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4월호

독도 논란, 국제법 판례로 다시 보기

‘무대응이 상책’이라고? ‘묵인’ 지속되면 앉아서 뺏긴다

  • 글: 김영구 려해연구소장, 전 한국해양대 교수·국제법

    입력2005-03-24 10: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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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도 논란, 국제법 판례로 다시 보기

    한국이 독도를 실효적으로 점유함으로써 영유권을 확보하고 있다 해도 이러한 영유권이 확실하게 보장되는 것은 아니며 한일간의 독도 영유권 논란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독도에 대한 일본의 부당한 영유권 주장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일본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가장 중요한 근거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일본 정부가 1905년 1월에 독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했다는 것, 둘째는 1952년 대일 강화조약에서 일본이 한국에 반환해야 할 섬의 명단에 독도가 빠져 있다는 점이다.

    먼저 1905년 1월 일본 정부가 독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한 행위를 살펴보자. 당시 조선왕조에서 적법하게 관리하고 있는 한국 영토인 독도를 인접 국가인 일본이 자기네 영토로 편입한 사실 자체가 국제법상 성립될 수 없는 광포한 행위인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일본측 논리의 허구

    그런데도 이런 행위가 성립될 수 있었던 것은 1904년 2월23일 성립된 ‘한일의정서’와 그해 8월21일의 ‘제1차 한일협약’ 등을 통해 제국주의 일본이 조선왕조의 국권을 이미 침탈해 외교권을 완전히 장악했다는 전제 때문이다. 조선왕조의 국가적 의사를 무력으로 완전히 억압할 수 있었던 일본은 침략을 본격적으로 개시한 뒤 독도를 자국 영토로 편입하는 것을 첫째 목표로 삼아, 국제법상 공시성(公示性)이 없는 은밀한 작전을 통해 이를 추진했다. 이러한 영토 편입 행위는 국제법상 효력을 인정할 수 없는 불법적 조치라고 할 수밖에 없다.

    1952년의 대일 강화조약 역시 마찬가지다. 제2차 세계대전 전승국인 연합국측과 패전국인 일본 간에 체결된 이 평화조약은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고 제주도, 거문도 및 울릉도를 포함하는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와 권한 및 주장을 포기한다’고 규정했다.



    연합국측이 당초 기안한 협정문 초안에는 독도도 일본이 식민통치권을 포기할 대상으로 명시돼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당시 요시다 시게루 수상을 중심으로 총력을 기울여 평화조약 조문을 고쳐 독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한 바 있다.

    그 결과 일본이 식민통치권을 포기할 대상으로 제주도, 거문도 및 울릉도와 함께 명시적으로 열거되어 있던 독도가 뒤늦게 빠지게 되었으며, 미국 연방정부도 공문을 통해 “독도는 ‘다케시마’라는 이름의 일본 영토로 인정한다”는 의사를 표시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일본은 이와 같은 평화조약의 조문 해석을 근거로 독도를 자국 영토로 공식 인정받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국제법상 인정되는 조약법의 원칙에 따라 이 조문을 해석하면 독도는 명시적으로 일본 영토로 지정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일본이 식민통치권을 포기할 대상 중 하나인 독도가 중간에 빠지게 됐다는 사실이 곧 독도를 일본 영토로 해석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 사람들의 주장과는 달리 대일 강화조약을 통해 독도가 다케시마라는 이름의 일본 영토로 확인된 것은 아니다.

    1965년 6월 체결된 한일협약에서는 한국측의 입장이 관철되어 협정문 안에서 독도 문제가 양국간의 영토분쟁 대상으로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므로 당시로서는 현실적으로 독도를 점유한 한국의 영유권이 우월한 것으로 확정됐다고 볼 수 있다. 한일 두 나라는 이후 양국간 교섭에서 독도 문제에 관한 논란을 사실상 회피하고 명목상 각자의 입장을 유보하는 것으로 일관해왔다. 다시 말해 한국과 일본은 1965년 이후 1996년까지 실질적 교섭에서 독도 문제를 다루지 않기로 합의한 것이다.

    200해리 수역 도입하자 적극 대응

    그러나 1994년 유엔 해양법협약 발표로 한반도와 일본 근해의 200해리 배타적 경제수역 제도를 도입하지 않을 수 없게 되자 일본은 기록상으로만 영유권을 주장하는 소극적 입장에서 벗어나 공격적 영토정책을 채택하면서 공개적이고 명시적으로 독도를 자국 영토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그러나 일본의 이러한 공격적 주장에 대해 우리 정부와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독도 문제에 관해서는 무대응이 상책’이라는 이상한 최면에 걸려 굳게 입을 다문 채 일본의 주장을 애써 외면해온 게 사실이다. 얼마 전에는 신임 경찰청장이 독도수비대를 방문하려 했다가 외교통상부의 만류로 초도순시를 취소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정말로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대해서는 무대응이 상책일까. 한 국제법학자는 이렇게까지 말하고 있다.

    “독도 문제가 표면화할 때마다 대일 감정까지 곁들여 우리의 영유권을 연거푸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국제법상의 영유권은 결코 다른 나라가 이의를 제기하면 약해지고 그렇지 않으면 강해지는 것이 아니다. 독도가 우리 것이면 도쿄 한복판에 있어도 우리 것이고, 만에 하나 아니라면 세종로에 있어도 아니다.”(박춘호, ‘명백한 우리 독도, 성숙한 대응을’ 동아일보 2004년 1월12일자)

    그러나 이러한 표현은 국제법 전문가답지 않게 법적인 해석과는 거리가 먼 감정적 분석이라고 할 수있다. 국제법을 모르는 사람들에겐 호소력이 있을지 모르나, 국제법의 기초를 아는 사람은 납득하기 어려운 불합리한 주장이다.

    다른 나라가 국제법상 영유권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때 적절하고 명백하게 반박하지 않고 계속해서 이것을 받아들이면 그 영유권은 단순히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부인될 수 있는 것이 국제법의 원칙이다.

    법적으로 정당하게 성립되어 있는 영유권이라도, 다른 나라가 계속해서 이의를 제기하고 더 나아가 해당 영토에 대해서 영유권의 주체인 것처럼 행동하는 것을 묵인한다면 정당하게 성립된 영유권이라도 결국에는 부인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현재 독도 문제에 관한 우리 외교부의 입장은 ‘한국은 독도에 대한 실효적 점유를 통해 확실한 영유권을 확보하고 있으며 아무 일 없이 이러한 실효적 점유를 일정 기간 유지하면 영유권 논란은 자연스럽게 사그라질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의 점유가 일정 기간 계속된다고 해서 국제법상 한국의 영유권이 더 확실하게 보장되는 것은 아니며, 한일간의 독도 영유권 논란이 자연스럽게 사라지지도 않는다. 1990년대부터 한일간에 독도 문제가 어떻게 점점 심각한 분쟁 양상으로 확대, 심화되어왔는지 돌이켜보면 우리 외교당국의 이른바 무대응 원칙이 얼마나 근거 없는 전제 위에 서 있는지를 쉽게 알 수 있다.

    ‘묵인’의 세 가지 요건

    국제법 용어인 ‘묵인(acquiescence)’은 ‘경쟁국가의 도전적 행동이나 주장에 대해서 당연히 기대되는 항변이나 대립된 주장, 또는 적어도 권리의 유보와 같은 대응조치를 하지 않고 수동적 태도나 침묵 또는 부작위(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를 견지함으로써 경쟁국가의 행위가 비례적으로 기속력(羈束力)을 갖게 하는 일체의 행위’를 말한다.

    지금까지 국제법원들이 영유권의 귀속에 관한 판단을 내리는 과정에서 ‘묵인’은 특별히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일반적으로 모든 침묵이나 부작위가 언제나 이러한 국제법상의 효력을 발휘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국제사법재판소가 판결한 영국-노르웨이간 어업분쟁사건의 판결문을 보면 일상적인 국가간 관계에서 일정한 법적 효과를 낼 수 있는 묵인 행위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제시되어 있다.

    이 판결은 영국과 노르웨이간 직선기선 문제를 둘러싼 장기간의 어업분쟁에 대해 1951년 국제사법재판소가 내린 것이다. 이보다 3년 전인 1948년, 영국은 국제사법재판소에 이 사건에 대한 판단을 의뢰했다. 쟁점이 된 부분은 ‘노르웨이의 칙령에서 수역 설정을 위한 기준으로 직선기선을 사용한 것이 국제법상 유효하고 적법한 것인가, 그리고 직선기선이 국제법상 적법한 기선 획정의 방법이라고 하더라도 노르웨이의 직선기선 획정 방식이 국제법상 적법한 기준을 따른 것인가’하는 것이었다.

    법원은 이 사건에 대한 판결에서, 이 두 가지 문제에 대해 모두 긍정적 판단을 내림으로써 노르웨이의 손을 들어주었다. 법원의 판결은 이렇다.

    “노르웨이의 (직선기선) 실행에 대한 외국의 ‘일반적 묵인’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영국 정부는 60년 이상 이 문제에 대해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즉 이 판결은 ‘직선기선’이라는 국제법상 매우 중요한 새로운 법적 제도가 공식적으로 탄생하는 데 관련 국가들의 묵인 행위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이 판결문에는 ‘묵인’에 관한 세 가지 요건이 제시되어 있다.

    첫째, 경쟁국가의 도전적 행동이나 주장들은 명백하게 국제법상 권리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도전적 행동과 주장들의 의미에 대해 상대방 국가가 충분히 알고 있는 상황, 즉 ‘공연성(notoriety of claims)’이 전제돼야 한다.

    둘째, 이른바 묵인 행위로 간주하기 위해서는 경쟁국가의 도전적 주장에 의해 법적인 권리나 국가적 이해에 영향을 받는 상대 국가가, 당연히 기대되는 항변이나 대립된 주장을 하지 않고 침묵이나 부작위로 대응하는 것이 일정 기간 지속(prolonged abstention)돼야 한다.

    셋째, 경쟁국가의 도전적 행동이나 주장들은 제3국이나 국제사회 일반으로부터 명시적으로 거부되지 않아야 한다(a general toleration of the claims by the international community).

    국가영역은 ‘영토’든 ‘영해’든간에 국가적 권위를 통해 명시적이고 계속적으로, 그리고 평화적으로 관리돼야 한다. 영유권 주장과 국권의 평화적 행사가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모든 영유권 분쟁에 대한 각종 국제판례에서 끊임없이 강조되어왔다.

    국제판례도 ‘침묵=인정’

    독도 논란, 국제법 판례로 다시 보기

    정부는 독도환경보전법 등을 이유로 우리나라 사람들의 독도 출입조차 사실상 금지하고 있어 한국이 얼마나 실효적으로 독도를 점유하고 있는지도 의심스러운 형편이다.

    국제법상 영유권에 관한 최초의 국제법원 판례로는 1928년 팔마스섬에 관한 중재판결을 들 수 있다. 이 사건은 절해고도인 팔마스섬을 놓고 1920년대 인도네시아를 점령하고 있던 네덜란드와 필리핀을 점령하고 있던 미국 사이에 벌어진 영유권 분쟁이다.

    이 판결에서 국제사법재판소는 ‘학설은 물론이고 국가 관행상으로도, 영역주권은 계속적이고 평화로운 국가권능의 표명으로 한결같이 유지되고 있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영유권 주장과 국권 행사가 계속적이고 평화적으로 유지돼야 한다는 사실은 팔마스섬의 판결례 이후로도 최근까지 여러 국제 판례들에서 영역주권 인정을 위한 필수적 요건으로 일관되게 유지되어왔다.

    즉 이 사건은 영유권 주장과 국권의 행사가 공개적·계속적이고 평화적으로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국제법상의 규범적 원칙을 극명하게 보여준 최초의 판례다. 물론 여기서 국권의 행사가 계속적이고 평화적으로 유지된다는 것은 인접·경쟁 국가의 묵인이 필연적으로 전제돼 있다.

    묵인에 관해 가장 극적인 현실을 보여준 판례는 1962년의 태국과 캄보디아 의 영유권 분쟁에 대한 국제사법재판소의 판결이다. 1904년 당시 사이암(Siam)이라고 불리던 태국과 캄보디아의 보호국이던 프랑스는 국경을 획정하는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에 따라 두 나라는 산맥의 분수령을 기준으로 국경선을 긋기로 합의했다. 이 원칙대로 국경을 획정했다면 프리 비이어(Preah Vihear) 사원은 당연히 태국 영토 안에 포함돼야 했다.

    그러나 1907년 국경위원회가 작성한 지도에 따르면 이 사원은 캄보디아 영토에 위치한 것으로 표시됐다. 1908년 프랑스에서 발행된 이 지도는 태국과 프랑스 양국 정부를 포함한 여러 곳에 배포됐다. 태국 정부는 지도를 발간해준 프랑스 정부에 감사의 표시를 하기까지 했으며, 양국은 그후로도 몇 년 동안 이 사원이 캄보디아에 속한 것을 전제로 한 공식적 관계를 지속해왔다. 1930년에는 이 사원을 방문한 태국 정부 관리들이 프랑스측으로부터 ‘외국 귀빈’으로 대접받기도 했다.

    국경수비대도 철수 명령

    그러나 몇 년 뒤인 1934년, 태국은 측량조사 결과 이 지도에 착오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럼에도 태국은 몇 년 동안 이를 전혀 문제삼지 않고 있다가 1950년에서야 이 지역에 국경수비대를 배치했다. 1953년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캄보디아는 이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태국과 접촉을 시도했으나 태국이 이에 응하지 않자 결국 1959년,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했다.

    이에 대해 국제사법재판소는 “태국이 잘못 제작된 지도의 효력을 부인하려면 그 부정확함이 판명된 후 즉시 또는 합리적 기간 내에 그러한 뜻을 표명했어야 함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으므로 이를 묵시적으로 승인한 것으로 봐야 한다”고 판시했다. 결국 태국은 지도의 착오를 ‘묵인’한 것으로 간주된 것이다.

    법원의 이러한 판결에 대해 태국은 “당시에는 명시적 항의를 하지 않았지만, 착오를 발견한 이래 오랫동안 실질적으로 우리가 이 사원을 점유하고 관리하고 있었다”고 항변하며 영유권을 주장했다.

    그 법원은 “태국 하급기관의 실질적 점유는 국가적 권한 행사의 대외적 표현으로 볼 수 없다”고 판시하고 10년 이상 주둔하고 있던 태국의 국경수비대와 민간인들은 이 사원에서 철수하라고 명령했다.

    이러한 판결에 비춰볼 때 독도 문제가 일본과의 외교분쟁으로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우리나라가 계속 ‘무대응이 최고의 전략’이라는 방침을 유지한다면 일본의 부당한 영유권 주장을 계속 묵인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하시모토와 모리, 고이즈미 등 전·현직 일본 총리들이 공개석상에서 독도를 일본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것은 한국을 포함한 국제사회 전체에 대한 일본의 공식적 의사 표시로 간주할 수 있다. 이러한 의사 표시는 국제법상 상당한 무게와 효력을 갖는 것으로, 우리나라는 이에 대해 일반적으로 기대되는 국제법상의 항변을 적시에 제시했어야 한다.

    사실상 우리나라가 얼마나 실효적으로 독도를 점유하고 있는지도 의문스럽다. 정부는 독도환경보전법 등을 이유로 일반 국민의 독도 출입을 사실상 금지하고 있어 우리나라 사람들도 독도에 마음대로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한국인들에 의한 관광이나 자원개발 같은 정상적 활동이 독도에서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우리 정부는 현재 40명 정도의 해양경찰병력을 독도수비대라는 이름으로 이 섬에 파견해놓고 있다. 물론 일본은 이러한 한국 경찰의 독도 주둔에 대해 여러 경로를 통해 완강하게 항의하고 비판을 해대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경찰병력의 주둔 사실이 적어도 국제법적으로는 독도에 대한 한국의 실효적 점유의 증거가 돼 영유권을 인정해줄 수 있는 유효하고 충분한 근거가 되기는 어렵다.

    한국이 독도에 대해 지속적이고 평화적으로 국제법상 실효적 지배를 유지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행정·입법 및 사법적인 국가 권능의 평화적인 행사, 또는 현시(顯示)라는 사실을 축적해 끊임없이 확인하고 보완해야 할 성질의 문제다.

    국제법상 영유권은 언제나 상대적인 것이다. 따라서 독도에 대한 한국의 영유권이 ‘현재 국제법적으로 확정적인 상태’라고 하는 주장은 국제법적으로 성립될 수 없는 잘못된 생각이다. 또 ‘전쟁 등의 방법을 통한 현상 변경이 없는 한 일본과의 관계에서 독도 문제는 회피할 수 있다’는 생각이 얼마나 비현실적이고 잘못된 것인지에 대해서도 더는 설명이 필요없을 것이다. ‘한국의 실효적 지배가 유지되는 독도에 대해 아무 일 없이 시간이 흐르면 이러한 한국의 확정적 영유권은 더욱 공고하게 굳어질 것’이라는 생각은 대단히 부정확하고 잘못된 국제법적 지식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이런 생각은 실효적 점유의 성립을 위해 국권의 행사가 일정 기간 지속돼야 한다는 요건의 문제와 국제법상 ‘취득시효(prescription)’의 문제를 혼동하고 있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취득시효는 전통 국제법에서 한때 영토 취득의 사유로 인정하던 제도의 하나다. 그러나 현대 국제법에서는 취득시효를 국가의 영역 변경 사유로 인정할 것인가를 놓고 견해가 대립되고 있으며, 긍정적으로 보는 견해에서도 취득시효 제도는 신중하게 받아들여지거나 회의적으로 다뤄지고 있다.

    ‘취득시효’ 혼동 말아야

    시간의 경과와 함께 영역을 취득할 수 있는 영토 취득시효 기간을 얼마로 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현대 국제법상 확립된 기준이 없다. 다만 1897년 영국과 베네수엘라 사이에 체결된 조약에서 영토 취득시효 기간을 50년으로 합의하고 2년 후 두 나라간의 영유권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중재에서 이를 인정하고 채택한 일이 있다.

    그러나 취득시효에 관한 국제법상의 법리를 독도 문제와 연결지어 적용해보려는 것은 여러 요건과 상황으로 보아 터무니없는 생각이다. 일부에서는 우리 정부가 일본의 독도 영유권과 관련한 부당한 주장에 대해 이른바 무대응 전략을 언제까지 계속해야 할 것인가를 논의하는 와중에 한국측의 평화선언에 자극을 받은 일본이 독도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자고 주장한 1952년 9월로부터 50년 또는 100년을 취득시효 기간으로 보자고 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는 국제법상 일고의 가치도 없는 주장일 뿐이다.

    국가간 영토 분쟁을 해결하는 방법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분쟁 당사국이 서로 합의를 도출하는 방법, 둘째는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해 재판으로 분쟁을 해결하는 방법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위의 두 가지 방식이 원만히 이뤄지지 않을 때 결국 무력에 호소하는 방식이 있다. 그러나 현대 국제법상 국가간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무력 행사는 원칙적으로 금지돼 있으므로 이런 방식은 결국 불법적인 무력침공을 방어한다는 자위권 행사의 형식으로만 발휘될 것이다.

    비관론은 금물

    최근 들어 일본 정부가 1954년 이래 지속돼온 독도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해서 해결할 것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독도는 본래 우리 영토이므로 이 문제를 가지고 국제사법재판소에서 논의한다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일본측이 부당하지만 지속적이고 집요한 태도로 우리나라에 대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이 결국 한일간 영토분쟁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국제법 원칙상 분쟁 당사국이 사건의 제소에 합의하지 않는 한 국제사법재판소의 재판 관할권은 성립되지 않으므로 한국 정부의 의사에 반해 독도 문제가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될 수는 없다. 다시 말해 독도 문제가 한일간 영토분쟁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과 이 문제가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될 수 있을지는 별개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나 국제사회에서는 복잡한 국제정치적 관계의 진전과 국제법상 이른바 ‘확대 관할권(forum prorogatum)’의 관행이 있으므로 경우에 따라 ‘수동적 당사자의 비정형적 동의’가 추정되어 결과적으로 제소된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러므로 한국은 독도 문제가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되는 경우까지 염두에 두고 완벽한 국제법 이론을 준비하는 동시에 역사적 증거 역시 철저하게 확보해 둘 필요가 있다.

    독도 문제 해결의 지름길은 계속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는 일본의 입장이 역사적으로나 국제법적으로 부당하고 근거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한일 양국 국민들은 물론, 국제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정확히 알리는 일이다.



    물론 영토분쟁 해결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근거 없는 비관론은 금물이다. 어찌 보면 한국 정부와 다수의 국제법 학자가 법리적으로 성립할 수 없는 이상한 논리로 정책 결정자의 어리석은 판단을 초래하는 것 또한 이러한 판단 외에는 뾰족한 대안이 없다는 비관적 시각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발상을 전환해 더욱 종합적이고 긍정적인 시각으로 문제에 접근한다면 가장 올바르고 정확한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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