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5월호

위스키 증류소 세운 조지 워싱턴

위스키稅 부과로 ‘위스키반란’…대통령으로서 직접 군 지휘해 제압

  • 김원곤| 서울대 의대 교수·흉부외과 wongon@plaza.snu.ac.kr

    입력2011-04-20 15: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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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스키 증류소 세운 조지 워싱턴
    “그가 여섯 살 무렵의 일이었다. 또래의 여느 소년들처럼 개구쟁이였던 그는 아버지가 애지중지하던 정원의 어린 벚나무를 작은 손도끼로 쳐서 껍질을 벗겨내고 말았다. 결국 이 때문에 그 벚나무는 죽고 만다. 얼마 후 이를 발견한 아버지는 노발대발했고, 누가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를 알려고 했다. 무서운 분위기 속에서 워싱턴은 울면서 말했다. ‘아버지, 저는 거짓말을 할 수가 없어요. 제가 손도끼로 그렇게 했어요.’ 그러자 아버지는 어린 소년을 팔로 안으면서, ‘너의 지금 행동은 황금 잎을 가진 천 그루의 나무보다 더 가치가 있는 일이다’라고 오히려 크게 칭찬했다.”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에 관한 이 유명한 일화는 이솝우화만큼이나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워싱턴의 도덕성을 한마디로 상징하는 이 일화가, 사실은 책의 흥미를 더하기 위해 한 전기 작가가 꾸민 이야기라는 게 공공연한 사실이다. 사건의 주범(?)은 윔스(Mason Locke Weems, 1759~1825)라는 목사이자 서적 판매원이었다. 그는 미국 메릴랜드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다시 고향에 돌아와 목회 일을 했다. 그러나 생활고에 시달린 나머지 서적 외판원 일을 하면서 설교를 병행했다. 그러던 중 워싱턴이 사망한 이듬해인 1800년, 상업적인 가능성에 착안하고 워싱턴에 관한 전기(The life · Memorable Actions of George Washington)를 집필해 처음 책을 냈다. 앞서 말한 벚나무 일화는 바로 이 책의 5판(1806년)에 이르러 다른 몇몇 일화와 함께 윔스에 의해 임의로 첨가된 것이었다. 한 설(說)에 따르면, 모범적인 삶으로 별다른 일탈의 에피소드가 없는 워싱턴의 전기를 보다 재미있게 만들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벚나무 일화에 관련된 논쟁과 관계없이 워싱턴이 미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인물 중 한 사람이라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워싱턴의 ‘벚나무 사건’은 작가의 상상

    미국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는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1732~1799)은 버지니아 주의 한 마을에서 부유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워싱턴이 11세 되던 해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이복형 로렌스가 가장 구실을 하며 워싱턴의 기둥이 되어준다. 이런 로렌스마저 1752년 오랜 투병 끝에 결핵으로 사망하자 그 이듬해 워싱턴은 로렌스의 뒤를 이어 소령 계급으로 버지니아 민병대의 부대장으로 임명된다.



    그러다가 1754년 프랑스와의 영토 분쟁으로 야기된 프렌치인디언전쟁(1754~1763, 영국과 프랑스가 북아메리카에서 벌인 싸움으로, 프랑스가 인디언부족과 동맹해 영국 식민지를 공격했다)에 참전하게 된다. 참전 중 전투지휘 능력을 인정받은 워싱턴은 대령으로 진급하며 영국군과 민병대를 제외하고는 미국 땅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정식 군부대의 지휘관을 맡는다. 워싱턴은 참전 4년 만인 1758년 12월 군에서 퇴임했다. 이때 영국군과 한편이 되어 싸우면서 얻은 귀중한 경험은 훗날 영국과의 독립전쟁에서 중요한 자산이 된다. 또 전투에서 보여준 그의 리더십은 190㎝에 가까운 그의 장대한 골격과 함께 카리스마 있는 군사 지도자로 인정받는 계기가 된다.

    프렌치인디언전쟁 참전 후 고향으로 돌아간 그는 1759년 부유한 미망인 마사와 결혼한다. 이 결혼으로 그는 막대한 자산가가 돼 버지니아 주 최고 갑부 중 한 명으로 떠오른다. 이후 워싱턴은 고향에서 확고한 기반을 가진 사회적 명망가로서 안온한 삶을 즐긴다.

    그러던 중 미국 독립전쟁(1775~1787)이 시작된다. 워싱턴은 식민지군 사령관으로 취임했고, 영국과의 오랜 전쟁 끝에 결국 승리를 거둬 미국의 독립을 쟁취한다.

    독립전쟁에서 승리한 2년 후인 1789년, 새롭게 제정된 미연방 헌법에 의해 워싱턴은 투표로 미국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그리고 1797년 두 번에 걸친 임기가 끝났을 때 3선(選) 대통령 추대 움직임이 있었지만 민주주의 전통을 세워야 한다는 이유로 사양했다. 이후 그는 사저가 있는 고향 땅 마운트 버넌으로 돌아갔고, 2년 뒤인 1799년 세상을 떠난다.

    위스키 증류소 세운 조지 워싱턴

    마운트 버넌에 있는 조지 워싱턴 생가 지하실 모습.

    이상이 조지 워싱턴의 간단한 이력이다. 생전에 미국 건국에 대한 그의 영향이 컸던 만큼 오랜 세월이 흐른 오늘날에도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서부터 핵 항공모함 조지 워싱턴호에 이르기까지 그를 기리는 흔적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유명한 군사, 정치적 인물 조지 워싱턴이 위스키라는 술과 뗄 수 없는 인연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개척지 주민을 자극한 위스키稅

    조지 워싱턴과 위스키와의 첫 번째 인연은 역사적으로 ‘위스키반란(Whiskey Rebellion)’이라는 특이한 이름이 붙여진 한 사건에서 비롯된다. 1789년 미 연방헌법에 의해 조지 워싱턴을 수반으로 한 첫 연방 행정부가 출범하면서 해밀턴(Alexander Hamilton)이 초대 재무장관에 취임한다. 그는 건국 초기에 연방정부가 떠안은 막대한 빚을 해결하기 위한 세원(稅源) 확보에 고심했다. 수입관세는 이미 충분히 높다고 생각한 그는 내수 상품에 세금을 부과하기로 하고, 그 첫 대상으로 미국 국내에서 증류되고 있는 위스키를 선택했다. 해밀턴은 위스키에 대한 세금이 일종의 사치세로 조세 저항이 가장 작을 것으로 판단했고, 실제 위스키 세금을 ‘악행세(sin tax)’의 하나로 생각하는 일부 계층의 적극적인 지지도 있었다.

    그러나 1791년 정식으로 법제화된 위스키세는 곧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신생 미국의 서쪽 개척지를 이루고 있던 애팔래치아 산맥 서쪽 거주민들의 불만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애팔래치아 산맥 서부의 농부들은 소규모 위스키 증류소를 운용하면서 부수입을 올렸다. 위스키 증류는 무거운 곡물을 산맥을 넘어 동부로 운반하는 것보다 훨씬 편리하고 수익성도 높았다. 게다가 현금이 귀했던 개척지의 사정상 위스키는 거의 현금과도 같은 구실을 했기 때문에 현지 농부들은 위스키세를 사치세라기보다는 일종의 소득세로 간주했다. 동시에 새롭게 제정된 위스키세가 동부의 대규모 위스키제조업자들을 도와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위스키세는 생산량에 따르거나 고정세율 중 한 가지를 선택할 수 있게 돼 있었는데, 동부의 대규모 증류업자들은 고정세율을 선택했다. 결과적으로 애팔래치아 산맥 서부 개척지의 업자들에 비해 훨씬 적은 세금을 내게 됐다. 동부의 증류업자 대부분은 신설 위스키세에 찬성 입장을 보였다.

    또 한 가지 중요한 문제는 당시 서쪽 개척자들은 연방정부에 불만이 많았다는 점이다. 개척지에서 인디언과 벌이는 전투 상황도 여의치 않아 안전에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스페인의 지배하에 있던 미시시피 강 운항 문제에 대해서도 정부의 대처가 미흡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위스키세 부과는 그야말로 불난 집에 기름을 끼얹듯이 서쪽 개척지 거주민들을 자극했던 것이다.

    위스키세 발표 이후 서부 펜실베이니아 주를 중심으로 한 애팔래치아 산맥 서쪽 개척지 거주민들은 여러 차례 집회를 열어 위스키세에 저항했다. 이런 와중에 1791년 9월 주민들이 위스키세 세금징수원을 타르와 새털로 덮어씌운 사건이 발생했고, 범인을 체포하기 위해 영장을 들고 간 관리마저 같은 수모에 채찍질마저 당하는 일이 일어났다. 물론 개척지 거주민들은 한편으로는 위스키세의 철폐를 위해 행정적으로도 노력했다. 그 결과 1772년 5월에는 세금 감액을 주 내용으로 한 수정 법안이 통과되기도 했지만 서부 거주민들의 불만을 해소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세금징수원 저택 공격한 위스키반란

    사태가 갈수록 꼬여가면서 서부 거주민들 집회는 점점 과격파가 주도하게 됐고, 사태를 걱정한 정부에서는 해밀턴 재무장관 등 강경파의 건의에 따라 1792년 9월15일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이름으로 세금 저항을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한다. 그러나 정부 성명에 관계없이 위스키세에 대한 저항은 계속됐다. 저항은 특히 서부 펜실베이니아 지역에서 격렬하게 나타났는데 존 네빌이라는 지역 세금징수관의 허수아비를 불태우는가 하면 또 다른 곳에서는 한 세금징수관을 총으로 위협해 직책을 그만두게 만들기도 했다.

    위스키반란은 1794년 정점에 다다랐다. 그해 5월 연방보안관 데이비드 레녹스는 위스키세를 내지 않은 사람들에게 영장을 전달하기 위해 서부 펜실베이니아로 향했다. 지역 세금징수관 존 네빌의 안내로 영장 전달은 7월까지 큰 사고 없이 진행됐다. 그러던 중 7월16일 피츠버그에서 남쪽으로 10마일 정도 떨어져 있는 네빌의 농장을 총으로 무장한 과격파 용병들이 포위하는 일이 벌어졌다. 다음날 이들의 수는 600명 가까이 늘어났다. 그러나 지역 유지이자 재력가인 네빌의 집은 사전에 요새화돼 있어 쉽게 진입할 수 없었다. 게다가 인근에서 온 10명의 미국 연방군까지 합세해 대비하고 있었다. 마침내 쌍방 간 총격전이 벌어지고 소수의 희생자도 발생했다. 이 중 반군 지도자인 맥팔레인(Major James McFarlane)의 죽음은 위스키반란을 더욱 거세게 만들었다.

    위스키 증류소 세운 조지 워싱턴

    1781년 미국 독립전쟁에서 조지 워싱턴 장군에게 항복한 영국 군인들.

    1794년 8월1일 열린 집회에서는 무려 7000명가량의 인원이 모여 위스키반란 시작 이후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 대부분은 소유 토지도 없고 위스키 증류소도 운영하지 않는 빈곤층으로 실제 위스키세와는 관련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이들은 위스키반란으로 혼란한 상황을 사회에 대한 불만을 표출할 기회로 생각했고, 이 때문에 이번 사태와는 무관한 부자들이 애꿎은 피해를 보는 경우가 속출했다.

    조지 워싱턴은 위스키반란 사태가 좀처럼 가라앉지 않자 본격적인 대책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그의 기본 방침은 정부의 권위를 지키되 되도록 민중의 반발을 최소화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협상 사절을 현지에 보내 유화책을 쓰는 한편, 무력 사용이 불가피하다고 보고 진압군을 모집했다. 당시 모집된 병력은 모두 1만2950명. 당시로서는 상당한 규모였다.

    1794년 10월 이윽고 워싱턴의 총지휘 아래 진압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는 미국 역사상 현직 대통령이 직접 군사를 이끈, 처음이자 유일한 일로 기록된다. 위스키반란군은 군대의 진격 중단을 요청하면서 협상안을 내놓았지만, 워싱턴과 재무장관 해밀턴은 그럴 경우 반란이 재발할 것이라며 요청을 거부했다. 그러나 워싱턴은 진군 도중 위스키반란군의 실제 저항이 미미할 것으로 보고 중간에서 장군(General Henry Lee, 1756~1818)에게 지휘권을 넘겨주었다. 재무장관 해밀턴은 민간인 고문 자격으로 계속 진압군에 머물렀다.

    마침내 진압군이 서부 펜실베이니아에 진입하자 반란군은 순식간에 무너지고 20여 명의 주동자가 체포됐다. 그러나 폭행, 방화 등 죄질이 나쁜 2명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얼마 후 석방됐다. 이들 2명도 반역죄로 교수형을 선고받았으나 워싱턴은 이들을 사면했다.

    위스키반란은 신생 정부가 단호한 의지로 법에 대한 저항을 성공적으로 해결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당시에도 사태 해결 후 워싱턴의 정책 방향은 국민 대다수의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위스키세 자체는 시행 과정에서 문제점이 노출되면서 1800년 해밀턴의 연방당에 반대하는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의 공화당이 집권하면서 철폐됐다. 위스키반란으로 어쩌면 위스키와는 좋지 않은 추억으로 끝날 수도 있었던 워싱턴과 위스키의 인연은, 그가 만년에 위스키 증류소를 건립하면서 좋은 추억으로 전환된다.

    위스키 증류소 세운 사업가 워싱턴

    워싱턴은 사실 사업가로서도 유능한 사람이었다. 그는 상속지인 마운트 버논(버지니아 주 포토맥 강가에 있는 지역)에 1771년 석재로 큰 제분소를 지어 여기서 만든 제품을 유럽에 수출했다. 그러던 중 그의 만년에 농장 관리인인 앤더슨(James Anderson)의 건의로 제분소 옆에 위스키 증류소를 세우기로 결정한다.

    위스키 증류소는 1797년 워싱턴이 대통령직에서 떠나던 해에 완공된다. 이 증류소는 당시 미국에서 가장 큰 규모로, 1년에 위스키 1만1000갤런(약 4만1640L)을 생산했다고 한다. 워싱턴의 증류소에서 만들어진 위스키 중 대표적인 제품은 호밀 60%, 옥수수 35%, 몰트 보리 5%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증류소에서는 위스키 이외에도 다양한 과일을 사용해 브랜디를 만들기도 했다.

    1799년 워싱턴이 사망하자 제분소와 증류소는 그의 조카 루이스(Lawrence Lewis)에게 넘어가고, 다시 1808년에는 한 상인에게 임대됐다. 증류소 영업에 대한 마지막 기록도 1808년까지다. 이후 1814년 증류소 건물은 큰 화재를 당했고, 제분소 건물마저 1850년 완전히 파괴됐다.

    이후 역사적인 이 건물들을 복원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철저한 고증 끝에 최근 제분소와 증류소 건물이 재건됐다. 2층에 모두 5개의 증류기가 설치된 증류소 건물 공사는 2007년 끝났다. 현재 이들 건물은 기념품점과 함께 일반인에게 공개돼 18세기 미국 위스키 증류소의 흔적에 대한 감상과 더불어 워싱턴과 위스키의 뗄 수 없는 인연을 되새기는 좋은 계기를 만들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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