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3월호

상류층 진입 신고? ‘그랜저 TG’를 타는 사람들

졸부·조폭 ‘권위’ 벗고, ‘성공한 3040 전문직’ 감성 싣고

  • 최영철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ftdog@donga.com

    입력2007-03-08 16: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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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류층 진입 신고? ‘그랜저 TG’를 타는 사람들
    “이렇게 많이 팔리리라곤 생각조차 못했지요. 당황스럽습니다.”

    지난 한 해 현대자동차 임직원들은 신형 그랜저(‘그랜저 TG’)의 눈부신 판매실적에 넋을 잃었다. 2005년 5월 출시된 그랜저 TG는 지난해 말까지 19개월간 14만1083대가 팔려 나갔다. 1998년 출시된 그랜저 XG의 7년간 총 판매량 30만여 대의 절반에 가깝다. 2006년 한 해 그랜저 TG의 판매량은 그랜저 XG의 2004년 실적과 비교해 내수와 수출물량 모두 2배 이상 늘었다. 말 그대로 ‘대박’이 터진 것이다.

    지난해 LPG차(장애인용, 렌터카, 영업용)를 제외한 현대 쏘나타의 판매 실적은 6만5000대 수준. 그런데 그랜저 TG도 가스차 21%를 제외하면 6만5755대가 팔렸다. 2005년 12월과 2006년 1월에는 국내 모든 승용차 브랜드 중 1개월 판매량 기준으로 연속 1위를 차지했다. 국내 대형승용차 판매기록으로는 전무한 실적이다.

    영업사원들은 신이 났고, 초창기에 차를 주문한 사람들은 길게는 두 달 이상을 기다려야 ‘애마’를 만져볼 수 있었다. 현대자동차 서울 강남지역 판매왕 차동환 차장(선릉지점)은 “현대차 입사 13년 이래 대형승용차를 이렇게 많이 팔아본 것은 처음이다. 판매왕인 나조차 믿기지 않는 실적”이라고 했다. 그는 그랜저 TG 출시 후 지난해 말까지 88대의 TG를 팔았다. 그랜저 단일 상품으로만 혼자 30억원 이상의 매출을 올린 셈이다. 그랜저 TG가 어느새 전체 대형승용차 시장의 63% 이상을 차지하자 자동차 전문가들은 “TG가 잠재하는 국내 대형승용차 수요를 진공청소기처럼 빨아들이고 있다”고 혀를 내두른다.

    그러나 정작 현대자동차 내부에선 이런 세몰이에 대해 우려도 쏟아지고 있다. 지난 20여 년간 그랜저라는 브랜드가 유지해온 희소성이 평가절하되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다. 대중화에 따른 ‘개체존엄성’의 파괴는 차의 성능, 디자인과 관계없이 대형승용차로서 그랜저의 ‘고품격’ 이미지를 손상할 가능성이 크다.



    角 그랜저, 깍두기, 그랜다이저

    일반적으로 동일한 브랜드의 상품가격이 올라가면 수요는 줄어드는 게 정상이다. 그런데 그랜저 TG는 이전 브랜드인 그랜저 XG 동급보다 판매가격(옵션 품목을 제외한 기본가격 기준)이 평균 691만원이나 올랐는데도 판매량은 2004년보다 오히려 2배 이상 늘었다. 자동차업계에서 ‘출시효과’로 불리는 판매량 반짝 증가 현상(출시 후 5개월)이 끝난 지도 1년이 넘었지만 그랜저 TG의 인기는 식을 줄 모른다.

    한국인에게 그랜저는 ‘부자와 상류층의 차’라고 각인돼 있다. 탈 수 있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이미지가 강하다. 그렇다면 그랜저 TG의 이 같은 폭발적인 판매세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불과 몇 년 만에 고급 대형승용차를 구입하고 유지할 만한 부자와 상류층이 그만큼 늘어났다고 보기도 어렵고, 그랜저가 준중형차나 중형차로 ‘다운그레이드’ 된 것도 아니다. 이를 이해하려면 우선 지난 20여 년간 4세대를 이어온 그랜저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상류층 진입 신고? ‘그랜저 TG’를 타는 사람들

    <b>1</b> 1986년 7월 출시된 최초의 그랜저, 일명 ‘각 그랜저’. <b>2</b> 1992년 9월 출시된 뉴그랜저. ‘백(白) 그랜저’의 효시. <b>3</b> 1998년 10월 출시된 그랜저 XG. <b>4</b> 2005년 5월 출시된 그랜저 TG.

    그랜저가 부자의 차, 상류층의 차로 자리매김한 것은 1986년 국내 최초의 대형승용차로 탄생한 일명 ‘각(角) 그랜저’ 시판 때부터다. 차의 외형에서 곡선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네모반듯하게 각이 진 이 차는 ‘위엄’ ‘권위’ ‘웅장’의 뜻을 가진 ‘Grandeur’라는 영문명과 딱 들어맞았다. 국내 대형승용차 시장의 80% 이상을 점유했던 ‘각 그랜저’의 6년간 판매실적은 9만2517대. 차를 가진 것만으로도 부자 소리를 듣던 시절이니 그랜저가 부와 명예, 상류층의 상징이 된 것은 당연했다.

    그 후 그랜저는 대형승용차의 상징이자 기준이 되었다. 배기량이나 차체 크기가 그랜저와 같거나 크면 대형차, 작으면 중형차로 구분된 것. 자동차관리법상 배기량 2000cc를 기준으로 이상이면 대형승용차, 이하면 중형승형차로 구분한다. 첫 출시된 ‘각 그랜저’의 배기량은 2000, 2400, 3000cc였다. 그랜저의 최소 배기량이 대형승용차의 법적 기준이 된 것이다. 이 기준은 지금도 그대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땅 투기로 큰돈을 번 졸부들이 유행처럼 ‘각 그랜저’를 사들이고, 이 차가 일본 미쓰비시의 ‘데보네어’를 그대로 들여와 외양만 조금 바꾼 차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일제라면 맥을 못 추는 교양 없는 졸부의 차’라는 인식이 덧씌워진다. 또한 영화에 조폭 두목이 ‘각 그랜저’를 타고 다니는 장면이 자주 나오면서(실제로도 많이 탔다) 이미지는 더욱 실추됐다. 조폭을 ‘깍두기’라고 표현하게 된 것도 이 무렵부터다. 각진 스포츠형 머리에 ‘각 그랜저’를 탄 조폭이 사각형 무김치인 깍두기와 닮았기 때문이다.

    그랜저의 이미지는 이렇게 조직의 장이나 사장, 보스, 상류층의 차로 굳어졌다. 사람들은 그랜저를 어린이 로봇 만화영화의 주인공인 ‘그랜다이저’라고 부르기도 했다. 졸부와 조폭, 교양 없는 상류층의 차라는 비아냥이 섞인 표현이었다.

    그랜저 XG의 불운

    1992년 9월 현대차는 ‘뉴그랜저’를 출시하며 ‘각 그랜저’의 딱딱한 이미지에서 벗어나려 안간힘을 썼다. 광고에 여성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 배우 고소영이 ‘구미호’라는 영화에서 흰색 뉴그랜저, 일명 ‘백 그랜저’를 몰고다니는 장면은 지금껏 많은 사람의 뇌리에 박혀 있다. 검은색 일색의 ‘각 그랜저’만 봐온 사람들에겐 신선한 충격이었다.

    직선이 곡선으로 바뀌고 차체와 실내공간이 훨씬 넓어졌지만 중후하고 권위적인 느낌은 그대로 유지됐다. 유럽식 다이내믹 세단을 추구한 뉴그랜저는 사양과 엔진이 고급화(3500cc)하면서 ‘졸부와 조폭의 차’라는 인식을 어느 정도 씻어내는 데 성공한다. 그랜저 브랜드가 지금과 같이 긍정적인 의미의 ‘상류층, 지도층의 차’로 자리잡은 데는 뉴그랜저의 몫이 컸다. 뉴그랜저는 1996년 ‘다이너스티’가 출시되면서 1등 대형차의 자리를 내줬다.

    1998년 10월에 출시된 그랜저 XG는 여러모로 ‘불행한’ 차다. 비록 TG가 나오기 전까지 7년간 30만대가 팔렸지만 출시 2년 전에 나온 ‘다이너스티’와 1999년 출시된 ‘에쿠스’ 같은 초대형차들에 치여 부자와 상류층의 차라는 이미지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현대차가 자체 개발한 196마력 시그마 3.0 V6 DOHC 엔진이 장착됐지만, 3500cc급을 다이너스티에 내주면서 그랜저 XG는 에쿠스와 다이너스티에 이은 ‘3등 준대형차’ 신세로 전락했다. ‘체어맨’과 ‘오피러스’와 같은 상위급 차량들이 나온 것도 이 시기다.

    상류층 진입 신고? ‘그랜저 TG’를 타는 사람들
    전장(차의 길이)도 10cm 이상 줄었다. 차량 내 공간이 좁아 기사를 두고 뒷자리에 앉는 고급차라는 가치도 퇴색했다. ‘오너용 차량’이 되고 만 것이다. 일부 관공서를 제외하고는 조직의 대표가 그랜저를 타는 경우는 드물게 됐다. 조폭 두목도 더 이상 그랜저를 타지 않았다. 그랜저는 조폭 사회에서조차 행동대장급이 타는 차로 강등됐다.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2004년에는 날렵한 유선형 디자인에 ‘대형 스포츠카’라는 수식어가 붙은 ‘SM7’이 출시돼 그랜저 XG는 또 대형승용차 시장의 일부를 빼앗긴다. SM7은 ‘세계 10대 엔진’이라고 평가되는 VQ 엔진을 장착하고 교통사고의 특성에 따라 방어시스템이 따로 제어되는 인공지능 안전장치와 스마트키를 채택해 젊고 부유한 전문직 종사자와 자동차 마니아층을 흡수했다.

    직선도 아니고 유선형 스타일도 아닌 어정쩡한 그랜저 XG는 디자인을 중시하는 감각적인 상류층에게 외면당했다. ‘EF 쏘나타’와 잘 구별되지 않는 콘셉트도 문제였다. 세련된 하드 탑 스타일에 ‘각 그랜저’를 얹어놓았다는 조롱이 쏟아진 것도 그 때문. 그랜저가 과연 부자와 상류층의 차인가 하는 의문이 또 한 번 제기되는 대목이었다. 상류층 입성을 준비 중이던 중산층은 그랜저 XG 대신 비슷한 가격에 크고 실용적인 레저용 차량(RV)으로 눈을 돌렸다. 더구나 휘발유 값은 하루가 멀다하고 오르는데 디젤 값은 그 절반이었다.

    렉서스 ES350이 주적(主敵)

    이런 트렌드에 위기의식을 가진 현대차는 마침내 XG보다 차체가 크고 최저 배기량과 최고 배기량을 파격적으로 올린 새로운 개념의 그랜저(TG)를 내놓았다. 차의 길이와 넓이 높이 모두 이전보다 몇 cm씩 늘었다. 현대차가 명운을 걸고 개발했다는 람다 V6 엔진(3300cc)과 뮤 V6 엔진(2700cc)도 장착됐다. 2000, 2500, 3000cc이던 배기량도 2700, 3300, 3800cc로 상향 조정됐다.

    뒷좌석은 수입차를 포함해 동급 어떤 차량보다 넓어졌고, 차량 내 공간은 100kg이 넘는 사람 4명이 안기에도 넉넉하다. 운전석 공간도 넓어졌다. RV를 몰던 운전자가 앉아도 갑갑한 느낌이 없도록 시야도 탁 트였다. 대형 타이어를 장착해 전고가 다른 차보다 높고, 후드의 유선형 디자인이 시야를 터주는 기능을 하기 때문. 한마디로 오너 드라이버도 만족시키면서 대형 승용차의 품위도 지켜낸다는 콘셉트다.

    2005년 5월 그랜저 TG를 출고하면서 현대차는 19년 전의 브랜드명인 ‘그랜저’로 회귀했다. 사실 ‘그랜저 TG’는 제품 프로젝트명이고 실제 브랜드명은 그냥 ‘그랜저’다. 19년 전 브랜드를 부활시킨 것은 국내 대형승용차 시장에서 밀려날 수 있다는 위기감을 잠재우고 옛 명성을 되찾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현대차는 신형 그랜저에 ‘럭셔리’ ‘프리미엄’ 같은 온갖 수식어를 동원했다. 신형 그랜저를 타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 차에는 에쿠스와 대형 수입차의 사양이 모두 들어 있다. 현대차는 모델별로 다른 마케팅 방식을 동원한다. 배기량 3300cc 이상 모델(L330, S380)은 주로 동급 수입차와 맞서기 위해 고품격과 중후함, 안락함을 강조했고, 배기량 2700cc(Q270) 모델의 경우에는 품질과 신뢰성을 바탕으로 감성적 이미지에 호소했다. 엠블렘에서 L은 ‘Luxury’, Q는 ‘Quality’를 상징한다. 배기량 3800cc급인 S380은 처음에는 ‘아제라’라는 이름의 수출용 모델이었지만 대형 수입승용차와 맞서기 위해 내수 판매가 결정됐다.

    신형 그랜저의 방송광고 콘셉트도 완전히 다른 두 가지로 나뉜다. 수입차에 대한 공격용 광고가 그 하나이고, 성공한 중산층을 위한 감성적 이미지 광고가 다른 하나다. 수입차 대응용 광고의 카피는 아예 대놓고 ‘한번 붙어보자’며 싸움을 건다. 다른 광고에는 없던 ‘럭셔리’라는 문구도 이때 출현한다. “지금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수입차가 있다면 한번 타보고 오십시오.” “수입차를 타보신 분들께 묻습니다. 당신이 누리고 싶은 가치는 무엇입니까.”

    현대차는 일본 도요타가 만든 명차 브랜드 렉서스의 ‘ES350’을 ‘주적(主敵)’으로 설정했다. 그래서 두 차를 비교 시승하는 행사까지 벌이고 있다(기사 뒷 부분 상자기사 참조). 시승에 참가한 자동차 전문기자들의 반응은 “그랜저 S380이 절대 뒤지지 않는다”로 모아졌다. 그랜저가 렉서스보다 2000만원 이상 싸지만 성능은 뒤지지 않거나 일부 항목에서 아주 미미하게 떨어지는 수준이라는 것. 그랜저 수출모델인 S380(아제라)은 미국에서 실시한 소비자 만족도 조사에서 국내 수출차량 중 처음으로 전체 승용차 부문에서 1위를 기록하는 등 각종 조사에서 1, 2위를 다투고 있다.

    상류층 진입 신고? ‘그랜저 TG’를 타는 사람들

    2007년 2월4일 정기모임을 가진 클럽TG 서울·경기지역 회원들. 이들 대다수가 설문에 응했다.

    기자도 현대차에서 제공하는 그랜저 TG S380과 렉서스 ES350을 시승하며 비교해봤지만, 비전문가라 그런지 성능이나 기능 차이를 별로 느낄 수 없었다. 오히려 편의사양과 옵션은 그랜저가 한국인의 취향에 더 가깝게 설계됐다는 느낌이었다. 또한 렉서스는 날렵한 외형 때문에 전고가 낮고 앞유리가 좁은데다 후드가 시야를 많이 가리는 구조여서 체구가 크거나 앞으로 바싹 당겨 운전하는 사람은 머리 위가 답답하고 시야가 좁아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렉서스의 단종 모델인 ES330을 미국에서 몰아본 경험이 있다는 한 기업 임원은 “한국에 들어와 그랜저 XG와 그랜저 TG L330을 몰아봤는데, TG가 기능과 성능, 디자인 면에서 렉서스에 뒤질 게 없다”며 “렉서스가 명차인 것은 틀림없지만 이제 그랜저도 대형승용차 분야에서 명차 반열에 오를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고 높이 평가했다.

    주 구입자는 중산층

    그러나 그랜저 TG의 가공할 인기몰이의 주역은 수입차 대응모델을 산 사람들이 아니다. 지난해 TG를 구입한 8만4861명 중 장애인용, 렌터카, 영업용 22%를 제외하고 L330 이상의 모델을 산 사람은 11%에 불과하다. 나머지 67%는 모두 Q270 모델을 샀다. Q270 모델을 구입한 사람의 대부분은 중형차나 일반 RV를 몰던 이. 그랜저 XG를 타던 사람들은 주로 L330 모델로 옮겨갔다. 다이너스티가 그랜저 TG의 출시와 함께 사라졌고, 에쿠스나 체어맨을 사기에는 가격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은 현대차의 마케팅 분석 자료에서도 확인된다. 자료에 따르면 L330 모델 이상을 구입한 사람들은 ‘준대형차(그랜저 XG급)와 고급 RV를 몰던 사람들’이라고 한다. Q270 모델을 구입한 경우는 쏘나타급을 보유한 사람의 ‘전환 구매’가 가장 많았다. 그랜저 TG 구입자의 이전 소유 차종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중형 57.1%, 준대형 13.7%, RV 10.9%, 미니밴 6.6%, 대형 1.6%, 소형 0.5% 순이다.

    지난 10년 동안 소형승용차와 중형승용차 판매시장은 각각 80%와 37% 급락한 반면, 대형승용차 시장은 2배 이상 늘었다. 그러나 소형차, 중형차 시장에서 급감한 수요를 대형차 시장이 모두 흡수했다고 하기에는 대형차의 절대적 판매량이 턱없이 모자란다. 이는 중형차나 일반 RV를 타다 좀더 좋은 차를 사려는 사람들 중에 대체 차종을 선택하지 못해 망설이는 사람이 그만큼 많았다는 얘기다.

    한 차량을 5년 이상 탄 사람이라면 큰 변고가 없는 한 대체 승용차의 그레이드를 낮춰 사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렇지만 자유롭고 역동적인 스타일을 선호하는 중형차 및 RV 소유자는 중후하고 전통적이며 딱딱한 이미지의 대형차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특히 디젤 가격의 폭등은 RV 운전자에게 차량을 바꾸고 싶은 충동을 안겨줬지만 그들이 기대하는 가격과 디자인, 성능을 만족시키는 대형승용차를 찾기 어려웠다.

    그러니 그랜저 판매량의 66%를 차지하는 Q270 모델 구입자를 상류층이나 부자라고 단정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중형차 중에도 이보다 값이 비싼 차가 많고, 일반 RV도 풀 옵션을 선택하면 가격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3040 감성 울린 ‘Try To Remember’

    그렇다면 이들은 왜 Q270 모델에 열광하는 걸까. Q270 모델의 경우도 기본 옵션을 선택하면 각종 세금을 포함해 3000만원, 풀옵션은 3500만원을 훌쩍 넘어선다. 쏘나타를 타던 사람에겐 예전의 차 구입비용보다 적게는 500만원에서 많게는 1500만원을 더 지급해야 그랜저를 탈 수 있다는 이야기다. 거기에다 유지비용이 늘어나는 것은 당연지사.

    답은 한 가지다. Q270 모델은 상류층의 자부심과 ‘386’으로 표현되는 이른바 ‘3040 세대’의 감성적 이미지를 함께 충족시키기 때문이다. 비록 상류층은 아니지만 상류층으로 진입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마치 상류층이 된 듯한 자부심을 심어주면서 그들의 꿈꿔온 자동차 성능에 대한 욕구와 감성적 이미지를 제대로 만족시켰기 때문이다.

    상류층 진입 신고? ‘그랜저 TG’를 타는 사람들

    그랜저 TG S380의 실내 전면부. 수입차보다 편의 사양이 더 많이 구비되어 있다.

    이는 현대차의 Q270 광고를 보면 확연하게 드러난다. 클래식한 기품이 느껴지는 유럽의 어느 건물 입구에서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와 여자가 회전문을 사이에 두고 스쳐 지나간다. 무심히 앞을 주시하던 두 남녀의 표정에 복잡한 변화가 일어난다. 벌써 십수년 전에 헤어진 첫사랑과 재회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은 채 담담히 각자의 길로 사라진다. 잠시 그랜저 앞에서 갈등하던 남자는 차를 몰고 시야에서 사라진다. 창 밖으로 멀어지는 남자를 바라보던 여자는 “참 많이 변한 당신, 멋지게 사셨군요”라고 독백한다. 광고에 깔리는 음악은 1960년대 히트 팝송인 ‘트라이 투 리멤버(Try To Remember)’.

    이 광고를 본 사람 중 많은 이가 홍콩 배우 여명과 서기가 출연한 영화 ‘유리의 성’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 영화의 전반에 흐르는 배경음악이 ‘트라이 투 리멤버’다. 1960년대 홍콩의 학생봉기 때 운동권 커플이던 남녀 주인공이 이데올로기 문제로 서로 다른 친구와 결혼한 후 각자 배우자가 죽자 20년이 흐른 시점에 다시 만나 사랑을 나누다 뜻하지 않은 교통사고로 함께 숨을 거둔다는 내용. 영화에서 그들은 젊은 시절에는 정의와 양심을 위해 싸웠고, 이후 사회에 나와서는 전문직 종사자가 돼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으로 묘사됐다. 중년의 그들이 영화에서 함께 머문 장소는 중후함과 현대적 아름다움이 조화된 곳이었다. 이 광고에서 현대차는 그랜저의 옛 영광을 끊임없이 ‘리멤버’ 시키려 ‘트라이’ 하면서 386세대의 특징인 자유분방한 연애를 통해 신형 그랜저의 트렌디한 콘셉트를 소비자에게 각인시키려 한다.

    “자꾸 외출하고 싶다”

    그렇다면 그랜저 TG를 구입한 사람들은 자신의 차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기자는 주변의 TG 소유자들을 비롯, 4만명 이상이 가입한 그랜저 TG 동호회 회원 40명을 만났고 현대차의 그랜저 TG 판매왕도 만났다. 오프라인과 온라인으로 78명에 대해 간단한 설문조사도 했다. 그들 가운데 자신을 ‘상류층이나 부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그랜저의 그런 이미지 때문에 TG를 구입하기까지 망설였다고 한다.

    Q270 모델을 소유한 40대 후반 이상의 사람들은 차량 성능이나 디자인, 편의사양보다 그랜저라는 브랜드 이미지 때문에 선택한 경우가 많았다. “친구들 모임에 쏘나타를 몰고 가려니‘쪽 팔려서’ 샀다”(51·자영업), “내 첫 차가 프라이드였는데 내 인생의 진정한 프라이드는 그랜저를 사고 나서야 얻었다”(48·대기업 차장), “XG 2.5에 속고 다시는 그랜저 안 사려고 했는데 차가 워낙 잘 빠졌다고 해 속는 셈 치고 샀다. 그런데 이번에는 진짜 그랜저 값 하더라”(48·중소기업 대표)….

    30대와 40대 중에는 보다 스포티해진 디자인, 수입차와 견주어도 손색없는 차량성능과 편의사양 때문에 구입했다는 사람이 가장 많았다. 이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신형 그랜저의 이미지는 ‘상류층이나 부자의 차’에서 ‘사회적으로 성공한 전문직 종사자와 상류층 진입을 앞둔 중산층의 차’로 변해 있었다. 그들이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인 부분은 디자인이었다.

    회원수 4만1000여 명 그랜저 TG 동호회 ‘TG클럽’(www.clubtg.com, 회장대행 황두현·38, 중소기업 대표) 홈페이지를 통해 설문조사를 요청했다. 30∼40대의 회원 43명이 참가한 설문조사 결과 ‘그랜저를 구입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16명이 ‘중후함과 스포티함이 조화된 이미지’ 때문이라고 답했고, ‘차량성능과 편의사양’ 때문이라고 답한 사람이 13명이었다. ‘상류층 이미지’나 ‘자존심’ 때문에 그랜저를 구입했다고 답한 사람은 없었다. 또 ‘그랜저라는 브랜드에서 느껴지는 이미지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라고 답한 사람이 8명으로 가장 많았고, ‘상류층 진입을 앞둔 중산층’이라는 대답도 6명이 나왔다. ‘상류층이나 부자’라고 대답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수입차에 대항하는 애국자의 차’라는 답도 눈에 띄었다.

    ‘다른 그랜저 시리즈에 비해 차별화된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이냐’는 질문에는 ‘좀더 세련되고 스포티한 디자인’이란 답이 18명으로 가장 많았고, ‘좀더 젊은 사람이 탈 수 있는 차’란 답이 12명으로 다음을 차지했다. ‘가격 대비 개선된 성능과 편의 사양’이라고 한 사람은 7명. ‘그랜저를 구입한 후 생활에 일어난 변화가 무엇이냐’는 질문에는 14명이 ‘성능이 좋은 차를 타고 있다는 자부심을 갖는다’고 답했고, ‘내가 상류층이 된 느낌’이라는 문항에는 반응이 거의 없었다.

    다음에는 TG클럽 서울·경기지역 모임에 참석해 35명에 대한 설문조사를 추가로 했다. 온라인 설문조사만으론 조사의 신뢰성이 흔들리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과는 거의 다르지 않았다. 다만 그랜저의 이미지에 대해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라는 답(13명)이 가장 많이 나온 것은 같았으나 온라인에서는 ‘상류층 진입을 앞둔 중산층’이라는 답이 두 번째로 나온 반면, 오프라인에서는 ‘전문직 종사자’라는 답변(12명)이 다음으로 많았다. 또 그랜저를 구입한 후 생활의 변화에 대해서는 역시 ‘성능 좋은 차를 타고 있다는 자부심’이라는 답변이 1위(17명)로 나왔으나 두 번째는 ‘내가 상류층이 된 느낌’이 아니라 ‘자꾸 외출하고 싶다’는 답변이 2위(10명)를 차지했다.

    자동차 전문기자가 본 그랜저 TG

    “렉서스 ES350 대비 품질 85%, 가격 66%?”


    상류층 진입 신고? ‘그랜저 TG’를 타는 사람들
    놀랄 만한 판매실적을 보이고 있는 그랜저 Q270은 중산층이 꿈꾸는 ‘현실적 드림 카’로 볼 수 있다. 엔진출력은 192마력으로 웬만한 수준을 넘어섰고 주행시 4기통과는 비교할 수 없는 6기통의 부드러움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Q270에 장착된 뮤 엔진은 잘 만든 엔진임엔 분명하나 ‘최고의 엔진’이라는 평가를 받을 만한 수준은 아니다.

    3800cc 람다엔진은 266마력에 최대 토크가 36kgm인데 최근의 기술경향으로 볼 때 배기량에 비해서는 평범한 수준. 이와 관련, 현대차가 일부러 출력을 줄였다는 설이 있다. 현재의 연료소비율(연비)을 유지하면서 300마력 정도로 만들 수 있었지만 에쿠스에 들어가는 V8 4500cc 엔진이 배기량에 비해서는 형편없는 268마력 37.6kgm에 불과해 어쩔 수 없이 그랜저의 출력을 40마력 정도 ‘봉인’했다는 것.

    그랜저의 옵션은 배기량과 선택사양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과분할 정도다. 2971만원인 그랜저 Q270 럭셔리 모델의 경우 공기청정기와 CD 체인저, 발수 글래스, 레인센서, 후방경보기, 차체 자세제어시스템 등 고급 수입차에 적용된 옵션이 거의 모두 들어간다.

    3.8 모델로 올라가면 밝기가 조절되는 사이드미러와 후방 카메라, DVD AV시스템, 뒷유리 커튼, 전동조절식 높이조절 페달, 슈퍼비전 클러스터 계기판 등 렉서스 ES350보다 앞서는 편의장치를 갖추게 된다.

    국산차 가운데 Q270과 비교할 만한 모델은 르노삼성차의 SM7 2.3이 유일하다. 출력이 170마력으로 그랜저 2.7에 비해 조금 달리지만 차량 무게가 그랜저보다 40kg 정도 가볍고 엔진과 변속기의 반응이 앞서 부족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다만 실내가 그랜저에 비해 약간 좁고 SM5와 디자인에서 큰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 점이 마이너스로 작용한다.

    ‘오차범위 내 차이’

    고급차의 비교 시승은 민감한 사안이다. 렉서스는 비교되는 것 자체를 거북스럽게 생각하지만 현대차는 비교하고 싶어 안달이다. 손해 볼 것이 없기 때문이다. 현대차가 일반인과 언론인들을 상대로 가진 그랜저 S380과 렉서스 ES350의 비교시승회에서 나온 반응은 “대체로 그랜저와 ES350이 큰 차이가 없다”는 것.

    주행시험장에서 실시한 간단한 비교시승이었기에 정밀한 데이터가 나올 수는 없었지만 초기 품질감은 눈에 띄는 차이가 나지 않았다. 일부에서는 그랜저가 아무리 잘 만든 한국의 대표 차종이라 해도 어떻게 프리미엄 브랜드의 베스트셀러 모델인 ES350과 비교할 수 있느냐는 반론도 있다. 렉서스로서는 이런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지만 그랜저가 비교의 사정권 안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만큼은 부인하기 어렵다.

    편의장치

    에어백의 숫자나 차체 자세제어장치(ESP) 등 안전관련 옵션은 비슷하게 갖췄고, 오디오시스템은 ES350이 한 급 위다. 인테리어는 두 모델 모두 무난하다. 적당히 세련되지만 그다지 고급스럽지도 않다. 보는 사람에 따라 그랜저가 더 좋다고 평가할 수도 있다. 다만 ES350은 천장을 뒤덮은 파노라마 글라스루프와 고급스러운 통풍시트를 갖춘 것이 매력이다.

    운동성능과 승차감

    핵심은 엔진과 변속기다. 이 부분에서는 ES350의 판정승이다. ES350은 그랜저보다 300cc가량 적은 3500cc급이지만 최대출력은 277마력으로 오히려 13마력 높다. 게다가 그랜저는 5단인 반면 ES350은 6단 변속기를 갖췄다. 운전을 해보면 이 차이가 바로 느껴진다. 정지상태에서 시속 100km까지 가속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ES350이 7초, 그랜저가 8초 중반으로 상당한 차이가 느껴진다. 엔진과 변속기의 반응도 ES350이 한결 빠르고 정확하다. 브레이크의 감각도 ES350이 한 수 앞선다.

    핸들링과 코너링을 결정짓는 서스펜션(현가장치)은 서로 비슷하다. 두 모델 모두 편안함과 부드러움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상당한 완성도를 보이기 때문에 승차감도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엔진 소음도 거의 비슷한 수준이고, 고속주행 중 바람소리나 타이어 소리도 막상막하다. 운전자에 따라 승차감 핸들링 등에서 미세하게 ES350이 조금 낫다는 평가도 있지만 오차범위 이내의 수준이어서 블라인드 테스트를 한다면 자웅을 가리기 힘들 것이다.

    전반적인 성능에서 ES350을 100이라고 할 때 그랜저는 85정도 되는 느낌이다. 승차감과 소음 편의장치 등은 그랜저가 눈에 띄게 뒤지는 점이 없지만, 엔진과 변속기 브레이크 등 주행성능과 관련된 부분이 약간 열세를 보이기 때문이다.

    대신 가격은 그랜저가 ES350의 66%에 불과하다. 품질은 85%이면서 가격은 66%인 셈이다. 그러나 ES350은 렉서스의 브랜드 가치를 안고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고품격 패밀리 세단의 용도로 어느 차종을 선택하더라도 후회하는 구입자는 별로 없을 것이다. 다만 두 차종 모두 가격의 거품은 만만치 않아 보인다.

    석동빈 / 동아일보 경제부 기자 mobidic@donga.com


    TG는 ‘괘씸죄’를 부른다?

    그랜저 TG가 더 이상 상류층이나 부자의 차가 아니라고 대답한 구입자들은 그러나 차를 타고 다니면서 조직이나 영업 상대방으로부터 상당한 심리적 압박을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기모임에 참석한 35명 중 ‘그랜저를 사기 전에 주변의 시선 때문에 망설인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20명이 ‘그렇다’고 답변했고, ‘그랜저를 타고 출근하거나 영업을 할 때 실제 눈치를 본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30명이 ‘그렇다’고 답했다.

    우리 사회가 여러 면에서 민주화했다고 하지만 월급쟁이나 ‘을(乙)’의 위치에 있는 사업가들은 아직 윗사람이나 사업 상대방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현실을 엿보게 한다. “나보다 상위 직급에 있거나 ‘갑(甲)’의 위치에 있는 영업 상대방이 나보다 더 싸고 작은 차를 탈 경우 행여 ‘괘씸죄’에 걸려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는 게 이들의 고백이다.

    특히 그랜저는 동급 대형승용차에 비해 이런 압박감이 더하다. 가령 르노 삼성의 SM7을 타고 오거나 그랜저보다 비싼 RV를 타고 오면 별 반응이 없던 조직원들이 그랜저를 새로 샀다면 ‘차 구경 좀 하자’며 법석을 떤다는 것. 상사들은 “능력만 되면 타는 거지, 전혀 문제 될 것 없다”고 하지만 조직 구성원의 처지에서 스스로 움츠러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그래서 이들 중에는 집에서 외출용으로만 그랜저를 타는 사람, 회사에 몰고 가도 회사 주차장에는 차를 대지 않는 사람, 거래처에 갈 때는 직원의 차를 빌려 타고 가는 사업가도 있었다.

    정부 부처나 학교 등 공조직에 있는 사람은 이런 경향이 더하다. TG 동호회 회원인 고등학교 수학교사 김모(41)씨는 “그랜저를 산 것에 대해서는 전혀 후회 하지 않지만, 쓸데없는 오해를 받을까봐 학교에는 아내의 차인 크레도스를 몰고 간다. 아직 학교에서는 내가 그랜저를 타고 다니는지 모른다”고 털어놓았다. “집이 있고 빚이 없는 맞벌이 부부가 할부로 구입하면 얼마든지 그랜저를 타고 다닐 경제적 여유가 되는데, 우리 사회에서는 ‘그랜저’ 하면 여전히 상류층의 차로 인식해 삐딱한 시선을 보낸다”는 것.

    심지어 그랜저를 만들어 파는 현대차조차 이런 고민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모양이다. 홍보팀 관계자들은 한사코 부인하지만 직원들은 “위에서 그랜저를 타고 다닌다고 나무라는 일은 없지만, 그랜저는 적어도 임원급 이상이 타고 다녀야 한다는 묵시적 룰이 있다”고 귀띔했다. 한 직원은 “그랜저를 살 여유가 되는 직원들은 웬만하면 그랜저와 가격이 맞먹는 SUV를 산다”고 했다.

    이런 분위기 탓인지 삼성전자는 아예 업무용차 모델을 임원급에 따라 정해놓고 있다. 지난해부터 삼성전자는 상무보 이상에게는 그랜저 TG, SM7, 오피러스를, 전무급 이상에게는 체어맨과 에쿠스를 지급하고 있다. 특기할 것은 삼성그룹 계열사인데도 상무보 이상 임원들 중엔 ‘옛 삼성자동차’가 만드는 SM7보다 현대 그랜저 TG를 타는 사람이 훨씬 많다는 점.

    ‘그랜저 타는 거지’

    그랜저 TG의 폭발적 판매 신장세에는 사회 양극화와 새로운 자동차 명품족의 등장이 일조했다는 분석도 있다. 또 리스 산업의 발전과도 연계하는 시각도 있다. 소형차, 중형차 시장은 매년 줄어드는데 대형승용차 판매가 이렇게 늘어나는 것은 중산층이 사라지는 대신 위아래 계층이 넓어진 결과가 아니냐는 해석이다. 또 대형차 판매량 가운데 상당수는 리스 회사에 팔려 나가는 물량이라는 것.

    이와 관련, 그랜저 TG의 판매율이 기존 그랜저 XG에 비해 서울·경기지역에서 2∼4% 늘어난 반면 다른 지역에선 오히려 6%가 떨어진 점은 주목할 만하다. 뒤집어보면 2002년 이후 아파트 값이 집중적으로 오른 지역에서는 그랜저 판매율이 크게 오른 반면 집값이 하락한 지역에서는 판매량이 떨어졌다는 의미로 분석할 수 있다. 실제로 현대차 판매대리점 중 서울·경기지역의 그랜저 최다 판매지점 분포를 보면 1∼10위까지 서울 강남과 송파, 경기도 분당 지역 등 지난해 아파트 값이 급등한 지역에 밀집되어 있다. 아파트 값 상승으로 발생한 기대소득을 대형승용차의 추가 구매나 신규 구입으로 즉각 실행에 옮긴 층이 있다는 얘기다.

    한편으로 그랜저는 젊은 층을 중심으로 대중적 명품, 즉 ‘매스티지(mass prestige)’로 자리잡고 있다. 인터넷 포털 ‘다음’에는 젊은 층이 중심이 되어 그랜저를 튜닝하는 카 마니아 카페도 여럿 생겼다. 그랜저와 같은 고급 대형승용차를 튜닝해서 타고 다닌다는 것은 예전에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자신의 전체적 경제상황으로는 그랜저를 탈 수 없는 형편이지만, 생활의 다른 부분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자신이 타고 싶은 차를 타려는 층이 늘고 있는 것이다. 1억원짜리 BMW를 몰고 다니는 사람이 원룸에 살며 할인마트에 가서 장을 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른바 ‘그랜저 타는 거지’로 불리는 이들은 집을 사기 위해 돈을 모으는 게 아니라 그랜저를 사기 위해 돈을 모은다. 그들의 ‘재산목록 1호’는 그랜저다.

    신분상징의 시대 가다!

    자동차 리스산업의 성장이 그랜저의 인기몰이에 불을 붙인 것도 분명해 보인다. 자동차 번호판에 ‘허’가 붙어 빌린 차라는 사실이 단박에 드러나는 렌터카와는 달리 매월 리스료만 내면 큰 초기비용 부담 없이 내 차처럼 탈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리스료를 사업비용으로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에 많은 기업이 이를 이용해 그랜저를 업무용 차로 쓰고 있다. 국내 자동차 리스시장은 2003년 1조844억원에서 3년 만인 2006년에는 무려 3조5000억원 규모로 급성장했다. 현대캐피탈의 한 관계자는 “그랜저의 판매량 증가 수치는 자동차 리스시장의 성장과 정확히 일치한다고 보면 된다”면서도 “그랜저의 리스 실적은 따로 뽑아줄 수 없다”고 했다.

    현대차 기획실의 박진영 차장은 “이제 그랜저가 신분의 상징이던 시대는 가고, 명차를 소유했다는 자부심과 차의 성능, 디자인으로 평가받는 시대로 접어들었다”며 “이는 그랜저가 도요타의 50년 장수 고급차 모델인 ‘크라운’과 비슷한 과정을 밟아가고 있다는 증거”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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