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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선생님

밥상머리 교육으로 나를 일깨운 ‘정신적 아버지’

“눈앞의 일에 연연 말고 더 멀리 바라보게”

  • 김승진 한국외대 교수·경제학 seunjkim@hufs.ac.kr

밥상머리 교육으로 나를 일깨운 ‘정신적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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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8월 육군 중위로 임관해 육사 경제학과 교관이 되었을 때 나는 거처할 곳이 없어 열악한 육사 BOQ(미혼 장교 숙소)에서 생활해야 했다. 이를 측은히 여긴 선생님은 나를 선생님 자택에 기거하도록 해주셨다. 이것은 내게 큰 행운이었다. 선생님은 새벽 5시면 기상하셔서 집에서 가까운 동덕여대 뒷산을 오르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하셨다. 또한 식사시간 틈틈이 당신의 인생역정과 인생관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이 내가 인생관을 형성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특히 미국 유학생활 체험을 들려주시면서 내게 제대 후 바로 미국 유학을 떠날 것을 권유하셨다. 이외에도 경제학, 중국고전, 영문학에 관한 해박한 지식을 풀어놓으셔서 내가 선생님의 학문세계로 한 발짝씩 더 들어갈 수 있도록 배려하셨다.

제자의 건강까지 챙겨

나는 아내를 한국은행 조사1부에서 근무하면서 만났다. 사내 커플이었다. 결혼을 결심했을 때 누구보다도 선생님께 먼저 신붓감을 보여드리고 결혼허락을 받고 싶었다. 아버지가 안 계신 나로서는 선생님의 허락이 부모님의 허락과 다름없었다. 선생님과 사모님은 친히 음식을 준비해 우리를 초대하셨고, 어려워하는 아내에게 다정하게 대해주시면서 결혼하라고 말씀해주셨다. 그때 부모님으로부터 승낙을 받은 것 같아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날 이후로 30여 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 아내는 나와 똑같이 선생님을 존경하고 있다.

1973년 3월에 결혼했는데, 신혼생활도 선생님 댁 옆에 있는 조그만 단칸방에서 시작했다. 매일 새벽 등산도 선생님과 같이 했고, 선생님 댁에 자주 방문해 가르침도 계속 받았다. 선생님은 결혼 후 군인의 박봉으로 고생하는 제자를 위해 여러 프로젝트를 주선해주는 등 음으로 양으로 도와주셨다.

이때 내가 한 일 가운데 가장 보람 있는 것은 선생님의 ‘경제학원론’ 교과서 집필을 도운 것이었다. 이 책은 선생님께서 제대로 된 경제학 교과서를 만들어야겠다는 소명의식에서 1년여에 걸친 혼신의 노력 끝에 완성한 것으로, 이후 경제학을 전공하는 학생이라면 누구나 읽어야 하는 필독서가 됐다. 이때 나와 함께 선생님을 도운 제자들은 동기생인 박종안, 김중수, 강호진 군과 2년 후배인 이정우(전 청와대 정책실장) 군이다.



1975년에 내가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받고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학교로 유학을 가게 된 것도 선생님의 배려 덕분이었다. 선생님은 1979년 미국을 방문할 일이 생기자 바쁘신 와중에도 나의 박사학위논문 지도교수를 만나는 등 나의 공부를 독려해주셨다.

1981년 내가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KDI(한국개발연구원)에 근무할 때도 선생님은 제자의 건강을 위해 매일 새벽 함께 관악산 등반을 하자고 권유하셨다. 당시 선생님은 관악구 봉천동에 사셨고 나는 서초구 반포동에 있는 KDI 관사에 살았다. 우리는 지금의 서울대 호암회관 부근에서 새벽 5시에 만나 관악산 중턱에 있는 마당바위까지 오르는 일을 거의 매일 반복했다. 처음엔 젊은 내가 오히려 힘들어 몇 번씩이나 쉬어 가야 했는데, 선생님은 친절하게도 나를 위해 기꺼이 기다려주시곤 하셨다.

그러다 내 등산 실력도 점차 향상되어 나중에는 이 코스를 단숨에 오르내릴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선생님과 함께 한 등산 덕분에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다. 당시 산악회 회원들은 나를 선생님의 친아들로 알 정도로 닮았다고들 했는데, 모든 면에서 선생님과 닮고 싶었던 나는 그런 말을 듣는 게 큰 기쁨이었다.

꾸준한 등산에도 불구하고 1984년 한국외대 무역학과 부교수로 부임한 후 과로로 쓰러져 사경을 헤맨 적이 있다. 이때 내가 누워 있던 경희대 응급실로 제일 먼저 달려오신 분도 바로 선생님이셨다. 그날 굳어진 내 사지를 주물러주시면서 선생님께서 하신 첫 번째 말씀이 “김군! 목전의 일에 연연하지 말고 먼 훗날을 바라보게”라는 훈계였다. 이 천금(千金) 같은 꾸지람을 들은 후 나는 매사를 조급하게 처리하지 않고 가능한 한 넓고 멀리 바라보면서 신중하게 추진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내가 1990년부터 1993년까지 말레이시아 콸라룸푸르에 있는 정부간 국제기관인 아시아태평양 개발센터(Asian and Pacific Development Center)에서 코디네이터로 근무한 것과 1995년부터 1996년까지 남태평양에 있는 피지공화국의 총리 경제자문관으로 근무하게 된 것 역시 선생님의 추천 덕분이다. 선생님께서 1982년에 필리핀 마닐라에 있는 ADB(아시아개발은행)에서 컨설턴트로 일하신 적이 있는데, 국제기구에 근무하는 게 학문연구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경험하시고 내게 권유하신 것이다.

1995년 선생님께서 서울시 초대 민선(民選) 시장으로 출마하셨을 때 미력이나마 선생님을 도운 것은 내게 큰 영광이고 보람이었다. 1997년 대선(大選)에 선생님이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셨을 때 선생님은 내게 민주당 정책위의장이라는 중책을 맡기셨다. 나는 나름대로 성의를 다했으나 지금도 부족했음을 느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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