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2월호

김정길 법무, ‘신승남 총장 카드’ 반대하다 낙마

‘호남검찰’ 5년의 피 튀긴 파워게임

  • 글: 조성식 mairso2@donga.com

    입력2003-01-30 16:04: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김정길 법무, ‘신승남 총장 카드’ 반대하다 낙마
    1998년 2월 하순 김대중 정부의 초대 민정비서관에 이범관 서울지검 1차장검사가 내정됐을 때 일이다. 동교동계 인사들 사이에서는 이검사에 대해 부정적인 평이 담긴 정보보고서가 나돌았다. 이 보고서는 호남 출신의 모 검찰간부가 동교동계 실세와 가까운 당 관계자에게 건넨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된 것이었다. 이검사의 사시 선배인 이 검찰간부는 뒷날 요직을 거치며 승승장구하다 화(禍)를 입었다.

    ‘신동아’가 최근 확인한 이 보고서는 검찰 내 호남 대 비호남 출신의 파워게임이 정권 초기부터 치열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보고서 요지는 다음과 같다.

    ▲사시14회 출신인 이범관 민정비서관 내정자는 법무비서관으로 내정된 박주선 검사의 사시 2회 선배로, 김중권 비서실장이 지난 법무비서관 인사시 자신의 인맥인 이OO OO지검 차장검사를 임명해 사정권(司正權)을 장악하려 했으나 자신의 의도대로 되지 않자, 김태정 검찰총장을 비롯한 대검 핵심인물들의 지원을 받고 있는 박주선 법무비서관을 견제하는 한편 각종 정보라인을 장악하기 위해 박주선 검사의 선배인 이범관 검사를 민정비서관으로 적극 천거한 것이다.

    ▲이 민정비서관 내정자는 지난 15대 대선 당시 안강민 서울지검장 밑에서 공안사건 수사를 총지휘한 실무책임자였다. 그가 초임검사 시절부터 철저한 반DJ 성향을 갖고 있었다는 것은 검찰 내에서 널리 알려진 일이다.

    ▲지난 대선 때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자 검찰 내부에서는 “이제 이범관은 좀 쉬어야 할 사람” “제일 먼저 옷을 벗어야 할 사람이 이범관”이라는 얘기가 돌았다.



    ▲이내정자는 ○○그룹 회장과 고교 동기생으로 매우 절친한 친구지간인데 이 그룹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그룹과 ○○일보는 대선 당시 반DJ 진영의 선두에 섰다.

    ▲이내정자는 ○○일보 회장과 대학 동문으로 깊은 유대를 맺고 있다. 그에 따라 국가 주요 정보가 ○○그룹과 ○○일보에 유출될 위험이 있다.

    사실 여부를 떠나 이범관 검사의 청와대 입성을 저지하기 위한 흠집내기용 보고서임을 알 수 있다. 다만 그가 공안통이라는 건 사실이다. 6공 때 대검 공안1과장, 서울지검 공안2부장을 지내고 김영삼 정부 말기에 서울지검 1차장검사로 대선 관련 업무를 지휘한 그는 자신의 ‘특기’를 살리기라도 하듯 현 정부에서도 대검 공안부장을 역임했다.

    동교동계 정보보고서

    경기 여주 출신인 이범관 검사는 이처럼 청와대 입성 당시 동교동계 일부로부터 심하게 견제를 받았지만 현 정부에서 탄탄대로를 달렸다. 대검 공안부장, 인천지검장을 거쳐 지난해 2월 서울지검장에 올랐다. 이용호 게이트 특검수사과정에 김대통령의 처조카인 이형택 전 예금보험공사 전무와 신승남 전 검찰총장의 골프 회동을 주선한 사실이 드러나 물의를 빚기도 했던 그는 그해 8월 광주고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좌천성 승진이었는데, 청와대의 간절한 눈빛을 외면하고 김홍업·홍걸씨를 구속한 데 따른 보복성 인사라는 얘기가 나돌았다.

    비호남 출신인 이고검장이 잠깐이나마 서울지검장을 지낸 데 대해 법조계 주변에서는 “국회 법사위 수석전문위원(1993∼95년)과 청와대 민정비서관(1998∼99년)을 지내면서 정·관계 인사들과 두루 친분을 쌓아 정치감각이 남달랐기 때문”이라는 평이 있다. 실제로 이고검장은 청와대 민정비서관 시절 김홍일 의원 등 동교동계 인사들과 친분을 쌓은 것으로 알려졌다.

    김대중 정부의 검찰은 흔히 호남검찰로 불린다. 이유는 호남 출신 검사들이 ‘대약진’, 검찰의 주요 자리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검사 출신인 함승희(사시 22회) 의원은 호남검찰 문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문제의 근원은 인사다. 호남 출신 검사를 요직에 많이 앉힌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얘기가 아니다. 능력과 자질이 없는 일부 검사를 단지 호남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중용한 것이 문제다.”

    물론 과거 정권에서는 영남 출신 검사들이 요직을 독차지했다. 전두환·노태우 정권 때는 TK(대구·경북), 김영삼 정권 때는 PK(부산·경남) 일색이었다. 강지원(사시 18회) 변호사는 “특정 지연이나 학연을 가진 검사들이 요직을 장악한 현상은 TK·PK정권 때도 마찬가지였다”고 꼬집었다.

    “과거 정권 때 호남 출신 검사들은 푸대접, 충청 출신은 무대접을 받는다는 얘기가 있었다. 그런데 정권교체 후 이러한 악습이 고스란히 되풀이됐다. 단적인 예로 검찰의 황태자로 불리는 법무부 검찰1과장에 누가 앉는지를 보면 안다. 과거 호남 출신 검사들은 인사에서 불이익을 받고 소외됐다. 현 정부에서 TK·PK 출신이 그런 처지다. 또 과거엔 비교적 한직인 고검에 호남 출신이 많이 몰려 있었는데, 현 정부에서는 영남 출신과 경기고 출신이 유난히 눈에 띈다.”

    이처럼 검찰 인사는 정권을 잡은 세력의 지역색을 반영해 왔다. 이는 검찰이 정권의 칼 노릇을 해왔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2001년 5월 ‘동아일보’에 실린 통계자료를 보면 검찰 인사의 지역편중 현상이 실감난다.

    먼저 호남 출신 비율. 통계에 따르면 노태우 정부 말기인 1992년 8월 검사장급 이상 검찰 간부 39명 가운데 호남 출신은 7명(18%)에 지나지 않았다. 김영삼 정부 말기인 1997년 3월에도 역시 7명이었다. 하지만 정권 교체 후엔 양상이 바뀐다. 2000년 7월 호남 출신은 30%로 늘었다(전체 40명 중 12명). 2001년 5월 신승남씨가 검찰총장이 된 직후 단행된 인사에서는 3명이 추가돼 37%를 차지했다.

    반면 영남 출신의 검사장급 이상 간부는 김대중 정부 출범 후 그 수가 많이 줄었다. 1992년 8월∼1997년 3월까지는 17∼19명(43∼46%)으로 절반에 가까웠다. 하지만 2000년 7월엔 16명(40%)으로, 2001년 5월 인사에선 14명(34%)으로 감소했다.

    검찰 인맥을 분류할 때 가장 중요한 기준은 출신 지역(출생지 또는 본적)과 출신 고교다. 따라서 호남검찰이라 함은 호남지역(광주, 전남·북) 및 이 지역 내 고등학교를 나온 검사들을 말한다. 호남검찰을 TK와 PK에 빗대 MK라고 부르는 것은 목포(또는 목포고)와 광주(또는 광주고, 광주일고) 출신이 돋보이기 때문이다.

    우연의 일치인지 몰라도 호남 출신으로 김대중 정부에서 고위직을 지낸 검사들 중에는 화를 입은 사람이 많다. 사건에 연루돼 불명예스럽게 옷을 벗거나 인사상 불이익을 받거나 심지어 사법처리까지 됐다.

    우선 떠오르는 사람만 꼽아도 김태정, 신승남, 신광옥, 임휘윤, 김대웅, 박주선씨가 있다. 하나같이 고위직 또는 요직에 올랐다가 불명예스럽게 물러난 검사들이다. 이들을 비롯한 일부 호남 출신 고위직 검사들의 부침(浮沈)을 검찰 내 파워게임, 특히 호남검찰 내 갈등의 산물로 보는 시각도 있다.

    호남검찰은 출신고교를 기준으로 크게 6개 인맥으로 분류할 수 있다(기자가 각종 인명정보자료를 임의로 취합·분석한 통계자료이므로 인맥의 실체 여부와는 상관없음을 밝혀둔다).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졌거나 고위직을 역임한 ‘대표주자’만 꼽으면 다음과 같다.

    광주고·광주일고 누른 목포고

    첫째는 현 정부 초기 실권을 잡았던 광주고 인맥. 검찰총장과 법무장관을 지낸 김태정(사시 4회, 사이버법률회사 로우시콤 대표) 변호사가 좌장 격이다. 김변호사의 사시 동기로 현 법무장관인 심상명씨도 광주고를 졸업했다. 청주지검장, 법무부 보호국장을 역임한 조규정(사시 15회) 광주지검장도 동문이다.

    현 정부 초기 청와대 법무비서관으로 활약하다 옷로비사건으로 구속됐던 박주선(사시 16회) 현 민주당 의원도 광주고 출신. 현 정권 초기 광주고가 검찰을 장악했다는 얘기가 나온 것은 김태정 검찰총장과 박주선 법무비서관의 영향력이 막강한 데다 역시 광주고 출신인 박상천(고시 사법과 13회) 의원이 법무장관에 취임했기 때문이다. 서울지검 특수3부장, 목포지청장을 거친 사시 20회의 명동성 인천지검 1차장검사도 이 학교 출신이다.

    둘째는 광주일고 출신 검사들이다. 청와대 민정수석과 법무차관을 지낸 신광옥씨(사시 12회)와 대검 중수부장, 서울지검장 등 요직을 거친 김대웅(사시 13회) 법무연수원 연구위원이 대표주자. 그밖에 이용호 게이트에 연루돼 사표를 낸 임양운(사시 17회) 전 광주고검 차장, 청와대 민정비서실 파견근무를 했던 이동호(사시 25회) 대검 범죄정보 제1담당관 등을 꼽을 수 있다.

    셋째로 목포고 인맥이다. 정권 초기 광주고와 광주일고 인맥의 약진이 두드러졌다면 중반 이후로는 목포고 인맥이 최대 파워집단으로 부각됐다는 것이 검찰 안팎의 정설이다. 이 학교 출신인 신승남(사시 9회) 전 검찰총장이 검찰에서 차지했던 비중을 생각하면 그런 얘기가 나올 만도 하다. 경북 선산 출신인 박순용(사시 8회) 검찰총장 체제에서 2년간 ‘실세 대검차장’으로 지내다 검찰총장에 오른 신씨는 김태정씨에 이어 호남검찰의 대부 노릇을 했다.

    사시 13회인 김학재 대검차장도 목포고가 배출한 실력자. 법무부 검찰국장, 법무차관을 역임한 김차장은 신광옥씨의 뒤를 이어 청와대 민정수석을 지냈다. 정충수 대검 강력부장은 김차장의 고교 및 사시 동기다. 법무부 법무실장, 수원지검장을 거쳤다. 대전지검장, 대검 강력부장을 지낸 김규섭(사시 15회) 수원지검장도 목포고 출신. 지난해 2월 인사 때 고교 동기인 정충수 대검 강력부장과 자리를 맞바꿨다.

    언론사 탈세고발사건, 진승현 게이트 수사를 지휘한 박영관(사시 23회) 서울지검 특수1부장은 김대중 정부에서 가장 두드러진 활약을 펼치고 있다. ‘검찰의 황태자’로 불리는 자리, 즉 검찰 인사를 관장하는 법무부 검찰1과장을 거치는 등 동기생 중 선두를 달려왔다. 지난해 동기생들은 주요 지청장으로 영전했지만 병풍 수사 때문에 현직에 남았다. 진승현 게이트와 관련해 김은성, 신광옥, 권노갑씨 등 거물들을 구속한 그는 병풍 수사를 이끌면서 ‘정치 검사’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넷째로 익산 남성고 출신이다. 먼저 송정호(사시 6회) 변호사. 1999년 법무연수원장을 끝으로 검찰을 떠났던 송변호사는 지난해 법무장관으로 복귀했다가 여권 수뇌부와의 갈등으로 6개월 만에 도중하차했다. 이용호 게이트 여파로 검찰을 떠난 임휘윤(사시 12회) 변호사도 이 학교 출신. 대검 강력부장, 서울지검장, 부산고검장을 역임했다. 또 경기도 부천 범박동 재개발비리사건에 연루돼 불구속기소된 김진관(사시 16회) 전 제주지검장도 동문이다.

    다섯째로 전주고 인맥. 사시 8회인 이광수 전 청주지검장, 15회인 채수철 창원지검장이 이 학교 출신이다. 이 전 지검장은 1999년 5월 동기인 박순용 검사가 검찰총장에 임명되자 옷을 벗었다. 채지검장은 춘천지검장, 법무부 기획관리실장을 거쳤다. 이용호 게이트에 연루돼 옷을 벗은 이덕선(사시 21회) 전 군산지청장도 전주고를 나왔다.

    마지막으로 경기고 인맥. 호남 출신으로 경기고를 나온 검사들이다. 먼저 전북 김제 출신의 유재성(사시 8회) 전 부산지검장. 유 전 지검장은 이광수 전 청주지검장과 마찬가지로 동기인 박순용씨가 검찰총장에 오르는 순간 검찰을 떠났다.

    광주 출신의 박종렬(사시 15회) 법무부 법무실장도 경기고를 졸업했다. 그는 김대중 정부에서 서울지검 1차장검사, 청와대 민정비서관, 대검 공안부장, 광주지검장을 역임했다. 대검 공안부장 시절 김홍일 의원 가족의 제주도 휴가에 동행해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임래현(사시 16회) 전주지검장도 광주 태생의 경기고 출신. 순천지청장, 대검 범죄정보기획관 등을 지냈다. 역시 광주 출신인 임승관(사시 17회) 서울고검 차장검사도 경기고를 나왔다. 서울지검 1차장검사, 서울지검 동부지청장 등을 거쳤다.

    5개교 출신 외 김대중 정부에서 고위직에 오른 호남 출신 검사로는 먼저 이재신(사시 8회) 민정수석을 꼽을 수 있다. 전북 정읍 출신으로 중동고를 나왔다. 수원지검장을 끝으로 변호사 개업을 했으나 지난해 2월 민정수석에 발탁됐다.

    김승규(사시 12회) 부산고검장은 순천 매산고 출신으로 법무차관과 대검차장을 역임했다. 사시 15회인 김종빈 대검 중수부장은 여수고를 나왔다. 대검 수사기획관, 전주지검장, 법무부 보호국장을 거쳤으며 이용호 게이트 재수사를 지휘했다.

    동교동계 실세들, 신승남 지원

    호남검찰 내부의 갈등과 알력이 표면화된 것은 2001년 5월에 있었던 검찰 인사 때다. 2년 임기를 채운 박순용 검찰총장 후임을 두고 여권과 검찰 주변에서 보이지 않는 전쟁이 벌어진 것. 야당인 한나라당은 신승남씨의 총장 취임을 막기 위해 연일 공세를 폈다. 신씨가 검찰총장이 될 경우 사법·경제 사정기관을 모두 호남이 장악한다는 이유에서였다. 당시 국정원장은 전북 전주 출신의 신건씨였고 경찰청장도 전주 출신의 이무영씨였다. 또 안정남 국세청장은 공교롭게도 신승남씨와 동향으로 전남 영암 출신이다. 이남기 공정거래위원장은 전북 김제 출신. 게다가 막강한 권력을 가진 청와대 민정수석 자리엔 광주 출신의 신광옥씨가 앉아 있었다.

    당시 법무장관은 김정길씨(사시 2회·전남 신안·조선대부속고). 김장관은 2년간 검찰 실세로 군림해온 신승남 대검차장이 검찰총장이 되는 데에 반대했다. 법조계 주변에서는 김장관이 김대중 대통령에게 박총장 후임으로 신승남 대검차장보다 세 기수 아래인 임휘윤 부산고검장을 천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장관의 인사안이 알려지면서 대검에는 비상이 걸렸다고 한다. 사시 12회인 임고검장이 총장에 오를 경우 9회인 신차장은 물론이고 10·11회의 고위간부들이 모두 퇴출돼야 하기 때문.

    2년 전인 1999년 5월 박순용씨가 검찰총장에 취임했을 때 그런 일이 있었다. 법무장관에 오른 김태정씨가 자신보다 네 기수 아래인 사시 8회의 박순용 대구고검장을 총장에 임명하자 5·6·7회는 물론 동기인 8회까지 포함해 검사장급 이상 고위간부가 13명이나 옷을 벗는 ‘대학살극’이 펼쳐진 것이다.

    하지만 2년 전의 상황은 재현되지 않았다. 김정길 법무장관의 인사안이 거부당했기 때문이다. 당시 사정을 잘 알 만한 검찰의 전 고위간부에 따르면 김홍일 의원과 김홍업씨, 이수동 아태재단 상임이사 등 여권 실세들이 신승남씨의 검찰총장 임명에 적극 찬성했다고 한다. 이런 사정을 알고 있는 김대통령은 ‘신승남 카드’를 탐탁찮게 여겨 며칠 동안 결재를 미뤘으나 마땅한 대안이 없자 마지못해 사인했다는 게 이 관계자의 증언이다.

    김정길 법무, ‘신승남 총장 카드’ 반대하다 낙마

    2001년 10월 한나라당 의원들과 원외 지구당 위원장들이 대검찰청 정문에서 검찰을 비난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신총장 임명과 동시에 김장관은 경질됐다. 명분은 법무장관과 검찰총장 모두를 호남 출신이 독식해서는 안 된다는 것. 하지만 진짜 이유는 김장관이 검찰총장 인선을 둘러싸고 권력 실세들과 갈등을 빚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고검장 출신의 한 변호사는 “김정길 장관이 옷 벗은 이유는 뜻밖의 인물을 천거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당시 일부 언론은 여권이 신승남씨를 검찰총장으로 만들기 위해 법무장관까지 바꿨다고 비판했다. 이 주장의 옳고 그름을 떠나 김장관의 갑작스러운 낙마는 후유증을 낳았다. 후임으로 급하게 결정된 안동수 변호사가 장관 취임 이틀 만에 이른바 ‘충성 맹세’ 파문으로 사퇴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청와대 관계자에 따르면 당시 신광옥 청와대 민정수석은 대통령 측근으로부터 ‘안동수 카드’를 준비하라는 전화를 받고는 질겁해 반대의견을 내놓았다. “평검사 출신이 어떻게 법무장관으로 갈 수 있냐”는 게 반대 이유였다. 하지만 대통령의 측근이 세 차례나 전화를 해 “대통령 지시”라고 강조하는 바람에 더 이상 반대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고시 사법과 15회인 안변호사는 충남 서천 출신. 1975년 인천지검 검사를 마지막으로 변호사 개업을 했다. 1997년 국민회의에 입당한 그는 민주당 인권위원장을 지냈다. 법무장관 임명 당시엔 민주당 서초을 지구당위원장이었다.

    안동수씨 후임으로 법무장관에 오른 사람은 최경원 전 법무차관이었다. 서울 태생으로 경기고 출신인 최씨는 사시 기수로 신승남 총장의 1년 선배였다. 그는 2년 전 사시 동기인 박순용씨가 총장에 올랐을 때 용퇴한 바 있다.

    최경원씨가 장관에 취임한 지 4일 만에 단행된 검사장급 이상 인사는 신총장의 친정체제 구축이라고 평가받았다. 겉보기에는 지역 안배를 고려한 인사였다. 서울지검장, 대검 중수부장, 법무부 검찰국장, 대검 공안부장 등 이른바 ‘빅4’ 중 두 자리가 비호남 출신에게 돌아갔기 때문이다.

    충남 논산, 대전고 출신인 유창종(사시 14회) 대검 중수부장은 ‘신승남 인맥’으로 분류된다. 두 사람은 1993년 슬롯머신사건 수사 때 각각 서울지검 강력부장과 3차장검사로 ‘찰떡 궁합’을 과시한 바 있다. 당시 유부장의 직속상관이었던 신차장검사는 ‘외압’을 막아주는 버팀목 노릇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법무부 검찰국장에는 송광수 부산지검장이 임명됐다. 사시 13회로 경남 마산, 서울고 출신. 현재 대구고검장이다.

    지역 안배와는 별개로 호남 출신의 약진도 두드러졌다. 사시 12회인 김승규 대검 공판송무부장이 광주고검장으로 승진했고, 사시 13회인 김학재 법무부 검찰국장도 선배 기수를 제치고 법무차관으로 영전했다. 또 사시 15회인 박종렬 법무부 보호국장이 ‘빅4’ 중 하나인 대검 공안부장을 차지했다. 대검 중수부 수사기획관에 임명된 명동성(사시 20회) 검사는 전남 강진 출신으로 뒷날 이용호 게이트를 수사하게 된다.

    유력한 ‘차기’ 임휘윤의 낙마

    ‘검찰의 꽃’이라 불리는 서울지검장에는 사시 13회인 김대웅 대검 중수부장이 임명됐다. 서울지검장 인선을 두고도 여권 내에서 알력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자신이 물러나리라곤 전혀 예상치 못했던 김정길 법무장관이 총장 교체 시점에 맞춰 서울지검장에 김학재 법무부 검찰국장을 앉히려 했다는 것. 하지만 검찰 수뇌부와 동교동계 실세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했다는 후문이다.

    DJ정부 후반기에 검찰의 세력판도를 크게 바꾼 사건이 바로 이용호 게이트와 진승현 게이트다. 검찰의 위상을 크게 실추시킨 두 사건은 호남검찰의 이미지를 결정적으로 훼손한 사건이기도 하다.

    먼저 이용호 게이트를 살펴보자. 2001년 9월에 발생한 이 사건의 최대 피해자는 신광옥 청와대 민정수석과 더불어 ‘포스트 신승남’으로 꼽히던 임휘윤 부산고검장이었다. 6공 때 주로 공안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냈던 임고검장은 현 정부에서 대검 강력부장, 서울지검장, 부산고검장을 지내며 유력한 검찰총장 후보로 꼽혀왔다.

    임고검장은 2001년 10월 사시 동기인 한부환(경기고) 대전고검장이 지휘한 이용호 게이트 특감 수사과정에 옷을 벗었다. 2000년 5월 서울지검 특수2부가 긴급체포했던 G&G 그룹 회장 이용호씨가 하루 만에 석방되는 과정에 개입한 혐의였다. 당시 그는 김태정 전 검찰총장으로부터 전화로 이용호씨를 선처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수사팀에 ‘압력’을 행사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김태정씨는 이씨에게 1억원을 받고 임고검장을 상대로 ‘전화 변론’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검찰 사정에 밝은 전직 검찰 고위간부는 “임휘윤이 김태정 전화만으로 이용호를 풀어주라고 했겠나. 그 이상의 외압이 작용했을 것”이라며 이씨 석방 배경에 강한 의문을 제기했다.

    이용호 게이트의 불똥은 신승남 총장에게도 튀었다. 동생 신승환씨가 이용호씨로부터 6000여 만원을 받은 사실이 드러난 것. 수사를 맡은 대검 중수부는 승환씨가 이용호씨 회사의 계열사 사장으로 영입됐던 점을 들어 이 돈의 성격을 급여와 스카우트비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이듬해 1월 차정일 특검수사팀은 로비자금이라고 판단, 승환씨를 구속했다. 야당의 사퇴 공세에도 꿋꿋이 버티던 신총장은 결국 동생이 구속된 다음날 사표를 냈다. 신씨를 잘 아는 한 변호사는 “신씨는 동생을 불러 호되게 추궁했다. 그런데 동생이 로비와 관련 없는 돈이라고 완강히 부인하자 진짜 죄가 안 되는 것으로 믿었던 것 같다”며 신씨를 동정했다.

    신승남 검찰총장의 사퇴는 호남검찰 독주체제의 붕괴를 뜻했다. 그런데 사퇴만으로 사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특검팀은 이용호씨한테 5000만원을 받은 이수동 아태재단 상임이사를 조사하는 과정에 신승남 총장과 김대웅 서울지검장이 이수동씨와 통화하면서 수사 관련 사항을 발설한 혐의를 잡았다. 두 사람은 그해 7월 공무상비밀누설과 직권남용 혐의로 불구속기소되기에 이른다.

    임휘윤씨가 이용호 게이트에, 신광옥씨가 진승현 게이트에 물려 낙마한 후 유력한 차기 검찰총장 후보로 꼽히던 김대웅씨마저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음으로써 호남검찰은 만신창이가 됐다. 김씨는 지난해 2월 이명재 검찰총장 취임 직후 광주고검장으로 좌천성 영전을 했다. 지난해 8월 한직이자 한참 후배들이 가는 자리인 법무연수원 연구위원으로 밀려나는 치욕을 겪으면서도 옷을 벗지 않고 있다.

    2001년 11월에 불붙은 진승현 게이트는 김은성 국정원 2차장, 신광옥 청와대 민정수석, 권노갑씨 등 쟁쟁한 권력실세들을 하루아침에 낙마시킨 사건이다. 그해 12월 진승현 게이트 수사과정에 발생한 신광옥 법무차관 구속사건은 호남검찰 내부의 갈등 양상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2000년 1월 대검 중수부장으로서 옷로비사건 수사를 잘 마무리한 공으로 차관급인 청와대 민정수석으로 영전한 신광옥씨는 열성적이고 깔끔한 일 처리로 김대통령의 신임을 얻었다. 청와대 근무 시절 한광옥 비서실장과 남궁진 정무수석, 권노갑씨 등과 가깝게 지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씨가 친정인 검찰로 돌아온 것은 이용호 게이트로 신승남 검찰총장이 곤경에 빠져 있던 2001년 9월. 검찰의 2인자인 대검차장을 원했으나 검찰 수뇌부와 권력실세들의 견제 탓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는 얘기도 들린다.

    신씨 구속 과정엔 석연찮은 점이 있다. 첫째 의문은 검찰 간부 중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언론에 신차관의 혐의사실을 부풀리거나 왜곡해 알렸다는 점이다. 2001년 12월11일 ‘중앙일보’는 신차관이 청와대 민정수석 시절이던 2000년 8월 주가조작 등의 혐의로 검찰 조사를 앞둔 MCI코리아 진승현 회장으로부터 골프가방에 든 1억원을 전달받았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이는 오보였다. 검찰 수사결과 신씨가 진씨로부터 직접 돈을 받은 적은 없는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검찰에 따르면 진씨가 1억원을 건넨 사람은 신씨가 아니라 그의 고문 노릇을 했다는 민주당 당료 최택곤씨다. 또 최씨가 신씨에게 진씨 구명로비 명목으로 전달했다는 돈은 6차례에 걸쳐 300만원씩 총 1800만원에 지나지 않는다.

    둘째 의문은 신씨와 최씨 혐의에 대한 검찰의 이중잣대다. 신씨는 최씨에게 1800만원을 받은 혐의로 기소됐다. 그런데 검찰은 최씨에게 뇌물공여죄를 적용하지 않았다. 진씨한테 로비자금 명목으로 1억원을 받은 사실만 기소하고 신씨한테 1800만원을 준 데 대해서는 법적 책임을 묻지 않은 것이다. 최씨한테 돈 받은 사실 자체를 부인하고 있는 신씨는 검찰이 자신을 죽이기 위해 최씨와 ‘뒷거래’했다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비호남 출신으로 검찰 고위직을 역임한 한 변호사는 이른바 ‘음모론’을 뒷받침하는 주장을 폈다.

    “신광옥이 억울할 만도 하다. 나도 겪어봐서 알지만 그런 종류의 기사가 나오는 경위는 뻔하다. 검찰 내부의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언론에 흘린 거지. 그리고 한번에 300만원씩 줬다는데 그 정도야 민정수석에게는 뇌물이 아니라 떡값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신광옥 죽이기’의 주체는 누구인가. 검찰과 청와대 주변에서는 신광옥씨와 신승남씨의 알력을 거론한다. 대표적인 갈등사례가 2001년 8월 인천지검이 수사한 인천공항 유휴지 특혜개발사건이다.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이었던 신광옥씨는 이 사건에 연루된 민정수석실 소속 국중호 행정관(3급)에 대한 사법처리를 둘러싸고 신승남 당시 검찰총장과 심각한 갈등을 빚었다.

    청와대 자체 조사를 통해 국씨에게 죄가 없다고 판단한 신수석은 신총장과 사시 두 기수 후배인 이범관 인천지검장에게 거세게 항의했다. 그러나 신총장은 “인천지검에 맡기자”는 원칙론을, 이지검장은 ‘여론 잠재우기’ 명분을 내세워 신수석의 요청을 뿌리쳤다. 이 일로 신수석과 신총장은 사이가 크게 벌어졌다. 한광옥 비서실장도 김대통령에게 국씨가 억울하다고 보고하는 등 신수석을 거들었으나 신총장의 냉정한 태도로 무위에 그쳤다.

    신광옥씨의 항의가 아니더라도 김홍일 의원의 이름이 거론된 그 사건에서 국씨는 희생양에 가까웠다(‘신동아’ 2002년 3월호 참조). 재판과정에서 인천지검 특수부가 무리하게 수사한 정황이 드러났다. 국씨에게 적용된 혐의는 뇌물수수, 공무상비밀누설, 업무방해 등 세 가지. 인천지법은 지난해 8월 이 사건 1심 판결에서 뇌물수수, 공무상비밀누설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고 업무방해 혐의만 인정했다. 국씨는 곧바로 항소했는데 그의 변호인단은 완전한 무죄판결을 낙관하고 있다.

    함승희 의원은 “당시 검찰 내부에서 은근히 암투가 벌어졌다. 신광옥씨는 파워게임의 희생양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함의원 말대로 검찰 주변에는 신씨 구속이 차기 검찰총장 경쟁구도와 관련된 것이라는 소문이 있다. 신씨가 구속되기 전 여권 일각에서 동생 문제로 곤경에 처한 신승남 총장을 퇴진시키고 ‘신광옥 또는 임휘윤 카드’를 검토했다는 얘기도 들린다.

    신씨 구속 당시 수사 지휘선상에 있던 검찰 간부는 박영관 서울지검 특수1부장, 박상길(현 서울지검 남부지청장) 서울지검 3차장검사, 김대웅 서울지검장, 신씨와 사시 동기인 김각영(현 검찰총장) 대검차장, 신승남 검찰총장 등이다. 누군가가 언론에 신광옥씨 혐의사실을 흘렸다면 이들 중 한 명이거나 수사팀(서울지검 특수1부)인 셈이다.

    대전법조비리사건으로 물갈이

    두 신씨는 2001년 10월 단병호 민주노총 위원장 사법처리를 둘러싸고도 충돌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신광옥 민정수석과 한광옥 비서실장은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소속 김승훈 신부의 중재를 받아들여 단위원장에 대한 선처를 약속했다. 그에 따라 수배자 신분으로 명동성당에서 농성하던 단위원장은 검찰에 자진 출두했다. 그런데 얼마 후 검찰은 법대로 단위원장을 구속했다. 신수석은 신승남 총장에게 협조를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고 한다.

    이용호 게이트 수사를 둘러싸고도 갈등이 있었다는 얘기가 들린다. 소문인즉 신승남 총장이 이용호 게이트 수사과정에 자신의 동생 문제를 불거지게 만든 장본인으로 신광옥 수석을 의심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신광옥씨는 지금도 자신의 구속 배후에 신승남씨가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지난해 3월 서울구치소에 수감돼 있을 때 면회 온 지인에게 “신승남이 동생 문제가 불거지자 자기가 살기 위해 나도 죽이고 임휘윤도 죽였다”고 울분을 터뜨리기도 했다.

    이제 이들 호남검찰 실세들이 전면에 나서기 전인 정권 초기의 검찰 세력판도를 살펴보자. DJ 정부 검찰 파워게임의 신호탄은 1999년 1월초에 발생한 대전법조비리사건이다. MBC 특종보도로 촉발된 이 사건은 애초 이종기 변호사의 수임비리를 문제삼은 것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수사 초점이 판·검사들의 전별금과 떡값으로 옮겨졌다.

    수사결과 검사 25명이 이종기 변호사한테 금품(전별금, 명절 떡값, 휴가비, 회식비 등)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그 중 6명이 옷을 벗었고 나머지 검사들은 경고·인사조치 등의 징계를 받았다. 검사장급 이상에서는 심재륜(사시 4회·충북 옥천) 대구고검장 등 4명이 연루됐는데, 공교롭게도 하나같이 비호남 출신(충북 1명, 영남 3명)이어서 ‘음모론’을 부채질했다.

    검찰 사상 초유의 항명파동과 평검사들의 연판장 사태까지 낳은 대전법조비리사건의 성격에 대해서는 지금도 의견이 분분하다. 항명파동의 주인공 심재륜 변호사는 “당시 김태정 총장이 이 사건을 인사개혁의 구실로 삼았다. 자신과 불편한 사람들을 제거하고 많은 검사를 희생양으로 삼았다”고 회고했다. 서울고검의 한 검사는 “김태정 총장이 안팎으로 위기를 맞자 여론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사건을 확대·재생산했다. 그 사건으로 김총장은 결정적으로 신망을 잃었다”고 말했다.

    최용석(사시 27회·오세오닷컴 대표) 변호사는 “언론에서 키워서 그렇지 사건 자체는 별것 아니었다”며 “검찰 수뇌부가 자신만 깨끗한 척한 게 문제였다”고 말했다. 함승희 의원은 “김태정씨가 검찰 총수로서 책임지는 자세를 보이지 못해 비판을 받았지만 그렇다고 책임을 총장에게만 돌리는 것도 문제다. 1차적으로는 변호사한테 돈 받은 사람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해 5월 김태정 검찰총장은 법무장관으로 영전했다. 그 직후 검찰 수뇌부에 대한 대규모 인사가 단행됐다. 사시 8회인 박순용 대구고검장이 검찰총장에 임명됨에 따라 선배 기수인 사시 5·6·7회인 고검장 6명이 모두 옷을 벗었다. 역대 정권에서 고위직에 오른 호남 출신 검사가 드문 탓인지 이들 중 호남 출신은 뒷날 법무장관에 오르는 송정호(전북 익산·사시 6회) 법무연수원장밖에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박총장의 동기생인 7명의 검사장도 모두 용퇴했다. 말 그대로 대학살이었다.

    박순용씨는 경북 선산, 경북고 출신이다. 하지만 검찰 주변에서는 그를 ‘김태정 사람’ 또는 ‘범 호남 인맥’으로 분류한다. 김태정 검찰총장 체제에서 대검 중수부장, 서울지검장 등 요직을 두루 거쳤고 처가가 호남이라는 이유에서다. 그의 장인 김용제씨는 1970년대 호남 출신 검사로는 처음으로 서울지검장에 올랐다. 김대중 대통령의 목포상고 2년 선배이기도 하다. 흥미로운 것은 목포고 출신인 김학재 현 대검차장이 김용제씨의 6촌 동생이라는 사실.

    세 기수를 건너뛰어 검찰총장이 나오는 바람에 사시 9회 이하 검사들에겐 약진의 기회가 찾아왔다. 특히 신승남씨는 대검차장에 임명됨으로써 ‘차기’를 둘러싼 경쟁에서 절대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점령했다. ‘신승남 독주체제’의 틀이 갖춰진 것이다. 1999년 6월 김태정 장관이 조폐공사파업유도사건과 관련해 사퇴한 후 신씨는 호남검찰의 새로운 맹주로 부상했다. 자연스럽게 ‘실세 차장’이라는 별칭이 따라붙었다.

    김태정, 김옥두 안내로 일산행

    여기서 잠깐 김태정씨 얘기를 해보자. 검찰총장과 법무장관을 지낸 김씨가 구속까지 당한 것은 호남검찰 영욕의 상징적인 사건이라 할 만하다. 검찰의 전직 고위간부는 김씨의 구속을 두고 ‘업보’라고 표현했다.

    그는 부산 영도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부친의 고향이 전남 장흥인 데다 여수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니고 광주에서 고등학교(광주고)를 졸업했기에 호남 인맥으로 분류된다. 사시 4회 선두주자였던 그는 김영삼 정부 때도 호남 출신으로는 드물게 ‘잘 나가던’ 검사였다. 대검 중수3·1과장, 서울지검 특수3·1부장, 대검 중수부장을 거친 전형적인 특수통이었다.

    그의 정치적 행보는 부산지검장 시절부터 두드러졌다. 민주계 인사들과 자주 어울린 그는 1995년 법무차관에 임명됐다. 그 무렵 김영삼 대통령의 아들인 현철씨와도 친분을 쌓았다. 1997년 8월 그가 검찰총장에 임명되자 검찰과 정치권 주변에서는 그가 김영삼 대통령에게 한보사태로 구속된 현철씨에 대한 선처를 맹세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널리 알려진 대로 김태정씨가 김대중 대통령의 눈에 들게 된 결정적 계기는 1997년 대선을 한 달 앞둔 상태에서 한나라당의 폭로로 불거진 DJ비자금사건 수사를 유보시킨 일이었다. 이를 두고 YS의 지시설도 있지만, 김태정 검찰총장이 결정하고 YS가 묵인했다는 게 정설이다. 당시 대검 중수부 수사기획관으로 수사유보 발표문 작성에 관여한 박주선 의원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김태정 총장으로부터 사전에 보고를 받고 “검찰 판단대로 하라”며 방관했다는 것.

    대선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김태정 검찰총장은 남들 눈을 피해 경기도 일산에 있는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 집에 찾아갔다. 동향(전남 장흥)인 김옥두 의원과 이귀남(사시 22회·현 대검 범죄정보기획관) 대검 범죄정보관리과장이 연결고리가 됐다. 김태정씨는 당시 상황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비자금 수사 유보는 오로지 내 소신에 의한 결정이었다. 대선이 끝난 후 그쪽에서 보자는 연락이 왔다. 김옥두 의원의 안내로 일산에 가 DJ를 만났다. DJ를 만난 것은 그때가 처음이다.”

    강지원 변호사는 이를 두고 “검찰총장이 비공식적으로 대통령 당선자와 만난 것 자체가 문제”라고 지적했다. 어쨌든 김태정 총장은 김대통령의 절대적 신임을 바탕으로 검찰 조직을 자신의 뜻대로 끌고갈 수 있었다. 청와대에서는 자신이 아끼는 후배인 박주선 법무비서관이 호흡을 맞춰주고 있었다. 거칠 게 없던 김총장은 정치인 사정에 대해 표적·편파수사라고 반발하는 한나라당과 이회창 총재를 공개석상에서 비난하는 등 정치적 발언을 마구 쏟아냈다. 정치검찰이라는 비판이 나올 만도 했다.

    1999년 12월 김태정씨는 박주선 청와대 법무비서관과 더불어 옷로비사건의 유탄을 맞고 구속됐다. 김대중 정권 초기 검찰을 장악했던 광주고 인맥의 두 기둥이 한꺼번에 무너진 것이다. 박주선씨 구속을 둘러싸고 청와대 파견검사들과 대검 중수부 검사들은 지금도 감정이 풀리지 않았을 정도로 심하게 대립했다. 두 사람을 구속한 신광옥 대검 중수부장은 이듬해 1월 청와대 민정수석으로 영전했다. ‘신승남 검찰-신광옥 청와대’의 새로운 호남검찰 시대가 열린 것이다.

    김태정씨 이후 호남검찰 시대를 이끈 신승남 신광옥 임휘윤 김대웅씨 등은 자질이나 능력면에서는 다들 인정을 받던 사람들이다. 이들이 사라진 무대를 지키고 있는 김학재 대검차장이나 김승규 부산고검장도 평판이 좋은 편이다. ‘청와대 외도’에 나섰다가 영영 돌아가지 못한 박주선 의원 역시 유능하고 강직한 검사로 이름을 날렸다. 문제는 이들 중 상당수가 과거 영남 정권에서 고위직에 오른 검사들이 그랬듯 정치권에 너무 가까이 다가섰다는 점이다.

    서울대 법대 수석 졸업에 사시 수석 합격자인 신승남씨는 초임 검사 시절인 1970년대 초 박정희 대통령 눈에 들어 청와대 비서실 파견근무를 할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았다. 법조계 주변에서 마당발로 통하는 최용석 변호사는 “신승남씨는 검증된 사람이다. 실력도 있고 깡다구도 있다. 정치권으로부터 검찰을 지키려고 나름대로 애를 썼다”고 말했다. 그는 또 임휘윤씨에 대해 “정형근 강재섭 이종찬 등 쟁쟁한 인물이 많은 사시 12회의 선두주자로 5공 때부터 잘 나가던 유능한 검사”라고 평했다.

    ‘정치검사 백서’ 발간을 준비중인 강지원 변호사는 “개인적인 실력과 정치 성향은 구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호남 출신이라도 아주 실력 없는 검사는 못 올라가더라. 신광옥씨는 유능한 검사였다. 그런데 정권이 바뀌면서 정치적 날개를 달더라. 그것이 그의 비극이었다.”

    법조계 안팎에서 신망이 높은 심재륜 변호사는 호남검찰과 정치검사 문제에 대해 이런 얘기를 들려줬다.

    “지역편중 인사라도 능력 있고 올바른 사람이 갈 자리에 가면 문제가 안 된다. 그런데 실력과 자질이 떨어지는 사람들이 정치권에 줄을 대 좋은 자리를 차지하는 게 문제다. 신분 상승과 권력 공유 욕구가 인사특혜를 부르는 것이다. 정치권력으로부터 은혜를 입은 검사가 어떻게 정치권의 입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겠나. 권력 입맛에도 맞고 국민들로부터 신뢰도 받는 검찰은 있을 수 없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