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1월호

아테네 장애인올림픽 금메달리스트 허명숙

‘된장찌개 투혼’, 희망의 과녁 꿰뚫다

  • 박은경 자유기고가 siren52@hanmail.net

    입력2004-10-27 11: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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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테네 장애인올림픽 금메달리스트 허명숙

    사격은 그에게 처음으로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해준 아주 특별한 선물이었다.

    지난 9월20일 그리스 마르코풀로 사격센터. 제12회 아테네 장애인올림픽 여자 50m 소총3자세 결선에 오른 허명숙(48) 선수는 일순 호흡을 멈추었다. 과녁을 향해 총구를 조준한 채 마지막 방아쇠를 당겼다.

    잠시 뒤 이관춘 대표팀 감독이 상기된 표정으로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 그 앞에 나타났다. ‘해냈구나!’ 하는 생각이 섬광처럼 스쳤다. 가난과 장애를 딛고 마침내 금빛 과녁을 향해 축포를 쏘아올린 순간이었다.

    제12회 아테네 장애인올림픽에서 우리나라는 13개 종목에 120여명의 선수단을 파견해 금11, 은11, 동6 등 총 28개의 메달을 건져 올리며 종합순위 16위를 기록했다. 허 선수는 금메달뿐 아니라 여자 10m 공기소총에서도 은메달을 목에 거는 쾌거를 이룩했다.

    허 선수를 만나기 위해 찾아간 서울 성북구 상월곡동 아파트 단지 입구에는 ‘올림픽 메달 획득’을 축하하는 현수막이 높이 걸려 있었다. 하지만 집 안으로 들어서자 ‘과연 금메달리스트의 집일까’ 싶을 정도로 초라했다. 10여평 남짓한 공간에 작은 방 한 칸, 싱크대가 딸린 거실과 욕실이 전부였다. 보증금 1000만원에 매달 14만원의 월세를 내는 ‘거주기간 10년’의 임대아파트였다.

    “결선 10발 중 7발을 쏘고 나니 금메달에 대한 감이 왔습니다. 그 순간 흥분되고 떨렸지만 가까스로 마음을 눌렀습니다. 더도 덜도 말고 지금까지 한 것처럼만 하자고 다짐했죠. 마지막 세 발을 쏠 때는 시간이 너무나 길게 느껴졌습니다.”



    마음이 흐트러질까봐 시합 내내 자신의 점수가 기록되는 전광판을 쳐다도 보지 않았다는 허 선수. 지난 12년간의 선수생활 중 금메달을 향한 ‘마지막 세 발’을 남겨놓았을 때가 가장 고통스러웠다. 실수할지도 모른다는 극도의 불안감이 엄습했기 때문이다.

    “한 달 앞서 열린 아테네올림픽에서 옆 선수의 표적지를 쏘아 실격당한 선수가 있지 않았습니까. 표적지 간격이 너무 좁기 때문에 ‘아차’ 하는 순간 벌어질 수 있는 일이죠. 일반인은 ‘뭐 저런 사격선수가 있나’ 하겠지만 국제대회에서 가끔 일어나는 사고예요. 그래서 저도 마지막 세 발을 쏠 때 제발 내 표적지에만 명중시키자 하는 간절한 심정이었습니다.”

    메달 소식이 연이어 전해지자 아테네 현지로 노무현 대통령의 축전이 날아들었다. 그동안 아시안게임, 세계선수권대회 등에서 아쉽게 2, 3위에 머물렀던 허 선수로서는 처음 받아보는 ‘대통령 축전’이었다.

    “예전에 다른 선수들이 대통령 축전을 받는 걸 옆에서 지켜보며 무척 부러워했어요. 그런데 이번 대회에서는 저도 두 번이나 받아 너무나 기쁘고 좋았어요. 나도 ‘우리나라 최고 윗분한테 이런 걸 받을 수 있구나’ 싶어 가슴이 뿌듯했죠.”

    금메달을 목에 거는 순간 벅찬 마음을 주체할 수 없던 허 선수는 이 감독과 함께 감격의 눈물을 쏟았다. 그 순간 성치 못한 딸 걱정만 하다 5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각났다고 한다.

    “아테네 선수촌에 도착한 첫날 어머니 꿈을 꾸었습니다. 지난 몇 년간 한 번도 꿈속에 나타나지 않았는데, 그날따라 초라한 모습의 어머니가 애틋한 눈빛으로 절 바라보시는 거예요. 꿈에서 깨고 난 뒤 ‘도대체 이게 무슨 의미일까’ ‘아테네에 도착한 첫날 왜 하필 뜬금없이 어머니가 꿈에 나타나셨을까’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금메달을 따자마자 제일 먼저 어머니가 생각났던 겁니다.”

    기뻐서 울고 슬퍼서 울고

    이날 허 선수의 눈물은 환희와 감격 뒤에 가려진 쓰라린 가슴의 응어리를 함께 토해낸 것이었다.

    “어려서부터 외톨이로 쓸쓸하게 지내며 모진 삶을 살다 보니 맺힌 한이 많았습니다. 금메달을 목에 거는 순간 그동안 꽁꽁 눌러두었던 가슴속 응어리가 둑 터지듯 한꺼번에 폭발했죠. 정말 난생 처음으로 맘 놓고 울어버렸습니다. 기뻐서 울고 슬퍼서 울었습니다.”

    허 선수는 강원도 원주에서 땅 한 평 없는 품팔이 농군의 8남매 중 셋째딸로 태어났다. 여섯 살 때 소아마비를 앓아 지난 42년간 두 다리를 휠체어에 의지하며 살아왔다. 아주 어릴 적 동네에 서커스단이 왔을 때 식구들 손을 잡고 ‘걸어서’ 구경 갔던 일이 두 발을 땅에 딛고 걸은 유일한 기억이다.

    “제 다리가 정상이 아니라고 느낀 건 아마 7∼8세 무렵이었던 것 같아요. 어느 날 동네 아이들이 책을 보자기에 싸서 허리에 두르고 학교 가는 모습을 봤는데 그게 너무나 부러웠습니다. 방안에서 혼자 보자기를 등에 둘러메던 기억이 납니다.”

    장애인이라면 대부분 엇비슷하게 겪었을 가난, 장애, 무학(無學)의 삼중고를 그 역시 고스란히 짊어지고 살았다. 친구 하나 없이 원주 시골집에 갇혀 있다시피 지내던 그가 처음 세상 밖으로 나온 것은 스물여덟 살 때였다. 장애인으로 홀로 독립해서 살아가려면 뭔가 확실한 기술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에 경북 안동에 있는 국립재활원의 문을 두드렸다.

    “처음엔 한복 만드는 기술을 배우려고 그곳에 갔습니다. 수중에 돈 한푼 없이 입소했는데, 재료비는 본인이 내야 한다는 거예요. 별 수 없이 전자제품을 조립하고 품삯을 받는 단순노동만 하다 일 년 후 그곳을 나왔습니다.”

    이때부터 영세업체 기숙사나 남의 집에 얹혀사는 고달픈 삶이 시작됐다. 처음 취직한 곳은 액세서리를 만드는 가내공업 수준의 공장. 비록 홀몸이었지만 6만원의 월급은 생활을 꾸리기에도 턱없이 모자랐다. 더구나 계속되는 야근과 철야 작업은 불편한 몸으로 견뎌내기에 너무 힘든 고통이었다. 어렵게 사는 어머니를 도와드리고 동생들 용돈도 주고 싶었지만 불가능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방 한 칸 얻을 돈이 당장 급했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못했다. 다행히 시장에서 액세서리 장사를 하던 분의 도움을 받아 전국의 시골장터에서 액세서리를 팔며 약간의 돈을 모을 수 있었다.

    정부 보조금으로 생계 꾸려

    “장이 설 땐 새벽 5시에 일어나 집을 나서야 하는데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어요. 한겨울엔 차가운 얼음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새벽부터 해 저물 때까지 오돌오돌 떨면서 장사했죠. 아무리 옷을 껴입어도 뼛속까지 스며드는 추위를 당해낼 재간이 없었어요. 두 다리에 혈액순환이 안 되면서 마비가 왔고 결국 동상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이때 후유증으로 지금도 허 선수의 몸 상태는 그다지 좋지 않다. 찜통더위 때를 빼고는 사시사철 두꺼운 요와 이불을 깔고 덮어야 겨우 몸을 추스를 수 있다.

    사실 이번 올림픽을 앞두고 합숙에 들어가기 전까지도 몸 상태가 몹시 나빴다. 그렇다고 비싼 보약을 먹을 수 있는 처지도, 건강식품을 골라 먹을 처지도 아니었다. 며칠간 한방치료를 받은 게 전부였다.

    “대회 도중에도 건강상태가 몹시 안 좋았어요. 그래서 메달을 땄을 때 더욱 눈물이 솟구친 것 같습니다. 지금도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차며 소화가 잘 안 됩니다. 항상 피곤하고 불면증에 시달리죠. 오랫동안 혼자 생활한 데다 고생을 많이 해서 생긴 후유증인 것 같아요. 몸은 아픈데 병원에서는 특별한 이상이 없다고 하니 답답할 뿐이죠.”

    금메달을 딴 다음날 모 일간지에 허 선수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제목은 ‘된장찌개 투혼’. 수입이래야 생활보호대상자에게 매달 정부가 지급하는 생계보조금(31만원)과 장애인수당(9만원), 여기에 부업으로 버는 20만원 남짓한 돈이 전부여서 생활비가 늘 빠듯했고 이에 주로 된장찌개만 먹었다고 해서 붙은 제목이다.

    “부업도 항상 있는 게 아니라 들쭉날쭉하니까 못 버는 달도 많았죠. 아파트 월세 14만원에 각종 세금과 차 기름값 10만원을 내고 나면 손에 남는 돈이 얼마 없어요. 올림픽 대표선발전을 앞두고는 몸은 아픈데 성적은 올려야겠고, 다급한 마음에 무척 초조했죠. 그때 불고기나 등심을 먹으면 힘이 나지 않을까 싶었지만 형편을 생각해서 꾹 참았습니다. 왜 이러면서까지 사격을 해야 하냐는 회의도 들었죠.”

    하지만 사격은 꿈도 희망도 없던 그에게 한 줄기 빛과 같았다. 시골장터를 떠돌며 모은 돈으로 서울에 안착한 그는 아주 우연한 계기로 사격과 인연을 맺는다. 서울 광진구에 있는 지체장애인 대상 복지회관인 정립회관의 복지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된 것. 프로그램에는 탁구, 수영, 배드민턴 등 여러 운동 종목이 있었지만 그의 관심을 사로잡은 것은 바로 사격이었다. 물론 사격 선수가 되리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다. ‘그냥 총 한번 쏴봤으면 좋겠다’ ‘탕 소리가 나면 마음속까지 후련해지겠다’는 마음뿐이었다.

    정립회관에서 딱 한 번 실제로 총을 쏘아보고 나서 공기소총 10발을 쏘는 시합에 참가했다. 그 시합에서 생애 처음으로 1등이란 걸 경험한 그는 환희로 온몸이 떨려오는 벅찬 감격을 맛보았다. 이번 올림픽에서 허 선수와 함께 금맥을 일궈낸 이관춘 감독이 바로 정립회관의 사격코치였다. 당시 이 감독은 총을 쏠 때 집중력이 남달랐던 그에게 선수로 입문할 것을 권유했고 허 선수는 망설임 없이 승낙했다.

    아테네 장애인올림픽 금메달리스트 허명숙

    과녁에 총을 겨눌 때 가장 행복하다는 허명숙 선수.

    이때부터 집안에만 틀어박혀 지내던 그의 삶에도 햇살이 찾아 들었다. 사격선수 생활을 시작한 첫해인 1993년 전국대회 여자 10m 공기소총 시합에서 당당히 1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생활고가 사격선수로 살아가려는 그의 발목을 잡았다.

    “1993년 대회출전을 앞두고 정립회관에서 연습이 있었어요. 그런데 도무지 짬이 나질 않았죠. 아침부터 새벽 2∼3시까지 구슬 꿰는 부업에 매달려야 했거든요. 대회날짜가 다가와 할 수 없이 일을 일찍 접었어요. 그러니 생활은 더 힘들어졌죠.”

    선수생활 3년간 차도 없이 무거운 장비를 챙겨 움직이느라 더욱 힘들었다는 허 선수. 지금은 어렵사리 소형차를 마련해 어려움을 덜었지만 사격 장비를 나를 때는 여전히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처음엔 지나가는 사람한테 ‘휠체어 좀 내려달라’ ‘차 트렁크에 장비 좀 실어달라’는 말이 입에서 떨어지질 않았어요. 하지만 요즘은 수월하게 도와달라고 말해요.”

    눈이나 비가 오는 날에는 집에서 나설 엄두도 내지 못한다. 길이 젖거나 얼면 휠체어 바퀴가 굴러가지 않기 때문이다. 대회가 코앞에 닥쳤는데 궂은 날씨 때문에 밖으로 나갈 수 없어 방에서 발발 동동 구른 적도 많았다.

    허 선수는 지금까지 줄곧 남의 총을 빌려 썼다. 수백만 원씩 하는 총기를 구입할 형편이 못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대회에서는 처음으로 500만∼600만원이나 하는 총을 사용했다. 그는 새 총이 금메달을 따는 데 보탬이 됐다며 환하게 웃었다.

    “언감생심 꿈도 못 꿨던 새 총을 받아들었을 때 너무도 고맙고 뛸듯이 기뻤어요. 세련된 줄무늬에 색깔도 화려하고 예뻐, 총에 흠집이라도 날까봐 애지중지했습니다. 연습할 때는 타월로 만든 덮개를 총 놓는 받침대에 씌웠을 정도였죠.”

    수십 년 세월을 외톨이로 살아오면서 외로움과 쓸쓸함에 견디기 힘겨웠다는 허 선수가 오로지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야만 하는 ‘고독한 도전’을 선택한 것은 다소 의외다. 맞붙어 싸울 상대도 없고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함께 뛸 선수도 없는 사격은 정말 외로운 운동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외로울지 몰랐으니까 시작했지 처음부터 알았으면 절대 총을 잡지 않았을 거라고 그는 말한다.

    “국제적인 대회는 세계인의 이목이 집중되잖아요. 결선무대에 설 때면 꼭 발가벗겨진 채 혼자 무대에 올라 춤을 추는 것 같아요. 경기장에 들어설 때면 매번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가 된 듯한 묘한 기분이었죠.”

    지난 방콕아시안게임 때는 증세가 특히 심했다. 경기 당일 아침을 먹고 경기장으로 가는 버스를 타자 갑자기 머릿속이 아득해져왔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내가 왜 이런 걸 시작해서 도마에 올라야 하나’ ‘왜 이런 고통과 압박을 느껴야 하나’. 매번 시합 직전 찾아오는 극도의 두려움은 참아내기 쉽지 않았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2002년 화성 세계장애인사격대회를 앞두고 연습도중 부주의로 휠체어에서 넘어져 요추가 금가는 중상을 입었을 때다. 깁스를 할 수 있는 부위가 아니라 뼈가 붙을 때까지 꼼짝없이 누워 있어야 했지만 형편이 따라주지 않았다.

    “통증은 말할 것도 없고 누군가 대소변을 받아내고 밥도 챙겨줘야 하는데 주위에 도와줄 만한 사람이 없었어요. 별 수 없이 구청에 도움을 요청했고 자원봉사자가 일주일에 한 번 집으로 왔죠. 3개월 만에 간신히 뼈가 붙었고 연습 한번 제대로 못한 채 대회에 출전했어요.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엉덩이 한쪽을 든 채 총을 쏘았는데, 다행히 은메달을 땄습니다.”

    뼈에 금가도 포기하지 않아

    사격은 ‘평생 영세업체를 전전하며 단순노동이나 해야 하나’하는 암담함 끝에 찾아낸 희망이었다. 희망을 포기할 수 없다는 신념이 고비마다 허 선수를 이끌어주는 동력이 되었다.

    이번 아테네 장애인올림픽은 가는 길부터가 순탄하지 않았다. ‘비장애인’ 선수단과는 달리 이들은 전세기를 타지 못하고 영국 런던을 경유하는 먼 길을 돌아 36시간의 비행 끝에 아테네에 도착했다.

    “선수단에 준비된 휠체어가 하나밖에 없어 비행기에 타고 내리는 데만도 서너 시간이 걸렸어요. 지체장애인을 한 명씩 휠체어에 태워 일일이 이동시켜야 했으니까요. 아테네공항에 도착했을 때 선수들은 비행기 안에서 자기 차례가 언제 오나 기다리면서 지칠 대로 지쳤죠. 국제대회에 나갈 때마다 똑같은 일이 반복됩니다.”

    다리가 불편한 허 선수는 그나마 나은 편이다. 그러나 척추가 마비된 사람은 움직이지 않고 한 곳에 오래 있으면 십중팔구 욕창이 생긴다. 이번 대회 때 허 선수와 함께 출전한 여자 사격선수 한 명은 욕창에 걸린 채로 경기를 치러야했다. 당연히 성적이 좋을 리 없었다.

    사격에 입문하기 전 그는 사람들과 만나기를 꺼리는 소극적인 성격이었다. 그에게 사격은 삶에 활력과 용기, 희망을 불어넣어준 행운 자체였다. 하지만 바로 사격 때문에 종종 처량한 기분이 들기도 한단다.

    “TV에서 비장애인올림픽을 보고 있으면 서글픈 생각이 밀려옵니다. 하루에도 수차례 반복해서 경기장면을 보여주고 사람들은 뜬눈으로 경기를 지켜보죠. 하지만 장애인올림픽은 뉴스에 짧게 메달소식만 나오면 끝입니다. 장애인 선수들 사이에서 ‘우린 열심히 해봐야 텔레비전에도 안 나오고 알아주는 사람도 없는데 그냥 대충하자’는 자조적인 말들이 오갑니다.”

    이번 올림픽을 앞두고 그는 고민에 빠졌었다. ‘메달을 따야 한다’는 부담감이 아니라 ‘메달을 따야 하나, 말아야 하나’라는 갈등에 빠진 것. 현행 규정상 메달을 따서 연금이 나오면 기초생활수급자에서 제외되어 생계보조금을 받을 수 없고 무료 의료혜택도 없어지기 때문이다.

    “메달을 땄을 때 솔직히 기쁨보다 걱정이 앞섰습니다. 지난 시드니올림픽 때 금메달을 딴 장애인 선수가 있는데, 아버지가 참전 상의군인이라 영구임대아파트에 살았거든요. 그런데 금메달 포상으로 매달 60만원의 연금을 받게 되자 영구임대아파트에 살 수 있는 자격이 박탈되어 쫓겨났습니다. 이 문제는 생활형편이 어려운 장애인올림픽 출전 선수라면 누구나 안고 있는 고민입니다.”

    이런 사정이 알려지자 지난 10월1일 보건복지부는 아테네 장애인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선수들 중 기초생활수급자의 경우 메달을 따 연금을 받더라도 기초생활수급 자격을 계속 유지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허 선수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여러 기관에서 나온 방문객이 끊임없이 들이닥쳤고 전화벨은 쉴 새 없이 울렸다. 그로서는 난생 처음으로 받는 관심이었다.

    하지만 허 선수는 이런 관심이 마냥 좋지만은 않다고 한다. 방콕과 부산아시안게임에서 은메달을 땄을 때 누구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고, 이번 대회를 앞두고도 격려전화를 걸어준 사람 하나 없었다. 뒤늦게 생색내려는 사람들을 보면 고마움에 앞서 속상하고 화도 난다.

    장애인 선수에게도 관심과 지원을

    허 선수는 이번 대회를 계기로 ‘삶의 금메달’까지 건져 올렸다. 열정과 꿈이 그것이다.

    “생활이 안정되면 공부를 하고 싶어요. 공장 다닐 때 독하게 마음먹고 야학에 나간 적이 있는데 몇 달 못 가 그만두고 말았죠. 아침 6시부터 밤 10시까지 일하고 공부하는 게 몸이 불편한 저로서는 무리였던 것 같아요. 돈을 많이 벌면 노인들을 위한 요양원도 짓고 싶어요.”

    쉰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아직 미혼인 허 선수의 꿈에는 결혼이 들어 있지 않다. 28세 때 고향을 떠나기 전 혼담이 오간 적이 있었다. 하필 그때 안동 국립재활원에서 입소를 허가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고민 끝에 그는 결혼 대신 독립을 택했다.

    “생활기반을 갖춘 다음 결혼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게 지금까지 이어진 거예요. 공장과 기숙사를 오가는 외톨이 생활을 하느라 사람 만날 기회도 없었습니다. 그나마 정립회관을 다니면서 사람들과 알고 지내게 됐지만, 선배 선수들은 이미 다 결혼했고 미혼이라곤 20대 청년들뿐인데 어떻게 짝을 찾겠어요? 가끔 누군가 의지할 사람이 있었으면 하지만 이젠 나이도 있고 해서 포기했어요.”

    얼마 전 그는 부모님 묘소에 다녀왔다. 원주까지 먼 거리를 오가기엔 몸도 불편하고 바쁘다는 핑계로 살아계실 때 자주 찾아뵙지 못한 미안함을 금메달로 대신했다. 인터뷰를 마치려는데 허 선수가 조심스레 한 가지 바람을 털어놓았다.

    “태릉선수촌 같은 곳이 장애인 선수들에겐 없습니다. 올림픽 메달리스트에게 주는 특별격려금 액수도 차이가 많이 나죠. 장애인과 비장애인 구분 없이 비슷한 환경에서 맘껏 실력을 쌓을 수 있도록 평등한 지원이 이뤄졌으면 합니다. 장애인 선수를 대상으로 하는 실업팀도 생겨나서 선수 생활을 하면서 지원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으면 더욱 좋겠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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