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7월호

‘목수(木壽)’ 신영훈

“인격을 담아내는 이 세상 유일한 집이 한옥입니다”

  • 김서령 칼럼니스트 psyche325@hanmail.net

    입력2007-07-06 10: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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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수(木壽)’ 신영훈
    신영훈(申榮勳·72)이라는 이름을 목수(木手)라고 수식하는 것은 그가 평생 해온 일을 옹졸하게 축소하는 일이다. 그는 분명 목조건축물을 짓는 일에 세상 누구도 따르지 못할 기술과 이론, 상상력과 눈썰미를 갖춘 대목(大木)이지만 직접 대패질을 하고 끌질과 자귀질을 하는 목수는 아니다.

    집 짓는 일 자체를 기획하고 장인들을 불러 모아 팀을 짜며 설계와 시공을 총괄 관리해서 결과에 대해 책임 지는, 집짓기의 총감독 노릇을 하는 이를 부르는 ‘지유(指諭)’라는 명칭이 있다. 신영훈 선생이 평생 해온 일이 바로 그 ‘지유’에 해당하지만, 마침 그의 호가 ‘목수(木壽)’이니 나는 낯선 이름 대신 그냥 친숙하게 ‘큰목수’라고만 부르련다.

    둘이 포개 누워도 안 보이게

    서울 북촌의 좁다란 골목 끝, 한옥문화원이란 간판이 걸린 집에서 신영훈 선생을 뵈었다. 한옥문화원은 아쉽게도 한옥이 아니지만 댓돌에 신발 벗고 마루로 올라가 왼쪽 문을 여니 선생 계신 사랑방이다. 문과 창을 한식으로 짜서 달고 나무빛이 맑은 이층장 한 점이 등 뒤로 놓였다. 한옥문화원 강좌 중엔 ‘아파트를 한옥처럼’이란 과목도 있다니, 아닌게아니라 아파트에 이런 창호와 목물을 두는 것만으로도 한옥다운 운치를 맛볼 수 있겠구나 싶다. 그는 대뜸 본론에 진입했다.

    “저기 창문 앞에 가서 한번 서봐. 어깨 너비랑 딱 맞지? 사람 키와 어깨 너비에 맞춰서 창문 크기를 정하는 거라고. 안방 아랫목에 야트막한 창이 있지? 그 문 높이를 어떻게 정하는 줄 알어? 앉아서 팔굼치를 편하게 얹어놓을 만한 높이라고! 창 아래를 막는 나무를 머름대라고 하는데 머름대의 높이는 어떤 줄 알어? 바닥에 누워도 뜰에서 들여다보이지 않을 만한 높이지. 때로 둘이 포개 누워도 바깥에서는 보이지 않을 높이라고!



    하하…. 뭐 그런 거까지 고려했겠나 싶지만 그게 안 그래. 인간이 하는 온갖 일에 편리한 공간이라야 그게 좋은 집이지. 무슨 일을 할 때마다 똑 알맞고 쓸모가 있어야 좋지 할 때마다 불편해서야 쓰것어? 우리 살림집은 집 치수를 사람 치수에 맞춰서 짓는 맞춤집이지. 그러니 싫증이 날 리가 있나. 봐, 문얼굴하고 사람 얼굴이 똑같지? 환하고 정기가 돌잖아? 전에는 한국 사람의 심성이 이렇게 창호 문에 그대로 얼비쳤는데 이제는 문마다 방범창을 쳐대니 나 아닌 남은 다 도둑놈이라는 거지 뭐야.”

    처음 듣는 얘기가 많다. 이야기가 쉽고 재미있고 친숙해 무릎 앞으로 바싹 다가앉을 수밖에 없다.

    “옛 어른들이 방석을 놓고 그 위에 올라 앉으시는 건 까닭이 있어. 엉덩이는 높고 다리는 아래로 내려오니 절로 허리가 곧게 펴지거든. 갓을 썼으니 벽에 기댈 수도 없지. 한식 두 칸 방엔 맞은편 벽이나 문 외엔 눈앞에 걸릴 게 아무것도 없거든. 한지로 도배한 바닥은 해맑은데 정좌해서 건너편 은은한 벽을 바라보고 있자면 집중력이 절로 생길 거 아냐. 자연 궁리가 깊어지고 생각이 익어가지. 집을 사람이 경박할 수 없도록 만들었어.”

    따로 질문할 필요도 없다. 창호지를 통해 들어오는 부드러운 오후 햇살을 받아 신영훈 선생의 낯빛이 과연 장지문처럼 환하다.

    “제 집에 살아야 신명이 나지…”

    “여자를 계집이라고 하잖아. 그건 욕이 아니거든. ‘계집’이란 ‘제집’이 변해서 된 말이라고. 집이란 게 뭐야? 은밀하고 남을 함부로 들이지 않고 생산을 하는 곳이잖아? 제 몸 안에 제 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여자라는 거지. 이렇게 심오한 철학을 담고 있는 말이 우리말말고 어느 나라에 또 있어? 원시인간은 굴을 파고 살았지. 굴과 집이 뭐가 달라? 굴에는 표정이 없어. 그리고 문도 없지. 집은 저마다 표정이 다 다르거든. 그리고 문이 있어. 문이 뭐야? 들어오지 못할 놈은 못 들어오게 하는 게 문이잖아? 여자에게도 문이 있으니까 집인 거지.”

    이 무슨 에로틱한 내용인가 싶어 잠깐 어리둥절하는 새 그는 다시 ‘집’에 관해 종횡무진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쉽고 명료하고 구수하고 유머러스하고 적확하다. 말씨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으며 어조는 시종 침착한데 내용은 때로 울분과 열정에 차오르고 때로 매섭고 때로 통쾌하다. 그와 다섯 시간 넘게 앉아 이야기했다. 1935년생이니 일흔을 넘긴 나이건만 지치는 기색이 전혀 없다. 관심을 끄는 일이 있으면 어디든 달려가는 예술가적 성정과 몰두가 절로 읽힌다.

    ‘목수(木壽)’ 신영훈

    신영훈 선생은 우리 문화와 전용의 총체적 집결지가 한옥이라고 강조한다.

    “지금 김 선생 입은 그게 양복이요? 우리 치수에 맞게 만든 21세기 한복이라고 해야 옳은 거 아니겠소? 걸핏하면 전통한옥이라고 말들 하는데 전통은 뭐고 한옥은 또 뭐야? 물으면 대답을 한 마디도 못하면서 전통한옥이라고 말만 하거든. 사는 방법은 시대에 따라 달라지잖아. 어떻게 먹고 입고 잠자고 아이 낳고 사느냐가 문화이고 그게 우리에게 가장 편리한 방식으로 이어져 내려온 게 전통이지. 고구려 집과 신라 집은 같았을 리가 없지. 백제와 조선도 달랐고. 그러면 어느 게 전통한옥이라는 거야?”

    거칠게 말한다면 한국 사람이 입는 옷은 다 한복이고 한국 사람이 사는 집은 다 한옥이라고 할 수도 있으리라. 사람이 중심이지 껍데기가 중심일 수 없다는 말이다. 다만 개화기 이래 우리는 무엇이 우리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문화’인지 연구하고 토론해서 공감대를 형성하는 과정을 생략한 채 너무나 급작스럽게 남 하는 방식을 그대로 좇은 것이 문제다. 이제 이만큼 살아왔으니 남의 잣대 아닌, 우리 몸과 마음에 가장 잘 맞는 집과 옷과 음식은 무엇인지 궁리하고 공부할 때가 됐다는 것이 신영훈 선생 말씀의 요지라고 나는 이해했다.

    서양 문물에 비판 없이 경도된 오늘의 사조 또한 머잖아 끝날 때가 올 것이다. 문화란 원래 그런 것이니까. 그럴 때 우리 고유의 미덕과 장점을 되찾으려 해도 자칫 다 사라져버리면 큰 탈 아닌가, 당장 교육현장에서 그걸 가르쳐 인재를 기르는 일이 시급하다는 것이 신영훈 선생의 문제의식이고 초조함이고 울분이었다.

    “몸뎅이에 안 맞는 옷을 억지로 입을 수 없잖아? 그 몸뎅이가 들어가 사는 것이 집인데 집도 몸뎅이에 맞게 지어야 편안하고 싫증이 안날 거 아니겠어? 인제 아파트에 싫증나서 튀어나오는 사람이 점점 늘어날 거라고. 아이들이 집에 들어가기 싫어하는 것도 집이 제 몸에 안 맞아서 그런 거야. 새로 우리에게 맞는 집을 지으려 해도 뭘 알아야 할 거 아냐? 대학 건축과에서 한옥은 아예 취급을 안 해. 한옥만 그렇겠어? 안 봐도 훤하지. 음식도 의복도 음악도 예법도 제대로 가르치는 데가 없는 거 같애.

    언제까지 이런 엉터리 교육들을 시킬 거야? 얼마나 더 해야 직성이 풀릴 거야 ? 학교에는 왜 보내고 공부는 왜 시켜? 형제끼리 사촌끼리 이웃끼리 의지하고 사는 법을 배우고 자기 삶을 즐겁게 만들기 위해 공부하는 거 아냐? 요새는 학교에서 함께 사는 법 대신 남을 누르고 이겨야 한다고 가르치잖아? 사람이란 자기 생리에 따라, 개성에 따라 집도 옷도 음식도 저한테 맞아야 행복하고 즐거운 법이거든.

    제 집에 살면 당당하고 신명이 나지만 남의 집에 세를 살면 어깨가 처지고 풀이 죽잖아? 그런데 서양놈들 하는 대로 따라 한다 해서 그게 진짜배기로 즐거워지겠어? 넓은 아파트에 산다고 꺼떡거려쌓지만 백년 이백년 그렇게 살 수 있겠어? 벌써 싫증나서 튀어나오는 사람이 숱한데?”

    설명할 수 없는 이끌림

    집은 한 민족의 총체적인 문화가 담긴 소중한 유산이고 자료다. 최순우 선생의 말씀대로 ‘조선시대 주택은 우리 민족이 쌓아온 생활문화의 기념탑이고 우리 생활에 가장 가깝고 여전히 새로우며 앞으로도 새로울 수 있는 한국미의 요소를 듬뿍 지녔다’.

    그러나 우리가 한옥 살림집의 소중함을 채 알기도 전에 그것들은 무너지고 헐리고 물속에 잠겼다. 그 자료를 알뜰히 정리하기는커녕 몰가치하고 미개한 것으로 몰아 소홀히 대접했다. 광복과 전쟁 후, 급하게 복구된 블록집에서 1970년대 새마을 주택을 거쳐 오늘의 빌라와 아파트에 이르기까지 우린 날림으로 지은 서양집에서 60년 넘게 살림을 꾸려왔다. 다행히 신영훈 선생과 그의 명콤비 김대벽(사진가) 선생 같은 이가 있어 수천의 집이 실측과 도면과 사진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정보화사회의 개성 있는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산업사회의 몰취미한 집을 선호하지 않는다. 첨단 고층빌딩 숲을 대견해하지도 않는다. 그리운 한옥!

    한옥이 서양집보다 더 나은 주거공간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한옥이 암만 홀대받아도, 짓는 기술을 가르치는 학교가 없어도, 한옥은 꾸준히 명맥을 이어왔다. 최근에는 새로운 한옥 붐이 일어나고 있는 게 확실하다. 신영훈 선생의 책을 사러 교보문고에 갔더니 서점 한 코너가 온통 한옥에 관련한 책이다.

    그러나 이제 도시에 한옥을 짓기란 아예 불가능해 보인다. 어쩌면 좋을까. 신영훈 선생에게 그 답을 기대할 수밖에 없다. 도시에 어울리는 21세기형 한옥을 그가 찾아내준다면?

    “경제적인 목적에만 주력한 지금의 아파트는 과도기적인 집일 수밖에 없어. 아파트에는 구수하고 능청스러운 구석이 없잖아. 지금처럼 되바라지게 까발려놓고 살면 머잖아 한계를 느끼게 돼 있어. 그 기세에 밀려 부부가 갈라서는 일도 흔하게 돼버렸지. 현명하지 못하다는 걸 깨달았다면 이젠 스스로를 추슬러 참답게 살아볼 필요가 있겠어 없겠어?

    학교창문에 커튼 대신 창호지를

    ‘목수(木壽)’ 신영훈

    ‘청소년 한옥교실’에 참가한 어린이들이 신영훈 한옥문화원장의 설명을 들으며 민속촌 내에 재현한 양반 가옥의 구조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짓는 집을 서양건축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지만 양옥은 아직 이 땅에 정착된 한옥이 아니거든. 21세기 한국인이 살아야 할 집은 지금 같은 양옥일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돼. 그렇다면 새로운 한옥을 지을 수 있는 건축가가 있어? 없으면 이제라도 키워야겠어, 말아야겠어?”

    그는 흡사 수수께끼 문제를 내듯 이편을 향해 자꾸 질문을 던진다. 정답이야 뻔하고 그건 추임새가 되어 이야기판을 한층 무르익게 만든다.

    한옥에는 설명할 수 없는 이끌림이 있다. 들어앉으면 심신이 편안하고 넉넉해진다. 좁은 공간이라도 답답하지가 않다. 오밀조밀하면서도 여유가 있고 별다른 장식 없어도 보는 눈이 즐겁다. 뒷산과 옆집과 신기하게 잘도 어우러진다. 주변 경관을 해치기는커녕 한옥이 들어서면 오히려 주변 자연이 살아난다.

    살다가 허물어져도 모조리 자연으로 돌아갈 뿐 환경 폐기물이 생기지 않는 놀라운 자연 친화력을 갖는다. 그러니 집과 사람이 따로 놀지 않는다. 몸이 바닥에 척 붙어 단잠이 솔솔 들고, 자고 나면 날아갈 듯 가볍다.

    나무와 흙이 인체에 신비한 화학작용을 일으켜서라는 설도 있고, 벽체가 습기를 알맞게 내뿜다 머금다를 반복해서라는 주장도 있고, 올려다보는 서까래가 갈비뼈 같아서 그 안의 사람을 보호한다는 의견도 있지만 정작 한옥의 법식, 기법, 건축 구조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가르치는 기관이 없다. 그가 한옥문화원을 열어 사람들에게 한옥에 대해 강의하는 것도 그런 안타까움에서 시작된 일이었다. 살수록 쓸모있고 볼수록 예쁘고 생각할수록 의미 깊은 집, 우리 땅 기후와 재질과 생활방식에 맞게 수천년 발전해온 집, 그 한옥의 장점을 현대에 되살려 생활 가까이로 끌어와야 한다는 것이 신영훈 선생의 글과 강의의 핵심이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개화기 이후 학교를 지으면서 교실마다 양쪽에 유리창을 달았잖아. 그게 우리 아이들의 시력을 다 망친 주범이야. 유리창을 달아놓고 빛이 들어오니까 또 커튼을 달잖아? 창가 쪽 아이는 직사광선에 노출되고 통로 쪽 아이는 얼비치는 칠판 글씨를 보느라고 애를 먹거든. 심지어 책을 펴면 한 페이지엔 볕이 들고 한 페이지엔 그늘이 진단 말이야. 빛이 가만 있나, 시간 따라 옮아다니지. 그런 학교 몇 년만 다니면 아이들 3분의 2 이상이 안경을 쓰게 되잖아.

    대신 우리 창호지를 발라보면 어떨까. 빛을 차분하게 가라앉혀줘서 좋고, 창문 밖 내다보지 않아서 공부에 집중할 수 있어 좋고, 간살이를 쳐다보는 건 또 얼마나 은은하고 이뻐? 그래서 애들 미감을 키우고 마음에 심지를 잡아줘야지, 창문 밖에서 감시하겠다는 거야 뭐야? 제 것 좋은 줄 모르고 다 갖다버리고서 남의 것만 갖다 쓰는 게 무슨 문화민족이야? 제 것 귀한 줄을 모르니 옛사람의 지혜를 써먹을 줄도 모르지. 유리창 달린 학교 생긴 지 100년이 돼가도록 어째 우리 아이들 눈 보호하자는 말을 하는 이가 아무도 없어? 우리 학교 창에 조선 종이 바르자는 문화운동 한번 안 해 보실려우?”

    ‘개성 목조집’에서의 어린시절

    그는 개성에서 태어나 자랐다. 아버지가 부농이었다. 포목상을 겸하다 나중에는 목물(木物)을 제작해 판매하는 전국 규모의 가구점을 경영했다. 여섯 살 무렵 부친이 살림집을 새로 지었다.

    “개성 최초의 목조 이층집이었어. 집 지을 때 도편수가 고모부야. 어린 나더러 대패 가져오너라, 저 아저씨한테 자귀 갖다드려라, 자꾸 심부름을 시키시네. 그게 그렇게 좋았어. 조수의 조수 노릇을 한 셈이지. 내 운명이 그때 이미 집 짓는 일과 연이 닿은 건지도 모르지.”

    전쟁이 났다. 1·4후퇴 때 고향을 떠났다. “지금도 임진강가에 서면 우리집 논이 저 건너로 보여. 개성이 그렇게 서울과 가까운 곳이야.” 피란 갔다 중앙고등학교로 진학했다. 당시는 책 읽고 글쓰기를 좋아하는 학생이었다. 주왕산이란 국어선생(그는 주시경 선생의 아들이다)이 그를 특별히 아껴서 교지 편집을 맡았고 나중 서울대학으로 가신 이기문 선생에게 글쓰기를 배웠다.

    “교지에 삽화를 그리던 친구 중에 서성배라고, 수화 김환기 선생의 조카가 있었어. 그 친구를 따라 국립박물관에서 하는 미술강좌를 들으러 갔다가 최순우 선생을 만났지.”

    그게 옛 미술과의 첫 만남이었다. 당시 국립박물관 미술과장이던 최순우 선생의 강의에 그는 금방 매료된다. 우리 미술에 담긴 아름다움과 선비정신에 관한 이야기가 가슴 안으로 뜨겁게 파고들었다.

    ‘목수(木壽)’ 신영훈
    당시 박물관은 부산으로 피난했다가 막 환도했지만 이승만 대통령의 반대로 경복궁에 들어가지 못한 채 남산 기슭에 임시로 자리잡고 있을 때였다. 같은 개성 출신인 최순우 선생이 좋았고 박물관이 무조건 좋았다. 그는 기꺼이 덕수궁으로 이사하는 박물관의 자원봉사자가 됐다. 방금 서울대 국문과에 낙방해 마땅히 할 일도 없었다.

    교통비 정도만 받으면서 박물관 유물을 분류하고 기록했다. 유물을 손끝으로 감촉하는 것이 행복했다. 거기 담긴 숱한 이야기가 손을 통해 마음으로 흘러드는 것이 좋았다. 그러면서 막연히 감지했다. 나는 평생 이런 일을 하며 살겠다는, 다짐도 아니고 예감도 아닌 그 무엇을!

    ‘사랑방 대학’ 순례

    덕수궁 박물관엔 간송 전형필 선생이 자주 찾아왔다. 젊은 직원들과 탁구를 한판 친 후 일쑤 집으로 데려가곤 했다. 그들을 사랑방에 앉혀두고 도자기나 고서화들을 꺼내놓고 일일이 설명을 해줬다.

    “정종 따르는 술잔이 시간이 지날수록 고급이 돼. 처음엔 조선백자로 따르다가 밤이 깊으면 상감청자로 바뀌지. 그걸 손에 들고 설명을 해보라고 시키셔. 깨뜨릴까봐 걱정이었지만 그런 게 진짜 공부였는데….”

    말하자면 그게 그의 대학이었다. 하루는 최순우, 하루는 전형필, 하루는 황수영 식으로 각자의 사랑방에 불려가서 그런 방식의 미술수업을 받았다. 일종의 사랑방 순례로 영혼이 교감하는 공부 방식이었다.

    “그런 방식을 지금 나도 시도하고 싶은데 가족들이 불편해하니까 할 수가 없어. 그게 다 가옥구조 때문이지. 요즘 집은 되바라져서 가족 외의 사람이 드나드는 것을 봐주질 못하잖아. 전형필 선생도 최순우 선생도 다 한옥에서 사셨거든. 한옥은 사랑채가 있어서 손님을 가족과 자연스럽게 분리해 주거든. 요즘 집은 그런 분리하는 공간이 없으니 손님을 집으로 데려갈 수 없게 생겨 먹은 거지.”

    1957년 입대했지만 근무지가 육사 박물관이었다. 군 생활도 박물관을 떠날 수 없었고 제대 후에도 박물관 근처에 머물렀다. 차비도 제대로 못 받던 청년 신영훈에게 당시 문화재 수리·보수 공사의 명장이던 이광규 선생이 조수직을 제안했다. 불감청(不敢請)이언정 고소원(固所願)이라. 스승을 따라 전국을 떠돌았다.

    이광규 선생은 문화재 수리 공사의 설계·시공·감독을 도맡던 유일한 사람으로 제자인 그를 혹독하게 단련시킨다. 숱한 보고서를 쓰고 숱한 도면을 그렸다. 그러는 중 전통건축의 매력에 진정 깊이 빠져들기 시작한다. 한 3년 수련한 1963년 그는 국보 제1호 숭례문 중건 공사 책임을 맡는다. 이어 석굴암 보수 공사의 총감독이 된다.

    스승이 지유이고 자신은 공사감독이지만 목조 건축물의 대표인 숭례문과 석조 건축물의 대표인 석굴암을 자신의 손으로 중수했다는 자부는 컸다. 석굴암에 전실 지은 것을 두고 학계에서 말이 많을 때도 그는 확고했다.

    “전세계 석굴치고 전실 없는 곳은 없거든, 아 부처를 모셨으면 그 앞에 예불드릴 곳이 있어야지 괜히 부처를 만들었겠냐구. 이광규 선생을 따라다니면서 집 짓는 법식을 웬만큼 터득했어. 조수로서 내가 하는 일이란 별게 아냐. 그저 사람들 술대접이지. 여러 장인 비위 맞추고 칭찬하는 일만 했어.”

    ‘집이란 뭘까’, 허구헌날 그 생각

    부여박물관 홍사준 관장과는 각별한 사이였다. 홍 관장은 서산 마애불을 발굴한 사람으로 백제 문화에 대한 애정이 끔찍하다. 마애불을 보호하기 위한 전실을 둘이 머리 맞대고 궁리해 지었다.

    “그분이 내 호를 목수라고 지어준 주인공이야. 내가 하는 일과도 맞고 나무에 생명을 불어넣는다는 뜻도 좋고…. 서산 마애불 전실을 지어준 보답으로 그분은 나를 데리고 다니면서 당신이 평생 공부했던 백제 문화를 일일이 가르치셨지. 여수 진남관을 지을 때는 전라도 살림집을 샅샅이 구경하고 다녔고. 제주 박물관 진성기 관장도 나를 한라산 꼭대기부터 바닷가까지 끌고 다니면서 옛집들을 보여줬어. 그런 분들을 만난 것이 다 내 복이지. 그분들 아니면 내가 무슨 수로 수만 채의 한옥을 구경할 수가 있었겠어?”

    한국 최고의 명장들과 어울려 숭례문, 석굴암, 송광사를 헐어내고 다시 지은 현장 경험, 틈틈이 사료를 찾아내 얻은 체계적 지식, 아무하고나 순후하고 푼푼하게 어울리는 인간성은 그를 차츰 유명하게 만들었다. 이제 큼직한 문화재 복원이나 조선집 짓는 곳이면 어디서든 ‘목수 신영훈’을 불러댔다.

    그 무렵 조자룡, 김대벽 등 뜻맞는 이 몇과 민학회를 조직한다. 민학회는 우리 일상 속에 깃들인 기층문화를 통해 문화의 본질에 접근하려는 일종의 문화운동 단체. 한국인의 집, 밥, 웃음, 탄생, 죽음, 바위, 산 같은 삶과 직결된 소재와 현장을 집중탐색하고 다녔다. ‘기층문화에서는 세계가 통한다’는 민학적 관점을 만들어낸 것도 그였다. 지식인들을 삶의 현장으로 이끌고 다니면서 기층문화를 생생하게 체험케 하는 답사여행을 숱하게 인솔하곤 했다.

    1980년대엔 송광사 중창 불사를 맡았다. 많은 절을 지었지만 인연 없는 절 일은 안 한다는 게 그의 원칙이다. 송광사는 방장 구산스님과의 인연이 깊었다. 이때 스님이 주신 화두가 “집이 뭣고?”였다. 집이 뭐냐? 허구헌날 그 생각을 했다.

    “양식 위주의 서양 건축사를 보면 내용이란 게 거의 명품 해설 차원에 그치더라고. 내가 짓는 집은 무슨 양식이 아니라 철저히 인간을 위한 집이거든. 인간의 삶이 집짓기의 출발점이고 귀착점인 거지. 아, 밥을 배 고파서 먹지 탄수화물을 섭취하려고 먹나? 집이란 궁궐이든 사찰이든 사람이 편하고 즐겁게 살려고 짓는 거지 양식에 맞추려고 짓는 건 아니거든. 집이란 사람이 즐겁게 살기 위한 곳이다, 스님이 주신 화두를 그렇게 풀었어.”

    사람이 출발점이자 귀착점

    송광사 대웅전을 짓는 중에 이광규 선생이 돌아가셨다. 직접 울력하시며 인부들에게 정성이란 뭔가를 보여주시던 방장 구산스님도 입적하셨다.

    “할 수 없이 지유는 내가 되고, 도편수는 조희환이 맡고, 송광사 스님 전부가 직접 덤벼들어서 일을 했지. 완공 전에 선생님이 돌아가셔서 당황했지만 그게 되레 남은 사람들 힘을 합하는 계기가 됐어. 집은 혼자 짓는 게 아니라 여러 사람의 합작품이지. 기와장이, 대목, 소목, 미장이, 구들 놓는 이…. 혼자 잘났다고 되는 일이 아니야. 누가 너무 잘나면 되레 팀워크가 깨져버려. 잘났다고 까불면 될 일도 안 돼. 사람이 뭘 해낸다는 건 지가 잘나서가 아니라 남의 도움으로 된다는 걸 그때 송광사에서 배웠지. 그렇게 절집 짓고 다녔으니 요새도 스님들이 날 괄시는 안 한다구.”

    신영훈 선생은 자신이 짓고 보수한 숱한 집 중 어느 곳을 가장 맘에 들어할까. 덴마크와 멕시코에 가서도 한옥 사랑방을 짓고 1992년엔 파리 이응로 선생댁 고암서방을 짓고 1994년 청도 운문사 대웅보전, 1995년 안동 하회 심원정사, 1995년 선산 동호재에 잇달아 그의 미덥고 정교한 손길이 미쳤다. 1996년엔 황룡사 9층탑 이래 가장 규모가 큰 목탑이라는 진천 보탑사의 삼층 목탑을 올렸다. 그가 절을 지어 비어 있던 절에 스님이 가득 차는 건 자주 있는 일이었다.

    2000년엔 미륵사 미륵전을 중창하고 영국 대영박물관(British Museum) 안에 정갈하고 아름다운 한옥 사랑방 한 채를 세웠으며 2001년엔 강화도에 학사재를 지어 21세기 한옥 살림집의 모델을 제안하려고 했다. 선생이 지은 집 중 딱 하나를 구경 간다면 어디가 좋겠냐고 물었더니 ‘파리의 고암서방’을 꼽는다.

    고암서방은 정말 공들여 지었다. 문과 창의 살대를 은근하고 해맑게 짜고, 부연걸어 겹처마 올리고, 소나무 다듬어 우물마루 들이고, 한지 장판에 발갛게 호두기름 발라 현대 한옥의 아름다움을 최대한 살리려 애썼다.

    “원칙대로 하고 정성을 쏟으면 좋은 결과가 나온다는 것을 해보니까 알겠데. 덴마크 국립박물관 안에 한옥을 지을 때 고암 선생이 보러 오셨어. 나도 이런 집 하나 지었으면 하시더군. 그건 뭐 농담도 약속도 아니고 서로 간의 막연한 희망 같은 거였는데, 고암 선생 사후에 부인 박인경 여사가 정말로 한옥 한 채를 지어달라고 하대. 설레는 마음으로 땅을 보러 갔지.”

    마침 프랑스에서 건축 공부하는 한국 유학생들이 찾아왔다. 쟁쟁한 프랑스 건축들 사이에서 한옥이 미개하고 초라해 보이지는 않을까 걱정했다. 다음에 너네 선생하고 꼭 같이 오라고 시켰다. 프랑스 건축가는 방 안을 고루 데우고 불길이 빠져나가는 구들을 보더니 그 구조에 탄복을 아끼지 않았다.

    “구조를 알고 싶어하는데, 내가 ‘바닥을 다 뜯어 보여줄 수도 없고 배우고 싶거든 한국으로 유학 오라’고 했지.” 독일인 건축가도 찾아왔다. “와 보더니 집의 곡선과 원형에 놀라는 거야. 자기네 집은 다 직선뿐이라는 거지. 집의 지붕 곡선은 원래 뒷산 곡선에 맞추는 거거든. 천원지방(千圓地方)의 우주 원리도 설명하고 몸 치수에 맞춘 집의 치수도 얘기해줬지.”

    장인(匠人)이자 학자

    그의 일이 궁궐과 절집과 살림집을 설계, 시공하는 ‘장인의 우두머리’로만 끝나는 건 아니다. 그는 장인인 동시에 학자였다. 한옥의 구조와 원리와 역사를 경험뿐 아니라 전적을 통해서 고증하고 체계화해 나갔다. 1970년대 월간지 ‘공간’에 ‘고건축 단장’을 연재하는 걸 시작으로 현장 작업 못지않게 글쓰기에도 몰두했다.

    자신이 보고 느낀 것을 글로 써서 거의 한 해에 한 권꼴로 책을 출간했다. ‘한옥의 향기’ ‘ 절로 가는 마음’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한옥’ ‘우리 단청’ ‘경복궁’ ‘석굴암’ 등 그가 펴낸 책은 이미 마흔 권이 넘는다. 한 사람이 어찌 이토록 많은 일을 할 수 있느냐는 내 놀라움에 그의 반응은 그저 심상하다.

    “절에서 일할 때 새벽에 일어나면 할 일이 뭐가 있어? 다섯시에 일어나면 일 시작할 때까지 서너 시간이 남잖아. 그때 그 절 사적기를 읽지. 현장에서 읽는 게 최고거든. 읽으면 처음 보는 내용이 많고 혼자 보기 아까우니까 정리를 해두는 거지. 나는 논문은 한 편도 안 썼어. 전부 자료 정리하고 실물 대조하면서 내가 느낀 감상을 적은 것뿐이지. 그러니까 난 영원히 아마추어야. 겁날 게 없어. 설령 생각이 좀 틀리다 해도 동의하지 않으면 그뿐인 거지.”

    그는 어려운 말을 전혀 쓰지 않는다. 노상 구수하게 두런두런 말한다. 자료 찾고 책 읽고 글 쓰고 강의하지만 그는 책상물림 학자와는 다르다. 궁리 많고 눈썰미 빼어나고 생각 깊은 현장감독이다. 수천, 수만 채의 한옥을 샅샅이 살펴본 후 그 방면에 문리가 트인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넉넉한 웃음을 웃는다. 그 여유는 다정하고 소담하고 정겹고 우아하다. 흡사 아른아른 윤이 나는 장판방에 들어선 것 같다. 따스한 훈김에 나도 몰래 입귀에 웃음이 돈다.

    마루와 온돌의 만남

    수만 채의 한옥을 봤지만 똑같은 집은 하나도 없더라는 그에게 한옥의 정의를 묻는다. 한옥의 장점도 물어본다. 왜 되살려야 하며 현대에 되살리는 것이 가능한지도 물어본다. 연이은 질문에 그의 대답은 간명하다. 한옥은 ‘온돌과 마루가 함께 있는 집’이며 ‘가장 큰 장점은 속속들이 자연 친화적이고 인간 중심적이라는 점’이며 그 ‘자연 친화와 인간 중심이야말로 현대가 추구하는 가치’에 맞아떨어지지 않냐는 것이다.

    “마루와 온돌은 상반된 구조인데도 서로 개성을 존중하면서 공존한다는 게 놀랍잖아. 우리말고는 세상 아무 데도 그런 집은 없거든. 북방문화인 온돌과 남방문화인 마루의 연합이라는 문화사적인 의의도 대단히 크지. 방 가운데에 불을 피워야 겨울을 나던 추운 지방의 온돌과, 나무 위에 집을 지어 습기와 해충을 막아야 했던 더운 지방의 마루가 합해져 한옥이라는 새로운 유형의 살림집을 낳았어. 마루는 높은 위치에서 점점 아래로 내려오고 구들은 지하에서 지표로 노출되면서 구들과 마루가 수평으로 만나거든. 그게 바로 한옥이지.”

    한옥은 일단 기단이 높다. 댓돌이나 죽담을 놓고 주추(柱礎)도 쌓아 바닥을 땅과 떨어뜨려 땅의 습기를 줄일 수 있게 지었다. 또한 처마가 깊다. 깊은 처마는 여름에 태양이 높이 떴을 때 차양이 되고 뙤약볕을 가려준다. 그늘진 실내는 뙤약볕 받는 마당보다 시원할뿐더러 차고 더운 공기 간에 대류가 생기게 만든다.

    그래서 한옥에는 바람 없는 여름날에도 시원하게 바람이 인다. 흙으로 된 방과 나무로 된 마루 또한 공기 온도가 다르다. 그러니 문 열어놓으면 마루와 방 사이에도 영락없이 자연스럽게 바람이 일어 기가 순환된다. 에어컨으로 만드는 바람과는 질이 다를 수밖에 없다.

    겨울에는 반대 현상이 일어난다. 낮게 뜬 태양볕이 집안 깊숙이 들어오고 온돌로 데워져 위로 올라간 따뜻한 공기는 처마에 막혀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한다. 머리맡에 둔 자리끼가 얼어버렸다는 건 6·25전쟁 이후 지어진 시멘트 블록집의 추억일 뿐이다.

    인격과 첨단과학의 집합체

    “양옥을 지으면서 처마를 얕게 하거나 아예 없애버렸잖아. 태양열을 조절할 방도가 없으니 에어컨이나 틀어댈밖에. 1m 넘는 처마는 건평에 포함해 세금을 더 받는 어이없는 제도가 있어. 그래서 처마를 달지 않는 경우가 많아. 처마만 달면 기름값을 훨씬 더 절약할 수 있을 텐데 제도가 낭비를 부추기는 거지.

    처마는 직사광선을 막아서 사람 얼굴을 은은하게 만들어줘. 서양인은 직사광선을 좋아해 일광욕을 즐기지만 한국 여인은 볕을 가리려고 양산을 들잖아? 집 구조는 민족성향을 반영하는 건데 일괄적으로 다 없애버렸으니…. 다들 가치관이 혼란스러워 쩔쩔매는 것도 그 때문인 거 같애. 가려주는 그늘이 없으니까 다들 되바라져서 안 싸울 것도 싸워쌓고….”

    한옥에는 인격이 있다. 한옥의 모든 규칙은 인체와 직결돼 있다. 방 크기와 문 높이와 대문 너비뿐 아니라 한옥의 구조가 사는 사람의 자세를 겸허하게 만들고 마음을 집중하게 만든다. 방높이와 마루높이를 달리해서 기의 순환을 활달하게 한다.

    “인간이란 소우주가 중우주인 집에 들어앉은 것이 삶이거든. 대우주의 원칙인 천원지방에 맞게 사랑기둥은 둥글게, 안기둥은 모나게 깎지. 사람도 얼굴은 둥글고 발은 네모나잖아. 신라시대 법령 중에 방 넓이 규정이 알려진 게 있어. 백성집은 15척이고 4, 5두품은 18척, 6두품은 21척, 진골은 24척인데 기준이 되는 15는 3과 5의 곱이거든. 3은 천지인(天地人)이고 5는 신라인의 평균신장이었어. 현대건축에도 그만한 과학적, 철학적 고려가 있는지 묻고 싶어.”

    한옥에는 구들이 있다. 부뚜막과 아궁이 고래와 개자리와 굴뚝은 한옥의 대표적 특징이다. 아궁이는 식물 폐기물을 대부분 소각할 수 있다. 아궁이에 지핀 불길이 방고래를 훑으며 가다가 고래 끝에 파놓은 개자리에 이르러 잠시 맴돈다. 개자리는 고래 바닥에서 60cm 이상 움푹하게 파내려 만드는데 연기가 잠시 여기 머물다가 냉각되면서 그을음이 거기로 떨어진다. 굴뚝 밑에도 개자리가 하나 더 있어 오염물질은 다 빠지고 굴뚝을 통해서는 맑은 연기만이 배출된다.

    “공기가 어떻게 순환하는지를 알지 못하고선 구들을 놓을 수가 없어. 그렇게 과학적인 난방법을 후진이라고 다 파다 내버렸잖아. 온돌방의 윗목 아랫목은 장유유서의 예의와 질서를 훈련하는 교육장이었거든. 그게 없어지면서 우리 사회의 위계질서가 다 망가져버렸어.”

    말끝에 그는 온수 파이프를 설치하더라도 아랫목엔 촘촘하게, 윗목엔 성기게 깔아 윗목과 아랫목을 구분하면 어떠냐고 제안했다. 집구조가 그러면 어려서부터 어른 대하는 예절을 가르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방이란 더운 곳이 있으면 덜 더운 곳도 있어야지. 똑같이 뜨겁기만 하다고 평등이 아니거든. 그래서야 무슨 변화가 있고 재미가 있겠어?”

    공동체의 학습장

    한국 사람들을 잇는 은근한 정은 한옥 구조에서 나왔다는 그의 말에 동의한다.

    “생활습성이란 게 집의 구조 때문에 생기거든. 대청은 방과 방을 이어주는 공간이잖아. 대청에 다들 모여서 다듬이질도 하고 제사도 지내고 혼인도 하지. 가마솥도 혼자 먹으려고 거기다 밥하는 거 아니지? 떡시루도 마찬가지 아냐? 마당은 우리집 애만 노는 공간이 아니라 이웃집 애에게도 언제나 열려 있지. 한옥은 그 자체로 공동체 생활을 가르치는 학습장이었어. 동네 전체가 공동체나 다름없었지. 집이 아파트로 대체되면서 세상 인심이 변해버렸어.”

    경복궁에 들렀더니 신영훈 선생의 말이 귀에 쟁쟁하다. 광화문 해태상이나 근정전 앞 돌조각을 보는 눈이 전과는 아연 달라졌음을 고백한다.

    ‘목수(木壽)’ 신영훈
    김서령

    1956년 경북 안동 출생

    경북대 국문과 졸업

    중앙중 교사, ‘매일경제’ 신문·‘샘이깊은물’ 객원기자

    월간 ‘동서문학’ 신인상

    저서 : ‘김서령의 가’


    “해태 얼굴이 어수룩하게 웃고 있지? 뒤에 가서 꼬리를 한번 봐. 꼬리는 아주 힘차고 기운 충만하거든. 지키기는 지키는데 위협해서 내쫓는 게 아니라 너그럽게 웃으면서 그만 가렴, 하는 식이잖아. 돌다리 좌우의 지킴이 돌짐승을 봐. 히쭉 웃거나 혀를 낼름 내밀면서 근무를 하고 있지? 물을 타고 흐르는 나쁜 기운을 막자는 놈들인데 무섭게 위협하는 게 아니라 들어오면 재미없다고 달래는 거거든. 얼마나 다정하고 느긋해?

    그게 우리들의 원래 심성이지. 남의 나라 돌짐승들은 하나같이 눈을 부릅뜨고 얼굴에 독기가 서려 있는데 우리 건 다 웃는다고. 심지어 새끼를 가슴팍이나 등에 업고 있는 놈도 있거든.

    암수 두 놈이 마주보며 넌지시 웃고 있는데 참 절묘해. 젊은 연인들이라면 청혼할 때 거기 가서 ‘우리 이렇게 삽시다’라고 해봐. 경복궁의 또 다른 매력이고 훌륭한 고전 활용법이 되지 않겠어?”

    시인 윤제림의 ‘신영훈’이란 시가 있다.

    중화전 활래전 충효당 적멸보궁 미륵전 너와집 귀틀집 까치구멍집 / 우리 옛집 삼천 채쯤 보았다 한다 / 멋대가리 없이 쭉쭉 뻗은 / 아무나 돈만 내면 쥔이 될 수 있는 집이 아니라 / 대목장 소목장 구름처럼 모여들어/ 적송 백송 아름드리로 뚝딱뚝딱 / 육자배기 노랫가락 뽑아대며 지은 고대광실 지아비 지어미 여남은 아들 딸 함께 얼려 / 얘기하며 흥얼대며 지은 토담집 / 팔대조 귀양살이 눈물 속에 살다간 집 / 모퉁이 돌면 도발하듯 솟구치는 다락집 / 너부죽 다가 안겨오는 수간모옥 / 뒷걸음으로 떠나온 풍경이 한둘이 아니라지 / 아궁이도 굴뚝도 식어버린 빈집 / 아흔아홉 칸 집 중문간 같은 데 서서 무얼 보았을까 그는 / 돌아서 오는 고갯마루턱 / 머릿속 가슴속 온통 산신각 성황당 지으며 /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 돌무덤도 쌓으며 / 무얼 빌었을까 그는 / 삼천 채쯤의 한옥을 보며 / 삼만삼천 사람 숨을 짚으며


    파리의 고암서방에 가봐야겠다. 아니, 파리는 너무 머니 우선 강화 학사재에 들러 은은한 문살과 환한 문얼굴과 새침한 문고리를 손으로 잡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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