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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方外之士 ⑤

너브실 고택 애일당 지키는 處士 강기욱

저녁엔 노을빛이, 밤엔 달빛이 가슴속에 들어오니…

  • 글: 조용헌 江湖東洋學연구소 소장, 원광대 초빙교수 cyh062@wonkwang.ac.kr

너브실 고택 애일당 지키는 處士 강기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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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나서야 자연과 호흡할 수 있게 됐다. 새벽의 여명이 아름답게 느껴졌고 지저귀는 새 소리가 반가웠으며 저녁이 되면 노을빛이, 밤이 되면 달빛이 가슴에 들어오게 됐다. 대자연과 내가 함께 호흡하고 있다고 느낀 뒤로는 외롭지 않았고 잔잔한 평화가 밀려왔다. 그때부터 생활을 즐기게 되었다. ‘아! 나는 복 많은 사람이구나’ 하고. 처음 3년이 문제다. 이 시기만 넘기면 시골에 뿌리내릴 수 있지만, 견디지 못하면 다시 도시로 돌아가게 된다.

낮에는 주로 3500평이나 되는 집을 청소하고 풀 뽑는 일을 하는데 보통 서너 시간이 걸린다. 그 외엔 설거지를 도와주거나 아이들과 함께 책을 본다. 또 강아지와 함께 뒷동산에 1시간 정도 산책을 다녀온다. 이만하면 완벽한 건달의 일과 아닌가(웃음).”

이 집의 흙담 뒤로는 2km 가량 이어진 오솔길이 나 있다. 뒤에는 백우산(白牛山) 자락이 완만한 경사의 숲길을 이루고 있어 몇 사람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면서 걷기에 최적이다. 집 뒤쪽으로 텃밭을 지나서, 고봉이 책을 읽었다는 귀전암(歸全庵) 터에 오르면 눈 아래로 넓은 들판이 펼쳐진다. 소나무와 진달래가 어우러진 숲길을 내려오면 옛 선비들이 공부에 전념했던 월봉서원(月峰書院)이, 동네 윗길을 돌아 올라가면 동네 아이들이 공부하던 서당인 귀후재(歸厚齋)가 보인다. 오솔길뿐 아니라 동네 앞으로 흐르는 황룡강 길을 따라 산책하는 것도 일품이다. 오솔길 산책이 자기와의 만남이라면 석양 무렵 강변길 산책은 마음을 풀어놓고 사물의 지혜를 깨닫는 시간이다. 강 처사는 산책을 너브실 생활의 가장 큰 즐거움으로 꼽았다.

담양 소쇄원에서 인생 공부

필자가 강 처사를 처음 알게 된 것은 2001년 봄이다. 호남의 명문인 고봉 기대승 집안을 추적하던 중 너브실의 애일당을 알게 됐다. 그때 넓디넓은 고택을 지키던 사람이 바로 강 처사다. 젊은 사람이 시골에서 남의 집을 관리해주며 살고 있다는 것이 필자에게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후 마음이 허전할 때마다 애일당에 가서 강 처사와 함께 달을 보곤 했다. 소나무 향기를 맡으며 달을 바라보면 허전한 마음을 위로받을 수 있었다.



함께 달을 보며 간간이 들었던 그의 과거사를 정리하면 이렇다. 강 처사의 고향은 광주로, 20세 때 피비린내 나는 광주항쟁을 겪었다. 친지와 선배들이 처참하게 죽는 광경을 두 눈으로 목격했던 것. 한 세상을 온전하게 사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1980년대 중반 대학을 다니면서 다산 정약용의 사상에 접하게 됐다. 특히 다산의 탕론(湯論)과 여전제(閭田制)에 공감했다. 탕론은 일종의 혁명론으로 백성의 뜻에 따르지 않는 왕은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고, 여전제는 공동으로 전답을 경작하고 공동으로 분배한다는 토지개혁사상이다. 그는 다산사상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겠다는 생각으로 1988년 광주 대인동에 있던 ‘다산학연구원(茶山學硏究院)’을 찾아갔다. 당시 다산학연구원장은 다산학 연구의 개척자라 할 수 있는 고 이을호(李乙浩) 선생이었다. 대개 대학을 졸업하면 취직자리를 알아보지만 강 처사는 무보수로 다산학연구원에 다니면서 7년간 이을호 선생을 시봉했다. 아울러 광주에서 ‘다신계(茶信契) 문화교실’을 운영하며 팀을 짜서 다산의 유적지를 답사했다. 다산정신의 사회화 운동이자 전남지역 문화운동인 셈이었다.

이 시기 강 처사는 담양의 소쇄원(瀟灑園)으로 거처를 옮겼다.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이기도 한 소쇄원에서 무보수로 근무하면서 숙식을 해결했다. 숙소는 계곡 바로 옆에 자리잡은 광풍각(光風閣) 건물로 글자 그대로 빛과 바람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공간이었다. 특히 장마철 정취는 압권이었다. 비가 많이 오는 날 광풍각에 앉아 있으면 철철철 흐르는 물소리가 사람을 빨아들이는 것 같고 튀어오르는 물보라는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이때 강 처사는 자연과 일체가 되는 체험을 했다고 한다. ‘물아일체(物我一體)’와 ‘내가 없어질수록 마음은 편하다’는 이치를 어렴풋이 깨닫게 된 것도 이 시기였다. 청소년 시기에 읽었던 ‘장자’의 소요유(逍遙遊)나 ‘노자’의 무위(無爲)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머릿속에서 맴돌던 명사(名詞)가 가슴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동사(動詞)로 전환되던 시기였다.

소쇄원에서 하늘을 바라보면 ‘별밭’이 펼쳐진다. 이 장관을 보면 ‘성산별곡(星山別曲)’이 왜 소쇄원 일대에서 나왔는지 이해가 된다. 강 처사는 소쇄원 생활 3년 동안에 16년 동안 학교에서 공부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공부를 했다고 한다.

소쇄원이 광주 일대의 명소다 보니 밤에는 문화인들이 종종 마실을 왔다. 술은 먹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었기에 광풍각의 모임은 학구적이었다. 새벽이 올 때까지 의견을 주고받으며 토론을 진행했다. 이때 단골로 드나들던 9명의 멤버가 ‘장작계’를 조직하기도 했다. 아궁이에 땔 장작을 마련하기 위한 계모임이었다. 돈을 걷어서 한 트럭분의 장작을 사놓고 구들장을 달구었다. 당시 소쇄원 내의 광풍각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장작을 때야 했다. 멤버들은 밤새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새벽의 여명을 같이 즐겼다. 이때 벅차 오르는 감동은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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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조용헌 江湖東洋學연구소 소장, 원광대 초빙교수 cyh062@wonkw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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