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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라이벌 ⑥

현대 정주영 VS 삼성 이병철

한국 경제부흥의 쌍두마차

  • 박상하| 저자 psangha1215@hanmail.net

현대 정주영 VS 삼성 이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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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정주영 VS 삼성 이병철
휴교 중인 학교 교실을 소독한 뒤 페인트칠을 하고, 바닥에 널빤지를 깔아 천막을 쳐서 숙소를 만드는 작업이었다. 정주영은 잠을 하루 3시간으로 줄여가며 눈코 뜰 새 없는 강행군을 계속했다. 결국 약속한 한 달 안에 미군 10만 명의 임시 숙소를 뚝딱 만들어냈다.

정주영의 뚝심에 감명 받은 미군 측은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 당선자와 유엔(UN) 사절단이 참배할 부산 유엔군 묘지 보수 작업을 위해 그를 다시 불렀다. 한겨울이던 그때 미군은 유엔군 묘지 언덕을 푸른 잔디로 깔아달라고 주문했다.

참배일이 겨우 닷새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정주영은 고심했다. 자신 있다고 큰소리치긴 했으나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중도에 포기할 수도 없어 머리를 쥐어짰다. 그러던 중 문득 어린 시절 고향에서 봤던 청보리밭이 떠올랐다.

정주영은 곧바로 트럭 30대를 동원해 부산 인근의 농촌으로 달려가 파랗게 싹을 틔운 청보리 포기들을 떠다 유엔군 묘지에 옮겨 심었다. 한겨울 황량하던 묘지 언덕이 청 보리가 싹트면서 푸른 잔디로 변해가자 미군 관계자들은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우며 감탄했다. 이들은 앞으로 미군의 건설 공사를 정주영의 현대건설에 맡기겠다고 약조하기도 했다. 한겨울의 청보리 잔디는 오직 그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콜럼버스의 달걀’이었던 것이다.

한편 이병철은 창원 정미소를 정리한 뒤 대구에서 삼성상회와 함께 조선양조를 경영하다, 광복이 되자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 종로구 종로 2가에 사무실을 얻어 삼성물산공사를 설립한 그는 오징어와 한천(寒天) 따위를 수출하고 면사를 수입하는 무역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서울로 상경한 지 3년여 만에 제법 자리를 잡아가던 이병철에게도 6·25전쟁은 피할 수없는 시련이었다. 그는 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고 빈털터리가 되어 대구로 피신한다. 대구에 도착한 이병철은 뜻밖의 얘기를 듣는다. 그동안 조선양조의 이익금이 3억 원(당시 1달러는 2원)가량 비축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생각지도 않은 거액을 손에 쥔 이병철은 부산에서 옛 임직원들과 함께 삼성물산주식회사를 새로이 설립하고 재기에 나선다. 그리고 1년 만에 무려 17배로 키워내는 기적과도 같은 성장을 이뤄낸다. 이병철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 바 있다.

“우선 서울에서 무역을 하던 경험을 살려 공급이 가장 달리는 생필품을 하나하나 조사했는데 달리지 않는 물자란 하나도 없을 정도였다. 전쟁과 함께 국내 물자가 잿더미가 되고 생산 능력이 마비된 데다 전시 인플레로 물가가 엄청나게 치솟기 시작하자 정부로서도 관·민수 할 것 없이 당장 수입을 촉진하지 않을 수 없는 실정이었다. 이 당시 부산에서의 사업 경쟁이란 자금 동원 능력과 기동력 싸움이나 다름없었다. 자금 동원력은 우리를 능가하는 상사가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기동력만큼은 삼성물산이 타사의 추종을 불허했었다고 자부한다. 경황없이 1년을 보내고 결산해 보니 3억 원의 밑천이 장부상으로나마 무려 17배 넘게 불어나 있었다.”

이쯤 되자 이병철은 생각이 깊어졌다. 무역업만으로 만족할 수 없어서다.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은 시점이었지만 그는 제조업에 도전하기로 결심하고 1953년 제일제당에 이어 이듬해 제일모직을 설립했다. 두 회사는 단숨에 국내 기업 순위 앞자리를 차지했다. 이전까지 작은 연못에 사는 송사리에 불과하던 그가 고래만한 경성방직의 김연수 등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것이다.

벼룩의 교훈 vs 이발사의 장인정신

젊은 날 정주영이 쌀가게에 취직하기 전의 얘기다. 서울에 아무런 연고가 없던 그는 친구 오인보에게 50전을 빌려 인천으로 향했다. 인천에서 정주영은 한동안 막노동판을 전전했다. 정박한 선박에서 무거운 짐을 등으로 지어 나르는 하역 일을 하며 함바(飯場·현장 합숙소)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함바에서는 들끓는 빈대 때문에 도무지 잠을 잘 수 없는 지경이었다. 견디다 못한 몇몇이 빈대를 피해 테이블 위로 올라가 잠을 청했는데, 이번에는 빈대가 테이블 다리를 타고 기어올라가 사람들을 물어뜯었다. 함바 노동자들은 머리를 짜내어 테이블의 네 다리 끝에 물을 담은 양재기를 하나씩 고여놓고 잠을 청했다.

그러나 편안한 잠은 겨우 이틀 만에 끝나고 말았다. 테이블 다리를 타고 기어오르려다 양재기 물에 몽땅 빠져 죽었어야 할 빈대들이 다시금 극성을 부렸다. 사람들은 빈대들이 도대체 테이블 위에서 자는 노동자를 무슨 수로 괴롭힌 것인지 불을 켜고 지켜보다 아연실색했다. 테이블 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게 불가능해진 빈대들이 일제히 벽을 타고 천장으로 까맣게 몰려가 천장에서 테이블에 누워 있는 사람의 몸으로 ‘낙하’했던 것이다. 정주영은 생전에 이를 일컬어 ‘빈대의 교훈’이라고 표현했다.

“하물며 보잘것없는 빈대도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머리를 쓰고, 죽을힘을 다해 원하는 바를 끝내 얻어내지 않는가.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도 빈대한테서 배울 점이 있다면 배우자. 무슨 일이든 중도에 포기하지 아니하고 그야말로 죽을힘을 다해 노력한다면 이루지 못할 게 없다는 걸 말이다.”

1950년 2월 이병철은 천우사의 전택보, 대한전선의 설경동 등 재계 주요 인사 15명과 함께 제2차 세계대전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일본 도쿄로 향했다. 방문 목적은 일본 경제계 시찰로 일본 점령군 사령부의 초청에 의한 것이었으나, 실은 한국과의 교역을 통해 경제 부흥을 도모하려는 일본 경제계 인사들의 제안으로 이뤄진 방문이었다. 그래서인지 이때까지만 해도 패전국 일본의 경제는 생각보다 더 어려웠다. 하네다 공항에서 도쿄 중심부에 이르는 길에는 판잣집이 즐비했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제국의 중무기를 생산하던 가와사키중공업은 미 공군의 폭격을 받아 공장 건물의 골격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이병철은 가로등조차 켜지지 않은 도쿄의 아카사카 골목길을 걷다 한 이발소 안으로 들어섰다. 가위질을 하던 중년의 주인에게 이병철은 별다른 생각 없이 말을 건넸다.

“이발 일은 언제부터 하셨나요?”

“제가 3대쨉니다. 가업이 된 지 60년쯤 되나봅니다. 자식 놈도 이어줬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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