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과 출산이라는 힘겨운 존재의 문턱을 넘는, 혹은 넘어야 할 모든 여성은 프시케와 자청비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단지 ‘사랑’을 얻기 위해, 단지 ‘아이’를 얻기 위해 때로는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여성의 아픔은 최첨단 문명의 이기로도 쉽게 치유되지 않으니 말이다. 그녀들이 마지막으로 넘어야 할 문턱은 바로 ‘죽음’의 문턱이었다. 프시케는 아프로디테의 요구대로 하데스의 아내 페르세포네에게서 ‘아름다움의 묘약’을 얻어 오지만, 지극히 ‘여성스러운’ 유혹을 견디지 못한다. 절대로 ‘아름다움의 묘약’이 들어 있는 상자를 직접 열어봐서는 안 된다는 아프로디테의 금기를 깨뜨린 것이다. 이 묘약은 바로 ‘죽음 같은 잠’이었다. 목숨을 걸고 하계를 건너가 간신히 구해 온 비밀 상자 속에는 달콤하면서도 치명적인, 여신의 금기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정말 ‘죽음 같은 잠’에 빠지자 지금까지 팔짱 끼고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던 남편 에로스가 이제야 나선다. 아프로디테에게 용서를 구하고 아내를 구해낸 것이다. 이로써 프시케는 아프로디테가 숨겨놓은 마지막 미션, ‘죽음’을 이해하게 된다. 죽음 같은 잠을 경험함으로써 마침내 인간과 신의 경계를 뛰어넘은 프시케는 비로소 ‘여신’의 반열에 올라 에로스와 행복한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그녀가 낳은 딸의 이름은 바로 ‘기쁨(Pleasure)’이었다.
한편 천신만고 끝에 문도령의 부모를 만난 자청비는 ‘며느리 자격’을 제시하는 미래 시부모의 요구사항을 듣고 절망한다.
“내 며느리 될 사람은 쉰 자 구덩이를 파놓고, 숲 쉰 섬을 묻어 불을 피워놓고 불 위에 작두를 걸어, 칼날 위를 타나가고 타들어와야 며느릿감이 된다.”
어쩐지 자기 아들을 장가보내기 전에 모든 시어머니가 며느릿감을 향해 보내는 의심과 경계의 눈초리를 닮지 않았는가. 가련한 자청비의 운명 앞에 대성통곡하는 문도령을 뒤로한 채 자청비는 죽기를 각오하고 칼날 위에 몸을 싣는다.
자청비는 눈물로 세수하며 백릉 버선을 벗고 박씨 같은 발로 작두 위에 올라섰다. 앞으로 한 발짝 뒤로 두 발짝, 아슬아슬하게 칼날 위로 걸어 나갔다. 말할 것 없이 몇 발 못 가 숯불에 타 죽으리라 생각했는데 끝까지 무난히 타나가는 것이었다. 작두 끄트머리에 가서 내리려고 한 발을 땅에 내려디딘 순간이었다. 긴장이 조금 풀려서 그런지 작두를 디디고 있던 발뒤꿈치가 슬쩍 끊어졌다. 음부에서 피가 불끗 났다. 자청비가 속치맛자락으로 얼른 싹 쓸었더니 속치마가 더러워졌다.
-‘제주도 신화’, 175쪽
자청비는 그렇게 진정한 여성이 됐고, 제주도 신화는 바로 이 장면에 이렇게 의미를 부여한다.
“여자아이 열다섯 살이 넘어가면 다달이 몸엣것 오는 법을 마련했다.”
여성이 되기 위해 피할 수 없는 고통, 월경의 유래를 재치 있게 설명한 제주도 신화의 유머가 빛나는 대목이다. 자청비가 겪어야 한 상상초월의 고통은 월경이나 출산의 고통을 겪어본 모든 여성이 공감할 만한 대목이기도 하다. ‘일’과 ‘사랑’만으로는 정돈될 수 없는, ‘여성성’이라는 운명의 미션을, 우리는 이렇게 프시케와 자청비의 간난신고를 통해 반추할 수 있는 것이다.
아무도 도와줄 수 없는 고통, 도와준다면 그 사람에게 주어진 운명의 몫을 빼앗는 것만 같은 고통이 있다. 넘어진 아이가 혼자 일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아이가 혼자 일어서는 것을 지켜보는 마음으로, 그렇게 고통에 빠진 사람을 내버려둬야 할 때가 있다. 프시케가 에로스를 잃고 절망에 빠져 있을 때 그녀가 그를 다시 찾기 위해 거쳐야 한 모든 통과의례, 자청비가 문도령을 잃고 망연자실해 있을 때 그녀가 견뎌내야 한 수많은 시험. 바로 그런 시험의 순간들이 우리가 반드시 혼자 겪어내야 할 운명의 터닝포인트들이다. 우리는 그렇게 ‘여성’이 되고, ‘어른’이 되고,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여신’이 되기도 한다.
대부분 여성이 먼저 “여기 앉아서 우리가 지금 어디 있는지 이야기해보자”라고 말한다. 남성은 이런 것에 익숙하지 않다. 여성은 남성을 위해 진화의 매개자가 된다. 여성은 종종 남성에게 새로운 차원으로 관계를 발전시키도록 빛을 비춘다. 남성은 내심 등불을 가지고 있는 여성에게 감사한다. 남성은 자신들이 인정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여성의 빛에 의존하고 있다.
-‘신화로 읽는 여성성 She’, 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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