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호

“목표가 절실해야 운도 따른다”

이원종 지역발전위원장의 인생 노트

  • 조성식 기자 │mairso2@donga.com

    입력2013-11-21 09:54: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목표가 절실해야 운도 따른다”
    “청소년 시절 나의 목표는 농촌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이었고, 봉급생활자가 되어 고된 육체노동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 전부였다.”

    “공직은 나의 천직이었고 다시 태어난다 해도 나는 공직의 길을 갈 것이다.”

    이원종(71) 대통령 직속 지역발전위원회 위원장이 저서 ‘인생, 네 멋대로 그려라’에서 한 말이다. 충북 제천의 시골 농가에서 태어난 이 위원장의 어린 시절 꿈은 우체국장이었다. 그래서 체신학교에 진학했다. 체신학교 졸업 후 9급 공무원이 된 그의 첫 업무는 공중전화에서 동전을 수거하는 일이었다.

    실망한 그는 행정고시에 도전했다. 야간대학을 다니며 4차례 시험을 본 끝에 합격해 간부로 전환했다. 서울시 5개 구청장과 국장을 역임하고 청와대 비서관으로 발탁된 뒤 충북도지사를 거쳐 서울시장에까지 올랐다. 이후 민선 충북도지사를 두 번 더 지내면서 그에겐 ‘행정의 달인’이라는 별명이 생겨났고, 개각 때면 종종 총리 후보로 거론됐다.

    행정 외길을 걸어온 그가 박근혜 정부에서 지역발전위원장을 맡자 ‘적임자’라는 평이 나왔다. 그 자신도 만족해했다. 평생 쌓은 공직 경험을 지역 발전에 쏟아 붓는다는 것이 그에게 자부심과 긍지를 갖게 했다.



    홍조 띤 얼굴과 그윽한 눈길에서 삶을 관조하는 노년의 지혜가 느껴진다. 아니, 노인이라는 표현은 실례가 될지 모르니 삼가는 게 좋겠다. 자신의 일에 열정을 바치는 그는 여전히 청춘이고 젊은이다. 나이 들면 다들 알게 된다. 청춘이 황혼이고 황혼이 청춘이라는 것을. 인생에서 나이가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를.

    지역발전위원회는 지역 발전과 관련된 중요 정책에 대해 대통령의 자문에 응하는 기관이다. 지역 발전 정책 방향과 세부 계획을 수립하는 한편 중앙과 지방 간 이해가 상충하는 사안을 조정하고 관련 부처가 수행하는 각종 정책을 조율하는 컨트롤타워 노릇을 한다. 위원은 위원장을 포함해 30명. 임기 2년의 민간 위촉위원 19명과 당연직 위원인 정부 11개 부처 장관으로 구성된다. 실무조직으로는 각 부처 파견자 40명으로 구성된 기획단이 있다. 이 위원장의 설명을 들어보자.

    “지역발전위원회는 노무현 정부 때 균형발전위원회라는 이름으로 출발했다. 행정수도 이전을 추진하고 수도권 공공기관들을 지방으로 옮기는 분산정책으로 서울과 지방 간 균형발전을 꾀하려 했다. 이명박 정부 때는 광역경제권 개념을 도입했다. 호남권, 충청권, 대구경북권 등 전국을 7개 권역으로 나눈 것이다. 박근혜 정부는 이를 바탕으로 지역행복생활권을 만들려 한다. 예컨대 고속도로가 마을 앞을 지나가도 그 효과가 마을의 생활환경이나 주민의 삶의 질과 연결되지 않는다면 진정한 지역 발전이라고 할 수 없다. 열악한 환경의 시골 사람들에게는 상수도 물 마시고 가스 시설 들이고 하수도 고치는 게 더 절실하고, 그게 실질적인 행복이다. 거기에 더해 높은 수준의 교육, 문화, 의료 서비스가 필요하다. 그걸 위해 지역행복프로젝트 호프(HOPE)를 수립했다. 6대 분야 17개 과제인데 세부적인 사업이 200개쯤 된다. 그렇게 섬세하게 접근해 국민을 행복하게 하겠다는 것이 우리 위원회의 목표다.”

    빚 갚는다는 마음으로

    ▼ 위원장은 어떻게 맡게 됐나. 박근혜 대통령과 특별한 인연이라도….

    “별다른 인연은 없다. 사전에 상의한 적도 없다. 어느 날 대통령께서 결정했다며 임명 사실을 통보해왔다. 몇 가지 이유로 맡았다. 첫째는 국가원수가 ‘너 아직 쓸모 있으니 일하라’고 명령한 것을 특별한 사유 없이 거절하는 것은 국민의 도리가 아니라는 것. 둘째는 내가 한평생 지방자치행정에 종사하면서 쌓은 경험으로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다는 점이다. 정치적인 일이라면 안 맡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건 내가 다른 사람 못지않게 잘할 수 있는 일이다. 셋째, 가난한 농촌 출신이 신분 탈출에 성공해 서울시 국장과 구청장을 하고 시장, 도지사까지 한 것은 많은 분한테 빚을 진 거다. 그 빚 갚는다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2006년 1월 충북도지사 선거 6개월을 앞두고 3선이 유력하던 그는 불출마와 은퇴를 선언해 주변을 놀라게 했다. ‘박수 칠 때 떠나라’는 금언을 실천한 것이다.

    ▼ 3선 불출마를 선언하며 떠날 때 더는 공직을 안 맡을 걸로 보였는데.

    “명예나 권력과 관련된 일이라면 안 맡았다. 경제적 이득을 보는 것도 없다. 오직 지역 발전에 이바지하는 것뿐이다.”

    지역발전위원장은 급여를 받지 않는다. 소정의 수당이 있을 뿐이다.

    “봉사라는 표현은 건방진 것 같고, 내가 가진 경험으로 사회에 기여한다고나 할까.”

    ▼ 보도자료에 ‘창조지역사업’이라는 용어가 있던데, 이 정부가 부쩍 강조하는 창조경제와 관련된 것인가.

    “우리 프로젝트 속에 지역의 고유한 특성이 있다. 그것을 그 지역의 경쟁력 있는 산업에 융합해 지역에 기여하는 사업으로 재창조하는 것이다.”

    ▼ 예산은 어떤 식으로 지원하나.

    “대통령 취임 후 태스크포스가 구성돼 지역 발전 정책의 기초를 마련했다. 내가 와서 그걸 바탕으로 지방기관과 중앙부처의 정책을 연결해 조율했다. 이 작업을 할 때 전국을 돌면서 지역 의견을 수렴했다. 거기서 나온 의견을 갖고 계획을 다듬었다. 과거엔 중앙정부에서 예산 지침을 주면 지역에서 거기에 맞춰 사업을 신청했다. 그러다보니 정작 지역에서 하고 싶은 일은 제대로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가 관여하는 예산에 광특계정(광역·지역발전특별계정)이 있다. 앞으로는 지역계정의 비율을 더 높여 지방자치단체 의견이 손쉽게 반영되도록 운영할 계획이다.”

    ▼ 2014년 신규사업으로 107개 사업을 공모해 그중 27개 사업을 선정했는데, 얼마나 지원하나.

    “대체로 매칭펀드로 운영한다. 중앙에서 70% 주면 30%는 지역에서 부담하는 방식이다.”

    ▼ 지역발전위원회의 성과와 한계를 꼽는다면.

    “노무현 정부 때 추진한 행복도시(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은 잘되고 있고 혁신도시 건설도 순조롭게 진행 중이다. 현재 공공기반시설공사가 99% 완성됐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국민에게 행복을 주는 데 한계가 있다. 일상생활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섬세한 복지를 실현하겠다는 게 우리 목표다.”

    ▼ 노무현 정부 때 균형발전 차원에서 행정수도 이전 계획을 세우지 않았나. 그런데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판결이 나오면서 규모가 축소돼 행복도시로 건설됐다.

    “행정수도 개념으로 모든 부처가 내려갔다면 본래 목표에 근접했을 거다. 그런데 행복도시로 축소되면서 이원화됐다. 불편과 비능률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중단할 수도 없다. 지금으로선 빨리 그 기능을 완성해 부작용을 없애는 데 주력해야 한다. 사무소 설치나 화상회의 등으로 보완해야 한다.”

    크든 작든 목표 가져야

    ▼ 정부기관의 지방 이전에 대해 여전히 반대 목소리가 높다. 서울 중심의 사고방식이 가장 큰 문제인 것 같은데.

    “역기능과 순기능이 있는데 순기능을 극대화해 우리나라의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

    ▼ 이 위원장도 어린 시절 인생에서 성공하려면 무조건 서울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나. 물론 그때와 지금의 시대상황이 다르지만.

    “많이 달랐다. 그때는 농촌에서 살 수가 없었다. 식량 문제가 해결이 안 됐고 일자리가 없었다. 서울로 가야 일자리도 있고 공부도 할 수 있었다. 조선 세종 때 서울 인구를 조사했는데 10만9000명이었다. 그 후 2배인 20만이 되는 데 400년이 걸렸다. 1963년 서울 인구가 300만이었다. 그런데 9년 후 2배인 600만으로 늘었다. 이토록 급속히 늘다보니 성장통을 앓을 수밖에 없었다. 서울을 어떻게 다시 건강한 몸으로 만들 수 있겠느냐는 고민에서 나온 게 인구 분산이었다. 서울시 인구 분산은 노무현 정부가 갑자기 만든 정책이 아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부터 추진한 과제였다.”

    ▼ 박정희 정권 때도 행정수도 이전 계획을 세우지 않았나.

    “맞다. 그때도 수도권 과밀화 문제가 고민이었다. 무리가 따르긴 하지만 분산정책은 순기능이 크다.”

    그는 자신이 정치가가 아닌 행정가임을 강조했다.

    “(민선) 도지사선거를 두 번 치렀다. 선거 과정은 정치적이었지만 내가 정치가라고 생각해본 적은 한 번도 없다. 행정가일 뿐이다. 한평생 그런 자세로 공직을 맡아왔다.”

    우체국장이 되려 했던 시골 소년은 행시에 합격한 후 자신의 꿈을 업그레이드했다. 김영삼 정부 때 서울시장을 하다 성수대교 붕괴사고로 1년 반 만에 하차한 것 빼고는 대체로 탄탄대로를 걸었다.

    “남보다 특별히 다른 능력이 있었던 건 아니다. 절실함 때문에 그랬을 거다. 난 평생 그런 생각을 했다. 사람은 목표를 갖고 살아야 한다고. 작든 크든.”

    그의 ‘목표론’은 논리 정연하다.

    “목표는 세 가지만 갖추면 반드시 이뤄진다. 첫째, 내용이 분명하고 구체적이고 건전해야 한다. 둘째, 목표가 절실해야 한다. 셋째, 포기하지 말라. 우리 세대에겐 절실한 목표가 있었다. 배고픔을 면하자는 것이었다. 그 이상 절실한 목표가 어디 있겠나. 그리고 노력하는 사람과 노력하지 않는 사람의 차이는 클 수밖에 없다. 물론 운도 따른다. 그런데 사람이 운을 찾아다니면 안 되고 운이 나를 따라오게 해야 한다.”

    베세토 프로젝트

    그가 최근 펴낸 책 제목은 ‘인생, 네 멋대로 그려라’이다.

    ▼ 책을 읽어보니 어릴 때부터 성공에 대한 집념과 오기가 강했던 것 같다.

    “수돗물로 허기진 배를 채웠던 우리 세대 사람들은 웬만한 어려움에는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이런 절실함이 조국 근대화를 뒷받침한 거다.”

    ▼ 서울에 대한 시골 출신의 콤플렉스도 엿보인다.

    “맞다. 그것도 발전의 원동력이었다. 당시 농촌에 비친 서울은 근접하기 힘든 괴물 같은 존재였다. 농촌 탈출과 신분 탈출. 그 절실함이 어려움을 이기게 만들었다.”

    그의 인생은 유난히 숫자 ‘4’와 관련이 깊다. 넷째 아들로 태어났고 생일이 4월 4일이다. 행시 4회에 합격했고 44년간 공직에 몸담았다. 서원대 4대 총장을 지냈고 딸만 넷이다.

    “목표가 절실해야 운도 따른다”

    “다시 태어나도 공직의 길을 걷겠다”고 말하는 이원종 지역발전위원장.

    ▼ 행시에 3전4기로 합격한 것도 추가해야 하지 않나.

    “그렇네. ‘4’는 참 좋은 수다.”

    ▼ 일반적으로 꺼리는 숫자다.

    “편견이다. 자기 잣대와 세상의 잣대는 꼭 일치하지 않는다. 그걸 인정해야 화합과 평화를 이룬다. 자기 잣대를 들이대면서 ‘너는 왜 치수가 다르냐’ 따지면 분쟁이 생긴다. 정치도 그렇고 개인생활도 그렇다.”

    ▼ 당시 죽을 고생 하면서 함께 행시 준비해 다같이 합격했던 친구도 4명 아니었나.

    “맞네. 그것도 ‘4’네.”

    그는 “제가 책을 열심히 읽지 않았나”라는 기자의 농담에 “합격점 드려야겠네”라며 웃었다.

    ▼ 1994년 성수대교 붕괴사고로 시장을 그만둔 것에 대해 미련이 있지 않나.

    “미련은 없지만 아쉬움은 있다. 지금도 성수대교 밑을 지날 때마다 눈감고 잠시 기도한다. 다리가 무너져 32명의 생명이 사라진 것이 너무 안타깝다.”

    ▼ 후진적 사고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어떻게 보면 필연적 결과다. 급속도로 고도성장을 하면서 ‘싸게’ ‘빨리’ ‘많이’를 외쳤다. 그 결과 물량적으로는 엄청난 발전을 이뤘지만 질이 떨어졌다. 그래서 성수대교도, 삼풍백화점도 무너졌다. 그 사이클의 맥이 닿는 순간 내가 그 책임자 자리에 앉아 있었던 거다. 하지만 당연히 책임을 져야 했다. 사고 소식을 듣자마자 청와대에 연락해 ‘현장수습한 뒤 사표 낼 테니 후임자 물색해달라’고 요청했다. 희생된 분들께 미안할 따름이다. 아쉬운 것은 ‘베세토(BESETO)’ 프로젝트다.”

    베세토는 베이징, 서울, 도쿄의 영문 머리글자를 딴 합성어다. 1993년 10월 이원종 서울시장은 베이징을 방문해 리치옌 시장에게 한중일 세 나라 수도의 협력벨트를 제안해 동의를 얻었다. 다음 날 도쿄에서 세계 수도 시장회의가 열렸다. 이 시장은 그 자리에서 스즈키 준이치 도쿄도지사에게도 같은 제안을 했다. 도쿄도지사도 흔쾌히 찬성했다. 곧 협력준비단을 구성하고 분야별로 사업계획을 세웠다.

    돈으로 살 수 없는 보람

    1994년 10월 28일은 서울이 수도가 된 지 600년째 되는 날이었다. 이 시장은 ‘시민의 날’로 정해진 이날을 행사일로 잡았다. 후손에게 전할 타임캡슐도 만들었다. 그러던 중 성수대교가 무너졌다. 모든 게 물거품이 됐다.

    “분수대에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접시를 얹으면 하늘에 붕 뜬 무대가 된다. 거기에 서울, 베이징, 도쿄 도지사가 올라가 우주 중계를 통해 베세토 프로젝트를 발표하려 했다. 그런데 딱 일주일 앞두고 성수대교가 무너졌다. 그걸 못한 게 지금도 아쉽다. 그때 성사됐다면 세 도시가 더 발전하고 동북아 평화협력에도 기여했을 텐데….”

    서울시장 중도하차가 공적인 시련이라면 폐결핵은 사적인 시련이었다. 1966년 4년간의 주경야독으로 행시에 합격한 후 그는 중증 폐결핵을 앓았다. 당시만 해도 폐결핵은 사망률이 높은 전염병이었다. 고시보다 더 처절한 사투를 벌인 그는 끝내 병마를 이겨냈다.

    “폐결핵을 앓으면서 생명의 소중함을 알게 됐다. 내 생명이 소중하면 다른 사람 생명도 소중하다는 것, 이 세상에 소중하지 않은 생명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든 것이 평온하면 발전이 없다. 고통을 겪은 만큼 성장한다. 폐결핵을 앓던 시절이 고통스럽긴 했지만 얻은 게 많다.”

    ▼ 지금은 깨끗한가.

    “매년 폐를 촬영한다.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오른쪽 가슴에 흔적은 남아 있다.”

    ▼ “다시 태어나도 공직의 길을 걷겠다”고 했는데 도대체 공직의 매력이 뭔가.

    “첫째는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 공직 외에는 없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보람이다. 밤새워 일하면서 힘들어도, 어떤 시스템이나 제도 발전을 통해 시민의 행복에 이바지했을 때 굉장한 보람을 느낀다. 그런 보람은 돈으로 살 수 없다. 돈이 인간을 편리하게 해줘도 행복하게 해주는 건 아니잖은가. 그런데 보람은 사람을 행복하게 해준다.”

    ▼ 개각 때 총리후보로 거론된 적이 많은데, 이 정부에서 요청하면 맡을 생각인가.

    “난 그런 능력이 있는 재목이 아니다. 공직은 내게 필요한 자리가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자리가 돼야 한다. 충북도지사 3선 불출마를 선언하고 사임한 후 당시 노무현 대통령께서 교육부 장관을 맡으라고 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성공적인 장관이 못 될 것 같더라. 그래서 사양했다.”

    ▼ 겸손의 말씀인 것 같다.

    “지역발전위원장으로 복잡다단한 문제를 풀어가면서 전국 17개 지방자치단체 발전과 국민행복에 기여할 수 있다면 그 이상의 보람이 없을 것 같다.”

    공무원을 사랑해달라

    ▼ 흔히 공무원을 비판할 때 ‘영혼이 없는 공무원’이니 ‘복지부동’이니 ‘철밥통’이니 한다. 한국 공무원 사회의 고질적 병폐가 뭐라 생각하나.

    “태풍이 불 때 가지는 흔들려도 나무가 쓰러지지 않는 것은 뿌리가 튼튼하기 때문이다. 국가 존립의 뿌리는 공무원이다. 대한민국이 그토록 짧은 기간에 세계사에 유례없는 발전을 이룬 데는 공무원의 노고가 있었다.”

    ▼ 부정부패에 연루되는 공무원도 많다.

    “그건 극히 일부다. 그 일부의 사람들 때문에 선량하고 열심히 일하는 절대다수의 공직자가 피해를 본다. 공무원 사회를 비난하던 사람도 공직에 들어와 3개월만 지나면 생각을 바꾸게 된다. 내가 서울시 공무원 할 때 목격한 바다. 공무원 조직을 사랑해달라(웃음)”

    ▼ 문제점을 지적해달라고 했는데…(웃음).

    “아니, 그런 공무원이 별로 없다. 공무원을 함부로 매도하면 안 된다.”

    평생 공직에 몸담은 그에게 공무원 비판은 무리인 듯싶다. 하지만 그의 말에 일리가 없는 것도 아니다. 비판은 공정하고 적절해야 한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국가와 사회를 위해 열성적으로 일하는 공무원이 왜 없겠나.

    ▼ 모범생 이미지인데, 살아오면서 일탈한 적은 없나.

    “어릴 때 남의 과수원에서 참외서리 많이 했다. 배가 고파서(웃음).”

    ▼ 아니, 뭐 여자 문제라던가 술 먹고 사고 쳤다던가.

    “옆을 돌아볼 겨를 없이 숨가쁘게 살아왔다. 서울로 올라가 2년제 체신대를 다녔다. 수업료가 없는 학교였다. 한 반 학생이 70명인데 그중 20명은 장학생이고 50명은 아니었다. 20명에게는 생활비 대기에 충분한 돈이 나왔다. 장학생 경쟁이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대학 2년을 고3처럼 살았다. 졸업 후 전화국에 취업했다. 이어 성균관대 3학년에 편입해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학교를 다녔다. 그 다음엔 고시를 하지 않으면 신분상승이 안 될 것 같아 고시 공부를 시작했다. 영어 실력이 모자라 출근시간 전에 영어학원을 다녔다. 그렇게 대학 3, 4학년을 보냈다. 그런 상황에서 미팅을 할 수 있겠나. 술 먹고 놀기를 하겠나. 아니면 노름을 하겠나. 그래서 내가 사교 면에서 무능하다. 춤도 못 추고 노래도 못한다. 노는 걸 못 배웠기 때문이다. 그게 체질이 됐다.”

    ▼ 부인 만나기 전에 다른 여성을 전혀 안 만났나.

    “깊이 사귀어본 적은 없다. 남산길을 걸어본다든지 빵집에서 만난 적은 있다.”

    참 건전한 인생이다. 목표지향적인 삶이었던 만큼 스스로에게 조금의 곁눈질도 허용하지 않은 모양이다. 가난 탈출과 신분 상승에 다걸기했던 산업화 세대의 단면이다.

    여생에 대한 그의 바람은 소박하고 경건하기까지 하다.

    “아무리 일생을 보람되고 멋지게 살았어도 세상을 하직할 때의 모습이 아름답지 못하면 격이 떨어진다. 향기로운 여생을 살고 싶다. 하나님과 대화할 수도 있고 예술활동이나 봉사활동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이 세상에서 물러날 때 힘들어하는 걸 보면 안타깝다. 내 인생이 곧 세상 만물이라고 생각하고 잘 가꾸면 아름다운 마무리가 되리라 믿는다.”



    인터뷰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