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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착 인터뷰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입’, 손석희

“내가 ‘과대포장’ 됐다면 실체 벌써 드러났겠죠”

  • 이나리 동아일보 주간동아 기자 byeme@donga.com / 사진·김성남 기자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입’, 손석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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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손석희와의 만남은 썩 기대되는 일이 아니었다. 그 스스로 대한민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인터뷰어다. 무슨 말을 하고 하지 말아야 할지, 그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이도 드물 것이다. 게다가 ‘사생활과 정치 얘기는 안 한다’는 무언의 조건까지 달려 있는 참이었다. ‘거 참, 의욕 안 생기네’ 혼자 투덜대던 중 그 책, 아니 그 얼굴을 만났다. 그가 1993년 펴낸 에세이집 ‘풀종다리의 노래’(역사비평사) 표지에 실린 서른 대여섯 살 적 그의 모습이었다.

사진 속 그는 예뻤다. 귀엽고 깨끗했다. 여주인공을 설레게 하는 순정만화 속 이웃집 소년 같았다. 이렇게 예쁘던 남자가 쉰 살이 되면 어떤 얼굴을 갖게 되는지 알고 싶었다. 그는 자기 얼굴을 어떻게 책임지며 쉰 살이 됐는지 알고 싶었다. 비로소 여의도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MBC 사옥 6층, 아나운서국장실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이 학생 고집은 똥고집’

인터넷에 떠도는 신조어 중 ‘미중년(美中年)’이라는 것이 있다. 그저 ‘잘생긴 중년 남성’을 일컫는 말이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미중년의 조건은 네티즌들의 주장에 따르면 ‘품격 있는 따스함, 권위를 살짝 위반하는 귀여움, 자기만의 개성을 극단으로 밀어붙인 섹시함’이다. 손석희, 그는 아쉽게도 미중년이 아니었다. 그는 그렇게 귀엽지도, 따스해 뵈지도, 개성이 넘쳐 흐르는 듯 보이지도 않았다. 방송에서 보여지는 이미지와 실제의 그는 놀랍도록 비슷했다. 꿈꾸는 눈동자의 ‘미소년’은 유능하고 절제력 강한 ‘방송인’이 돼 있었다. 그런데 왠지 미련이 버려지질 않았다. 이를테면 햇빛 때문이었다.

‘내가 지켜 온 가장 오랜 기억은 햇빛에 대한 것이다. 널따란 신작로에 줄지어 늘어선 포플러 나무들, 그 나뭇잎들 사이로 부서지던 한낮의 햇빛, 끊어질 듯 말 듯 들려오던 골목길 안의 아이들 소리…. 그 때 나는 세 살쯤이었던가. 아스라하여 자꾸 도망가려는 그 기억의 끝자락을 가까스로 붙들어 세상에 대한 내 첫 기억으로 남겨 놓았다.’



그의 에세이집 첫 꼭지의 첫 문장이다. 또한 그는 한 인터뷰에서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뜬 동료 정은임 아나운서에 대한 추억을 묻자, 다만 “몸집 작은 사람이 흰 눈밭을 또박또박 걸어가던 뒷모습”을 이야기했다. 모르긴 몰라도 정은임 아나운서의 정갈한 성품과 고독한 면모를 이처럼 정확히 묘파한 표현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그를 어찌, 냉정하고 절제력 강한 방송인으로만 단정할 수 있겠는가. ‘딱 한 장의 그림’으로 한 사람과 한 시기, 한 세계를 인상지울 수 있는 직관력은 아무나 타고나는 것이 아니다.

손석희는 서울 토박이다. 위로 누나 하나, 아래로 남동생 하나가 있다. 직업군인이던 아버지는 그가 여섯 살 때 군복을 벗었다. 그해 여름은 유난히 가물었다. 아버지는 양수기 판매업에 뛰어들었다. 가진 돈 다 털고 자그마한 집까지 잡혀 양수기를 사들였다. 그걸 경기도 전곡 어딘가에 풀어놓았는데 이튿날 그만 큰물이 져 몽땅 떠내려가 버리고 말았다. 그는 “이후 우리 식구들의 삶은 그 양수기 사건처럼 극적인 데가 있었다”고 했다.

한번 자리잡은 가난은 쉬 떠나지 않았다. 집을 잃은 그의 가족은 중구 필동의 한 양철담장집에 세를 들었다. 거기서 그는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을 보냈다.

“제가 고집이 좀 셌어요. 2학년 통지표에 ‘이 학생 고집은 똥고집’이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니까. 또 제법 터프한 편이었는데, 근처 퇴계로 고아원에 살던 아이들이랑 주로 어울렸어요.”

단지 ‘비슷하게 어려운 처지’여서 그랬던 것만은 아니었다.

적산가옥에 사는 몇몇 아이를 빼곤 특별히 더 잘살 것도, 못살 것도 없는 살림이었다. 그런데 초등학교 3학년 시절, 그는 이런 동류의식이 소리없이 무너지는 경험을 하게 됐다. 진원지는 새로 담임을 맡은 40대 여교사의 빈 커피병이었다.

담임선생님은 도시락 반찬을 싸오지 않았다. 대신 아이들 도시락에서 반찬을 적절히 ‘빼앗아’ 먹었다. 처음에는 빈 커피병 가득 김치를 거둬 먹고 남은 것은 싸 가지고 갔다. 열흘 후쯤부턴 도시락 뚜껑에다 다른 반찬들까지 담았다. 선생님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갔다. 아이들의 도시락 반찬을 둘러본 다음 “누구, 누구, 누구는 도시락 들고 나와라. 선생님하고 같이 먹자”고 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의 3학년 시절 급우들은 ‘선생님 책상 앞에 거의 늘 불려 나가는 아이들과 가끔씩 불려 나가는 아이들, 전혀 나가보지 못한 아이들’로 세 동강이 났다. 그는 비로소 가난을 알았다. 그로 인한 설움과 자괴심, 억눌린 분노도 경험했다. 필동 시절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그의 가족이 다음으로 옮겨간 곳은 성북구 보문동이었다.

“거기 애들은 아주 조용하고 얌전하더군요. 저도 덩달아 그런 아이가 됐죠.”

6학년 때는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지는’ 경험을 했다. 보문동 안에서도 몇 번 이사를 다닌 끝이었다. 온 가족이 저녁상을 물리고 며칠 전 마련한 TV 앞에 둘러앉아 있는데 천장에서 작은 흙덩이 몇 개가 후두둑 떨어졌다. 전날부터 내린 비 때문인 듯했다. 날림으로 지은 한옥에서 빗물 새는 것쯤은 예사여서 처음엔 식구들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떨어지는 흙의 양이 점점 많아졌다. 어머니가 문득 말했다. “이러다 집 무너지는 거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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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리 동아일보 주간동아 기자 byeme@donga.com / 사진·김성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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