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2월호

김용순(대남 비서)·오진우(인민무력부장)·고영희(김정일의 처) 교통사고와 金正日 비밀파티

  • 글: 박인철 북한전문가

    입력2003-11-26 13:43: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김용순(대남 비서)·오진우(인민무력부장)·고영희(김정일의 처) 교통사고와 金正日 비밀파티
    거참, 희한한 일이다. 요즘 북한 고위층 인사들의 교통사고가 잦다. 김용순 전 대남비서가 교통사고로 장기간 입원하다 지난 10월26일 사망했고, 일본 ‘산케이신문’의 보도(10월7일자)에 따르면 김정일의 처 고영희가 지난 9월 하순경 교통사고로 중태에 빠졌다.

    북한에는 교통사고가 빈번할 정도로 차량이 많은가? 아니다. 북한 차량의 대부분은 간부들이 업무용으로 사용하는 관용차이다. 외국인이나 극소수의 돈 많은 재일 교포가 타고 다니는 승용차가 있을 뿐이다. 혹은 오래된 군용트럭이거나.

    때문에 거리를 오가는 차량은 얼마 없다. 평양 또한 차량이 없기로는 매한가지다. 평양 거리는 늘 한적하다. 밤에는 을씨년스러울 정도로 오가는 차량이 없다. 게다가 밤에는 자동차가 함부로 돌아다닐 수도 없게 되어 있다. 시골에 내려가면 더 한심하다. 웬만한 지역은 하루 온종일 자동차 한 대도 구경하기 힘들다. 그런데 왜 교통사고가 일어날까. 그것도 북한의 최고위층이 자주 교통사고를 당한다? 참으로 희한한 일이다.

    추측 보도에 ‘소설’까지

    북한 고위층이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보도가 있으면 이에 대해 분분한 ‘학설’이 나온다. ‘산케이 신문’은 고영희의 교통사고설을 보도하면서 “북한 권력내부에 뭔가 심각한 사태가 있는 것 같다”고 토를 달았다.



    ‘산케이신문’에 이같이 보도되자 러시아 일간지 ‘코메르산트’는 10월8일 “고영희의 교통사고는 김정일의 이복 아들들 사이에 벌어진 권력투쟁의 산물”이라고 보도했다. 그것도 ‘전문가’의 견해를 인용, “고씨가 차량 통행이 거의 없는 평양에서 교통사고로 생명이 위독할 정도로 다쳤다는 것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는 코멘트를 달았다. 그리고 “김정일 위원장의 전처 성혜림씨 소생인 정남씨와 고씨 소생인 정철씨 사이의 치열한 후계다툼의 과정에서 고씨가 희생된 것으로 보인다”는 잠정적인 결론까지 내렸다. 이 기사는 이어 “정남씨는 최근 동생 정철씨를 제거하기 위해 전문킬러까지 고용한 것으로 전해진다”고 보도해, ‘소설 반 기사 반’으로 전개된다. 그러나 “정남씨의 사조직이 이번 교통사고에 연루됐는지는 확실치 않다”고 마무리해 한 발 물러선다.

    이런 류의 기사에서 인용되는 ‘전문가’가 도대체 누구인지 궁금하다. ‘고씨가 차량통행이 거의 없는 평양에서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는 대목까지는 전문가의 견해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고씨의 교통사고를 둘러싸고 ‘북한 권력내부에 심각한 사태가 벌어진 것으로 보인다’라든지, ‘이복형제들 간의 치열한 후계 다툼에서 고씨가 희생된 것으로 보인다’는 대목에 이르면, 이 전문가가 과연 믿을만한 사람인지 의문스럽다.

    김정남은 ‘숨겨놓은 사생아’일 뿐

    김정남이 누구인가. 김정남은 북한 주민들이 그 존재 자체를 ‘알면 안 되는’ 김정일의 숨겨진 사생아일 뿐이다. 김정남은 젊은 시절의 김정일이 멀쩡히 잘살고 있는 유부녀를 가로채 몰래 데리고 살다 낳은 아들이다. 김일성마저도 처음에는 그 사실을 전혀 몰랐다는 것이 통설이다.

    이 비운의 유부녀는 모스크바에서 홀로 쓸쓸히 살다 지난해 사망한, 왕년의 명배우 성혜림이다. 김정일은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가 다른 사람의 부인을, 그것도 전 북한인민의 사랑을 독차지한 명배우 성혜림을 가로채 자기 관저에 숨겨놓고 산다는 사실이 알려질까봐 이 일을 극비에 부쳤다. 또 소문을 발설하는 자는 가차없이 제거했다. 성혜림의 언니 성혜랑은 성혜림이 김정일 관저에 들어갈 때 따라 들어간 인물. 그녀는 1994년 서방탈출 후 관저에서의 ‘비밀생활’을 수기 ‘등나무집’에 이렇게 묘사했다.

    “김정일 비서와 내 동생이 함께 산다는 것은 북조선 최대의 극비사건으로 간주되었다. 나의 아버지(성유경)에게도 말씀드리지 않았다. 아버지에게는 처음 혜림이 ‘3호 청사’(대남정보공작기구) 공작원으로 뽑혀갔다고 말했다. 이런 거북한 사정 때문에 어머니는 6년 동안 관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설마 그런 일이 한 가정에서 어떻게 지속되었는지 의문시 할 수 있으나 온 사방에서 보위원이 우리 식구들의 언행을 탐지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입을 다물고 살 수밖에 없었다.

    명배우 성혜림이 잠적한 데 대해 유언비어가 돌았고 문화예술계, 특히 촬영소 주변에서는 지도자가 채어가 데리고 살고 있다는 소문이 속살속살 퍼졌다. 가계(수령과 지도자의 직계)에 대한 여론을 엄단하던 보위부와 당 조직에서 아무리 강권을 써도 사람들은 말하고 싶어하는 동물이다. 촬영소에서도 나의 직장에서도 사람들이 말질을 하다가 없어지는 수가 있었다.”

    이 무렵 이른바 ‘남반부 출신’ 영화배우들이 숱하게 숙청됐다. 성혜림이 남한 출신이어서 성혜림과 김정일의 동거 소문이 남한 출신 영화배우들 사이에서 먼저 퍼져나갔고, 이 때문에 애꿎게도 남한출신 배우들이 처형되거나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것이다. 남한 출신 명배우 심영도 이 무렵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다.

    요컨대 김정남이라는 존재 자체가 다른 사람이 알면 안 되는 인물이고, 그런 만큼 김정일 입장에서는 이미 ‘내놓은 자식’이나 다를 바 없다. 특히 김정남의 일본 밀입국 사건이 불거진 후 그는 북한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그저 외국을 떠돌아다니는 낭인 신세가 되었다. 그런 처지에 있는 김정남이 이복동생들과 후계자 투쟁을 벌인다는 언급은 공상만화 같은 얘기다.

    우리 정부는 김용순과 고영희의 교통사고 배경에 대해서 말을 아꼈다. 10월27일 조선중앙방송이 “김용순 비서가 지난 6월16일 교통사고로 장기간 입원치료중 10월26일 사망했다”고 보도하자, 정세현 통일부 장관은 “인간적으로 조의를 표한다”고 언급했다. 이에 앞서 정장관은 고영희의 사고와 관련해 10월21일 국회 대정부 질의에 대한 답변을 통해 “고영희가 중병을 앓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짤막하게 밝혔다.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10월27일자 부고를 통해 “김용순 중앙위원회 비서는 6·15 북남공동선언의 기치 아래 조국통일의 전환적 국면을 열어나가는 데 온갖 정열을 바쳤다”며 “당과 혁명, 조국과 민족 앞에 세운 그의 공적은 길이 남아 있을 것”이라는 공식적인 언급을 하는 데 그치고 김용순의 교통사고 배경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오가는 차량이 거의 없는 북한에서 김용순과 고영희의 교통사고는 어떻게 가능했을까.

    북한 고위층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경우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80년대 중반 김치구 당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 이화영 조직지도부 부부장이 심야에 승용차를 몰고 귀가하다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당시 노명근 당 재정경리부장은 크게 다쳐 그 후유증으로 오랫동안 고생했다. 이들 모두는 승용차를 함께 타고 가다 변을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보다 앞서 이종목 외교부 제1부부장 역시 심야에 차를 몰고 귀가하다 교통사고로 즉사했다.

    또한 1987년 오진우 인민무력부장은 새벽 3시경 직접 승용차를 몰고 귀가하다 교통사고를 당해 거의 초죽음 상태에서 기적적으로 회생한 적이 있다. 도대체 북한 고위층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길래 이 같은 교통사고가 빈번한 것일까.

    두개골 깨지고 갈비뼈 부러진 오진우

    이들의 교통사고는 100% 새벽 2∼3시경 만취한 상태에서 발생한 음주운전 사고였다. 교통사고의 원인이 모두 동일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조선인민군 인민무력부장 오진우가 왜 당번병이나 운전기사에게 맡기지 않고 노구(老軀)의 몸으로 직접 핸들을 잡았을까? 먼저 전 인민군 고위장교 출신들의 증언을 종합해 오진우 교통사고의 전말을 알아보자.

    1980년 10월 제6차 당대회를 통해 김정일은 조선노동당 중앙군사위원에 선출됐다. 이로써 1974년 공식 후계자로 지명된 이후 군에 대한 영향력까지 확고히 장악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김정일로서는 넘어야 할 ‘산’이 하나 있었다. 그가 오진우였다. 당시 오진우는 군의 제후였다. 오진우는 빨치산 시절 김일성의 당번병이었고 김일성 앞에서 맞담배를 피울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김정일이 아무리 김일성의 후계자라고 해도 오진우는 벅찬 상대였다.

    김정일은 이 무렵부터 오진우에게 ‘당근’ 작전을 폈다. 그는 오진우에게 포드 승용차와 벤츠-450형, 사냥용 승용차 등 최고급 자동차 6대를 선물했다. 또한 ‘특각’을 포함하여 비밀공사를 전담하는 사회안전부 공병 1여단을 동원하여 호화 단독주택을 지어줬다. 오진우 역시 김정일이 정치국 상무위원이 되면서 그에 대한 태도를 달리하기 시작했다. 1980년 10월 6차 당대회 이후 북한 권력의 수뇌부인 정치국 상무위원은 김일성, 김일, 오진우, 김정일, 이종옥 등 5명이었다. 김정일은 겉으로 오진우를 존경하고 내세웠지만 끝까지 믿지는 않았다.

    이러한 가운데 1987년 봄 오진우가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했다. 이 사고로 오진우는 두개골이 깨지고 갈비뼈가 부러지는 등 의식을 잃고 중태에 빠졌다.

    1987년 북한은 88서울올림픽에 대응하여 ‘89 평양세계청년학생축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 북한은 평양축전에 대비한 광복거리 건설로 온 나라가 시끌벅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른 새벽, 인민무력부장 오진우의 집에 전화가 걸려왔다. 오진우가 교통사고로 평양 제1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다급한 전화였다. 오진우는 의식불명 상태였다. 목숨이 붙어 있는 것이 기적일 정도였다. 그의 아내가 병원측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는 이러했다.

    벤츠의 두 가지 ‘절대 수칙’

    사고 당일 새벽 3시경. 평양시 안전국 교통순찰대원이 오토바이를 타고 전승기념관 앞 도로를 지나가고 있는데, 벤츠승용차가 가로등을 들이받고 부서져 있는 것이 보였다. 안전원이 급히 달려가 보니 운전석에 웬 ‘노인’이 혼자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있었다. 차안에서는 피비린내와 함께 술 냄새가 확 풍겨 나왔다.

    안전원은 고급 승용차인 점으로 미루어 어느 고위간부의 운전기사려니 짐작하고 급히 가까운 평양 제1병원으로 옮겼다. 당직 의사가 살펴보니 이미 두개골이 깨지고 갈비뼈가 여러 대 부러져 있었다. 노인의 신원을 파악하려고 주머니를 모두 뒤졌으나 신원을 증명할 만한 물건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불현듯 노인의 팔목에 찬 시계가 눈에 띄었다. 순금으로 된 ‘오메가’ 최고급 시계였다. 의사의 눈에는 시계 중앙에 찍힌 ‘김일성’이라는 빨간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김용순(대남 비서)·오진우(인민무력부장)·고영희(김정일의 처) 교통사고와 金正日 비밀파티

    차량 통행이 거의 없는 곳에서도 교통사고가 일어날까? 북한 고위층의 교통사고는 음주운전으로 인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직 의사는 노인이 예사 인물이 아님을 바로 짐작하고 급히 중앙당에 전화를 걸었다.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중앙당에서 사람들이 달려왔다. ‘노인’은 오진우로 판명됐다.

    평양의 명의들이 모두 달려왔고, 외국의 의사들도 급하게 데려왔다. 그러나 워낙 중상이었기 때문에 오진우는 마취상태로 모스크바로 실려갔다. 마취를 풀면 통증으로 오히려 목숨을 잃을 수 있다고도 했다. 김정일이 오진우를 회생시키는 데 들인 외화도 엄청났다.

    오진우는 전날 밤 김정일의 비밀파티에 참석한 뒤 새벽에 집으로 돌아오다 음주운전으로 사고를 낸 것이다. 그런데 인민무력부장의 차를 운전병이 몰지 않고 왜 노구의 오진우가 직접 몰았을까. 여기에는 그럴 만한 사연이 있다.

    김정일은 1986년경부터 측근들에게 자기 명의로 벤츠승용차를 한 대씩 선물했다. 군에서는 오진우 인민무력부장, 오극렬 총참모장, 김광진 인민무력부 부부장, 김영춘 작전국장, 김창성 인민무력부 대외사업국장 등이 한 대씩 받았다. 당에서는 장성택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 등 측근들이 벤츠를 받았다. 선물한 벤츠는 280형 모델로 문이 하나 달린 소형 승용차다. 특기할 만한 사실은 누가 이 차를 갖고 있든 차량번호가 모두 ‘216-9999’로 똑같다는 것이다. 나중에는 차량번호가 ‘216-5555’로 바뀐다. ‘216’은 김정일의 생일인 2월16일을 의미한다.

    이 차에는 두 가지 ‘옵션’이 달려 있다. 하나는 반드시 차량 소유자가 직접 운전해야 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반드시 김정일이 부를 때만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 목적으로는 절대 사용할 수 없게 되어 있다. 김광진 인민무력부 부부장이 1992년경 자신의 관용차가 없는 사이에 잠깐 이 차를 몰고 비행장에 갔다가 당 조직지도부에 적발돼 혼이 난 적이 있다고 한다.

    벤츠는 김정일의 비밀파티에 참석하러 갈 때만 사용할 수 있었다. 본인이 직접 운전하도록 한 이유도 이 비밀파티의 ‘보안’을 지키기 위해서다. 한 증언자에 따르면 어느 날 저녁 무렵에 ‘216-9999’ 번호를 단 벤츠 승용차 20대가 일제히 평양 중심가를 달리는 진풍경이 목격된 적도 있다고 한다. 오진우는 김정일이 부른 비밀파티에 참석했다가 만취한 상태에서 서툰 솜씨로 운전하다 참변을 당한 것이다.

    앞서 언급한 김치구, 이화영, 노명근, 이종목 등이 모두 김정일의 비밀파티에 참가하고 만취한 상태에서 반드시 손수 운전하도록 되어 있는 승용차를 몰고 가다 사고를 일으킨 것이다. 김용순의 교통사고 역시 이 같은 맥락에서 추론해볼 수 있다. 김용순은 비밀파티 고정멤버였고, 그가 빠진 비밀파티는 재미없다고 할 정도로 노래, 춤, 재담에 뛰어났다고 한다. 한마디로 비밀파티의 ‘분위기 메이커’였던 것이다.

    만수대예술단 무용수 출신인 고영희 역시 비밀파티 고정멤버다. 처음에 무용수 자격으로 비밀파티에 참가하여 김정일의 고정 파트너가 되었다가 김정일의 총애를 받아 관저에 들어앉았다. 고영희는 김정일의 처-사실상 김정일의 공식 처는 김영숙인 만큼 고영희는 ‘애첩’이라고 할 수 있다-가 된 이후에도 비밀파티에 참가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자세한 내막이야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고영희가 자기 대신 김정일의 옆자리에 새로운 젊은 여자가 앉는 것을 싫어했을 것이다.

    비밀파티는 김정일의 ‘용인술’

    그러면 김정일은 왜 비밀파티를 시작했으며, 왜 지금까지 해오고 있는가.

    김정일의 비밀파티를 처음 공개한 사람은 1997년 2월 북한 공작원에게 피살된 이한영(본명 리일남)이다. 이한영은 사망한 성혜림의 언니 성혜랑의 아들이다. 그는 1982년 서방으로 탈출해 한국에 들어왔다. 그는 14년간 자신의 신분을 공개하지 않다가 1996년 성혜랑 일가의 서방탈출 사건이 터지면서 언론에 그 신분이 노출되었다. 그는 성혜림 가족이 김정일의 관저에서 은신생활을 할 때 함께 관저에 살면서 김정일의 숨겨진 아들 김정남을 돌봐주었다. 그런 만큼 그는 김정일의 사생활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김정일의 비밀파티는 1970∼80년대 절정을 이루다가 1990년대 이후 다소 줄어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횟수가 다소 줄었을 뿐 1주일에 1회 이상 열린다고 보면 틀림없을 것이다. 외부에서는 김정일의 비밀파티에 대해선 ‘기쁨조’ 정도를 떠올리지만 극도의 독재체제와 부패한 사회에서나 볼 수 있는 일들이 내놓고 벌어진다. 술과 여자는 기본이며 도박판까지 벌어진다. 김정일은 이 비밀파티에서 중요한 인사(人事) 문제를 즉흥적으로 처리한다.

    김정일은 이 행사를 이용하여 ‘자기 사람’을 많이 만들었고, 여기에 참석하는 것만도 ‘지도자 동지의 영광’으로 받아들이도록 만들었다. 말하자면 비밀파티는 김정일이 자기 사람을 만드는 일종의 ‘용인술’의 측면도 있는 것이다.

    이 파티에 참석하는 사람들 가운데 ‘부부장급’이 많은 이유도 김정일이 1970년대 당내 주요 자리를 자기 사람들로 채우기 위해 이 파티를 이용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김정일이 계속 ‘관리’해야 할 대상들도 비밀파티에 참석하도록 했다. 현재 김정일이 직접 관리하는 북한의 주요 인물은 대략 200명 정도인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공연조·희극조·중주조

    이한영에 따르면 비밀파티에는 공식 이름은 없다고 한다. 그냥 ‘연회’ 또는 ‘행사’라고 부른다. 처음에는 심부름하는 여자들만 있는 ‘남자들만의 술 파티’였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여자 파트너가 등장했다. 1974년 만수대예술단의 일본공연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만수대예술단의 공연은 일본 NHK에서도 방영되었는데, 일본 공연 후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 공연실’이 생겼다.

    공연실은 공연조와 희극조, 중주조로 구성되었다. 남한에서 흔히 ‘기쁨조’로 불리는 조직이 바로 이들이다. 북한에서는 ‘기쁨조’라는 용어가 없다. 남한의 언론에서 사용한 조어(造語)일 뿐인데, ‘공연조’가 말하자면 핵심적인 ‘기쁨조’에 해당된다. 공연조는 만수대예술단에 소속된 무용수들 중에서 뽑힌 무용조다. 이들은 파티에서 캉캉쇼 등을 공연하고 좌석에 같이 앉아 춤추고 술 마시는 파트너가 된다. 희극조는 만담이나 코미디를 하는 사람들이다.

    중주조는 파티 분위기를 돋우는 관현악 합주단이다. 이 중주조의 대외명칭이 ‘백두산 7중주단’이다. 중주조는 평양음악무용대학을 졸업한 재능 있는 20대 초반의 여자 7명으로 구성되었다. ‘백두산 7중주단’의 멤버들은 김정일의 공관 숙소에서 생활한다. 김정일의 집무실 타자수들도 영내에 숙소가 있어 영내를 벗어나지 못한다. 김정일의 사생활과 관련한 사람들은 인민과 철저히 단절되는 것이다. 중주조와 공연조 여자들은 25세가 되면 그만두는데, 대개 김정일을 경호하는 호위군관과 결혼시키는 등 될 수 있는 대로 바깥에 내보내지 않는다. 비밀이 새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비밀파티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대개 부부장들이며, 김정일과 가까운 사이다. 조직지도부, 선전선동부, 연락부(사회문화부), 국제부의 부부장급들이 파티의 주요 참석자들이다. 1970년대 초반에는 인민무력부 총정치국장 이용무, 호위사령부 2국장 김성윤 등 측근 부부장 20명 미만이 참석했다. 1977년부터는 규모가 늘어나 40명 정도가 파티에 참석했다. 허담, 김영남, 연형묵, 김용순, 장성택 등이 이 자리에 자주 나타났다. 비밀파티는 그야말로 김정일의 측근만이 참석할 수 있다. 물론 이 자리의 참석여부와 김정일의 신임도는 직결된다.

    김정일 취해야 파티 종료

    파티에 빠지지 않고 참석한 사람 중 한 명은 당시 중앙당 국제부 부부장 김용순이었다. 김용순은 춤을 잘 추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 때문에 ‘혁명화’(사업이나 당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수령체제에 반하거나 미풍양속을 해칠 때 노동을 통해 과오를 뉘우치도록 하는 일종의 벌칙)를 갔다 오기도 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밖에 이명재 만수대예술단 담당 부부장, 선전선동부 영화담당 최익규 부부장, 조직지도부의 최영철 부부장, 최철용 부부장, 이제강 부부장 등이 주요 멤버였다.

    비밀파티는 김정일이 새로운 인물을 자기 사람으로 만드는 자리이기도 하다. 대개 처음 나타나는 인물을 그 대상으로 보면 된다. 군(軍)에서는 김정일과 가까웠던 이용무 총정치국장이 1977년경 숙청되자, 오진우가 이 파티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김정일이 오진우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파티는 대개 김정일 집무실 옆의 공관에서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저녁 8시경 열렸다. 이한영에 따르면 참석자들은 공관을 ‘물고기집’이라 불렀다고 한다. 1층 현관에 들어서면 높이 3m, 길이 8m 정도의 대형 수족관이 설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수족관에는 큰 바다 물고기들이 헤엄친다. 종종 장소를 옮겨 목란관을 사용하기도 했다. 공관 지하에는 수영장이 있고 1층에는 각종 게임기구들이 있다. 마작방도 있고, 카지노의 룰렛이 설치된 방도 있다.

    파티가 열리는 곳은 150평 규모의 2층 연회장이다. 연회장 한쪽에 무대가 있다. 1층 서기실(비서실) 과장이 미리 통보받아 그날의 파티 참석자 명단을 가지고 있다. 명단에 빠진 사람들은 김정일의 신임을 잃어버릴까봐 꽤 불안해한다고 한다. 김정일은 무대에서 제일 가까운 헤드테이블에 앉는다. 한 테이블에 보통 남자 5명 정도가 앉고 사이사이에 공연조 무용수들이 앉는다. 헤드테이블에는 김정일과 그 날 참석자들의 서열에 따라 앉는다. 김영남 당 국제부장, 오진우 인민무력부장, 김용순 국제부 부부장, 연형묵 당 비서 등이 주로 헤드테이블에 앉았다.

    참석자들은 대개 저녁 7시 반이면 도착한다. 참석자들이 모두 모이면 함께 2층으로 올라간다. 연회장 입구에는 그 날 당번이 서 있다. 당번은 대개 부부장급 참석자들이 돌아가면서 맡는다. 당번은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양주를 물 컵으로 한 잔씩 따라준다. 이른바 ‘입주식’이다. 그걸 마셔야 입장할 수 있다. 미리 한 잔씩 마시고 분위기 딱딱하게 굴지 말라는 뜻이다. 김정일이 자리에 앉으면 요리가 나온다. 한식, 일식, 중식, 양식 등 다양하다. 요리를 들면서 김정일이 건배 제의를 한다. 이때부터 백두산 7중주단이 러시아와 서방의 경음악 등 은은한 음악을 연주한다. 파티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다.

    파티가 무르익으면 김정일이 노래를 시킨다. “누구누구 노래해라”는 식이다. 이 자리에서는 ‘남조선’ 노래가 판을 친다. ‘이별’ ‘사랑의 미로’ ‘하숙생’ ‘동백아가씨’ 등이 자주 불리고, 김정일은 ‘찔레꽃’ ‘섬마을 선생님’ ‘이별’ 등을 즐겨 부른다. 러시아 노래도 자주 등장한다. 김정일은 러시아 민요 ‘트로이카’와 ‘모스크바 교외의 밤’ 등을 좋아한다고 한다.

    노래가 나오면 춤도 춘다. 주로 왈츠와 탱고다. 공연조 무용수들은 무대로 나가 캉캉춤을 추기도 하고 참석자들 사이사이에 앉아 같이 술 먹고 노래한다. 파티는 대개 새벽 1시쯤 되어 끝난다. 새벽 3시까지 갈 때도 있다. 김정일이 취해야 파티도 끝난다.

    파티 분위기는 김정일 마음 내키는 대로다. 술 먹고 노래하다 끝나는 경우도 있고, 주지육림(酒池肉林)에 빠지기도 한다. 파티에 참석하는 여자들은 무용수를 빼면 주로 이들이다. 오미란, 홍영희, 김옥희 등이 자주 불려갔다고 한다. 이들은 이 자리에 불려간 사실을 입밖에 낼 수 없다. 파티 자체가 특급비밀인 데다 참석자들은 우선 불러주는 것 자체가 ‘무한한 영광’이기 때문에 알아서 입밖에 내지 않는다.

    김정일은 파티 참석자들에게 한 달에 한번 정도 선물을 나눠준다. 남자에게는 양복 옷감이나 구두, 공연조 무용수들에게는 화장품세트나 일본제 고급내의 등을 선물한다. 일년에 한번 정도는 스위스제 롤렉스 시계나 오메가 시계를 선물한다. ‘물고기집’에는 100평 규모의 선물창고가 있다. 창고에는 외제 선물이 품목별로 가득하다.

    이 비밀파티에서는 즉흥 인사(人事)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김정일에게 잘 보이면 갑자기 출세하기도 하고, 잘못 보이면 직위해제 당하기도 한다. 김정일이 술에 취해 “너는 지금부터 당중앙위원회 위원이다”고 선언하면 그 자리에서 중앙당 위원이 되고, “너는 오늘부터 철직(직위해제)이다” 하면, 그 순간부터 자기 자리를 지킬 수 없는 것이다.

    1인 독재체제의 폐해

    남한을 비롯한 외부 세계에서는 북한에서 어떻게 이 같은 일이 버젓이 일어나고 있는가 의문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호화판 비밀파티가 가능한 근본 원인은, 김정일이 사상 유례없는 1인 독재체제를 거의 완벽하게 구축해놓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중앙일보’에 이문열과 황석영의 대담이 연재된 바 있다. 북한에서 생활해본 경험이 있는 황석영은 “북한은 지독한 통제사회”라고 표현한 바 있다.

    이같이 지독한 통제와 감시체제는 김정일 체제가 전환되지 않는 한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김정일 체제가 지속되는 동안 고위층의 음주운전과 교통사고 또한 계속될 것이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