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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은 거리에서 마구잡이로 여성을 체포해 위안소에 넣었다”

위안부 강제동원 자료 공개 정진성 서울대 교수

  • 송화선 기자│spring@donga.com

“일본군은 거리에서 마구잡이로 여성을 체포해 위안소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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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은 거리에서 마구잡이로 여성을 체포해 위안소에 넣었다”
“처음 ‘정신대’라는 용어가 쓰인 건,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한국인 대부분이 여성을 성적으로 강제동원한 제도를 정신대라고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누가 정신대로 끌려가는 걸 피하려고 서둘러 결혼했다더라’ ‘면사무소 직원이나 순사가 찾아와서 정신대에 끌고 갔다더라’ 하는 이야기를 흔히 들었으니까요.”

하지만 정신대(挺身隊)는 본디 ‘자발적으로 몸을 바치는 무리’라는 뜻. 일제가 무상으로 노동력을 동원하기 위해 만든 제도다. 1940년대 일제는 ‘정신대’라는 이름 아래 수많은 조선 남녀를 강제 노동에 동원했다. 이들 중 일부 여성이 사기와 강제로 인해 일본군의 ‘성노예’가 된 것이다. ‘위안부’라는 용어는 이러한 성적 강제동원 피해자를 공장 등에서 근무한 여느 정신대 피해자와 구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일본에서는 이미 그런 여성을 ‘종군위안부’라고 부르고 있었어요. 1940년대 일본군 문서에도 ‘위안부(comfort girl)’라는 단어가 등장하지요.”

막상 ‘위안부’라는 단어가 쓰이기 시작하자 비판의 목소리도 나왔다. 여성이 전쟁 상황에서 강제적으로 당한 성적 피해를 ‘남성에 대한 위안(慰安)’으로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었다. 피해자들의 노예적인 상황을 표현하는 ‘성노예’라는 단어가 더 적절하다는 의견이 이때부터 제기됐다. 그러나 이미 사회 전반에 ‘위안부’라는 용어가 급속히 퍼져가고 있었다. 정 교수는 “문제 해결에 힘을 모아야 하는 상황인데 용어를 바꾸면 불필요한 혼란만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위안부라는 말을 그냥 쓰기로 했다”고 회고했다.

“다만 일본이 쓰는 ‘종군’이라는 접두어만큼은 떼야 했어요. ‘자발적으로 따라 다닌다’는 느낌을 풍기니까요. 그 대신 만들어진 용어가 ‘일본군위안부’입니다. 1993년 우리 정부가 피해자를 돕기 위해 제정한 법 이름을 ‘일제하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생활안정지원법’으로 정하면서 이 용어는 국내에서 공식적인 것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정 교수의 설명에서 알 수 있듯, 우리 사회에서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건 1990년대 이후의 일이다. 1990년 ‘정대협’이 출범하면서 비로소 유언비어처럼 떠돌던 ‘정신대’ 이야기가 공식적인 역사로 받아들여졌고, 비로소 가해자 처벌과 피해자에 대한 배상 요구가 일기 시작했다. 정 교수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전후처리 문제가 국제적인 관심을 모았을 때 우리 정부와 사회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에게 관심을 기울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한다”고 털어놓았다.

그에 따르면 일본은 종전 직후 군위안부 강제동원 문제로 형사 책임을 진 사례가 있다. 1946년 인도네시아의 바타비아에서 열린 군사법정에서 일본인 12명이 네덜란드 여성 35명을 강제로 위안소에 데려가 성노예로 사용한 것에 대한 재판을 받은 것. 당시 네덜란드령이던 인도네시아 스마란 섬이 일본군에 점령되면서 발생한 일이다. 이 재판에서는 관련자 9명에게 유죄판결이 내려졌고, 특히 가장 직급이 높은 장교 한 명에 대해서는 사형이 집행됐다. ‘강제 성매매를 위한 부녀자 유괴(abduction of girls and women for forced prostitution)’와 ‘성매매 강요(coercion to prostitution)’ 등의 죄목이 인정됐다. 그러나 정작 우리나라와 대만 등 일본군위안부 문제로 가장 큰 피해를 당한 나라에서는 이러한 단죄가 이뤄지지 않았다. 현재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군위안소 문제에 관한 모든 민사 또는 형사사건은 시효규정이 적용돼 더 이상 소를 제기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상태다. 1952년 샌프란시스코 조약과 1965년의 한일협정으로 이 문제에 대한 개인의 배상청구권은 소멸됐다는 주장도 편다. 그러나 정 교수는 “둘 다 말이 안 되는 이야기”라고 잘라 말했다.

“인도에 반한 죄와 전쟁범죄는 공소시효의 대상이 아니에요. 게다가 일본 정부가 군위안소 설치 및 관리에 관여했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건 1990년대의 일입니다. 샌프란시스코 조약과 한일협정 체결 당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의지가 전혀 없는 상태였는데, 이제 와서 그 조약으로 모든 문제가 정리됐다고 주장하는 건 어불성설이지요.”

꼼꼼하고 집요하게

정 교수는 “일본이 1940년대에 저지른 범죄를 1993년 이른바 ‘고노 담화’로 모호하게 시인하기까지 50년이 걸렸다. 여러 피해자의 용기 있는 증언과 국내외 연구자·시민단체의 노력이 없었다면 그나마 불가능했을 일”이라며 “그런데도 국가의 지도적인 정치인이 몇 년에 한 번씩 망언을 내놓고, 심지어 ‘고노 담화’ 폐지 주장까지 들고 나오는 모습을 보며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많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이번 도쿄지방법원의 판결에 대해 일본 정부가 항소하면 최종판결까지는 1~2년이 더 걸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은 정의가 승리할 겁니다. 일본 정부가 위안부 문제의 진상을 밝히고, 잘못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며, 피해자들에게 법적인 배상을 할 때까지, 더 꼼꼼하고 집요하게 그들의 책임을 추궁할 겁니다.”

정 교수의 각오다.

신동아 2012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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