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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adership in Sports ③

빈스 롬바르디 그린베이 패커스 감독

미식축구의 역사를 새로 쓴 그라운드 위의 구도자

  • 하정민│동아일보 DBR 기자 dew@donga.com

빈스 롬바르디 그린베이 패커스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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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바르디 감독은 누구인가

그렇다면 이 NFL에서 전설적 지도자로 이름을 남긴 롬바르디 감독은 과연 누구인가. 그는 1913년 뉴욕 브루클린의 이탈리아 이민자 가정에서 5남매의 맏이로 태어났다. 당시 그의 가정을 지배했던 건 엄격한 가톨릭 문화였다. 일요일에는 반드시 미사에 참석해야 했고, 성당에 다녀온 후에는 대가족이 모두 모여 식사를 했다. 롬바르디는 어릴 때 성 마크 성당에서 복사(服事·미사를 집전하는 사제의 시중을 드는 소년)로도 활동했다. 이는 그가 훗날 구도자에 가까운 스포츠 리더가 되어 선수들에게도 영적인 힘과 믿음을 강조한 것과 무관치 않다.

1933년 그는 뉴욕 브롱스에 있는 포드햄 대학에 축구 장학금을 받고 입학한다. 청소년기에 다녔던 다른 학교들과 마찬가지로 포드햄 대학 역시 로마 가톨릭 교단의 예수회 소속 학교였다. 당시 수비수였던 롬바르디의 체격은 신장 5피트8인치(176.8㎝), 몸무게는 180파운드(약 81㎏)로 미식축구 선수치고는 체격이 작은 편이었다. 게다가 3학년 때는 경기를 하다 치아 몇 개가 부러질 정도로 큰 부상을 입어 선수로는 큰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1937년 대학을 졸업한 롬바르디 앞에 닥친 건 대공황의 후폭풍이었다. 미국 경제 전체가 휘청거리고 있던 시절이라 스타 선수도 아닌 그가 일자리를 얻는 건 쉽지 않았다. 미국 사회의 지배 계급인 앵글로색슨 혈통이 아니라는 점도 걸림돌이었다. 결국 그는 대학 졸업 후 2년을 쉬어야 했다.

1939년 그는 마침내 일자리를 구했다. 뉴욕 맨해튼의 허드슨 강 건너편에 있는 뉴저지 주 잉글우드의 성 세실리아 고등학교의 보조 코치 자리였다. 여자친구였던 마리 플래니츠와 결혼해 가정도 꾸렸다. 당시 성 세실리아 고등학교의 감독은 포드햄 대학 시절의 동문이자 쿼터백으로 활동했던 앤디 파우로 그가 롬바르디에게 일자리를 제안했다. 롬바르디는 미식축구 외에 학생들에게 라틴어, 화학, 물리학 등도 가르쳤다. 1947년에는 모교인 포드햄 대학에서 잠시 미식축구 및 농구 코치로 활동했다.



롬바르디는 1948년 미국 육군사관학교인 웨스트포인트에 부임했다. 그가 맡은 역할은 공격진 담당 코치였다. 웨스트포인트에서의 경험은 성장기에 접한 가톨릭 문화 못지않게 지도자 롬바르디의 리더십 구축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당시 웨스트포인트의 미식축구 팀 감독은 레드 블라익 대령이었다. 롬바르디는 엄격한 훈련과 규율, 질서정연함, 명예를 중시하는 군인들의 지도 방침에 완전히 매료됐다.

1954년 롬바르디 감독은 드디어 프로팀의 지도자로 부임한다. 뉴욕 자이언츠의 공격 담당 코치 자리였다. 하지만 여전히 감독(head coach)은 아니었다. 그는 뉴욕 자이언츠 코치 재직 시절 노트르담대학 등 몇몇 대학의 감독 자리에 계속 지원했으나 신통치 않았다.

그린베이 패커스에서의 기적

몇 년을 더 기다린 끝에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다. 1959년 2월 무려 48세의 나이에 그는 처음 감독으로 취임한다. 부임한 팀은 위스콘신주에 위치한 그린베이 패커스(Green Bay Packers)였다. 팀 이름에 ‘포장(pack)’에 관한 명칭이 붙은 건 창단 당시 구단주가 통조림 회사를 운영했기 때문이다. 태어나서 뉴욕, 뉴저지 인근을 벗어난 적이 거의 없는 롬바르디였지만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중서부의 한적한 시골로 가는 것을 마다할 상황이 아니었다.

1919년 창단한 그린베이 패커스는 창단 후 위스콘신의 소도시인 그린베이에서 한 번도 연고지를 바꾼 적이 없는 자부심 강한 팀이다. 게다가 시민이 주주여서 성적에 관계없이 항상 열성적인 팬을 보유하고 있었다. 영하 20℃의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활기차게 경기하는 팀으로도 유명했다. NFL은 아메리칸 리그와 내셔널 리그로 나누어 있던 시절이었고 그린베이는 내셔널 리그에 소속돼 있었다.

1959년 초 그린베이 패커스의 상황은 그야말로 암담했다. 그린베이는 1958년 시즌을 1승 10패라는 초라한 성적으로 마쳤다. 승률 10%의 팀에 소속되어 있으니 팀 분위기는 엉망이었다. 당시 팀원들은 실력도, 자신감도 부족했다. 그러나 빈스 롬바르디는 부임하자마자 이 3류 팀을 챔피언 팀으로 만들겠다고 호언장담했다.

패커스 선수들은 그의 호언장담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선수로도, 지도자로도 경력이 시원찮은 이가 감독으로 와서 도저히 이룰 수 없는 망상을 떠벌린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은 곧 달라졌다. 롬바르디는 1959년 시즌에 7승5패를 기록하며 그린베이 패커스의 승률을 60%로 끌어올렸다. 꼴찌 팀을 승률 60%의 팀으로 바꿔놓자 미식축구계의 시선도 확 달라졌다. 초보 감독은 그해의 감독상에 이름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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