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3월호

전 NHK 서울주재기자가 34년 만에 털어놓은 ‘김대중 납치사건 중대 증언’

“박정희가 이후락과 中情 국장 불러 ‘계획’ 칭찬, JP 정보비서관이 오사카에서 ‘교차확인’”

  • 황일도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hamora@donga.com

    입력2007-03-08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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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 NHK 서울주재기자가 34년 만에 털어놓은 ‘김대중 납치사건 중대 증언’

    \'일본 도쿄에서 납치된 지 5일 만인 1973년 8월13일 서울 동교동 자택으로 돌아온 김대중씨가 기자들에게 피랍경위를 설명하면서 울고 있다. 입술이 부르튼 모습이다.

    1973년 8월8일 오후 1시19분, 일본 도쿄 그랜드팔레스호텔 스위트룸에서 신병치료차 일본에 머물던 양일동 통일민주당 당수를 만나고 나오던 김대중씨는 괴한 6명에게 납치되어 옆방으로 끌려갔다. 괴한들은 김씨를 마취시켜 차에 태운 뒤 오사카 안전가옥을 거쳐 부두에서 배에 태우고는 부산으로 옮긴다. 부산에서 서울 안가(安家)를 거쳐 동교동 자택에 김대중씨를 풀어놓은 것이 8월13일 밤. 한국과 일본은 물론 미국까지 발칵 뒤집어놓은 이 사건이 이른바 ‘김대중 납치사건’이다.

    납치사건의 실행과정이나 일본에서 공작을 진행한 사람들의 신상 등은 3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상당부분 공개됐다.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의 지시를 받은 이철희 정보차장보와 하태준 해외공작국장이 수뇌를 이뤘고, 윤진원 단장을 비롯한 해외공작단원들이 실행을 담당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특히 1998년 2월 ‘동아일보’가 보도한 중앙정보부(이하 중정) 내부문서 ‘KT공작요원 실태조사보고’는 사건 실무자들과 중정 지휘라인의 관계를 명확하게 드러냈다.

    이 사건과 관련해 남아 있는 사실상 유일한 물음표는 박정희 대통령의 직접지시 혹은 사전인지 여부다. ‘KT…’ 문서는 박 대통령이 최소한 사후에는 인지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지만, 직접적으로 납치를 지시했는지는 규명하지 못했다.

    이후락 당시 중정부장은 대통령의 직접지시가 있었는지에 대한 공식 증언을 피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김대중 정부 시절 청와대는 여러 차례에 걸쳐 이 전 부장에게 사람을 보내 증언을 요청했으나 성과가 없었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설명. 김 전 대통령은 1987년 ‘신동아’ 인터뷰에서 “이후락 부장이 동향 출신인 최영근 의원에게 ‘박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김대중이 해치워버려’라는 말을 듣고, 한 달이 지난 뒤 다시 ‘왜 하라는데 안 하느냐’고 다그쳤다’며 당시 상황을 털어놓았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이후락 전 부장은 같은 해 역시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하늘에 맹세코 박 대통령의 직접 지시는 없었다”고 반박했다.

    강원도 평창이 고향인 천학범씨는 1949년 미국공보원(USIS) 근무를 시작으로 언론계에 발을 디뎠다. 1960년 NHK 서울지국에서 기자생활을 하며 29년간 격동의 한국현대사를 현장에서 취재했다. 국내 언론인에 비해 활동이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던 그는 박정희 정권의 핵심 실세들이나, 김대중 김영삼 등 주요 정치인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취재활동을 벌였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보도와 관련해 당시 보안사령부 서빙고 분실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기도 했다.



    1992년 ‘아사히신문’ 서울지국 상담역을 끝으로 언론계를 떠난 그는, 이후 고향 등지에서 칩거해왔다. 심장수술과 반신마비로 건강이 악화된 그는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그간 마음속에 담고 있던 이야기를 남기고 싶다”며 ‘신동아’에 취재를 요청했다. 특히 1973년 8월 벌어진 김대중 납치사건과 관련해 ‘확인은 했으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발설할 수 없었던 내용’을 공개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사건 발생 후 처리 문제를 둘러싸고 한일 간에 벌어진 막후협상에 관여했던 까닭에, 단순한 취재를 넘어서서 사건 진행의 내막에 깊숙이 접근할 수 있었다는 설명이었다.

    지난 1월 말과 2월 초순 몇 차례에 걸쳐 인터뷰에 나선 천씨는 건강 악화로 거동이 자유롭지 못해 말 한마디 하는 것도 힘겨워 보였지만, 상대의 말을 정확히 알아듣고 요점을 파악해 답하는 눈매는 여전히 날카로웠다. 다음은 그 가운데 사건관련 부분을 정리한 것이다.

    전 NHK 서울주재기자가 34년 만에 털어놓은 ‘김대중 납치사건 중대 증언’

    전 NHK 서울주재기자 천학범씨.

    “사전계획은 따로 있었다”

    “주지하다시피 1970년 대통령선거에서 낙선한 김대중씨는 이후 해외에서 유신을 비판하는 활동을 강력하게 전개했고, 이는 박 대통령에게는 큰 골칫거리였다. 문제는 박정희 정부에서 누가 ‘납치’라는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구체화했는가 하는 점이다.

    이와 관련해 당시 중정 국내파트의 K국장은 나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이후락 부장이 처음 아이디어를 낸 것은 맞지만, 자기가 그 실현 가능성을 타진했고 이를 이 부장과 함께 박 대통령에게 보고해 OK를 받았다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언제, 어떻게 보고했는지는 듣지 못했지만, 납치사건이 벌어지고 난 후에 박 대통령이 이 부장과 자신을 불러 식사를 하면서 칭찬한 적이 있다는 게 본인의 말이었다. 이후의 구체적인 실행은 훗날 알려진 것처럼 중정 해외파트에서 담당했다고 했다.”

    ▼ 사실이라면 박정희 대통령이 납치계획을 사전에 인지하고 있었다는 말인가.

    “그렇다고 생각한다. 아이디어 자체는 중정에서 올라갔다 해도 최종적인 승인은 박 대통령 본인이 내렸다고 본다. 이철희 당시 차장보를 중심으로 중정 해외파트만이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김대중 납치라는 사건 자체가 국내 정치상황에서 파생된 것 아닌가. 다만 박 대통령이 이 부장과 K국장만을 불렀다는 말로 미루어 국내파트 담당 차장을 비롯한 다른 인사들은 배제돼 있었던 것 같다. 내 기억으로도 당시 국내담당이었던 김치열 차장은 검찰 출신으로, 상대적으로 중정 내의 위상이 약했다.”

    김대중 납치사건의 기획과정에 이제까지 알려진 해외파트 이외에 국내파트 인사가 관여했다는 이러한 증언에 대해, 당시 중정 관계자들의 반응은 엇갈린다. “최소한 사건이 불러올 파장이나 파급효과에 대해 국내파트의 판단이 궁금하지 않았겠냐”는 의견이 있는 반면, “이런 류의 공작은 보안이 생명인데, 꼭 필요한 실행조 이외의 사람이 사전에 알 수 있도록 했을 리 없다”는 견해도 있다. 흥미로운 것은 주로 해외파트 출신 인사들이 국내파트의 관여 가능성을 주장하고, 국내파트 인사들이 그렇지 않다고 반박하는 모양새라는 점. 30여 년이 지난 사건의 정치적 의미가 여전히 적지 않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이에 대해 천씨가 지목한 K국장은 “내가 사전에 납치계획 수립에 관여했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그런 취지의 얘기를 누구에게도 한 적이 없다.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는 전혀 알지 못했고, 김대중씨가 동교동 자택에 도착한 날이 되어서야 상부로부터 ‘대비하라’는 지시를 처음 받았다”며 부인했다.

    박 대통령이 이후락 부장과 자신을 불러 식사를 하며 칭찬했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간혹 안가에 가서 대통령의 식사자리나 술자리에 참석한 일이 있고 잘된 일에 대해서는 칭찬도 받았지만, 김대중 납치와 관련해서는 그런 일이 없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의 직접지시와 관련해서도 “당시의 분위기로 미루어 ‘김대중 좀 어떻게 해보라’는 식으로 대통령이 한 말을 이후락 부장이 ‘과잉 해석’했을 수는 있으나 직접적인 지시가 있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덧붙였다.

    중정과 총리실의 견제관계

    다시 천학범씨에게 물었다.

    ▼ 중정 국내차장도 몰랐다면, 다른 권력핵심인사들은 납치계획을 사전에 몰랐다고 보는가.

    “내가 들어 알고 있는 또 하나의 사실은 당시 총리실 정보비서관 김홍래가 납치가 진행되던 바로 그 시점에 문제의 오사카 안가에 있었다는 것이다. 납치사건이 불거진 직후 김홍래는 나에게 자신이 특명을 받고 일본에 출장을 갔으며, 임무는 중정 실행조의 작전수행을 확인해 보고하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 당시 총리는 김종필씨였다(김종필씨는 1971년 6월부터 1975년 12월까지 총리를 지냈다). 총리 정보비서관이던 김홍래가 사건에 관여했다면, 김 총리로부터 지시를 받았다는 것인가.

    “김홍래는 누구에게 지시를 받았고 누구에게 보고했는지에 대해서는 함구했다. 다만 당시 나는 총리실 정보비서관이 일본에 출장을 갔다면 당연히 총리를 통해 지시가 내려갔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김홍래 비서관도 박정희 대통령과 친분이 두터웠으므로 박 대통령이 직접 김홍래에게 지시를 내렸을 수도 있다. 총리가 최소한 일본에서 무언가 사건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은 인지하고 있었을 가능성은 있다고 본다.”

    전 NHK 서울주재기자가 34년 만에 털어놓은 ‘김대중 납치사건 중대 증언’

    납치사건의 현장인 도쿄 치요다(千代田)구 그랜드팔레스호텔.

    1925년생으로 육사 10기인 김홍래는 5·16 당시 야전군사령부 중령 신분으로 쿠데타에 참여한다. 군 정보계통에서 오랫동안 일한 것으로 알려진 그는 대선을 앞두고 있던 1971년 3월 김종필 당시 공화당 부총재의 보좌역으로 임명됐고, 김종필 총리 취임 후에는 정보비서관으로 일했다. 황인성 총리실 비서실장 임명 당시 김 비서관이 정부 1급 공무원 모두의 인사카드를 검토해 김 총리에게 단수 후보자를 추천했고 총리가 이를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일화가 있을 만큼 JP의 신임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김종필씨가 총리 퇴임 한 달 후인 1976년 1월 공직에서 물러난 그는, 이후 칩거하다가 1995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 박 대통령이 중앙정보부 소속도 아닌 김홍래 비서관을 통해 이를 교차 확인해야 할 이유는 무엇이었겠나.

    “지금은 비밀도 아니지만, 당시 이후락 부장과 김종필 총리는 정적(政敵)에 가까운 관계였고 중정과 총리실도 견제관계에 있었다. 따라서 박 대통령으로서는 중정이 일을 제대로 진행하고 있는지, 다른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는지 별개의 루트를 통해 확인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 일에 가장 적합한 조직이 총리실이었고, 가장 적합한 인물이 정보를 담당했던 김홍래라고 판단한 게 아닐까 생각한다.

    이 역시 처음으로 공개하는 일이지만, 박 대통령이 대선에서 승리하고 김종필을 총리로 임명한 1971년 무렵 김종필의 측근들은 중앙정보부가 정보를 독점하는 상황을 경계해 독자적인 정보보직을 만들기도 했다. 차기 대권 승계를 기대하려면 독자적인 정치정보를 확보해야 한다는 구상이었다. 그 실무 책임자가 김홍래 비서관이었고, 내게도 도움을 청했다. 이후 김홍래는 중정 요원 일부와 경찰 정보요원을 끌어들여 구체적인 설립작업을 진행했다.

    그러나 이후 박 대통령은 유신을 통한 장기집권으로 마음이 기울었고, 그 추진작업의 중심에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후락 부장이 있었다. 김홍래의 정보조직에 참여했던 중정 요원 하나가 김종필의 대권 승계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정보조직의 실체를 중정에 보고했다. 이에 따라 중정측은 강력하게 항의했고, 문제의 조직은 1972년 10월 유신 선포 직전에 해산됐다.

    1970년대 초반 이후락과 김종필의 관계, 특히 중정과 총리실의 관계에는 그러한 대립구도가 있었다. 저간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나로서는 중정의 김대중 납치를 이중으로 감독하기 위해 오사카에 다녀왔다는 김홍래의 이야기에 충분히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JP, “사전에 전혀 알지 못했다”

    ▼ 상당히 민감한 내용이고 공개될 경우 김홍래 비서관으로서는 사건의 책임을 져야 할 수도 있을 텐데, 굳이 이를 천 선생에게 이야기해야 할 이유가 있었나.

    “무엇보다도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앞섰을 것이다. 김홍래와 나는 아내들이 고등학교 동창이어서 이전부터 매우 가까운 사이였고, 특히 총리실 정보비서관이 된 후에는 내게 이러저러한 도움을 청하는 일이 많았다. NHK 기자로서 국내외 정치인들을 제약 없이 접촉할 수 있는 내 신분이 그에게도 요긴했을 것이다. 앞서 정보조직의 경우도 있었지만, 당시 김홍래와 나의 관계는 단순한 취재원과 기자의 관계만은 아니었다. 나 역시 김종필의 대권승계가 박 대통령의 장기집권을 막는 한 방법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열심히 조력했다.

    그러한 이유로 김홍래와 나는 수집한 정보의 상당부분을 공유했고, 또 철저히 보안을 유지했다. 김홍래는 자신의 이야기가 세상에 공개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을 것이다. 나 또한 그가 죽은 후에도 약속을 지켰고, 이제 내가 세상을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털어놓는 것이다.”

    이 같은 증언은 두 가지 의미에서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우선 중정 소속이 아닌 다른 사람, 특히 이후락 부장과는 견제구도에 있었던 총리실 소속인사가 사건에 일부 관여한 게 사실이라면, 이는 중정부장보다 윗선인 청와대의 지시와 사전인지가 있었음을 입증한다. 또한 당시 총리였던 김종필씨가 과연 자신의 측근이던 정보비서관의 움직임을 알았다면, 그 역시 김대중 납치계획을 사전에 알았을 수 있다는 추론도 가능하다.

    전 NHK 서울주재기자가 34년 만에 털어놓은 ‘김대중 납치사건 중대 증언’

    1998년 ‘동아일보’가 입수해 보도한 ‘KT공작요원 실태조사보고’ 중 ‘사건 관여 인사 일람표’. 관련자들의 직급과 이름, 당시 직책과 1979년 직책, 현직에 대한 의견과 그들의 희망을 들어주기 위한 방안 등이 적혀 있다. 오른쪽 위에 비밀문건을 의미하는 `秘`자가 보인다.

    그러나 김 전 총리는 사건 발생 직후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사전에 전혀 알지 못했다”고 말해왔다. 사건이 발생한 지 40여 일이 흐른 9월24일 제88회 국회 본회의에서 김영삼 당시 신민당 의원의 내각 총사퇴 주장에 대해 김 총리는 “언제까지 진범들을 잡겠다고 말씀드릴 수 없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다”며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와 관련해 ‘신동아’는 김 전 총리에게 질문지를 띄웠다. 1973년 8월 김 전 비서관의 오사카 방문을 지시한 사실이 있는지, 지시를 내린 적이 없다면 사전에 인지했는지, 혹은 후에라도 관련보고를 받았는지 등에 대한 것이었다. “김대중 납치에 대해 사전에 전혀 아는 바 없었다”는 이전의 주장에 변화가 있는지도 물었다. 이에 대해 김 전 총리측은 “김홍래 비서관을 일본에 보낸 적이 없으며, 간 사실도 없는 것으로 기억한다. 정확한 것은 당시의 출입국관리기록을 확인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사전에 납치계획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으며, 사후에도 김 비서관으로부터 따로 보고받은 사실이 없다”고 답변했다.

    마에다 전 NHK 회장의 막후교섭

    김홍래 비서관이 오사카 안가에서 중정 라인과는 별도로 감시 임무를 수행했다면, 이를 확인해줄 수 있는 이들은 당시 납치실행을 맡았던 인물들. 그러나 현장에 있었던 윤진원 전 단장이나 김동운 전 서기관 등은 소재를 찾기 어려웠다. 사건 직후 퇴직했다가 1977년 복직해 1980년에 완전히 은퇴한 윤 전 단장은 2000년대 초반까지 서울 이태원동에서 살며 골프로 소일했지만 이후 전직 중정 간부들에게 “해외로 나가 살겠다”는 말을 남기고 잠적했다. 김 전 서기관은 귀국한 이후 중정 방계회사에서 4~5년 근무하다 역시 이민을 갔다는 게 전직 중정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김대중 납치사건은 이후 한일 간에 심각한 외교문제로 떠올랐다. 현장에서 당시 주일한국대사관 김동운 1등 서기관의 지문이 발견되고 김 서기관이 중정 파견요원이라는 보도가 이어지면서 일본 언론과 정계는 들끓었다. 사건을 주권침해로 규정한 일본 정부는 경제협력 등 한일관계를 중단하겠다는 강수를 뒀다. 이후 양국 정부는 다양한 막후접촉 끝에 ▲김대중의 해외체류 중 활동에 대한 면책과 ▲총리 김종필의 ‘진사(陳謝) 방문’ 수락을 조건으로 논의를 공식 종결하기로 합의한다. 사건 발생 3개월 만의 일이다. 다시 천학범씨의 설명이다.

    “당시 일본측의 반응, 특히 일본 경찰의 반발은 매우 거셌다. 1960년대 후반에 주한 일본대사관에 파견근무를 했던 가가 오사무라는 간부가 있었다. 경찰이 정보수집을 담당하는 일본은 해외파견 경찰관이 해당국 정보수집 업무도 수행했다. 당시 나는 그에게 한국 정치사정에 대한 자문을 제공했는데, 내게 김대중씨와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하기에 자리를 만들어준 적도 있다.

    묘하게도 납치사건이 발생했을 당시 가가 오사무는 도쿄 경시청에서 근무하고 있었고, 납치사건의 초기 수사에 참여한 담당자가 됐다. 가가 오사무는 ‘이건 우리 집에 흙 묻은 신발을 신은 채 들어와 사람을 납치해 간 것”이라며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경찰을 비롯해 검찰, 정보, 공안담당 간부들은 ‘김대중의 원상회복(일본 출국 허용)과 김동운의 체포, 신병인도’를 주장했다. 다나카 총리로서도 쉽게 무시할 수 없는 요구였다.

    따라서 일본측의 초기 막후접촉은 이러한 요구를 서울측이 받아들일 수 있는지 타진하는 데 초점이 모아졌다. 다나카 총리는 마에다 요시노리 전 NHK 회장에게 한일 간의 막후채널 노릇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마에다 회장은 이미 현직에서 물러나 해외에 있다가 막 귀국한 참이었는데, 다나카 총리의 청을 받고 서울에 날아와 조선호텔에 묵으며 김종필 총리를 접촉하고자 했다. NHK 서울지국도 그 일에 힘을 보탰고, 한국 정치인들과 친분이 있던 나는 막후협상에서 연락업무를 맡았다.

    마에다 회장은 우선 한국 공보부에 총리 인터뷰를 정식으로 신청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나를 비롯한 NHK 사람들을 통해 비공식적인 사전 의사타진을 맡겼다. 당시 마에다 회장이 다나카 총리로부터 받은 세 개 항목은 ▲이 문제는 ‘외교적으로’ 해결한다 ▲김대중을 일본에 원상복귀시킨다 ▲김동운을 일본 경찰에 출두시킨다는 것이었다. 일본 국내 분위기가 강하게 반영된 항목이었고, 이 가운데 한국측이 수용할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인지 타진해보라는 것이었다.

    육군첩보부대(HID) 인맥과 김대중 납치사건

    “군 출신 이철희, 첩보부대 인맥만으로 일 처리해 ‘거친’ 플레이”


    취재과정에서 접촉한 1970년대 당시 중정 관계자들은 납치를 실행한 인물들과 관련해 흥미로운 분석을 들려줬다. 이들이 모두 중정이 창설된 후 육군첩보부대(HID)에서 옮겨온 인물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군 첩보기관에서 몸에 익은 ‘거친 방식’이 나타나 한일 간의 외교 문제를 촉발하는 도화선이 됐다는 얘기다. 한 관계자의 설명이다.

    “사건 초기 일본 경찰에서는 ‘이게 과연 한국 중정이 한 일이냐. 그랬다면 이렇게 허술하게 일을 처리할 리 있겠느냐’는 의견이 있었다고 들었다. 현장에 지문을 남기고 주일공사관 등록 차량으로 김대중씨를 옮기는 등 아마추어나 저지를 만한 실수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1961년 창설될 당시 공작업무 경험자가 부족했던 중앙정보부는 휴전선 단기공작(대북침투)을 맡았던 군 정보부대 출신 인사들을 꾸준히 ‘영입’한다. 대표적인 경우가 육군방첩부대장을 지낸 이철희 전 차장. 이들은 이후에도 첩보부대에서 동고동락했던 옛 동료들을 해외파트로 불러들였고, 이들 중 상당수가 해외공작국 산하 공작단에서 활동했다. 군사정권 시절 위세등등하던 이들 ‘인맥’의 기세는 중정 내의 공채 출신 직원들을 ‘문관’으로 부르며 무시할 정도였다는 회고다.

    김대중 납치사건을 실행에 옮긴 것으로 확인된 이들은 모두 육군첩보부대 출신이다. 이철희 당시 차장보와 함께 실행계획을 마련했던 하태준 해외공작국장, 현장책임자였던 윤진원 해외공작단장은 1961년 중정이 창설되면서 HID에서 자리를 옮긴 인물들이다. 주일대사관에서 근무했던 김기완 당시 공사와 김동운(본명 김병찬) 1등서기관 등도 모두 1960년대 후반 HID에서 공작관으로 일하다 자리를 옮긴 인물들이라는 게 당시 중정 관계자들의 회고다.

    그때나 지금이나 해외파트 직원들은 대사관 및 영사관 근무가 일반적인 과정이다. HID 출신 인사들은 외국어 실력이 부족해서 그나마 일제 강점기의 경험으로 기초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한 일본 근무를 선호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1973년 당시에 주일대사관에 파견된 중정 요원들의 상당수가 HID 출신이었다는 것이다.

    이후락 부장으로부터 납치공작 지시를 받은 이철희 차장보는 보안유지를 위해 일본에 있던 자신의 인맥만을 동원해 사건을 준비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외교문제를 의식해 ‘깔끔한 일처리’가 필요했던 일본 공작에서, 대담하고 신속한 행동을 중시하는 대북공작 시절의 활동 패턴이 나와 ‘아마추어적인 실수’를 저지른 것”이라고 당시 중정 관계자들은 입을 모았다.

    김대중 납치사건 자체가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지만, ‘실무적으로’ 평가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를 김 총리측에 물었고, 김 총리는 박 대통령에게 보고해 뜻을 물었던 것으로 전해들었다. 그에 대한 회신은 ‘외교적 처리’는 동의할 수 있지만 김대중의 원상복귀는 불가능하다, 김동운은 한국 내 규정에 따라 면직 처리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마에다 회장은 김대중의 원상복귀가 불가능하다면 최소한의 신변안전을 약속받을 수 있어야 일본측의 체면이 선다고 판단했다. 양측 모두 그 정도면 OK라고 했고, 이튿날 마에다 회장과 김종필 총리가 만났다. 그 결과가 11월 양국 총리의 합의였다.”

    ▼ ‘외교적 처리’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한국과 일본이 서로 자국 국민에게 다른 내용의 발표를 할 수 있도록 양해하는 것으로 생각하면 된다. 한국은 ‘정치적으로 해결했다’는 정도로 발표하고, 일본은 한국이 일본에 와서 ‘사죄했다’고 발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일본은 최소한의 자존심을 챙기고, 한국은 중정의 개입에 대해 공식적인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었다.

    실제로 11월 김종필 총리는 일본을 방문해 다나카 총리에게 사죄의 뜻을 전했다. 이때 귀국하던 김 총리는 비행기 안에서 기자들에게 “내가 한 일도 아닌데 왜 내가 수모를 겪어야 하느냐”고 하소연하기도 했다.

    실질적 조치가 없었으므로 일본 국내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지만 ‘사죄’라는 표현이 자존심을 살려준 것도 사실이다. 여기엔 양국 경제관계를 고려한 다나카 총리의 고심이 반영돼 있다고 생각했다. 한일 간의 교역이 단절될 경우 막대한 손실을 입는 일본 기업들의 로비가 워낙 치열했기 때문이다. 여러모로 박정희 정부는 운이 좋았다. 배짱이 있는 일본 총리와 마에다 같은 노련한 교섭자가 있었으니까.

    이후 일부에서는 당시 김 총리가 다나카 총리에게 무마금 조로 4억엔을 줬다는 주장이 나온 적이 있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이들이 나에게도 찾아와 사실확인을 요청했지만, 내가 아는 한 이것은 사실이 아니고 막후접촉 과정에서도 그런 논의는 없었다. 당시만 해도 일본 총리 같은 유력 정치인은 4억엔에 그런 정치적 부담을 질 정도로 자금사정이 궁하지 않았다. 일본의 ‘양보’를 납득할 수 없었던 이들은 그런 의심을 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내가 아는 한 돈 거래는 없었다.”

    ▼ 일본 경찰의 반발은 어떻게 무마됐는가.

    “무마되지 않았다. 그냥 무시됐을 뿐이다. 합의 이후 일본 정부는 이 문제를 공식적으로 거론하지 않았지만, 도쿄 경시청은 김대중 납치사건 수사본부를 해체하지 않았다. 사건 이튿날 만들어진 수사본부는100명 안팎의 대규모였다. 1983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해산했지만 지금도 형식상 체계는 남아 있고 아직도 공식적으로는 ‘수사 중’이다. 심지어 수년간 주일 한국대사관 주재 경찰관이 경시청이나 다른 일본 정부기관을 방문하는 것조차 허가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언제든 김대중씨가 일본에 오면 자신들이 직접 찾아가서 방문조사를 하겠다는 의지도 내비쳤다. 그 때문에 김대중씨도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는 일본 방문을 자제한 것으로 안다. 1993년 무렵 미국에서 귀국하는 길에 나리타공항에 중간 기착했을 때는 실제로 경시청 관계자들이 청취조사를 하기도 했다. 심지어 대통령에서 물러난 후에도 일본 방문 때마다 ‘추가수사 협조’를 요청했다고 들었다. 일본인들의 무서운 일면이다.”

    30년 만의 기지개

    2004년 11월 출범한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과거사위)’는 당초 설정했던 7개 ‘우선조사 대상’ 가운데 6건에 대해서는 조사결과를 발표했지만, 김대중 납치사건에 대한 조사결과 발표는 아직 이뤄지지 않고 있다. 사실상 과거사위의 ‘마지막 숙제’인 셈이다.

    결과 발표가 계속 연기되는 이유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흘러나오지만, 과거사위의 조사에 대한 일본측의 반발도 한몫을 하고 있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말이다. 다나카-김종필 합의에 따라 공식 종결키로 했는데 한국 정부가 이를 재조사하는 것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왔다는 것이다. 외교통상부 등 한국 정부 일각에도 ‘새로운 외교문제 야기’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지난해 9월26일 일본 ‘산케이신문’은 일본 정부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과거사위가 납치사건 조사결과를 발표할 것이며 일본 경찰당국은 사건 재수사 방침을 굳혔다”고 보도했다. 서둘러 봉합했던 사건이 30여 년 만에 기지개를 켜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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