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9월호

‘자연식 삶’ 연구가 김정덕

“오르가슴이 뭔 줄 알아? 머리와 마음이 하나 되는 게야”

  • 김서령 자유기고가 psyche325@hanmail.net

    입력2005-08-29 14: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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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연식 삶’ 연구가 김정덕
    충남천안 병천에 가서 김정덕(金貞德·71) 할머니의 황토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바깥은 불볕인데 방안은 거짓말처럼 서늘했다. 바닥엔 고운 새끼줄을 촘촘히 엮어 만든 짚자리를 깔았고 방 가운데는 고슬고슬한 흙더미가 그대로 드러났으며 베개는 소나무를 반으로 쪼갠 경침이다. 눈앞엔 멍석만한 연잎들이 넘실거리고 뜰엔 봉숭아, 백일홍, 채송화가 각기 무리지어 피고 키 작은 천일홍이 막 붉은 꽃을 피워 올렸다.

    마실 거리로 연달아 나오는 탱자, 수세미 효소, 천일홍 효소, 맨드라미 효소는 지난해 바로 이 땅에서 자란 것들로 그냥 입속에 털어넣기 아까울 만큼 향 좋고 빛깔 고왔다. 밭에서 꺾어 갓 쪄낸 옥수수, 소금 두어 알 얹은 수박 맛도 서울서 먹던 것과는 확실히 달랐다(수박은 음이니 양인 소금을 섞어 먹어야 탈이 없단다).

    나는 주인이 내준 황톳물들인 인조견 바지에 자투리천을 모아 지은 삼베 적삼을 입고 날아갈 듯 가벼워져서 연신 뱃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흐뭇한 웃음을 웃어댔다. 모처럼 맛보는 삽상한 의식주의 체험이었다. 전에 분명 이렇게 살았건만 잊고 있던 자연주의적 삶이었다.

    쪽빛 기저귀, 인조견 잠옷

    김정덕 할머니! 황토집 짓고 야채 효소 만들며 천연섬유에 자연 염색해 한땀 한땀 옷을 지으며 장 담그고 장아찌 만들고 차 우리고 농사짓는 그를 일쑤 ‘황토 연구가’라고들 부르는 모양이지만 그의 관심은 황토에 국한된 게 아니라 의식주 전반에 걸쳐 있다.



    올해 일흔하나, 할머니라 부르기엔 몸매도 피부도 태도에도 여태 팽팽한 긴장이 흐르고, 종횡무진, 천의무봉하게 솟아나는 아이디어와 호기심은 차라리 아이 같고 새로움을 좇는 순발력과 추진력, 관심의 다양함은 어느 청년에 못지않다. 그러면서 문득 다 내려놓고 물러서는 고요와 비움을 말하는 그를 나는 일단 ‘자연식 삶 연구가’라고 칭한다.

    “나의 전공은 의상 디자인이었다. 스페셜 코스로 섬유조직학도 공부했다. 그러나 그때 배운 암홀이니 웨이스트 라인이니 하는 규정들은 내 의생활에 별 영향을 주지 못한다. 나는 삼베에 쑥물들인 넉넉한 바지를 입고 베 쪼가리로 만든 상의에 굵은 삼베와 가는 삼베를 섞어 만든 모자를 쓰고 다닌다. 석유에서 뽑은 화학섬유의 범람, 오존층이 깨져서 직사하는 자외선, 배기가스 등의 뒤범벅으로 아토피 피부병은 늘어만 가는 추세다.

    천연직물에 천연염색한 옷은 이 살벌한 시대를 살아가는 방위복이 될 것이다. 붉은 홍화물은 나쁜 세균을 막고 바닷빛을 내는 쪽은 피부를 보호한다. 그래서 아기들 기저귀에 쪽물을 들이면 좋고, 치자나 금잔화로 노란물들인 인조견 잠옷은 촉감이 가실가실해서 좋다. 비바람에 떨어진 풋감을 짓이겨 물들인 감물옷, 이보다 더 우아하고 고상한 사치가 또 있을까….

    나는 우리 동네 한복집에다 사람을 자주 소개한다. 베 자투리를 얻기 위한 목적이다. 내가 좋아하는 일 중의 하나는 조각 모아 옷 만들기다. 동네 한복집 아주머니의 비위를 맞춰 얻어온 백옥 같은 모시, 노르스름한 안동포, 누런 삼베를 이리저리 매치해서 옷을 짓는다. 누구와 만나 필(feel)이 좋으면 그를 위해 무조건 옷 한 벌을 만드는 마음, 그게 바로 내 재산이다.”

    그는 이렇듯 글도 잘 쓴다. 쉽고 선명해서 더욱 힘찬 글이다.

    그는 1987년에 이곳 병천으로 내려왔다. 병천으로 오게 된 사연, 그게 또 여느 삶과는 완연히 다르다. 1970년대 말엽 일본에서 자연건강법을 공부하고 돌아왔을 때 그의 주변엔 양생법과 자연요법을 지지하는 사람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한국양명회란 단체를 만들었다. 자연건강회, 한마음회 같은 모임도 그를 중심으로 생겨났다. 그 무렵 김정덕은 사람을 만나면 그들 심신의 상태를 환하게 읽었다. 처방도 금방 떠올랐다.

    “‘당신은 황토찜질을 어떻게 하고 율무죽을 한 달만 먹으라’는 식으로 불쑥 말해놓고도 내가 깜짝 놀라, 나도 몰래 내 안에 내재된 힘을 믿게 됐어요. 우주와 영통하는 어떤 부분이 있었다고 할까.”

    그게 소문이 나 절로 자연건강법의 전도사가 돼버렸다. 전국을 돌며 강연을 다니던 무렵 병천 사는 한 노인이 찾아왔다.

    “와세다 대학 통신강의를 받는다는 깨인 농부였어요. 분홍색이 살짝 도는 ‘보까시’ 무를 가지고 왔는데 너무 예쁜 거야. 달이 농사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루돌프 슈타이너식 농법을 실천하는 그 노인에게 당시 내가 가진 돈 전부를 투자했어요. 근데 그 돈을 못 갚게 되자 대신 이 땅 3000평을 날 준 거예요. 빌려준 돈이야 7000~8000평을 살 수 있는 액수였지만.”

    그 땅엔 지능이 좀 모자란 노인의 아들 내외가 살고 있었다. 젊은 손자도 있었다. 병천 내려와 황토집을 지으면서 김정덕은 노인의 손자 김안식을 아들로 삼았다. 땅은 모두 양아들 명의로 했다. 며느리를 맞아 떡두꺼비 같은 손자 셋을 얻었고 어눌해서 더 착하고 부지런한, 양아들의 친부모까지 여덟 식구가 어울려 함께 살고 있다.

    큰손자 용희에게 “세상에서 가장 좋은 사람?” 물으면 대뜸 “우리 할머니!”라 대답한다. 아무리 더워도 그는 세 손자를 끼고 잔다. 아이들도 할머니 곁을 떠나려 하지 않는다. 손자를 위한 투자엔 아까울 게 없고 훌훌 떠난 여행길에서도 아이들이 보고 싶어 얼른 집에 돌아온단다. 그가 구현하는, 피로 얽히지 않은 신개념 가족의 아름다움을 나는 놀라움으로 지켜봤다.

    食相이 보인다

    올해 그는 병천면 탑원리 3000평의 밭에다 아들 내외와 함께 오이를 심었다. 병천에서 유일하게 무농약 농산물에 붙이는 품자 마크를 획득한 ‘아우내 오이’다. 병천에서 그는 농부다. 그냥 농부가 아니라 농약과 비료 없이 땅과 사람 사이의 진정한 의미를 살피면서, 씨앗이 싹터 자라는 일에 감격하고 마침내 맺히는 열매를 눈물어린 감사로 수확하는, 본질적 의미의 농부다.

    그에겐 땅에서 솟은 잡풀 하나도 허투로 난 게 없다. 다 이유 있게 솟았으므로 제 쓸모를 알뜰히 찾아낸다. 산야초는 제철 가기 전에 뜯어 흰설탕에 재워 효소를 만들고 일찍 떨어진 과일은 짓이겨 천을 물들이고 돋아나는 싹과 뿌리들은 찌거나 말려 나물반찬으로 갈무리한다.

    “나는 우주무당이라는 말을 좋아해. 인간의 힘으로 안 되는 일도 일월성신의 힘을 빌려오면 못 이룰 게 없지. 일월성신의 힘? 나는 그게 바로 마음이라고 봐. 인간은 호르몬의 작용으로 움직이는 존재지? 사람의 감정이 바로 호르몬이거든. 기분을 자꾸 잡치면 사람은 죽는거야. 황토집이 암만 좋다고 떠들어도 마음이 느끼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는 거지. 나는 머리와 마음이 하나 되는 게 오르가슴이라고 생각해. 내가 나니까 내 인생에 오르가슴을 느끼도록 살아줘야 할 거 아냐?”

    그는 직관이 유난히 발달해 사람을 척 보면 주변에 흐르는 기운을 본능적으로 감지해낸단다.

    “한번은 어떤 사람과 마주앉아 있는데 비린내가 몹시 나는 거야.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다는데 내 코에만 그 냄새가 자꾸 나는 거예요. 알아봤더니 그의 부모 직업이 어부였다는 거지. 고깃내가 유난히 나던 사람은 집에서 정육점을 했다고 하고…. 뭔 소리냐 하면 지금까지 먹어온 음식이 현재의 그 사람을 만들었다는 거지. 예민한 사람에겐 냄새로까지 느껴지는 거고.”

    김정덕 할머니에 따르면 사람에겐 식상(食相)이란 게 있다 한다. 음식 먹는 것을 보면 운명이 보인다는 것이다. 바른 자세로 밥을 먹느냐, 씹는 모양이 어떠냐 하는 정도가 아니라 무슨 음식을 좋아하느냐, 얼마나 탐식하느냐, 밥 먹는 태도가 음식을 귀히 여길 줄 아느냐 같은 건데, 그게 사람의 건강과 운명에 관여한다는 게 확실하다는 주장이다.

    “사람 얼굴은 뱃속에서부터 먹어온 식품의 명세표예요. 인상학의 권위자인 시즈타 남부코도 ‘식(食)은 운명이다’라고 주장하거든. 난 이제 사람을 한번 보면 그가 먹어온 식품이 뭔지 알아요. 청진기보다 더 정확하지. 그걸로 과거나 미래를 점칠 수도 있다고. 사람의 일생은 먹는 것에 의해 정해져요. 길흉(吉凶), 화복(禍福), 현우(賢愚), 수요(壽夭), 미추(美醜), 선악(善惡)이 음식에 의해 결정된다면 내 말을 의심하겠지?

    난 선악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다만 먹을거리에 의해 선악이 좌우된다고 보는 거지. 고기 먹지 말고 곡식과 채소를 먹으면 기운이 맑아져. 동물성 음식말고도 곡식과 열매에 더 훌륭한 단백질이 얼마든지 들어있거든.”

    “소젖으로 엉터리 첫 키스 말라”

    ‘자연식 삶’ 연구가 김정덕

    베 자투리를 모아 옷을 만드는 일은 김정덕 할머니의 가장 큰 낙이다.

    그에게서 숱한 이야기를 들었다. 처음 듣는 비방이기도 했지만 체험에서 나온 각성과 통찰이 내용에 빛을 씌워 말에 힘이 있었다. 나는 거의 황홀하게 이야기에 몰입했다. 먼저 아기 낳는 이야기!

    “아기가 태어나면 3~4일은 아무것도 먹이지 않는 게 원칙이야. 탯줄을 짧게 자르지 말고 한 뼘 이상(13㎝쯤) 남겨두고 잘라야 해. 며칠 굶겨도 탯줄에 남은 도시락으로 충분히 살 수 있어요. 엄마 젖은 3일 뒤에 나오는 게 우주의 법칙인데 괜히 무모한 어른들이 배고플 거라면서 고무 젖꼭지에 소젖을 넣어 귀한 생명에게 엉터리 첫 키스를 시킨단 말이야.

    맨 처음 엄마 젖꼭지를 빨리고 초유를 먹인 아기는 머리가 명석해지고 인간성이 좋아져요. 3~4일간 아기 배를 비워야만 뱃속에 쌓인 배내똥이 말끔히 빠지지. 낳는 순간 아기를 씻기는 건 얼마나 큰 어리석음인지 몰라요. 아기가 자궁 밖으로 나오면 태지가 묻어 있는 채로 1시간40분 정도 그냥 눕혀둬야 해. 혼자 손발을 움직이면서 대우주와 동화하도록 기다려주는 엄숙한 순간이지. 손가락 발가락을 버둥거리는 모관운동을 통해 모세혈관까지 피가 도는 것을 스스로 감지하게 하는 거지. 1시간40분 동안 발가벗겨놓으면 난원공(좌심방과 우심방 사이에서 태내 혈액순환을 담당하는 곳) 폐쇄가 빨라지면서 초생아 황달도 생기지 않아요.

    그 시간이 지나면 목욕을 시키는데, 냉수(30℃)에서 시작해서 온수(40℃)로 바꿔가며, 얼굴만 빼고 물속에 담그기를 두 번 반복하고 끝에 냉수로 헹군 후 옷을 입혀요. 이게 아기를 제대로 받는 방법이에요.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은 빛이 너무 밝지 않은, 어스름 속에서 이뤄져져야 해요. 그걸 깨버리면 새 생명에 담긴 우주의 조화로운 기운을 뺏길 염려가 있지. 다행히 내 손자 셋은 산부인과 의사가 내 말에 공감해서 다 이런 방법으로 받았어요. 병원 한번 가는 일 없이, 흔한 감기 한번 앓지 않고 총명하게들 자라고 있지. 누구든 아기 낳을 집에서 믿고 불러준다면 난 사명감을 가지고 기꺼이 달려갈 겁니다.”

    다음은 방 한 켠에 놓인 경사판에 관한 이야기! 그의 방엔 한쪽은 바닥에 닿고 다른 한쪽은 바닥에서 35~38㎝쯤 들린, 길이 180㎝ 폭 45㎝가량의 길쭉한 나무판이 놓여 있었다. 첨에 나는 널뛰기하는 널인가 해서 신기하게 만져봤다. 그는 일흔 나이에도 염색하지 않은 검은 머리를 유지하는 것과 얼굴 근육이 아래로 처지지 않는 비결이 바로 이 경사판에 있다고 믿는다.

    “외출해서 돌아왔을 때나 피곤할 때는 이 경사판 위에 몸을 턱 맡기고 자연스럽게 누워요. 물구나무서기하듯 머리를 낮게 다리를 높게 놓는 자세는 아래로 내리누르기만 하던 척추와 내장을 정상적인 위치로 안정시켜주고 얼굴이나 턱선을 거꾸로 잡아당겨 혈행을 바꿔주거든. 약해진 복근을 강하게 해주고 볼이나 인후, 턱 근육의 피가 아래로 흘러 혈액순환이 활발해지니 안색이 좋아지고 모발이 윤택해지지.

    오후에 한 번, 자기 전에 한 번, 15분씩 하루 두 번만 경사판에 누워 있어도 다리는 중력에서 해방되고 혈류나 조직도 서서히 뭉친 울혈에서 회복되는 것을 실제로 느낄 수가 있어요. 다리보다 머리 쪽을 낮게 해서 누우면 위하수나 빈혈, 중이염, 시력강화, 코골이, 두통에도 다 효과가 있고 뇌 활동이 20%나 증가한다는 연구결과도 나와 있지. 그리고 이게 얼마나 쉽고 간단해? 사람은 휴식을 잘해야 건강하고 건강해야 행복해질 수 있거든요.”

    양파 와인과 냉이씨주

    그리고 양파 와인 만드는 방법! 양파 와인이란 양파를 두세 개 채 썰어 붉은 포도주 한 병에 넣고 봉했다가 2~3일 후 양파 건더기는 건져내고 포도주만 밀봉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이 간단한 제조법의 와인은 무릎 통증에 탁월한 효능을 발휘한다고 한다. 당뇨병 환자의 혈당을 떨어뜨리고 혈압도 정상화하며 노안에도 효과가 있고 수족냉증, 변비, 이명도 손쉽게 고쳐진다는 것을 실제 여러 사람을 통해 증명해봤다. 봄에 먹는 냉이와 쑥이 가을에 씨를 맺으면 그 씨를 손바닥으로 훑어내 냉이씨주와 쑥씨주를 담글 것도 권한다.

    요컨대 그에게는 삼라만상이 다 약이다. 우리 몸을 지탱해주는 기운, 병을 다스리는 기운이 다 땅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병이 있으면 반드시 약도 있어요. 병이 흔하면 약도 그만큼 흔해요. 내 몸은 내 땅에서 나온 식물로 다 다스릴 수 있다고…. 식물은 봄이면 기운이 잎사귀로, 가을이면 뿌리로 가요. 단오 이전 쑥은 색과 향이 그윽하고 산뜻하지만 늦가을엔 땅에 묻힌 쑥뿌리를 캐서 항아리에 꾹꾹 눌러담고 도수 높은 술을 부어 쑥주를 담가. 3개월 후에 건더기를 건져내고 진국주를 하루 한 잔씩만 마시면 지칠 줄 모르는 스태미나가 생겨. 쑥으로 만들어 맛이 쓸 것 같지만 오히려 감미로워. 색깔과 향은 조니워커 같은 건 저리 가라지. 우리집에 오는 술꾼 중 이 술 싫다는 사람은 내가 한 명도 못 봤네.

    사람들은 내게 ‘라이선스가 있느냐?’ ‘대각(大覺)을 이루었느냐?’ 묻지만 나는 그런 데 연연하지 않아. 일생이 다 배움인걸. 시절마다 내 코드에 맞는 학업이 눈앞에 있어 그걸 혼자 탐구했을 뿐. 그러니 라이선스가 있을 게 뭐야.”

    스물일곱에 청상과부가 되어

    그는 인천에서 태어났다. 집은 인천지역 건어물을 집산해 중국, 일본과 무역하는 거상이었다.

    “상인상회라면 다들 알아줬지. 큰오빠가 일본 중앙대 법대를 나온 진빨갱이였는데 마루 밑에 그 책이 얼마나 쌓였어도 우리집은 뒤지지를 못했어요. 아버지는 길가에 끄나풀 하나가 떨어져도 꼭 주워오는 사람이지만 주변에 인심을 잃지 않았거든.”

    살림살이가 넉넉하니 음식과 옷에 사치를 맘껏 부렸다.

    “이만한 민어알을 말려서 참기름 발라 먹고 민어 대가리와 부레를 넣은 매운탕을 끓였지. 김은 논작논작하게 굽고 게를 까서 고추장 넣고 무쳐 먹었어. 콩나물은 콩의 한 배 반 길이로만 키워서 먹고 그때 이미 현미를 싹 틔워 먹을 줄 알았다니깐.”

    박문소학교를 다닐 당시부터 그에겐 남들과는 다른 눈이 있었다.

    “반 아이 얼굴을 턱 보면 상이 보여요. 엄마가 없는 것 같다든지, 집이 망한 것 같다든지 하는 느낌이 전해져 와. 물어보면 엄마가 분명 있는데도 내 눈에 그렇게 보이는 거야. 그런데 방학을 마치고 오면 그 아이 엄마가 죽었다는 거예요. 내가 무당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관용찰색(觀容察色)이라고, 잘 살피면 사람의 운명과 건강은 겉으로 드러나게 돼 있어요.”

    서울로 유학 와 배화고녀를 다니다 졸업 무렵 인천고녀로 전학했다. 외교관 부인이 되길 꿈꿨다. 파티, 음악, 드레스류의 소녀다운 상상에 불과했지만. 서울대 불문과에 다니는 오빠 친구와 연애감정 비슷한 걸 나누면서 프랑스 유학을 계획했다.

    “연애라고 해봤자 휘파람을 불면서 내 방 창문 앞을 지나가면 오빠 몰래 호롱불을 들고 창문 앞에 가서 내다보는 거지. 시 같은 연애편지나 주고받고…. 이화대학에 합격은 했는데 그 오빠가 이대는 첩딸들만 다니는 학교니 가지 말라는 거야.

    당시 헬싱키올림픽 사이클 선수로 출전했던 임상조란 사람이 헬싱키에서 바바리코트를 사 입고 인천에 나타났어. 얼마나 멋지던지 그 바바리코트에 반해 내가 갑자기 그 사람을 좋아했다니깐.”

    그러다 유학은 무산되고 스물두 살에 군 특무대에 근무하던 장교와 결혼한다. 혼인 전 찾아갔던 무당집에선 “봄에 갔다 가을에 올 걸 뭐하러 가?” 했지만 상관없이 혼인은 급속도로 진행됐다. 아이 둘을 낳았고 남편은 사고로 죽는다. 그의 나이 27세, 그야말로 청상에 과부가 된 것이다.

    “남편과는 정이 없었어. 그가 김창룡(당시 육군특무대장)이 휘하에 있었는데 그때가 조봉암을 잡아 죽일 때였거든. 조봉암은 큰오빠 친구였어요. 멋있었지. 나 어릴 때 우리집에 놀러오면 귀엽다고 내 볼에다 뺨을 비비곤 했는데…. 그 오빠를 이 사람이 죽였나 싶어 그렇게 무섭고 싫었어. 음식을 너무 맵게 먹는 것도 악인이라서 그렇지 싶고…. 별일 아닌 일에도 권총을 들이대고 해서 내가 울화병이 났었어.”

    이 시절을 그는 아주 상세히 기억한다.

    “그 사람은 소령인데 특무대 경리장교였거든. 집에 돈을 하루 한 자루씩 가지고 와. 당시는 산에서 집채만한 나무들을 베서 서울로 싣고 오는데 특무대 대장의 인가가 없으면 트럭이 움직일 수 없었다고. 한주일 모으면 돈이 이런 궤짝에 가득 차는데 토요일이면 그걸 다 자기 아버지를 갖다줘. 나중 내가 일본에서 돌아오니 그게 다 날아가고 없어졌데….”

    ‘자연식 삶’ 연구가 김정덕

    황톳물로 두 손자를 목욕시키는 김정덕 할머니. 더운 여름에도 세 손자를 꼭 안고 잘 만큼 그의 손자 사랑은 지극하다.

    남편이 죽자 시집에선 재산과 함께 아이들을 데려가버린다. 그 무렵 친정에 들렀을 때 영화를 하나 봤다. 제목이 ‘야생녀’였다.

    “수전 헤이워드와 타이론 파워가 나오는 영화였어. 수전이 나처럼 과부가 되어 묘지 앞에 섰는데 비가 내리고 어찌어찌해서 사랑이 싹트는 장면이 나와. 그걸 보고 결심했어. 3년상이 다 뭐냐? 그건 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위선일 뿐이다. 난 수전처럼 좋은 사람 만나 마음껏 연애도 하면서 살 거다!”

    “인생도 실루엣이 중요한 거야!”

    홀로 된 그를 일본 사는 큰언니가 불러들였다. 갓 서른이었다. 우선 문화복장학원이라는, 신부수업을 주로 하는 학원에 등록한다. 거기서 일본식 고급 교양을 마스터한다. 의상 디자인, 재봉뿐 아니라 조리법, 차, 꽃꽂이, 인테리어, 에티켓을 두루 배웠다. 문화학원에서 어린 아이들 틈에 끼여 ‘명실공히 과부가 된’ 그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갈급하게 빨아들였다. 물론 길 가다 서울에 두고 온 아이들만한 또래를 만나면 그 자리에 주저앉을 만큼 숨이 막혔다. 그러나 이를 악물고 견뎠다.

    그는 손재주도 조형감각도 빼어난 사람이다. 어느 날 우연히 신주쿠에서 종이접기 워크숍을 구경한다. 커피숍에 50여 명이 둘러앉아 화지(닥나무로 만든 일본 종이)로 그날의 테마인 대나무와 참새를 접는 행사였는데, 그날 모임을 주도한 이는 일본 오리가미의 대가 다카하마 도시에였다. 그 정교한 입체와 다채로운 상상력에 한눈에 반했다.

    그날 이후 그는 책상 한켠에 항상 색종이를 비치하고 종이접기 광이 되었다. 종이접기에는 명장마다 고유한 법이 있고 위(位)가 있어 도용하면 법에 저촉되기도 했지만 그는 혼자 자신의 법을 만들어 나갔다. 종이를 접고 있으면 만사를 잊었다. 머릿속에 들어 있던 꽃과 새와 동물이 눈앞에 나타났다. 종이를 접노라면 “숨은 다듬어지고 꿈은 이루어졌다.” 정기신보 귀본원(精氣神寶歸本源)의 삼매경을 맛봤다.

    문화학원을 다니던 중 한 미술잡지에서 ‘당신의 재주를 테스트해보지 않으시렵니까?’란 현상공모를 봤다. 종이를 접어 보냈다. 시니컬한 주제였다.

    “인생을 비웃고 희롱하는 내용이었어요. 남녀 성기를 꽃처럼 접어 큰 판에다 여러 개 붙인 거였지. 난 과부니까 아름다운 섹스를 할 수 있는 처지가 못 된다고 떠들고 싶었는지도 모르지.”

    그게 일등으로 당선 됐다. 부상은 주최측인 고단샤(講談社)에서 운영하는 디자인 스쿨(미국 패이머스 스쿨의 분교)에서 2년간 무료로 공부할 수 있는 특전이었다. 김정덕은 비로소 날개를 달았다. 디자인뿐 아니라 그래픽, 레터링, 일러스트 등 생활미술 전 분야를 배웠다.

    “날마다 하네다 공항에 스케치하러 다녔어요. 국제공항이라 2분에 1대씩 외국 비행기가 도착하고 비행기 안에서 패셔너블한 국제 멋쟁이들이 와르르 내리거든. 거기 가서 사람들을 스케치해 와서 그걸 함께 평가하고 분석하는 게 공부였어요.

    그때 우리 디자인 선생이 했던 말이 지금도 쟁쟁해요. 살다가 피곤이 몰려오거든 기차여행을 해라, 바느질을 꼼꼼하게 하는 건 전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실루엣이다, 인생도 디테일이 아니라 실루엣이 중요한 거다!”

    복장학원이 일본 체류의 구실이었다면 패이머스 스쿨은 그를 전방위 디자이너로 키웠다. 지금 병천에서 쓰다 남은 자투리천으로 그가 만드는 치마, 바지, 저고리, 블라우스, 모자, 보자기들…. 머리가 산란해지거나 조금의 틈만 생겨도 들어앉아 그것들을 만들지 않고는 못 배기는 그의 바느질 중독증세는 당시 몸에 밴 병통이다.

    그가 만드는 이 세상 하나뿐인 치마나 저고리의 디자인과 배색과 비례감에 나는 아주 반했다. 다 그만두고 이런 천연염색, 손바느질 옷만 만들어도 김정덕은 그 방면 최고가 될 것이다, 진심으로 치켜세워도 그는 “돼서는 뭐하는데?” 시들해할 뿐이다.

    미국에서 종이접기 초대전

    1992년 종이접기 작품을 갖고 미국 보스턴 근처 아름다운 소도시, 렌덤의 한 갤러리에서 자그마한 전시회를 연 적이 있다. 렌덤 지방 신문에 김정덕 오리가미 작가 초대전이 보도돼 동부 미국인들이 몰려와 그 교묘한 종이 조형에 찬탄을 퍼붓기도 했다.

    “‘지(紙) 천년, 견(絹) 오백년’이라고 하거든. 천년 가는 종이에 시간을 초월하는 드라마를 펼쳐내는 게 종이접기야. 다람쥐가 웅크리고 앉아 도토리를 까는데 곁에 흩어진 옥수수알 수백개를 일일이 접고 한지를 결 있게 훑어 껍데기를 만들고 환한 해바라기 몇 송이를 세워두는 거지. 종이접기는 정교한 기하학이야.

    몇 해 전 샌타모니카에 있는 건축가 프랑크 게리의 작업실에 가서 건축모형을 보고 느낀 건데 종이접기는 건축과도 흡사하더라고. 종이접기를 하면 머리가 좋아지고 늙지 않아요. 일본이나 중국의 종이접기 대가들은 거의가 90세 넘도록 생존하지.”

    연말이 되면 그는 화려한 행사를 벌인다. 한지를 염색해 다음해의 상징동물을 접어 가까운 사람들에게 새해 인사로 보내는 것이다. 지난해는 원숭이였고 올해는 닭이다. 닭 두 마리가 올려진 카드를 나도 뒤늦게 받았는데, 수세미를 붙여 만든 둥지와 실제 닭털을 뽑아 만든 꼬리와 홍화물을 들인 볏이 볼수록 정밀하고 아름답다. 심술통을 그린 만화가 이정문은 십수년째 김정덕 연하장을 모아 벽장식을 하는 중이다.

    “그이는 날더러 열일 제치고 색종이만 접으라지만 그것만 접어서 뭘 하게. 난 농사짓고 황토집 보급하고 장 담그고 지장수 만들고 효소 만드는 게 더 급한 걸.”

    일본에서 학교 다닐 때 하루는 오빠 친구가 만나자는 전갈을 보냈다. 일본 에 회사를 10여 개 가지고 있는 기업가였다. “주판 놓을 줄 아느냐?”고 묻길래 그날부터 일주일간 주판을 배우느라 밤을 새웠다. 난데없이 오사카에 있던 ‘성서금속주식회사’란 폐금속을 녹이는 회사가 그에게 맡겨졌다. 그의 배포를 오빠가 알아본 것일 게다.

    “일단 아타미 온천에 방을 28개 예약했어요. 기술자가 28명이었거든. 촌놈들이니까 화려하게 오입을 시켜주자 생각했던 거지.”

    철강회사에서 황토방으로

    그렇게 주요 인력을 수중에 넣은 후 단시간에 도요타와 미쓰비시 같은 거대 회사에 철강을 납품하는 회사로 키워낸다. 마침 오사카박람회가 있어 철의 수요는 엄청났다.

    “내가 그때 오사카에 6대밖에 없던 하얀색 올드 모빌즈를 타고 다녔다니깐. 아침마다 철강신문을 읽어 철박사가 다 됐지. 오사카박람회에서는 납품상도 받았고.”

    그러나 그는 돈 버는 일에 큰 재미를 붙이진 못했던 모양이다. 한 3년 열심히 일하다 본사로 들어오라길래 그냥 사표를 내버렸다. 황토의 효능을 안 것은 그 무렵이었다. 향수병인지 스트레스인지(그때는 아직 ‘스트레스’라는 말이 생기지 않았지만) 손가락이 퉁퉁 붓고 아파 견딜 수 없었다. 고모가 인편에 황토 한 더미를 보내줬다.

    “거기 손가락을 꽉 박고 있었더니 콕콕 쑤시던 게 없어지고 시원하더라고. 나중엔 아예 베개에 넣고 베고 잤어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절로 그렇게 하고 싶어지더라고….”

    그 무렵 친구를 따라 우연히 미도리카이(綠會)라는 진료소에 가게 됐다. 친구가 입이 비뚤어지는 증세가 있었는데 약 대신 부항을 뜨고 침을 놓고 모관운동을 시키고 찜질팩으로 배를 따뜻하게 쬐고 닭우리만한 진흙집에 들어가 땀을 흘리는 게 치료의 전부였다.

    “일본에선 1960년대에 벌써 그런 걸 하더라고. 내가 자연요법의 소굴로 들어간 거지. 쇼킹했어요. 나치가 사람을 죽여 안경이 산처럼 쌓인 걸 본 이후 두 번째로 크게 놀란 거야. 풀밭에 앉아 꽃 따고 태양빛을 받고 농약 안 친 채소를 즙내서 마시고 된장과 장아찌 담그고 바느질이나 하면서 치료를 한다니…. 녹회의 모든 것이 너무 좋은 거야. 내게 내재된 어떤 것과 코드가 맞았던 거겠지.”

    녹회가 하도 맘에 들어 철강이고 디자인이고 뒤로 밀어놓고 일본의 자연의학 거두이던 니시 가즈조 선생(서식 건강법)과 사쿠라 가와 선생(정식회)의 강의를 따라다니며 들었다. “ 원래 역마살을 타고난지라” 일본 전역의 자연요법을 찾아다니고 장수촌을 섭렵했다. 우메보시(매실에 소금을 넣고 절인 일본 음식)란 우메보시는 다 먹어보고 소문난 다쿠앙(가는 당근, 오이, 가지를 일본식으로 절인 것)은 모조리 찾아 맛봤다. 그러던 중 쌀겨와 현미눈과 다시마와 쪽마늘과 찹쌀죽을 발효한 것에다 오이, 무, 가지를 박아 만드는 다쿠앙 만들기에 이골이 났고 물과 황토와 효소와 생채식에 대해서도 일가견이 생겼다.

    “서식 건강법의 기본은 ‘병이 나면 스스로 고치고 평소 병나지 않는 생활을 해야 한다’였어요. 그걸 위한 법칙이 경침(딱딱한 베개), 경상(딱딱한 침대), 소식(적게 먹기), 모관운동(바로 누워 손발을 직각으로 들고 흔드는 운동), 금붕어 운동(꼬리뼈를 붕어처럼 좌우로 흔드는 것), 등배운동이죠.”

    ‘공주방’의 추억

    15년을 일본에 머물렀다. 연애는 했으나 결혼은 염두에 없었다. 두고 온 아이들, 이제 성인이 됐을 아이들 곁에 가고 싶었다. 조부가 그 많던 재산을 다 까먹었다는 소문도 들렸다. 귀화하라는 권유, 결혼 제의를 다 뿌리치고 서울로 돌아왔다. 1970년대 중반 한국은 한창 토담집을 무너뜨리고 시멘트로 싸 바를 때였다. 3년을 아무것도 않고 놀리라 작정했다. 전국을 다니며 건강법 강의만 했다.

    그러다 이화여대 앞에 공주방이라는 자연식 전문식당을 차렸다. 2세를 낳아 기를 처녀들에게 자연식 요리를 먹이고도 싶고 가르치고도 싶었다. 메뉴는 오분도(五分度) 현미로 만든 김밥과 유부초밥, 쌀겨에 익힌 다쿠앙, 껍질째 빻아 만든 통밀빵과 요구르트였다.

    요구르트는 홍동에 있는 농업기술고등학교인 풀무학교 황영하 선생이 산양젖을 발효해 만든 것이었다. 발효된 양젖에 사과잼이나 살구잼을 얹고 다시 잣이나 호두를 짓이겨 얹었다.

    “황 선생 집에 처음 갔을 때 내가 지성이면 감천이군, 환호했었지. 꿀 찾는 벌처럼 나는 사람을 찾아다녔거든. 전국에 흩어져 농사를 지으며 자기 소신을 실천하는 귀한 사람들을! 음식이 나오는데 보니 밥상은 통나무를 쫙 쪼개 자빠뜨린 것이고, 황 선생 바지는 뒤가 터져 있고, 대접 세 개가 다 다른데 하나는 통밀빵, 하나는 순두부 같은 요구르트, 하나는 당근, 비트, 야생초 같은 채소가 조작 없이 막 담겨 있었지.”

    부엌은 바깥에서 요리 과정이 훤히 보이게 만들었다. 위생을 과시하겠다는 게 아니라 서너 개뿐인 테이블에서 음식을 기다리던 여학생들이 절로 조리법을 익힐 수 있도록! 줄서서 요구르트를 기다리는 학생들이 늘어났지만 결국 공주방은 얼마 안 가 문을 닫았다. 그는 너무 앞서갔다. 학생이 튀김과 콜라와 커피에 길들은 탓도 있었고 재건축되는 터에 자리잡은 탓도 있었다.

    이 무렵 KBS 라디오의 한 건강 프로그램에 고정출연했다. 거기서 주로 한 이야기가 황토집을 짓자, 녹두비누로 세수하자, 현미와 통밀과 율무를 먹자, 적게 먹자, 콩나물은 제 키의 한 배 반쯤만 길러 먹자 같은 것들이었다.

    공주방의 문을 닫고 서울 동작구 흑석동 어느 절 아래서 토종 율무를 와글와글 간 것 6에 현미가루 4를 넣고 죽을 끓여 팔았다. 원래 그 절 스님의 무릎 관절염을 치료하려고 시작한 일이었으나 들깨가루 한 술에 누런 설탕 한 숟갈을 끼얹어 먹는 율무죽은, 그릇 긁는 소리가 너무 시끄럽다고 주변에서 항의할 만큼 잘도 팔려 나갔다.

    “내가 지금도 자신 있는 게 몇 있지. 죽과 우거지국과 빙수인데 음식점만 차리면 아마 손님이 미어터질 걸. 내가 아이디어를 줘서 식당을 차린 집도 전국에 흩어져 있고.”

    김정덕 할머니 주변엔 표정 맑은 사람이 유난히 많다. 그의 인생관에 공감하는 이들이고 욕심을 버리고 자연에 묻혀 사는 이들이다.

    “가만 있어도 하늘에서 복이 내리는데 왜 똥내 나게 자꾸 욕심을 부려? 자세히 보면 잘사는 사람은 잘살 짓만 하고, 못사는 사람은 못살 짓만 하더라고.”

    꿈꾸는 자유인

    김정덕, 그는 예전부터 자유를 꿈꿨다. 일흔 넘은 지금 스스로 거칠 것 없는 자유인이라고 자부한다. 나는 그의 활달한 말과 거침없는 태도와 번개 같은 통찰에서 여러 번 그리스인 조르바를 연상했다. 그에게 듣는 자유인의 정의는 ‘삶의 모든 것을 진정으로 좋아하는 사람’이다. 무슨 일을 하든지 즐겁게 하며 사물에 대해 불평하지도 남의 약점을 찾는데 시간을 낭비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소풍 영화 책 운동 음악회 도시 농촌 동물 산…. 세상의 어떤 것도 사랑할 줄 안다. 일부러 즐거운 척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재치 있게 수용하며 현실을 향유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다.

    직접 흙벽돌을 찍어 지은 황토집이 세 채, 나무와 흙으로만 만들어진 이곳에서 그는 농사짓고 염색하고 바느질하고 책 읽고 글 쓰고 종이 접고 차 마시며 산다. 가끔 건강법을 강의하거나 상담하고 원하는 사람에겐 흙벽돌도 찍어준다. 가진 것은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다. 모든 게 생각하기 나름이다. 원하면 언제든 여행을 떠나고 어딜 가든 친구들이 껴안으며 반겨준다. 눈을 돌리면 세상은 축복투성이라는 걸 그는 이미 안다. 더 부러울 게 있을까. 제 몸으로 낳은 아이들은 떠나가고 양아들 내외와 살 비비며 뒤엉켜 산다.

    “인생은 가능성이야. 하늘이 무너진 것 같아도 내일이면 새아침이 정말 오더라고. 애증을 없애고 텅 비워야 해. 나는 날마다 밭을 싹 갈아엎고 거름까지 뿌려놓고 잠이 들어. 내일 아침에 무슨 싹이 돋을까 설레는 마음으로!”

    천장에 늘어뜨린 끈을 잡고 독자 개발한 춤을 내게 가르쳐주다 병천 황토집 할머니 김정덕은 신명에 겨워, 비유도 화려하게 이렇게 말했다.



    “학이 천년을 사는 것은 균형과 긴장을 잃지 않기 때문이지. 이 체조는 날 학으로 만들어줘. 무엇보다 세상을 사랑해야 해. 되도록이면 연애를 하라고. 그래야 온몸의 기관들이 웽~하고 가동을 시작하거든. 아침이면 해가 눈부시고 새소리는 또 왜 저렇게 사랑스러워?

    날더러 젊다고 칭찬하지만 내가 분수를 잃지 않았기 때문이지. 감자를 북북 닦다 하나가 툭 튀어나가면 쥐나 먹지 그걸 어따 써? 자배기 속에서 북북 닦여야 뽀얀 감자가 된다고! 그렇듯이 사람은 사람 속에서 서로 닦이며 살아야 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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