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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 한국의 명장

인연의 실타래도 아름다운 매듭으로

매듭장 김은영

  • 글·한경심 │한국문화평론가 icecreamhan@empas.com 사진·박해윤 기자

인연의 실타래도 아름다운 매듭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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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 시절 매듭 기본형 서른여덟 가지를 배웠는데, 결혼하고 3년간 쉬었어요. 그러다 다시 해보지 않겠느냐고 권하셔서 본격적으로 염색부터 끈 짜고 술 비비는 것까지 배우게 됐습니다.”

비록 좋아서 시작한 일이었지만, 한창 자라는 아이가 넷이고 큰 집안 살림과 손님접대까지 해가며 매듭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큰 작품을 하느라 지칠 때면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제가 힘들어하면 친정어머니는 그만두라고 하셨지만, 아버지는 힘들더라도 계속 하라고 하셨죠. 작품 전시회에 필요한 액자나 진열대도 신경써주시면서 제가 고비를 넘기도록 이끄셨어요.”

그의 인생에 아버지는 이정표가 되어주었다. 미대 진학도 아버지의 선택이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문학을 하시고 언니도 영문학을 전공했으니 저도 국문학이나 불문학을 할까 생각했었는데, 아버지가 이화여대 미대에 실내장식 전공이 생겼다며 권하셨어요.”



아마 아버지는 딸의 눈썰미와 솜씨를 이미 알고 있었던 듯하다. 과연 그는 줄리앙 석고상 데생을 석 달 동안 연습하고 시험에 붙었으니, 아버지의 판단은 옳았던 셈이다. 엄마와 아내, 며느리라는 자리에 안주하지 말고 늘 책 보고 공부하라고 일러주던 아버지는 그가 뒤늦게 서울여대 미대 대학원 공예학과에 진학했을 때도 크게 기뻐했다. 힘들게 공부해 드디어 석사모를 쓰고 편찮은 아버지와 사진을 찍을 때 그도 정말 기뻤다.

남자들이 더 많이 썼던 매듭끈

인연의 실타래도 아름다운 매듭으로

노리개는 보석에 매듭을 엮어 품위를 살린 장식품이다.

김희진 선생 밑에서 매듭을 익힌 뒤 그는 스승이 만든 한국매듭연구회의 부회장으로 활동하면서 스승과 함께 후배들을 지도하며 한편으로 국전과 전승공예대전에 출품해 아홉 차례나 수상했다. 1982년에는 국무총리상을 탔고, 특별상도 네 번이나 탔다. 그렇게 차곡차곡 작품을 해나가는 사이 1995년 가나아트에서 초대전 제의가 들어와 첫 번째 개인전을 열게 되었다.

“그 전시회에 당시 무형문화재 기능보존협회 이사장으로 재직하면서 갓일 하시던 정춘모 선생이 오셔서 이력서를 달라고 하시더군요. 어른이 말씀하셔서 이력서를 한 장 드렸는데 이듬해 서울시 무형문화재가 되었습니다.”

무형문화재가 되고부터 그의 마음은 새로워졌다고 한다.

“그전에는 그저 제가 즐거워서 한 일이었지만 문화재가 되고 보니 이 문화를 제대로 지키고 제자도 길러야 한다는 책임감이 생기더군요.”

문화 지킴이라면 간송의 며느리로 딱 맞는 일 아닌가. 그가 책임감을 느낀 데는 매듭이 우리 공예에서도 풍류와 멋이 뛰어난 가장 한국적인 공예라는 자부심도 한몫했다.

“흔히 매듭이라고 하면 여인의 노리개를 먼저 떠올리지만, 사실 남자에게 더욱 빠져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도포를 입고 도포끈을 매지 않으면 오늘날 슈트를 입고 넥타이를 매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멋도 멋이지만 빠져서는 안 되는 품목이지요. 또 갓끈, 차고 다니는 호패와 장도의 끈, 안경집, 부채까지 다 매듭끈과 술 장식이 있었습니다.”

도포끈은 품계에 따라 색깔도 달리했고, 관복에는 허리띠와 후수(뒤에 늘어뜨리는 장식 띠)에도 매듭이 들어갔다. 옛 선비가 도포끈과 갓끈을 길게 늘어뜨리고 장도를 차고 부채를 든다면 최고 멋쟁이가 될 터다. 또 사냥이나 궁술에 필요한 활통과 화살통, 심지어 매의 발목에도 매듭 끈을 달았다. 한편 사랑방에 걸리는 고비와 붓걸이, 발걸이, 겨울에 보온용으로 치는 방장걸이(커튼 같은 장막) 등도 모두 매듭끈과 찰랑이는 술이 달려야 멋이 난다.

그러나 매듭은 개인의 치장이나 실내를 꾸미는 데만 필요한 게 아니었다. 가마와 상여, 불교의식에 쓰는 연(가마)과 번(깃발), 고승이 드는 불자(拂子·벌레 쫓는 총채 비슷한 모양. 고승의 상징이다), 잔치 마당에 놓는 지당판(연못 형태를 딴 넓은 판으로 그 위에 꽃이나 구슬로 장식한다)과 궁중무용의 시작과 끝에 등장하는 죽간자(장식을 단 기둥)와 포구락(럭비 골대처럼 기둥을 세우고 작은 구멍에 공을 던져 넣는 놀이를 춤으로 만든 것)에 필요한 의물(儀物) 등에도 어김없이 매듭으로 장식했다. 특히 음악을 연주할 때 모든 악기에 매듭을 달았다. 이처럼 매듭은 장식성뿐 아니라 군주의 위엄, 종교와 제례, 연회의 장엄함을 표현하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매듭 수요가 얼마나 많았는지 조선시대 명주실을 염색하는 장인과 실 꼬는 장인, 끈 만드는 장인, 매듭짓는 장인, 술 만드는 장인이 다 따로 있었어요. 조선후기 법전인 ‘대전회통’을 보면 매듭 만드는 과정이 분업화되어 있고 총 아흔 명 가까이 등장하는데, 염색하는 데도 붉은 물들이는 홍염장과 푸른 물들이는 청염장이 따로 있을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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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한경심 │한국문화평론가 icecreamhan@empas.com 사진·박해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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