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6월호

1960년대 충무로 女帝 최은희

“인고의 한국여성? 난 그 역할이 너무나 지겨웠다”

  • 글: 심영섭 영화평론가 chinablue9@hanmail.net

    입력2004-06-01 10: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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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대 충무로 女帝 최은희
    그녀의 ‘차마 접근하기 어려운 단아한 신비’는, 독수공방과 이루어질 듯 말 듯한 성적 판타지 사이의 아슬아슬한 경계에 그녀를 놓았다. 이 ‘아슬아슬함’은 전근대적·유교적 가치관과 근대적 가치관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빚어진 심리적 억압에 갇혀 있는 슬픈 여성의 자화상과 아찔한 남성 판타지의 타협점이었다. 그러나 그 성애(性愛)는 1970년대 토속 에로물들이 여배우의 육체를 다루는 방식보다 훨씬 우아하고 아름답다는 점에서 최은희는 운이 좋은 편이다. 한국영화의 최대 전성기를 구가하고 한국영화사상 가장 훌륭한 감독과 함께하는 겹경사를 누리는 와중에, 그녀는 섬세하고 절도 있으며 한없이 깊은 정적인 연기의 예증(例證)으로 영화사를 장식한다.

    놀라운 점은 그녀가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나 ‘벙어리 삼룡이’의 한국적 여인상에만 안주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시체애호 취미마저 엿보여 변칙적 욕망의 도가니라 불러도 좋을 영화 ‘다정불심’을 보자. 앨프리드 히치콕의 ‘현기증’을 연상케 하는 이 사극에서 그녀는 공민왕을 유혹해 파멸에 이르게 하는 팜 파탈적 평민여성과 헌신적인 아내 노국공주의 1인2역을 맡아 열연했다. ‘지옥화’에서는 놀랄 만한 관능성과 치열한 생존본능을 지닌 창녀 역을 너끈히 소화하기도 했다.

    배우 최은희의 면모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쌀’이나 ‘촌색씨’에서는 자연의 모습을 닮은 건강한 또순이로, ‘젊은 그들’에서는 남장미인으로, ‘어느 여대생의 고백’에서는 법과대학에 다니는 엘리트 여대생으로 분한다. 북한에서 만들어진 ‘소금’이나 ‘탈출기’ 등에서는 가난에도 굴하지 않는 무산계급의 어머니로 변신을 거듭한다. 그녀의 연기는 모양을 알 수 없는 수많은 각으로 이루어진 다면체였다.

    최은희의 이름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기록은 그녀가 충무로에서 매우 희귀한 ‘여성 감독’이었다는 점이다. 1965년 그녀는 한국영화 사상 여자로는 세 번째로 메가폰을 잡는다. 데뷔작인 ‘민며느리’와 1967년작 ‘공주님의 짝사랑’, 1972년작 ‘총각선생’을 거쳐, 북한에서는 ‘약속’이라는 작품을 연출했다. 그녀 자신은 “신필름에 감독이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쑥스럽게 웃지만 남편이자 동료인 신상옥은 그녀의 영화에 대해 “카메라도 좋고 포인트도 좋다”고 평한다.

    평론가 변인식의 말을 빌리자면, 최은희는 조미령, 노경희, 이민자, 윤인자, 문정숙, 도금봉, 김지미에 이르는 이른바 ‘비로드 시대의 여배우’ 중 하나다. 이는 아마도 1960년대라는 한국영화의 황금기를 거친 일단의 여배우를 수식하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그녀는 ‘아리랑’의 신일선, 한은진, 김소영, 김선재의 바통을 잇는 ‘완숙하고 신비로운 조선여인상’의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여배우이기도 하다.



    최은희의 영광과 도전 뒤에는 당대의 거장, 신상옥 감독이 있다. 어쩌면 두 사람은 누가 누구에게 공(功)을 돌리기 어려운, 흡사 암수동체 같은 동업자이자 친구이며 동지였을 것이다. 이미 남편이 있는 몸으로 세상의 비난을 무릅쓰고 결합을 택한 여배우와 당대의 감독은 영화라는 고리만으로 버티며 50년의 세월을 넘었다.

    황무지에서의 새 출발

    이 인터뷰는 납북된 비운의 여배우나 신상옥 감독의 아내가 아닌 ‘연기자 최은희’의 삶과 영화를 회고하기 위해 기획됐다. 인터뷰가 그녀의 집 거실에서 이루어진 덕분에 필자는 신상옥 감독과도 대화를 나누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이제 누가 누구랄 것 없이 서로를 닮아 미움과 앙금마저도 이지러지고 녹아버린 전형적인 노부부였다. 필자가 가지고 간 ‘여성영화인사전’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들여다보고, 숱한 포즈를 취했을 텐데도 카메라기자 앞에서 어색하다고 미소 짓는 그녀는 얼마나 다정다감한 여성이던지. 결코 할머니라는 말이 떠오르지 않는 이 아름다운 여배우에게선 여전한 ‘소녀’의 향기가 잔잔하게 묻어났다.

    -요즈음 어떻게 지내세요?

    “우리가 (북한에서) 돌아오니 예전에 갖고 있던 재산은 건물 하나 안 남은 상태였어요. 그런데 마침 안양시에서 ‘안양을 다시 영화인의 도시로 만들고 싶다’고 해서 재작년 가을에 전시회를 했어요. 아파트 사잇길을 ‘신필름로’라고 명명까지 해가면서. 그래서 우리는 ‘이왕이면 영화학교를 하자’고 제안했죠. 36년 전에 우리가 세웠던 ‘신필름 부설 안양영화예술학교’의 맥을 잇고 싶었던 거죠. 커리큘럼이나 과정을 전문대 기준으로 만들어서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어요. 당분간은 어떻게든 학교를 성장시키는 게 가장 큰 목표예요.”

    -신상옥 감독은 ‘신필름’을 다시 운영하는 거죠?

    “작품이 많이 나오지 않으니까 운영이라고 하기는….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에서 다시 시작하려니까 어려움이 많아요. 지금 준비하고 계신 것도 언제 시작할 수 있을지 확언할 수 없는 상태거든요. 신 감독이 벌써 20년 넘게 칭기즈칸을 그린 영화를 만들고 싶어해요. 워낙 대작이다 보니 제작비가 많이 들어서 늦어졌지만 요즘에는 한국영화도 제작비를 충분히 투입하니까 시도할 만 하죠. 영화계가 무척 달라졌어요. 예전에 1000만 관객을 어디 상상이나 했겠어요. 세월이 바뀌고 환경이 좋아지는 만큼 영화도 달라져야죠. 16mm 카메라로 촬영하던 우리 젊었을 때랑은 많이 다르니까요.”

    -어린 시절 얘기부터 해보겠습니다. 예전에 한 인터뷰를 찾아보니 부친이 중앙전화국 직원이었고 2남3녀 중 셋째 딸이더군요. 부모님이 많이 예뻐하셨을 텐데 배우를 한다는 말에 반대하지는 않으시던가요.

    “반대가 심했죠. 그래서 데뷔가 늦었어요. 학교를 다니는 중에 자꾸 배우가 되겠다고 하니까 완강히 반대하셨거든요. 그러지 않았으면 조금 더 일찍 시작할 수 있었겠죠. 다행히 연극에 데뷔하자마자 주연을 맡기도 하고 운이 좋았어요. 해방되지 않았다면 아마 일본에 건너가 배우생활을 했을 거예요. 일본에서 영화를 하자는 권고도 많이 받았지요. 다행히 곧 광복이 돼서 우리나라에서 영화일을 하게 됐죠.”

    -어릴 때는 키가 유별나게 크고 남자아이 이상으로 활발해서 ‘오빠’라는 별명으로 불렸다더군요(웃음).

    “무용이나 음악,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어요. 공부는 원래 싫어하다 보니 잘하지도 못했고, 주로 그림을 그리든가 책을 보든가 하면서 시간을 보냈죠. 어머니는 늘 ‘차라리 살림을 하라’고 꾸중하셨어요. ‘오빠’라는 별명은 성격이 적극적이어서 붙여진 거였어요. 스크린 속 이미지와는 많이 달랐죠. 학교 다닐 때는 리더가 돼서 아이들을 이끌었거든요.

    그러다 데뷔하고 나서 180도 바뀌었어요. 처음 극단에 들어갔는데 선배들이 이름을 물으면 대답도 못하고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니까요(웃음). 운 좋게도 첫무대부터 비중 있는 조연급 역할이 주어졌죠. 이후에도 죽 그렇게 연기를 했어요. 지금처럼 영화학교나 연극학교가 있던 시절이 아니니까 극단에서 연구생으로 있었죠. 그 때가 열일곱 살이었어요.”

    연극은 친정, 영화는 시집

    -극단에 들어가게 된 계기가 있었을 텐데요.

    “동창생한테 끌려가다시피 갔어요. 솔직히 나는 연극이나 영화 한 편 제대로 본 적도 없었어요. 우연히 친구 손에 끌려가서 본 영화가 문예봉씨가 주연한 ‘임자 없는 나룻배’였는데, 거기 보니 등장인물이 모두 이세상 사람 같지 않고 선녀 같았어요. 그래서 ‘나도 저렇게 돼야겠다’고 마음먹은 거죠. 그때는 배우를 천시하던 시절이어서 여배우가 무척이나 귀했어요. 강홍식 선생이라고 배우 강효실씨 부친, 그러니까 최민수의 외할아버지 되시는 분이 유명하셨는데, 그 분이 일부러 분장을 하고 여자 역할을 하셨을 정도니까요.

    여러 가지로 어려웠지만 배우가 된다는 일념으로 무대에 올랐어요. 그렇게 연극을 먼저 시작했는데 그 모습을 본 선배들이 영화를 하지 않겠느냐고 제의를 했죠. 그래서 처음 했던 영화가 1947년작 ‘새로운 맹서’예요. 해방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죠. 그 무렵 ‘토월회’가 재조직되어 스카라극장에서 ‘40년’이라는 연극을 공연했는데 그 작품에 저는 중국 옷을 입은 장님 소녀 역할로 잠깐 출연했어요. 공연이 끝나고 동양극장에서 다른 작품을 하는데 복혜숙 선생이랑 최운봉 선생이 찾아오셨더라고요. ‘이번에 새로 영화 들어가는데 하겠느냐’는 거였죠.

    그때만해도 내가 철이 없고 콧대가 높아 ‘무슨 역할인데요?’하고 되물었어요. 가져오신 대본을 봤더니 주연에다 어촌처녀 역할이니까 나에게 딱 맞거든요. 그래서 하겠다고 했죠. 그 작품이 바로 ‘새로운 맹서’로 영화 데뷔작이에요. 그 다음에 ‘밤의 태양’ ‘마음의 고향’으로 이어졌죠.”

    -영화판이라는 데가 어떻던가요, 어린 나이에. 20세 전후가 아니었나 싶은데.

    “나한테 연극은 친정 같고 영화는 시집 같아요. 연극무대는 앙상블을 위해 전체단원이 한데 모여 집체적으로 생활하잖아요. 연습하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리고. 그러다보니 서로 친해져서 가족 같은 분위기가 되는데, 영화는 전혀 그렇지 않았어요. 찍을 때만 잠깐 모였다가 헤어지면 그뿐이고, 그러니 정이 안 갔죠. 영화를 하는 동안에도 틈만 나면 친정집 가는 기분으로 연극하러 갔어요. 오죽하면 신 감독이 배우극장이라는 극단을 따로 만들었겠어요.

    ‘새로운 맹서’를 만든 신경균 감독은 일본에서 공부하신 분이었어요. 나 나름대로는 연극에서 주연도 했으니까 연기에 자신감을 갖고 있었는데, 사실 좌절을 많이 했죠(웃음). 연극에서는 동작이나 대사가 커야 감동이 전달되지만 영화는 그렇지 않잖아요. 무대에서 하던 대로 하니까 감독님이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딱 자르는 거예요.

    그때까지 클로즈업이 뭐고 바스트가 뭔지도 모르고 있었으니 할말 다했죠. 선배들이 일일이 가르쳐주는 것도 아니고. 그런 상태에서 갑자기 시커먼 기계가 앞에 딱 들이닥치니까 주눅이 들죠. 제약이 어찌나 많은지 정이 안 붙더라고요. 감독한테 야단을 맞고는 서럽고 속이 상해서 막 울었어요. 연기를 못한다면 오히려 나을 텐데 나름대로 감정을 잡아서 하는 데도 오버액션이라고 하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서 무척이나 애를 먹었던 기억이 잊혀지지 않아요.”

    -데뷔작품은 반응이 좋은 편이었나요.

    “그때는 35mm 영화를 찍는 것만으로도 긍지를 갖던 시절이고 영화가 많이 안 나오던 때여서 반응이 좋았죠. 영화계에서는 신인이 하나 나왔다고 했고요.”

    1960년대 충무로 女帝 최은희

    ①1959년작 ‘동심초’ ②1961년작 ‘성춘향’

    -그 직후에 그 영화의 촬영감독과 첫 번째 결혼을 하셨죠.

    “연극계에서도 프로포즈하는 사람이 많았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별로 결혼할 마음이 없었는데, 그 무렵 조미령이 제작자와 결혼을 한 거예요. 비슷한 나이의 동료가 갑자기 시집을 가버리니까 어린 마음에 ‘나는 이러다가 결혼을 못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죠. 그 시절에는 스무 살만 돼도 노처녀라고 다들 걱정하곤 했으니까요. 하지만 예전부터 연기자와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생각했거든요.

    첫 영화를 찍을 때 출연자 중에 처녀가 나 하나였는데 두 사람이 프로포즈를 했어요. 나와 결혼하게 된 김학성씨는 촬영기사였죠. 갑자기 다방에 데려가길래 영화에 관해서 뭘 좀 가르쳐주려나 싶어 쫓아갔더니 갑자기 자신의 불행한 개인사를 쭉 늘어놓는 거예요. 게다가 그 누님도 그 영화에 같이 출연하셨는데, 둘이 잘 어울린다는 둥 옆에서 분위기를 이끄는 거예요. 결국 얼떨결에 결혼을 하게 됐죠. 지금 생각하면 엄청나게 순진했어요.

    집에서도 반대가 대단했거든요. 나이도 열두 살이나 차이 나고. 속으로는 ‘어쨌든 배우는 아니잖아, 기술이 있으니까 밥 굶기지는 않을 테고’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렇지만 결혼하자마자 후회가 막심했죠. 지극히 사랑해서 결혼한 게 아니니까 정나미가 떨어졌죠. 친정에 가서 어머니한테 하소연도 하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6·25 전쟁을 맞게 됐어요.”

    -6·25때 고생을 심하게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피난도 못 가고 인민군 점령하의 서울에 남았다가 경비대 협주단 단원으로 끌려갔죠. 연극계, 영화계, 무용계의 이름깨나 알려진 이 가운데 피난 못간 이는 모두 왔더군요. 한동안 200여명이 명동성당에 갇혀 꼼짝없이 숙식을 했죠. 국군이 서울을 수복하기 직전 인민군에게 끌려 북으로 올라갔어요. 김동원씨와 주증녀씨는 개성을 거쳐 이북으로 가고, 나와 김승호씨는 청량리쪽으로 해서 이북으로 올라갔는데, 공습이 계속되니까 밤에만 걷고 낮에는 민가에서 잤어요. 그렇게 걷고 걸어 어느 틈에 38선까지 넘었는데 그 와중에 김승호씨가 도망쳤죠. 그렇게 누군가가 도망가면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어찌나 겁을 주는지…. 결국은 저도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도망쳤어요. 우리집에서는 내가 죽은 줄로만 알고 있었어요.

    그 무렵 김학성씨는 군 소속 뉴스 카메라맨으로 일했어요. 나는 최전방에서 갖은 고생을 다하고 있는데 무심하게도 소식 한 장이 없는 거예요. 인편을 통하면 방법이 없는 게 아니었거든요. 정말 매정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이 사람과는 평생을 같이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 거죠.”

    신상옥과의 만남

    1960년대 충무로 女帝 최은희

    1964년작 ‘벙어리 삼룡이’

    -그러다가 신상옥 감독을 만난 거군요. 첫 만남을 기억하세요?

    “동료배우 황남씨가 영화를 함께 하자고 제안해 왔어요. 내가 출연하고 있던 연극 ‘춘향전’을 영화화하고 싶다는 거였죠. 중국집에서 만나 식사를 하면서 감독을 소개하는데 바로 신 감독이었어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언젠가 어디서 본 듯했어요.

    전에 내가 대구에서 연극할 때 키 큰 사람이 기둥에 기대어 서서 앉지도 않고 연극을 관람하는 거예요. 무대에서 연기를 하는 중에도 자꾸 눈에 띄었죠. 다음날 보면 또 와서 서 있고. 그 사람이 바로 신 감독이었던 거죠. 내가 연극하는 걸 쭉 지켜봤더라고요. 자기가 영화에 쓸 배우를 물색해온 거였어요.

    한참 집안일로 마음고생을 하고 있을 무렵에 사육신 이야기를 다룬 윤백남씨의 연극 ‘야화’에 출연했는데, 체력이 많이 소진되는 역할이었어요. 마침내 공연을 하다가 무대에서 쓰러졌죠. 그걸 객석에서 구경하던 이 양반이 뛰어들어와서는 나를 들쳐업고 병원으로 갔어요. 나중에 정신차려 보니까 선배 언니가 ‘신 감독이 너 업고 병원에 데리고 왔다’고 말해주더군요. 이 얘기를 하면 사람들이 ‘백마 탄 왕자가 구원하러 왔다’고 농담하곤 했죠(웃음). 나중에 보니까, 이 사람이 내가 한 연극을 안 본 게 없어요. ‘맹진사댁 경사’며 유치진 선생의 ‘왜 싸워’며. 나만 몰랐던 거예요. 그렇게 해서 만났죠.”

    -신 감독은 아직 총각이었고.

    “총각이었지, 법적으로는.” (웃음)

    -무슨 영화 같은 스토리인데요. 그러고 나서 신 감독과 작업해보니 어떻던가요. 다른 감독과는 많이 다르던가요.

    “맨 먼저 ‘코리아’라는 다큐멘터리를 했고 그 다음에 극영화 ‘꿈’을 찍었는데, 신 감독은 배우를 참 편하게 해주는 감독이에요. 다른 배우들도 그렇게 느낄 거예요. 일단 배우한테 맡기는 스타일이죠. 시켜보고 거기서 좋은 점만 골라 자기가 화폭에 담아요. 어떤 감독은 이만큼 봐라, 눈을 삼각형으로 굴려라 하며 세세하게 지시하곤 하는데, 나는 솔직히 그런 스타일 별로였거든. 감정만 제대로 나오면 되지 눈알을 어떻게 돌리든 무슨 상관이 있겠어요. 신 감독은 그런 점에서 참 편했죠.

    이후로 ‘무영탑’ ‘젊은 그들’ ‘지옥화’ ‘어느 여대생의 고백’으로 이어졌죠. 초기에는 흥행이 부진하다가 ‘어느 여대생의 고백’부터 성공해서 쭉 괜찮았어요. 처음에는 주먹밥 싸 가지고 삼륜차 타고 다니면서 촬영을 했어요. 아무리 어려워도 우리 돈으로 찍었지 남의 돈으로 영화를 만들지는 않았거든요. 의상도 모두 집에서 만들고. 심지어는 집에 있는 자개장까지 들고 나가 소품으로 썼어요. 그러다 보니 집에는 뭐든 들여놓고 살지를 않았어요. 갖다 놓으면 뭘 해요, 금세 안양촬영소 소품실에 가 있을 텐데. 아무리 못 가져가게 해봐야 내가 일 나간 다음에 조연출들이 와서 다 집어가곤 했죠.” (웃음)

    1960년대 충무로 女帝 최은희

    1984년 북한에서 제작한 ‘탈출기’

    -이 시기에 출연한 작품 가운데 유명한 것을 꼽자면 ‘동심초’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가 있을 겁니다. 이 두 작품에서 보여준 수절 과부, 연상의 여자는 최은희씨를 상징하는 하나의 이미지가 되었죠. 성불구 남편을 둔 경우도 있고. 경제적으로 힘들어서 늘 집 팔러 왔다갔다하는 역할, 한마디로 전형적인 인고의 한국 여성상인데요.

    “만날 지지리 궁상 떠는 거죠. 그래서 캐릭터를 바꿔본 작품이 ‘지옥화’였어요. 그 후에 또 한번 바꿔본 게 ‘로맨스 그레이’의 바걸 역할이었고요. 최은희가 저렇게도 변신할 수 있다는 인정은 받았는데, 팬들한테서 항의도 많이 받았어요. 왜 그런 역할을 하느냐, 앞으로는 그런 역할 하지 말라는 팬레터가 사방에서 날아들었죠. 그래서 그 후에는 또 궁상 떠는 역할만 했죠.

    연기를 하다 보면 조용하고 정적인 이미지가 제일 어렵고 힘들어요. 동적인 역할은 사실 쉽죠. 내적으로 삭이고 가슴앓이하는 연기는 정말 하기에 버거워요.”

    “돈 들인다고 흥행되는 게 아니다“

    1961년작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는 신상옥 감독의 영화 중 가장 많이 알려진 작품이다. 시어머니를 모시고 어린 딸과 함께 살고 있는 전쟁 미망인이 남편의 친구를 사모하게 된다는 내용으로, 서정적인 화면에 달걀장사, 하녀, 시어머니 같은 인물들이 서사의 풍부함을 더한다. 신 감독은 “당시에는 영화가 120분을 넘어야 검열을 받을 수 있게 돼있어서 달걀장사나 하녀 같은 이야기를 뒤에 덧붙여 촬영한 것”이라고 회고했다.

    이와 함께 신 감독은 “‘성춘향’으로 신필름이 흥행의 절정을 맞이한 후, 한국영화가 산업적으로 얼마나 가능성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만든 영화가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였다”고 덧붙였다. 엄청난 예산을 들인 경우와 반대의 경우 흥행에서 어떤 결과나 나오는지 테스트하기 위해 ‘벼락부자’와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를 찍었다는 것이다.

    구봉서가 주인공을 맡은 영화 ‘벼락부자’는 돈이 너무 많아 골치 아파하는, 심지어 염소에게도 돈을 먹이는 괴상한 사나이를 그렸다. 올스타 캐스팅의 흥행물이었지만 실패했다. 반면 그때까지 한국영화사상 가장 돈을 적게 들인, ‘방 두개와 아이 하나로 찍었다’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는 성공했다. 결국 제작자 신상옥은 이를 통해 “돈만 많이 들인다고 손님이 드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했다.

    -정적인 역할을 연기할 때 특별한 비법이 있었나요. ‘자매의 화원’과 ‘동심초’를 보면 최은희씨는, 눈을 내리깔다가 똑바로 쳐다보고 얘기를 하고 다시 고개를 숙이는 식의 전형화된 얼굴의 자세 혹은 각도가 있었던 것 같은데요. 굉장히 양식화되어 있으면서도 특이한 향기가 있거든요.

    “무슨 비법이 있겠어요. 캐릭터에 몰입해서 자아를 의식하지 않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는 거죠. 정적인 연기를 할 때는 그렇게 고개를 옆으로 꼬는 형식이 있었죠. 고생을 많이 하고 고민이 깊은 사람은 고개를 정면으로 숙이는 법이 없어요. 고개가 처져도 맥없이 옆으로 픽 처지는 거죠. 비슷한 연기가 나온 것은 그런 생각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네요.

    사람들이 어떻게 평가하든 나는 그런 영화들이 참 답답했어요. 그래도 굳이 꼽자면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가 가장 기억에 남죠. 대사가 없어서 더 힘들었어요. 그런 유의 작품으로는 ‘열녀문’도 참 좋아하고 아끼는 영화예요.”

    오로지 영화만 보이는 사람

    -이 무렵 최은희씨와 대조를 이루던 배우가 도금봉씨였습니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에서는 식모로, ‘성춘향’에선 향단이로 출연했죠. 자료를 찾아보니 한 인터뷰에서 “나는 정적으로 연기해야 하는데 도금봉씨는 동적인 연기를 하니까 대비가 되어 너무 어렵다. 동적인 연기가 더 나아보이지 않나”하고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분명히 그런 면이 있어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에서도 도금봉씨와 김희갑씨가 연기하는 장면은 세트가 떠나가도록 웃음바다였거든요. 내가 봐도 두 사람이 나오는 장면은 정말 재미있어요. 반면 나는 숨소리도 안 들릴 정도로 조용하니까 이거 내가 연기를 하는 건지 마는 건지 항상 불안하고. 그래서 늘 ‘나도 저런 역할 좀 해봤으면’ 하는 아쉬움을 느끼곤 했죠.”

    -개인적으로도 아쉽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사실 ‘지옥화’를 아주 좋아하거든요. 아끼는 작품 가운데 하나죠. 최은희씨에게 이런 면이 있었는지 깜짝 놀라기도 했고요. 최은희씨가 맡은 역할이 양공주였는데, 남자에게 옷의 지퍼를 올려달라고 하는 장면은 정말 관능적이죠. 거침없이 담배를 피우면서 남자들을 농락하는 캐릭터. 당시만해도 여자가 담배를 피운다는 게 굉장히 특별한 의미를 지녔잖아요. 대단한 열연이었죠.

    “연극무대에선 담배 피우는 역할을 많이 해 봤어요. 6·25 무렵 한영모 감독이 만든 ‘사나이의 길’이라는 영화에서 바걸 역할을 했어요. 대본연습을 하러 갔더니 담배를 피워보래요. 무대에서 피웠던 것만 믿고 불을 붙였더니 그건 피는 게 아니라고 하데요. 연기를 꿀꺽 삼켜야 한다는 거죠. 정말 하라는 대로 해봤다가 그대로 핑 돌아서 쓰러졌다니까요. (웃음) 담배를 정식으로 피운 건 그때부터였죠. 지금은 끊은 지 오래됐지만. 신 감독은 술도 안 하고 담배도 안 하니까 내가 미안해서 끊었어요.

    ‘지옥화’ 얘기를 좀더 하자면, 흔히 한영모 감독의 ‘운명의 손’에 한국영화사상 첫 키스신이 있다고들 하지만 사실은 ‘지옥화’가 먼저예요. 그 장면을 10번을 찍었어요. 상대배우였던 김학씨가 섹시하게 보인다고 가슴에다 털을 붙였는데, 그 여름에 촬영이 길어지니까 땀이 나서 그 털이 나한테 붙고 난리가 났었죠(웃음). 내가 부인이라지만 신 감독은 작품을 할 때면 그런 거 안 보이는 사람이에요. 오로지 영화만 보일 뿐이죠.

    첫 영화 ‘꿈’만 해도 11월에 광릉 개울가에서 목욕하는 장면을 찍었어요. 가장자리에 살얼음이 얼었는데 준비도 없이 그냥 찬 얼음물에 들어가라는 거예요. 정강이를 바늘로 콕콕 찍는 것 같은데 이 양반이 갑자기 ‘뭐 하는 거야, 빨리 들어가지!’ 하고 소리를 지르는 거예요, 카메라 돌아간다고.

    그 후에도 평생을 그렇게 살았어요. 영화라면 물불을 안 가리거든요. 오죽하면 내가 ‘활동사진이 그렇게 좋냐’고 물었겠어요. 북한에서 ‘소금’을 찍을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백두산에서 나무를 해오는 장면이었는데 4월인 데도 쌓인 눈에 무릎까지 푹푹 빠져요. 그 무렵 내가 이북에서 담석수술을 받은 직후였거든요. 그 몸을 해 갖고 얼음구덩이에서 하루 종일 영화를 찍으니 나중에는 내 몸이 내 몸 같지가 않더군요. 그래도 그렇게 고생해서 찍은 덕분에 모스크바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탔죠.”

    ‘성춘향’ vs ‘춘향전’

    -1960년대 초반 한국영화계의 사건 가운데 하나가 홍성기-김지미 커플의 ‘춘향전’과 신상옥-최은희 커플의 ‘성춘향’이 맞대결이었습니다. 당시의 에피소드를 좀 들려주세요.

    “‘성춘향’은 한국영화 최초의 컬러 시네마스코프였어요. 오랜 기간 준비했죠. 컬러에 맞도록 화장품도 준비하고 가발, 쪽머리도 하나하나 챙겼어요. 의상도 내가 직접 동대문시장에 가서 순 갑사, 면, 무명천을 사다 집에서 물감 들여가며 만들었고요. 그러는 중에 홍성기 감독이 ‘춘향전’을 찍으려고 준비한다는 이야기가 들려요. 우리가 준비하는 걸 뻔히 알 텐데 그럴 리가 있나 싶었어요. 그런데 알아보니 사실인 거예요.

    그 쪽에는 선민영화사라는 든든한 스폰서가 있었지만 우리는 자력으로 영화를 찍고 있었고, 또 김지미씨가 나보다 나이가 한참 어리니 춘향 역에 딱 맞는 배우였죠. 오죽하면 짓궂은 기자들이 ‘40대 춘향이와 10대 춘향이의 대결’이라고 썼겠어요. (웃음)

    결국은 양쪽 다 양보할 수 없어서 밀어붙였죠. 그런데 잡지에 보니 ‘김지미네 영화에서는 춘향이 의상 한 벌에 30만원을 들였다더라’ 하는 유의 기사가 이어지는 거예요. 당시 30만원이면 지금 돈 3000만원쯤 된다고 봐야죠. 우리는 면에다 갑사 사다가 의상 만들고 있으니 불안할 수밖에요. 사실 겁났죠. 그래도 결국 우리가 흥행에서 압도적으로 이겼으니까 성취감도 있고 통쾌함도 있었어요. 한편으로는 미안한 생각도 들었지만.”

    -김지미씨는 한마디로 딱 잘라서 “재미없게 만들었으니까 흥행에 실패한 것“이라고 하더군요. 흥행에서 이긴 원인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작품 내용이야 뻔한데, 우리는 소박하게 가는 대신 팀워크가 좋았다고 생각해요. 연기자들도 모두 잘해줬고. 반면 그쪽 영화는 김지미씨 하나만 좋았지 노경희가 맡은 향단이나 이도령의 캐스팅이 이상했어요. 결국 지미 혼자서만 고생한 셈이죠. 영화는 팀워크가 잘 맞아 앙상블이 이뤄져야 작품이 되는 거거든요. 한두 사람만 뛰어나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죠.”

    -최은희씨의 이미지 가운데 재미있는 것은 ‘또순이’ 캐릭터입니다. 억척스러우면서도 자기 본분을 잘 지키는 여인. 북한에서 연기한 ‘소금’도 그 연장선상에서 강한 생명력을 갖고 있죠. ‘쌀’이나 ‘촌색씨’ ‘산색시’는 물론이고 직접 감독을 맡았던 ‘민며느리’에서도 마찬가지였다고 봅니다. 또순이 역할을 할 때는 연기가 달라졌나요. 정적이고 순종적인 이미지를 표현할 때와는 사뭇 다르다는 느낌이 드는데요.

    “우선 ‘소금’에서 맡은 역할의 경우 모스크바영화제에서 막심 고리키의 ‘어머니’ 같다는 평을 들었어요. 상당히 높이 평가하더군요. 물론 맡은 캐릭터에 따라 다르게 연기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소금’ 주인공은 함경도 여성이니까 말투도 좀 억세야 하고.

    재미있었던 게 북한에서는 벌써 함경도 사투리가 거의 없어지고 이른바 ‘문화어’라는 것만 남았거든요. 조연출 어머니가 함경도 출신이어서 사투리를 적어달라고 했더니 안 된다는 거예요. 이유를 나중에야 알았죠. 문화어만 사용하게 돼있기 때문에 사투리를 쓰면 안 된다는 거였죠. 그래서 무슨 소리냐고, 작품이 살려면 주인공이 당연히 사투리를 써야 실감이 난다고 박박 우겼죠. 아마 북한 배우였으면 감히 그렇게 못했을 거예요. 어찌어찌해서 고집대로 했는데, 나중에는 아무 말도 없더라고요. 오히려 잘했다는 소리를 들었지.”

    -다음으로 아까 얘기한 ‘지옥화’에서 보여준 팜 파탈의 이미지가 있습니다. 이 캐릭터에선 관능적으로 보이는 것이 관건일 텐데 그건 어떻게 만들어냈는지 궁금합니다.

    “연구 많이 했죠. 그건 무대경험이 뒷받침된 거예요. 이광수의 ‘무정’ 을 비롯해 연극무대에서 기생 역할을 많이 했거든요. 그때부터 그런 동작을 많이 연구 했어요. 후배들한테도 자주 하는 얘기인데, 길을 가든 전철을 타든 버스를 타든 온갖 사물이나 사람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 자기가 연기할 게 다 있는 법이거든요. 그 안에 수만 가지 인물이 있어요. 걸음걸이며 얼굴에 찍힌 점 하나, 껌 씹는 모습까지. 그걸 하나하나 잘 관찰해둬야 내가 갖고 있는 것을 깨뜨릴 수 있어요. 그래서 일부러 파마를 하고 걸음걸이를 바꿔가며 변신하려고 노력했죠.”

    ‘지옥화’는 신상옥 감독이 1958년 만든 작품이다. 양공주와 밀수꾼 그리고 주한미군이 뒤엉켜있는 서울의 한복판에서 생존본능 하나만으로 세상을 헤쳐나가는 인물을 그린 신 감독 초기 걸작 중 한 편. 시골에서 상경한 동식은 미군의 밀수품을 훔쳐 파는 건달패의 두목인 형 영식과 그의 애인 소냐를 만난다. 미군을 상대로 몸을 파는 소냐가 동식을 유혹하여 관계를 가지면서 위험한 삼각관계가 형성되고 결국 소냐는 동식의 손에 비참한 최후를 당하는 줄거리다.

    신 감독은 이 영화에서 미군에 기생해 살아가는 이들 하층민을 냉정하고 도발적인 이미지로 형상화했다. 당시 제작비가 넉넉지 못해 영화에 등장하는 미군부대 파티장면은 영내에 들어가 실제 파티를 몰래 찍은 것이었다고 한다. 거의 다큐멘터리식으로 촬영했다는 서울의 풍경은 영화의 리얼리즘을 더욱 부각시키고 있다.

    -신상옥 영화의 또 한 가지 특징은 장소와 영화가 잘 조화된다는 점입니다. ‘자매의 화원’은 작품 분위기와 단아한 한옥이라는 배경이 잘 맞아떨어지는 반면, ‘지옥화’에서는 말 그대로 지옥에서 핀 꽃을 그려내기 위해 진창을 사용했단 말입니다.

    “‘지옥화’는 주로 사근동에서 촬영했죠. 한양대 위에 갈대밭이 우거지고 물이 고여있는 데였어요. 촬영을 하는데 조명부가 가만 있지 못하고 막 움직이는 거예요. 감독님이 왜 움직이느냐고 야단을 치는데 알고 보니 거머리가 달라붙어서 어쩔 수가 없었던 거지. 내 머리도 흙 속에 반쯤 잠겼는데, 일어나 보니까 내가 누웠던 자리에 이만한 지렁이 거머리들이 오물오물 엉켜있는 거예요. 아이고, 그거 생각하면 지금도 근질근질해요.” (웃음)

    -TV 드라마에 출연한 적도 있나요.

    “안 해 본 게 없어요. 연극으로 시작해서 라디오 드라마, 영화, TV 드라마까지. CF는 신 감독이 못하게 해서 안 했죠. 라디오 드라마는 얼마나 많이 했는데요, KBS가 정동에 있던 시절에. 소설 낭독도 내가 입체낭독이라는 걸 처음 시도했어요. 혼자서 소설을 낭독하지만 각 인물에 맞춰서 목소리를 바꿔가면서 하는 거죠. 한창 인기 있던 프로그램이 ‘장미부인’이라는 거였는데 아마 1945~46년경이었을 거예요. 영화를 찍게 되는 바람에 완성을 못하고 다른 사람한테 인계했죠. 참 아쉬웠어요.”

    새벽 녹음실의 추억

    여기까지 인터뷰가 진행될 무렵 신상옥 감독이 안방에서 쓰윽 나온다. 갑자기 궁금해졌다. 신상옥 감독은 배우 최은희에 대해 어떻게 평가할까. 신 감독은 “항간에 내가 유교적·봉건적인 질곡에서 벗어나려는 인간을 많이 그렸다고 평가하는데 그건 사실이 아니다. 나는 유교질서의 예찬론자이고, 아직까지 최 여사(신 감독이 최은희씨를 지칭할 때 쓰는 용어)보다 더 한국적인 용모를 갖춘 여자는 없다고 생각한다”고 정리했다. 이러한 까닭에 그 역시 ‘벙어리 삼룡이’와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를 최은희씨의 최고작으로 꼽았다. ‘빨간 마후라’의 바걸 역할만 해도 좀 튄다는 것이다.

    -최은희씨의 상대역을 가장 많이 한 남자배우는 누구일까요. 아마도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을 법한데요.

    “내가 그때 여배우 치고는 체격이 큰 편이었거든요. 그래서 김진규씨나 신영균씨, 나중에는 남궁원씨하고 많이 찍었죠.

    ‘동경아 잘 있거라’에서 여간첩 역할을 맡았을 때 이런 에피소드가 있었어요. 간첩이 기모노를 입고 변장을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시사회 때 당시 공보부 장관을 하던 양반이 ‘아니 최 여사, 최 여사가 왜 저런 옷을 입습니까?’ 그러는 거예요. ‘최은희는 한국을 대표하는 여성이기 때문에 왜놈의 옷을 입으면 안 된다’는 거죠. 다른 여배우라면 몰라도 최은희만은 안 된다는 거예요. 결국은 그 양반이 그 장면을 덜어내더(삭제)라고요(웃음). 그게 박정희 정권 시대였어요.”

    -신 감독과 오래 작업을 한 덕분에 적어도 겹치기 출연은 안 해도 돼서 좋았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개런티를 제대로 못 챙겨 받는다는 단점도 있었겠지만.

    “그렇지도 않아요. 우리 영화사 (신필름) 작품을 겹치기 했죠. 그 무렵 1년에 28~30편 찍었으니 회사 안에서도 겹치기로 찍고, 또 다른 영화사 작품도 내가 이 양반 몰래 계약해서 찍고 그랬어요. 계약한 다음에는 어쩔 수 없으니까 가만히 계시더라고(웃음). 많게는 네 작품에 동시 출연했죠. 다른 배우들은 스무 작품까지 겹치기 출연했다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나 싶어요. 용하기도 하고.

    특히 곤란한 경우가 한 쪽은 사극이고 한 쪽은 현대물인 경우죠. 분장을 바꾸는 것도 무척 힘들거든요. 달리는 지프 안에서 분장하는 것은 예사였죠 뭐. 아마 돌아가신 김승호 선생님이 제일 겹치기를 많이 했을 거에요. 이쪽에서 촬영하고 있는데 저녁에 저쪽 제작부장이 와서 강제로 끌고 가거든요. 그러면 저쪽 촬영장에서 이쪽 대사를 하기도 하고. 아주 유명한 에피소드예요.

    우리 때는 동시녹음이 없었으니 촬영이 끝나면 또 녹음하러 가서 밤을 새야 했어요. 녹음실에서도 참 에피소드가 많았죠. ‘입맞추러 갑시다’ 하면서 우르르 몰려들어가면 그대로 감옥이야. 어두컴컴한 녹음실에서 아침부터 새벽까지 녹음을 하거든요. 나중에는 화면도 잘 안 보여요, 머리가 띵해서. 그러다 새벽이 되면 일제히 청진동 해장국집, 속칭 ‘따구집’에 몰려가는 거예요. 재미있는 일이 참 많았어요.”

    1960년대 충무로 女帝 최은희

    다행스러운 것은 파란만장한 반세기를 보낸 두 사람의 노후가 비극이 아니라는 점이다.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은 무척이나 다정해 보였다.

    -목소리 녹음은 직접 했나요.

    “그럼요. 내가 출연한 작품에 남의 목소리를 더빙해본 적이 없어요. 물론 몸은 정신없이 바빴지만 내가 촬영한 것에 어떻게 남의 목소리를 빌려요. 그래서 신 감독은 나보고 욕심이 많다고 그러죠. 심지어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에서 피아노 치는 것도 직접 했고, 가야금도 직접 했고, 승무도 내가 췄죠. 완벽하게는 못해도 조금씩은 다 했어요. 도움을 빌린다는 게 그렇게 싫었어요, 서툴더라도 내 손으로 직접 해야지.”

    -말이 나온 김에 연출했던 이야기도 했으면 합니다. 감독을 왜 하고 싶었는지 궁금한데요.

    “솔직히 내가 하고 싶었던 건 아니에요. 신필름에서 1년에 30여편을 제작하던 때니까 감독이 부족했던 거죠. 어느날 저 양반이 나보고도 감독 하나 하라고 그러더라고요. 처음에는 펄쩍 뛰었더니 아니라고 그만한 능력이 있으니까 한번 해 보라고 용기를 북돋아주는 거예요. 그래서 찍은 게 ‘민며느리’였는데 감독상은 못 타고 주연상만 탔죠.

    지시에 따라 연기하다가 내가 남에게 연기를 시키려니 정말 어려웠어요. 그렇게 어려운 줄 몰랐어요. 차라리 내가 하는 게 낫지 얼마나 답답한지. 또 한 가지는 여성이 하기에는 체력이 딸릴 수 있겠다는 생각도 했어요. 그때만 해도 워낙 건강했으니까 한계를 느끼지는 않았지만 참 힘들더라고요. 촬영장소 헌팅을 갈 때도 ‘내가 왜 남자한테 지나’ 싶어서 꼭 따라다녔는데, 저 양반이 옆에서 보기에 피곤해 보였던 모양이에요. 편집은 직접 하지 말고 편집기사에게 맡기라고 하더군요.

    원래는 편집도 내가 하겠노라고 우기다가 결국 양보했죠. 편집은 기사가 하고 나는 지켜보는 걸로. 왜냐하면 우선 저 양반이 편집을 남한테 맡기지 않아요. 내가 신 감독한테 편집을 배웠기에 저 양반을 따라하고 싶었던 거죠. 작품 ‘꿈’을 편집할 때 우리집에다, 그러니까 저 양반 처가에다 기계 갖다 놓고 방에다 필름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같이 이것저것 골라가며 편집을 했어요. 신 감독이 자르면 나는 옆에서 침 발라서 마그네틱 빡빡 긁어 가지고 아세톤으로 붙이고 그랬거든요. 그러다가 자연히 편집이 뭔지, 액션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배웠죠.”

    -제가 당시 기사 한 토막을 읽어보겠습니다. ‘남편이 짜준 촬영대본 들고 촬영현장에서 레디고만 부른다는 세상의 소문에 적잖이 불쾌해 하다. 처음 8시간 동안 7신33커트를 척척 찍었다.’ 그런 시선이 적지 않았던 모양이죠?

    “그랬어요. ‘배우가 무슨 감독을 하겠어, 남편이 콘티 다 짜준 거 갖고 나가서 찍겠지’, 그런 시각이었죠. 사실 내가 그 전에도 안 해본 게 없어요. 데뷔작인 ‘새로운 맹서’ 때도 내가 그림 그려가면서 스크립터를 했다니까. 원래 호기심이 많고 모험을 좋아하는 성격이에요. 콘티도 내가 다 짰어요. 신 감독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어요. 처음에는 자기가 뒤에서 봐주겠다더니 자기 일이 바쁘니까 그냥 무시해버리더라고. 솔직히 원망도 많이 했어요.”

    “민며느리는 걸작이야”

    -‘민며느리’ 다음에도 ‘총각선생’ ‘공주님의 짝사랑’ 등을 연출했습니다.

    “‘총각선생’은 지금도 아쉬운 게 많아요. 도금봉이 맡은 역할이 수다쟁이 부인이어서 그 입만 클로즈업으로 잡고 싶었는데, 그때만 해도 카메라 기능상 그 수준의 클로즈업은 안 됐어요. 아무리 가득 들어가도 얼굴만 크게 나오지 입만 잡을 수는 없었죠. 그런 기계는 한참 지나서야 나왔죠. 요즘 영화에서는 눈만 잡기도 하고 그러잖아요. 그런 컷을 보면 ‘총각선생’ 생각이 나는 거예요. 아쉽죠.

    ‘공주님의 짝사랑’은 라디오 드라마로 히트한 작품을 영화로 만들었는데, 구중궁궐에 있는 공주가 민가에 몰래 나와서 암행어사같이 돌아다니면서 좋은 남자 만나 따라다니는 줄거리였어요. 그 영화 하면서 감독은 더 이상 못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어찌어찌 완성했죠. 우선은 연기를 해야 하니까 양쪽을 다 하는 게 벅찼고, 또 검열이 워낙 심했기 때문에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었거든요. 연기만 하면 되는데 굳이 그런 것까지 신경쓰며 살아야 할 이유가 뭐가 있나 싶고요. 요즘만 같았다면 아마 계속 연출을 했겠죠. 그래서 요즘 영화인들이 부럽다니까요.”

    이쯤해서 신상옥 감독에게 최은희씨의 연출실력에 대해 객관적인 평가를 듣기로 했다. 그는 최은희씨의 설명과는 달리, 감독이 부족해서 연출을 시켰다기보다 배우 출신 감독이 좋은 감독이 될 거라는 믿음에서 맡겼다고 했다. 연극을 오래한 데다 드라마투르기도 잘 알고 있으므로 메커니즘만 따라주면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는 회고다. 그는 당시 너무 바빴기 때문에 최은희씨가 만든 영화를 보지도 못했단다. 최근에야 ‘민며느리’를 보니 카메라도 좋고 핀트도 좋아서 놀랐다는 것. “민며느리는 걸작이야.” 신 감독의 단언이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두 분은 한때 이혼도 했지만 지금까지 살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신 감독은 총각인데 이혼 경험이 있는 최은희씨와 결혼했고요. 이혼 후 홍콩에 최은희씨를 만나러 갔지요. 수기를 보니 신 감독은 최은희씨가 죽은 줄 알았다가 북한에서 만난 것으로 돼 있던데, 거기서 다시 만난 느낌이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이 질문에는 신상옥 감독이 입을 열었다.

    “고집을 부려서 그랬지. 이 사람도 고집이 대단하니까. 이혼 안 하겠다는 데 괜히 이혼해달라고 부추기고. 이북에 앉아서 또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고(웃음). 그러니 ×고집이지 뭐. 고집 때문에 망했어요. 고집이 세니까 그만큼 일했겠지만.

    글쎄, 죽은 줄 알았다가 다시 만났을 때는, 뭐 아무 감정이 없었지. 우리 사이는 단순한 부부라기보다는 오랫동안 일을 함께해온 동지적 결합이라고 할까. ‘사랑한다’는 선은 벌써 넘은 상태였으니까. 우리 시대는 서로 사랑한다는 표현도 못했다고. 그렇지만 사랑하니까 하여튼 북한에서 데리고 나온 거지. 그렇게 지옥에서 만난 첫날밤에도 숙소에 들어가서는 따로따로 자자는 거야. 왜 그러냐고 물으니 ‘지금이라도 사랑하지 않으면 다른 방을 쓰겠다’ 이거지. 내가 한참 웃었어, 여기까지 와서 부부싸움을 해야 하나 싶고.



    여자가 다 그래. 심지어는 이혼도 의미가 없었어. 이혼 후에도 매일 만났는데 뭐. 작업실에 나가면 안 볼 수가 없지. 그렇게 이혼 안 했으면 이북에 잡혀가지도 않았죠. 그러니까 북한에서 여러 가지 상황을 판단해서 ‘이 사람들은 다시는 한국에 안 들어갈 사람이다’ 생각했기 때문에 납치한 거겠지.”

    신 감독의 긴 이야기가 끝나고 최은희씨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우리가 그렇게 파란만장하게 50년을 같이 살았어요.”

    정말 그랬다. 그처럼 파란만장하게 살아온 부부를 다시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한국영화사에서도, 또 한국현대사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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