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0월호

강자에게 더 강한 애리조나의 ‘작은 거인’

메이저리거 김병현 스토리

  • 송재우 < 스포츠평론가 > jwsong@sports.com

    입력2005-04-04 16: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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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병현(22·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을 처음 만나는 사람은 우선 두 번 놀라게 된다. 생각보다 키가 작아서 놀라고 차돌같이 단단해 보이는 인상에 놀란다. 메이저리그 사무국에 등록된 김병현의 신장은 180cm. 결례가 될 것 같아 물어보진 못했지만, 필자의 눈대중으로는 175cm도 채 안 돼 보인다. 어떻게 저런 체격에서 150km의 강속구가 나오고, 자신보다 훨씬 커보이는 메이저리그 강타자들을 손쉽게 삼진으로 처리할 수 있을까. 실력과 구위 이상으로 두둑한 배짱을 필요로 하는 마무리 투수 김병현. 그는 지금까지 어떤 타자와 맞서더라도 도망가는 피칭을 한 적이 없다.

    ‘작은 고추’ 김병현이 ‘한국형 핵잠수함’으로 그리고 ‘BK’(병현의 영문 이니셜이자 ‘Bullpen Killer’라는 의미로도 쓰인다)라는 자신의 이니셜을 딴 ‘불펜 삼진왕’으로 메이저리그 마운드에 우뚝 서기까지를 살펴보았다.

    야구선수로서 김병현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994년 광주 제일고등학교 1학년 시절이다. 당시 광주일고의 에이스는 현재 뉴욕 메츠 산하 마이너리그 트리플 A팀에서 뛰고 있는 서재응이었다.

    서재응의 경기를 보기 위해 많은 스카우트들이 경기장을 찾았다. 하지만 정작 이들이 주목한 선수는 서재응보다 1학년생 김병현이었다. 잠수함 투수로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빠른 볼과 변화무쌍한 변화구로 상대 타자들을 제압했기 때문이다. 김병현은 2학년 때 청룡기 대회에서 한 경기 18탈삼진을 기록하는 등 팀을 우승으로 이끌며 스카우트의 표적이 되었다.

    김병현이 국제적으로 눈길을 끈 것은 성균관대 1학년 시절 한미 대학야구대회에 참여한 뒤다. 빼어난 피칭으로 현지 관계자들의 혼을 빼놓았고,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 때는 8타자를 연속 삼진 처리하는 등 눈도장을 확실하게 찍혔다. 결국 김병현은 당시 국내 선수로는 최초로 계약금과 연봉 포함 225만달러라는 초특급 대우를 받고 메이저리그에 진출한다.



    근성과 오기의 작은 고추

    어린 시절 김병현은 태권도를 배웠다. 체격이 크지는 않지만, 독종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승부근성이 강한 소년이었다. 그와 함께 청소년 국가대표팀에서 뛰었던 동료에 따르면 공도 치기 어려웠지만, 워낙 승부욕이 강해 곁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다고 한다. 태권도로 다져진 체력도 그의 강력한 무기였다.

    지기 싫어하는 김병현의 태도는 연습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메이저리그에서 뛰는 지금도 그는 연습을 거르는 법이 없다. 경기 막판, 그것도 승패가 한순간에 바뀔 수 있는 고비에서 마운드에 오르는 마무리 투수이기에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김병현은 주위에서 과로를 걱정할 정도로 연습에 매달린다.

    손목을 많이 활용하는 잠수함 투수인 김병현은 불펜에서 대기하면서 쉴새없이 기구를 이용해 힘을 기른다. 투수들에게 기본적인 러닝은 말할 필요도 없고 경기가 끝난 후에도 개인 훈련을 거르지 않는 독종이다.

    어쩌면 친구들과 어울려 미팅도 하고 즐겁게 놀 시기인 22세의 김병현에겐 그런 즐거움이 없다. 오히려 ‘정글의 법칙’만이 존재하는 메이저리그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채찍질할 뿐이다. 이런 김병현의 지독한 훈련태도는 미국 진출 3년, 풀타임 2년 만에 주전으로 확실히 자리잡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8월 초 김병현은 매년 그를 괴롭히는 손목과 무릎, 팔 등에 통증이 생겨 코칭 스태프가 등판을 만류한 일이 있다. 한 부위가 아니라 몸의 오른쪽 전체에 통증이 왔기 때문에 참아내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어렵게 잡은 마무리 투수의 기회를 김병현이 손쉽게 포기할 리는 만무했다. 김병현은 계속해서 등판했다. 드넓은 애리조나의 홈구장 뱅크원 볼파크를 세 바퀴나 뛰면서 땀을 쏟았다. 그는 치열한 페넌트 레이스를 펼치는 팀사정을 감안해 팀 트레이너에게만 통증을 귀띔했을 뿐이다.

    김병현은 마무리가 허약한 팀 사정상 일반적인 세이브 투수보다 많은 이닝을 소화하고 있다. 지난 시즌까지 그는 시즌 막바지에 체력이 떨어져 고전했다. 그래서 그의 잦은 등판이 자칫 무리를 가져오지 않을까 우려하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 전혀 굴하지 않는 김병현은 코칭스태프의 믿음을 얻고 있다. 하루도 쉬지 않는 체력훈련이 동반됐기 때문이다.

    김병현은 모든 일에서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다. 좀처럼 타석에 들어설 기회가 없는 마무리 투수 김병현이 지금까지 타석에 들어선 횟수는 여덟 번. 이 가운데 김병현은 오직 한 번 성공했을 뿐이다. 김병현은 하나의 안타로 타점까지 올렸으며, 경기 막판 시소 게임에서 터뜨렸기 때문에 동료들의 박수를 받기도 했다.

    김병현은 안타를 때린 뒤 동료들에게 “나도 아마추어 시절 4번타자로 타격왕을 차지한 적이 있다”고 큰소리를 치는 바람에 동료들은 그에게 은박지로 만든 ‘은방망이’ 네자루를 선물했다. 이것은 각 포지션에서 가장 방망이가 뛰어난 선수에게 주는 ‘실버 슬러거상’을 본떠서 애리조나 선수들이 김병현을 축하해준 해프닝이었다.

    김병현은 메이저리그 진출 한국인 1호 박찬호(LA 다저스)와는 분명히 다른 점이 있다. 미국에 진출할 당시의 나이는 20세와 21세로 비슷하지만, 김병현은 처음부터 메이저리그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그리고 마이너리그 생활은 아주 짧게 했다. 박찬호가 2년 동안 거의 풀타임 마이너리거로 생활한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일반적으로 김병현 정도의 나이와 경력을 가진 선수들이 마이너리그에 진출했을 때는 보통 루키리그 혹은 싱글A에서 선수생활을 시작해서 단계별로 성장하여 메이저리그에 입성한다. 하지만 김병현은 처음부터 메이저리그 계약이었고 성장 속도도 유례를 찾기 힘들 만큼 빨랐다.

    일단 마이너리그에서 가장 낮은 단계인 루키리그로 보내졌지만, 처음부터 애리조나 구단은 그를 마이너리그에 오래 처박아둘 생각이 없었다. 이미 그를 데려 올 때부터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미국야구에 적응하고 간단한 테스트 기간을 거치게 한 것에 불과했다. 루키리그에서 단 한 경기를 뛰고 그는 싱글A를 건너뛰어 더블A팀인 엘파소로 승격했다. 그곳에서도 10경기에만 출장하고 마이너리그 최고 단계인 트리플A로 올라가 선발, 중간계투, 마무리 등을 고루 뛰고 곧장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유니폼을 입은 것이다.

    99시즌 메이저리그 25경기에 출장할 기회를 잡았던 김병현이 매스컴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순식간이었다. 지난해 애리조나의 마무리 투수 매트 맨타이의 부상이 장기화되면서 팀내 마무리 투수로 뛰게 되었고 전반기에 맹활약한 것이다. 물론 전반기 막판부터 처음으로 풀타임을 뛰는 만큼 체력 저하로 고전했지만, ‘불펜의 삼진왕’으로 그리고 당시 최연소 마무리 투수로 각광받기 시작했다. 팬들은 그의 자그마한 체구가 뿜어내는 변화무쌍한 공에 감탄했고, 현재 메이저리그 삼진왕 랜디 존슨조차 “삼진에서는 김병현이 나보다 한수 위”라는 말로 김병현의 어깨를 으쓱하게 만들었다.

    그의 존재가치는 단숨에 다른 팀에서 탐낼 정도로 커졌다. 올 시즌 전반기 맨타이의 부상 재발로 다시 위기를 맞은 애리조나는 긴급히 마무리 투수 수배에 나섰고 여러 팀과 협상을 벌였다. 애리조나가 원하는 선수는 경험이 풍부하고 배짱이 두둑한 마무리 투수였는데, 접촉한 구단들은 예외없이 원하는 선수 명단에 김병현을 포함시켰다. 애리조나의 대답은 언제나 ‘NO’일 수밖에 없었다. 젊은 나이에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유망주를 손쉽게 포기할 수 없다는 팀의 강경한 방침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애리조나는 7월부터 마무리 투수의 대권을 김병현에게 넘겨주었다.

    날마다 스테이크를 먹어라

    메이저리그에서 마무리 투수는 불펜의 에이스로 불린다. 막판 박빙의 승부에서 팀의 승리를 지키기 위해 최후의 방어선으로 기용되는 만큼, 경험과 배짱, 그리고 승부구를 필요로 한다. 그러기에 메이저리그 마무리 투수는 평균 연령 30대 초반의 한창 물이 오른 선수들이 대부분이다. 그렇게 볼 때 젊은 김병현에게 애리조나가 중책을 맡긴 것은 높은 신뢰도를 말해주는 증거다.

    국내 야구처럼 철저하게 선후배 사이를 따지는 편은 아니지만, 메이저리그에도 그 나름의 위계 질서는 엄연히 존재한다. 불펜투수 중 막내였던 김병현은 올 시즌 중반 마이너리그에서 브래드 프린츠가 올라올 때까지 커피 심부름을 했다. 미국 야구에서 선후배는 나이가 아니라 누가 먼저 메이저리그에 들어왔느냐로 따진다. 유난히 고참급 선수가 많았던 애리조나 불펜에서 커피 심부름을 하던 김병현은 이제 커피를 주문할 수 있는 처지가 됐다. 고참들이 부상, 트레이드 등을 통해 자리를 떠났고, 이제는 어느덧 메이저리그 3년차로, 뭔가 돌아가는 상황을 아는 선수로 변모한 것이다. 3년 사이에 그의 위상은 커피 심부름꾼에서 NO.1으로 성장한 셈이다.

    LA 다저스의 박찬호는 대식가에 음식을 잘 가리지 않는 선수로 알려져 있다. 이런 식생활 습관은 박찬호의 메이저리그 적응뿐 아니라 한 시즌 162경기의 장기 레이스를 펼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하지만 김병현은 지난해까지 짧은 입과 가려먹는 식성 때문에 고전했다. 아무리 어린 시절부터 다져진 체력에 자신이 있다고 해도 마라톤에 비유되는 장기 페넌트레이스에서 먹는 것이 부실하면 견디기 힘들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체력은 점점 떨어지고 원하는 곳으로 공을 던지기가 어려워지는 것이다.

    메이저리그에 데뷔했던 1999년이나 지난 시즌 김병현은 이런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 오프 시즌 동안 꾸준한 체력 훈련으로 전반기에는 펄펄 날았지만, 경기 출장 수가 누적되면서 연료탱크가 서서히 바닥났다. 김병현은 고갈된 연료를 재충전하지 못한 채 대형사고를 일으키곤 했다.

    지난 시즌을 끝내고 김병현은 식성을 바꾸기 위해 노력했다. 별로 즐기지 않던 스테이크를 매일 먹다시피 했고 식사량도 늘렸다. 그러면서도 웨이트 트레이닝을 충실히 했다. 지난 시즌 그의 모습을 기억하는 팬들은 올 시즌 달라진 김병현의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두툼해졌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김병현이 마침내 메이저리그의 두터운 벽을 깨달은 것이다.

    예전에는 과자 같은 군것질을 좋아해 정작 몸에 필요한 에너지를 보충해줄 식사를 게을리했지만 이제는 한 끼 식사에 정성을 기울인다. 비위가 좋은 편이 아니라서 ‘몬도가네’식 보양식은 피하고 있지만, 한약 등 자신이 소화할 수 있는 스태미나 보조식품은 마다하지 않는다. 입에 맞지 않아도 먹어야 산다는 단순한 생존원리(?)를 김병현은 몸으로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라도 한번쯤은 경험해 보았겠지만, 식성을 바꾸기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김병현은 그런 어려움을 이겨내고 몸에 좋다는 음식을 닥치는 대로 먹고 있다.

    올 시즌 후반기. 그가 식성을 바꾸지 않았다면 아마도 지금쯤 마운드에서 고개를 떨구는 모습이 자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시즌 막판까지도 씩씩하게 공을 뿌리고 있다. 이런 김병현의 이면에는 식생활을 바꾸기 위한 치열함이 숨어 있다.

    올 시즌이 개막하기 전까지 김병현은 보직에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자신도 선발로 뛰고 싶다는 강한 의사표현을 한 것이다. 사실 불펜에서 언제 등판할지 모르는 가운데 최상의 컨디션을 계속 유지하기란 생각처럼 쉽지 않다. 또한 셋업맨(중간 계투요원)이나 마무리 투수는 잘하면 본전, 못하면 패배를 책임져야 하는 정신적인 부담이 따르는 자리다. 그래서 대다수 불펜 투수들은 등판 간격이 일정하며 몸관리를 체계적으로 할 수 있는 선발투수를 선호한다.

    김병현이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것은 당연히 선발투수로서의 성공 가능성을 가지고 결정한 것이지 불펜투수로 계속 던질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처음 얼마간은 경험도 축적하고 타자를 상대하는 요령도 익혀야 했기 때문에 중간 계투도 마다하지 않았지만, 셋업맨으로 승격되고 마무리 투수로 점점 굳어져 가는 자신의 보직에 노골적인 불만을 터뜨렸다. 자신의 에이전트를 통해 팀에 호소도 해보았다.

    이런 불만은 지난해 잠시 받아들여졌다. 콜로라도 로키스와의 원정경기에 선발등판한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그리 좋지 않았다. 경기 초반부터 공이 마음먹은 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김병현은 ‘투수들의 무덤’으로 알려진 콜로라도 로키스의 홈구장 쿠어스 필드에서 3회를 마치지 못하고 홈런 2방을 허용하는 등 4실점을 하고 마운드에서 내려와야 했다.

    그렇다고 김병현이 선발투수에 대한 미련을 버린 것은 아니었다. 올 시즌 스프링 트레이닝을 앞두고 김병현은 직간접적으로 계속해서 선발투수에 대한 바람을 팀에 전달했다. 당시 애리조나는 마무리 투수 맨타이가 합류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김병현의 선발 욕심은 컸다. 게다가 선발 1, 2번을 제외하고 불안한 로테이션을 보인 애리조나의 투수력을 감안할 때 김병현의 선발 진입은 그리 어렵지 않아 보였다.

    이런 가운데 김병현이 조금씩 마음을 정리한 것은 1월 무렵이다. 가라지올라 단장은 팀 사정상 김병현이 불펜투수로 뛰어야 한다고 간곡히 호소했다. 개인 성적도 중요하지만 팀에서 필요치 않은 선수라고 판단되면, 냉정하게 돌변하는 메이저리그 습성상 김병현이 마냥 선발로 발탁해 달라고 떼를 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셋업맨으로 시즌을 맞이한 김병현은 이제 확실한 애리조나 마무리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선발이냐 마무리냐

    그렇다고 김병현의 마음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선발투수에 대한 꿈을 접은 것은 절대 아니다. 올 시즌을 앞두고 김병현은 잠수함 투수로 메이저리그 선발투수가 되지 못한다는 통념을 뒤집어 놓겠다며 결연한 의지를 보였다. 그의 말처럼 현재 그리고 지난 10년 동안 메이저리그 선발투수 중 옆으로 던지는 투수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 이유는 처음에는 특이한 투구 형태로 타자들이 혼란을 겪지만, 투구패턴이 어느 정도 눈에 익으면 위에서 던지는 투수보다 쳐내기 쉽고 장타가 많이 나온다는 야구이론과 좌타자에게 절대적으로 약점을 보인다는 야구계의 정설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김병현은 “나는 예외”라고 말한다. 우선 잠수함 투수로는 드물게 151km의 빠른 공을 던지는데다 공의 변화가 심하다는 것이다. 지난해 샌디에이고 파드레스 소속이었던 빌리 오웬스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김병현 같은 선수는 야구계에서 추방해야 한다”는 말까지 했을 정도다. 김병현은 아직까지 싱커를 잘 구사하고 있지는 않지만, 선발 기회가 주어졌을 때는 지금까지의 빠른 공, 슬라이더, 체인지업에 싱커까지 가미, 다양한 구질로 타자를 상대하겠다는 생각이다.

    또한 김병현은 좌타자를 상대로 특별히 약점을 보이지 않는다. 올 시즌 김병현은 좌타자를 맞아 피안타율 0.191로 웬만한 우완 투수를 능가하는 뛰어난 기록을 보이고 있다. 지난해까지는 0.245로 평범한 성적을 거두던 그가 올 시즌 이렇게 좌타자들을 압도하고 있는 것은 선발투수를 의중에 두고 나름대로 좌타자 공략법을 개발한 게 주효했다는 것이 주위의 시각이다.

    하지만 김병현의 선발투수 꿈이 조만간 실현되기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우선 잠수함 투수는 메이저리그에서 통하지 않는다는 기존 시각을 뒤집어야 한다. 또한 현재 메이저리그에서 쓸 만한 마무리 투수를 구하기 어렵다는 상황이 김병현에게는 ‘행운’이면서 ‘악재’로 작용하고 있다. 애리조나가 당분간 대형 마무리 투수를 확보하지 않는 한 김병현에게 불펜의 책임을 맡길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한인들이 가장 많이 사는 곳은 LA다. 그런 면에서 박찬호는 행운아다. 교포들이 많은 만큼 한인 커뮤니티가 잘 형성돼 있어 먹고 싶은 음식을 먹을 수 있고, 주변의 격려도 심심치 않게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애리조나의 홈인 피닉스에는 한국 교포가 그리 많지 않다. 김병현이 친구들과 자유롭게 어울리고 젊음을 만끽할 상황도 아니지만, 한국 사람이 적은 도시에 산다는 게 외로운 것만은 사실이다. 그런 김병현의 단짝친구는 잠과 컴퓨터게임이다.

    일반적으로 프로야구 선수는 밤에 많은 경기를 치르는 직업 특성상 잠자리에 늦게 들고 늦잠을 자는 경우가 많다. 김병현도 예외가 아니며 야구선수 중에서도 특히 잠이 많은 편에 속한다.

    지난 스프링 트레이닝 때 김병현은 아침 10시부터 실시하는 훈련에 참여하는 데 애를 먹었다. 물론 지각을 하거나 훈련을 빼먹진 않았지만, 일찍 일어나지 못해 애를 먹었다. 고심 끝에 김병현이 생각해낸 방법은 낮잠을 안 자는 것이다. 낮잠을 자면 밤에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고, 아침에 고전하기 때문이다. 그가 낮잠을 자지 않기 위해 주로 선택한 방법은 드라이브였다.

    벤츠 E클라스가 애마인 김병현은 오후 2∼3시면 어김없이 드라이브를 즐긴다. 아무래도 핸들을 잡으면 운전에 집중해야 하기 때문에 잠을 잘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사실. 원해서 하는 드라이브가 아니라 밤잠을 잘 이루기 위한 고육책이라는 사실이 씁쓸하지만, 그래도 이 방법은 그런대로 효과를 발휘해 스프링 트레이닝을 잘 보낼 수 있었다. 지금도 김병현은 잠이 많다. 한마디로 그에겐 잠이 보약인 셈이다.

    김병현의 또 다른 취미는 컴퓨터 게임이다. 원정경기든 홈경기든 김병현의 소지품에는 꼭 노트북 컴퓨터가 포함되어 있다. 스타크래프트를 주로 하는 김병현은 주로 PC를 상대로 혼자서 경기를 즐긴다. 혼자 시간을 보내기에는 최고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는 김병현은 게임을 잘하는 편이다.

    김병현은 혼자서 훌쩍 떠나는 여행도 좋아한다. 시즌이 끝나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는 가족들에게도 행선지를 알리지 않고 돌아다닌 적이 있다. 김병현은 시끄러운 성격이 아니라서 이런 ‘나 홀로 여행’이 편하다고 한다. 가끔 친구가 동행하지만, 대부분은 혼자서 짐을 꾸린다.

    미국 내에서 꾸준히 연락하는 지인들도 몇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고등학교 선후배 사이인 서재응과는 자주 안부를 묻고 시즌 후 함께 훈련하기도 한다. 지난 봄에는 시카고 컵스 마이너리그 소속인 권윤민과 훈련했다. 가끔씩 박찬호와도 전화하고 서로의 도시를 방문하며 함께 식사도 한다.

    미국에 와서 새로 사귄 친구는 골프선수 박지은 정도. 애리조나 주립대 출신인 박지은과는 안부 전화를 할 정도로 우정을 쌓았다. 외국 생활을 오래한 박지은이 이런 저런 충고를 해준다고 한다. 종목은 다르지만 나이가 비슷하고 같은 운동선수라서 말이 잘 통하는 편이라고 한다.

    마운드에 선 투수는 상대가 홈런을 펑펑치는 홈런 타자나 3할을 가볍게 넘기는 정교한 타자라면 긴장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피해가는 투구를 하게끔 되어 있다.

    메이저리그에서는 ‘꿈에서도 상대하기 싫은’ 타자가 각 팀에 즐비하다. 그런데 김병현은 오히려 이들과의 대결을 즐긴다. 김병현은 마무리 투수의 특성상 안타 한 방에 경기의 승패가 오가는 벼랑 끝에서 등판하면서도 자신감을 잃지 않는다.

    얼마 전 김병현은 메이저리그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아메리칸리그 타율 부문 선두를 질주하는 시애틀 매리너스의 스즈키 이치로와 한판 승부를 벌였다. 김병현은 그와 대결하는 내내 얼굴에서 미소를 잃지 않았다. 숨막히는 대결에서 이치로의 타구를 플라이볼로 유도해 팀을 승리로 이끌었지만, 김병현의 미소는 불가사의 그 자체였다.

    경기 후 인터뷰에서 김병현은 이치로와 상대하는 순간이 너무 재미있었다고 말했다. 일본 프로야구에서 7년 연속 타격왕 출신에다 메이저리그 첫해부터 신인왕은 물론 타격왕까지 노리고 있는 선수와의 대결에서 김병현은 긴장하지 않고 여유있게 게임을 즐긴 것이다.

    김병현 앞에만 서면 꼬리를 감추는 강타자가 바로 마크 맥과이어와의 홈런왕 경쟁으로 유명한 시카고 컵스의 새미 소사다. 올해까지 4년 연속 50홈런 이상을 기록한 강타자 소사는 제아무리 대투수라 해도 부담스러워하는 괴물타자다. 하지만 김병현은 그와의 대결에서 압승을 거두고 있다. 모두 여덟 번 상대해서 단 한 개의 안타도 허용치 않고 있다. 그중 여섯 번을 삼진 처리했으니 더 이상 보충설명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지난해 아메리칸리그 홈런왕 트로이 글로스도 3타수 무안타로 눌려 있다. 1994년 내셔널리그 MVP 휴스턴의 제프 백웰도 김병현과의 네 차례 대결에서 철저히 당했다. 박찬호의 팀메이트 셰필드도 삼진 한 개를 포함 3타수 무안타다. 박찬호도 셰필드가 김병현을 부담스러워한다고 말한 적이 있을 정도다.

    최고의 공격력을 자랑하는 뉴욕 메츠의 포수 마이크 피아자도 김병현에겐 안타가 없다. 올 시즌이 끝나면 은퇴하는 ‘영원한 3할타자’ 샌디에이고의 토니 귄과도 두 번의 대결에서 모두 승리했다. 올 시즌 마크 맥과이어의 단일 시즌 최다 홈런 기록인 70개에 도전하고 있는 샌프란시스코의 배리 본즈도 3타수 무안타에 그치고 있다.

    정면으로 승부를 건다

    물론 그렇다고 천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박찬호에게도 강점을 보이는 콜로라도의 토드 헬튼은 김병현에게도 호락호락한 타자가 아니다. 헬튼은 김병현을 상대로 5할 타율에 홈런도 한 개를 빼앗았다. 다저스의 좌타 거포 숀 그린 역시 두 번의 대결에서 모두 김병현을 울렸고 그 역시 홈런을 뽑아냈다. 얼마 전 통한의 역전 3점포를 허용했던 샌디에이고의 라이언 클레스코도 그리 달갑지 않은 타자다. 하지만 전체적인 비율로 봤을 때 김병현은 이들과의 대결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보인 경우가 훨씬 많았다.

    이렇게 철저하게 메이저리그에서 내로라하는 강타자들을 압도하는 김병현의 비결은 무엇일까. 해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본인의 말처럼 이들과의 대결을 절체절명의 결투로 보는 것이 아니라 게임으로 즐기는 것이다.

    그렇다고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즐기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만큼 본인의 공에 자신감을 갖고 있다는 얘기다. 구위에 자신이 있으니 피해가지 않고 정면승부를 거는 것이고, 피해가는 투구 패턴에 익숙해져 있던 강타자들이 오히려 당황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풀타임 2년차의 새내기이지만 구원투수로 팀의 신뢰를 받고 있는 것이다.

    김병현의 성공은 그를 잘 아는 주변에서 어느 정도 예측했던 일이다. 하지만 이렇게 빠르게 자리잡을 것이라고 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김병현은 현재까지의 성적을 스스로 절반의 성공으로 생각하고 있다. 아직 메이저리그 선발투수의 꿈을 이루지 못했고, 개인기록이 최고 수준에 들어갈 정도로 올라서지 못했기 때문이다. 연봉으로나 매스컴의 주목도 면에서 선발투수가 마무리 투수보다 유리한 고지에 있다는 것은 상식이다.

    이 점은 본인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이미 본인 최다 세이브를 세우고 차곡차곡 기록을 쌓아가고 있는 현재 상황에서도 김병현은 “내 목표는 선발투수”라고 밝히고 있다. 목표는 선발이기 때문에 아무리 많은 세이브를 올려도 특별한 감정이 생기지 않는다고까지 말하는 대목에서는 당돌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가 마음속에 품고 있는 메이저리거로서의 꿈은 한 시즌 20승을 올리고 노히트노런까지 기록하는 것이다. 결국 그에게 지금까지의 성공은 절반에도 미치지 못할는지 모른다. 아마도 선발투수로 정식 발령을 받는 그날부터 김병현이 생각하는 진정한 성공신화가 시작될 것이다.

    올 시즌 김병현은 메이저리그 진출 1호인 박찬호도 아직까지 이루지 못한 꿈에 도전하고 있다. 바로 소속팀의 포스트시즌 진출이다. 아직까지 박찬호의 소속팀 LA 다저스도 포스트시즌 진출 가능성이 남아 있다. 만약 다저스가 ‘가을의 축제’ 포스트 시즌에 진출한다면, 박찬호는 미국 진출 7년 만에 플레이오프 무대를 밟게 된다. 반면 김병현의 소속팀 애리조나는 현재 내셔널리그 서부지구 1위로 다저스보다 한 걸음 더 포스트시즌에 다가서 있다.

    지역구 스타에서 전국구 스타로

    아직까지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는 않지만, 메이저리그 선수들에게 포스트시즌 경험은 연봉계약이나 본인의 경력에 대단히 큰 부분을 차지한다.

    현재의 팀 성적이 유지되고 김병현이 포스트시즌 마운드에 선다면, 그리고 한 경기 한 경기가 중요한 단기 시리즈에서 세이브를 얻어낸다면, 김병현은 페넌트레이스에서 거둔 세이브와는 완전히 다른 기분을 느낄 것이다. 또한 지역구 스타에서 전국구 스타로 발돋움할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될 것이다.

    물론 개인성적도 팀성적에 따라 많은 영향을 받지만, 개인적인 성공이 팀성적으로 직결되기는 어려운 게 냉정한 현실이다. 따라서 포스트시즌 진출은 올시즌 김병현에게 주어진 지상과제가 되고 말았다. 셋업맨으로 시즌을 열었지만, 확실히 마무리 투수로 포스트시즌을 맞이하게 된다면, 김병현은 자신의 꿈에 한걸음 더 다가서게 될 것이다.

    선발투수였다가 마무리 투수로 변신한 경우는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하지만 마무리 투수를 하다가 선발로 전환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만큼 어렵다는 뜻이다. 일부 마무리 투수를 하다 선발로 돌아선 경우는 메이저리그 경력 초반에 선발투수 경험이 있던 투수들이 대다수다. 메이저리그에서 선발 경험이 단 한 번에 불과한 김병현에게는 잠수함 투수가 통할 수 없다는 정설을 뒤엎어야 하는 한편, 마무리 투수에서 선발로 전환해 성공하기가 어렵다는 또 다른 통념을 깨뜨려야 한다.

    정상적으로 대학을 다녔으면 이제 4학년. 동기들이 이제 프로 진출이냐 새로운 진로 모색이냐 하는 출발선에 서려 할 때 김병현은 일찍부터 프로야구의 본고장 미국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김병현은 지금까지 큰 어려움 없이 성공 가도를 달려왔다.

    하지만 그의 꿈은 저 멀리 지평선 어딘가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다. 20승, 노히트 노런의 그날까지 김병현은 달릴 것이다. ‘작은 거인’이라는 새로운 애칭으로 불릴 그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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