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7월호

문제아(問題兒)들이 외치는 성공의 노래

프리스타일 랩 그룹 브레이커 Z

  • 이의철│인턴기자 eclee.el@gmail.com

    입력2012-06-21 13: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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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제아(問題兒)들이 외치는 성공의 노래
    초여름 더위가 한창이던 5월 말, 두 명의 프리스타일 힙합가수가 경기외고 어머니회 앞에 섰다. 스피커에서는 피아노 전주가 흘러나온다. 아토르와 아툼라가 등장한다. 아직은 어색함이 묻어난다. 리듬이 빨라지며 비트가 강해진다. 그들의 표정이 바뀐다. 브레이커 Z가 가슴속에 있는 노래를 토해낸다.

    “저 푸른 바다 하얀 비둘기의 날개처럼, 우리들은 가리라 콜럼버스처럼. 아픈 시련, 고통 있지만 괜찮아, 그 실패 속에 배움이 있다. 이 시련, 이 고통이 추억이 되고, 나를 더 발전하게 해주는 계기가 된다.”

    그들은 학생들과 어머니들을 위해 노래한다. 학생들에게 그들의 길을 가라고, 어머니들에게는 그 길을 믿어주라고 한다.

    “우리 아이들이 성공하길 바래? 아이들에게 희망을 주세요. 진정 하고 싶은 것을 하며 행복하게 사는 것, 점수의 노예가 되지 말고, 나 자신의 이름을 믿고 세상에 내 발자국을 찍으면서 간다. 세상에 내 이름을 알린다.”

    공연이 막바지로 치달으며 열기가 더해진다. “돈에 미쳐 돌아가는 세상, 하지만 우리들은 의미에 미쳐. 아이들에게 힘과 용기를 심어주는 아토르와 아툼라가 되리라. 브레이커 Z는 용기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지, 믿음과 자신감을 심어주지. 네 자신을 믿어라. 브레이커 Z.”



    아툼라 켄트김(40)과 아토르 송기환(19)으로 구성된 브레이커 Z는 10대 청소년들의 꿈과 삶, 그리고 제도권 교육과 자살 문제에 관해 노래한다. 그들은 힘들었던 과거가 있었기에 청소년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들은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던 ‘문제 청소년’이었다. 지금은 어려웠던 시절을 잘 극복하고, 전국의 학교를 돌며 같은 고민을 하는 아이들과 그들의 부모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강연과 공연을 하고 있다.

    나는 ‘자살 실패자’다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토르 송기환의 웃음은 밝았다. 항상 긍정적이고 싶다는 그는 사실 ‘자살 실패자’다. 서울의 한 국제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극단적인 결심을 할 정도로 그의 모든 것이 무너졌다고 한다. 무엇이 그를 6층 높이의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리게 했을까?

    그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인 일곱 살이 되던 해, 그의 부모님은 이혼했다. 여느 이혼가정과 같이 불화 때문이었다. 평소 그의 아버지는 평범한 가장이었지만, 술을 마시면 난폭하게 변했다. 손찌검도 잦았다. 아버지가 술을 마시고 늦게 오는 날 어머니는 그와 함께 근처 여관방으로 가 잠을 잤다. 그의 어머니는 이런 날이 반복되자 더 견디지 못하고 이혼을 결심했고 이혼 후 사라졌다.

    그가 불행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아껴주는 할머니가 있었다. 아버지도 마음을 다잡고 술을 끊었다. 중학교 때는 우등생이었다. 그가 중학교에 들어가자 아버지는 공부를 시켰다. 처음에는 방법을 몰라 헤맸지만 곧 공부에 재미를 붙였다. 그는 어느덧 반에서 5등, 1등을 거쳐 전교에서도 1등을 하는 ‘공부를 잘하는’ 학생으로 변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만족하지 않았다. 1등을 하고 오면 만점을 요구했다. 실수가 용납되지 않았다. 99점을 맞아오면 나머지 1점이 문제가 됐다. 그는 지쳐만 갔다.

    중학교 3년이 지나고 고등학교 진학을 고민하던 그는 모 국제고에 대해 알게 됐다. 특수목적고등학교였다. 일반 고등학교보다 일류 대학을 가는 데 유리할 것 같았다. 기숙사 학교여서 공부를 강요하는 아버지를 피해 달아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좋은 기회라고 여겼다. 탈출하고 싶었다. 가정 형편은 좋지 않았지만 그는 할머니를 졸라 국제고에 입학했다.

    국제고 시절은 그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크고 작은 문제가 계속됐다. 고교 수업은 중학교 때와는 전혀 달랐다. 따라갈 수가 없었다. 동기들은 수업 내용을 학원에서 먼저 다 배워왔다. 학원을 다닐 형편이 되지 못한 그에게는 학교 수업이 전부였다. 하지만 수업은 ‘뛰어난’ 학생들을 기준으로 이뤄졌다. 그에게는 너무나 어려운 내용이었다. 성적은 계속 떨어졌고, 중학교 시절 1등을 했던 기억은 잊혔다. 한번 뒤처지자 공부에서 점점 멀어졌다.

    친구들과도 잘 지내지 못했다. 성적이 떨어지면서 성격마저 어둡게 변했다. 친구들이 장난을 쳐도 장난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됐다. 이런 그를 보고 같은 반 학우들은 꼬투리를 잡기 시작했다. 한번 시작된 ‘왕따’는 심해져만 갔다. 가학적인 괴롭힘이 이어졌다. 하루는 친구의 부모가 사다준 간식을 먹지 않자 그 친구가 “우리 부모가 사준 간식이 더러우냐, 왜 먹지 않느냐”며 화를 냈다. 더 이상 견디기 힘들었다.

    상담을 받기 위해 선생님을 찾아갔다. 처음 몇 번은 선생님도 관심을 가지고 들어주었지만 횟수가 점차 잦아지자 문제가 생겼다. ‘불평과 불만만 가득 찬 문제아 송기환’으로 낙인찍힌 것이다. 더 이상 마음 편히 선생님을 찾을 수도 없었다. 아무도 그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벼랑 끝에 선 심정이었던 그는 결심을 했다. 모든 것을 지우고 싶었다. 방법은 딱 하나 자살이었다. 가정불화, 뒤처지는 학업, 왕따. 이 모든 문제는 그가 해결하기에 너무나 벅찼다. 지난해 2월이었다. 그가 아버지와 난투극을 벌이고 정신병원에 다녀온 지 수개월이 지난 뒤였다. 6층짜리 건물의 옥상으로 올라갔다. 하늘을 바라보았다. 미련도, 두려움도, 돌아갈 곳도 없었다. 그에겐 잃을 것이 없었다. 뛰어내렸다.

    그가 눈을 뜬 곳은 병원이었다. 바닥에 바로 떨어지지 않고 아래 있던 자동차 범퍼에 부딪혀 살 수 있었던 것. 하지만 그 순간 그는 자살마저 성공하지 못한 처참한 실패자였다. 6주 후 복학했지만 학교에서는 그에게 자퇴를 권유했다. 씁쓸할 것도 없었다. 그는 아무도 믿고 있지 않았다. 한 달 후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갔고 5일 만에 자퇴했다. 그리고 아툼라 켄트김 씨를 찾아간다.

    만화를 좋아한 꼴통 문제아

    켄트김 씨의 한국 이름은 김형섭이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가며 켄트김이 되었다. 그 역시 미국에 있을 때 자살을 생각했다고 한다. 경제적으로 힘들었고, 무엇을 위해 사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어린 시절 역시 평탄하지 않았다. 초등학교 3학년 때 그가 보는 앞에서 어머니가 폭행을 당했다. 낯선 사람들이 어머니를 때렸다. 그의 전부와도 같았던 어머니에게 가해진 폭행, 큰 충격이었다. 얼마 후 어머니는 이혼을 하고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세 살배기 어린 여동생과 남겨진 아홉 살 아이는 만화영화가 좋았다. 당시 그가 즐겨 봤던 만화영화는 ‘플란더스의 개’와 ‘은하철도 999’. 고아인 주인공이 나오고, 어머니를 찾아 떠난다는 내용이었다. 꼭 그의 이야기 같았다. 떠난 어머니를 결코 잊을 수 없었다. 그는 “저 만화의 주인공들처럼 나도 꼭 커서 어머니를 찾으러 가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 어머니가 있는 친구들을 다 미워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유 없이 아이들과 싸웠다. 약해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에겐 자신을 지켜줄 어머니가 없었다. 그는 다른 어머니들이 자기 자녀에게 “저 아이랑 놀지 마”라고 했던 문제아였다고 고백했다. 중학교 시절도 나아질 것은 없었다. 사랑을 받아야 할 시기에 어머니 없이 7년을 살았다. 성격은 점점 괴팍해졌다. 만화영화를 좋아하던 아이는 사라지고 어느덧 화면 가득 피가 낭자한 공포영화를 더 좋아하는 괴물이 그의 마음속에 자라났다. “당시의 저는 미쳤던 것 같아요,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습니다.”

    감수성이 풍부하던 중학교 3학년 때, 그의 아버지는 재혼을 했다. 그는 미국에 가서 어머니랑 살겠다고 했다. “네가 미국 가서 뭐 하려고?” 오기가 생겼다. 순간 어릴 적 봤던 하버드대학교가 떠올랐다. “하버드나 가죠.” “네가? 미쳤어? 미국에서 태어나도 가기 힘들다는 하버드를 네가 무슨 수로?” 아버지의 이런 말이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화가 났다. 어떻게든 하버드에 가겠다고 다짐했다.

    문제아(問題兒)들이 외치는 성공의 노래

    브레이커 Z가 경기외고 어머니회 앞에서 프리스타일 랩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

    “어머니가 날 하버드로 보냈다”

    미국에서는 가난과 싸워야 했다고 한다. 하루하루를 견뎠다. 그가 막 미국에 도착했을 때, 오랜만에 만난 어머니는 돈을 벌기 위해 한국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2주만 기다리라고 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다섯 달이 지나서야 돌아왔다. 비자에 문제가 생겼던 것이다. 혼자 살아남아야 했다.

    그는 그 시절 미국에서 있었던 씁쓸했던 에피소드를 웃으며 소개했다.

    “유대인 집주인이 저에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화가 많이 난 표정이었습니다. 이때 보통 뭐라고 하나요? 당시 저는 영어를 못했어요. 알고 있는 영어가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웃으면서 ‘땡큐’라고 했죠. 어이가 없었는지 멍한 표정으로 그냥 가더라고요. 알고 보니 집세를 내라고 독촉한 거였어요. 또 다른 사건도 있어요. 어느 날 전화국에서 전화가 왔어요. 못하는 영어를 쥐어짜며 통화를 하는데 많이 답답했나 봐요. 그 사람이 너희 집에서 영어를 가장 잘하는 사람을 바꿔 달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한마디했습니다. ‘아이 엠 더 베스트.’ 그러니까 전화를 끊더군요. 그리고 다음 날로 집 전화가 끊겼습니다. 하하하.”

    하루는 너무 지친 나머지 여동생에게 “오빠는 힘들어서 못살겠다. 죽어야겠어”라고 말했다고 한다. 어떻게 죽을지 고민하던 시기였다. 그 말을 들은 동생은 울면서 집을 뛰쳐나갔다. 그 길로 마트에 달려간 동생이 조그만 카드를 사와서 몽당연필로 “오빠야 죽지 마. 사랑해. 해나가”라고 써줬다고 한다.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았다.

    그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서 공부를 했다고 한다. 하버드에 가겠다는 오기 하나만 있었다. 그가 대학에 갈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이런 절박함과 어머니의 믿음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그의 어머니는 사람들 앞에서 “우리 아들은 하버드에 갈 것”이라고 당당하게 말했다고 한다. 하루는 너무 부끄러워 “아직 간 것도 아닌데 말하지 말아달라”고 부탁을 하자 “넌 이미 (하버드에) 간 거야. 엄마는 그렇게 믿고 있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하버드에 가지 않을 수 없었다.

    하버드대학 시절 그는 1만 명의 유명 인사에게 편지를 썼다. 위대한 멘토들에게 성공에 대해 배우고 싶었다. 많은 사람이 직접 답장을 해줬고 그 일화로 ‘1만 명에게 편지를 써라’라는 책을 썼다고 한다. 그는 경제학을 전공했지만 만화를 그렸고, 공부법에 대한 강의를 했다. 지금은 교육 전문 인터넷 신문 와이즈맘을 운영하고 있다.

    한 사람을 살린 운명 같은 만남

    스무 살가량 차이가 나는 두 사람이 만나게 된 것은 당시 중·고등학교 강연을 활발하게 다니고 있던 켄트김 씨가 기환이가 다니던 국제고에 강연을 오면서였다. 2010년 여름 기환이가 다니던 국제고는 글로벌 리더 특강을 열면서 김 씨를 강사로 초청했다. 이미 TV에서 김 씨의 특강을 들었던 기환이는 강연 내내 믿음과 희망을 이야기하는 김 씨에게 푹 빠졌다. 일류 대학에 가는 게 전부가 아니라고 했다.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삶을 찾으라고도 했다. 강연 중 많은 학생이 눈물을 흘렸다. 그동안 아무도 꿈을 꾸라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꿈은 대학 이후로 미루어야 했던 짐이었다.

    한 시간의 강연이 끝나고 모두 돌아갔다. 하지만 기환이는 여운을 지울 수가 없었다. 공부를 하기 위해 책을 폈을 때 돌아간 줄 알았던 김 씨가 다시 나타났다. 강연 내내 힘들고 지쳤던 마음을 솔직하게 드러낸 학생들을 차마 그냥 두고 갈 수가 없었다고 했다. 학생 한 명 한 명과 악수하고 대화를 나누었다. 꼭 꿈을 향해 미쳐보라고 했다. 기환이는 그 메시지를 놓치지 않았다. 얼마 후 김 씨에게 만나고 싶다고 연락을 했고 함께 봉사활동을 가기도 했다. 하지만 기환이가 방황을 하면서 둘사이 연락은 끊겼다.

    문제아(問題兒)들이 외치는 성공의 노래
    기환이는 자퇴한 후 지난해 9월 자신이 겪은 일과 자살 시도를 했던 이야기를 모두 써서 김 씨에게 전했다. 김 씨는 바로 찾아오라고 했다. 다음달 두 사람은 김 씨가 운영하는 봉사단체 엠티를 함께 가게 되었다. 함께 가던 차 안에서 김 씨는 기환이에게 희망의 씨앗을 뿌렸다. “너는 한번 끝을 봤다. 이렇게 돌아온 것은 기적 같은 일이다. 뭐든지 할 수 있을 거다. 함께 해보자.”

    이렇게 시작된 둘의 인연은 기환이가 김 씨가 하던 많은 활동에 참여하며 점점 깊어졌다. 대한민국의 어머니들을 에디슨의 현명한 어머니와 같이 바꾸겠다는 취지의 교육 전문 인터넷 뉴스인 와이즈맘의 기자로 활동하고, 봉사특공대에서 봉사활동도 꾸준히 참여했다. 김 씨의 강연에도 함께 다녔다. 그때 김 씨는 기환이가 틈틈이 연습하던 힙합에 주목했다.

    사실 기환이는 중학교 때부터 국내외 유명 힙합 가수들의 노래를 따라 하며 꿈을 키울 정도로 힙합에 미쳐 있었다. 그는 친구들과 함께 동네 무대에 올라 공연도 했다. 무대 위에서는 힘든 것도 무서울 것도 없었다고 한다. 김 씨는 자신과 기환이의 진실된 마음을 학생들이 좋아하는 힙합을 통해 전달하면 깊은 공감을 자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해보자. 재미있는 공연이 될 거야.” 그렇게 브레이커 Z는 탄생했다.

    꿈을 향해 전진하라

    지난 5월 25일 브레이커 Z의 ‘천재를 만드는 부모님, 바보를 만드는 부모님’이란 강연이 예정된 고양외국어고로 가는 차 안, 아툼라와 아토르의 대화는 끊이지 않았다. 주된 내용은 한국의 교육제도와 청소년 문제, 자살 증가에 따른 대책 등이었다. 하버드대 졸업생과 고등학교 중퇴생이라는 다른 배경을 가진 두 사람이지만 함께하는 동안 어느덧 가족 이상의 공감대가 있어 보였다. 그 둘은 입을 맞춰 행복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한국 교육은 줄 세우기예요. 경쟁에서 이기지 않으면 실패했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고 싶은 일을 찾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경쟁만을 강조하면 자살같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돼요. 우리가 그랬거든요. 하지만 약간 생각을 바꾸면 행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기환이가 바로 그 예예요.”

    음악 이야기도 빠질 수 없었다. 기환이는 흥분한 표정으로 잠시 후 있을 공연에 대해 이야기했다. “켄트김 선생님의 강연이 끝나고 나면 브레이커 Z는 프리스타일 랩 두 곡을 할 거예요. 저희 곡인 ‘Row Forward’를 하는 것도 좋지만 그곳에 계신 분들의 이야기를 끌어낼 수 있는 프리스타일 랩이 더 재미있을 거예요. 다 같이 일어나서 신나게 놀 수 있으면 좋겠어요.”

    학교에 도착하자 강연이 시작됐다. 김 씨는 아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자신만의 방법을 담담하게 풀어나갔다. “저는 소년원에서 200명의 아이 앞에서 강연을 합니다. 이 아이들을 믿어주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었으면 소년원에 들어가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그 아이들에게 너희를 믿는다고 했습니다. 나와서 갈 곳이 없으면 꼭 찾아오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200명의 아이가‘네 형님’하고 소리를 쳤어요. 제 등 뒤에 믿음직한 200명의 동생이 생겼어요. 너무 큰 힘이 됩니다.”

    어머니와 헤어져 방황했던 이야기, 어머니가 암으로 돌아가시기 직전, 아들의 손을 꼭 잡고 “너무 고맙고 사랑한다”고 한 이야기를 하자, 강의실을 꽉 채운 어머니들은 연신 눈물을 훔쳤다. “그래도 저희 어머니께서는 저를 끝까지 믿어주셨습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의 아이들을 믿어주셔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아이가 아닌 다른 아이들도 믿어주셔야 합니다. 내 아이만 소중한 게 아닙니다. 모든 아이가 소중합니다.”

    그는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강연을 끝냈다. “작년에 몸이 좋지 않아 병원에 갔습니다. 선종(腺腫)이 나왔어요. 이 선종이 나중에 암이 된다고 합니다. 만약 제가 앞으로 1년밖에 살지 못한다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죽음이 두렵지는 않습니다. 다만 무엇을 할까 고민하겠습니다. 하고 싶은 것을 하십시오. 감사합니다.”

    강연과 공연의 마리아주

    강연이 끝나고, 그가 변신할 차례였다. “선글라스, 선글라스 가져다 줘요. 공연해야 합니다.” 하버드대를 졸업한 켄트김은 사라지고 브레이커 Z가 나올 차례였다. 차분했던 강연장도 사라지고 프리스타일 랩으로 하나 되는 공연장이 나타났다. 나이가 많은 어머니도, 교장선생님도 다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치며 하나가 됐다. 브레이커 Z가 전한 메시지는 하나, 아이들을 믿어주고, 그 꿈을 위해 나아가는데 힘을 실어주자는 것이었다.

    공연이 끝나자 어머니들은 마치 10대 소녀 팬처럼 뛰어나가 브레이커 Z와 기념 촬영을 했다. 두 곡의 프리스타일 랩 공연을 한 7분은 마법의 시간이었다. 사인을 받아가는 어머니, 손을 잡아보는 어머니, 앞으로 꼭 자신의 아이와 대화를 더 해보겠다고 말하는 어머니 등 강연과 공연이 있던 한 시간 반 동안 눈에 보이는 변화가 일어났다.

    가장 먼저 일어나 열띤 호응을 하던 한 학부모는 “강연에서 랩이 나올 줄은 기대하지 못했다”며 특색 있어서 무척 좋았다고 했다. 아이에게 무엇을 해주어야 할지 몰라 막연한 불안함이 있었지만 강연과 공연이 끝난 뒤 그런 불안감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아이가 여행 작가가 되고 싶어 해요. 이제 다른 걱정은 하지 않기로 했어요. 믿어주고, 무엇이든 자신이 하는 일을 후회 없이 즐길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해요. 아이를 위해 좋은 멘토를 찾아줘야겠어요.”

    고양외고를 뒤로하고 나오며 김 씨와 기환이는 이날 공연을 반추했다. “오늘 공연은 어땠어?” “오늘은 반응이 조금 약했어요.” “아무래도 어머니들이라 조금 얌전하셨지.” 어느 인기가수 콘서트 못지않게 열정적으로 보였던 공연도 그들에게는 부족했던 것이다.

    진심으로 외치는 믿음의 힘

    “학생들 앞에서 공연을 하면 그 에너지가 속된 말로 ‘장난’이 아니에요. 아이들에게는 분출구가 필요해요. 자신들의 열정을 쏟아낼 곳이 필요하지만,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공부만을 강요해요. (아이들이) 정말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게 도와야 해요.”

    프리스타일 랩을 하다보니 그때그때 틀리기도 하고, 리듬을 놓치기도 한다. 하지만 완벽한 랩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순간 느끼는 감정과 내면의 목소리를 담아서 분출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저희 공연은 교육에 관한 강연과 함께 합니다. 강연을 하면서 청중이 어떤 내용에 집중하는지 그 느낌을 봐요. 그리고 그곳에 있는 분들과 상황에 맞춰 랩을 합니다. 똑같은 공연은 있을 수가 없죠.” 그래도 꼭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을 것 같다고 물었다. 기환이는 “자기 자신을 믿고 꿈을 향해 나아가라는 것”이 공연의 핵심이라고 했다.

    브레이커 Z의 다음 계획은 세계 각국의 언어로 랩을 만드는 것. 현재 ‘왕따 아리랑’이란 곡을 영어, 일본어, 중국어 등으로 번역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다양한 언어를 섞어 만든 노래로 전 세계의 청소년에게 희망을 전하고 싶다고 한다. “기환이와 제가 한 고민이 같았어요. 세계 각국의 아이들도 같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들에게 저희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요.”

    틈나는 대로 랩을 연습하며 곡 작업을 하고 있다는 기환이는 아직 배워야 할 것이 많다고 한다. “틈틈이 연습해요. 새로 나온 곡도 놓치지 않고 듣고요. 브레이커 Z는 화려한 랩을 뽐내지는 않지만 마음에 닿는 말을 프리스타일 랩에 담아야 해요. 그래서 평소 연습이 가장 중요합니다.” 두 사람이 함께 차를 타고 이동할 때 차 안은 항상 연습실로 변한다.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큰 성공은 ‘자살 실패’라는 두 명의 브레이커 Z. 천둥의 신을 의미하는 아토르와 아툼라라는 이름처럼 그들의 노래가 세상에 우렁차게 울리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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