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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장 ⑨

헌 상 고쳐주며 나주반 원형 살려낸 소반장 김춘식

“목공예의 꽃은 바로 소반 사람에 대한 배려가 담겨 있죠”

  • 한경심│한국문화평론가 icecreamhan@empas.com

헌 상 고쳐주며 나주반 원형 살려낸 소반장 김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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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 상 고쳐주며 나주반 원형 살려낸 소반장 김춘식

나주시 죽림동 공방에서. 재래식 작업대는 비록 작지만 여기서 장롱도 거뜬히 짜낸다.

“기술자들은 월급제가 아니라 상을 만든 숫자만큼 품삯을 받는 도급제로 일해 비록 기술이 출중하다 해도 시간 들여 정성껏 만들기는 힘들었죠. 그리고 이미 그때 제대로 만드는 전통 목수를 찾기가 힘들었습니다.”

그 역시 밥벌이로 ‘장따래기 상’을 만들어 파는 목물상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주반을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찾아 왔다.

“공방을 시작한 지 몇 년 되지 않아 서울에서 손님이 왔어요. 집안에 아주 멋진 제상(祭床)이 있었는데, 당숙이 가져가버렸대요. 그 상이 나주서 만든 상이니 그와 똑 같은 상을 만들어달라고 저를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다리마다 용이 휘감고 올라와 상판에 이르러 두 마리씩 마주 보는 모양을 한 상을 재현해낼 기술자를 찾기는 어려웠다. 서울 손님은 기술자 찾는 경비로 쓰라며 500원을 맡기면서까지 그에게 매달렸고, 그날부터 그는 장인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때 전통 나주반을 만드는 장인을 여럿 소개받았는데, 나주반의 마지막 장인이라고 할 이운연 선생에게도 부탁을 넣었다.

“제가 아는 허일만이라는 목수가 이 선생님댁과 사돈지간이라며 부탁해보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그때 이 선생님 연세가 아주 고령이라 도저히 일할 상태는 아니었고, 허일만 씨가 ‘선생님 말년의 역작을 남기시라, 일이 힘드시면 지시만 하시고 일은 제가 하겠다’고 해도 거절하셨답니다.”



이운연은 일제강점기 조선 예술에 빠졌던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가 조선을 돌아다니며 공예품과 장인들을 찾아다니던 1920년대에 쓴 글에도 등장하는 인물이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이운연과 그의 부친인 이석규를 만나는 자리에 있던 어린아이를 보며 이 아이가 과연 자라서 아버지의 뒤를 이을 수 있을지, 조선 공예의 맥을 이을 수 있을지 염려했다. 야나기의 걱정대로 이운연의 아들 이민섭 씨는 대를 잇지 못했다.

“이민섭 씨는 고등학교 때 일본으로 유학 갔다가 나중에 철도공무원이 됐는데 상 만들던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부끄러워해서 그런 사실을 숨겼대요. 그런데 나중에 그분 선배가 일본에 가서 야나기 무네요시의 자료를 보고 와서 ‘나주반 명인으로 자네 할아버지와 아버지 기록이 남아 있더라’는 말을 듣고 비로소 공예의 가치를 알게 됐답니다. 이민섭 씨가 나중에 제게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맥을 잘 이어달라고 당부하더군요.”

‘나주반의 맥을 이어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는 1980년대 초였고, 문제의 ‘제사상’을 짤 장인을 찾아 헤맬 때는 1960년대 초, 젊은 목물상인 김춘식은 아무런 기술도 갖고 있지 못한 때였다.

“그런데 그 뒤로도 서울에서 교수니 사장이니 하는 모모한 분들이 나주반을 구한다며 저를 자꾸 찾아왔어요. 그래서 저도 점점 나주반에 빠지게 된 거죠.”

그런데 서울 손님의 주문은 어떻게 됐나? “지금 내 실력이라면 어떻게든 만들어냈을 텐데, 당시로서는 서울 손님의 숙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고 그는 아쉬워한다. 하지만 그 숙제가 인연이 되어 그는 제대로 된 나주반 찾기에 나서 마침내 직접 나주반을 만드는 장인이 되었으니 서울 손님의 숙제는 오랜 세월 뒤 다른 방식으로 풀린 셈이다.



나주반의 마지막 장인 장인태를 모시다

그가 운영하는 공방에는 기술자가 많았지만 나주반을 제대로 만드는 사람을 만나기는 어려웠다. 그는 우선 나주반의 원형부터 찾아보기로 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한 가지 꾀를 냈다. 헌 상 고치는 일을 시작한 것이다.

“헌 상을 해체해서 때를 벗겨내고 곱게 다듬어 제대로 조립해주는 일을 했습니다. 워낙 정성 들여 해주니 소문이 나서 헌 상이란 헌 상은 죄다 모여들었지요. 닭이 1000마리면 그중에 학도 있고 봉(鳳)도 있다는 말이 있잖습니까. 쇠못으로 대충 박은 엉터리 상이 많지만 가끔은 좋은 상도 만나게 마련이거든요.”

헌 상을 고치는 일은 여러모로 이득이었다. 다양한 종류의 상을 접할 수 있었고, 해체해서 다시 조립하는 과정에서 상의 구조를 잘 파악하게 되어 기술이 그만큼 빨리 늘었다. 그리고 헌 상을 고쳐주고 받는 보수 역시 짭짤했다. 그의 공방에서는 기술자들이 ‘장따래기 상’을 열심히 만들었지만 정작 사장인 그는 나주 영산포의 헛간을 빌려 헌 상을 분해하고 다듬고 보수하고 조립하는 일을 했다. 물론 자신이 거느리고 있는 기술자에게 물어가면서. 그렇게 10년 넘게 고치고 연구하다 보니 어느덧 나주반을 직접 짤 정도로 실력이 늘었다. 그래도 그는 늘 나주반을 제대로 짜는 옛 장인을 수소문했다. 그가 채용한(또는 모신) 기술자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장인태 장인이다.

“이운연 선생의 아드님인 이민섭 씨가 장인태 어른 이야기를 해주었어요. 여름방학 때 일본에서 고향에 돌아와 지낼 때 할아버지와 아버지 공방에서 일하는 장인태 장인을 봤다고요.”

그런데 막상 장인태 장인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기술 좋은 목수들이 대개 그렇듯 장인태 역시 역마살이 심했다. 나주 출신인 장인태는 영광에서 주로 활동했는데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는 홍길동’ 같은 이로 한곳에 진득하니 붙어 있지 못하는 사람으로 유명했다. 그런 그를 김춘식 장인은 ‘3년간이나 모셨다’고 한다.

“늘 술을 마시면서 위장약도 함께 드시곤 했죠. 나중에 아들네에 다녀오겠노라고 가시더니 석 달이 지나도 종무소식이어서 제가 직접 대전으로 찾아갔더니 글쎄, 돌아가신 뒤더라고요. 위암이었다고 해요.”

단순하고 세련된 선, 튼튼한 구조의 나주반

장인태 장인은 다른 사람이 상을 세 개 만들 때 겨우 하나 만들까 말까 할 정도로 나주반을 제대로 만드는 이였다. 아마도 정확하고 프로 정신까지 갖춘 마지막 전통 목수 세대였을 것이다. 김춘식이 장인태를 모신 시절은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였다. 그때 김춘식은 이미 나주반을 재현하는 데 성공했을 정도로 기술을 익혔지만, 그는 “장인태 장인은 대패질부터 달랐다”고 기억한다. 그런 장인태 장인이 죽기 전 3년 동안 김춘식 장인에게 옛 목수의 전통을 전해줌으로써 이석규와 이운연, 장인태, 김춘식으로 이어지는 나주반의 전통은 맥을 이을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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