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7월호

‘10% 룸살롱’ 代母 피미선이 털어놓은 “대한민국 최상류층 술문화 25년”

  • 글: 이나리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byeme@donga.com

    입력2003-06-24 11: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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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룸살롱’ 代母 피미선이 털어놓은 “대한민국 최상류층 술문화 25년”
    지난 5월15일, 서울 강남구에 위치한 B룸살롱에 미모의 여성 7명이 꽃다발을 들고 찾아왔다. 모두 이른바 ‘10% 룸살롱’(강남 최고급 룸살롱을 뜻하는 은어)의 마담들이었다. 각각이 ‘움직이는 억대 영업장’인 이들에게서 꽃다발을 받은 이는 B룸살롱의 사장 겸 마담 피미선(46)씨. 스승의 날을 맞아 ‘제자의 예(禮)’를 다하려 온 것이었다.

    그 세계에서 흔히 ‘피언니’ ‘피마담’으로 통하는 피미선씨는 룸살롱 업계 ‘2세대 大마담’의 대표격이다. 1970년대 중반 서울 소공동 일대에서 시작된 초기 룸살롱 마담들이 1세대라면, 강남에 터 잡은 후인 1980년대 초 ‘데뷔’한 피씨는 2세대에 해당된다.

    사실 피씨는 돈 잘 벌기로 유명한 마담은 아니다. 그가 운영하는 업소 또한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룸살롱과는 분위기가 다소 다르다. 그럼에도 그가 10% 룸살롱의 ‘대모’로 통하는 것은 나름의 원칙과 상도의를 철저히 지키고, 그를 통해 신뢰할 만한 고급 단골들을 다수 확보하고 있으며, 마담들이 흔히 빠지기 쉬운 도박·사치·스캔들 등으로 구설에 오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10% 업소 치고 피마담 제자 없는 곳이 없다”는 말을 들을 만큼 수많은 ‘프로 선수’들을 배출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최근 공직에서 사퇴한 남편, 두 자녀와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있는 것도 이채롭다.

    그 때문일까. 피씨의 단골 손님 리스트에는 우리나라의 내로라하는 기업인, 정치인, 고위 공직자, 군장성, 명사들이 망라돼 있다. 역대 대통령 아들들도 모두 고객이었다. 피씨는 이들과 ‘형’ ‘동생’ ‘누님’ ‘미선아’로 통한다. 국내 굴지 재벌가의 3세들도 피씨에게는 예외 없이 ‘동생’ 또는 ‘○○야’다. 매너가 엉망인 손님은 지위와 상관없이 피씨의 독한 질타와 매운 손맛을 보게 된다. 그래서 피씨에게 붙은 또 하나의 별명이 ‘변방의 무법자’다.

    고위층·명사들과 “형” “동생”



    피씨는 “이 세계에서 손님들과 인간적 유대를 맺고 ‘물장사’가 아닌 ‘장사꾼(경영자)’ 대접을 받으려면 속속들이 ‘남자’가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의리, 낭만, 인간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어떻게 하면 손님들 등쳐 먹을까만 궁리해서는 진정한 大마담이 될 수 없다.” 이렇게 일갈하는 피씨에게서 1960 ~70년대 명사들의 회상에 종종 등장하는 ‘밤세계 여걸’의 이미지가 짙게 풍겼다.

    -먼저 유흥업에 몸담게 된 배경을 좀 설명해 주시죠.

    “저는 서울에서 1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부잣집 외아들로 태어나 평생을 한량처럼 사신 분이고, 어머니는 교육열이 대단한 여장부 스타일이었어요. 아버지는 집 앞에 걸인이라도 지나면 마당에 불러놓고 꼭 새 밥을 지어 대접할 만큼 손도 크고 정이 많았습니다. 아버지의 그런 점을 제가 많이 닮았죠. 제가 여고 3학년 시절 집안이 갑자기 어려워졌습니다. 아버지가 이런저런 것들로 가산을 다 탕진해버린 거예요. 아버지는 행방이 묘연하고, 어머니는 몸져눕고, 오빠는 입대해버리고, 언니는 선천적 장애가 있어 누군가 늘 옆에 붙어 있어야 하는 상황이고. 결국 돈 벌어올 사람이 저밖에 없었습니다.”

    -그럼 여고시절부터 직업 전선에 뛰어든 겁니까.

    “일단 학교는 졸업해야겠더라고요. 등록금과 최소한의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신문배달을 했습니다. ‘동아일보’를 돌렸는데, 주말이면 그 때 막 입주를 시작한 잠실 아파트에 달려가 이삿짐을 날라줘가며 부수확장을 했죠. 덕분에 학교를 간신히 졸업할 수 있었어요. 여고시절 제 꿈이 정치가였거든요. 그런데 집안 사정이 그러니 어쩝니까. 운동을 좀 하는 편이라 장학금 받을 욕심으로 체육학과에 진학했죠. 사실 사정도 안 되면서 오기로 들어간 대학이었어요. 학교에는 이름만 올려놓은 채 닥치는 대로 일거리를 찾아 나섰습니다. 남대문시장 좌판에서 옷장사도 했어요. 그런 제가 안쓰러웠던지 한 선배언니가 일자리를 알아봐 줬는데, 그게 바로 룸살롱에서 노래를 부르는 일이었습니다.”

    -‘아가씨’가 아니라 가수로 시작했군요.

    “예, 학교 축제 때 제가 노래하는 걸 보고 잘한다 싶었나봐요. 1학년 2학기 때부터 소공동의 한 룸살롱에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밴드와 함께 룸에 들어가 노래 두세 곡으로 분위기를 띄워주는 게 제 일이었어요. 청바지에 티셔츠 걸쳐 입고, 노래만 부르는 게 아니라 모창이나 우스개 같은 ‘개인기’도 함께 선보였죠. 그래야 제 단골도 생기니까요. 손님들이 팁을 주면 30%는 가게 전무(지배인)에게 주고 70%는 제가 가졌습니다. 막일하던 때랑 비교하면 힘도 한참 덜 들고 수입도 훨씬 많았죠.”

    -초창기 룸살롱에 대해 좀 설명해 주시죠.

    “1970년대 중반, 주로 맥주를 팔던 술집을 살롱 또는 클럽이라 불렀습니다. 수준으로 따지면 요즘의 ‘쩜오(1.5, 즉 15%)’나 ‘20%’ 룸살롱 정도죠. 종업원 팁은 3000원 정도였고요. 룸살롱은 그 클럽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한 거였습니다. 1970년대 후반 양주가 도입된 것이 계기였죠. ‘밀폐된 공간에서 양주를 파는 것’이 당시나 지금이나 변함 없는 룸살롱의 기본 컨셉트입니다.

    소공동에서 시작해 충무로로 옮겨갔는데,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수가 적은 탓에 그야말로 고급, 고품격이었습니다. 가게당 10평이 채 안 되는 크기의 룸이 4~6개 있었어요. 여자종업원은 7~8명, 대개 대학생이나 무명 연예인, 모델 들이었습니다. 매너와 화술이 뛰어나지 않으면 예뻐도 받아주질 않았죠. ‘얼굴이 안 팔린다’는 장점 때문에 장안의 가난한 미녀들이 많이 모여들었습니다. 하이클래스 손님이 많아 분위기는 점잖은 편이었어요. 요즘의 ‘15%’나 ‘20%’ 같은 룸살롱은 그 때 없었습니다.”

    -10%니 20%니 하는 것은 무얼 뜻합니까.

    “이런 용어가 생긴 지는 5~6년쯤 됩니다. 나중에 다시 설명하겠지만, IMF 경제위기가 찾아오면서 1종 허가(유흥주점 허가) 규정이 완화됐고 이어 엄청나게 많은 수의 룸살롱이 새로 생겨났어요. 룸 수가 18~30개씩 되는 기업형도 다수 등장했죠. 마담, 아가씨, 밴드 할 것 없이 공급이 수요를 못 따라갔고 손님층이 다양해지면서, 가게마다 어떤 ‘등급’이 매겨지게 됐습니다. 기존의 고급 룸살롱 분위기를 충실히 고수하며 신뢰할 만한 단골 중심으로 영업을 하면 10%, 그보다 대중적이면서 이른바 ‘2차’(손님과 여종업원 간 매매춘)가 비교적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면 20%, 10%와 20%의 성격을 반반씩 갖고 있으면 ‘쩜오’ 하는 식으로요. 물론 이런 식의 등급을 결정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는 건 그 가게에서 일하는 마담들의 수준과 영업 스타일이죠.”

    -룸살롱이 강남으로 옮겨가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인가요.

    “1980년, 그러니까 12·12 사태가 날 때쯤 국산양주 소비가 급격히 늘었습니다. 또 룸살롱에 가면 대우가 좋은 데다 아가씨들도 괜찮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손님이 크게 늘었지요. 이에 힘입어 한남동, 이태원 등지에 방 5~6개짜리 룸살롱들이 문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이태원에 있는 카페들이 1982년쯤까지는 대부분 룸살롱이었어요.

    1980년대 초 룸살롱의 근거지가 강남으로 옮겨간 건 자연스런 현상입니다. 그 지역을 중심으로 엄청난 부동산 붐이 일었잖아요. 룸 7~10개로 규모가 좀더 커졌으며 아가씨 수도 10명 내외에서 20명쯤으로 늘어났죠.”

    공채 개그맨에서 ‘새끼마담’으로

    -그때쯤 피미선씨는 어디에 몸담고 있었습니까.

    “종업원이 아닌 가수이긴 했지만 유흥업소에서 오래 일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어느 정도 돈이 모이자 고속버스터미널 지하에 수입품가게를 차렸어요. 그런데 사실은 그게 다 미군 PX 물건을 빼다 파는 거거든요. 미군과 결혼했거나 동거중인 기지촌 여성들과 연을 맺을 수밖에 없어요. 예를 들어 30만원어치 물건이 필요하다, 그러면 아가씨들에게 60만원을 줘야 해요. 남는 30만원은 물건 빼다 주는 이의 몫이죠. 큰 돈 벌 수 있는 장사가 아니었습니다.”

    가게를 하면서도 간혹 돈이 궁하면 가수 일을 했다. 그러는 새 대학을 졸업했고, 그 해 친구들의 권유로 MBC 개그맨 공채 1기 선발대회에 나가 덜컥 합격했다. 이경규씨 같은 이가 그 동기다.

    “1년2개월 동안 방송국 생활을 했습니다. 1기 중 가장 주목받는 편이었죠. 그러다 보니 동료들에게 질시를 받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자존심 상하는 일도 자꾸 생겨, ‘결혼하마’ 그렇게 거짓말을 하곤 방송국을 그만뒀지요. 사실은 대학 시절부터 잠 못 자고 고생해 모은 돈으로 방배동에 카페를 열 요량이었는데, 그만 그 돈을 고스란히 다 날려버리고 말았어요. 계가 깨진 거였죠.”

    -그래서 다시 업계로 돌아갔습니까.

    “한 달여를 넋 나간 사람처럼 살았습니다. 당장 가족의 생계가 막연했거든요. 그 때 길에서 우연히, 이전 가수로 일할 때 알던 업소 전무 한 분을 만났어요. 그를 계기로 이 일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됐죠. 논현동의 한 룸살롱에 가수 겸 ‘새끼마담(보조마담)’으로 취직을 한 겁니다. 그렇게 피하고 싶던 물장사였는데…. 운명인가 봅니다.”

    ‘10% 룸살롱’ 代母 피미선이 털어놓은 “대한민국 최상류층 술문화 25년”

    강남구 논현동의 미용실 골목. 유흥업소 종사자들의 발길이 잦아 새벽까지 영업을 한다

    -사장과 마담의 역할이 분리된 건 언제부터입니까.

    “소공동, 충무로 시절만 해도 나이 지긋한 여사장이 마담 역할을 겸했습니다. 그런데 이태원 때부터 이 둘이 나뉘기 시작했어요. 가게가 그만큼 커진 때문이었죠. 제가 다시 이 일을 시작한 1982년 무렵에는 한 가게에 마담이 두 명 이상인 경우도 적지 않았어요. ‘새끼마담’이라는 자리와 용어가 생긴 것도 이 무렵이죠. 경제 규모가 커지면서 룸살롱도 더욱 대형화해 방 15개, 아가씨 30~40명이 일반적인 수준이 됐으니까요. 부동산 투기바람을 타고 ‘대하’ ‘대원’ 등 이름에 大자를 쓰는 가게들이 대거 등장하자 결국 정부가 나서 1종 허가 요건을 매우 까다롭게 만들었습니다.”

    -1982년이면 25세인데, 마담 일을 하기엔 너무 어린 나이 아니었나요.

    “평소 제법 수완이 있다는 소리를 들은 데다, TV를 통해 알려진 얼굴이란 게 플러스 요인이 됐습니다. 비밀요정 출신의 박모 마담 밑에서 처음 일을 배웠죠. 재주가 있었는지 한 달 1000만원 정도 하던 박마담 매상을 3000만원까지 올려줬어요. 그 정도면 당시로서는 大마담 소리를 들을 만했죠. 1년 후 아가씨 6명을 데리고 독립했습니다. 일 잘한다는 소문이 났는지 여기저기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오더군요.”

    -그런데 마담과 종업원들이 그렇게 팀제로 움직이면 수입은 어떻게 나눕니까.

    “마담의 수입을 좌우하는 건 ‘와리’입니다. 자신이 끌어온 손님이 올린 매상 중 일정 퍼센티지를 떼 갖는 걸 와리라 하죠. 198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마담 와리는 매상의 25~30%였습니다. 그러던 것이, 심야 영업을 못하게 되면서 35%, 요즘은 아예 40~45%까지로 뛰어올랐어요.

    아가씨들은 예나 지금이나 팁으로 먹고 삽니다. 소공동 시절 아가씨 1인당 팁은 1만원이었습니다. 비슷한 시기, 그보다 좀 수준이 낮은 이태원 쪽에서는 5000원을 받았죠. 강남으로 옮겨오면서 3만원으로 상향조정된 후 1987년경까지 그 수준을 유지했는데, 역시 심야영업 금지조치가 실시된 이후 5만원, 지금은 1인당 10만원이 ‘공정가’입니다. 10%에선 25만원까지 주고받는 경우도 있죠. ‘쩜오’나 20%에서는 7만~8만원 선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 15%나 20% 가게 아가씨들은 확실히 수입이 적겠군요.

    “그 반대예요. 대신 ‘2차’를 나가는 경우가 많잖아요. 또 새벽 5, 6시까지 영업을 하니 하루밤 새 룸을 네댓 개까지 바꿔가며 뛰기도 하구요. 월수 1000만원 넘는 애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하지만 제대로 된 10%는 지금도 그렇게 늦게까지 영업하지 않습니다. 대충 새벽 1, 2시면 정리가 되죠. 룸도 많아야 3개 정도만 돌고요. 손님이 그 방에만 붙박이로 있기를 원할 경우 보통 ‘공정가’의 2~3배인 20만~30만원을 지불합니다.

    2차는 거의 안 나가는 분위기예요. 특히 업주나 마담의 권유 혹은 강요라는 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일급 아가씨들이 붙어 있겠습니까. 10%에서의 2차는 어쩌다 특별한 경우 제한적으로 이뤄지는데, 이 때는 70만~100만원 정도를 지불해야 합니다. 월수는… 애들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보통 500만~600만원 선이에요. 쩜오나 20%보다는 많이 떨어지는 편이지요. 그래도 생활이 규칙적이라 장기적,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일찍 끝나니 원룸 같은 거 안 얻고 집에서 다닐 수도 있구요. 20% 같은 데서 함부로 몸을 굴리면 3개월 이상 버티기 힘들거든요. 중간중간 한 달 이상씩 쉬어줘야 해요.

    그래도 당장 들어오는 돈이 적으니 요즘은 10%보다 20%를 선호하는 아가씨가 더 많습니다. 손님들도 난삽하고 자극적인 서비스에 길들여지고. 자연히 10% 가게의 입지도 자꾸 좁아지고 있죠.”

    ‘진상’ 손님과 ‘진상’마담

    -10%와 20%를 가르는 기준이 뭘까요. 단지 ‘2차’가 용이하냐 그렇지 않느냐만은 아닐텐데요.

    “한마디로 ‘진상’(‘진상치’를 뜻함. ‘값싼 물건’을 속되게 이르는 말) 손님, ‘진상’ 마담이 있느냐 없느냐입니다. 그게 제일 중요해요. 진상 손님이란 믿을 수 없고 수금이 잘 안 되고 매너도 엉망인 손님을 뜻합니다. 진상 마담은 그런 손님이 많은 마담이구요. 한마디로 실패한 마담이지요. 그래서 마담이나 아가씨에게는 “너 진상이냐”는 비아냥이 가장 모욕적인 말입니다. 고급 단골이 적어 ‘지명’이 잘 안 들어오면 굉장히 자존심 상하죠. 수입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받고요. 근데 우스운 건 마담이 너무 돈을 밝히면 진상이 된다는 거예요. 좋은 손님들이 다 떠나고 마니까.”

    -‘진상’ 손님을 받지 않는 특별한 요령이라도 있습니까.

    “전 정확치 않은 손님은 받지 않습니다. 오랜 단골, 그래서 서로 인간적으로 믿을 수 있는 형, 동생들만 들이지요. 새 손님은 단골과 함께 온 사람이나 추천한 이들로 국한합니다. 그렇게 하면 당장 큰돈은 못 벌어도 매우 안정적으로 장사를 할 수 있거든요. 경기 변화가 피부로 느껴지는 게 이 사업인데, 전 다른 업소에 비해 호황이나 불황을 크게 타지 않는 편이에요.”

    여기까지 말한 피씨는 “마음 같아서는 ‘마담 매뉴얼’ 같은 거라도 만들고 싶다”고 했다. “양질의 마담이 양질의 술문화를 만드는 건데 요즘은 너무 엉망”이라는 것이었다.

    “업소가 많아져서 그래요. 고정 손님 2~3팀만 있으면 스물하나, 스물 둘 먹은 애들을 마담 삼는 시대니…. 술집이란 게 뭐 대단한 곳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의 규율과 상도의가 있잖아요. 또 여기서 잘해 인생 제대로 살고 성공할 수도 있는 거고. 그런데 요즘은 애들이 그런 걸 배울 기회가 없어요. 강남 마담들, 정말 변해야 된다구요.”

    -예를 들면 어떤 겁니까.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마담들이 남자 좋아하고 노름을 또 좋아해요. 명품 찾고 외제차 찾고, 그렇게 사치가 심하지요. 그러니 돈을 벌겠어요? 물장사를 잘하려면 자기관리에 철두철미해야 합니다. 당장 손님 많고 예쁜 애들 많이 데리고 있는 게 다가 아니에요. 자기 중심이 서 있어야 좋은 단골들과 오랜 인연을 맺을 수 있죠. 한 발짝 더 나아가 경영자로 인정받고 싶으면 더욱 그래야 하구요. 안 그러면 그냥 ‘술집 여자’로 끝나는 겁니다.”

    그는 룸살롱 마담도 일종의 전문직이라고 주장했다.

    “보통 마담들은 무조건 예쁜 아가씨만 찾아 룸에 밀어넣으려 합니다. 하지만 손님들이 꼭 예쁜 애들만 찾는 건 아니에요. 손님마다 다른 취향을 한눈에 읽어낼 수 있어야 하고 대화가 통할 만한 아가씨로 짝을 지워야죠. 또 애들 훈련을 잘 시켜야 돼요. 매너, 친절, 화술, 몸가짐, 마음가짐. 전 가게 화장실 가 봐서 엉망으로 돼 있으면 애들 모아놓고 막 난리 쳐요. 나중에 시집가 자식 키울 것들이 이러면 되냐구요. 볼일 볼 때도 그냥 앉아 있지 말고, 신문 보고 시사지 보고 하다 못해 패션 잡지라도 보라고 잔소리합니다. 명품 좋아하지 마라, 돈 모아라, 빚지지 마라, 낮시간에 빈둥거리지 말고 뭐든 배워라…. 다 지들 피가 되고 살이 되라고 하는 소리지요.”

    아가씨들, 기본적으로 불우해

    -다시 옛날 얘기를 좀 하죠. 고용 마담으로 있다 독립한 게 언제부터입니까.

    “1983년 1년 동안 마담으로 일한 후 결혼 때문에 2년 반을 쉬었어요. 스물여덟 살 때 경제적 이유로 복귀했죠. 서른한 살 때까지 남의 가게에서 일하다 1988년 처음으로 내 가게를 차렸습니다.

    그 때는 룸카페라는 것이 유행했어요. 대형화한 룸살롱과 차별화한다는 의도에서 시작된 건데 상류층 사이에 인기가 좋았죠. 제가 그 룸카페를 강남에 퍼뜨린 장본인이에요. 작은 공간에 테이블 몇 개 놓고, 라이브 공연 하고, 학벌 있고 미모 뛰어난 아가씨 몇 명 두고. 장사가 아주 잘 돼서 기존 룸살롱들도 방 몇 개를 터 룸카페 흉내를 내고 그랬어요. 하지만 손님들이 좋아하나요. 룸살롱을 찾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밀실’을 원하는 건데. 다 원상복귀되고 말았죠.”

    -여종업원은 어떤 경로를 통해 고용하나요.

    “앞에서 설명한 대로 마담과 아가씨는 한 팀입니다. 그러니 아가씨를 고르고 관리하는 것도 전적으로 마담의 몫이지요. 주변에서 알음알음 소개받는 경우가 많은데, 전 다른 마담 밑에서 배운 애들보다는 처음 시작하는 쪽을 선호하는 편이에요. 한 10년, 15년 전쯤에는 ‘길거리 캐스팅’도 많이 했습니다. 대학 앞에 가 가만히 서있다 보면 ‘저 애다’ 하는 학생이 눈에 확 들어와요. 그럼 다가가 솔직히 말하죠. 난 이런저런 일을 하는 사람인데 학생과 얘기를 좀 하고 싶다구요. 따귀라도 맞을 것 같지만 아니에요. 백이면 백 관심을 보였어요. 대화를 해보면 십중팔구 돈이 필요한 학생입니다. 이상하게 제 눈에는 그게 보이더라구요. 아, 쟤는 지금 꼭 돈이 필요하다, 물장사 할 팔자다…. 그런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죠. 꼭 그렇게 하지 않아도 괜찮은 아이들이 제 발로 찾아오니까요.”

    -그러니까 고학력 여성들이 룸살롱에 많이 몰리고 있다는 소문이 사실이군요.

    “그렇습니다. 우리 가게만도 애들 대다수가 대학 졸업 이상입니다. 물론 재학중인 아이도 있구요. 4명은 유학이나 연수 경험이 있어 외국인 손님과의 대화에도 막힘이 없죠.”

    -역시 형편이 어려워 이 곳으로 빠져들었다고 보기는 어려운 여성들이네요.

    “그게 한마디로 단정짓기 어려워요. 분명한 건 아직은 불우한 애들이 많다는 거예요. 특히 요즘은 IMF 위기 때문에 집안 사정이 나빠져 이 길로 들어선 애들이 꽤 많아요. 가장 역할을 하고 있거나, 아니면 부모가 뒷바라지를 해줄 형편이 못돼 제 손으로 학비나 유학자금, 창업자금을 모아야 하는 애들이요. 꼭 돈 문제가 아니어도 부모가 이혼했다거나 사이가 나쁘다거나 형제자매가 속을 썩인다거나…. 하여튼 가정이 편치 않은 쪽이 대부분이에요. 우리 가게에는 이혼하고 혼자 애 키우며 고생하는 친구들도 둘이나 되는 걸요. 물론 겉멋 든 애도 있죠. 특히 카드 빚 때문에. 저는 그런 애들은 거의 안 써요. 그래서 업계에 ‘피언니 밑 애들은 착하다’는 소문이 난 걸 거예요.

    전체적으로 통계를 내면,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가장 노릇 하는 애들이 전체의 70%쯤 됐다면, 지금은 가장형이 30%, 반가장이 40%, 카드 빚에 쫓기는 아이들이 30% 정도라고 할까요.”

    -아무리 업주나 마담이 ‘똑바로’ 가르친다 해도 역시 룸살롱은 유흥업소이고, 매매춘이나 방종한 생활로 빠지기 쉬운 지대 아닙니까. 직업으로 이 일을 선택한 걸 사회가 지지해주기란 쉬운 일이 아닌데요.

    “그렇지요. 여자로서 술집에서 일한다는 게 무슨 자랑이겠어요. 그래도 어쩔 수 없어 들어왔다면 열심히 일해 빨리 털고 나가는 것이 상숩니다. 그런 면에서 아가씨들에게 사치하고 방종한 본을 보이는 마담들은 아주 나쁜 종자들이에요. 자기 친여동생이 돈 쓰는 재미에 빠져 미래 계획도 없이 줄창 술집만 나가면 좋겠어요?”

    카운슬러 역까지 해야 진짜 大마담

    -룸살롱 아가씨들의 ‘이후 삶’은 어떻습니까.

    “전 다른 집은 잘 모르겠어요. 우리 가게 애들은 잘 돼 나가는 편이에요. 지난해에만 3명이 시집을 갔고, 유학을 떠나거나 제과점·네일아트숍 같은 가게를 낸 아이들도 꽤 됩니다. 다른 10% 룸살롱에 마담으로 진출한 아이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구요. 아마 1000명은 더 될걸요? 만약 유흥업에 승부를 걸겠다고 생각했다면 전 그것도 괜찮다고 봐요. 아가씨로 끝나지 않고 경영자가 돼보겠다는 포부니까. 룸살롱이란 게 아주 없어질 업종이 아닌 바에야, 그나마 생각 똑바로 박힌 사람들이 사업도 하고 마담 일도 보면 사회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지 않겠어요.”

    -그러고 보니 B룸살롱은 다른 가게와 분위기가 많이 다르네요.

    “전 제대로 된 룸살롱은 방이 많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가게에는 룸이 3개밖에 없어요. 대신 넓고 안락한 홀에서 수준급의 생음악을 들려드리는 데 주력하죠. 술집엔 뭐니뭐니해도 낭만이 있어야 하잖아요. 아가씨도 12~15명이 고작입니다. 룸살롱과 룸카페를 합쳐놓은 형태인데, 그래도 분위기나 서비스는 그 어떤 업소보다 정통 룸살롱에 가깝다고 자부합니다. 문 들어서면 웨이터 열 명, 스무 명이 좌악 서서 ‘어서옵쇼’ 하는, 그런 건 룸살롱이 아니지요.

    우리 가게는 단골을 위한 집이에요. 와인을 맡겨놓고 마셔도 편안한 룸살롱, 매상 무리하게 안 올려줘도 대접받는 룸살롱, 아름답고 대화가 통하는 아가씨들과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룸살롱, 대신 깔끔한 매너를 지켜야 하는 룸살롱. 전 부와 명예, 교양을 겸비한 상류층 남성일수록 바로 그런 분위기의 술집을 선호하고 꾸준히 찾는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일까, 피미선씨는 화장 안한 맨얼굴에 티셔츠와 청바지 차림으로 손님을 맞는다. 매일 2시간 이상 운동으로 몸매를 관리하는 덕분에 그런 스타일이 오히려 젊고 탄력 있게 느껴진다. 물론 여종업원들은 성장을 한다. 피씨는 “5년, 10년 된 단골의 경우 그 안사람들과도 대강 알고 지낸다. 이혼 문제 같은 가정사에도 종종 카운슬러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아가씨들이 호스트바에 자주 다니는 건 문제가 안 됩니까.

    “왜요, 엄청난 문제지요. 정말 큰일 났어요. 이런 데 나오는 아이들이 사실 여리고 외롭거든요. 그런데 거기 남자접대부들이 입 안의 혀처럼 잘해주니까 그 달콤함에 그만 홀딱 넘어가고 마는 거예요. 그런 느낌 있잖아요. 항상 ‘을’의 입장에 있다 ‘갑’이 된 느낌. 호스트바라는 게 기본적으로 다 무허가고, 영업 시간도 새벽 2시부터 아침까지예요. 그런데 장사 안 되는 1종 가게를 전세 내 합법으로 위장하고 어려운 아이들 돈을 우려 먹는 거지요. 장사보다 돈 빼먹는 데 더 관심 많은 남자들이 많다니까요. 제비족은 잡아넣으면서 왜 그 사람들은 가만둡니까.”

    -DJ 정부가 들어선 이후 룸살롱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는데요.

    “그렇죠. 1990년대 들어 이른바 ‘밀실 문화’라는 게 나이트클럽까지 확산되긴 했지만, 그래도 룸살롱 수는 많지 않았거든요. 1년에 한두 개나 생길까 말까…. 워낙 허가받기가 어려워 어디 새 가게가 생겼다 하면 모두, ‘무슨 재주를 부린 거냐’고 놀라워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지난 정권이 들어서면서 1종 허가 규제가 많이 완화됐어요. 1998 ~2000년 서울 강남에만 매일 1개꼴로 새 가게가 생겼습니다. 마담 스카우트 비는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올라가고. 다행히 때맞춰 분 벤처바람 덕분에 한동안은 장사가 잘 됐죠. 하지만 보세요. 지금은 다 문닫게 생겼다고 난리잖아요. 업계가 지금 이 모양이 된 데는 정부 탓도 아주 크다니까요.

    룸살롱 20년을 지켜본 사람으로서 하는 말인데, 지금 대개의 룸살롱은 ‘클럽’이지 결코 ‘룸살롱’이 아니에요. 가게 값도 장난이 아니잖아요. 룸 한 개 당 약 4000만~5000만원에 거래가 되는데, 이렇게 따지면 방 20개짜리 가게의 경우 8억~10억원이라는 계산이 나오거든요. 1990년만 해도 8000만원이면 논현동 노른자위 룸살롱을 인수할 수 있었으니 그때랑 비교하면 올라도 너무 오른 거지요. 하여튼 그렇게 가게를 인수했다, 그럼 업주는 어떻겠어요. 투자비를 뽑고 이익도 좀 얻으려면 한달 매출이 7억 이상은 돼야 하거든요. 그러려면 괜찮은 마담과 아가씨가 있어야 하고. 마담 스카우트 비에 아가씨들 마이낑(취업 선불금)까지 10억~15억은 기본이지요. 여기에 더해 억대 홍보비까지 써야 하니 술값이 비싸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고 보면 가게마다 술값이 천차만별인데요.

    “그럼요. 가게 운영을 잘하면 술값에 거품이 빠져 비교적 싸게 나가고, 급한 마음에 매상 올리기에 급급하다 보면 비싸게 나가는 거죠. 업주들이 비싼 술을 원하니 양주회사들도 그에 발맞춰 17~18년산 술을 대거 출시했습니다. 업소 입장에선 12년산보다 35% 정도 더 비싸게 팔아먹을 수 있으니 좋아할 밖에요. 일부 업소에서는 손님에게 ‘요즘 12년산은 출고가 안 되니 17년산을 드시라’며 거짓 권유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건 올바른 장사가 아니에요.”

    -법인 형태의 룸살롱이 많아진 건 무엇 때문이죠.

    “아무래도 가게 규모가 커지다 보니 한 사람 돈으로는 창업하기가 힘들어서겠죠. 이왕 세금 낼 것 법인화하면 좀 싸지는 측면도 있고요. 하지만 더 큰 이유는 마이낑 사고 때문인 것 같아요. 룸살롱은 룸살롱대로 운영하면서 대부업을 표방한 법인을 따로 등록하는 거죠. 아가씨들을 데려올 때 작게는 1000만원, 많게는 1억원까지 취업선불금을 주는데 이게 사고가 자주 나거든요. 아가씨들이 돈을 안 갚고 버티면 법에 호소할 수밖에 없잖아요. 그럼 ‘이 아가씨한테 뭘 믿고 수천만원을 줬느냐’는 질문이 돌아와요. 할 말이 없잖아요. 이 때를 대비해 따로 만든 회사를 통해 정식으로 차용증을 쓰고 선불금을 주는 거죠.”

    -요즘 신문·방송에 룸살롱에 관한 비판적 뉴스들이 많이 다뤄지고 있는데요.

    “저, 거기에 대해 할 말 많아요. 일단 왜 룸살롱 하면 모두 싸잡아 비난하는 겁니까. 저도 20%식의 영업에는 문제가 많다고 생각해요. 터무니없이 폭리를 취하는 가게들도 있겠고요. 하지만 우리 업소 같은 곳도, 또 나름대로 세금 똑바로 내고 깨끗하게 장사하는 일급 룸살롱들도 있는 겁니다. 그리고 자꾸 멤버십, 멤버십 하는데 멤버십이란 건 회비를 내고 특별한 혜택을 받는 제도를 말하는 거예요. 제가 알기론 룸살롱 중 그렇게 영업하는 곳은 없습니다. 다만 진상 손님을 피하기 위해 단골 중심으로 운영하는 것뿐이죠.

    그리고 술값이 1000만원이니 뭐니 하는 것도 좀 잘 알아보고 썼으면 좋겠어요. 사실 돈 많은 사람들이 값은 더 따지거든요. 손님들이 바본가요. 대충 술값이 어떻다는 걸 아는데 막무가내로 바가지를 씌우게요. 전 누가 제 앞에서 술을 몇백 만원어치를 먹었니 하면 꼬치꼬치 캐물어요. 허풍인 경우가 많지요. 1인당 50만원어치를 먹었다, 이러면 이건 엄청나게 세게 먹은 겁니다. 흔치 않은 일이에요.”

    -그래도 접대하는 쪽에서는 고민이 많은 모양이던데요.

    “저도 우리나라 접대 문화에는 문제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당연히 바뀌어야죠. 삼성에서 룸살롱 접대하지 말라고 했다던데 그거 아주 잘하는 겁니다. 그래서 정말 올 사람들만 오게 해야죠. 그리고 제가 볼 때 접대 문화가 이렇게 왜곡된 건 받는 쪽보다 내는 쪽에 더 문제가 많은 것 같아요. 어떻게든 코를 꿰려고 비싼 술에 2차까지 악착스레 붙여주잖아요. 접대하는 쪽이 바뀌면 받는 쪽도 바뀔 거라 생각합니다.”

    -이제껏 시대별로 룸살롱이 어떻게 변해왔는가를 주로 설명했는데, 손님들도 많이 변했지요.

    “그렇습니다. 사실 유능한 업주나 마담은 3년 후 경제를 내다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때 그때 잘 나가는 사람, 잘 나가는 업종이 무엇인지를 재빠르게 파악해 업태도 바꾸고 영업 전략도 바꿔야죠.

    1970년대 말에는 건설 붐, 부동산 투기 붐이 대단했습니다. 그 쪽 손님들이 밀어닥쳤죠. 건설 하시는 분들은 말술에 아주 떠들썩하게 놀았어요. 노래도 많이 부르고 호기도 잘 부리구요. 말투는 억세지만 뒤끝이 없어 좋았습니다. 반면 부동산 종사자들은 통이 좁고 허세를 많이 부렸어요. 007가방에 현금다발 넣고 와 자랑을 하기도 했죠. 점잖은 것과는 거리가 좀 있다 할까요.

    1980년을 전후해서는 군부가 반짝 경기를 이끌었습니다. 장성들은 스케일이 굉장히 커요. 생각과는 달리 매너 좋고 심플하구요. 특히 장군을 모시고 온 부관들은 아주 스마트하고 얼굴도 깔끔하니 잘생겼지요. 군인인 만큼 술 마시는 자세도 매우 절도가 있었습니다. 보통 폭탄주를 만들어 마시는데 어마어마한 말술이에요. 20잔씩은 기본으로 돌았죠. ‘폭탄주’라는 말 자체가 그때 탄생한 겁니다. 그런데 요즘은 별로 오시는 분들이 없어요. 어쩌다 무기거래상이나 그런 사람들과 함께 오는 경우가 있는데 여전히 점잖고 조용한 편입니다. 오히려 접대하는 쪽에서 너무 ‘주접’을 떨면 상당히 불쾌해들 하시죠.”

    벤처 재벌, 오래 못 갈 줄 알았다

    -1980~90년대는 어땠습니까.

    “1980년대 중반에는 섬유업이 활황이었죠. 대구 경북 지역에 관련 공장이 많다보니 영남 사투리가 룸을 점령하다시피 했습니다. 대개 수출 상담을 전후한 바이어 접대가 많았는데, 영어를 할 줄 아는 부장급 ‘술상무’들이 자리를 이끌었습니다. 참 그 분들 대단해요. 모두 어엿한 가장임에도 바이어 비위 맞추느라 각설이 분장에 꼽추춤에…. 아가씨보다 더 열심히 땀 흘리는 모습들이 안쓰럽고 가슴 뭉클하기도 했습니다. 최근 그때 드나들던 ‘술상무’ 중 한 분이 간이 상해 고생이 막심하시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마음이 아플 뿐이에요.

    1989년부터는 증권사, 사채업, 금융업 종사자들의 발길이 잦았습니다. 이분들은 술보다 아가씨에 더 관심이 많았어요. 술자리에서도 워낙 말조심을 하다 보니 스케일이 작은 편이었고 계산에도 아주 민감했죠.

    이어 컴퓨터 쪽 사람들이 늘었는데, 이 분들은 회사나 연구소를 자주 바꾸더라구요. 혼자 아니면 둘이 와 조용조용 마시고 소리소문 없이 사라지곤 했습니다.”

    -IMF 경제위기 때는 업계도 상당히 어려웠겠죠.

    “일단 사업하는 분들이 부도니 뭐니 해서 확 들어가 버렸으니까요. 대신 변호사나 공무원 손님이 좀 늘었습니다. 공직자들이 안 그럴 것 같은데 사실 매너에 문제가 있는 경우가 많거든요. 윗세대로부터 잘못 배운 탓이겠죠. 하지만 장관급, 국장급 되는 분들은 모범적이다 할 정도로 아주 깨끗하세요. 역시 그 자리에 오를 만하다 싶지요.

    쭉 소원하다 그때쯤부터 다시 받기 시작한 손님이 검사들이에요. 옛날에는 막 재떨이, 화채그릇, 신발, 그런 데다 술 따라 마시게 하고 입도 걸고…. 주로 변호사들 접대를 많이 받았는데 그 역시 보기 안 좋았죠. 그런데 한 10년 사이에 무슨 혁명이라도 일어난 것 같더라구요. 매너가 몰라보게 심플해진 거예요. 스폰서 삼아 변호사를 대동하는 경우도 거의 사라졌고요. 이전처럼 벼락출세에 흥분한 모습이 아니라, 원래 부유한 집 자손인 듯 동료들끼리 와 조용조용 즐기고 가시는 분들이 대부분입니다. 고위직에 계신 어른들은 더 그렇고요. 사실 매너 거칠기로 따지면 기자들도 누구 못지않잖아요. 동료들끼리 오면 모를까, 직접 술값을 내는 경우도 거의 없구요.

    경제위기가 어느 정도 수습되면서부터는 잘 아시다시피 벤처 바람이 불었습니다. 벤처업계나 엔젤투자자, 벤처캐피탈 관계자들이 확 늘어났죠. 그런데 저는 그 쪽 손님들을 거의 받지 않았어요. 머리 좋고 학벌 좋고 다 좋은데 이상하게 정서가 맞질 않아요. 쉽게 벌어 그런지 자기 관리를 잘 못하고 호기도 자주 부리구요. 오래 못 가리라 예상했습니다.

    제가 장사하며 제일 듣기 싫은 말이, 나는 한 달에 20번은 룸살롱에 간다 뭐 그런 거예요. 한마디로 잘 해라 그 소린데, 돈 좀 더 쓰고 덜 쓴다고 손님 차별할 수 있나요. 또 그렇게 술 잘 마신다고 자랑하는 거 보면 솔직히 불안해요. 첫째, 건강이 걱정되고, 둘째, 회사나 가정이 온전할까 싶구요.”

    -연예계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역시 꺼리는 편입니다. 다른 고객들이 불편해해서요.”

    -역대 대통령 자제들도 많이 드나든 걸로 아는데요.

    “그 분들은 다 조용하고 매너도 깨끗해요. 오히려 ‘모시고 온’ 사람들이 더 난리를 치지요. 주인이나 아가씨 입장에선 솔직히 피곤하고 부담스럽습니다. 사실 불쌍한 사람들이잖아요. 서민들은 ‘꼭 그런 데 가서 먹어야 맛이냐’고 할지 모르지만, 그럼 또 그런 분들이 조용히 사람 만나고 쉴 수 있는 데가 몇이나 됩니까. 한정식집은 시간 제한이 있고요.”

    -정치인들은 매너가 어떤가요.

    “그분들은 룸살롱보다 비밀요정을 더 선호하세요. 보안 유지도 잘 되고 편하니까. 우리 가게에는 한나라당 국회의원들이 자주 오시는데 대개 당선되기 전부터 드나들던 분들이죠. 원래 풍족한 집안 출신이라 술 매너도 깔끔하고 부드러운 편이에요. 접대를 많이 받을 거라 생각하는데 본인이 계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 그런 건 아니겠죠.

    “물론 엉망진창인 손님도 있지요. 한 국회의원은 아가씨가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며 폭행하고, 시골 친구들까지 불러 올려 접대를 받고, 심지어는 그 사람들이 낸 돈을 현금으로 찾아가며 ‘누구누구한테 연락해 돈 받으라’는 몰상식한 짓까지 하던걸요. 제가 가만 있겠습니까. 너 같은 손님 안 받는다고 난리를 쳤죠. 또 전 정권의 실세인 모씨는 싫다는 아가씨를 억지로 차에 태워 끌고 가려 하질 않나, 항의를 하니 ‘내일 문 닫을 생각이냐’고 협박을 하지 않나…. 두 사람 다 제가 참 좋아하는 단골들이 소개한 경우인데 나중에 제가 그랬어요. 그 따위 인간들 데려올 거면 니들도 오지 말라고.”

    -재벌가 고객의 경우 집안마다 다른 특징 같은 게 있습니까.

    “전 참 LG 분들이 좋아요. 구씨 집안 어른들은 심플하고 세련됐고, 허씨 어른들은 순박하면서 털털한 스타일이지요. 남자와 여자의 어우러짐 같다 할까. 서로 얼마나 잘 챙기고 경우도 바른지, 친형한테도 깍듯이 ‘회장님’ 하고 예의를 차릴 정도니까요.

    삼성가는 집안이 크잖아요. 2세끼리 3세끼리 몰려 찾아오는 편이죠. 매너 좋고 털털합니다. 현대 정씨 일가는 술 잘 드는 이, 못 드는 이가 극명하게 갈리고요. SK는 회장님이나 직원들이나 조용하고 별 특징이 없는 편이에요.”

    현대-화끈, 삼성-깔끔, 대우-말술

    -재벌 2, 3세들은 집안과 상관없이 자주 어울리는 편이죠?

    “그렇습니다. 대개 학연으로 얽혀 있는데 계보를 만들어 그 안에서만 놀지요. 일부 정치인이나 관료 자제들도 섞여 있고요. 2세들은 모이면 주로 경제 얘기를 하고 3세들은 여자 얘기를 많이 합니다. 아무래도 젊으니까요. 가정 교육을 엄하게 받아 대체로 깔끔한 편이고 술값도 의외로 꼼꼼히 따집니다. 특히 그 중 핵심 역할을 하는 L회장님은 후배가 안주를 더 시키면 ‘니가 내라’고 할 정도로 ‘짠돌이’예요.

    계보를 만드는 건 재벌 자제들만이 아닙니다. 학벌이 워낙 중요한 사회라 그런지 학교별로 이너서클을 형성하는 경우가 아주 흔해요. 고등학교는 경기·경복·서울·중앙, 대학은 서울대·고대·연대, 여기 하버드·스탠퍼드·UCLA 등 유학 인맥까지 합쳐 거대한 층을 형성합니다. 결국 이 사람들이 고위 공직자가 되고 오너가 되고 전문경영인이 되고 법조인이 돼 우리나라를 지배하는 것 아니겠어요.”

    -혹 어떤 대학을 나왔느냐에 따라 성향이 갈리기도 합니까.

    “확실히 달라요. 서울대 출신들은 뭔가 맘에 안들고 기분 나쁜 일이 있어도 절대로 불평을 하지 않습니다. 그냥 다음부터 안 오죠. 분위기를 많이 따지는 반면 술은 잘 못합니다. 연대 사람들은 분위기보다 아가씨의 미모에 관심이 많아요. 옷 잘 입고, 유머감각 있고, 또 잘 놀구요. ‘놀러가자’며 아가씨를 자꾸 꾀죠. 고대 출신 중에는 관료가 많습니다. 말술에 매너도 거친 편이지만 오히려 진솔한 면이 있어요. 그리고 보수적이라 마담이 싱거운 농담이라도 하면 금세 인상이 구겨지죠.”

    -기업마다 문화가 다른데 술자리에서도 그런 것이 티가 나는지요.

    “저희 가게에는 주로 사장단들이 많이 오세요. 현대 분들은 여러 사람이 쫙 다 모여 떠들썩하게 놀지요. 상하관계가 분명하고 술도 잘 마십니다. 여자에 대한 관심은 보통이고, 미모보다 마음씨 고와보이는 애들을 선호하고요. 그래도 신나게 노는 데 더 비중을 많이 둡니다.

    삼성 분들은 삼삼오오 조금씩 모여 조용조용 이야기에 몰두합니다. 상하 관계보다는 동료 간 수평관계에 치중하는 분위기예요. 나중에 방을 치우러 들어가 보면 바닥에 휴지 한 장 떨어진 것 없이 깨끗해요. 뒤처리가 섬뜩하리만큼 철저하지요. 놀랍기도 하고 한편 감동스럽기도 하구요.

    대우는 스케일이 현대보다 더 커요. 술도 어마어마하게 마십니다. 여자에는 거의 관심이 없죠.”

    -요즘 경제가 어렵다 어렵다 하는데 어떻습니까.

    “물장사 20년에 최대 불황인 것 같아요. 앞을 내다볼 수가 없습니다. 경기 활성화의 핵심이 없잖아요. 우리 가게는 올 3월부터 매출이 떨어지기 시작했는데 다른 집들은 작년 9월부터 그랬다더군요.”

    -경기 하락의 원인을 향락산업의 비대에서 찾는 사람도 있는데요. 사회가 건강해지려면 사실 룸살롱처럼 폐쇄적이고 고소비를 조장하는 업태는 사라져야 하지 않을까요.

    “이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결코 부유층이 아닙니다. 웨이터, 아가씨, 주방 보조, 주차관리원…. 게다가 거기 딸린 식구들을 생각해 보세요. 세금은 또 얼마나 많이 내는데요. 유흥업도 하나의 산업입니다. 무조건 퇴폐·향락문화라고 매도하면 안 되지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누군가 ‘부’를 갖고 있게 돼 있어요. 그들이 돈을 쓰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누군가 그 주머니를 열어 돈이 돌게 하지 않으면 결과적으로 서민들만 더 힘들어집니다. 전 ‘부자는 오적, 빈자는 청렴결백’ 하는 식의 정서는 이제 없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돈 있는 사람이라면 조용히, 안락하게 술 마실 권리가 있는 것 아닌가요.”

    -글쎄요. 돈을 쓰되 어디에 어떻게 쓰느냐의 문제겠지요. 사실 지금 대다수의 룸살롱은 그 영업 행태에 분명 큰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그건 사실입니다. 저도 엄청난 바가지 요금에 퇴폐적인 생활을 부추기는 스타일의 영업은 하루빨리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술집을 아주 없앨 수는 없으니, 또 그 안에 나름의 등급이 없을 수 없는 일이니, 룸살롱을 고급 사교장으로 탈바꿈시킬 수 있는 방법을 모두 함께 고민해야 할 때라 생각합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룸살롱을 모두 시 외곽으로 내보냈으면 좋겠어요. 지금처럼 상업지구 지하에 박아두지 말고요. 일본을 보십시오. 긴자면 긴자, 아카사카면 아카사카, 나름대로 개성과 역사가 있는 유흥 명소들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도 그런 풍류와 개성을 만들어 가야지요. 지난번 일본에 갔다 막부 때부터 내려오는 한 술집에 가보고는 정말 감동했습니다. 아름다운 정원과 정갈한 기모노, 조용한 분위기…. 집안 대대로 딸을 통해 이어져왔다는데 저도 제 딸에게 가게를 물려주고 싶어요. 한번 멋지게, 제대로 해보라구요.”

    인터뷰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피미선씨가 “마지막으로 하고픈 말이 있다”며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어느새 목소리에는 울음이 묻어 있었다.

    “그리고… 저 이 말을 꼭 하고 싶은데요, 고맙다는 말씀 드리고 싶은 분들이 있어요. 20년이란 세월동안 절 도와준 우리 형들. 물장사 하는 여자 취급 안하고, 인간적으로 대접해주고, 힘들 때나 어려울 때 늘 격려해주시고 아낌없이 가르쳐주시고…. 형들, 고마워요. 정말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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