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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 증언

시게미쓰 오장(伍長)에게 취조당한 항일운동가의 피맺힌 증언

“생매장, 주리틀기, 물고문으로 나를 불구자 만든 친일 헌병 시게미쓰(重光)”

  • 글 : 김한국

시게미쓰 오장(伍長)에게 취조당한 항일운동가의 피맺힌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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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치안유지법은 요즘의 국가보안법과 성격이 비슷한 법으로 치안유지법 위반은 아버지가 항일운동을 했다는 중요한 증거다. 아버지가 자서전에서 ‘함께 항일운동을 하다 붙잡혔다’고 밝힌 다른 동지들이 같은 죄목으로 처벌받은 교도소 기록도 구했다. 아버지와 동지들은 ‘학인동우회’라는 반국가단체를 결성, 항일 활동을 한 혐의로 치안유지법에 따라 처벌받게 된 것이다.

당시 시국사범은 일본군 헌병대가 취조했다. 아버지의 공범이 먼저 진해헌병대에 붙잡혔으므로 아버지는 경성에서 체포돼 관할인 진해 일본군 헌병대로 압송되어, 취조·고문당한 것이다. 취조가 끝난 뒤 아버지의 신병은 진해 일본군 헌병대에서 관할인 부산형무소로 넘겨져 수감됐다.

자서전에서 아버지는 당신을 고문한 일본군 헌병의 이름(시게미쓰), 근무처 및 계급(진해주둔 일본군 헌병대 소속 헌병 오장), 민족(조선인), 출신지(전라도), 경력(사범학교 졸업 후 4∼5년 교사)을 자세히 기록해 놓았다. 신기남 전 의장의 부친 신상묵씨와 인적사항이 일치했다. 아버지가 말하기를, 1944년 진해 일본군 헌병대엔 한국인 출신 일본군 헌병이 100여명 있었는데 절대다수는 사병이었으며 오장 이상의 한국인은 시게미쓰와 오니시(大西) 두 사람뿐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10년 전인 1983년 자서전을 쓰셨다. 그 시기 같은 자서전을 국가기관에도 보내셨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자서전 내용은 1983년 당시 아버지가 쓴 것과 한 글자도 다르지 않다. 신상묵씨의 친일해위가 전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1983년에 신상묵씨의 신상명세를 자세히 묘사했다는 것은 아버지가 신씨를 직접 만난 적이 없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또한 아버지가 고문 당하던 시기(1944년 중순), 장소(진해 일본군 헌병대)에서 아버지가 기록한 것과 이름, 계급, 출신지, 학교, 경력이 같은 시게미쓰로부터 고문 당했다는 다른 두 사람(차익환, 김장룡)의 증언이 신문에 실린 것을 봤다.

이들은 신상묵씨의 사진을 확인한 끝에, 자신을 고문한 시게미쓰가 신기남 전 열린우리당 부친 신상묵(시게미쓰 구니오)씨라고 증언했으며, 신 전 의장도 이들의 증언을 받아들여 의장직사퇴입장으로 돌아섰다는 보도를 봤다. 이상과 같은 이유에서 나는 아버지를 고문한 진해헌병대의 일본군 헌병 오장 시게미쓰가 신 전 의장의 부친 신상묵씨임을 알게 됐다.



시게미쓰의 ‘태극무공훈장’

지난 8월 시게미쓰의 존재를 알게 된 순간 나는 그토록 그를 다시 만나고 싶어했던 아버지가 떠올라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날마다 망가진 몸을 부여잡고 끙끙 앓으며 시게미쓰에게 고문당한 기억을 평생의 한으로 삼아 가슴에 묻고 지낸 게 아버지의 삶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다리를 주물러달라고 할까봐 방과 후 아버지를 피해다녔던 내 어린 시절이 부끄럽다. 그런데 기사를 보니 신상묵씨는 광복 후 경찰 고위직에 올라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고 한다.

‘태극무공훈장’. 이 말이 내 마음을 아프게 한다. 대한민국으로부터 정식으로 인정받는 유공자가 되는 것이 아버지의 소원이었다. 그래서 나를 시켜 서울의 정부기관에 당신의 자서전을 보내게 했다. 일제가 패망하면서 부산형무소 자료를 소각해 아버지에 대한 판결문도 없다는 통보를 들었다. 그 때는 아버지가 치안유지법, 군사보호법 위반으로 복역한 기록도 못 구했을 때였다. 결국 아버지는 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잘 안 되는 것 같습니다”고 하자 아버지는 별 말씀이 없었지만 상심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버지는 1927년 경남 진해에서 부유한 한의사의 아들로 태어나 1941년 서울로 유학, 경성전기학교 토목부에 입학했다. 아버지는 혈기 넘치고 구김살 없는 성격이셨다고 한다. 그러나 1942년 11월 일본 국경일인 명치절 때 한국 학생에 대한 차별대우에 격분, 학교 교관으로 파견나온 일본군 헌병 집단구타에 가담하면서 아버지의 인생은 전환점을 맞게 됐다. 비록 일제의 강압에 의해 ‘김(金)’씨 성을 ‘가네와(金和)’로 창씨개명했지만 헌병구타 사건을 계기로 아버지는 타교생 8명과 함께 항일활동 자금 조달, 조선어 보급, 문맹퇴치, 요인 암살 등을 목적으로 하는 ‘학우동인회’를 결성해 1년여 간 항일 활동을 했다. 학우동인회 회원인 이춘삼씨가 진해에서 헌병에 붙잡히면서 1944년 1월 아버지도 서울에서 체포되어 같은 해 2월 진해헌병대로 이송됐다.

아버지는 헌병 하급자들에게 수 차례 고문당한 뒤 이들 헌병을 지휘하는 오장 시게미쓰(重光)와 대면했다. 시게미쓰 오장은 학우동인회 사건을 취조해 조서를 작성하는 업무의 총책임자로서, 아버지 일행 7~8명에 대한 고문은 모두 그의 지휘하에서 이뤄졌으며, 시게미쓰 본인이 직접 고문하기도 했다.

아버지는 시게미쓰 취조반의 갖은 고문을 참고 견뎠으나 물고문은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취조에 응하게 됐다. 물고문 때 아버지에게 물을 부은 사람은 다른 헌병이었지만, 시게미쓰 오장이 지시한 것이라고 아버지는 자서전에 썼다. 시게미쓰 등 취조반이 아버지와 동료들에게 행한 그 밖의 고문도 가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시게미쓰 오장 등 취조관이 그렇게 한 것은 공을 세워 진급을 빨리 하려는 목적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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