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2월호

검찰직 7급 출신 미국 변호사 김행선

“너무 늦은 때란 없어요, 결정했으면 저지르세요”

  • 구가인 동아일보 여성동아 기자 comedy9@donga.com

    입력2006-02-01 16: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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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찰직 7급 출신 미국 변호사 김행선
    인터뷰를 위해 미리 받아본 이력서. A4 용지 한 장에 빽빽이 채워진 경력이 화려하다. 1980년 이화여대 법정대 수석입학, 1993년 검찰직 7급 첫 여성 합격자, 2002년 미국 뉴욕주 변호사, 2004년 SMU(Southern Methodist University) 로스쿨 JD(법학박사) 과정 졸업, 현 사법개혁추진위원회(이하 사개추위) 기획연구팀 소속 변호사, 영어 중국어 독일어 등 4개국어 가능….

    약속 시간을 잡기 위해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또랑또랑한 목소리도 화려한 이력서와 잘 어울린다. 2~3분 남짓한 통화지만 시종일관 ‘~습니다’로 끝나는 종결어미에는 자신감이 실려 있다. 그의 사무실에 들어서는 순간 눈에 들어오는 첫인상도 예상했던 그대로다. 선뜻 손을 내밀며 힘있게 악수를 청하는 모습, 자신 있는 미소, 정확한 눈맞춤. 역시 잘나가는 사람은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저 잡초예요.”

    잡초라니.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커리어 우먼의 자기소개치곤 지나치게 겸손하다. 당장 이력서의 몇 줄만 봐도 ‘아무도 찾지 않는 바람부는 언덕의 이름 모를’ 그 풀과는 거리가 있지 않은가.

    “잡초기질이라고 할까요. 웬만해선 기가 안 죽습니다. 밟을수록 오기가 생기는 편이죠. (웃음) 미국 유학을 결정할 때도 별로 두렵지 않았습니다. 인생에서 몇 번 역경을 겪었는데, 그때마다 역경이 곧 스스로가 가장 많이 발전할 수 있는 기회란 걸 깨달았어요. 이겨내면 그 이상의 큰 선물을 받을 수 있거든요. 되레 좋은 시절이 오는 전조라는 느낌을 받곤 합니다.”



    ‘역경’이란 말도 의외다. 탄탄대로만 걸었을 법한 세련된 변호사가 겪은 역경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주저 없이 “긴 터널을 걷는 것 같던 결혼생활”이라고 말을 이었다.

    “친구가 ‘네 인생에서 가장 잘못한 선택과 가장 잘한 선택이 뭐였냐’고 묻더라고요. 결혼이 최악이고 이혼은 가장 잘한 선택이라고 답했습니다. 예전엔 전남편처럼 나쁜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지금은 용서했어요, 남을 미워하는 것도 쉽지 않잖아요.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잘된 일이 아닌가 해요. 그 때문에 공부도 하게 됐고 지금의 제가 있게 된 거니까요.”

    김행선 변호사는 대학 4학년 때 전남편을 만나 졸업 후 바로 결혼했고 7년 만에 이혼했다. 구체적인 이유에 대한 언급은 피했지만 그와의 결혼은 “법정이혼 사유에 모두 해당하는 종합선물세트였다”고 한다.

    “이혼 경력으로 크게 불편한 점은 없습니다. 다만 주변에서 ‘왜 이혼했나’ ‘아이들은 어떠냐’는 상세한 개인사까지 질문해서 곤란할 때가 있어요. 또 화내면 ‘성격이 저러니까 이혼했지’ ‘이혼한 사람은 인생의 실패자’라는 소리를 들을까 봐 더 자제하는 편입니다. 단점일 수 있지만 장점일 수도 있겠죠.”

    따지고 보면 검찰직 7급 공무원이라는, 여성이 선뜻 가지 않는 길을 선택하게 된 것도 이혼이 계기였다. ‘자아성취’ 같은 거창한 목표가 있어서가 아니라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서울지검 수사계장, 대검 강력부 계장

    “양육비가 없어서 아이들을 남편한테 맡겨야 했습니다. 날씨가 좋으면 좋은 대로 나쁘면 나쁜 대로 애들이 생각나서 마음 아팠습니다. 나이 든 여자를 뽑아주는 데가 많지 않고, 영어 과외만으로는 밥벌이가 안 돼 공무원시험을 준비한 겁니다. 사법고시는 시간이 걸릴 것 같아 포기하고 수사같이 활동적인 일이 적성에 맞는 것 같아 검찰직을 지원했습니다.”

    검찰직 7급 출신 미국 변호사 김행선

    미국 SMU 로스쿨 LLM 과정 졸업식 때, 그간 함께 고생했던 아시아권 친구들과 찍은 사진.

    당시만 해도 검찰직 7급 공무원 중 여성은 한 명도 없었다. 원래 채용 인원이 적은 자리인 데다 군(軍) 가산점제도가 있어서 여자는 거의 만점을 맞지 않으면 합격하기 힘들었다.

    “도시락 싸서 도서관에 다녔고, 틈틈이 영어과외와 고시학원의 문제집 편집 일을 도우면서 번 20만원이 채 안 되는 돈으로 한 달을 살았습니다. 절박하니 열심히 해야 했죠.”

    그렇게 공부한 지 6개월 만에 7급 검찰직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다. 그러나 여성으로선 최초의 일이다 보니 고충도 적지 않았다. 동료 직원들뿐 아니라 피의자들조차 ‘여자가 어떻게 조사를 하냐’고 코웃음칠 정도로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여자인 데다 나이도 어려 보이니까, 청소 아주머니가 잡무를 돕는 아르바이트생으로 착각하는 경우도 있었어요. 남자 직원들의 쓰레기통을 비우지 않았다고 어찌나 혼을 내던지. 처음 지원할 때부터 여자가 행정직에나 가지, 왜 검찰직을 하려느냐는 얘길 많이 들었습니다. 그럴수록 더 오기가 생기죠. ‘여자에겐 어려운 일’이라는 말을 들으면, 여자가 더 잘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져요. 실제로도 더 잘하려고 노력하고요. 통념 때문에 힘들 때도 있지만 오히려 힘이 되기도 합니다. 수사할 때는 여성의 부드러움이나 섬세함이 더 유용한 측면도 있고요.”

    검찰직 공무원으로 재직하면서 그는 인천지검 송무계장, 서울지검 공안2부 수사계장, 대검 강력부 계장을 거쳤다. 여자인 그가 공안부나 강력부에 가게 될 줄은 스스로도 기대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름이 남자 같아서 인사권자들이 착각한 때문이었다. 요행 행(倖)에 바랄 선(羨), 그러고 보니 착각할 만도 한 이름이다.

    “갓난아이 때 워낙 약해서 난 지 한참이 되도록 이름을 짓지 않았답니다. 나중에야 아버지가 유명한 작명가를 찾아가셨더니, 허약하게 태어났으니 ‘요행을 바래 살기를 바란다’는 뜻으로 그렇게 짓더라고 하더군요. 이름에는 잘 쓰지 않는 한자잖아요. 학교 다닐 때는 선생님들도 읽기가 어려워선지 수업시간에 질문을 별로 안 받았지요. (웃음)”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어보면 ‘남자 같은 여자’는 내력인 듯하다. 아들 하나에 딸만 여섯인 집의 다섯째인 그는, 아들 하나를 더 원한 부모님 때문에 옷이며 머리모양을 남자아이처럼 하고 다녀 ‘공갈남자’라는 별명이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딸들에게도 대학시험을 치를 기회는 주지만 한번 떨어지면 꼼짝없이 살림을 시킨다는 부모님의 교육방침 때문에 죽어라 공부했다는 이야기다. 고등학교에서는 이과를 택했지만, 한번 법대에 가겠다고 마음먹으니 다른 과에는 눈이 가질 않았다. 그렇게 해서 이화여대 법정대학에 수석으로 입학했다.

    그러고 보니 항상 시험성적이 출중했던 모양이다. 검찰직 공무원으로 근무하면서 사법고시를 볼 생각은 없었느냐고 묻자 의외의 답이 돌아온다.

    “검찰에서 일하는 동안 판·검사들을 많이 봤죠. 그런데 별로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하겠더라고요. 우선 제 성격이 수직적인 사고보다는 수평적인 사고를 좋아하는 편인데, 우리나라에서는 밖에서 맺는 인맥이 중요하잖아요. 법조계는 그런 문화가 더 강한 편이지요. 그런데 저는 그런 걸 잘못했거든요.”

    남자 동기들은 유학 보내는데…

    나름대로 잘나가던 검찰공무원을 그만둔 결정적인 이유는 ‘매너리즘’이었다. “그럭저럭 밥이나 먹고 사는 건 나 자신에게 용서가 안 됐다”는 회고다. 미국 로스쿨 유학을 결심하고 방법을 찾았지만 그리 녹록지 않았다.

    “공무원 유학신청을 대여섯 번 했습니다. 검찰청의 경우 몇 배수 추천을 받은 뒤 영어시험을 봐서 대상을 선발하는데, 우선 추천부터 안 되더라고요. 주변의 남자 동기들은 되는데…. 그래서 법무부에 항의했더니, 마지막에 지원할 땐 앞으론 지원도 하지 말라고 하더군요. 회의가 느껴졌죠. 낡은 인식을 바꾸는 일이 쉽지 않았습니다.”

    결국 개인경비로 유학을 결심했다. 미국 법대에 대해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이 아는 세 개의 대학인 하버드와 예일, SMU에 지원했고, 그중 장학금을 주겠다는 SMU LLM(법학석사) 과정에 진학을 결정한다. 아들과 딸을 데리고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퇴직금과 아파트 전세비 등을 털었지만 그것으론 등록금 일부와 몇 개월치 생활비를 댈 수 있을 뿐이었다고 한다.

    “어떤 일을 결정할 때는 심사숙고하지만, 행동으로 옮길 때는 무척 빠른 편이에요. 그리고 후회는 안 하죠. 저돌적으로 밀고 나가는 식이고요. 휴직이 아니라 사표를 낸 것도 그 때문입니다. 어차피 갈 거라면 배수진을 치자, 얼마 안 되는 퇴직금이라도 학비에 보태는 게 낫다고 생각한 거죠. 그래도 유학비용이 턱없이 모자라서 미국에선 최소경비로 살았어요. 여행 같은 건 꿈도 못 꾸고, 나나 아이들 머리는 직접 자르고….”

    혼자 아이들을 키우며 공부하는 유학 생활 내내,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들과 갈등도 적지 않았다.

    “미국에서는 부모가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매일 운전해서 학교 데려다줘야지, 밥해줘야지…. 그뿐이 아녜요. 과외활동도 일일이 따라다녀야 합니다. 저는 그런 걸 못했죠. 돈이 없으니 무조건 제일 싼 것만 강조했고요. 아이들이 사춘기가 되니까 ‘멀쩡한 직장 그만두고 멀리 와서 자기들까지 고생시킨다’고 항의하더라고요. 속상했죠. 물론 지금은 그때 자기들이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고 해요. (웃음)”

    미국에 갔을 때 중학교 2학년이던 아들은 USC(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에서 컴퓨터 공학을 전공하고 있고, 초등학교 4학년이던 딸은 함께 귀국해 경기도 일산에 있는 고등학교에 다닌다. “아들은 영화 일을 하고 싶어하고 딸은 엄마처럼 법을 공부해 국제기구에서 일하고 싶어한다”며 아이들 이야기를 하는 동안, 그의 표정이 한층 밝아진다.

    로스쿨? 문제는 콘텐츠

    김 변호사는 2002년 뉴욕주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로스쿨을 졸업한 응시자의 60~70%만 합격한다는 그 시험을, 친구 책을 빌려 불과 한 달 공부한 후 통과했다.

    “딱 25일 준비하고 시험을 봤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말이 안 되죠. 운이 정말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이 ‘너는 가난하니까 한번 봐준다’ 하는 뜻에서 합격시켜준 것 같다는 생각도 합니다.”

    변호사 자격증을 따낸 뒤엔 미국 학생들이 변호사가 되기 위해 진학하는 3년의 JD과정을 밟았다. 그는 JD과정을 통해 미국법을 제대로 알게 됐다고 말한다.

    “이왕 하려면 제대로 하고 싶었어요. 보통 한국 변호사들은 1년 LLM과정만 밟고 자격증 따서 오거든요. 하지만 그건 맛보기예요. 그래서 JD과정을 선택했어요. 결과적으론 잘한 선택이었죠.

    저는 로스쿨 제도를 지지하는 편입니다. 미국 로스쿨은 정말 철저히 가르칩니다. JD과정 중 1년만 마쳐도 실무를 할 수 있을 정도죠. 고객에게 인사하는 법, 상담하고 결과를 알려주는 법, 변호사끼리 협상하는 것, 모의재판 대회까지 수업과정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요즘 우리나라 로스쿨 제도에 대한 논란이 한창인데, 저는 제도적인 형식보다는 콘텐츠에 대해 논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외국에 나가면 한국이 더 잘 보인다던가. 김 변호사 또한 미국 생활을 통해 한국 법조계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다고 말한다. 검찰에 몸담던 시절엔 보지 못했던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 사법체계가 가진 장단점이 골고루 보이죠. 제가 보기에 사법개혁이라는 말이 나온 근본적인 원인은 엘리트 의식에 있습니다. 일반인이 법에 다가가는 걸 어렵게 만들거든요. 미국의 경우 법조인은 그저 돈 많이 버는 직업의 하나지 엄청난 벼슬은 아닙니다. 그에 비해 우리는 수직적이고 권위적인 문화가 강하죠. 그 때문에 법조계에 대한 일반인의 반감도 적지 않고요. 우선 문턱부터 낮춰야 한다고 봅니다.

    사개추위가 배심제를 추진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배심제가 이뤄지면 변호사와 검사가 일반인을 설득해야 합니다. 자연히 어려운 법률용어를 쉽게 설명하게 되지요. 미국 JD과정 중에 1학년 때 배우는 과목 중 하나가 ‘법률조사 및 작문(Legal Research & Writing)’인데, 이런 강의에서 선생님들이 강조하는 가장 좋은 글쓰기는 ‘일반인이 이해하기 쉬운 평이한 문장’입니다. 법률용어는 되도록 쓰지 않고 길이도 길지 않아요. 짧고 명확하고 단순하게 써야 좋은 점수를 줍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선 법정문서는 무조건 어려운 법률용어로 길게 늘여 써요. 일반인은 자신이 이긴 건지 진 건지조차 잘 알 수 없다는 거죠. 배심제를 도입해 일반인이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법조문화를 형성한다면 긍정적이겠지요.”

    그가 사개추위 기획연구팀에서 일하게 된 것은 2005년 초 귀국한 직후다. “외국 변호사를 뽑는다”는 검찰 후배의 전화를 받고 지원했다.

    “원서 접수 마지막 날 지원했는데, 역시 운 좋게 붙었지요. 제가 맡고 있는 과제는 ADR(대체적 분쟁해결기구), 집단소송제 등 미국식 제도를 국내에 도입하는 방안입니다. 그동안 배운 것을 활용할 수 있고, 단순한 돈벌이가 아니라 사법개혁에 미력이나마 보탤 수 있다는 것,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게 참 좋습니다.”

    끝없이 뻗어나가는

    검찰직 7급 출신 미국 변호사 김행선
    사개추위는 2006년 12월31일까지 존속하는 한시(限時)기구다. 김 변호사도 12월까지 이곳에서 일하게 된다. 이후에 김 변호사는 지적재산권이나 세법, 각종 회사법, 증권규제법, 회사 인수합병 분야에서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 특히 한국 기업들이 외국에서 지적재산권과 관련된 소송에서 불리한 판정을 받는 경우가 많은데, 이를 예방하거나 소송전략을 세우는 일에 관심이 많다. 한편으로는 기회가 닿으면 국제기구나 외교분야에서 활동하고 싶은 꿈도 있다. 외국어 실력과 유학하는 동안 맺은 외국 친구들과의 교우관계가 보탬이 될 거라는 이야기였다.

    시종 자신감 있는 말투로 얘기를 이어가던 그는 “생각해보면 시작하고자 마음먹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는 말로 그간 걸어온 길을 정리했다. “늦었다고 생각하지 말고, 결정했으면 과감하게 저질러라”는 말이었다. 밟히면 다시 일어나고, 한 자리에 만족하지 못하며, 거침없이 새로운 자리를 찾아 뻗어나가는 근성의 원천은 뭘까. 좋아하는 책에 대한 설명을 듣자 짐작이 될 것도 같았다.

    “‘어린 왕자’를 제일 좋아합니다. 왕자는 장미를 사랑해서 정성을 다해 돌보죠. 그러던 중 자신의 별을 떠난 왕자는 무수히 많은 장미꽃을 발견합니다. 처음엔 자신의 장미가 별것 아니라는 생각에 실망하지만 곧 ‘나의 장미가 특별하다’고 말해요. 기울인 노력과 마음만큼 대상이 소중해진다는 거죠. 모든 게 마찬가지 아닐까요. 저는 그래요.”

    그는 삶의 결과보다 과정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인 듯했다. 잡초가 질긴 생명력으로 짓밝혀도 다시 자라고 끊임없이 뻗어나가는 것처럼, 그의 삶은 멈추지 않고 계속 뻗어가는 중이다. 문득 그의 다음 행로가 무척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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