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8월호

금융전문가가 본 ‘200승 투수’ 송진우의 생존 미학

버리고 또 버려라, 그러면 지혜를 얻을지니…

  • 이상건 미래에셋투자교육연구소 수석연구원 lsggg@miraeasset.com

    입력2006-08-10 19: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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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융전문가가 본 ‘200승 투수’ 송진우의 생존 미학
    “나이가 들면 체력과 순발력이 떨어지지만 지혜는 남는 법입니다. 때문에 나이를 먹으면 권한을 포기하고, 자기가 잘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자꾸 권한을 가지려고 하면 사람이 추해지고 결국 후배들에게 쫓겨나죠.”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한 기업체 사장으로부터 들은 얘기다. 그렇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젊음의 무기인 체력, 순발력과 이별함을 말한다. 그래서 지혜로 살아야 한다. 한국 프로야구에서 지혜의 힘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는 선수가 바로 한화이글스 송진우 투수다.

    ‘가장 닮고 싶은 선배’

    올해 그는 만 41세다. ‘우리 나이’로는 마흔둘이다. 송진우는 현역 최고령 선수다. 한화 선수들은 그를 ‘송진우 옹(翁)’이라 부른다. 송진우가 게임에 출전할 때마다 한국 프로야구의 ‘나이’와 관련된 모든 기록은 다시 씌어진다.

    송진우는 이미 최고령 완봉승(39세 6개월22일), 최고령 완투승(38세 7개월) 기록을 갖고 있다. 박철순이 세운 최고령 승리 기록(40세 5개월22일), 김정수의 투수 최고령 출장 기록(41세 2개월8일)도 이변이 없는 한 조만간 그의 손에 의해 깨질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는 프로야구 최초로 지난 2002년 통산 150승 고지를 돌파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프로야구 데뷔 후 14시즌 439경기 만에 한국 프로야구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이제는 200승 고지다.



    송진우는 후배들에게 하나의 이정표다. 프로선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기록이 아니다. ‘연습생 신화’를 일궈낸 한화의 장종훈이 말하지 않았던가. 부상당하지 않고 매 게임에 나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출장하지 않으면 기록도 없다. 그래서 후배들은 송진우를 닮고 싶어 한다.

    지난해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한 삼성라이온즈의 특급 마무리 투수 오승환은 인터뷰에서 ‘올 시즌 신인으로 이루고 싶은 것을 다 이뤘다. 남은 꿈이 있다면?’이라는 질문을 받자 이렇게 답했다.

    “송진우 선배님처럼 자기관리를 철저히 해 10년 넘게 아프지 않고 던지고 싶다. 아프면 성적도, 우승도 아무 의미 없다. 아파본 사람은 다 안다.”

    올해 한화에 입단해 연일 ‘삼진 쇼’를 벌인 고졸 루키(신참) 류현진이 가장 닮고 싶은 사람도 송진우다. 새내기인 그는 “송진우 선배님의 자기관리 능력에 감탄했다”며 “팀내 최고참으로 솔선수범하는 모습에도 감동했다”고 말했다. ‘국보급 투수’라는 선동열보다 송진우를 닮고 싶다는 후배가 많다.

    송진우는 비단 야구 후배들뿐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 지혜로운 삶의 아이디어를 제공한다. 송진우는 세대론적 관점에서 보면 베이비붐 세대다. 6·25전쟁 이후 1953년부터 1965년 사이에 태어난 사람들을 흔히 베이비붐 세대라고 한다. 이들은 전체 인구 중 17%를 차지해 그 영향력이 어떤 세대와 비교해도 크다.

    최근 진보세력과 보수세력이 갈등하는 배경도 이들 세대가 제공하는 측면이 있다. 김광수경제연구소의 김광수 소장은 “1990년대 이후 진보적 성향의 베이비붐 및 이후 세대들이 기성 보수세력인 베이비붐 이전 세대를 인구수 면에서 추월하면서 정치·경제의 주도세력으로 등장했다. 이 과정에서 두 세대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금융전문가가 본 ‘200승 투수’ 송진우의 생존 미학

    송진우는 프로야구 선수 중 가장 일찍 연봉 계약을 체결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돈보다 일을 좋아한다.

    중장년층에 접어든 이들은 왕성한 구매력으로 소비시장을 좌지우지한다. 최근 들어 소형차 판매량이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중대형차 판매량이 증가하는 것이나 중대형 아파트 선호도가 부쩍 높아진 것은 중장년층으로 성장한 베이비붐 세대의 취향 때문이다.

    ‘이상한 2관왕’

    하지만 이들은 숫자가 많기 때문에 치열한 경쟁의 삶을 살아야 하는 운명이다. 한국 경제는 외환위기 이후, 과거의 고성장 국면에서 저성장 체제로 전환했다. 저성장 체제에서는 일자리가 성큼성큼 늘어나지 않는다. 자리는 늘지 않는데 경쟁은 치열하다. 그래서 이들의 행복지수는 그리 높지 않다. 행복 이전에 생존을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스포츠 세계는 경제용어로 표현하면 저성장 구조다. 1군에서 생존하지 못한 선수는 2군으로 밀려나야 한다. 1군의 엔트리 숫자가 정해져 있으니 엔트리에 포함되지 않으면 출장 기회가 없다. 도태되는 수밖에 없다. 송진우는 어떻게 해서 이런 저성장 논리를 가진 야구 세계에서 장수할 수 있었을까.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자기관리다. 성공의 요체가 자기관리라는 사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불문율이다. 같은 월드컵 영웅이라도 베켄바워나 펠레는 세계 축구계의 거물이 됐지만 마라도나는 약물중독과 난잡한 사생활로 주저앉았다. 베켄바워와 펠레가 귀빈석에서 월드컵 경기를 관전할 때 마라도나는 일반석에서 경기를 봤다. 물론 마라도나의 이런 모습도 소박하고 아름답다. 하지만 그는 길고 긴 고통의 시간을 감내해야 했다.

    송진우는 자신의 몸이 재산이라는 것을 잘 안다. 그래서 담배는 입에 대본 적도 없고 술도 가볍게 마신다. 얄미울 정도로 몸에 나쁜 것을 멀리한다. 그리고 단 하루도 연습하지 않는 날이 없다. 훈련이 없을 때는 혼자 그라운드에 나가 연습한다. 그에게 연습은 삶의 일부분이다. 이런 자기관리는 자칫하면 주위 사람들을 떠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송진우는 다르다. 자기 것만 챙기는 사람에겐 아첨꾼만 남고 친구는 없는 법이다. 그는 팀을 위해 자신을 내놓는다. 자기 것을 버릴 줄 아는 것이다.

    1992년 송진우는 다승왕과 구원왕을 함께 수상했다. 야구를 좀 아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다승왕과 구원왕을 동시에 차지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질 것이다. 현대 야구는 철저히 분업구조다. ‘선발-중간계투(繼投)-마무리’로 이어지는 투수 로테이션을 따른다. 사실 다승왕과 구원왕 동시 석권은, 말이 좋아서 동시 석권이지 현대 야구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어떻게 송진우는 그 둘을 동시에 차지했을까.

    “정말 골치 아팠어요”

    당시 빙그레(현 한화)를 이끌던 김영덕 감독은 페넌트레이스 1위를 차지하기 위해 데뷔 3년차 에이스이던 송진우를 선발, 중간계투, 마무리를 따지지 않고 경기에 투입했다. 시즌이 끝났을 때 그가 출전한 게임은 팀 전체경기의 38%인 48게임이나 됐다. 팀의 우승을 위해 물불 안 가리고 등판했던 것이다. 당시 주변에선 잦은 등판이 짧은 선수생활로 이어질 수 있다며 우려했지만, 그는 팀 승리를 위해 철저히 감독의 명령에 따랐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송진우는 언론의 도마 위에 오른다. 기록을 위해 승리를 조작했다는 비판에 휩싸인 것이다.

    1992년 시즌 막판 송진우는 대학 1년 후배인 해태타이거즈(현 기아타이거즈)의 이강철과 다승 선두 자리를 놓고 경합을 벌였다. 1승 차이로 단독 1위를 하거나 공동 1위를 하게 되어 있었다. 시즌 마지막 경기. 시즌 내내 선두 자리를 내놓지 않았던 빙그레는 경기 상황과 상관없이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김영덕 감독은 초반 대량 득점을 하자 4회까지 무실점으로 잘 던지던 한희민을 빼고 송진우를 투입했다. 다승 1위 타이틀을 주기 위한 김 감독의 ‘배려’였다. 김 감독은 “1년 내내 고생한 팀의 에이스에게 뭔가를 해주고 싶었다”며 경기 후에 송진우 등판 배경을 밝혔다.

    금융전문가가 본 ‘200승 투수’ 송진우의 생존 미학

    일본 한신 타이거스의 영웅 가네모토 선수. 팀의 맏형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송진우와 닮았다.

    그러나 언론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결국 이 일로 MVP 타이틀은 후배 장종훈의 몫이 됐다. 송진우의 항변은 이러했다.

    “많은 사람이 저를 타이틀에 눈먼 선수로 봤습니다. 저는 타이틀을 탐내는 성격이 아닙니다. 전 감독님의 말씀을 충실히 따랐을 뿐입니다.”

    송진우가 세운 다승왕과 구원왕 타이틀은 이전에도, 지금도 없다. 감독의 배려와 팀의 승리를 위해 노력한 송진우가 만들어낸 ‘이상한 2관왕’이었던 셈이다.

    후배들은 그를 한없이 신뢰한다. 송진우가 1999년 프로야구 선수협의회의 초대 회장을 맡을 때 일이다. 그는 회장을 맡을 상황이 아니었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FA(자유계약선수)다. 1999년 자유계약선수가 된 그는 한화와 3년 동안 7억원을 받기로 계약했다. ‘대박’이었다. 개인적으로 보면 충분한 대우를 받은 그가 다른 선수들의 권익을 위해 초대 회장을 맡을 이유가 없었다. 그렇지만 후배들의 간곡한 청을 마다하지 못하고 송진우는 회장 자리를 맡았다. 선수 생활 최대의 위기였다.

    후배들이 송진우를 회장으로 추대한 배경에는 그가 고참이라는 것, 그리고 실력 있는 선수여서 구단도 함부로 하지 못할 것이라는 계산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계산보다 대의를 따랐다. 게다가 구단주측 간사는 당시 한화야구단의 이남헌 사장이었다. 1999년 단장과 에이스로 서로 손을 맞잡고 한국시리즈 우승을 일궜던 두 주역이 양극에 섰던 것이다. 당시 한화 야구단에서 근무한 직원의 얘기.

    “정말 골치 아팠어요. 시범 케이스로 회장을 맡고 있는 송진우를 날려야 했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송진우 같은 선수를 한화에서 버릴 수 있겠어요. 1989년 데뷔 이후 다른 팀에 눈길 한번 주지 않았고, 후배들도 잘 따르는데요. 송진우 하면 한화의 에이스 아닙니까.”

    ‘맏형 문화’의 두 얼굴

    송진우는 선수협의회가 출범하던 당시의 심경을 언론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처음 선수협이 발족할 때 대한생명 빌딩에 각 팀 선수 대표들이 모였다. 한밤중이었다. 회의실 문 앞에 취재진이 몰려왔는데, 문을 걸어 잠그고 마지막으로 이야기했다. 비장했다. ‘강행할 것인가, 여기서 그만둘 것인가.’ 그때 함께 울었다.”

    이 일 이후 송진우는 ‘송골매’라는 별명에 더해 ‘회장님’이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다른 팀 감독들도 송진우에게 농담 반으로 ‘회장님’이라 부른다.

    팀내 최고참으로서 송진우는 ‘맏형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다. 맏형은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 때로는 직접 동생들을 챙겨야 하고, 부모 노릇도 해야 한다. 야구 월드컵인 WBC(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한국이 기대 이상의 성과를 보였던 것은 이런 ‘형-동생 문화’의 힘이 컸다고 한다. 일본은 고등학교 팀이 워낙 많은 데다, 프로선수들의 출신 배경도 고교, 대학, 사회인 야구 등으로 다양하다. 미국도 철저히 마이너리그를 밟아서 실력으로 올라온 선수들이 메이저리그에서 뛴다. 이런 분위기에선 형-동생 문화가 생겨날 수 없다.

    한국은 그렇지 않다. 야구팀이 있는 고등학교나 대학의 숫자가 많지 않아 한 다리만 건너면 다 선후배다. 형-동생 문화의 강점은 짧은 기간에도 팀워크의 혼란 없이 힘을 응집할 수 있다는 데 있다.

    맏형의 리더십이 드러난 대표적인 사건이 7월2일 한화-현대전에서 빚어졌다. 한화 투수 안영명이 타석에 선 현대의 김동수에게 몸쪽 볼을 두 개 던지자 김동수는 빈볼을 던졌다며 달려나와 안영명의 따귀를 때렸다. 새까만 후배인 안영명은 가만히 서서 맞았다. 이때 갑자기 송진우가 뛰어나와 김동수에게 2단 옆차기를 날렸다. 언론에서는 백전노장 김동수와 송진우를 놓고 둘 다 스타답지 못하다고 비판했다.

    두 선수의 행동은 분명 잘못됐다. 하지만 같이 운동하는 후배가 별로 잘못한 게 없는데도 상대 선수로부터 구타를 당한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화가 치밀 것이다. 송진우는 “그런 상황이 될 줄은 몰랐다. 솔직히 동수가 영명이를 때리는 순간 욱하는 성격이 나와 그렇게 됐다. 하지만 내 행동에 대해서 큰 후회는 없다”고 했다. 전형적인 맏형의 태도다. 물론 송진우는 경기 후 평소 친하게 지내던 김동수에게 전화를 걸어 사과했다. 한국적 맏형 문화는 지나치면 조직에 독(毒)이 되지만, 송진우처럼 평소 모범을 보이면 조직에 매우 긍정적으로 작용한다.

    이런 예는 한국 야구뿐 아니라 일본 야구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숙적 한신 타이거스의 4번타자 가네모토 도모아키(金本志憲)가 그 주인공이다. 재일교포인 가네모토의 본명은 김지헌이다. ‘김본(金本)’은 김씨 성을 일본어로 표기하기 위해 재일교포들이 주로 활용하는 방법이다.

    ‘O형 남자들’

    가네모토의 별명은 ‘아니키(兄貴)’, 즉 ‘형님’이다. 가네모토는 외모부터가 한국적이다. 다부진 몸매와 옆으로 찢어진 눈매가 그렇다. 그는 다른 재일교포 선수들과 달리 자신이 재일교포 3세라고 밝힌 채 선수생활을 했다. 일본 여성과 결혼하면서 일본 국적을 얻은 그는 재일교포가 많이 거주하는 오사카를 연고지로 하는 한신 타이거스 팬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다.

    가네모토가 2003년 히로시마 카프스에서 이적해 온 후 치른 세 번의 시즌에서 한신 타이거스는 두 번이나 정규 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매년 하위권을 맴돌던 팀이 최강으로 변신한 것이다.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하나가 가네모토의 영입이다.

    일본 야구계에서 가네모토는 매우 독특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전형적인 한국식으로 선수들을 대한다. 후배들에게 짓궂은 장난을 거는가 하면, 슬럼프에 빠진 후배들을 다독이기도 한다. 가네모토 특유의 친화력과 대인관계가 한신 타이거스를 강팀으로 바꿔놓는 데 큰 몫을 했던 것이다. 그래서 팬들도 그를 ‘아니키 가네모토’라고 부른다. 애정이 듬뿍 담긴 호칭이다. 혈액형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가네모토를 ‘전형적인 O형의 남자’라고 부른다. 강한 책임감, 포용력, 친화력의 소유자라는 것이다.

    가네모토와 송진우는 닮은 점이 많다. 먼저 둘 다 백전노장이다. 1968년생인 가네모토는 우리 나이로 39세다. 철저한 자기관리로 후배들의 모범이 되고 있다는 점도 같다. 가네모토는 904경기 무교체 연속출장이라는 놀라운 세계 신기록을 세웠다. 1999년 7월21일부터 무려 7년간 경기 시작부터 끝까지 그라운드를 지킨 것이다. 지금도 계속 출장하고 있으니 그가 게임에 등판하는 것 자체가 세계 야구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교체 연속출장은 대단한 기록이다. 철저한 자기관리와 실력이 없으면 꿈꾸기 어렵다. 가네모토는 게임이 있으나 없으나 쉬지 않고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몸을 단련한다. 심지어 오프 시즌에도 몸 만들기에 여념이 없다. 이런 그를 보면서 한신 타이거스 선수들은 오프 시즌은 쉬는 시간이라는 생각을 버리게 됐다고 한다. 가네모토의 웨이트 트레이닝을 지도했던 트레이너는 그를 표지로 해서 웨이트 트레이닝 책을 내기도 했다.

    가네모토와 송진우는 또 둘 다 혈액형이 O형이다. 철저히 팀플레이를 하는 점도 같다. 가네모토는 1002타석 무병살 기록 보유자다. 병살타가 대부분 게임의 흐름을 바꿔놓는 점을 감안하면 가네모토는 자신의 성적보다 팀 성적을 우선하는 스타일임을 엿볼 수 있다.

    두 사람은 자존심도 대단하다. 송진우는 지난 2000년 시즌에 자신을 혹독하게 몰아붙이며 공을 던졌다. 1999년 선수협 파동으로 성적이 떨어졌다는 얘기를 듣기 싫어서였다. 마침내 그는 자신의 말처럼 2000년 시즌에 13승을 올렸다. 가네모토는 FA가 된 후 일본 야구팬의 50%가 응원한다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스카우트 제안을 받았지만, 결국 연봉도 적은 한신 타이거스를 택했다. 비슷한 실력인데도 요미우리에서 뛴다는 이유로 대접받는 풍토가 싫었기 때문이었다.

    철저한 자기관리와 맏형 리더십, 그리고 독한 자존심을 가졌다 하더라도 세월의 무게를 감당하기는 어렵다. 나이가 들면서 육체적 능력이 약화되는 것은 인간이라면 피할 수 없다. 하물며 몸이 무기인 운동선수는 오죽할까. 송진우에게는 1997년, 98년 시즌이 그랬다. 두 해 연거푸 10승을 채우지 못했다. 사람들은 “젊은 시절 물불 안 가리고 등판한 결과”라고 수군거렸다. 확실히 30세를 넘기자 몸은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강속구와 빼어난 제구력으로 타자들을 윽박지르던 투구 방식이 더는 먹혀들지 않았다.

    그는 떨어지는 체력과 순발력에 집착하지 않고 지혜를 선택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경험이 쌓인다는 것이고, 경험이 쌓인다는 것은 지혜가 는다는 것이다. 송진우의 대학시절 은사이기도 한 한화 김인식 감독은 송진우와 함께 한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경험이란 게 중요하지. 많이 이겨도 보고 져보기도 해야 되는 것 같아. 그러면 어려운 상황에서 내리는 판단이 훨씬 빨라지는 것 같아. 너(송진우)는 투수라 해당 사항이 별로 없지만, 야수들에게는 상황 판단이 가장 중요해. 수비할 때 공을 던져야 할지 말아야 할지 등을 주어진 상황에 맞춰 잘 해내야 하거든. 이런 게 다 경험에서 나오는 거야.”

    송진우는 빠른 공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제구력에 집중했다. 시속 130km 안팎의 느린 공을 던졌다. B급 투수의 속도였지만 타자들은 그의 공을 제대로 공략하지 못했다. 빼어난 제구력을 바탕으로 힘을 뺀 다양한 변화구를 구사했기 때문이다. 그해 한화는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송진우의 부활이 한화의 한국시리즈 제패로 귀결됐던 것이다.

    송진우의 스타일 변화는 많은 후배에게 귀감이 됐다. 강속구 투수였지만 지금은 느린 공과 경험으로 타자들을 요리하는 한화의 에이스 정민철이 대표적이다. 시속 150km대에 육박하는 강속구를 던지던 정민철도 나이가 들면서부터는 강속구로 타자들을 압도할 수 없었다. 다행히 그의 옆에는 송진우라는 지혜로운 선배가 있었다. 결국 정민철도 강속구를 버리고 나서야 재기에 성공했다. 송진우는 버려야 얻는다는 상식을 야구를 통해 보여줬다.

    이 세상의 얼마나 많은 노장(老將)이 늘그막에 추해지는가. 권한을 놓지 않으려 하고 자신이 쌓아놓은 것 아래로 절대 내려오지 않으려 한다. 정치인이 그렇고, 기업인도 그렇다. 만일 그들이 송진우처럼 버림의 미학을 실천했다면 어떠했을까. 최소한 지금의 위치보다는 나아지지 않았을까.

    인디라 간디의 조언

    송진우의 장수비결 중 하나는 돈보다는 일, 즉 야구를 선택했다는 점이다. 국내 프로야구 1호 자유계약선수인 송진우는 2000년, 2003년, 2005년 세 번의 계약을 체결했다. 물론 팀은 변함없이 한화 이글스였다. 2005년에는 구단측과 계약 기간을 둘러싸고 자그마한 갈등이 있었지만 송진우는 결국 운동을 더 잘하기 위해 양보했다.

    “처음에 3년 계약을 주장한 것은 최소 3년은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구단에서 내 나이에 대한 부담이 있었던 것 같다. 계약 문제로 시간을 끌면 훈련 시간이 부족해진다. 그렇게 되면 다음 해에 실력이 부진할 수 있기 때문에 구단측에 많은 부분을 맡겼다.”

    2002년엔 자유계약선수 중 가장 빨리 계약을 맺었다. 다른 구단에서 한화보다 더 많은 돈을 주겠다고 했음에도 그는 고향팀에 눌러앉았다.

    “줄다리기를 해서 다른 팀으로 옮긴다고 해서 얼마나 더 받겠어요. 빨리 계약 끝내고 운동하는 게 낫죠.”

    송진우의 이런 태도는 성공하는 사람들에게 엿볼 수 있는 공통점이다. 인도의 전 총리였던 인디라 간디 여사는 “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 일하는 사람과 공(功)이 돌아가는 사람이다. 그중에서 일하는 사람이 되도록 하라. 그곳은 경쟁이 그리 심하지 않다”고 했다. 송진우는 이 말에 딱 들어맞는 사람이다.

    역사상 위대한 경제학자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존 메이나드 케인스 경(卿)은 “인간은 장기적으로 죽는다”라는 말을 남겼다. 송진우도 언젠가는 야구 선수로서 삶이 끝날 것이다. 영원히 공을 던질 수는 없다.

    그러나 그는 던지지 못하는 바로 그 순간까지 자신을 담금질할 것이다. 이 시대는 송진우와 같은 사고방식과 삶의 태도를 필요로 한다. 인구가 고령화하면서 노후 문제는 심각해질 것이다. 노후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강력하고 효과적인 방법은 오래 일하는 것이다. 아니, 죽기 전까지 일하는 것이다.

    과거에는 젊어서 은퇴하는 게 꿈이라는 사람이 많았지만, 요즘은 오래 일하는 게 꿈이라는 사람이 부쩍 늘었다. 그만큼 오래 사는 위험에 대한 이해가 높아진 결과다.

    오래 일하길 원하는 사람이라면 송진우로부터 배울 수 있다. 자기관리, 꾸준한 연습(자기계발), 주위 사람들과의 친화력 등이 그것이다.

    조직에 대한 그의 생각도 한 번쯤 짚어볼 필요가 있다. 송진우는 조직이 먼저고 자신의 기록은 다음이다. 후배를 챙기고 윗사람에게 깍듯하다. 그는 은사로 모셨고 지금도 모시고 있는 김영덕 감독과 김인식 감독을 가끔씩 찾아간다. 또한 중간자로서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다. 조직은 최고경영자 못지않게 중간계층이 튼실해야 발전한다. 구단과 감독, 그리고 선수들 사이에 존재하는 중간자의 역할을 자각한 송진우처럼 조직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늘 다른 조직원들과 교감의 사다리를 놓아야 한다.

    금융전문가가 본 ‘200승 투수’ 송진우의 생존 미학
    이상건

    1967년 충남 출생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한국경제TV, ‘이코노미스트’ 금융·재테크 담당기자

    現 미래에셋투자교육연구소 선임연구원

    저서 : ‘부자들의 개인 도서관’ ‘돈 버는 사람은 분명 따로 있다’ ‘부자 만드는 경제기사’


    변화에 적응하는 자

    송진우는 선동열 같은 국보급 투수도, 위대한 투수도 아니다. 뛰어난 투수의 상징인 ‘20승’ 기록은 한 번도 올리지 못했다. 지금은 보통 투수들처럼 시속 130km의 공을 던진다. 하지만 그는 꾸준하다. 기복이 없다. 기복이 생겨도 상황을 바꾸지 않는다. 자신을 바꿔 상황을 이겨 나간다. 그는 현실을 바탕으로 한 변화의 사고(思考)를 한다.

    진화론의 창시자 찰스 다윈이 말하지 않았던가. “살아남는 자는 강한 자가 아니라 변화에 적응하는 자”라고. 송진우는 강하지 않다. 그러나 송진우는 앞으로도 살아남을 것이다. 적응하기 위해 끊임없이 변화할 것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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