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월호

‘민주세력 통합’ 깃발 든 전 의원 추미애

“전국정당 염원 짓밟은 노 대통령이 통합 반대할 자격 있나”

  • 조성식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airso2@donga.com

    입력2007-01-15 14: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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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세력 통합’ 깃발 든 전 의원 추미애
    오후 2시의 메마른 겨울햇살이 널브러져 있다. 12월11일 한양대 연구실에서 만난 추미애(秋美愛·49) 전 의원은 밝은 베이지색 투피스 차림이었다. 안에 받쳐입은 자줏빛 블라우스와 잘 어울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신년호 분위기에 맞는 옷을 고르느라 신경 썼다며 웃었다. 복장만큼이나 환한 웃음이다. 며칠 전, 오랫동안 미뤄둔 충치 치료를 감행했다는데, 웃을 때 모나리자가 연상되는 것은 명백히 그 덕분이리라.

    추 전 의원은 2004년 4월 총선 참패 이후 ‘3보1배’의 쓰라린 잔영을 떨쳐버리기라도 하듯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미국에 가서는 2년간 컬럼비아대에서 한반도 안보를 주제로 공부했다. 2006년 8월 귀국한 그가 새로 둥지를 튼 곳은 모교인 한양대. 국제대학원 초빙교수로 위촉돼 가을학기 강의를 맡았다. 이어 10월엔 법무법인 아주의 대표변호사로 취임했다.

    범(汎)여권의 잠재적 대선후보군(群)에 들어가는 그는 귀국 후 민주화세력의 대통합을 촉구하는 이른바 ‘용광로론’으로 주목을 받았다. 비록 정치권 특유의 동상이몽과 아전인수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긴 하지만,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의 통합신당 추진세력이 그의 용광로론에 환영을 나타낸 것은 언뜻 보기에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어쩌면 그가 가진 영호남 통합의 상징성을 존중하는 차원의 반응이었는지도 모른다. 최근 부산대 강연에서 주장한 산업화세력 대안(代案) 불가론도 눈길을 끌었다. 이로써 그는 ‘정치인 추미애’로 되돌아왔다.

    인터뷰에서 정치 관련 질문을 뒤로 돌린 것은, 정치 얘기의 상투적이고도 소모적인 면을 감안한 것이기도 하거니와 미국에서 그가 공부한 내용, 즉 한반도 안보와 북핵 문제에 대한 연구의 깊이가 자못 궁금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북핵사태는 최근 우리 사회를 장악한 이슈 중 가장 뜨겁고 폭발적인 것이 아닌가.

    그는 딸 둘 아들 하나로 아이가 셋인데, 미국 유학을 떠날 때 데리고 갔다(장녀는 한 달 후 합류). 그 바람에 남편이 자연스럽게 ‘기러기 아빠’가 됐다. 미국에서는 유학생답게 공부에만 매달렸다고 한다.



    “뉴욕 컬럼비아대에 적(籍)을 두고 있었지만, 세계의 심장부라는 워싱턴을 자주 오가면서 그쪽 전문가들과 한미관계, 동북아 문제를 두고 우리의 국익을 관철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토론을 벌였어요. 토론의 대전제는 한반도 문제가 미국의 세계전략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죠. 미국의 세계전략 흐름과 변화 속에서 중국과 일본의 움직임을 들여다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어요.”

    美와 공통분모 찾고 이해 폭 넓혔어야

    그가 한양대에서 맡은 과목은 ‘동북아 국제정치의 이해’. 교양학부생을 대상으로 한 강의다. 그밖에 학교측의 요청이 있을 때마다 대학원생들에게 특별강의를 하곤 했다.

    그의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9월18일 있었던 그의 첫 강의 내용을 볼 수 있다. 강의 제목은 ‘미국의 세계전략과 한반도의 미래’. 누군가 자신의 글을 읽었다고 말해주면 기분 좋은 것은 기자나 교수나 다를 게 없나보다. 기자가 강의록 원문을 읽었다고 알은체를 하자 그가 “감사하다”며 무척 반가워했다.

    ▼ 강의 내용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리비아 이라크 이란 인도 북한 등 핵개발 국가에 대한 미국의 이중성과 일관성 없는 대응을 지적한 부분이었습니다. ‘미국은 핵 비확산이라는 목표보다 세계를 어떻게 통제하느냐의 전략에 따라 케이스별로 대응하고 있다’고 주장했는데, 북핵사태 전개양상을 보면 일리 있는 지적이 아닌가 싶습니다. 미국의 세계전략 혹은 동북아전략에 비춰 북핵사태를 규정한다면.

    “북한이 핵에 집착하는 건, 첫째는 대외적 협상력을 높이고, 둘째로 비대칭 군사수단을 확보하기 위해서입니다. 한 가지 더 보탠다면 핵기술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계속 실험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기술적인 논리가 있습니다만 여기선 무시해도 좋을 것 같아요. 북이 미사일 발사에 이어 핵실험까지 한 것은 결국 미국의 태도 변화를 기대한 것이거든요. 하지만 미국은 북한 의도대로 움직여주지 않았어요. 미국은 세계전략의 우선순위를 중동 문제에 두고 있거든요.

    미국이 북핵 문제를 잠재적인 도전자인 중국을 견제하는 하위전략의 수단으로만 간주한 것이 사태의 근본 원인입니다. 그간 미국의 태도를 보면 (북한이) 미사일 쏠 때 미국 안보에 위협을 주는 행위라고 비난하면서도 적극적으로 문제해결에 나서지 않았어요. 북한 핵실험 이후 미국 내에서 부시 행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해 ‘그동안 한 게 뭐냐’고 비판론이 일고 북미 양자회담에 나서라는 목소리가 높아진 것도 이 때문이죠. 아무런 전략도 없이 시간만 보내다 결국 북한의 핵실험 사태를 초래했다는 거죠. 하지만 여전히 핵시설 동결을 대화의 전제조건으로 내세우는 걸 보면 근본적인 방침이 달라진 것 같지는 않아요.”

    ▼ 북한 핵실험 이후 햇볕정책의 유용성 논란이 일고 정책 담당자들이나 지지자들이 곤경에 빠졌는데요. 햇볕정책을 재평가한다면.

    “미국에 있을 때 참 답답했던 것이, 미국의 논리를 무비판적으로 전하기에 급급한 행태였어요. 우리의 국익과 충돌하는지를 따져보지도 않고. 다른 한쪽에서는 미국의 급소를 보지 못한 채 우리의 의견을 전하는 데만 급급했고요. 햇볕정책은 우리만 잘한다고 성공할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미국과 공통분모를 찾고 이해 폭을 넓혔어야 합니다. 양쪽 다 일방통행이었어요. 북핵사태 초기엔 우리 국민이 햇볕정책을 폈음에도 핵개발을 막지 못한 데 대해 대단히 실망하고 정책 자체에 대한 회의를 표출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초기의 분노와 회의에서 벗어나 균형 잡힌 판단을 하고 있다고 봅니다. 햇볕정책은 평화공존정책이고 포용정책입니다. 그걸 안 한다면 봉쇄정책밖에 없잖아요.”

    ▼ 북핵실험 이후 그런 목소리가 높아졌죠. 봉쇄와 압박만이 해결책이라는.

    “미국이 한국의 참여를 요구하고 있는 PSI(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로 북핵 문제가 해결되면 좋겠지만 북한의 미사일 구상무역 등을 막을 국제법적 근거가 없다는 점에서 봉쇄엔 한계가 있어요. 또 해상충돌 등으로 남북한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고 자칫 전쟁까지 벌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화가 나는 일이긴 하지만 냉정하게 판단해야죠.”

    이라크 파병과 북핵 연계는 실책

    예상한 바지만, 그는 햇볕정책의 기조가 유지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의 햇볕정책에 어떤 차이가 있냐고 묻자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외교역량의 차이라고 봅니다. 첫째, 우리의 국익을 관철하는 해법을 제대로 제시하지 못했어요. 둘째, 북한의 변화를 이끌어냈어야 하는데 그 점에서도 미흡했습니다. 북한과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책의 일관성에 따른 상호 신뢰 확보인데, 정권 초기부터 대북송금 특검 등으로 불신을 자초했어요. 셋째, 대북지원을 일방적인 퍼주기라고 과장하는 보수세력의 공세에 원칙 없이 대응했다는 점입니다. 중심을 잡고 확고히 대응하는 게 중요한데 고비마다 흔들린 게 아쉽죠.”

    ▼ 노무현 정부가 이라크 파병이나 용산기지 이전,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문제 등을 북핵과 연계한 것이 큰 실책이었다는 지적이 있는데요.

    “2004년 문정인 동북아시대위원장이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이라크 파병은 부시 행정부가 선(先) 안전보장, 후(後) 핵폐기 방식인 우크라이나 모델을 약속해 이뤄진 것인데, 나중에 미국이 선 핵폐기 방식인 리비아 모델을 들고 나옴으로써 한국 정부를 속였다’는 취지로 말했어요. 문정인씨가 며칠 뒤 (인터뷰 내용을) 부인하긴 했지만, 정황으로 보건대 이라크 파병과 북핵 문제를 연계한 것은 사실인 듯싶습니다.

    제 생각엔 연계 시도 자체가 잘못된 게 아니라 미국의 급소를 잘못 본 게 문제예요. 미국은 1차 6자회담 때부터 CVID(완전한 핵 폐기)를 주장했거든요. 부시도 APEC 회담에서 노 대통령에게 같은 얘기를 했어요. 완전한 핵 폐기가 이뤄지려면 모호성이 없어야죠. 그런데 북한은, 구소련의 핵무기를 물려받아 그 실태가 공개된 우크라이나와는 사정이 달라요. 농축우라늄이 있네 없네 하면서 계속 모호성 전략을 구사하지 않았습니까.

    따라서 미국이 북한에 대해 우크라이나 방식을 적용하기는 어려운데, 우리가 섣불리 그걸 기대했다면 잘못 짚은 거죠. 용산기지 이전이나 전략적 유연성 문제를 북핵과 연계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개연성은 있다고 봐요. 외교전략의 하나로. 다만 엉뚱한 판단으로 연계하니 미국으로부터 (북핵 문제를) 평화적 외교적으로 해결하겠다는 원칙 차원의 추상적 답변을 받은 것말고는 아무런 성과가 없었던 거죠.”

    그렇다면 그가 생각하는 북핵 해법은 무엇일까.

    “미국에 있을 때 CSIS(국제전략문제연구소)와 헤리티지재단 토론회에서 제가 생각한 해법을 발표한 적이 있어요. 두 가지 원칙입니다. 첫째, 핵무기 폐기는 안전보장으로 풀어야 한다. 둘째, 핵 이용권 포기는 에너지 보상으로 풀어야 한다는 겁니다. 핵의 용도는 두 가지예요. 핵무기와 평화적 이용이죠. 핵의 평화적 이용은 NPT(핵확산금지조약)에서도 인정하는 주권국의 권리입니다. 즉 에너지 보상은 핵무기 포기가 아닌, 평화적 핵 이용권 포기에 대한 대가라는 거죠.

    ‘민주세력 통합’ 깃발 든 전 의원 추미애

    2002년 10월13일 광주에서 열린 국민참여운동본부 발대식에 참석한 노무현 후보와 추미애 공동본부장.

    그런데 부시 행정부가 북한을 불량국가로 규정하고 보상 자체를 부정하니 문제가 안 풀리는 거예요. 2005년 9월 6자회담에서 핵의 평화적 이용권을 인정하고 북한도 핵 폐기를 약속하는 등 북-미 간 만족할 만한 접점을 찾았습니다. 그러다 미국이 북한의 위조지폐 문제를 제기하고 북한이 회담 불참을 선언하면서 다시 틀어져버린 거죠. 북-미 양측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민주세력의 창의성, 다양성 활용해야

    그는 이목구비가 뚜렷한 편이다. 복스러운 인상에 비하면 눈매가 다소 매섭다는 느낌. ‘추다르크’라는 별명이 붙은 데는 눈매도 영향을 끼쳤을까. 문득 사자후와도 같던 그의 대중 연설 광경이 떠오른다. 2002년엔 목이 닳도록 노무현 후보 지지를 외쳤고, 2003년엔 분당(分黨) 반대를 부르짖었고, 2004년엔 탄핵 사과로 목이 메었다. 그 후 2년간 정치현장을 떠났다. 그리고 차기 대통령선거가 1년 앞으로 다가온 2006년 12월 현재 민주화세력 역할론을 제기하며 어떤 형태로든 대선에 적극 참여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치고 있다.

    그런데 새삼스레 민주화세력, 산업화세력이라니. 그다지 신선하지 않은 이분법 아닌가. 민주화세력은 되고 산업화세력은 안 된다는 발상도 도식적이고.

    ▼ 민주화세력과 산업화세력의 구분이 현 시점에서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민주화세력은 이른바 운동권만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우리 사회 전 분야에서 민주화에 헌신하거나 이를 심정적으로 지지한 세력, 평화적 정권교체와 정권 재창출을 지지한 세력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개념이에요. 반면 산업화세력은 스스로 주장하는 대로 5·16 이후 박정희 대통령 밑에서 개발독재형 경제성장을 이뤘고 지금도 그 정신을 이어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거나 이를 지지하는 세력입니다. 이러한 구분은 그 정체성을 선명하게 드러낸다는 점에서 좌파와 우파, 혹은 진보와 보수로 나누는 것보다 훨씬 더 의미가 있다고 봐요.

    많은 국민이 현 정부가 무능하다는 데 공감하면서 그것을 민주세력 전체의 무능으로 이해하고 있어요. 반면 한나라당은 현 난국을 극복할 정책대안을 제시하거나 우리가 진입하는 지식정보화시대에 걸맞은 비전을 제시하지 않고 있음에도 높은 지지를 받고 있어요. 박정희를 닮고 싶다는 대선후보들의 움직임은 과거의 경제개발 향수와 관련돼 있어요.

    이 점만 보더라도 민주화세력, 산업화세력의 구분이 이미 우리 국민의 잠재의식에 깃들어 있다는 걸 알 수 있죠. 그리고 그 구분은 우리 사회를 성찰하는 데 매우 유용한 도구라 할 수 있죠. 이런 구분으로 우리 사회의 진로와 방향성을 두고 함께 고민해보자, 앞으로 민주화세력은 어떻게 변해야 하고 산업화세력은 과거의 발상을 그대로 유지해도 되는 건지 성찰해보자는 뜻이지 새삼 편가르기를 하려는 건 아닙니다.”

    ▼ 산업화세력은 대안이 될 수 없다는 논리가 국민에게 먹힐까 의문입니다. 역사적 정통성을 주장하는 건가요.

    “아니오. 산업화세력은 성장 우선의 가치를 갖고 있어요. 산업화세력이 이룩한 경제발전의 긍정적 유산을 인정한다 해도 미래의 대안세력이 될 수 없다고 보는 것은 우리가 빠르게 지식정보화 시대로 접어들고 있기 때문이에요. 산업화시대엔 국가가 기업을 지도하고 물가와 노동, 임금을 통제했어요. 하지만 세계화, 지식정보화시대에는 국가의 역할보다 기업이나 개인의 역할이 더 중요하죠. 획일적 규제보다는 다양성과 창의성을 통한 개인의 경쟁력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동력입니다. 이런 점에서 산업화세력의 획일적이고 경직된 가치관으로는 미래의 비전을 만들기 어렵다고 보는 거죠.

    예를 들어 산업화세력의 대표적인 후예라 할 수 있는 야당의 한 유력 후보는 서울에서 부산까지 운하를 건설하는 방안을 현재의 난국을 극복하고 미래를 책임질 수 있는 장대한 비전으로 제시하고 있어요. 그 실효성을 따지자는 게 아니라-그건 앞으로 전문가들이 판단하겠죠-그게 말 그대로 오늘의 난국을 극복하고 미래를 열어가는 차원의 발상이냐고 묻고 싶은 거죠. 그것이 우연한 발상이 아니라 과거 산업화시대의 경험과 가치관에서 비롯된 필연적인 발상이라는 게 문제죠. 토목 중심, 공간 중심, 물류 중심의 산업화시대 발상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한 거예요. 이런 수준의 발상이 주목받는 게 안타깝다는 거죠. 이건 과거의 성장방안이지 미래의 성장대안은 아니거든요.”

    성장에 참여할 기회를 달라

    그는 “산업화세력이 부적절하다고 해서 민주화세력이 대안이라는 법이 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 이대로라면 절대 아니죠. 과거의 반독재 투쟁 경험만으로는 안 되죠. 하지만 자질이랄까, ‘끼’랄까. 억압과 규제에 반대하고 자유롭고 창의적인 발상을 존중하는 민주화세력의 가치관이 바로 미래세대의 요구를 실현하는 데 더 적합하다는 거죠. 민주화세력이 추구해온 정치민주화의 궁극 목표가 무엇이었나. 정치민주화에 그토록 정열을 바친 이유가 뭔가. 권력을 잡는 게 아니지 않았는가. 사회 각 분야에서 민주화를 실현해 각 개인에게 자유를 주고 창의성과 자발성을 높여 공동체에 다 함께 참여하는 신명 나는 세상을 만드는 게 궁극적 지향점이지 않았는가. 그것이 미래세대가 요구하는 바와 일맥상통한다는 거죠. ‘우리가 누군데’ 하는 자만에 빠지지 말고, 또 노 대통령이 민주화세력의 대표선수로서 실패했다고 허탈해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미래를 향해 진취적으로 나아가자는 거죠. 저는 민주화세력에게 그런 새로운 시대적 과제를 던진 겁니다.”

    ▼ 민주화세력으로선 이 정권 때문에 억울한 점도 있겠죠?

    “(웃음) 운하 따위의 발상으로는 안 된다면, 민주화세력이 말하는 미래지향적인 발상은 뭔가. 국민은 무한경쟁의 글로벌경제, 신자유주의시대를 맞아 심해진 양극화 문제에 대한 해법을 민주화세력에게 기대하지 않잖아요. 그래서 성장이 먼저 돼야 분배가 가능하다는 산업화세력의 발상에 복고적 관심을 보이고 있어요. 그런데 양극화 심화는 저(低)성장에서 비롯된 게 아닙니다. 오히려 글로벌경제의 특징인 고용 없는 성장이 빚은 결과죠. 따라서 산업화시대의 ‘성장 우선’ 발상으로는 글로벌경제체제에서 온전한 성장도 이룰 수 없고 양극화 해소도 불가능한 거죠. 성장 없이는 지속적 분배가 불가능하지만 역으로 분배 없이는 지속적 성장도 불가능해요. 성장은 곧 기회 창출이죠. 국민이 성장을 원하는 것은 기회의 배분, 즉 나도 그 성장에 참여할 기회를 달라는 뜻입니다.

    왜 자꾸 다른 얘기를 하는지…

    그런 점에서 ‘권력이 시장에 넘어갔다’는 노 대통령의 말은 잘못됐다고 봐요. 신자유주의에 백기 투항할 게 아니라 긍정과 부정 양면을 섬세하게 파악해 주택, 의료, 교육 등 공공성이 강한 분야에서는 국가의 역할을 더욱 강화해야죠. 새 시대의 정치지도자에게 요구되는 리더십은 거창한 개발 프로젝트나 거시경제지표를 제시하는 영웅적 리더십이 아니라 시대흐름을 잘 읽고 국민을 편안하고 안전하게 이끄는 선장의 리더십입니다. 통찰력을 갖고 국정 곳곳에 숨어 있는 문제점을 파악해 조정할 수 있는 섬세한 리더십이죠.”

    그가 용광로론으로 불을 지핀 민주화세력의 대통합, 혹은 통합신당 창당 움직임은 노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반대의사를 밝힌 이후 주춤한 상태다. 그로서는 노 대통령에게 반감을 품을 만도 하다. 그렇지 않아도 항간에서는 두 사람을 두고 애증의 관계라 하지 않는가.

    ▼ 여권 일부의 통합신당 추진에 대해 지역구도에 편승해 정권을 잡으려는 전현(前現) 민주당 세력의 야합이라느니 호남을 지역기반으로 한 반(反)한나라당 세력의 연합이라느니 하는 비판이 있는데요. 통합신당을 지지하시죠?

    “‘신당’이 아니라 ‘통합’에 방점을 두고 있죠.”

    ▼ 노 대통령의 통합신당 반대 논리에 대해 반론을 편다면.

    “노 대통령께서 염려하는 게 ‘지역주의 회귀’ 아니냐는 건데, 저는 이미 용광로론을 통해 지역주의를 비롯한 모든 기득권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기득권은 속된 말로 ‘지분’이에요. 거기엔 지역주의에서 비롯된 힘도 포함되죠. 저는 통합의 3정신 또는 3원칙에 동의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통합 대상이 될 수 있다고 강조한 바 있습니다. 그 세 가지는 기득권 포기, 전국정당화, 민주세력 중심입니다. 이것만 지켜지면 노 대통령의 염려는 다 해소될 겁니다. 현대사를 보면 민주세력이 힘을 합칠 때는 역사가 진보했고, 분열할 때는 후퇴했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어요. 한나라당이 민주세력의 통합을 반한나라당 연합이라고 비난한다면 현 집권세력의 무능에 따른 반사이익을 계속 누리겠다는 얘기밖에 안 됩니다. 반사이익에 연연하기보다는 미래의 대안세력으로 거듭나 국민의 진정한 지지를 받겠다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 통합신당은 민주당과의 통합을 전제로 한 것인데, 이에 대해 노 대통령과 친노(親盧)세력은 열린우리당의 창당정신에 어긋나는 것 아니냐고 비판합니다.

    “열린우리당의 창당정신이 뭡니까. 중산층과 서민을 위하고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건 모태정당인 민주당과 다르지 않아요. 사실 민주당 것을 그대로 가져간 거죠(웃음). 그분들은 탄생배경도 잊어버렸나봐요. 마치 어머니 자궁 속에 있을 때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민주세력 통합’ 깃발 든 전 의원 추미애

    2년간의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추미애 전 의원은 한양대 초빙 교수로 임용됐다.

    2002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당시 노무현 후보는 조직에서 현저히 열세였어요. 그런데 광주에서 예상외의 승리를 거두면서 판세를 장악했어요. 왜 그런 결과가 나왔습니까. 바로 호남인들이 지역주의에 바탕을 둔 기득권을 버렸기 때문이거든요. ‘노무현 당신을 통해 전국정당을 만들 수 있다’는 기대감이 반영된 거죠. 호남에서 이렇게 나왔기 때문에 본선에서 노 후보가 민주당 후보인데도 영남에서 30%의 지지율을 얻었던 겁니다. 노 대통령 자신은 그 간판(민주당)을 싫어했고 지금도 싫어한다지만 그 간판으로 영남에서 표를 얻었단 말이에요.

    그렇다면 대선 후 전국정당을 바라는 민심을 반영해 분열 없는 통합신당으로 나아갔어야죠. 그런데 노 대통령은 제로섬 게임을 했어요. 호남을 빨대로 삼아 영남 표를 얻겠다는 발상이 빤히 보이니 영남도 지지할 명분을 잃게 됐죠. 그 결과 호남에서도 소외되고 영남에서도 외면받았죠. 전국정당에 대한 호남인의 기대와 결단을 노 대통령 스스로 저버렸잖아요. 민주세력 대통합은 (분당으로 깨졌던) 전국정당을 복원하자는 겁니다. 왜 자꾸 다른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열이 오르는지 얼굴도 약간 상기됐다.

    ▼ 지금의 통합 움직임과 2003년의 분당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봅니다. 당시 노 대통령과 이른바 천·신·정이 왜 분당을 추진했다고 봅니까. 그리고 왜 추 의원은 거기에 반대했나요. 권력다툼이었습니까.

    “과거 얘기로 대립각을 세우고 싶진 않은데…. 대선 당시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이 오르지 않자 민주당 내에서 이른바 후단협, 즉 노무현을 버리고 다른 후보를 세우겠다는 그룹이 생겨났어요. 저는 선거에 지고 이기고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국민과의 약속이다, 국민경선후보를 바꾸는 것은 국민을 속이는 것이라고 후단협에 반대했지요.

    통합 나선 사람은 치마폭 넓어야

    어쨌든 후보단일화가 이뤄진 후에는 다들 협조하고 지역에서 열심히 뛰었어요. 그러면 당선 후 다소 섭섭한 마음이 있더라도 승자 처지에서 넉넉한 마음으로 그들의 체면을 세워주면서 당 개혁에 협조하도록 이끌었어야죠. 저도 당시 당 체질을 개선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최고위원직을 내던졌어요. 새로운 통합신당에는 더 많은 개혁원군이 필요하고 그들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자리를 비워둬야 한다고 생각했죠. 말하자면 기득권을 포기한 겁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분당으로 가버렸어요.”

    ▼ ‘느닷없이’라뇨?

    “알아서 해석하세요.”

    기자가 “대선 때 이상한 행동을 보인 의원들에 대한 응징 또는 분리작업으로 볼 수 있겠냐”고 파고들자 그는 “모르겠다”며 불편한 심기를 에둘러 드러냈다.

    “저라고 왜 화를 삭이는 과정이 없었겠어요. 마음고생 심하게 하고. 1년 내내. 밥을 먹어도 먹는 게 아니고 잠을 자도 자는 게 아니었죠. 고통의 나날이었어요. 화도 많이 나고. 아버지가 투병 중이실 때라 더했어요.”

    ▼ 앞서 말씀한 통합 3원칙에 비춰보면 노 대통령의 반대논리는 기우라는 얘기인데요. 왜 대통령은 반대할까요.

    “국민의 목소리를 좀 들으셨으면 좋겠어요.”

    ▼ 노 대통령의 기득권 집착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자신을 부정해야 하니.

    “통합에 나선 사람은 치마폭이 넓어야 하고, 하고 싶은 말도 참아야 해요. 제가 무심코 한 말이 어떤 분한테는 비수로 꽂힐 수 있거든요. 사실, 통합 분위기 조성을 위해 굉장히 말을 아끼는 편이에요(웃음).”

    ▼ 하지만 통합론자로서 명백한 통합반대 세력에 대해선 부당성을 지적해야죠.

    “지역주의 회귀라고 하는데 그 반대죠. 통합신당이 추구하는 것은 전국정당이에요. 호남민심이 대결단을 내려 노 후보를 밀었는데, 노 후보는 당선 후 분열의 길을 갔어요. 분당을 선택했어요. 이렇게 지적하면 사무치겠죠. 달리 어떤 표현을 더 하겠어요.”

    ▼ 범여권의 잠재적 대선후보로 거론되는데, 대선 때 어떤 역할을 할지 들려줄 수 있나요.

    “자장면 배달원도, 음식점 주차 관리인도 저에게 ‘통합해주세요’라고 호소하더군요. 통합을 말하려면 일관성과 정당성, 상징성을 갖추고 있어야 해요. 그분들의 얘기를 듣고 통합에 대한 저변의 공감을 얻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됐어요. 대선은 그 다음 문제예요.”

    ▼ 통합의 기반이 갖춰지면 대선후보로 출마할 용의가 있습니까.

    “말하기 부적절합니다. 지금은 통합에만 고민을 집중하고 있어요.”

    ‘DJ 계승자’로 불린다면 영광

    그는 한때 ‘DJ의 정치적 딸’로 불렸다. 그 때문에 김대중 전 대통령의 후광을 벗어난 그의 정치력에 의문을 나타내는 시각이 있다. 이에 대해 묻자 그는 김 전 대통령과의 정치적 유대감을 감추지 않으면서도 차별성을 내세웠다.

    “김대중 전 대통령을 통해 정치에 입문했고 그분의 철학과 노선을 계승하려 노력했죠. 그런데 진정한 계승자라면 책임이 따릅니다. 단순히 이어받는 게 아니라 더욱 발전시켜야 하기 때문이죠. 정신은 같지만 시대적 책임이 다릅니다. 그분이 책임졌던 민주화 시대에는 국민의 분열을 극복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였어요. 제가 나서는 글로벌경제 시대에는 정치지도자가 국민의 선장이 돼 세계와의 경쟁대열에서 밀려나지 않고 앞장설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거시적인 부분보다는 미시적인 부분을 통찰하고 점검하고 미세 조정하는 능력이 필요해요.”

    ▼ ‘DJ의 계승자’로 자임하는 건가요.

    “그렇게 불린다면 저로서는 영광이죠.”

    ▼ DJ의 후광, ‘영남 출신 호남 며느리’라는 지역통합의 상징성, 여성 정치인의 상징성 덕분에 과대포장된 면이 있다고 생각지 않나요. 분당과 탄핵, 총선 실패를 두고 정치력이 미흡하다는 지적도 있는데요.

    “정치를 하면서 늘 원칙과 소신을 지키려 애썼고 그에 걸맞은 평가를 받아왔어요. 저를 어떤 상징성으로 주목하는 것을 거부해왔어요. 여성 정치인이니 당의 꽃인 대변인을 해보라는 권유를 받았을 때도 단순히 여성이라는 이유로 그런 직책을 맡기는 싫다고 거절했어요. 불편함과 비난을 감수하면서도 권력대열에 합류하지 않는 등 원칙을 지켰습니다. 다만 바람 앞의 등불과 같았던 분당과 탄핵 사태에 대해선 왜 나라도 끝까지 막지 못했나, 하는 회한이 남아 있어요. 너무 앞서 나가 소통이 안 된 점도 있었고요. 당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고 생각하지만, 결과적으로 저의 책임이라는 걸 인정하죠.

    노 대통령이 당선 후 호남을 방문해 ‘이회창 싫어서 나를 찍었죠?’라고 말한 적이 있어요. 그 얘기를 들은 호남인들은 ‘노 대통령이 선거전략 차원에서만 호남을 이해하는구나’ 싶어 배신감이 들었죠. 저는 호남에 지역기반을 둔 당에서 정치를 시작한 이후 ‘영남 출신의 호남 며느리’라는 상징성에 안주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영호남 사람들의 진심을 소통하게 하는 일을 해왔어요. 지금도 그것이 저의 소임이고 운명이라고 봅니다.”

    노 대통령의 잘못과 실패에 대한 비판을 주문하자 그는 내키지 않아했다. “뭘 잘못했는지 왜 실패했는지 국민이 잘 알고 있다”고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 과거의 정치적 동지로서 비판한다면.

    “스스로 ‘임기 못 마치는 대통령이 되지 않게 해달라’고 할 정도로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제가 거기에 보탤 말이 뭐가 있겠어요. 벌여놓은 일이나 잘 수습하길 바랄 뿐이죠.”

    ▼ 자질의 문제일까요. 정책의 실패일까요.

    “가시 있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아요.”

    다시 한번 노 정권의 실패 원인을 묻자 마지못한 듯 몇 가지를 지적했는데, 흔히 하는 얘기였다. “국정운영의 우선순위와 의제설정이 잘못됐다.” “소모적이고 대립적인 방식으로 국정을 이끌었다.”

    엄마 노릇 제대로 못한 게 걸려

    ▼ 정치하면서 가장 괴로웠던 때는 언제였나요.

    “역시 분당과 탄핵사태 때였죠. 막지 못한 게….”

    당시 그의 부친은 위암으로 입원한 상태였다.

    “분당 문제로 한창 싸울 때였는데, 병원에 가면 오히려 아버지께서 저를 위로해주셨어요. 뉴스를 들으시고는 ‘네가 떠나자니 원칙에 어긋나고 남아 있자니 힘들 것’이라며. 누구보다도 제 심정을 잘 아셨죠. 대화상대 해드린다고 가면 제 걱정만 하셨죠.”

    어느새 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부친은 2년간의 투병 끝에 눈을 감았다.

    ▼ 아이들에게 좋은 어머니였나요? 불만을 샀을 법도 한데.

    “가슴 아프죠. 제대로 뒷바라지를 못해줘서. 관심도 많이 못 갖고. 사춘기와 한창 학업에 매진해야 할 때 엄마 노릇을 제대로 못한 게 안타깝고 아파요.”

    ▼ 남편은 추 의원의 삶에서 어떤 존재인가요.

    “연인이자 동반자죠. 평생 그럴 것 같아요. 연인이라는 것은 주말부부로 서로 그리워하면서 살기 때문이고, 동반자라는 것은 정치적으로 힘들 때마다 남편에게서 힘을 얻기 때문이죠. 남편이 ‘당신이 옳다’고 격려해줄 때가 많아요.”

    남편 서성환씨는 고향인 전북 정읍에서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 주말부부는 애정도 더 솟고 오래 간다고 하던데요.

    “(웃음) 일단 안 싸우게 되죠. 싸우다보면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되니.”

    ▼ 프러포즈를 먼저 했다는 얘기가 있던데요.

    “그럴까요(웃음). 여성이 감정 표현에 더 솔직하죠. 남자는 좀 점잖고.”

    ▼ 여전히 사랑하시나 보네요.

    “(웃음) 그보다는 서로 아끼죠. 굉장히.”

    진부한 얘기일지 모르지만, 사랑, 그것은 우리네 삶의 영원한 주제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이런저런 사랑에 목말라 한다. 제대로 된 정치가라면 모름지기 사람과 세상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품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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