구요.”

    -싸움도 제법 했나봐요.

    “아니요. 잘하는 척만 했죠. 그게 다 방법이 있더라구. 우선 낮고 침착한 목소리, ‘니들 이리 와봐’ 하고는 뒤로 딱 돌아서는 거야. 뒷모습을 보이면 안될 것 같지만 그럼 상대편에서는 엄청 쫄거든요. 얼마나 잘 싸우면 등을 보일까 하고. 그 다음엔 제일 어둡고 으슥한 구석으로 가요. 뭐 그렇게 머리 쓰다 된통 당한 적도 있지만.”

    -대학 들어간 해가 1972년이군요. 거기서도 여전히 대장 노릇이었나요.

    “그렇지는 않았어요. 강요배(화가), 배용균(‘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감독) 같은 친구들하고 친해진 것말고는 조용한 생활이었죠. 다시 예전처럼 수줍고 내성적이고, 뭐랄까 퇴폐적이고. 서울은 벌레 먹은 창녀 같다느니 그런 생각도 하고. 학교랑 하숙집 사이만 왔다갔다했는데 어쩌다 길을 잃으면 무조건 서울역으로 가 되짚어 오곤 했죠. 과 애들 이름도 잘 못 외웠어요.”

    ‘도를 구하다 죽은 사내의 해골’

    -미술 작업은 어땠나요.

    “처음에는 향토적인 것, 자연이 참 좋았거든요. 새알을 들고 선 단발머리 소녀, 바람에 흔들리는 옥수수잎 사이에서 벌거벗고 춤추는 남자. 그런데 4학년쯤 되니 혼란스럽더라구요. 다른 친구들은 다 모더니즘(비구상) 쪽인데 나만 구상이니, 이거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 아닌가. 그래서 졸업 후 군대 다녀온 뒤부터는 엄청나게 실험적인 작품을 그려대기 시작했어요. 목성의 소혹성이니 뭐니, 지구상의 것들 중엔 더 그리고픈 것이 없다 하며.”

    대학 시절 그는 불교에 심취했다. 특히 ‘숫타니파아타’(‘말씀의 모음’이라는 뜻)라는 초기 경전에 매료됐다. 한글판 팔만대장경도 읽었다. 그는 ‘진리의 맛이 어찌 달던지 마치 커다란 꿀항아리를 마구 떠먹은 것 같았다’고 회상한다. 특히 궁으로 돌아갈 것을 설득하는 신하에게 젊은 고타마 싯다르타가 한 말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한다.

    “그냥 가시오. 도를 구하기 전에는 난 돌아가지 않을 것이오. 만약 내가 여기서 도를 이루지 못하고 죽어 해골이 되거든 이렇게 전해주시오. 도를 구하려 노력하다 죽은 사나이의 해골이 여기 있다고.”

    예술지상주의에 빠져 있던 염세적 미술학도에게는 가히 치명적 매력으로 다가왔을 영웅담이다.

    -졸업 후에는 어찌 지냈는지요.

    “우선 군대에 갔죠. 부산 고향집에서 방위 근무를 하며 화실을 운영했어요. 제대 후에는 배낭 하나 짊어지고 여행을 갔지요. 단식도 해 보고 절 생활도 해 보고. 아버지가 ‘그러다 죽으면 어쩌려고?’ 하시기에 ‘죽으면 죽는 거죠 뭐’ 했어요. 나중에 부모가 되고 보니 참 못된 자식이었다 싶더군요.”

    -좀 오만했나봐요.

    “여행 중 집으로 보낸 편지에서 부모님을 ‘내 사랑하는 소년소녀’라 지칭할 정도였으니까요. 인간의 본질을 알고 싶었고 강해지고 싶었어요. 죽음에 불안을 느끼는 내가 싫기도 했구요. 그러다 한 교회 기둥에 걸린 성경 말씀들을 읽고는 한번에 무너지고 말았지요. 눈물을 걷잡을 수 없었어요. 긴 여정에 지칠대로 지쳐 쓰러진 내게 어떤 파장 같은 것이 닿는 것을 느꼈거든요. 씻은 듯 피로가 가시고 ‘서울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현실 감각이 돌아온 거에요.”

    -원래 집에는 무심한 자식이었나요.

    “대학 졸업했으니 집안에 뭔가 보탬이 되자, 솔직히 그런 생각은 전혀 안 했어요. 저 자신 안정된 가정을 일구고 살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구요. 제가 할 일은 부모님과 똑같이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술적 성취를 하는 거라 믿었어요. 생활에 빠져 허덕이는 건 부모님의 삶을 정체시키는 일이라구요. 뭐 솔직히, 할 일도 없었지만.”

    -서울 와서는 뭘 했나요.

    “학원 선생 조금 하다 휘문고 미술교사로 부임했어요. 1979년이었죠. 한참 오만방자하던 때라 학교에서도 튀는 짓을 많이 했어요. 마음이 꼬부장하니 매사가 걸렸지요. 떠드는 애 조용히 시키지도 않고, 준비물 안 가져와도 꾸지람 안하고, 교장선생님이 환경미화 좀 하라면 ‘정부 홍보하는 사진이나 걸 걸 내가 왜 하냐’고 뒤도 안 돌아보고. 그래도 애들은 참 사랑했어요. 가르치는 게 즐거웠거든요.”

    ‘딴지일보’ 사이트에 가면 ‘박재동 선생 딴지팬클럽자칭회장’이란 이가 쓴 ‘추억의 미술시간…박재동 선생님전’이라는 글이 있다. 초임 교사 시절 그의 모습이 생생히 묘사돼 있다. 대강 이런 내용이다.

    ‘당시 우리 담임 선생님은 박선생님의 수염(가뭄에 콩 나듯 한 턱수염)이 교사의 품위를 손상시킨다고 생각해 “박선생님, 그거 기르시는 겁니까?” 하고 핀잔을 줬다가 “아닙니다. 지가 알아서 그냥 자라는 겁니다”라는 답변에 말문이 막혔다고 한다.

    박선생님의 수업은 따로 정해진 장소가 없었다. 준비물은 도화지 한 장과 연필이면 족했다. 학교 잔디밭에 나가 풍경을 그리고, 때때로 한강 지류인 탄천으로 달려가 맞은편 정신여고 쪽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미리 준비한 종이비행기와 병뚜껑을 날렸다. 또 다른 수업시간에는 시사실에 모여 박선생님이 촬영해 오신 것을 감상했다. 아직 개발 덜 된 학교 주변 쓰레기장을 찍어 보여주시며 거기서 ‘미(美)’를 찾아보라고도 했다. 백지에 네모 칸 두 개를 그리고 한 쪽 모서리에 종이비행기를 그려놓고는, 그 비행기가 날아가는 모습을 그리라는 게 시험문제였다.’

    부당하다 싶으면 교감에게도 반기를 들던 그는 결국 1년 만에 ‘짤리고’ 말았다. 그가 학교를 그만두자 시인이던 국어교사는 “그 사람이 얼마나 크게 될 사람인데…”라며 매우 안타까워했다 한다.

    -사회의식을 갖게 된 건 언제부터입니까.

    “휘문고 교사 시절, 화실 강사를 겸했거든요. 그 때 만난 제자로부터 충격적인 말을 들었어요. ‘선생님의 그림에는 삶이 없다, 역사도 없고 사람도 없다, 나는 그런 그림은 그리지 않겠다’. 전 완전히 무너져버렸죠. 저로 말하면 대학 시절엔, 정치니 학생운동이니 하는 것에 상당히 냉소적인 편이었거든요. 근데 그 친구 말을 듣고는 제 자신을 깊이 돌아보게 됐어요.”

    휘문고를 그만두고 1년쯤 쉬다 다시 서울 중경고등학교 미술 교사가 됐다. 그 즈음 친구 강요배 화백을 통해 ‘현실과 발언’ 동인이 됐다. 1980년 창립전을 연 ‘현실과 발언’은 우리나라 민중미술의 모태가 된 집단이다.

    “마침 5·18 광주항쟁의 흉흉한 소문이 치고 올라오던 때였어요. 이상한 일이지만 전 그 전해부터 뭔가 끔찍한 일이 생길 것이다, 남도로부터 어두운 기운이 몰려온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남들한테 그런 예감을 발설하기도 했구요. 하여튼 그렇게 사회의식이 남다른 친구, 제자들과 어울리면서 정신이 ‘돌아’왔지요. 삶과 체제를 분리해서 생각하던 데서 내 민족, 내가 속한 사회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게 된 거예요.”

    만화가 구보씨의 ‘행복한 노예생활’

    -이데올로기 학습도 열심히 했나요.

    “그렇지는 않았어요. 내 상식에 비추어, 또 사람들과의 많은 대화를 통해 옳고 그른 것을 가려내게 됐죠. 전두환 대통령이 싫었고, 그의 등장이 비정상적으로 여겨졌고, 최루탄 냄새를 맡으면 고통 속에서도 ‘학생들이 살아있다’는 생각에 기쁨을 느꼈어요.”

    -그러니까 사회주의 이론으로 무장한 운동가는 아니었네요.

    “그래서 전 사회주의권 붕괴로 사람들이 온통 혼란에 빠졌을 때도 아무렇지 않았어요. 신문사 다니면서 사회과학 학습도 제법 했는데 전 그 때마다 반론을 많이 폈거든요. 왜 예를 들어,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가진다고 하잖아요. 하지만 능력이나 필요는 커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하고, 또 사람마다 상황마다 다 다른 거거든요. 그걸 어떻게 정형화할 수 있겠어요. 양적 변화가 질적 변화를 추동한다, 뭐 이런 거는 정확하지만 사람에 대해서만큼은 그렇게만 볼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중경고 교사 시절은 어땠나요.

    “그 때는 철이 좀 들었죠. 환경미화 같은 것도 열심히 하고. 또 교장선생님이 절 많이 지지해 주셨어요. 밴드부 만들고 연극반 만들고, 축제도 부활시켜 아이들과 참 신나게 지냈어요. 잘한다고 정부 표창도 받고 그랬으니까요. 한 5년 그러다 보니 녹초가 돼, 나중에는 더 못하겠다 싶더라구요.”

    -1981년 서울대 교육대학원에 입학했군요. 왜 미술대학원에 가지 않았죠.

    “교사니까요. 새로운 교육을 해보고 싶었어요. 가르치는 일에도 소질이 있다 싶었고. 미대 졸업하고 미술대학원 가는 건 지 앞길 다지는 일 같아 내키지 않았어요.”

    1986년, 연극배우 김선화씨와 결혼했다. 김씨는 연극, 드라마는 물론 ‘너에게 나를 보낸다’ 등의 영화에서 비중 있는 조연으로 활약해 온 성격파 배우다.

    “나이가 서른다섯쯤 되니 초조해지더라구요. 부모님께 해 드릴 것은 그것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선을 봤는데 아내 될 사람이 세 가지 조건을 걸더군요. 첫째, 연극을 계속하겠다, 둘째, 천주교도인 자신의 종교를 인정해 달라, 셋째, 예술 한다고 가정을 등한시해선 안 된다. 다 좋다 했죠.”

    그는 소문난 ‘공처가’다. “마누라가 무섭다”는 말도 예사로 한다. 돈 버는 능력이 있나, 관리하는 능력이 있나, 전기 배선 하나 자신 있게 만질 줄 아나. 그래도 어찌어찌 집사고 애들 둘 키우고, 자가용까지 몰고 다니는 걸 보면(그는 운전면허가 없다) 아내가 대단해 뵈고 존경스럽기까지 하단다.

    “행복한 노예상태지요. 예술 하기 위한 전략이랄까(웃음). 또 아내는 제가 뭘 하겠다는데 ‘해라’ ‘하지 마라’ 그런 말을 거의 하지 않아요. 애니메이션 한다고 나선 이래 한 달에 100만원도 못 갖다줄 때가 있었는데 역시 별 말 없었어요. 영상원 교수 된 다음부터 사정이 좀 나아졌지만, 그래도 제 비슷한 또래 가장들하곤 비교가 안 되지요. 하지만 전 무지 만족해요. 저처럼 가난했던 사람이 이렇게 잘살게 되다니. 꿈 같은 일이지요. 희한한 세상이라니까요.”

    얘기가 한참 재미있어질 즈음 종업원이 다가와, 영업 끝났단다. 어느새 새벽 1시다. 그는 또 용산 어딘가에서 약속이 잡혀 있단다. 함께 움직이며 또 몇 가지 질문을 던진다.

    출사표를 던지다

    -기독교에는 언제 귀의했나요.

    “서른세 살 때요. 그러면서 많이 편안해졌어요. 이전에는 항상 내가 중요하고, 세상 그 어떤 일도 내 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교만함이 있었는데, 종교를 갖게 된 후론 많이 유연해졌지요. 이전의 내 논리는 실질적 삶이 거세된 철옹성 같은 관념일 뿐이었다는 걸 깨달은 거예요. 겉으로는 강해 보이지만 내면은 공허하고 한없이 외로웠거든요. 그래봤자 나일롱 신자지만 기도할 땐 뭐랄까, 우주와 교류한다는 느낌이 들어요. 어떤 신의 뜻, 우주의 섭리가 나를 통해 발현되는 느낌. 인간과 물질과 우주가 사랑으로 하나되는 느낌이요.”

    -1988년 ‘한겨레신문’ 창간과 함께 시사만화가의 길로 들어섰지요. 특별한 계기라도 있었나요.

    “그 1년 전쯤 학교를 그만뒀어요. 교사생활이 작가로서 저를 벼랑 끝에 서지 못하게 한다 싶어서요. 제가 아이들을 참 사랑했거든요. 교사로서의 사명감도 강했구요. 수업이 잘 끝나면 행복감이 굉장해요. 어느 날 교무실을 나서다 멀리 퍼진 석양을 보며, ‘이 이상 더 좋을 순 없다’ 하는 황홀경에 빠졌던 기억이 새롭네요. 그게 바로 문제였어요. 위기를 느꼈죠.

    그리고 몇몇 친구들과 회사에 들어가 일러스트 그리는 일을 했어요. 그 때 알게 모르게 ‘눈에 잘 들어오는 그림’에 대한 훈련을 했죠. 2년 남짓 그러고 있는데 창간 준비중인 ‘한겨레신문’에서 시사만평을 공모한 거예요. 거기 당선돼 졸지에 만화가의 길을 걷게 됐죠.”

    -선택에 갈등은 없었나요.

    “당연히 있었죠. 생활, 작품 세계를 다 바꿔야 했으니까요. 하지만 정작 더 큰 걱정은 ‘세상에 드러난다’는 것이었어요. 덕 중에는 음덕이 최고거든요. 뭐든 숨어 하는 것이 좋은 건데, 그래서 교사란 직업이 좋은 거고. 드러나는 사람이 되면 본질을 잃을 위험이 크잖아요.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제 슬슬 ‘출사’할 때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있었어요. 강호에 나설 때가 됐다 이거지요. 그 때 임옥상 선배가 제 등을 떠밀었어요. ‘이야말로 화가가 할 일’이라며 강물에 풍덩 빠뜨려버린 거예요.”

    서울의 새벽길은 뻥 뚫려 있다. 얼마 안 간 듯한데 벌써 용산이다. 차에서 내리기 직전 그가 불쑥 묻는다.

    “이거 제 얘기를 독자들이 재미있어 할까요? 저도 신문사 물 먹었던 사람이라 기자들이 부탁하면 거절을 잘 못해 응하긴 했는데, 아무래도 이번에는 좀 무리한 것 같아요. 해놓은 일도 없고 나설 생각도 없는데….”

    “담에 만나선 바로 그 얘기를 하자”고 대답했다. 삐뽀삐뽀 앰뷸런스가 붉은 빛을 뿌리며 달려간다.

    북한산 자락의 아침은 청신하다. 북악터널 부근 한 호텔에서 영상원 입시문제를 내느라 묶여 있던 그를 만났다. 이제 채점만 남았다고, 오랜만에 잘 시간을 충분히 확보하고 보니 오히려 시시때때로 잠이 쏟아진다며 긴 하품을 토해낸다. 여전히 속이 아픈 그는 유자차와 미지근한 물 한 잔을 시켜놓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시사만평 그리기의 핵심은 뭐죠.

    “머리 돌리기요. 순간 떠오르는 생각이나 이미지로는 독자들로부터 색다른 공감을 끌어낼 수 없어요. 연자맷돌 돌리듯 낑낑대며 머리를 두 바퀴는 돌려야지요. 아, 정말 그 스트레스가 얼마나 큰지. 생각해 보세요, 매일 수십만 명 앞에서 전시회를 열어야 하는 화가의 심정을. 하지만 한편으로 그것은 엄청난 힘을 갖게 됐다는 뜻이기도 하죠. 또 역사의 소용돌이 한복판에 서 있다, 내 작은 재주로나마 민주화 운동에 기여할 수 있다, 고통스러운 만큼 그런 자긍심과 만족감도 컸어요.”

    만평을 그린 지 한 달이 채 안 돼 그는 유명인사가 됐다. 여기저기 잡지, 방송에서 앞다퉈 인터뷰 요청이 왔다. 그는 자만심에 빠지지 않기 위해 제 뺨을 때려가며 분투했다. 다른 무엇보다 그의 만평은 재미가 있었다. 이전에는 보기 힘들던 만화적 구성. 말 풍선, 칸 나누기, 의성어 사용, 핑핑 나는 생동감. 우리나라 한 컷 만화의 역사는 박재동 이전과 이후로 나눠진다는 말에 이의를 달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신문사 생활에 갈등은 없었나요.

    “주로 하는 일이 비판이다 보니 세상 보는 눈이 건조해지더라구요. 자꾸 경직되고 예리해지고 공격적이 되고. 그런 것들이 두려웠어요.”

    -애니메이션에는 어떻게 눈을 돌리게 됐나요.

    “이전에도 관심은 있었어요. 그러다 회사 동료의 추천으로 미야자키 하야오의 ‘이웃집 토토로’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같은 작품들을 보게 됐죠. 그 때가 1991년이었나, 새로운 발견이었고 할 만한 일이란 걸 확신하게 됐어요. 얼마 후 친구 강요배의 제주도 4·3항쟁을 소재로 한 전시회 구경을 하게 됐는데, 말할 수 없이, 이루 말할 수 없이 강렬하게 그 이야기를 만화영화로 풀어내고 싶은 거예요. 처음에는 단편을 생각하다 모 영화사 사장과 연이 닿아 장편 애니메이션을 기획하게 됐죠.”

    -신문사를 그만둔 건 그보다도 한참 후였는데요.

    “기획은 1993년부터 했고, 1994년 봄부터는 틈만 나면 제주도로 날아가 사진 찍고 스케치에 매달렸어요. 1995년쯤에는 거의 열병이랄까, 바이러스 수준에 가 있었어요. 애니메이션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요. 그런데 사표를 내도 받아주지를 않는 거예요. 한 3년 조른 끝에 새 일을 시작하게 됐죠.”

    -그런데 왜 잘 안 됐나요.

    “시나리오 문제가 컸어요. 그 처참한 상처를 가족 다 볼 수 있는 만화영화로 꾸미자니…. 하지만 대충 하기는 싫었거든요. 애초 6개월이면 되겠거니 했던 시나리오 작업이 7년을 넘겨가고 있지만, 우리 팀은 여전히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어요.

    어려운 순간도 많았죠. 팀은 짜 놨는데 시나리오는 안 나오고, 얼마 안 있어서 외환위기까지 닥쳤으니까요. 그때는 ‘오돌또기’가 아니라 생존 자체가 문제였어요. 그래서 MBC에 시사만평을 납품하고 다른 일들에도 손을 댔지요.”

    “뺀질뺀질한 게 싫다”

    -조바심이 나지는 않나요.

    “요즘에야 깨달았어요, 묵혀야 한다는 걸. 물론 저도 가끔씩은 ‘왜 이렇게 어려운 테마를 골라 사서 고생하나’ 하는 고민을 할 때가 있어요. 하지만 그래서 더 도전하고 싶고 어렵지만 뛰어 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난 대선 때 CF를 만들면서 자신감이 생긴 부분도 있고요. 무엇보다 당시 십시일반으로 후원금을 모아 주신 여러 분들께, 제대로 된 작품, 보람으로 여기실 만한 작품을 보여드리고 싶어요.”

    -신문사 재직 때부터 ‘우리만화연대’ 같은 단체 일에 열심이었는데요. 그런 것들이 결과적으로는 선생의 일과 정진에 방해가 됐다고는 생각지 않나요.

    “저도 처음에는 시큰둥했어요. 근데 일단 시작하고 나니, 제 성격이 한번 하겠다고 하면 우직하게 가는 거거든요. 그런 단체의 ‘권력’은 출석에서 나오더라구요(웃음). 오랄 때마다 열심히 참석하니 점점 일이 저한테로 몰리는 거예요. 결국 회장도 하고 이런저런 연합 모임에도 달려가고, 그러다 보니 만화계 큰 행사 때마다 또 중심에 서게 되고.

    물론 적당히 빠져나가면 몸도 편하고 제 작업에도 훨씬 집중할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할 수 있는 일인데 나 몰라라 할 수 있나요. 그런 건 굉장히 뺀질뺀질하게 느껴져서요. 차라리 어떤 이권이 걸린 문제라면 거절하기가 쉬울 거예요. 하지만 그런 일들은 희생을 요구하는 거거든요. ‘No’ 하기가 어렵지요. 뭐, 언젠간 지나갈 거예요. 할 만큼 하다 보면 끝이 나겠죠.”

    -지난해 노무현 후보에 대한 공개 지지를 표명했는데요, 시사적 주제를 다루는 만화가로서 걱정되는 부분은 없던가요.

    “전 만화가인 동시에 정치비평가로서의 아이덴티티를 갖고 있어요. 노무현 후보 역시 대통령이 되고 나면 비판해야 할 부분이 없지 않을 텐데, 비평가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려면 중립을 지키는 쪽이 훨씬 더 안전했겠지요. 하지만 아니다, 지금은 개혁 세력의 집권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어요. 할 수 있는데 안 하는 것이 더 부자연스럽지 않나요. 예를 들면 사람이 물에 빠졌는데 카메라로 그걸 찍을 것이냐, 버리고 뛰어들어 목숨부터 구할 것이냐의 선택인 거죠.”

    -예술가로서 어떤 정치적 색깔로 규정지어지는 게 불편하지 않은가요.

    “왜 제게는 그게 문제가 안 될까요. 아마 앞으로의 제 작업에 대한 열망이 그만큼 강한 때문일 거예요. 어떻게 생각해도 좋다, 나는 작품으로 말하겠다…. 그럼 또 그것으로 저란 인간이 새롭게 규정될 것 아니겠어요.”

    차 한 모금 마시며 잠시 숨을 고른 그가 이어 말한다.

    “나이 오십이 넘으니 이제야 삶의 맛을 알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감사함도 배우고, 능글맞아지기도 했고. 지금 생각대로 이렇게 살면 되겠다, 그런 자신감도 생겼어요. 한 마흔다섯까지는 거칠 것이 없었거든요. 대신 건조하고 윤기가 없었지요. 이제는 차 마시는 시간의 달콤함도 알겠고, 공부하고픈 것도 오히려 더 많아졌어요.”

    -욕심이 참 많은 분이네요.

    “대체로 공부 욕심이죠. 그림 공부, 그를 통해 펼쳐 보일 만한 세계관을 다지고 싶은 욕심. 이전에는 (민주화라는) 목표가 분명했지만 지금은 혼란의 시대잖아요. 이제는 함부로 이상향을 만들지 않아요. 대신 지금, 이 곳, 우리 시대에 대해 더 많은 걸 알고 싶죠.”

    -결국 화두는 ‘관계’와 ‘인간’인가요.

    “그렇지요. 예를 들어 학교 내 권력구조 말이에요. 장유유서가 전통이라지만 원래 우리한테는 군국주의적 위계질서 같은 건 없었거든요. 보세요. 초등학교 애들끼리는 어디 사생대회를 가더라도 학년 높은 애가 어린아이 짐을 들어주잖아요. 근데 중학생만 돼도 3학년이 1학년을 하인 부리듯 하거든요.”

    -이론서에 기대 깨친 바가 많지 않아선지, 오히려 늦도록 원형적 질문에 천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또 ‘늘 배운다’ ‘사람으로부터 배운다’는 자세가 확고한 것 같구요.

    “제가 제 자신을 기특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있다면, 인간적으로 성숙하려 늘 노력하는 거예요. 전 참 부족한 게 많고 채울 부분이 많은 사람이거든요. 그래선지 다른 사람의 훌륭한 인격이 눈에 쏙쏙 들어와요. ‘아, 그렇구나, 그 말이 참 맞네’ 하는 거요.”

    -아까 공부에 대한 욕심을 말했지만, 사실은 명예욕도 강하지요? 그만큼 자신도 있구요.

    “저는 사명 위주로 사는 인간이에요. 명예욕, 성취욕도 강하구요. 그걸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하거든요. 그래서 전 명예욕은 존중받아야 할 거라 생각해요. 거기 사명감이 겹쳐 있으니까요. ‘내가 얼마나 그림을 잘 그리는지 아니?’, 결국 그 말하려고 애쓰는 거거든요.”

    -명예욕을 안으로 깊이 파고들다 보면 결국 존재 증명의 욕구와 맞딱드리게 되는데요.

    “또 그것만이 끝도 아니에요. 유전자를 퍼뜨리듯 예술가로서의 내 세계관을 퍼뜨리는 거지요. 우주가 인간의 그런 강렬한 존재증명 욕구를 이용하고 있다, 허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세요? 그것이 곧 인간을 헌신케 하고, 가치 있는 무언가를 창출하게 하니까요. 생식을 위해 정욕이 필요하듯 정욕이 곧 목표는 아닌 거죠. 그러니 예술가가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불행이 아니에요.”

    지나갈 것은 다 지나간다

    -질투 또한 힘이 될 수 있겠죠.

    “무욕의 상태란 도달하기도 힘들지만 위험한 것일 수도 있어요. 저한테는 스타의식이 있거든요. 그게 제 아이덴티티의 큰 부분을 차지해요. 그래서 근사해 보이려고 노력하죠. 전 그렇게 노력하는 제 자신이 좋아요. 하지만 권력을 원하지는 않습니다. 아마 전생에 권력은 누릴 만큼 누렸나봐요.”

    -그 질투 말인데요, ‘실크로드 기행’ 같은 책만 봐도 노골적으로 질투심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던데요(웃음).

    “그게 우리 세대가 할 일이에요. 질투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사람은 극복할 가능성도 있는 사람이거든요. ‘아, 나 삐칠래!’, 이렇게 터놓고 말함으로써 감정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거지요. 그것이 바로 문화적 족쇄를 푸는 길이기도 하구요.”

    -누군가는 선생에게, ‘한겨레그림판’ 이후 한 게 뭐냐, 그 때 명성 팔아먹고 사는 것 아니냐고 비난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맞아요. 맞는 말이에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길가다 우연히 마주친 주부가 ‘만화가시지요’ 하고 말 붙여올 때가 있어요. 하지만 정작 그 분은 제가 그린 만화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일 수 있어요. 제가 이런저런 단체 일이나 그런 걸로 TV 화면에 비친 때가 많으니까요. 하지만 그런 것들이 꼭 싫고 창피하지만은 않아요. 하다보니 그렇게 된 건데요. 언젠가는 그런 제 역할도 다 끝나고, 정말 양심 거리낌 없이 편한 마음으로 작품에 몰두할 수 있는 날이 올 거예요. 다만 필요 이상으로 과대 포장된 거, 그런 것은 벗겨졌으면 좋겠어요.”

    시간이 다 돼 자리 털고 일어서니 그가 또 느릿한 걸음으로 바깥 배웅을 나온다.

    “이런저런 얘기하면서 새삼 제 자신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됐어요. 남들이 씌워준 포장에 싸여, 자칫 제 자신조차 스스로를 못 보게 되는 수도 있거든요. 들여다볼수록 참 부족하고, 새롭게 고민해야 할 부분이 많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어요.”

    긴 대해가 끝났다 해서 누구나 그이처럼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박재동은 바다처럼 아주 깊은 사람은 아닌지 모른다. 지식과 신념으로 가득찬, 바위 같은 사람도 아닐 게다. 하지만 그는 또 바다처럼 비어 있어 넉넉한 사람이다. 그 한 덩이로 진실인, 바위처럼 담백한 사람이다. 좋은 것은 ‘아 좋다’ 하고, 싫은 것은 ‘아 싫다’ 하는, 쉰두 살의 꿈 많은 그가 잘 가라 손을 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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