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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연구

“나를 윤이상 같은 변절자와 비교하지 말라”

북한이 버린 천재 음악가 정추 1923~2013

  • 송홍근 기자 | carrot@donga.com

“나를 윤이상 같은 변절자와 비교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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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부터 북한에서는 김일성 주도로 반(反)종파 투쟁이 일어났다. 남로당파에 이어 소련계, 옌안계를 숙청하면서 정추, 김원균 같은 유학생을 상대로도 사상 검열을 했다. 정추를 비롯한 일부 유학생은 ‘반종파 투쟁은 김일성 우상화로 가는 길이며, 그것은 스탈린주의의 우상숭배와 다를 게 없다’고 결론지은 후 반(反)김일성 시위를 조직했다.

정추는 1957년 모스크바에서 벌어진 시위의 주동자 중 하나였다. 북한 당국은 모스크바 유학생 전원을 평양으로 소환해 조사를 벌였다. 김원균은 이 과정에서 평양으로 되돌아갔다. 정의롭지 못한 권력에 저항한 음악가(정추)는 불우했고, 권력 품에 안긴 작곡가(김원균)는 영예를 누렸다. 정추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김일성이 소련계도 잡고, 옌안계도 잡고, 갑산계도 잡고, 남쪽에서 온 사람들도 다 잡아버렸어요. 소련계 한인 허가이는 6·25전쟁 때 김일성이 하는 일을 마뜩잖게 여겼어요. 허가이는 그 나름의 힘을 가진 인물이었어요. 허가이가 김일성을 제압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죠. 결과적으로 허가이는 김일성을 살려 놨는데, 김일성이 허가이를 죽여버린 겁니다. 허가이는 1953년 자살했고, 박헌영은 1955년 사형선고를 받았죠. 나 같은 경우는 모스크바에서 쫓겨나 평양으로 붙들려 갈 뻔했고요. 시위를 주도한 데다 남조선에서 왔으니 평양에 갔다면 죽었을지도 몰라요.”

反김일성 시위 주도

정준채도 권력투쟁 과정에서 숙청됐다.



“형님이 1956년에 평양에서 최승희 무용극을 영화로 찍었습니다. 그런데 녹음장치 같은 것이 제대로 준비가 안 됐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북한 당국이 형님을 모스크바에 보냈습니다. 모스크바에서 필름을 현상하고 편집하느라 2~3개월 머무른 뒤 평양으로 돌아갔어요. 형이 모스크바에 왔을 때 소련은 들떠 있었습니다. 또 다른 혁명의 시기였죠. 선생들이 스탈린의 잘못을 하나둘씩 폭로했습니다. 학생들도 그것에 호응해 별의별 이야기를 다 했고요. 우리 음대만 해도 미학 선생인 완슬라브 교수가 스탈린 탓에 무고한 시민 수천만 명이 죽었다는 얘기를 해줬습니다.

그런데 스탈린이 한 짓이 김일성이랑 비슷한 거 아닙니까. 형이 그런 분위기를 지켜본 후 평양으로 돌아갈 때 내가 비행장까지 나가 전송을 했습니다. 북한에서는 아무도 모르는 소식을 형은 모스크바에서 다 알고 간 것 아닙니까. 그 뒤로 형과 연락이 닿지 않았습니다. 수년 후에 ‘조선영화’라는 잡지를 보니 남쪽에서 형이 데리고 올라간 사람들의 이름이 다 빠져 있더군요. 물론 정준채라는 이름도 없었고요. 그렇게 해서 형이 숙청됐다는 것을 알게 됐죠. 형은 물론이고 형수와 5∼6명 되던 조카들마저 모두 검덕수용소로 갔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는데, 확실한 행방은 몰라요.”

“나를 윤이상 같은 변절자와 비교하지 말라”

정추는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50년 넘게 망명객으로 살았다.

북한은 소련 당국에 정추를 체포해 송환해달라고 요구했으나 소련 당국은 절충안을 제시했다. 당시는 소련계 숙청 등으로 북한-소련 관계가 경색됐을 때다. 북한은 “흐루시초프의 소련이 수정주의 노선을 걷고 있다”고 비판했다.

소련 당국은 정추를 북한에 송환하는 대신 알마티로 ‘유배’를 보냈다. 반(半)백년 넘는 망명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수일간의 기차 여행 끝에 톈산(天山)산맥 아래 도시, 아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는 알마티에 도착했어요. 이방인으로서의 삶은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北 애국가는 주체사상 찬송가”

북한의 영웅 김원균에 대한 그의 감정은 곱지 않았다.

“김원균은 별명이 ‘사또’였어요. 유학 시절 함께 어울려 다녔죠. 나와 그치의 운명이 갈린 것은 김일성 우상화 반대 시위 때죠. 나는 조국 독립을 고민하는 과정에서 사회주의자가 됐지만, 스탈린주의는 옳지 않다고 여겼어요. 스탈린이 죽고 흐루시초프가 집권하면서 소련에서 스탈린 격하운동이 벌어졌습니다. 그 과정에서 북한의 김일성 우상화 행태에 대한 비판적 여론이 모스크바 유학생 사이에서 확산됐죠.

김원균은 내가 김일성 반대 연설할 때 현장에 있기는 했어요. 그런데 김원균이 방학 때 북한 유학생들에게 잠깐 평양에 다녀와야 한다고 꾀었던 모양입니다. 다른 학생들이 걱정하지 않게 집도, 책도 두고 몸만 잠깐 갔다 오면 된다면서 평양으로 데리고 갔어요. 유학생을 대상으로 포로수용소에서 하는 것처럼 한 명씩 사상 검토를 했다고 합니다. 김일성 비판이 옳다는 사람들은 다 잡아 가뒀고요. 김원균은 소련에 유학 온 김일성의 조카딸에게 연인 감정을 갖고 있었어요. 조카딸은 공부도 못하고 러시아말도 서툴렀습니다. 김원균이 김일성의 충복 노릇을 한 것은 ‘김원균평양음악대학’이란 명칭으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아침은 빛나라 이 강산’으로 시작하는 북한 ‘애국가’는 완전히 찬송가예요. 그도 그럴 것이 주체사상은 세계 10대 종교 중 하나 아닌가요? 주체사상에 딱 맞는 찬송가가 ‘애국가’인 거예요.

김원균의 실력이요? 실력은 무슨, 뭐 어디 음악학교에 다닌 적도 없고, 일제강점기 에 독실한 기독교인이어서 찬송가나 알고 있는 형편이었어요. 다만 그치가 작곡한 ‘김일성 장군의 노래’는 나쁘지 않아요. 나름대로 잘 만들었습니다. 북한 당국이 김원균을 주제로 한 영화를 제작해 김원균과 나를 비교한 적도 있습니다. 하나는 김일성 반대해서 여기 남고, 하나는 김일성 찬양해서 그리로 돌아가고…. 그 사람은 아마도 평양에서 최고의 영예는 다 받았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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