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4월호

‘서울의 얼개’ 디자인한 최초의 도시설계사 차일석박사

“여의도, 강변도로, 남산터널, 삼일고가 …‘불도저 콤비’ 가 밤낮없이 만들어낸 작품들이죠”

  • 김서령 칼럼니스트 psyche325@hanmail.net

    입력2006-03-28 15: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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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의 얼개’ 디자인한 최초의 도시설계사 차일석박사
    “서울이 왜 서울인 줄 알아요?”

    마주 앉았을 때 차일석 박사는 대뜸 그렇게 물었다.

    “음… ‘서라벌’에서 온 말일걸요. 신라 향가 처용가에도 ‘셔블 밝기 달에 밤드리 노니다가’란 구절이 나오잖아요.”

    내가 듣기에도 엄청 싱거운 대답, 무안해서 얼른 다시 물었다.

    “서울이 왜 서울입니까?”



    인터뷰어로서 내 질문은 그 한마디로 충분했다. 그 물음 하나에 일흔 넘은 노(老)관료의 입에서 서울에 관한 역사·지리·정치·인구·교통·주택에 관한 분석과 통계들이 해박하고도 실증적으로 쏟아져 나왔다.

    “서울은 네 개의 산으로 둘러싸였잖습니까. 북에 북악, 남에 남산, 동에 낙산, 서에 인왕. 이걸 내사산이라 부르는데, 겨울에 내사산에 눈이 쌓이면 울타리처럼 둥그렇게 보이거든요. 높은 곳에 올라서서 보면 동그라미가 그려진 거 아닙니까. 그래서 서울이라고요. 눈의 ‘설(雪)’ 플러스 울타리의 ‘울’ 해서! 하하.”

    유머가 몸에 배어 있다. 열정적이다. 박람강기(博覽强記)하다. 젠틀하다. 서울을 지독하게 사랑한다!! 첫눈에 읽히는 차일석 박사의 풍모다. 그는 1960년대 서울의 광경을 두루마리처럼 내 앞에 주루룩 펼쳐 보았다.

    “1960년대는 한국사의 격동기였어요.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고 허정 과도정부를 거쳐 1960년 민주당 정부가 들어서자 서울에 첫 민선시장이 뽑혔습니다. 카이저 수염을 기른 김상돈씨로, 그는 내 이모부였어요. 그런데 임기를 반도 못 채우고 5·16이 일어나서 서울시정은 군사정권에 넘어가버리죠. 군 중장 출신의 윤태일씨가 서울시장이 됐는데, 내무부가 지휘감독하는 다른 지방자치단체와 달리 서울시는 임시조치법을 만들어 국무총리 직속으로 승격됐어요.”

    미처 몰랐던 서울의 현대사다. 모든 분야가 그랬지만, 그중에서도 서울의 외형은 특히 놀랍게 변모했다.

    두 불도저의 ‘무궁화 계획’

    “1962년부터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시작됐잖아요. 거기 따른 수출 드라이브 정책으로 서울에는 의류·옷·가발공장과 같은 노동집약적 산업체들이 마구 생겨났어요. 지방에서 근로인구가 마구 몰려들었죠. 그 때문에 1960년 245만이던 서울 인구가 1965년에 347만으로 늘어났어요. 5년 만에 100만명이 불어난 거예요.

    그런데 서울의 도시공간은 그때까지 1950년대 전쟁 직후와 별반 달라진 게 없었어요. 강북 시가지는 예전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했고, 서울 내사산 기슭을 비롯해 시가지를 가로지르는 청계천과 정릉천 냇가에는 판잣집이 다닥다닥했어요. 교통수단은 전차와 일부 노선버스가 전부인데, 그 범위는 서북쪽으로는 무악재 고개를 넘지 못했고 동쪽으로는 청량리, 동북쪽으론 미아리 고개, 서남으로는 신촌과 마포나루, 동남으로는 왕십리가 고작이었다고요. 도시계획이 있기는 했으나 현황 측량지도조차 마련돼 있지 않은 상태였어요. 거기다 갑자기 인구가 비대해져버렸으니 1960년대 중반, 그야말로 서울은 초만원이었지요.”

    바로 이 무렵 차일석 박사는 서울시 부시장이 된다. 1966년대 부산시장으로 건설사업부문에서 성과를 올리던 김현옥씨가 서울시장이 됐고, 그가 시장이 되자마자 당시 연세대에서 도시행정을 강의하던 차일석 교수를 건설담당 부시장으로 지명했다. 명콤비가 탄생한 것이다.

    연세대 교수 시절 차일석은 중앙도시 계획위원으로 위촉돼 부산직할시 승격의 타당성에 관한 조사보고서를 만든 적이 있다. 당시 부산시장이 바로 김현옥이었다. 현장조사하러 간 자리에서 세계 여러 도시를 예로 들어가며 도시계획에 관해 설명했다.

    “‘부산시는 대서양 연안에 위치한 뉴욕과 입지가 비슷하다. 지정학적으로 한국의 관문이자 천연 항구로 대외무역에서 다른 내륙도시와 차별성을 갖는다. 세계로 뻗어나갈 한국의 최대 항구도시이므로 마땅히 직할시로 승격해야 한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썼어요. 그 때문인지 1963년 부산은 직할시로 승격됐지요. 현장조사하는 제 모습이 인상적이었는지 김현옥 시장은 서울시로 온 직후 절 불러들이더군요. 김 시장은 군 수송감 출신이었어요. 저돌적이면서도 합리적이고 애국적인 분이셨죠.”

    김현옥 시장은 부산에서 이미 불도저로 통했다. 별명답게 부산을 새롭게 건설한 공로가 인정되어, 이번에는 서울을 한번 만들어보라는 뜻으로 박대통령에게 뽑혀 올라왔다. 김현옥 시장과 차일석 부시장, 그들은 번개처럼 서울 건설에 나섰다. 큰 불도저와 작은 불도저! 박정희 대통령은 둘을 그렇게 불렀다.

    차 박사에게서 들은 이야기는 어리둥절할 정도였다. 부시장 재임 기간이 불과 4년 남짓인데 어떻게 그토록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다는 건지. 듣고 보니 현재 서울의 얼개는 대부분 당시에 만들어진 구도였다.

    “나를 테크노크라트 부시장으로 지명한 뒤 김현옥 시장이 ‘우리가 가장 먼저 할 일이 뭐냐?’고 물어요. ‘시민에게 꿈을 심어주는 일’이라고 답했지요. 시청에 쌓여 있는 자료를 모아 미래 서울의 마스터플랜을 작성해 전시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4월에 취임해 8월15일에 그 전시를 하고야 맙니다. 건설부에서 근무하던 실력파 윤진우를 도시계획 과장으로, 얼마 전 서울대 환경대학원장에서 정년퇴임한 최상철을 계장으로 데려와 신속히 막강한 실무진을 구성했지요. 도시기본계획은 물론이고 아직 제대로 확보되지 않았던 지적고시도면까지 재빠르게 완성했습니다. 거의 밤샘작업이었어요. 1966년 광복절, 드디어 시청 앞 광장에 가건물을 세우고 미래 서울 마스터플랜 1/1200 모형도를 전시했어요. 박 대통령을 불러 미래 서울을 하나하나 설명했죠. 아주 만족스러워하고 감동하더군요.”

    “섬에다 국회의사당을 짓는다고?”

    그 기본계획은 수도 서울의 새로운 청사진이었다. 기본 개념은 미국 수도 워싱턴 DC를 모델로 해 한양대 교수이던 이성옥 박사와 도시계획 이론가인 주원 박사가 실무를 맡아 진행했다. 이름하여 ‘무궁화 도시계획’! 그 계획 안에 현재 서울의 공간구조가 거의 결정되어 있었다.

    “국회의사당의 입지 문제가 시급한 과제였어요. 정부 수립 후 서울 시민회관(현 서울시 의회 건물)을 의사당으로 쓰고 있었는데 새로운 국회의사당이 필요했거든요. 종묘에 건설하자는 안은 전주이씨 종친회가 반대해 좌절됐고, 남산음악당 자리는 ‘국회가 행정부와 사법부를 내려다보는 자리여서는 안 된다’는 바람에 새로운 장소를 찾지 못하던 중이었죠. 국회뿐 아니라 행정부는 조선총독부 건물을 그대로 쓰고 있는 상태였고, 사법부는 정동 일대 일제 강점기 때의 법원을 그대로 사용했어요. 독립국의 위용을 갖추기엔 너무도 초라했습니다.”

    무궁화도시 계획에 따라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의 위치가 현재의 자리로 정해졌다. 올림픽을 유치하면 잠실에 100만평의 땅을 잡아 운동장을 짓겠다는 구상도 그 계획에 이미 들어 있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어요. 행정부는 청와대 인근에 두고 사법부는 강남땅을 개발해서, 입법부는 영등포 대방동에 지을 계획이었거든요. 나중에 여의도가 개발되어 입법부를 그리 옮긴다는 계획이 발표되자 풍수지리를 한다는 어떤 사람이 부시장실로 찾아왔더라고요. 여의도는 섬인데 입법부를 거기 두면 자꾸 흔들려서 안 될 거라고. 불안정한 섬에다 국회의사당을 짓는 계획일랑 반드시 재고해야 한다고. 나는 기독교인이라 풍수지리 같은 건 믿지 않았어요. 그냥 웃고 돌려보냈거든요. 나중에 국회가 자꾸 분란을 일으키고 싸움이 끊이지 않는 걸 보면서 종종 그 지관의 말이 생각나더라고요, 하하.”

    도로 만들고 땅 생기고

    청사진을 만들어 전시한 것은 좋았으나 정작 서울시에는 돈이 없었다. 당시 한 해 일반 예산이 97억원 정도. 다리 하나, 지하도 하나를 건설하려고 해도 언제나 비용이 문제였다. 개발시대의 리더십은 성숙사회의 리더십과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후진사회의 빠른 성장과 발전을 위해서는 지도자의 미덕에 권위와 카리스마, 그리고 추진력이 반드시 필요했는 지도 모른다. 어느 정도의 역작용이 있다는 걸 알아도 다들 모른 체하고 넘어갔다.

    “건설을 하려고 해도 돈이 있어야지요. 재원을 만들어 돈을 벌어가면서 일을 추진할 수밖에 없었어요. 한강을 사이에 두고 자동차 전용도로를 만들어서 강변부지 12만평이 생겼거든요. 그걸 평당 2만원에 일반분양해 24억원을 만들었어요. 그 돈으로 여의도 개발비용을 댔다니까요.”

    원칙을 무시하고 절차를 건너뛰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렇지만 공익을 위한 사업이었고 사익을 위해서는 한푼도 쓴 적이 없다는 걸로 절차 무시의 면죄부를 삼았다.

    서울시의 도시계획 기본 얼개를 총책임진 차 박사는 지금도 살고 있는 집 외에는 한 평의 땅도 없다. 아예 부동산을 사고파는 일 자체를 해본 적이 없다. 참외 밭에서 신발끈을 매지 않으려는 조심스러운 마음이기도 했고, 물욕에 얽매이지 않는 성향 탓이기도 했다.

    1억 공사를 1원에

    그가 사는 집은 자신이 한강을 개발하면서 생긴 땅, 동부이촌동에 지은 장미맨션이다. 1970년에 지어진 그 집에서 36년 동안 한 번도 이사하지 않고 살고 있다. 눈앞에 한강이 훤히 내다보이고 스스로 기획해서 닦은 강변도로에 불빛이 찬란한 이 집을 그는 아까워서 차마 떠날 수 없었다.

    “한 동밖에 없는 아파트지만 내 꿈이 이뤄진 걸 내다볼 수 있는 곳인데…죽을 때까지 여기서 살 겁니다. 35년 전 1900만원을 주고 입주했는데 요새는 이 집이 20억을 한다지요, 아마? 내가 우리 아파트에서 가장 오래 산 사람이에요.”

    그는 한강 너머로 달리는 차들을 바라보며 “저 길 닦을 때는 움직이는 이동 시청이 있었어요. 대형버스에 ‘한강건설이동시청’이란 간판을 달고 그걸 타고 다니면서 현장을 감독했다니까요”라고 했다.

    부시장이 되어 가장 먼저 한 일은 미래도시 청사진 만들기였지만 동시에 지하도와 보도육교 건설에도 주력했다. 도시행정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사람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당시 서울의 교통상황이 얼마나 원시적이었냐면, 세종로 사거리 같은 번화가에서도 도로 위에 횡단선을 그어놓고 교통경찰이 신호를 해서 질서를 잡는 식이었다. 행인은 늘 위험에 노출된 상태였다. 그는 먼저 세종로 사거리와 명동에 지하도를 만들고, 신세계 백화점 앞에 육교를 세우기로 했다.

    세종로 지하도는 국군의 날을 하루 앞둔 1966년 9월30일 개통했다. 박 대통령은 테이프를 끊으며 내일 국군의 날 행사 때 중무장한 기갑부대가 저 위를 지나갈 텐데 그 하중을 지하도가 견뎌낼지 근심하는 눈치였다. 김현옥 시장이 “내일 그 시간에 건설담당 차 부시장이 지하도에 내려가 있을 것”이라고 자신하며 대통령을 안심시켰다.

    마침 차 박사의 앨범에서 그날 테이프를 끊는 장면이 담긴 사진을 볼 수 있었다. 한복을 화사하게 차려입은 육영수 여사와 박 대통령, 정일권 총리와 프랑스 대사의 모습도 보였다. “당시는 이런 개통식에 늘 주한 외교 사절단이 함께했어요. 박 대통령은 테이프 끊는 것을 무척 좋아했지. 테이프 커팅 가위를 따로 모아 주욱 진열도 했다니까요. 나도 내가 참여한 현장의 가위들을 사무실에 늘어놓은 적이 있어요. 지하도 건설 따위, 요즘 같으면 아무 일도 아니라서 구청장도 개통식에 나오지 않겠지만 당시는 도시를 건설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 좋아 대통령이 꼭 참석했어요.”

    세종로 지하도 건설에는 뒷얘기가 있다. 지하도 입찰광고를 냈더니 당시 돈으로 1억원이 넘는 공사를 단 1원에 하겠다고 나선 건설사가 있었다. 언제나 현대에 눌려 지내던 대림산업이었다.

    “희한한 뉴스가 매스컴을 타고 전국에 퍼졌고, 이후 서울시가 발주하는 대규모 공사를 대림건설에 주지 않을 수 없게 됐지요.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습니까. 그러는 게 도리 아닙니까. 이후 대림산업이 급성장했지요.”

    그런 변칙은 곳곳에 있었다. 존슨 미국 대통령이 베트남 파병과 관련해 서울을 방문하기로 한 게 1966년 8월이었다. 숙소를 워커힐호텔로 정했는데 왕십리 한양대학에서 워커힐로 가는 길이 2차선밖에 되지 않았다. 김현옥 시장은 국빈을 맞기에 너무 초라하다고 생각했다. 차 부시장도 동감했다. 둘은 빠른 속도로 일을 진행했다. 도착 예정일까지 남은 시간은 불과 15일.

    “그 길을 4차선으로 넓히기로 결정했어요.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거지요. 일단 현대, 동아, 대림 등 큰 건설회사 총수들을 다 불러모았어요. 내 방에서 대책회의를 열고 가위바위보를 해서 각자 맡을 공구를 정했어요. 설계를 서두르면서 동시에 공사에 착공했지요. 24시간 불철주야로 일해 예정일보다 나흘이나 앞서 완공했지요.”

    1960년대 국내 건설회사가 가진 중장비는 보잘것없었다. 고작 일제 고마츠 불도저 몇 대가 전부였다. 공기를 단축하기 위해 현장에 있는 버드나무를 쓰러뜨리려고 불도저로 밀었는데 그만 불도저가 ‘뻥’ 나가떨어졌다. 그는 우리 장비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평소 친하게 지내던 미 8군 사령관을 찾아간다. 사정을 설명하고 8군의 장비를 빌리기로 한다. 마침 8군 안에는 스크랩터라는 대형 장비가 있었다. 미 공병대의 도움으로 어렵사리 워커힐 길을 닦을 수 있었다.

    “당시 공사는 시공과 설계를 동시에 한 경우가 많았어요. 이것저것 따지다보면 시간이 다 가버리는데 언제 공사를 하겠습니까. 무리도 따랐지만 그 시대에는 그 시대의 방식이 분명 있었어요. 낭만이고 열정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박 대통령, 건설이면 무조건 OK!

    ‘서울의 얼개’ 디자인한 최초의 도시설계사 차일석박사

    자신이 만든 서울 구석구석을 볼 때마다 가슴이 벅차다는 차일석 박사.

    박정희 대통령과 김현옥 시장, 차일석 부시장은 명콤비였다. 차 부시장이 건설 아이디어를 내 김현옥 시장에게 얘기하면 그는 일단 가만히 귀를 기울여 듣다가 “그거 괜찮네, 그거 한번 해보소” 한다. 그 말이 떨어지자 마자 차 부시장은 건축가를 불러 도면을 그린다. 도면이 완성되는 즉시 김 시장 방에 가면 김 시장은 “당장 갑시데이” 하면서 청와대로 바로 달려간다. 박 대통령은 건설이라면 웬만해선 다 ‘오케이’였다.

    “그리고 당장 공사에 들어가는 거지요. 다른 절차는 모조리 생략해버려요. 대통령의 허락이 떨어졌는데 건설부나 교통부에서 뭐라고 딴소리를 하겠어요? 늘 그런 식으로 자기주장이 강했으니까 김현옥 시장이 적(敵)이 많기는 했어요. 와우 아파트 무너졌을 때도 해임까지는 안 가도 괜찮았을 텐데 주변에 질시하는 사람이 많아서…정말 아까운 사람이었어요. 뉴욕이 뉴욕시를 건설하는 데 공을 세운 라가디어 시장을 기려 공항 이름을 짓고 도시행정의 달인이라고 치켜세우듯 서울시도 김현옥 시장의 이름을 딴 길이라도 하나 만들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그렇게 불명예 퇴직하실 분이 아니었는데….”

    김현옥 시장은 퇴임 후 고향 부산에서 초등학교 교장노릇을 하며 여생을 보내다 세상을 떠났다. 차 박사는 인생에서 김 시장과 같은 사람을 만난 것을 큰 행운으로 여긴다. 세운상가를 지을 때도, 강변도로를 건설할 때도 여의도를 개발할 때도 둘은 죽이 척척 맞았다. 요즘도 여의도 윤중로에 벚꽃이 피면 거기에 꽃 나무를 심어 꽃길을 만들 생각을 한 김 시장을 추모하며 그 길을 걷는다. 그는 여의도 광장을 없애버린 것이 영 불만이다.

    “세계 어느 도시를 가도 광장이 있잖아요. 아니 일부러 만들어놓은 대형 광장을 왜 공원으로 바꿔요? 윤중로 벚나무길 자체가 공원인 걸. 뉴욕이 도심에 센트럴 파크를 만든 것은 산이 없어서 그런 거예요. 북한산 같은 천혜의 공원에 둘러싸인 도시가 서울인데…. 굳이 광장을 공원으로 만든 이유가 뭐랍니까.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왔을 때도, 요한 바오로 교황이 왔을 때도 100만 넘는 사람이 모여 얼마나 좋았습니까. 지금 그런 행사가 열리면 도대체 어디에 모이지요? 월드컵 응원도 여의도 광장에 모여서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어요. 청계천 같은 도심 하천이나 여의도 광장은 굳이 나무를 심지 않더라도 도시행정에서 큰 뜻의 공원으로 보는 겁니다.

    ‘후생(後生)이 가외(可畏)라고, 지금 이명박 시장은 김현옥 시장의 뒤를 잇는 시장이라고 생각할 수 있어요. 내가 만든 삼일고가도로를 부수고 청계천을 복원한 것도 잘한 일이에요. 그 시대에는 서울의 동서 교통 흐름을 이어줄 고가도로가 절실했고, 지금은 환경복원을 위해 수명이 다한 고가도로는 철거하는 게 마땅하거든요. 도시는 생물이에요. 살아 있으니 자꾸 변화해야 하는 게 맞지요.”

    미국 도시에 매료되다

    그는 목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유명한 의사였고, 어머니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어머니가 매우 율법적이었어요. 엄격하셨죠.”

    덕분에 그의 다섯 형제는 하나 예외 없이 우뚝하게 자랐다. 맏형은 가업을 이어 의사가 됐고, 차 박사가 둘째이고, 셋째는 서울대 철학과 차인석 교수, 넷째는 여의도 63빌딩을 설계한 건축가 차우석이다. 극작가 차범석 선생과는 사촌간이다. 그들 형제는 중학교 때부터 선교사로 와 있던 미국인 호퍼 부인에게 영어를 배웠다.

    “아주 쉽고 생생한 영어였어요. ‘Who made you?’ 하면 ‘God made me’ 하고, ‘Where is god?’ 하면 ‘God is everywhere’ 하는 식으로….”

    1953년 군역을 마친 그는 미국 유학을 떠난다. 집이 부자였으므로 한 달씩 걸리는 배 대신 비행기를 타고 갔다. 샌프란시스코에 내려 기차로 뉴욕까지 가는 나흘 동안 미국 전역을 구경한다. 가면서 본 미국 도시들, 새크라멘토, 솔트레이크시티, 덴버, 시카고, 피츠버그, 뉴욕…. 그곳의 반듯한 도로와 고층빌딩과 공장에 그는 매료된다.

    하긴 짐작할 만하다. 1950년대 전쟁의 폐허 속 한국을 출발한 20대 초반 청년, 그의 눈에 비친 미국의 광활한 국토와 도시문명이 얼마나 황홀했겠는가. 미국이란 국가를 선망하고 푹 빠지지 않을 도리가 없었으리라. 아델파이 대학과 뉴욕대학에서 도시행정을 전공했다. 미국 도시들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공부하고 싶었다. 그 배움을 당연히 한국에 풀어놓고도 싶었다.

    그는 타고난 미성(美聲)이다. 노래를 무척 잘했다. 미국에서도 성악을 전공하는 게 어떻겠냐는 권유를 심심찮게 받았다(훗날 그는 마리아 칼라스, 주세페 디 스테파노와 함께 노래를 부른 적도 있다). 결혼식장에서 축가 부르는 아르바이트도 했다.

    “주로 ‘아베마리아’를 불렀는데 구노 아니면 슈베르트였죠. 한 곡 불러주면 20달러를 받는데, 백화점에 가면 신사복 한 벌을 살 수 있는 돈이었어요.”

    일리노이 대학에 다니던 아내 백영자를 만난 것은 대학 4학년 때였다. 그녀는 주택은행장을 지낸 백남권 선생의 무남독녀로 미스코리아 오현주, 피아니스트 오정주 자매의 외사촌 언니이기도 했다. 뉴욕에서 밤 비행기로 일리노이 대학까지 가서 같이 심야영화를 보곤 했다. 꿀 같은 연애시절이었다. 약혼식은 유니언 신학교에 다니던 강원룡 목사가 맡아줬고, 둘은 이듬해인 1958년 허드슨 강변의 리버사이드 교회에서 결혼한다. 남편은 도시행정을, 아내는 언어학과 영어교수법을 공부했다. 1961년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은 서울로 돌아온다. 연세대에서 그를 불러들인 것이다.

    “지금도 강남엔 안 가요”

    공항엔 이모부인 김상돈 서울시장이 마중 나와 있었다. 자기를 도와 보좌관이라도 맡아줬으면 하는 눈치였으나 그냥 학교로 가겠다고 한다. 청년 차일석이 도시행정학을 강의하는 교수가 된 지 두 달 만에 역사는 다시 한 번 바뀐다. 5·16 군사정변이었다. 연세대 교수 노릇뿐 아니라 중앙공무원 교육원의 고문 교수로도 강의하고 중앙도시계획위원으로도 활동하던 그는 몇 해 뒤 35세의 나이에 일약 서울시 부시장 자리에 오른다.

    1960년대 한강은 공포의 강이었다. 여름마다 물이 범람했다. 김현옥 시장은 1968년 그 한강을 향해 칼을 뽑았다. 한강 가운데 버려진 땅 여의도를 뉴욕의 맨해튼같이 만들고 싶은 것은 차 부시장의 꿈이었다. 미군 K16 비행장이 있던 여의도를 개발하려면 미군의 동의가 필수였다.

    미 8군 참모장을 만나 여의도 개발의 필요성을 늘어놓으며 설득했다. 비행장을 성남으로 옮기기로 하고 드디어 기공식을 연다. 건축가 김수근이 토지이용계획의 밑그림을 그리고 여의도 종합개발심의위원회가 조직되어 계획을 총괄했다. 여의도 개발에 투입된 돈은 26억원. 이건 시민이 낸 세금이 아니었다. 강변도로를 건설하면서 생긴 12만평 대지를 매각해 자체적으로 벌어들인 돈이었다.

    여의도 크기는 85만평, 둘레 7km에 높이 15.5km의 윤중재를 쌓아 어떤 홍수에도 이겨낼 수 있는 기초를 다졌다. 수도의 판도를 바꾸는 대역사였지만 완공되기 전에 와우아파트 붕과 사고가 터졌다.

    “도시계획 전문가로서 여의도에 거는 꿈이 정말 컸는데 지금 꼴을 보면 가슴 아파요. 이어서 맡은 이가 조금만 안목이 있었어도…. 여의도는 관악산 쪽으로 유기적으로 연결했어야 합니다. 강남을 봐도 얼마나 속상한지 몰라요. 나는 누가 강남에서 약속하자고 하면 절대 안 가요. 꼴보기 싫어서. 그때 계획했던 대로만 건설했다면 쾌적하고 시원한 거리가 됐을 텐데 지금 그 꼴이 도무지 뭡니까.”

    박 대통령과 얽힌 일화를 듣는 일도 재미있다. 강변도로를 개통할 때 그 자리에 참석한 대통령은 “이 도로 만드는 데 얼마 들었어?” 묻는다. “1km에 1억쯤 들었습니다.” 대답했다. “어이, 서울에서 부산까지 총 거리가 얼마지?” 또 묻는다. “약 430km일 겁니다.” “그럼 430억이면 되겠네.”

    그 얼마 뒤인 1968년 2월1일 대통령은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착공한다. 강변 유료도로가 완성되던 날, 박 대통령의 머릿속에서 구상된 일이었다.

    “고속도로 공사에 참여했던 건설회사들이 손해를 많이 봤어요. 강기슭을 달리는 강변도로 공사와 터널을 뚫고 다리를 건설해야 하는 고속도로 건설이 어떻게 경비가 같을 수 있겠어요?”

    어쨌든 공사는 429억원을 들여 마무리되었고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7번째 고속도로를 가지게 됐다.

    박 대통령의 즉흥적인 건설계획 결심은 북악 스카이웨이 개통식 날에도 있었다. 스카이웨이에선 남산이 바로 내려다보였다. 남산을 손가락으로 가리킨 대통령은 “저기에 터널 두 개를 뚫으면 어떨까. 평소엔 도로로 사용하다가 유사시 하나엔 1개 기갑부대를, 하나엔 보병사단을 숨겨둘 수 있지 않을까?”

    남산 1, 2호 터널도 그렇게 당장 착공됐다.

    남산 외국인 아파트를 지을 때의 일화도 인상적이다. 외화벌이가 무엇보다 중요할 때였다. 박 대통령은 달러가 들어오는 사업이라면 아주 솔깃해했다.

    ‘서울의 얼개’ 디자인한 최초의 도시설계사 차일석박사

    차일석 박사는 건설현장 곳곳을 누비며 직접 전두지휘했다.

    “주택공사에서 남산 자락에 외국인 아파트 다섯 동을 짓는다기에 당장 청와대로 달려갔지요. 이후락 비서실장과 이한림 건설부 장관이 배석해 있더군요. ‘각하, 남산에 아파트는 안 됩니다. 거기는 서울시민의 베개입니다. 그걸 가릴 수는 없습니다’ 하고 강하게 말했지요. 대통령은 ‘달러가 생긴다는데도 안 돼? 그럼 세 동만 짓지’ 해요. ‘안 됩니다. 세 동이나 다섯 동이나 마찬가집니다’ 했지요. ‘그럼 두 동만 짓지. 외국인이 오면 잘 데가 없다지 않나. 두 동! 차 부시장, 그건 돼지?’ 하니 어쩝니까. 할 수 없이 물러나왔지. 그거 폭파하는 날 어찌나 좋던지…와인을 마시며 축배를 들었어요.”

    8단계 도급 준 와우아파트

    그때 서울이 안고 있는 굵직굵직한 난제 중에 판자촌 문제가 있었다. 차 박사의 뛰어난 영어실력은 한미 공조에 늘 유리하게 작용했다. 그가 아시아재단 스타인버그 지사장을 찾아가서 벌인 담판이 효력이 있었다. 빈민촌 개발 전문가를 파견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오스카 내글러라는 친구가 부시장 옆방으로 출근했다. 판자촌 자리에 5층 정도의 서민 아파트를 지어 주민을 입주시키면 그들을 터전에서 내쫓지 않아도 되고 주거환경도 좋아지고 녹지공간도 생기면서 서울의 흉물을 없앨 수 있다는 연구결과를 내놨다.

    그때부터 서민 아파트라는 것을 짓기 시작한다. 서대문 금화공원 근처에 지은 금화아파트가 시작이었다. 준공식에 참석한 대통령도 깔끔해진 동네 풍경을 보고 신기해했다.

    “이 성과에 고무되어 김 시장이 서민 아파트 건설 권한을 구청장 전결사항으로 줘버린 것이 문제였어요. 당시 구청장들은 중령, 대령 출신이 대부분이었지요. 구마다 판자촌을 없애고 그 자리에 서민 아파트를 지으라며 경쟁을 부추겼고….”

    건설업계의 잘못된 관행이 더 큰 문제였다. 도급업자가 또 도급을 줘서 중간에 돈을 떼어먹으니 실제 건설을 맡은 회사는 터무니없이 낮은 가격으로 공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와우아파트는 나중에 알고 보니 여덟 단계인가 도급을 줬더라고요. 철근 20개 쓸 것을 5개밖에 못쓰는 식으로 부실공사를 했으니 안 무너질 도리가 없지…. 마포구에서 그런 일만 벌어지지 않았어도 강남개발을 제대로 했을 텐데. 강남을 보면 지금도 정말 속상해요.”

    김현옥 시장이 와우아파트 붕괴사고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나자 그도 시청을 떠났다. 연세대는 그의 사표를 수리하지 않고 휴직상태로 뒀으므로 학교로 돌아가는 데 무리가 없었다.

    “학교가 선심을 베푼 건 내게 기대하는 게 있었기 때문이에요. 연세대는 설립자 언더우드가 넓은 땅을 미리 잡아놓은 학교지만, 부지 안에 공원녹지로 개발이 제한된 땅이 있었어요. 개발제한을 풀 타당성이 인정돼 풀어줬지요. 시 당국이 타성에 빠져 무조건 묶어놓는 경우가 많았어요. 수십년간 조사 한 번 없이. 내가 대학 발전에 관심 많다는 소리를 듣고 많은 학교에서 찾아왔어요. 한양대가 주변에서 파고드는 무허가 집들로 골치 아프다고 찾아와서 풀어줬고, 서강대도 그랬어요. 서강대 데일리 총장에게 ‘행정에는 절차가 있다’고 했더니 약간 비꼬듯이 ‘군사통치를 하는 나라에 무슨 절차가 있습니까?’ 해요. ‘우리 공무원들은 미국에서 합리적인 민주교육을 받고 왔다. 일은 원칙대로 한다’고 대답했지요. 그때 과감하게 풀어주지 않았더라면 오늘의 캠퍼스는 없었을 겁니다.

    아, 참. 서울대 관악캠퍼스 이전 계획도 우리가 세웠어요. 연세대는 저렇게 캠퍼스가 큰데 우리나라 최고의 국립대학이 비좁아서야 되겠나 싶더라고요. 타당성을 검토하려고 문수 토목계장과 함께 관악 골프장에 일부러 골프를 하러 갔죠. 자연경관이 좋고 경지가 잘 되어 있고 경사가 완만하고 광활해 이상적인 땅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여의도에 순복음교회 자리를 잡아준 것도 차 박사였다. 오늘의 순복음교회와 조용기 목사를 만드는 데 그의 홍보계획과 실무가 큰 몫을 담당했다. 12·12 이후 미국에 피신해 있을 때 조용기 목사의 설교 프로그램을 만드는 방송국을 만들어 운영한 적도 있다.

    “클린턴 대통령 취임식장에서 조 목사가 영어로 설교하는 것을 처음 들었어요. 한 세기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하는 스타 목회자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냥 한국에만 묻어두기에는 너무 아까웠어요. 조 목사 설교를 다큐멘터리로 만들어 전세계 방송사에 배포해 남미, 인도, 동남아 등지에서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조선호텔의 민간 외교관

    연세대로 막 복귀했을 때 청와대에서 차일석 교수 부부를 초청한다는 전갈이 왔다. 대통령은 “그동안 건설사업하느라 애 많이 썼다”며 금일봉을 줬다. 그 돈을 차 박사는 지금까지 쓰지 않고 보관하고 있단다. 궁금했다. 박 대통령의 금일봉 액수는 얼마였을까? 그는 비밀이라며 액수를 밝히지 않는다.

    “그 자리에서 내가 관광의 필요성을 역설했어요. 신라 경주가 관광개발의 최적지라는 점과 일본인을 불러모으려면 첫째, 현대적 숙박시설이 필요하고, 둘째, 놀 거리가 있어야 하고, 셋째, 외화를 벌기 위한 손쉬운 방법으로 기생관광 개발을 제안했어요. 관광산업은 굴뚝 없는 산업이라 원가가 들지 않기 때문에 외화 가득률이 거의 100%라는 말까지….”

    며칠 뒤 김정렴 비서실장으로부터 다시 연락이 왔다. 당장 경주관광개발 실무단이 구성됐다. 청와대에서 한 몇 마디 발언으로 차 박사는 그 개발단의 핵심멤버가 된다. 서울과 경주를 여러 차례 오가면서 만든 것이 바로 보문단지다. 한국 첫 관광산업단지였고 그 가능성에 눈을 떠 제주에 중문단지도 만들게 된다.

    그때 을지로에는 조선호텔이 있었다. 조선호텔은 한국 정부(교통부)와 미국 아메리칸 에어라인이 50대 50의 지분으로 합작투자한 회사였다. 관광산업 개발에 참여한 공로인지 그에게 조선호텔 사장을 맡으라는 발령이 났다. 다시 대학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2년 임기 회장을 다섯 번이나 연임하며 그는 10년간 조선호텔에서 일한다. 여기서 그는 서양요리와 와인 전문가가 된다. 요리의 명소로 이름난 조선호텔 셉스 테이블(chefs table)에 초대받는 것을 마다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미국 명사들과 친교를 맺는 데 이만큼 좋은 장소는 없었다.

    “직함은 조선호텔 사장이었지만 그보다 그곳에서 한미 우호 증진에 큰 몫을 했다고 자부해요. 미국 대사를 비롯해 각국 대사들, 미 8군 사령관은 내가 부르면 언제든 주방장 테이블로 찾아왔지요. 하비브 대사와도 친했고 스나이더 대사와는 호형호제하는 사이였고 스틸웰 사령관과도 명동거리를 나란히 걷곤 했지요.”

    나라가 급격히 발전할 때는 개인의 삶의 영역도 급격히 확장된다. 더구나 그때 책임 있는 위치에 있던 사람이 역사에 끼치는 영향은 지대하다. 짧은 지면에 거칠게 살펴봐도 차일석 박사라는 거물, 일찍 미국에서 신학문을 공부해온 그가 서울시에 남겨놓은 흔적은 여태껏 우리 삶에 암암리에 작용하고 있다.

    그는 아직 건장하다. 하루 40분 반드시 수영을 하고 유머를 즐기고 한강을 내다보며 와인을 마신다. 서울신문 사장(그가 재임할 때 제호를 ‘대한매일’로 바꿨다)이었을 때는 평양에서 김정일과 와인을 나눈 적도 있다.

    ‘서울의 얼개’ 디자인한 최초의 도시설계사 차일석박사
    金瑞鈴
    ● 1956년 경북 안동 출생
    ● 경북대 국문과 졸업
    ● 중앙중 교사, ‘매일경제’신문·‘샘이깊은물’ 객원기자
    ● 월간 ‘동서문학’ 신인상


    “만찬에 나온 포도주가 그랑프리 샤토 나투르였어요. 한 병에 1000달러짜리 고급품이더군요. 김 위원장이 와인의 역사를 쫙 늘어놓는데 보니 지식과 총기가 예사가 아니던데요. 자정이 넘어서까지 남한 방송드라마 ‘허준’을 본다던가…. MBC 사장에게 ‘광고 좀 줄이시라우요’ 하고 농담도 하고 말이죠.”

    참 멋진 인생도 다 있구나. 그런 그에게도 남모르는 회한이나 아쉬움이 있을까. 그 대답이야말로 그가 얼마나 행운을 거머쥔 사람인지를 증명하는 말이 된다.

    “우리 부부가 아들만 둘이거든요. 아쉬움이라면 내가 좋아하는 오페라 ‘라보엠’ 이중창을 같이 부를 수 있는 딸이 하나 있었으면 싶은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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