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2월호

파리 오트 쿠튀르 ‘황색 돌풍’ 일으킨 디자이너 김지해

“명품 ‘지해’ 브랜드 파워 3년내 ‘애니콜’처럼 키워낼 자신”

  • 글: 이지은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miley@donga.com

    입력2004-11-24 11: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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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리 오트 쿠튀르 ‘황색 돌풍’ 일으킨 디자이너 김지해
    “파리에서 세 번째 컬렉션을 마친 후였어요. 어디선가 전화가 왔는데, 제 일을 도와주던 펠릭스가 전화를 받고는 막 울더군요. 그러더니 ‘지해, 너 오트 쿠튀르 초청멤버가 됐다’고 해요. 어안이 벙벙하더라고요. ‘난 신청한 적도 없는데?’ 했더니 ‘내가 너 몰래 신청했어. 그런데 정멤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대. 네가 프랑스인이 아닌데도…’라는 거예요. 순간 제 눈에서도 눈물이 흐르더군요.”

    그의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이내 굵은 눈물방울이 떨어진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감격스럽다”며 슬쩍 눈물을 훔쳤지만 여전히 눈시울은 붉고 목소리도 파르르 떨렸다. 그가 파리 오트 쿠튀르 초청멤버가 된 것은 2001년 1월. 도대체 오트 쿠튀르라는 게 패션 디자이너에게 어떤 의미길래 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렇게 감격하는 걸까.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디자이너 김지해(37)씨. 프랑스 유력 일간지 ‘르 피가로’는 그를 “겐조와 파코 라반의 공백을 메울 디자이너”라 평했고, 뉴스전문채널 LCI TV는 ‘오트 쿠튀르의 횃불을 들고 파리 패션에 혁명을 일으킬 예술가”로 추켜세웠다. 세계적인 패션그룹 LVMH 역시 그를 “차세대를 이끌어갈 패션 디자이너”라고 격찬했다.

    그의 이름을 딴 ‘지해(JI HAYE)’ 브랜드는 프랑스에서 브랜드 디자이너인 그 자신보다 더 많이 알려져 있다. 그가 이처럼 남다른 주목을 받는 것은 한국인 최초, 동양인으로는 일본의 하나에 모리에 이어 두 번째로 오트 쿠튀르 회원이 됐기 때문이다.

    한국인 최초 오트 쿠튀르 입성



    고급 맞춤복이라는 뜻의 ‘오트 쿠튀르(haute couture)’는 정교한 예술작품으로 평가받는다. 거장 디자이너의 무한한 상상력과 장인의 섬세한 손맛으로 완성되는 이 ‘예술작품’을 구입할 수 있는 사람은 유럽이나 중동의 왕족, 거물급 정·재계 인사 등 전세계를 통틀어 1000명 남짓밖에 안 된다. 옷값도 한 벌에 수천만 원을 호가한다. 오트 쿠튀르는 단순한 의상이 아닌 ‘소장품’으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트 쿠튀르 멤버가 된다는 것 자체가 디자이너에겐 최고의 영예다. 1년에 두 차례 열리는 오트 쿠튀르 컬렉션은 디자이너들에게 꿈의 무대다. 오트 쿠튀르와 함께 파리 패션계에서 또 하나의 축을 이루는 프레타 포르테(pret-a-porter)는 고급 기성복을 의미한다.

    현재 프랑스의상연합 오트 쿠튀르 부문에는 17명의 정멤버가 활동하고 있다. 크리스티앙 디오르, 샤넬, 이브 생 로랑 등이 대표적인 회원들. 해마다 초청멤버를 선발하는데, 까다로운 자격조건을 갖춰야 함은 물론 정멤버 모두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 김씨는 2001년 초청멤버가 된 후 4년째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정말 코끼리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려워요. 제가 초청되기 전해에는 정멤버들이 초청멤버가 될 만한 디자이너가 없다고 판단해 아무도 뽑지 않았죠. 제가 초청멤버가 된 것은 잘나서가 아니라 제 옷에 깃들인 한국 문화의 향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혹시 최근에 남산의 단풍을 보신 적 있어요? 너무나 아름답죠. 인위적으로 그런 색감을 만들려고 해도 도저히 만들 수 없을 거예요. 또 사계절이 뚜렷해 저를 둘러싼 자연의 빛깔과 분위기가 매순간 달라지죠. 그런 환경에서 살면서 풍족해진 제 마음이 옷으로 나타나는 것 같아요.”

    실제로 김지해씨의 의상엔 전통과 현대, 서양과 동양이 혼재한다. 오트 쿠튀르에 걸맞게 서양적인 디자인을 추구하지만 그 안에는 한국적인 고풍스러움이 스며 있다. 한국의 전통적인 색감과 소재를 모던하게 변화시킨 것이다. 그는 견, 마, 모시, 노방 등 한국적인 소재를 즐겨 사용하고 ‘깨끼’ 등 한국적 바느질법을 이용한다. 특히 모시에 대한 그의 애정은 남다르다.

    “구겨지는 단점이 있긴 해도 모시의 자연스러운 구김을 통해 드러나는 실루엣은 한국인인 저만이 표현할 수 있죠. 또 모시의 촘촘한 마디마디를 살펴보면 그걸 짠 분이 속상했는지, 아니면 행복했는지가 고스란히 느껴져요. 한국 모시의 폭이 왜 어깨너비인 줄 아세요? 인간의 진실한 마음을 담기에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폭이기 때문이죠.”

    한 고객이 모시로 만든 그의 드레스를 1억원을 주고 샀다고 한다. 그후 모시의 매력에 푹 빠진 고객은 그에게 모시로 소파보를 만들어달라고 했다. 하지만 김지해씨는 모시를 한낱 소파보로 사용할 수는 없다며 단호히 거절했다. 그리고 모시 한 폭에 담겨 있는 우리 여인네의 희로애락을 설명하며 함부로 대해선 안 된다고 말해주었다. 그래서 김씨는 모시를 오트 쿠튀르 소재로만 사용하지 프레타 포르테에는 쓰지 않는다. 고귀하게 만들어서 그에 걸맞은 가격과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파리 오트 쿠튀르 ‘황색 돌풍’ 일으킨 디자이너 김지해

    오트 쿠튀르 컬렉션에 선보인 김지해씨의 의상들. 위사진은 2002년 봄·여름 컬렉션에서 한일월드컵을 기념하는 의미로 만든 축구공 문양 드레스로 전세계 매스컴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

    자그마한 키에 노랗게 염색한 머리, 검은 바지 정장에 붉은색 스카프. 디자이너 하면 떠오르는 화려하고 ‘엘레강스’한 여인의 느낌보다는 장난기 가득한 톰보이 같은 모습이다. 아니나다를까, “어릴 적 유별나게 옷을 좋아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바느질 한번 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여자아이들이 그렇잖아요. 화려한 옷 입은 마론인형을 좋아하고 옷 그림 그려서 종이인형에 입히기도 하고요. 하지만 저는 그래본 적이 한 번도 없어요. 다섯 살 때부터 집 근처 인왕산을 헤매고 다니면서 전쟁놀이를 했죠. 대학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였어요. 1년 내내 같은 옷만 입고 다니는 애들 있죠? 그게 바로 저였어요. 남자 점퍼 같은 것만 걸치고 다녔죠.”

    한의사로 한시를 좋아하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릴 적부터 천자문을 익히고 동양고전에 관심을 가졌다는 김씨는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한 후 1987년 일본유학을 떠날 때까지 대학교수가 되는 게 유일한 꿈이었다. 하지만 문학공부를 위해 밟은 일본 땅에서 그는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한 청년과 마주치게 된다.

    “숨쉬기조차 힘들 만큼 습하고 더운 여름날이었어요. 길 건너편에서 특이한 복장을 한 남자가 걸어오는 거예요. 잉글랜드 전통의상처럼 두꺼운 치마에 옷핀이 수천 개 꽂혀 있고 발에는 가죽장화를 신었어요. 시선을 올려 그 남자의 상체를 살펴보니 갖가지 색깔로 염색한 펑크머리를 하고 있었죠. 그동안 저는 옷이란 몸을 가리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를 본 순간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죠. 아, 저것도 옷이구나. 여름에도 겨울 옷을, 남자도 치마를 입을 수 있구나. 옷으로 저렇게 개인의 창의성을 표현할 수 있구나 싶었어요. 나도 내 삶의 틀을 깨뜨릴 수 있는 옷을 한번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하루 종일 떠나지 않았습니다.”

    당시 그는 명문 와세다대 입학허가를 받아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석 달이 지나도 그 남자의 모습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과감히 대학을 포기하고 일본 최고 권위의 의상학교인 문화복장학원을 찾아갔다.

    “세계적인 디자이너 다카다 겐조와 요지 야마모토가 다닌 학교예요. 그곳에서 처음으로 바늘을 잡았죠(웃음). 하지만 급속도로 빠져들었어요. 당시 부학장이 제 담임선생님이었어요. 그분은 강의 때마다 학생들이 만든 의상 중 좋은 것을 골랐는데, 유난히 제 옷이 많이 뽑혔어요. 그 때마다 ‘그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옷’ ‘소매가 살아 있는 옷’이라고 칭찬하셨죠. 그곳에서 2년 동안 공부했어요.”

    문화복장학원의 커리큘럼은 보통 3년 과정이다. 하지만 2년 후 담당교사는 그에게 ‘하산’을 명했다. ‘더 가르칠 것이 없다”는 게 이유였다. 곧바로 일본의 의류회사인 D그룹에 입사해 1991년 프랑스 지사로 발령을 받았다. 그렇게 해서 그의 인생은 또 한번 전환점을 맞게 된다.

    동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프랑스에서 저는 열심히 일했어요. 정말 제 능력의 200%를 쏟아냈죠. 그런데 바이어들이 김지해를 보는 게 아니라 회사만을 본다는 걸 알았어요. 일본 회사에 있으니 내가 일을 잘한다고 생각하는 거였죠. 자존심이 상했어요. 또 이렇게 있다간 정말 회사 속에 매몰되고 말겠구나, 나만의 옷을 만들 수 없겠구나 싶었죠. 더 망설일 이유가 없었어요. 곧바로 사표를 냈죠.”

    회사에서는 난리가 났다. 그를 붙잡기 위해 온갖 수단이 다 동원됐다. 그가 회사에 가져다준 수익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인은 원래 너처럼 의리가 없다’는 소리까지 들었지만 그는 결심을 굽힐 수 없었다. 그런 일들을 겪으면서 결심은 오히려 더 확고해졌다. 하지만 곧 더 큰 시련에 부딪혔다.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베야 하는데, 아예 그럴 기회조차 없었어요. 무엇보다도 회사의 방해가 문제였죠. 제 바이어들에게 ‘저 친구는 갑자기 회사를 나간 의리 없는 사람이다. 거래하지 말라’며 모함도 했고요. 정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어요. 자살을 생각할 정도였죠. 한국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간절했어요. 하지만 지금 돌아가면 영원히 낙오자가 될 것 같은 두려움에 머리를 빡빡 밀어버렸어요. 그러면 창피해서라도 한국에 돌아갈 엄두를 못 낼 테니까.”

    그렇게 몇 개월 동안 방황의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 친하게 지내던 한 기자의 결혼식에 참석했다. 세계적인 디자이너 콤 데 가르송을 만났다. 파르라니 깎은 머리에서 개성이 느껴져서일까. 그가 “당신,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냐”며 말을 걸어왔다. “디자이너다. 난 정말 잘할 자신이 있는데 아무도 내게 일을 주지 않는다”고 하자 콤 데 가르송은 “당장 포트폴리오를 가져오라”고 했다.

    “제 포트폴리오를 보더니 매우 흡족해하며 ‘당신은 재주 있는 사람이다. 내 밑에서 프리랜서로 일해보지 않겠냐’고 권했죠. 그래서 6년 동안 일했어요. 프리랜서 신분이라 자유롭게 제 느낌을 표현할 수 있었죠. 돈도 꽤 많이 벌었고요. 무엇보다도 우물 안에 갇히지 않고 파리 패션계의 생리를 확실히 익힐 수 있었죠. 하지만 그렇게 제 디자인이 좋다며 찬사를 아끼지 않던 브랜드들이 막상 저를 치프(Chief) 디자이너로 스카우트하지는 않았어요. 동양인이라는 게 그 이유였죠. 제 이름을 건 컬렉션을 하고 싶었지만 돈도 없고 인지도도 낮아서 스폰서를 잡기는커녕 세인의 관심조차 끌 수 없었죠. 다시 한번 좌절이 찾아왔어요.”

    히말라야에서 찾은 옷의 의미

    평소 산을 좋아하던 그는 1998년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리고 혼자 히말라야로 떠났다. 그리고 3개월에 걸쳐 에베레스트 6300m 고지를 등정했다.

    “하루에 300m씩 올라갔어요. 중간쯤 올라갔을 땐가. 한 티베트 할아버지가 햇빛이 포근하게 내려앉은 소나무 밑에서 평온한 얼굴로 옷을 깁고 있었어요.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저것이 최상의 옷이구나. 저렇게 평온한 마음으로 옷을 만들어야 하는데 나는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만 옷을 만들었구나’ 하는 후회가 밀려왔어요. 그리고 산이 주는 의미를 다시 한번 깨달았죠. 산은 인간에게 찾아오라고 하지 않는데 인간들은 심지어 목숨까지 내놓으면서 산을 오르잖아요. 그래서 결심했어요. 나도 산과 같은 옷을 만들어야겠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스스로 찾는 그런 옷을.”

    히말라야 등반을 마친 후 그는 곧바로 한국에 돌아와 6개월 동안 산과 사찰, 시장바닥을 샅샅이 뒤지며 한국의 아름다움을 연구했다. 그리고 곳곳에 수많은 장인이 있음을 깨달았다. 평생 한복에 찍는 금박만 연구한 사람, 스님이 입는 가사만을 만드는 사람, ‘깨끼’의 달인, 모시와 함께 삶을 보낸 여인들…. 다시 프랑스에 간 그는 이때의 체험을 고스란히 옷에 녹여냈다. 그리고 1999년 7월 ‘지해’란 브랜드로 첫 컬렉션을 열었다.

    “반응은 차가웠어요. 무작정 밀어붙여 미흡한 점이 많기도 했지만, 무명의 동양인 디자이너 컬렉션에 관심을 가질 리 만무했죠. 하지만 매니저인 펠릭스의 도움으로 방송에 제 옷을 알리고 나자 이상하게 옷 주문이 밀려오더군요. 신바람이 났죠. 그 후 제대로 준비를 해 두 번째 컬렉션을 가졌어요. 처음과는 비교 안 될 만큼 뜨거운 반응이었죠.”

    그리고 세 번째 컬렉션 이후 오트 쿠튀르에 입성하는 영광을 안았다. 이처럼 단기간에 오트 쿠튀르 초청멤버가 된 것은 조합 탄생 이후 처음 있는 일. 2002년 봄·여름 오트 쿠튀르 컬렉션에서는 한일월드컵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축구공 문양의 파격적인 드레스를 선보여 전세계 매스컴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 2003년에는 미스유럽 선발대회 출전자 중 상위 입상자 5명이 입을 의상을 직접 만들었다. 한국인 디자이너가 세계 미인대회의 의상을 담당한 것은 처음이었다. 메이크업 아티스트 이경민씨는 이 대회 메이크업을 맡았다.

    “대회 한 달 전쯤 담당자가 제게 상위 5위 입상자의 의상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했어요. 미인대회 의상은 처음으로 해봤는데, 대회 시작 전부터 상위 5명이 누가 될지 정해져 있더군요(웃음). 저는 ‘우리나라에 실력 있는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있다. 내가 의상을 담당할 테니 대신 메이크업은 그분에게 맡겨달라’고 요구했어요. 그리고는 이경민 원장께 전화를 드렸죠. 개인적인 친분은 없었지만 메이크업 실력이나 철학 모두 존경받을 만한 분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디자이너 사단 아니면 ‘왕따’

    점차 한국에도 그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디에 있든 항상 갈구하고 자랑스러워하던 조국은 그를 따뜻하게 받아주지 않았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한국 디자이너계의 기득권 세력이 그랬다고 해야 할 것이다. 사실 그와 인터뷰를 갖기 전 자료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그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을 많이 들었다. ‘매니저가 사실은 남자친구인데, 그 집안의 힘으로 큰 것이다’ ‘마피아가 뒤를 돌봐주고 있다’ ‘컬렉션 때마다 제자들을 혹사시키고 때리기까지 한다’ ‘출세를 위해 몸을 팔았다’ 등등.

    파리 오트 쿠튀르 ‘황색 돌풍’ 일으킨 디자이너 김지해

    2003년 미스유럽 선발대회에서 김지해씨는 상위 입상자 5명의 의상을 직접 만들었다. 한국인 디자이너가 세계 미인대회의 의상 디자인을 담당한 것은 처음이다.

    “강남에선 누구하고도 같이 못 다녀요. 바로 호텔에 갔다는 헛소문이 퍼지거든요. 한국에는 이른바 ‘디자이너 사단’이 존재하는 것 같아요. 그 라인에 속하지 않으면 ‘왕따’를 당해요. 해외에서 인정받아도 한국에선 온갖 잡소문들로 완전히 매장당할 수 있더군요. 몇몇 분은 옷 이외에 너무 많은 것을 챙기려고 하세요. 도대체 언제 옷 만들 시간이 있는지, 이해할 수 없어요. 또 옷이 아니라 옷을 만든 사람에게 왜 그렇게 관심이 많은지…. 단순한 관심을 넘어 헛소문까지 내니 신경을 안 쓰려고 하지만, 저도 인간인 이상 휩쓸릴 수밖에요. 물론 이런 분들보다는 훌륭한 분이 훨씬 많지만요.”

    ‘휩쓸리지 않고 내 길을 간다’고 말은 하지만 꽤 오랜 시간 답답한 속내를 드러내는 것으로 보아 큰 상처를 받은 듯했다. 실제로 그에 대한 ‘국내파’의 텃세는 상당하다.

    지난해 9월 정부는 한국 패션의 세계무대 경쟁력 확보를 지원하기 위해 ‘월드 디자이너 프로젝트’를 시행했고, 김지해씨를 비롯한 3명의 디자이너가 그 혜택을 받게 됐다. 정부는 이들에게 짧게는 2년간 4억원, 길게는 4년간 8억원의 해외 컬렉션 참가비용을 지원한다. 또 정부 차원에서 홍보와 마케팅을 펼쳐 세계적인 디자이너로 육성하는 것이 목표다. 그런데 선발된 3명의 디자이너 가운데 유독 그에 대해서만 반대의 목소리가 높았다. 월드 디자이너 선정 문제는 지금도 패션계의 ‘뜨거운 감자’다.

    그가 지난해 6월 국내에서 처음으로 연 단독 패션쇼에서도 국내 기업들의 협찬을 거의 받지 못했다. 한국시장에서 큰 홍보효과를 얻지 못한다는 게 그 이유였다. 패션쇼 며칠 전에는 ‘쇼를 망쳐버리겠다’고 위협하는 전화를 받기도 했다.

    패션쇼 이후 국내 언론의 평가도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의 역량이 기대했던 것보다 떨어졌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잘 써주는’ 관행에 비춰보면 이례적이었다.

    “왜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 같냐”고 묻자 그는 “자신들이 오르지 못한 곳을 새파랗게 젊고 외국에서만 공부한 제가 먼저 올랐기 때문이겠죠”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한국의 문화사절 역할을 당당히 수행하고 있다. 그의 고객 중에는 세계적인 거물이 많다. 김지해의 오트 쿠튀르 고객은 25명. 한 ‘메종(maison·의상숍)’에 한 명의 고객만 있어도 한 시즌은 거뜬히 버틴다고 하는데, 그의 고객은 상당히 많은 편이다. 요르단의 라니아 왕비, 앨 고어 전 미국 부통령의 부인 티퍼 고어 여사 등이 그의 주요 고객. 최근엔 국내에서 유일하게 모 대기업 총수의 부인이 그에게서 옷을 맞춰갔다.

    “1대1로 옷을 맞추다 보니 고객들과 이야기할 기회가 많아요. 제가 한국인이라고 하면 한국에 대해 이것저것 많이 물어봐요. 특히 요즘엔 삼성이나 LG 같은 기업에 대해서도 물어보죠. 그러면 전 이렇게 말해요. ‘한국 휴대전화나 가전제품이 더 잘 팔리게 신경 써달라. 대신 더 아름답게 옷을 만들어주겠다’고. 한번은 미국 민주당을 후원하는 명문가 여성에게 수를 놓은 한복 소재의 트렌치코트를 해줬는데, 옷을 건네면서 ‘이 수는 중국의 것과는 다르다. 한국에서 3대째 수를 놓아온 분이 한 것’이라고 말했어요. 또 저는 늘 고객들에게 한국의 아름다운 자연에 대해 들려줍니다. 그리고는 ‘꼭 오세요. 그러면 제가 직접 가이드해드리죠’라고 해요. 이건 오트 쿠튀르 디자이너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에요.”

    하지만 그는 “한국에서는 누구도 당당하게 오트 쿠튀르 옷을 입을 수 없을 것”이라며 아쉬워했다. 가령 단골고객인 라니아 왕비가 오트 쿠튀르 옷을 한번 입으면 세계 패션계가 관심을 보일 정도로 그 가치를 인정하지만, 한국에서 누가 오트 쿠튀르 옷을 입었다고 하면 가격부터 알려 하고 옷 입은 사람에게 손가락질을 한다는 것.

    그렇다 해도 그의 옷 중에 3억5000만원짜리가 있고, 기본 정장이 평균 5000만원이라는 얘기를 들으면 입이 벌어지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옷을 산 사람에게 손가락질까진 하지 않더라도 이질감을 떨치기는 힘들 것이다.

    남자가 줄 수 없는 오르가슴

    그런데 김지해씨는 한 번도 그 돈을 직접 만져본 적이 없다고 한다. 매니저인 펠릭스 붑코자가 그를 대신해 모든 관리를 해주기 때문이다. 대형 컬렉션 준비에서부터 의상 판매 및 홍보는 물론 요리, 작업실 청소와 같은 자질구레한 일상의 일까지 그가 모두 처리해준다. 자신의 인생 전부를 김씨를 위해 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5년 전 김지해의 옷을 처음 본 순간 홀딱 반해 매니저 역할을 자청한 펠릭스는 기자에게 “지해의 인격과 눈부신 재능이 내가 인생을 살아가는 원동력이다. 나는 절대 희생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녀가 내 인생에 있어 가장 큰 선물”이라고 말했다. 옷과 재능에 반했다고는 하지만 그렇게 헌신적인 펠릭스를 보며 미혼인 김지해씨와 연인 사이가 아닌가 오해할 수도 있다.

    “저도 정말 그랬으면 좋겠어요(웃음). 이 일을 시작한 후 남자친구를 사귄 적이 없어요. 오죽하면 제자들이 ‘선생님, 제발 여성스럽게 살면 안 될까요. 치마도 입고요’라고 할까요. 저도 종종 마음이 맞는 사람과 편안한 동반자로 함께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하지만 결혼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또 너무 바빠서 외로울 틈도 없고요. 하루에 거의 20시간씩 일하거든요. 먹고 자는 시간만 빼면 일의 연속이죠. 결혼이야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어도 세계 최고의 디자이너가 되는 것은 그렇지 않죠. 저는 옷 만드는 데 인생을 걸기로 했어요. 사실 옷을 만들 때 최고의 오르가슴을 느껴요. 이런 희열은 남자가 줄 수 없는 거죠.”

    3년만 기다려라

    오트 쿠튀르 디자이너로 명성을 날리고 있는 그는 내년 초쯤 프레타 포르테 라인을 출시할 예정이다. 오트 쿠튀르는 특성상 많은 사람에게 자신의 의상을 선사할 수 없기 때문. 그리고 ‘지해’ 브랜드로 3년 안에 세계를 제패하는 것이 그의 꿈이다. 겐조처럼 어느 누구라도 자신의 브랜드를 알도록 만들 것이라고. 어느 기업을 통해 출시할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국내외 기업 상당수가 그에게 러브콜을 던지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국내 기업에서 출시하고 싶어요. 이젠 우리 기업들도 디자이너들을 잘 활용해야 해요. 국내에서의 성공만이 아니라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를 만들어 키워야 합니다. 그 경제적 파급효과는 정말 대단해요. 일본이 패션의 중심지가 될 수 있었던 건 다카다 겐조와 요지 야마모토, 하나에 모리 등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있었기 때문이죠. 이들을 발굴한 건 프랑스지만 키운 건 일본 기업이었어요. ‘지해’란 브랜드가 ‘애니콜’만큼 파워를 가지고 한국을 알릴 수 있도록 우리 기업들이 뒷받침을 해줬으면 좋겠어요.”

    그는 한국의 숱한 장인(匠人)이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는 현실이 너무도 안타깝다고 했다. 대우는커녕 요즘도 연탄불로 난방을 할 정도로 열악한 환경에 있는 이가 적지 않다. 먹고 살기 힘들다는 걸 알기에 그들은 자신의 기술을 자녀에게 물려줄 생각을 하지 않는다. 프랑스 샤넬이 의상과 관련된 장인들을 눈에 띄는 대로 끌어들여 작업에만 매진할 수 있도록 기반을 마련해주는 것과 대조적이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제품에는 그들만의 기술이 녹아 있기에 샤넬의 매출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그에게 “옷이 지닌 아름다움 중에서도 무엇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가장 본질적인 질문을 맨 나중에 던진 셈이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마음”이라고 대답했다.

    “제 옷을 입은 여성이 그저 ‘지해란 브랜드를 입었구나’가 아니라 ‘그 옷을 입으니 정말 아름답다’는 말을 들었으면 합니다. 옷을 입는 사람 역시 그 옷으로 자신이 가장 아름다워지길 바라죠. 이렇듯 옷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만드는 사람에게서 입는 사람에게로 옮겨지는 마음의 표현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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