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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지도자와 술 ⑮

데킬라의 아버지, 아스텍 왕국의 술 ‘풀케’

  • 김원곤| 서울대 의대 교수·흉부외과 wongon@plaza.snu.ac.kr

데킬라의 아버지, 아스텍 왕국의 술 ‘풀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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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전력을 재정비한 코르테스는 곧 반격을 시도한다. 그는 다시 틀락스칼란 원주민들과 합세해 아스텍 왕국에 대해 무자비한 공격을 펼쳤다. 코르테스 군의 공격으로 큰 피해를 당한 아스텍은 설상가상으로 그해 9월 천연두까지 창궐하면서 수많은 주민이 목숨을 잃었다. 이때 천연두는 코르테스를 잡으려는 정벌대가 상륙하면서 전파된 것으로 전해진다.

어쨌든 아스텍 왕국의 마지막 보루인 테노치티틀란에 대한 코르테스 군의 공격은 계속됐다. 그리고 1521년 8월 13일 아스텍의 마지막 왕 쿠아우테목(Cuauhte?moc·1495~1525)이 코르테스 측에 사로잡히면서 아스텍 왕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쿠아우테목은 당시 26세의 젊은 나이로 죽은 몬테수마 2세의 사촌이었다. 그는 체포당한 후 숨겨둔 보물을 찾으려는 코르테스의 혹독한 고문에 시달리다 결국 1525년 코르테스에 의해 처형되고 만다.

틀락스칼란 원주민과의 협공

아스텍 왕국을 완전히 정복한 코르테스는 이 지역을 아스텍 옛 민족 이름을 따 멕시코시티(Mexico City)로 명명하고 스페인으로의 복속을 선언한다. 이후 코르테스는 총독이 되어 1524년까지 멕시코를 지배한다. 그러나 화려한 그의 공적에 비해 그의 만년은 순탄치 못했다. 아스텍 왕국 정복 이후에도 그는 온두라스 지역으로의 진출하는 등 계속된 정복 활동을 기도했지만, 점점 강화되는 그의 입지에 불안을 느끼는 반대파의 역풍도 거세졌다. 그 공격의 선봉은 벨라스케스와 스페인 자국의 식민지 행정 책임자였던 후안 로드리게스(Juan Rodr?iguez de Fonseca·1451~1524) 주교였다. 코르테스는 이들의 모함을 피하기 위해, 당시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5세(Carlos V·1500~1558)에게 직접 결백을 주장하는 서한을 보내기도 했지만 역부족임을 깨닫는다.

결국 코르테스는 아메리카 대륙의 뉴스페인 총독 자리에서 파면됐고, 1528년 스페인으로 소환된다. 스페인으로 돌아온 코르테스는 왕을 설득한 끝에 뉴스페인 정복에 대한 그의 공적을 인정받았고, 마침내 1530년에 재차 멕시코 땅으로 건너간다. 이후 캘리포니아 만(灣) 등을 발견한 그는 1541년에 다시 스페인으로 귀국한다.



코르테스는 생전에 많은 재산을 모았지만 대부분 아메리카 대륙 탐험과 정복 활동에 쓰느라 만년에는 거의 파산 상태에 이르렀다. 그는 이런 곤경에서 벗어나고자 1544년 스페인 왕실에 공적에 대한 보상을 정식으로 청구했지만 아무런 대가 없이 3년간 허송세월했다. 실망한 그는 결국 1547년 다시 멕시코로 가던 중 지금의 세르비아 근처에서 폐렴으로 파란만장했던 생을 마감한다. 그의 나이 62세였다.

코르테스 군에 의해 정복된 아스텍 왕국의 역사는 제대로 된 기록이 없어 아직 많은 부분이 의문으로 남아 있다. 아스텍 왕국의 중심을 이룬 부족인 멕시카(Mexica)족은 나후아틀(Nahuatl)이라는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이었는데, 6세기경부터 지금의 멕시코 북부 지역에서 멕시코 중앙부(메소아메리카 지역)로 이동해온 것으로 추정한다. 1325년에 테노치티틀란(오늘날의 멕시코시티)이란 늪지 안의 섬에 새로운 수도를 만들었는데, 아스텍 전설에 의하면 당시 이 섬에서 선인장 위에서 뱀을 잡아먹고 있는 독수리를 보고 이곳을 신이 내린 땅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 전설이 바탕이 된 상징 그림은 멕시코의 국가 문장이 됐고, 오늘날 멕시코 국기 중앙에 자리 잡고 있다.

1440년 40세의 나이로 아스텍 왕으로 즉위한 몬테수마 1세(Moctezuma I·재위기간 1440~1468)는 아스텍 왕국의 기틀을 확실하게 마련한 지도자였다. 그는 적극적인 팽창 정책을 추진해 주변 부족들과 잇달아 전쟁을 치렀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틀락스칼라(Tlaxcala) 계곡에 살고 있는 부족과의 전쟁으로 강한 적대 관계를 형성하게 됐다. 훗날 코르테스가 아스텍을 공격할 때 틀락스칼란 원주민들이 그를 도운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용설란(龍舌蘭) ‘아가베’

아스텍을 점령한 스페인 정복자들에게 아스텍 문화와 사회 모습은 매우 생소한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이러한 아스텍 문화가 하나님을 모르는 미개한 원주민들의 우매한 관습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었겠지만, 어쨌든 정복자들도 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했다.

그런데 그들에게 재미있는 술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바로 ‘풀케(pulke)’ 또는 ‘옥틀리(Octli)’라고 하는 토속주였다. 이 술은 멕시코 일대에 자생하는 아가베(agave·용설란)라는 식물을 원료로 만든 것이었다. 아가베는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멕시코 선인장으로 잘못 알려져 있는 경우가 많지만 이 둘은 엄연히 다른 종류의 식물이다. 아가베는 멕시코 원산으로 키가 1m 이상 자라는 상록다년초다. 잎의 가장자리에 날카로운 가시가 있는데 그 모양이 전설의 동물인 용의 혀와 닮았다고 해 동양에서는 용설란(龍舌蘭)이라고 명명됐다. 아가베는 10여 년 동안 꽃을 피우지 않는다. 세인은 다소 과장을 섞어 ‘100년에 1번 꽃이 핀다’고 소개하고 있고, 실제 세기(100년) 식물(century plant)이라는 별명이 생겼다.

아가베에서는 아구아미엘(aguamiel·꿀물)이라는 10% 정도의 천연 당을 포함한 즙이 분비되는데, 이 즙에 자연 속에 존재하는 천연 효모가 작용하면 저절로 발효가 일어나 풀케가 만들어진다. 풀케는 멕시코 중앙부에서 아스텍 왕국이 형성되기 이전인 서기 200년 전후부터 원주민들이 음용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풀케가 자연 상태에서 저절로 만들어질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는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던 것이 아스텍인들이 멕시코 중앙부로 이동하고 난 뒤인 1171~1291년 사이에 처음으로 아가베 즙을 이용해 풀케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후 풀케는 알코올이 주는 신비한(?) 효험 때문에 주로 종교·국가 의식에 사용됐다. 당시 아스텍 부족에게는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의식이 있었는데, 이때 의식을 집행하는 제사관들뿐만 아니라 희생자들에게도 곧 닥쳐올 죽음의 공포를 덜어주기 위해 풀케를 마시게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이유로 풀케는 왕이나 제사장 등 국가 지도자들 이외 사람들에게는 아주 특별한 날을 제외하고는 음주가 엄격히 금지됐다.

풀케는 그 후 오랫동안 아스텍인의 문화에 스며들었다. 그들의 신화 속에도 오메토트크틀리(Ometotchtli·‘두 마리 토끼’라는 뜻)라는 주신(酒神)과 풀케의 탄생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아스텍을 정복한 코르테스도 이 풀케를 보고 독특하면서 매우 신기한 술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가 당시 처음으로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5세에게 보낸 보고 편지에서 풀케에 대해 알렸고, 풀케 샘플을 스페인 본국으로 보내려 했지만 냉장장치 없이 알코올 농도가 4~8%로 낮은 술을 운반할 수도 없었다.

독특한 향에 시큼한 맛을 지닌 풀케가 스페인 정복자들의 입맛에 맞을 리는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당시 멕시코에는 포도가 없어 와인을 만들어 마실 수도 없는 상황이어서 그들은 풀케를 증류해 마시기 쉽게 만들려고 했다. 이렇게 알코올 도수 낮은 발효주인 풀케를 높은 도수의 증류주로 만들려는 시도는 152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 바로 데킬라의 형제 격인 메즈칼(Mezcal)이라는 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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