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호

“내가 한국판 마타하리? 딱 한 남자만 사랑했다”

첫 탈북 위장 남파 女간첩 원정화

  • 한상진 기자│ greenfish@donga.com

    입력2013-10-17 16: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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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한국판 마타하리? 딱 한 남자만 사랑했다”

    2008년 9월 10일 수원지방법원에서 열린 첫 재판 때의 여간첩 원정화.

    2008년 7월 15일, 한 탈북여성이 간첩혐의로 검거됐다. 이름 원정화, 나이 35세, 미모의 젊은 여성이었다. 수사를 지휘한 검찰은 원 씨를 ‘최초의 탈북 위장 남파간첩’이라고 소개했다.

    검찰의 발표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검찰에 따르면, 북한 보위부 소속으로 2001년 남파된 원 씨는 탈북자로 위장해 중국, 북한 등을 수시로 드나들며 간첩활동을 벌였다. 재중 북한 국가안전보위부(이하 보위부)의 도움을 받아 대북무역회사를 운영하면서 공작금을 마련했고, 성(性)을 매개로 다수의 군인 등을 포섭, 군사정보를 빼내 북한으로 보냈다.

    언론은 원 씨를 ‘한국판 마타하리’라고 불렀다. 원 씨는 간첩죄 등이 인정돼 5년형을 선고받았고 지난 7월 만기 출소했다.

    ‘신동아’는 지난 9월부터 원 씨를 여러 차례 인터뷰했다. 직접 만나서 장시간 대화를 나눴고, 수시로 전화 인터뷰도 했다. 출소 이후 원 씨는 경찰과 검찰의 보호관찰을 받고 있다. 9월 중순부터 최근까지 그의 전화번호는 3번이나 바뀌었다.

    원 씨는 인터뷰를 하기에 앞서 ‘신동아’ 기사(2008년 10월호 ‘여간첩 원정화 2007년 미공개 인터뷰’) 등 자신과 관계된 많은 언론보도에 불만을 토로했다. 사실을 왜곡하고 명예를 훼손했다는 것이다. 원 씨는 이번 인터뷰를 통해 자신에 대해 잘못 알려진 내용이 바로잡히기를 희망한다는 뜻을 밝혔다.



    “죗값 받아야죠”

    ▼ 출소 이후 어떻게 지냈습니까.

    “정부의 도움을 받아 지내고 있어요. 며칠에 한 번씩 경찰에 가서 보호관찰 조사를 받아요. 누굴 만나는지, 어떤 대화를 나누는지 모두 보고해요. 귀찮지만 다 저를 위한 일이니까 감수해야죠. 혹시 모를 테러 가능성 때문에 경찰 관계자들이 고생하고 있어요.”

    ▼ 딸이 있는 걸로 아는데.

    “한국에 들어올 때 배 속에 있던 아이예요. 구속돼 있는 동안 대한민국 정부가 도움을 줘서 건강하게 잘 컸어요, 고맙죠.”

    ▼ 교도소 생활은 힘들지 않았나요.

    “독방에 있다보니 외로웠어요. 그래도 편안하게 잘 지냈어요. 책, 특히 역사책을 많이 읽었어요.”

    ▼ 5년형을 받은 뒤 항소를 포기했는데.

    “대한민국 정부에 죄를 많이 지었잖아요. 죗값을 받아야죠.”

    2008년 재판 당시 원 씨는 법원에 전향서를 냈다. 이런 내용이었다.

    ‘북한에서 태어나 우상화와 주체사상만을 배우고 수령님과 장군님을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쳐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그래서 강한 훈련도 참고 견디었습니다. 당의 방침, 장군님의 방침이 하늘인 줄 알고, 조국에 돌아가면 명예와 혜택을 얻을 수 있다는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일했습니다. (…) 한국에 살면서 제가 저지른 죄가 얼마나 큰지, 김일성 김정일 체제가 얼마나 잘못됐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 저에게는 7살 된 딸밖에 없습니다. 다시 태어나게 해주신다면 대한민국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이바지하겠습니다.’

    ▼ 이제 완전히 전향한 건가요.

    “그럼요. 체포 직후 북한이 내놓은 입장을 보고 충격 받았어요. 청춘을 다 바쳐 조국을 위해 일했는데, 조국은 저를 버렸어요. 당시 북한이 내놓은 입장은 입에 담기도 싫어요.”

    원 씨 사건 당시 북한 노동신문은 이런 내용의 논평을 낸 바 있다.

    ‘원정화는 나라와 인민의 반역자이며 돈과 재물을 탐내고 협잡에 미친 인간추물이다. 남조선이 이런 여인한테 간첩 모자를 씌우는 것은 완전히 음모이며 이런 거짓말을 꾸며내고 또 이를 조선 국가안전보위부와 연결시키는 것은 조선의 존엄과 체제에 대한 모독이다. 조선은 이를 절대로 간과하지 않을 것이다.’

    “조국이 나를 버렸다”

    그렇다면 원정화 씨는 어떤 인물일까. 검찰의 수사결과와 공소장에 따르면, 원 씨는 1974년 함경북도 청진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남파간첩이었는데 그녀가 태어나던 해 남파 과정에서 한국군에게 사살됐다. 원 씨 가족은 국가유공자로 풍족한 삶을 살았다. 원 씨는 고등중학교에 다니던 1989년 15세의 나이로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이하 사로청)에 발탁됐고, 공작원 양성기관인 금성정치대학에서 교육받았다. 1998년부터 보위부 소속으로 중국에서 외화벌이·정보활동을 시작했다. 탈북자 관련 사업을 하는 한국인, 일본인 등 100여 명을 납치·북송했다. 2001년 보위부의 지령을 받고 남파됐다.

    하지만 원 씨가 구속될 당시 많은 사람이 수사기관 발표에 의문을 던졌다. 특히 원 씨의 북한 내 행적을 의심하는 목소리가 많았다. 검찰은 이러한 의혹에 대해서도 조목조목 입장을 내놨다.

    “원정화가 자백한 부분에 대하여 검찰·경찰·기무사·국정원이 각 국내외, 북한, 군 관련 보강증거 수집에 만전을 기하였음. 원정화 자백에 대한 보강증거로는, 원정화 행적과 관련된 수십 명의 참고인 진술, 출입국조회, 통화내역, 감청자료, 계좌추적, 환전내역, 북한산 약품 등 각종 압수물, 현장검증, 관계기관의 북한 관련 자료 등 다양한 객관적 자료가 확보됨.”(‘원정화 사건 관련 일부 언론 보도에 대한 검찰의 입장’, 2008년 9월 4일)

    원 씨 수사에는 검찰과 경찰, 기무사령부와 국가정보원이 참여했다. 검찰은 수사결과를 발표하면서 2005년경부터 3년간 원씨를 내사했다고 밝혔다. 탈북여성이 대북무역을 하고 군 장교들과 교제하는 점을 수상하게 여겨 내사를 벌였다는 것이다.

    ▼ 수사기관이 내사하고 있다는 걸 몰랐습니까.

    “전혀 몰랐어요.”

    ▼ 3년이나 내사를 했다는 얘기를 듣고 어땠어요.

    “놀랐죠. 검찰조사를 받다보니 제가 중국에 갈 때에도 수사기관 사람들이 번갈아가면서 미행했더라고요. 14번 중 6번이나 미행했다는 거예요. 조사받을 때도 제가 혐의를 부인할 때마다 검찰이 사진을 하나씩 꺼내놓는 식이었어요. 중국에서 상부와 만나 밥 먹는 사진 같은 걸.”

    ▼ 혐의를 부인하기 어려웠겠네요.

    “며칠간 묵비권을 행사하다가 포기했죠. 중국에서 미행할 때 상부(단둥 보위부 대표부) 사무실이 있는 압록강호텔에 방을 잡고 저를 감시했다는 말을 듣고는 완전히 포기했죠. 체포 당시 수사기관은 저의 한국 내 활동을 거의 완벽하게 알고 있었어요.”

    ▼ 보위부 단둥 대표부가 압록강호텔에 있었나요.

    “그 호텔 3층에 있었어요. 거기서 남파교육을 받았어요. 수사기관 사람들은 4층에 방을 잡았었다고 해요. 사건이 터진 뒤 단둥 대표부는 철수했다고 들었어요. 검찰에 체포되어 가보니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사람이 많았어요. 식당에서 옆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 공항으로 가는 리무진 버스에서 제 옆에 앉았던 사람이 다 경찰수사관이었어요. 나중에 그분들께 ‘정말 고생하셨네요’라고 인사했죠(웃음).”

    ▼ 체포 당시 상황은.

    “아침 7시쯤 초인종이 울렸어요. 누구냐고 물으니 경찰이라는 거예요. 창문으로 내다보니 10명 넘는 사람이 문에 붙어 있는 게 보이더라고요. 계속 버티다가 ‘대화나 좀 하자’고 해서 문을 열어줬어요.”

    ▼ 바로 체포됐나요.

    “갑자기 15명 정도가 들이닥쳤어요. 여경 등 몇 사람이 저를 붙잡고 다른 사람들은 압수수색을 시작했죠. 싹 다 가져갔어요. 경찰병원으로 연행돼 신체조사도 받았어요. 자살도구 같은 걸 몸에 숨기지 않았는지 조사한다면서.”

    ▼ 어떤 것들이 압수됐나요.

    “단둥 대표부와 주고받은 서류, 북한에 송금한 내역, 컴퓨터 하드디스크 등등.”

    “내가 한국판 마타하리? 딱 한 남자만 사랑했다”

    2008년 8월 27일 검찰이 공개한 원정화 씨의 사진.



    탈북자 위장 위해 임신

    원 씨에 대한 내사는 그의 집에서 일하던 조선족 가정부의 제보로 시작됐다. 이 여성은 경찰을 찾아가 “원 씨가 수시로 중국의 북한대사관을 드나들고 탈북자답지 않게 씀씀이가 크다”고 알렸다. 나중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 조선족 여성은 가정부로 일하는 동안 원 씨로부터 여러 차례 폭행을 당했고, 그 앙갚음으로 고발한 것이었다. 원 씨는 “하도 거짓말을 많이 해서 두 번 때렸다”고 말했다.

    ▼ 남파될 때 어떤 지령을 받았습니까.

    “미군기지 위치와 인근 지리를 확인하고 사진을 찍는 거였어요. 그 일만 끝내고 돌아갈 생각이었죠. 한 달가량 용산, 동두천, 평택 등을 다니면서 미군 부대 위치를 파악하고 사진을 찍고 지도를 그렸어요. 시간이 나면 서울 관광도 하고.”

    ▼ 한국에 어떻게 입국했나요.

    “위조여권을 만들어서 들어왔어요. 한국 사람과 위장결혼을 하는 식으로.”

    ▼ 대한민국의 첫인상은.

    “평양보다 못하다는 느낌, 생각보다 도시가 더럽다는 느낌, 서울역에서 노숙자들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 그런데 왜 곧바로 중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나요.

    “다 제 잘못이에요. 중국에서 만난 딸아이 아빠가 한국 사람인데, 그 사람을 잠깐 만나러 갔다가 일이 꼬였어요. 북한 사람인 제가 한국에 있는 걸 보고는 그 사람이 깜짝 놀라서 신고한 거죠. 그 때문에 출국이 어렵게 됐어요. 어쩔 수 없이 탈북자로 신분을 위장해 자수했죠.”

    ▼ 상부에 보고는 했나요.

    “전화를 걸어서 ‘이러저러해서 탄로가 났다’고 설명했어요. ‘정화 동무는 무슨 일을 그렇게 하냐’고 엄청 욕먹었어요.”

    ▼ 탈북자로 위장하라는 것도 상부의 지시였나요.

    “그렇죠. 상부에서 별도 지시가 있을 때까지 남한에 머물라고 했어요. 대신 중국에 있는 가족들은 편히 살 수 있게 해주겠다고.”

    ▼ 탈북자 합동조사를 받았을 텐데, 의심 안 받았어요?

    “당시 제가 임신 7개월이었는데도 수갑을 차고 엄청 심하게 조사 받았어요. 국정원 조사관들은 저를 정상적인 탈북자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돈도 많고 고생한 흔적도 없었으니까. 자수 당시 가지고 있던 옷이며 화장품이 전부 일본제여서 더 그랬어요. 저는 저 나름대로 의심을 풀려고 엄청 노력했죠. 그래서 불가피하게 거짓말을 많이 했어요. 북한에서 아연을 훔쳐서 중국으로 나오게 됐다는 말도 그래서 나온 거예요.”

    검찰은 수사결과 발표 당시 원 씨의 북한-중국 내 행적을 설명하면서 원 씨가 북한에서 친구와 함께 아연 5t을 절도한 뒤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되자 중국으로 넘어갔고, 중국에서 보위부에 포섭됐다고 밝힌 바 있다.

    ▼ 탈북자로 위장을 위해 일부러 임신했나요.

    “네. 수월하게 들어오려고.”

    ▼ 가족들은 모두 북한에 있나요.

    “1998년 중국으로 발령을 받은 뒤 어머니와 동생도 중국으로 나왔어요. 제가 한국에 들어온 뒤에는 다시 북한으로 들어갔고요. 그런데 제 사건이 터진 뒤 가족이 모두 숙청됐다고 들었어요.”

    ▼ 같이 구속됐다 무죄로 풀려난 양아버지 소식은 들었나요.

    “연락처는 아는데 연락을 못하고 있어요. 충격을 많이 받으셨어요, 저 때문에. 너무 미안해요.”

    원 씨의 양아버지 김OO 씨는 원 씨가 구속된 직후 역시 간첩혐의로 체포됐다. 간첩인 원 씨에게 10억 원 상당을 제공하고 재중 보위부 공작원을 만나 금품을 제공한 등의 혐의였다. 검찰은 그에게 12년형을 구형했지만, 이듬해 김 씨는 무죄로 석방됐다. 간첩혐의를 입증할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였다. 원 씨에 따르면, 김 씨는 평양미술대학을 졸업하고 정찰국 소좌를 지냈으며 김정일 훈장도 받았다. 김영남 최고인민위원회 상임위원장과 사돈 간이다.

    군 부대에서 北 찬양

    “내가 한국판 마타하리? 딱 한 남자만 사랑했다”

    2008년 검찰이 공개한 원정화 씨 결혼식 사진. 장소는 중국이다.

    ▼ 북한으로 돌아가려고 애쓰진 않았나요.

    “돌아가고 싶은데 상부에서는 계속 기다리라고만 했어요. 그러다가 들어오라는 허락이 떨어졌는데, 도청을 통해 그걸 다 알고 있던 수사기관이 긴급체포한 거죠.”

    ▼ 한국에 있으면서 북한과는 어떻게 연락을 했나요.

    “단둥의 대표부로 전화를 해요, 거의 매일. 연말이 되면 직접 들어가 그간의 일을 보고하고 새 지령도 받고. 그것 말고도 수시로 들락거렸어요. 평양에서는 직접 전화가 왔어요. 동생도 제게 바로 전화를 하곤 했어요.”

    ▼ 평양에서 서울로 전화가 된다?

    “방법은 모르는데 하여간 전화가 왔어요. 동생도 ‘언니, 나 여기 평양 사무실이야’ 그러면서 전화했어요. 발신자표시제한으로.”

    ▼ 군 부대 강연을 많이 다닌 걸로 압니다. 그때 북한을 찬양해 문제가 됐다고 하던데.

    “탈북자 단체의 도움으로 군 부대 강연을 시작했어요. 당연히 상부에 보고하고. 그랬더니 상부에서 북한을 찬양하는 내용이 담긴 CD를 줬어요.”

    원 씨는 군 부대를 다니면서 북한의 군사력을 자랑하고 우리 정부를 비판했다. ‘핵무기는 자위권의 발동’이라고도 주장했다. 기무사령부는 원 씨의 강연 내용이 친북적이라는 보고를 받고 원씨에 대한 조사를 벌이기도 했다.

    “난 마타하리 아니다”

    ▼ CD는 어떻게 받았나요.

    “2006년 여름인가 중국 단둥 대표부에 가서 직접 받아왔어요.”

    ▼ 군 부대 강연을 하는 과정에서 여러 남자를 만난 걸로 아는데. 그렇게 만난 군인들을 통해서 군 관련 정보도 수집하고요.

    “많이 만났죠. 하지만 다 일로 만난 거예요. 언론 보도처럼 같이 자고 그런 관계는 아니었어요. 제가 정말 사랑해서 만난 사람은 강원도 OO사단에서 만난 A대위뿐이었어요. A를 만나기 전에 B소령도 만났지만, 그 사람은 그냥 필요해서 만난 사람이었고. 그 외 다른 사람들과는 성적으로 아무 관계가 없었어요, 정말이에요.”

    원 씨 사건이 세간의 관심을 모았던 데는 복잡미묘한 ‘러브라인’이 한몫했다. 검찰 수사과정에서 원 씨와 잠자리를 같이 했다는 사람이 다수 확인됐다. 검찰은 원 씨가 이들로부터 대북 정보요원 인적사항과 활동내역, 비전향 장기수 관련 정보, 국가 주요시설 위치, 탈북자 정보 등을 수집해 북한으로 보냈다고 했다.

    ▼ 결혼정보회사까지 찾아가 남자를 구한 이유는 뭔가요.

    “혼자 아이 키우고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탈북여성을 이상하게 보는 사람들 때문에요. 간첩이라고 저를 신고하는 사람도 여럿 있었어요. 의심받지 않으려면 남자가 필요하겠다고 생각한 거예요. 기왕이면 군인이 좋겠다고 생각해 결혼정보업체에도 군인을 알아봐달라고 부탁했고요. 400만 원을 내고 VIP 회원으로 등록해서 B를 만났어요.”

    ▼ A, B와는 정식으로 혼인신고를 했나요.

    “아니에요. B와는 주말에만 관사에서 만났어요. A와는 연애를 하는 사이였고.”

    ▼ A와는 얼마나 만났나요.

    “한 3년 정도?”

    ▼ A는 원 씨가 간첩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하던데.

    “맞아요. A가 제게 계속 결혼을 요구했어요. 저는 못한다고 했고. 그 문제로 A가 자살을 시도한 적도 있어요. 결혼 문제로 다투는 와중에 제가 ‘내가 간첩이면 어떻게 할 거냐’라고 말하면서 조금씩 탄로났죠.”

    A는 원 씨보다 7세 연하였다. 두 사람은 2006년경부터 사랑에 빠졌다. A는 원 씨가 간첩이란 사실을 알고도 신고하지 않은 죄, 탈북자 출신 군 안보강사의 명단을 제공한(간첩방조) 죄, 2007년 7월 원씨가 재중 보위부에 보고한 서류를 폐기하는 것을 도운(편의제공) 죄 등으로 원 씨와 함께 구속됐다.

    ▼ 체포된 후 A를 만난 적이 있나요.

    “2008년 11월 군검찰에서 처음 봤어요. 충격을 많이 받은 것 같았어요. 구속된 뒤에도 한동안은 A와 편지를 주고받았어요. 서로 건강도 챙기고. 그런데 저의 사생활 관련 보도가 나온 뒤부터 연락이 끊어졌어요. 전부 사실이 아닌데…. 저는 지금이라도 그에게 해명하고 싶어요. 내가 사랑한 유일한 사람은 A뿐이었다고, 그리고 미안하다고.”

    ▼ 먼저 만난 B도 원 씨가 간첩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나요.

    “그 사람은 몰랐어요.”

    ▼ 한국에서 만난 다른 남자는 없었나요.

    “2002년경 한 2년 만난 경찰이 있어요. 나중엔 편한 친구가 됐죠. 2002년인가 저 때문에 그 사람이 경찰에서 조사를 받은 적이 있어요. 제게 ‘혹시 숨기는 게 있으면 솔직히 털어놔라’고 했는데, 없다고 했죠.”

    北 생아편 팔아 활동비 조달

    ▼ 검찰에 따르면 한국에 들어온 뒤 북한에 3번 들어갔다는데, 사실인가요.

    “네. 2002년 상부의 지시를 받고 청진에 들어갔어요. 청진시 보위부 관계자로부터 청진 출신 탈북자를 색출하라는 지령을 받았죠. 상부에서 보관하고 있던 제 북한 여권을 받아서 들어갔어요. 2006년에는 북한 온성에 있는 동생을 만나기 위해 2번 입북했고요.”

    ▼ 중국과 한국에서 활동비는 어떻게 조달했나요.

    “월급도 받았고 보위부에서 물건을 보내면 팔아서 돈을 마련했어요.”

    ▼ 어떤 물건을 받아서 팔았나요. 혹시 마약도?

    “말하기 곤란한데…. 중국에 있을 땐 검은색 아편 진액을 덩어리로 받아와 팔았어요. 한국에서는 주로 냉동문어, 고사리를 들여왔어요. 약품도 들여오고.”

    2008년 원 씨의 공소장에 따르면, 원 씨는 중국에서 외화벌이를 할 당시 ‘요토알’이란 이름의 마약과 가짜 달러를 판매한 것으로 돼 있다.

    ▼ 마약은 얼마에 팔아서 얼마를 북한에 송금했습니까.

    “보위부에서 보낼 때 정해놓은 금액이 있어요. 우리는 얼마에 팔든 그 금액만 보내면 돼요. 북한에 보내고 남은 돈을 활동비로 쓰죠. 지정 가격의 10배 이상씩 받고 판 경우도 많았어요.”

    ▼ 월급은 얼마나 됐나요.

    “공식적으로는 중국에 있을 때 매달 500달러, 한국에선 6000달러를 받은 것 같아요.”

    ▼ 탈북자로 위장한 뒤 대북무역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습니까.

    “상부의 지시였어요. 물건을 보낼 테니 돈을 벌어서 북한으로 송금하라는 지시를 받았어요.”

    ▼ 탈북자가 대북 사업을 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한국에선 대리인을 내세워서 했어요. 북한에서 준비해야 하는 서류나 일은 모두 단둥 대표부에서 처리해줬고요. 그래서 사업을 손쉽게 할 수 있었어요. 한국에 있는 동안 총 10억원 이상을 북한으로 송금했어요.”

    국정원에 넘긴 정보

    검찰은 원 씨가 한국에 체류하던 2001년부터 2006년까지 재중 보위부로부터 수회에 걸쳐 6만 달러(현금 3만4000달러, 약품 등 2만6000달러) 상당의 공작금을 수령했다고 밝힌 바 있다. 원 씨는 대북무역에서 거둔 수익금 등 5만5000달러를 동생이 북한 청진에서 운영하는 외화상점에 투자하기도 했다.

    중국과 한국에서 활동하는 동안 원 씨는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고 말했다. 백화점에서 옷을 사고 명품 화장품을 썼다는 것이다. 원 씨는 “북에서 돈이 들어오면 그 돈으로 쇼핑도 하고 마사지를 받았다. 체포됐을 때 내 통장에 현금만 1억 원이 넘게 있었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생활하는 동안 원 씨는 국정원 정보요원들과 아주 가깝게 지낸 걸로 알려져 있다. 원 씨의 공소장에는 한 국정원 직원이 원 씨에게 “매달 500만 원을 줄테니 북한 정보를 수집해달라”고 요구했다고 기록돼 있다. 상부(보위부)의 지시를 받고 몇 차례에 걸쳐 군사정보를 국정원에 넘겼다는 내용도 들어 있다. 원 씨는 국정원 직원들과 압구정동 같은 곳에서 수시로 만나 술을 마셨다고 말했다.

    “내가 한국판 마타하리? 딱 한 남자만 사랑했다”

    2008년 검찰이 원정화 씨 집에서 압수한 간첩 행위 증거자료를 설명하고 있다.

    ▼ 어떻게 국정원 사람들과 가까워졌나요.

    “합동신문소를 나온 뒤부터 국정원 사람들이 연락을 해 왔어요. 그리고 계속 사람을 소개받았어요. 국정원에 들어가 국정원 요원들과 간담회를 한 적도 있고요. 어떤 직원은 나와 같이 중국에 가서 우리 가족들을 만나기도 했어요. 아무래도 내가 출신성분이 좋아서, 나를 통하면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 사람들이 접근했던 것 같아요.”

    ▼ 국정원과는 정식으로 일한 겁니까.

    “처음엔 거절했어요. ‘탈북자인 내가 어떻게 그런 일을 하겠느냐’고 했죠. 그랬더니 국정원 요원이 협박을 해왔어요. ‘우리가 제대로 조사하면 원정화 당신은 절대 빠져나가지 못한다’고 겁을 줬죠. 그래서 국정원에 정보를 주기 시작했어요.”

    ▼ 국정원에 넘긴 정보는 어떤 것인가요.

    “군 관련 정보, 북한이 지하에 운영하고 있는 무기공장의 지도와 약도 같은 것이었어요. 국정원은 늘 핵무기 관련 정보를 얻고 싶어 했어요.”

    ▼ 국정원에 넘긴 정보는 어떻게 입수했나요. 상부의 허락을 받고 넘겼나요.

    “입수 경위는 말하기 곤란하고…. 국정원에 넘길 땐 당연히 상부의 허락을 받았죠. ‘그런 건 줘도 된다’는 것만 넘겼어요.”

    ▼ 체포된 뒤 국정원 사람들이 많이 당황했겠네요.

    “그랬죠. 그래서 체포된 뒤 국정원 직원들이 밤마다 검찰청(수원지방검찰청)에 찾아와 난리를 쳤어요. ‘원정화가 국정원을 속였다’면서. 자기들을 기만한 죄를 반드시 묻겠다면서 미친 사람들처럼 소리를 질렀어요.”

    ▼ 국정원은 당시 원 씨에 대한 내사 사실을 전혀 몰랐나요.

    “몰랐으니까 그 난리를 쳤겠죠.”

    ▼ 그럼 국정원 직원들은 원 씨가 간첩이란 사실은 알고 있었나요.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어요. 저와 친했던 몇몇 사람은 분명히 알고 있었고요. 제게 받는 정보 때문에 알면서도 저를 검거하지 않은 거예요. 그래서 국정원 직원들이 검찰에서 난리칠 때 내가 그랬어요. ‘당신들이 나를 써먹은 것처럼 나도 당신들을 써먹었다’고.”

    ▼ 국정원 직원과 사귀거나 하지는 않았습니까. 당시 언론에는 국정원 직원 여러 명과 성관계를 가졌다는 보도도 나왔는데.

    “거짓말이에요. 오히려 저를 어떻게 해보려다 얻어맞은 사람이 여럿 있었어요.”

    탈북女 성폭행하는 목사

    ▼ 무슨 얘기죠?

    “술자리에서 제게 신체 접촉을 하는 국정원 직원이 있었어요. 성관계를 요구하며 슬며시 어깨에 손을 올리거나 하는. 제가 두들겨 팼어요. 홍콩에서 만난 한 국정원 직원은 술자리를 가진 뒤 같이 자자고 요구하다 저한테 맞았고요. 그런데 그렇게 맞은 사람들이 나중에 검찰에 와서는 ‘원정화에게 폭행을 당했다. 원정화가 같이 안 자면 죽인다고 해서 강제로 성관계를 가졌다’고 사실과 다른 진술을 했어요. 너무 화가 나서 그 사람들과 싸웠죠.”

    ▼ 수사 결과와 공소장에 따르면 국정원 직원 2명을 암살하라는 지령도 받았다던데.

    “홍콩에서 활동하는 국정원 직원을 죽이라는 지령이었어요. 중국을 통해 북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 북한 측 정보원들에게 포착됐는데, 정도가 좀 심했어요. 그런데 차마 못 죽이겠더라고요. 다른 북한 공작원이 그를 죽이려고 하는 것도 제가 말렸어요. 그 사람한테 ‘조용히 살라’고 했죠. 제 사건이 터진 뒤 그 사람은 검찰에 와서 ‘원정화가 나를 정말 죽인다고 생각했다’고 진술했대요.”

    ▼ 그런 일이 일어난 게 언제쯤인가요.

    “2003년쯤인가.”

    ▼ 원정화 씨가 간첩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바로 그 사람인가요.

    “네, 맞아요.”

    ▼ 검찰 발표에 따르면, 중국에서 활동할 당시 100명 이상을 납치해 북송했다는데 모두 한국 사람이었나요.

    “아니에요. 한국 사람은 7명뿐이었어요.”

    ▼ 그럼 주로 어떤 사람들이었나요.

    “제가 붙잡아 북송시킨 사람들은 대부분 북한에서 범죄를 저지르고 중국으로 도망간 수배자들이었어요. 일반 탈북자를 잡아서 북한으로 넘기는 경우도 일부 있고요. 한국 사람이나 재일교포, 미국 시민권자들의 경우 국정원이나 언론의 사주를 받아 북한 관련 정보를 수집하고 탈북자를 포섭하는 사람들이었어요. 탈북자들에게 돈을 주면서 북한의 장마당 같은 곳 사진을 찍어오게 하는 그런 사람들을 잡아서 북한으로 보냈죠. 나는 사람을 잡아 조사기관에 보내는 일까지만 했고, 이후에 어떻게 됐는지는 잘 몰라요. 그런데 검찰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내가 북송시킨 사람들이 아직까지 생사 확인이 안 된다는 말을 듣고 많이 당황했어요. 그분들의 가족들에게도 죄송했고.”

    ▼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나요.

    “그런 모진 일은 안 했어요.”

    ▼ 특히 기억나는 사건이 있나요?

    “길거리에 천막을 치고 어렵게 사는 탈북자 가족을 검거한 적이 있어요. 여자가 임신 7개월 정도 된 상태였어요. 살려달라고, 북한에 보내지 말라고 애걸하는데 결국 다 북송시켰어요. 마음이 아팠어요. 70세가 넘은 한 목사를 중국 공안에 넘긴 일도 있어요. 탈북 여성들을 감금해놓고 강간하고 성매매를 시키는 사람이었어요. 제보를 받고 오랜 시간 내사를 거쳐 붙잡아 중국 공안에 넘겼어요.”

    ▼ 한국인이었나요.

    “한인이지만 국적은 미국이었어요. 그런데 탈북자를 돕는다면서 그런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이 아주 많아요. 탈북 여성들은 그런 사람들의 도움이 아니면 한국에 들어갈 수가 없으니 시키는 대로 다 하죠. 우리가 쳐들어갔을 때 그 목사 집에 탈북 여성 7명이 있었어요. 19세부터 50대까지. 목사는 외출할 때 문을 밖에서 잠그고 나갔대요. 중국 공안으로부터 지켜준다는 핑계로. 밤마다 여자들을 불러 강간하고 성매매시켰다는 게 조사 과정에서 확인됐어요.”

    “북한은 모든 게 억지”

    ▼ 그 목사는 이후 어떻게 됐나요.

    “모르겠어요. 죽었는지 살았는지.”

    ▼ 최근 국회의원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이 벌어졌어요. 종북세력 문제가 사회적인 이슈가 되고 있는데, 이런 일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솔직히 한국 사회도 정상적인 사회는 아니에요. 그래도 언론의 자유가 있고, 사상의 자유가 있잖아요. 왜 사람들이 북한을 추종하고 따르는지 이해할 수 없어요. 북한은 모든 것이 억지로 만들어지는 곳이에요. 찬양할 만한 가치가 없죠. 이해가 잘 안 돼요.”

    ▼ 이제 출소해서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는데….

    “그동안은 항상 불안한 삶을 살아왔어요. 체포되기 전에도 저는 대문에 자물쇠를 4개씩이나 걸어놓고 살았어요. 붙잡힐 것이란 불안감 때문에요. 그래서인지 체포된 뒤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어요. 앞으로는 저와 가족을 위한 삶을 살고 싶어요. 작은 장사라도 해서 딸과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오랫동안 해온 무역업을 계속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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