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1월호

분식회계·비자금 파문에 휘청거리는 SK

투톱 갈등, 어설픈 로비가 빚은‘비극’

  • 글: 성기영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ky3203@donga.com

    입력2003-10-28 10: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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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식회계·비자금 파문에 휘청거리는 SK

    최태원 회장이 7개월 만에 보석으로 석방된 뒤 손길승 회장이 비자금 파문에 휩쓸리면서 두 사람 사이에 미묘한 갈등이 감지되고 있다.

    재계에 떠돌아다니는 우스갯소리 하나. 어느날 재벌 총수 집무실에 난데없이 뱀 한 마리가 들어온다면 삼성 현대 SK 등 각 그룹별로 대처하는 방식은 어떻게 다를까. 우선 삼성이라면 에스원 소속 보안요원이 긴급 출동해 뱀을 잡은 후 이내 원인 분석과 재발 방지 작업에 들어간다. 일단 담당 직원부터 문책한 뒤 뱀이 들어오게 된 경로를 파악하고 사무실 보안 장치를 그날로 교체한다. 그것도 뱀을 인지할 수 있는 특수칩이 장착된 첨단 보안 시스템으로.

    현대그룹이라면 대처하는 방식이 조금 다르다. 일단 집무실에 들어온 뱀이 MK 쪽에서 풀어놓은 것인지 MH 쪽에서 풀어놓은 것인지부터 확인한다. 그런 다음 우리 편에서 풀어놓은 것이 아니라고 판단되면 당장 눈앞에 보이는 화분이나 명패 등을 이용해 뱀을 격퇴한 후 시설 보완에 들어간다. 무엇보다 먼저 총수 집무실의 출입문을 물샐 틈 없는 대형 철제문으로 바꾸는 것.

    그렇다면 SK는 어떨까. SK 직원들은 각자 책상에 코를 박고 자기 일만 열심히 하는 통에 뱀이 들어온 줄도 모르고 있다가 뱀이 총수를 물고 나간 뒤에야 이 사실을 깨닫는다. 게다가 직원들 중 뱀 잡을 줄 아는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어 마냥 허둥대다가 뒤늦게 SK의 경영 매뉴얼인 SKMS에 ‘뱀 잡는 법’이 나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 고작이다.

    SKMS란 SK의 경영관리체계(Management System)를 일컫는 용어로 SK가 고(故) 최종현 회장 시절인 1979년 완성한 고유의 경영관리 모델이다. 기존의 경영학 교과서로는 설명되지 않는, SK만이 갖고 있는 독특한 경영 매뉴얼인 셈이다. 누구보다도‘시스템에 의한 경영’을 강조해왔던 최종현 회장은 SKMS를 통해 기업 구성원들이 어떻게 하면 자발적이고 의욕적으로 두뇌를 최대한 활용할 것인지를 매뉴얼화하는 데 전력을 기울인 바 있다.

    시스템 경영의 한계인가



    다소 모욕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이런 우스갯소리가 나도는 것은 SK가 삼성이나 현대, LG 등 다른 그룹에 비해 유독 ‘시스템에 의한 경영’을 내세워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스템만 강조하다 보니 정작 그룹이 위기에 처했을 때는 확실하게 책임지고 나서는 사람도 없고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 한마디로 위기 관리에 취약하다는 것이다.

    SK네트웍스(옛 SK글로벌)의 1조5000억원 규모 분식회계 사건으로부터 촉발돼 최태원 회장의 구속으로 이어졌던 SK사태가 최회장의 보석으로 수습국면에 들어가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한나라당 최돈웅 의원과 최도술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에 대한 거액의 비자금 제공 의혹으로 번지고 있다. 충격파로 따지자면 뱀 한 마리 들어온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초특급 태풍이 SK 전체를 덮치고 있는 것이다.

    SK에서는 최태원 회장의 보석 석방, 채권단과의 채무 재조정 협상 진전, 구조조정 계획 가시화 등 SK네트웍스 분식회계 사건의 여파가 가라앉아가는 상황에서 갑자기 정치자금 사건이 튀어나오자 그 진의를 의심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SK 계열사의 한 임원은 “솔직히 당시 그만한 정치자금을 양측 후보 진영에 갖다 바치지 않은 재벌 그룹이 어디 있겠느냐? SK가 걸려든 것은 가장 만만했기 때문이 아니냐”고 불만을 털어놓았다. 삼성을 건드릴 경우 안 그래도 투자 위축과 경기 불황에 시달리는 경제 상황 자체가 위태로워질 것이고, 4대 그룹이 아닌 다른 데를 건드려봐야 상징적 효과도 미미할 것이기 때문에 결국 SK가 걸려든 것이라는 이야기. 게다가 SK는 이미 SK네트웍스 분식회계 파동으로 상처를 입을 만큼 입었기 때문에 경제에 미치는 충격과 관련해서도 검찰이 뒤집어쓸 부담이 적지 않았겠느냐는 분석이다.

    특히 SK 관계자들은 드러내놓고 말하지는 못하면서도 “검찰이 삼성 이건희 회장의 장남 이재용씨의 편법증여 의혹과 관련해서는 오는 12월 공소시효 만료를 앞두고 모양새 갖추기식 수사를 하면서 유독 SK에 대해서만 강도 높은 압박을 펼치고 있다”며 불만스런 기색이 역력하다. 지난 2000년 업무상 배임 혐의로 검찰에 고발된 이재용씨 편법증여 의혹사건의 경우 배임액이 50억원 미만이면 공소시효가 7년으로, 올해 연말이면 공소시효가 끝난다. 물론 삼성측에서는 이러한 시각에 대해 “한마디로 말도 안 된다”는 반응이다. 검찰 역시 ‘SK 표적설’에 대해 강하게 부인하고 있다.

    지난 2월, SK네트웍스 분식회계 사건 수사에 착수해 최태원 회장을 전격 구속하는 등 SK사태에 불을 붙였던 당시 서울지검 이인규 형사9부장(현 원주지청장)도 “당시 수사에서도 최태원 회장이나 손길승 회장의 정치자금 문제는 나온 적이 없다. 나도 몰랐던 문제”라며 사전기획설을 강하게 부인했다. 그러면서도 이지청장은 “대검의 수사에 영향을 미칠까봐 지금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지만 나중에 좀더 조용해지면 얘기할 기회가 있을지 모른다”고 말해 묘한 여운을 남겼다.

    수백 억원대의 정치자금 파문으로 위기를 맞은 SK의 최근 사정을 보면서 세간에서는 ‘아이러니’라는 말을 떠올리기도 한다. 사업을 확장하거나 다각화할 때마다 정부 소유 공기업을 인수해 발판을 삼아온 것만 보더라도 SK가 다른 어느 그룹들보다도 정부와의 관계가 매끄러울 것이라는 게 재계 안팎의 추측이었기 때문이다.

    SK그룹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선경직물은 지금부터 정확히 50년 전인 1953년 고(故) 최종현 회장의 형인 최종건씨가 정부 소유 직물공장을 인수하면서 태동했다. 또 SK는 1980년대 들어서는 정부의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에 호응하듯 정유회사인 대한석유공사를 인수함으로써 그룹의 사업구조를 섬유 중심에서 에너지·화학 중심으로 재편했다. 뿐만 아니라 1990년대 들어서는 한국이동통신의 경영권을 차지함으로써 오늘날 그룹내 최고 알짜기업으로 성장한 SK텔레콤의 성장 기반을 구축했다. 이렇듯 SK가 사세(社勢)를 불려온 주요 고비고비마다 공기업과 연관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공기업 인수전략을 그룹 성장의 발판으로 삼기 위해서는 정부와의 관계를 매끄럽고 돈독하게 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SK 관계자들은 대정부 관계가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 1998년 최종현 회장 사후 최태원-손길승 회장의 ‘투톱 체제’가 출범하면서부터라고 지적한다. SK의 한 전직 임원은 이러한 원인을 최종현 회장의 사업 파트너로 동고동락하면서 ‘산전수전 다 겪어온’ 손길승 회장과, 미국 명문대학에서 공부만 하다가 30대 초반의 나이에 부장급으로 경영에 합류한 최태원 회장 간의 업무 스타일 차이에서 찾았다.

    “미국에서 공부만 하고 돌아온 최태원 회장은 선대 회장이나 손길승 회장과도 인식차가 너무나 컸다. 합리적 경영과 한국적 현실 사이에서 전자만 강조했을 뿐 후자에 대한 이해는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90년대까지만 해도 SK 경영기획실에는 경제기획원 고위 관료 출신, 안기부 간부 출신은 물론 민주산악회 출신 등 ‘필요할 때 활용할 수 있는’ 인맥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최태원 회장 체제가 들어서면서 이러한 인력들은 대부분 회사에서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최태원 회장은 학구파(?)

    굳이 비교하자면 삼성이 국세청, 공정거래위원회, 재경부 등에서, 얽히고 설킨 기업 경영의 현안이 발생할 때마다 바람막이가 되어줄 만한 ‘실력자’들을 적극 영입해 포진시키는 것과 달리 SK는 기업 경영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러한 인사들을 하나둘씩 정리해갔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최태원 회장의 주요 관심사 역시 기술 혁신, 신(新) 비즈니스 모델 등 ‘기업활동 그 자체’에만 집중돼 있어 예기치 못한 외풍이 불어닥쳤을 때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물론 계열사가 59개나 되는 거대그룹으로 성장한 SK가 순진무구한 생각만으로 대정부 관계를 끌고 갔으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과거 정권에서도 그룹 소유의 워커힐 빌라는 DJP 극비회동 장소로 제공되기도 하고, 참여정부 벽두부터 이남기 전 공정거래위원장의 요구에 따른 10억원 시주사건이 터지는 등 SK와 정치권이 관련된 각종 스캔들도 끊이질 않았다. 문제는 ‘세련되지’ 못한 일처리 방식에 있었다.

    지난 1996년 SK텔레콤에서 대규모 희망퇴직이 실시된 직후 떠밀리다시피 회사를 나온 퇴직자들이 회사 내부문서를 언론에 제공하는 바람에 곤욕을 치른 적이 있다. 그 일로 당시 SK텔레콤이 직원들을 상대로 청와대, 정보통신부, 국가정보원 등 주요 권력기관에 있는 지인(知人)들의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어 관리해왔음이 폭로되기도 했다.

    SK 주변에서는 이런 사실을 두고 SK가 재계 서열 3위라는 위상에 걸맞지 않을 정도로 대정부, 대국회, 심지어 대언론 등의 관계에서도 위기관리 능력이 취약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하다 못해 요즘 SK 주변에서는 SK에 대해 우호적 여론을 형성하는 암묵적 지지세력 중 하나가 ‘장학퀴즈 출신들’이라는 점을 들어 “왜 장학퀴즈 출신들 중에는 법조나 정치권으로 진출한 사람이 눈을 씻고 봐도 없냐”는 자조적인 이야기도 들리고 있다.

    분식회계·비자금 파문에 휘청거리는 SK

    최태원 회장 구속 이후 부인 노소영씨가 손길승 회장측에 반감을 갖게 됐다는 이야기도 있다.

    부족한 ‘경험’은 미숙한 ‘대응’을 낳는 법. 재계에서는 이번 비자금 파문을 보면서도 SK측이 지난해 대선이 임박한 상황에서 한나라당과 민주당 양측을 오가며 당황한 흔적이 역력하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한나라당 최돈웅 의원측에 100억원을 건넸다는 검찰 조사결과에서 나타나듯 SK는 대선 기간 중 한나라당에 ‘풀 베팅’하다시피 한 것이 사실이다. 반면 민주당 쪽에는 ‘섭섭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성의 표시’가 미흡했다는 것이 당시 상황을 잘 아는 SK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그러다가 노무현 후보와 정몽준 후보 간의 단일화 합의 이후 노후보 지지도가 급상승하자 당황한 나머지 급하게 노후보 쪽과 선(線)을 대기 위해 동분서주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상수 통합신당 총무위원장이 밝힌 대로라면 SK는 지난해 대선 직전인 12월6일과 12월17일 이틀에 걸쳐 15억원과 10억원을 각각 후원금으로 납부했다. 그것도 한 기업이 낼 수 있는 법정 한도액을 넘어 이총무위원장조차도 ‘당황할’ 정도의 금액을 싸들고 온 것이다. SK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대선 직후에도 손길승 회장의 초등학교 동창인 부산은행 출신 이영로씨를 통해 최도술 전 총무비서관에게 줄을 댔다.

    손길승 회장이 대선 직후 일면식도 없는 최도술씨에게까지 급히 줄을 댄 것을 보면 SK 입장에서는 민주당이나 인수위 멤버 등 최소한 ‘거쳐야 할 곳’ 조차 거치지 않은 셈이 됐다. 과감하게도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직접 로비’를 염두에 두었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SK의 의중을 인정하듯 손회장은 검찰 수사에서 ‘노대통령을 보고 최도술씨에게 돈을 주었다’고 진술함으로써 노대통령을 곤경에 빠뜨렸다.

    흔히 최종 로비대상 만큼은 보호하는 것이 일반적인 정치권의 뇌물 수수 관행과 비교해 볼 때 손회장의 언급에는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구석이 있다. 이를 두고 재계 일각에서는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후보 단일화 성사 이후 SK가 자금제공 라인을 민주당 쪽으로 급선회하면서 허둥댄 흔적이 역력한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내놓고 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SK는 대선 직전의 ‘양다리 걸치기’ 전략에도 불구하고 참여정부로부터 아무런 보호막도 제공받지 못한 채 분식회계와 비자금 파문으로 코너에 몰려 그로기 상태까지 내몰리게 된 것이다.

    현재 SK는 계열사를 59개사에서 중·장기적으로 10여 개까지 축소한다는 계획을 내놓고 이를 토대로 한 구조조정 약정서를 채권단과 맺는다는 방침이다. 이렇게 될 경우 SK(주)·SK텔레콤·SKC·SK C&C·SK네트웍스 등 주요 계열사만 남고 나머지는 정리되는 운명을 맞을 수밖에 없다.

    소버린 몫 이사 요구할 듯

    뭐니뭐니해도 그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최태원 회장의 석방 이후 표대결 양상에 들어간 소버린과의 한판대결이 어떻게 전개될 것이냐 하는 대목이다. 최회장의 동생인 최재원 부사장과 SK 계열사들이 SK(주) 지분을 추가 매입함으로써, 최태원 회장과 SK 계열사들은 SK(주) 지분 15.93%를 확보해 소버린자산운용의 자회사인 크레스트 지분(14.99%)을 제치고 최대주주 지위를 되찾은 바 있다.

    이와 관련해 나오고 있는 시나리오는대략 두 가지다. 첫째는 소버린측이 현재의 지분율을 10% 이하로 줄이는 방안. 언뜻 보면 표대결 양상으로 들어간 상황에서 지분을 줄인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현재 최태원 회장 지배하에 있는 SK C&C와 SK케미칼, SK건설 등의 SK(주)에 대한 출자는 출자총액한도 제한에 걸리는 것이지만 소버린측 지분이 10%를 넘어서면서 SK(주)가 외국인 투자기업으로 분류되어 예외를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소버린이 SK(주) 지분을 팔아 외국인 투자기업에서 벗어나게 되면 SK 계열사의 SK(주)에 대한 출자에도 문제가 생기게 된다. SK(주) 입장에서는 일종의 ‘오프사이드 트랩 전략’에 걸리는 셈.

    둘째, 소버린측이 15%라는 지분율을 지렛대로 SK텔레콤 경영권을 내세워 SK(주)를 압박할 가능성이다. 현행 전기통신사업법상 기간통신에서는 외국인 지분이 15%가 넘는 기업의 지분이 전체 주식의 49%를 초과할 수 없도록 규제하고 있다. 현재 SK텔레콤 주식 20.82%를 갖고 있는 SK(주) 역시 소버린측 지분이 15%를 넘게 되면 외국인 투자기업으로 분류돼 SK텔레콤 의결권 행사에 제약을 받게 된다. 따라서 소버린으로서는 내년에 임기가 돌아오는 이사회 멤버 중 일부를 안배해줄 것을 요구하며 SK(주) 이사진을 압박할 가능성이 크다는 이야기다. 시장에서는 현재 두 번째 가능성에 더욱 주목하고 있다. 세종증권 유영국 연구원의 지적.

    “소버린은 SK(주) 지분을 사들인 후 두 배가 넘는 수익을 챙겼다. 지금쯤 이익을 실현하더라도 뭐라 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소버린은 그동안 자신들이 기업지배구조 개선에 관심을 가진 건실한 장기투자자라는 사실을 수없이 강조해왔다. 그런 소버린이 스스로 논리적 모순을 범하는 일을 하겠는가?”

    30대 재벌의 지배구조를 분석해온 인하대 김진방 교수(경제학)도 “소버린 측이 주주총회에서 표대결을 벌일 경우 현재 집중투표제가 실시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불리한 입장에 놓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소버린으로서는 SK와의 막후협상을 통해 이사 몫을 확보한 뒤 기업가치를 높이는 방향으로 가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상법상 소버린은 9월말 이후 주총 소집을 요구할 수 있으나 지난 8월, 유죄판결을 받은 최태원, 손길승 회장 등에 대한 사퇴 요구를 내놓은 뒤 아직까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최·손 회장 사이 미묘한 갈등

    소버린측이 신중한 입장을 보이는 데는 최태원 회장 석방 이후 감지되고 있는 최회장과 손길승 회장 사이의 눈에 보이지 않는 미묘한 갈등에도 원인이 있다는 지적이다. 즉 최종현 회장 사후 절묘한 ‘투톱체제’를 유지하면서 대내외 활동을 역할분담해온 두 사람의 관계가 SK사태가 터지면서 본격적으로 금가기 시작했다는 분석이다.

    최회장 구속 이후인 지난 6월초 손길승 회장과 SK 주채권은행인 하나은행 김승유 행장이 비밀리에 공동서명한‘SK글로벌 정상화를 위한 양해각서’가 참여연대로 흘러나가 제보된 것도 사실상 손회장과 최회장 간의 알력의 산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SK네트웍스와 채권단이 경영정상화 방안을 놓고 밀고 당기기를 거듭한 끝에, 양자 사이에는 SK(주)가 SK네트웍스에 대해 갖고 있던 매출채권을 출자전환한다는 합의가 이뤄졌다. 이 양해각서에는 SK(주), SK텔레콤 등 계열사들이 SK네트웍스의 원리금 상환이 가능한 수준으로, 법인세와 이자 및 감가삼각비 차감 이전의 영업이익(EBITDA)을 달성하도록 확약서를 제출한다는 내용과, 최태원 회장 주식의 처리시기는 추가협의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이 양해각서는 만들어진지 불과 이틀 만에 참여연대가 입주해 있는 건물 화장실에서 발견되었다. 결국 최회장 보유 주식을 채권은행이 편법적으로 보전해주는 데 불만을 품은 손회장 측근이나 손회장이 주도하는 채권단 협상에 반대하는 최 회장 측근 중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양해각서를 참여연대를 통해 흘렸다는 분석이 나올 수밖에 없다.

    당시 참여연대에는 이 양해각서뿐만 아니라 최회장 보유 주식의 보장을 전제로 한 채권단의 채무재조정 계획이 논의되고 있다는 SK 내부자의 제보도 들어왔다. 참여연대 관계자는 “당시 최회장 보유 주식을 처분하지 않는다는 것을 채권단이 보장하고,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SK는 네트웍스에 대한 SK텔레콤, SK(주)의 지원을 끌어내 경영정상화 계획을 짠다는 물밑 합의가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 제보 내용이었다”고 전했다. 이 말이 사실일 경우 SK 내부에도 최회장 보유 주식 유지에 반대하는 세력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이와는 다른 맥락에서 SK 주변에서는 두 사람간 알력설의 근거로 최태원 회장 부인인 노소영씨가 최회장 구속중 보인 손회장의 행태에 대해 섭섭해하고 있다는 목소리도 들린다.

    따라서 최태원 회장 측근 인사들 사이에서는 비자금 파문을 계기로 그룹의 대외활동을 책임져온 손길승 회장이 궁지에 몰리는 사태를 역이용해 오너경영 체제를 오히려 확실히 하려는 움직임도 감지되고 있다.

    최재원 부사장 역할에 관심

    이와 관련해 가장 관심을 끄는 인물은 최태원 회장의 친동생인 최재원 SK텔레콤 부사장이다. 최부사장은 최근 최태원 회장의 경영 복귀에 대비해 소버린에 맞서 최회장 일가의 경영권 방어를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SK 계열사의 한 임원은 “최회장이 수감생활을 하던 7개월 동안 최부사장은 노소영 관장(SK 사람들은 최태원 회장의 부인인 노태우 전 대통령의 딸 노소영씨를 이렇게 부른다)과 거의 매일같이 구치소를 찾았다”고 전했다. 또 SK텔레콤의 한 관계자도 “최태원 회장이 구속된 2월 이후 최재원 부사장을 회사 내에서 거의 볼 수 없었다”고 전한다.

    최부사장은 외부에 개인적인 컨설팅 그룹을 운영하면서까지 최회장 일가의 경영권 방어전략 수립 등을 이끌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SK텔레콤 관계자들은 최부사장의 이러한 행보에 대해 ‘개인적 차원의 일’이라며 회사와는 관련이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최태원 회장의 측근 인사들은 최회장이 결자해지 차원에서라도 경영에 복귀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로 1998년 최종현 회장 사후 2세 승계 과정에서 6조원 규모의 개인 지급보증까지 떠안았기 때문이라는 점을 내세우고 있다. 당시 상황을 아는 관계자들의 증언은 이렇다.

    “최종현 회장의 장례를 모두 끝내고 나서 그룹의 재무담당 임원이 최태원 회장에게 상속 관련 보고를 하면서 선대 회장이 지고 있던 6조원 규모의 개인 지급보증을 처음으로 털어놓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룹 내부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지 못했던 최태원 회장은 그 자리에서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최종현 회장 명의의 주식 및 재산을 상속받기 위해서는 이 빚더미도 함께 떠안아야 할 판이었다. 그러나 최태원 회장으로서는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울며 겨자 먹기’식이었지만 6조원 규모의 개인 지급보증을 떠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까지 최태원 회장의 발목을 잡아온 숙명과도 같은 짐이 되었다.”

    이처럼 최태원 회장에 대한 동정론을 펴는 관계자들은 SK네트웍스의 분식회계 사건도 결국 어떻게 해서든 이 빚더미를 처리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이라고 설명한다. SK네트웍스 같은 종합상사가 한국적 재벌체제에서 계열사의 부실을 털어내는 창구 역할을 해왔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

    그러나 대우그룹과 같은 대부분의 종합상사들이 거미줄처럼 확보해 놓은 해외법인망을 통해 부실을 떠넘겨온 것과 달리 해외 지사망이 취약한 SK는 이러한 방식을 적용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고민 끝에 SK가 선택한 카드가 바로 지난 1999년 일본 NTT 도코모를 상대로 SK텔레콤 지분 매각을 추진하는 것이었다. 당시 SK는 SK네트웍스와 SK(주)가 갖고 있던 SK텔레콤 지분 14.5%를 NTT 도코모측에 매각해 자금난을 해소하기 위해 외자유치 협상을 벌였다. 6∼7조원 규모의 지분 매각에 성공하면 SK 계열사들의 빚도 청산하고 최태원 회장 역시 상속 부채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다는 판단을 내렸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2년여의 협상 끝에 지분 매각 협상은 결렬됐다. 이때부터 최태원 회장의 고민은 원점에서 다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최회장 복귀 쉽지 않을 듯

    물론 현재 2심 재판에 계류중인 최태원 회장이 당장 경영에 복귀하기는 쉽지 않다. SK(주) 노동조합이나 참여연대 역시 ‘최회장의 경영 복귀는 어불성설’이라며 강하게 반대하고 있다. 따라서 재계에서는 최태원회장이 일단 소버린측과의 물밑 대화에 나설 것으로 보고 있다.

    SK㈜가 내년에 임기만료되는 이사 6명 중 소버린측 인사 1∼2명을 이사회 멤버로 받아들이고 부실 계열사 지원 중단 등을 약속하면 소버린도 굳이 표대결을 벌여 기업 가치를 훼손시킬 이유가 없다는 점도 이러한 분석에 무게를 실어주고 있다.

    그러나 최태원 회장이 어떤 방식으로든 경영에 직접 간여하는 비중을 높인다 해도 과거와 같은 영향력을 행사하기는 어려울 전망이다. 일단 SK네트웍스 사태에 따른 채권단과의 구조조정 약정에 따라 상당수 계열사를 매각, 합병해야 할 처지이기 때문이다. 그룹 전체의 덩치는 물론 지배구조 역시 획기적인 변모를 겪을 수밖에 없다.

    인하대 김진방 교수는 “SK의 경우 SK C&C를 통해 최태원 회장이 계열사들을 간접지배하고 있지만 삼성 등 다른 재벌그룹에 비해 총수 일가의 지분이 낮고, 그나마 이것들도 핵심 계열사에 모여 있지 않다. 따라서 SK가 현재와 같은 구조조정을 추진한다면 소그룹별 연합체 형식의 일본 모델을 따라가게 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구조조정본부 체제를 고수하는 삼성이나 일찌감치 지주회사 모델로 돌아선 LG와는 또 다른 형태의 지배구조 실험을 한다는 이야기이다.

    SK는 지난 6월 구조조정본부 해체를 선언하면서 계열사들의 독립경영을 보장하고 ‘브랜드를 공유하는 느슨한 형태의 네트워크’라는 새로운 그룹 경영체제를 지향한다고 밝힌 바 있다. 위기를 기회로 만들겠다는 SK의 속내가 담겨 있는 셈이다. 그러나 늘 위기관리에 취약하다는 평가를 받아온 SK의 ‘샌님 체질’이 위기의 최태원호(號) 앞에 놓인 격랑을 헤쳐가기에는 역부족이 아니냐는 평가도 여전히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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