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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를 알면 대한민국이 보인다

신용하교수의 독도문제 100문 100답

  • 신용하교수

독도를 알면 대한민국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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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31 그렇다면, 1693∼1695년 ‘울릉도=죽도’ 영유권을 둘러싼 조선과 일본의 외교논쟁은 어떻게 해결되었는가?

A사필귀정(事必歸正)으로 잘 해결되었다. 일본측에서는 조선과 외교를 담당하던 대마도 도주 종의륜이 1695년에 죽고 그의 아우 종의진(宗義眞)이 도주가 되었다. 에도의 도쿠가와 막부에서는 1693년에 안용복을 송환할 때 후대하면서 죽도(울릉도)가 일본영토가 아님을 명백히 했다. 막부는 조선과의 외교를 담당하는 대마번의 번주 종의륜이 안용복을 송환하면서 죽도(울릉도) 획득의 공격외교를 행하는 것을 무리한 공격이라고 여겼는데, 조선측의 울릉도(죽도) 수호의지가 매우 강경하다는 것을 듣고 종의륜의 무리한 공격외교가 조선과 일본 두 나라의 우호를 불필요하게 해치지 않을까 하여 회의적으로 보고 있었다.

이때 마침 종의륜이 죽고 그의 아우 종의진이 도주가 되자, 종의진은 1696년 1월28일 도쿠가와 막부 장군에게 새해 인사 겸 새 도주 취임보고를 하러 에도에 올라가게 되었다. 막부 장군은 백기주(伯耆州) 태수 등 4명의 태수가 나란히 앉은 자리에서 울릉도(죽도) 문제에 대하여 대마도 신주 종의진에게 조목조목 날카롭게 질문하였다. 종의진은 죽도(竹島)가 조선의 ‘울릉도’이고 그것이 조선의 영토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막부 장군은 대마도 신주 종의진과의 질의·응답을 종합하여 참조한 후, 다음과 같은 명령하였다. 그 요지는 ①죽도(울릉도)는 일본 백기(伯耆)로부터 거리가 약 160리이고 조선으로부터는 40리 정도로 조선에 가까워 조선 영토로 보아야 하며 ②앞으로는 그 섬에 일본인들의 도해(渡海: 국경을 넘어 바다를 건너는 것)를 금지하며 ③이 뜻을 대마도 태수가 조선측에 전하게 하고 ④대마도 태수는 돌아가면 형부대보(刑部大輔: 대마도의 재판 담당관)를 조선에 파견하여 이 결정을 알리고 그 결과를 막부 장군(관백)에게 보고하도록 명령한 것이었다.

도쿠가와 막부 관백의 이 명령에 따라 울릉도(죽도)와 그 부속도서는 ‘조선 영토’로 일본측에 재확인되었고, 1618년의 ‘竹島渡海免許(죽도도해면허)’와 1661년의 ‘松島渡海免許(송도도해면허)’는 자동적으로 취소되었으며, 일본 어민들은 조선 영토인 울릉도(죽도)와 그 부속도서인 독도(우산도: 송도)에 건너가 고기잡이를 할 수 없게 되었다. 1696년 1월의 도쿠가와 막부 관백의 결정은 3년간 끌어온 울릉도·독도 영유권 논쟁을 일단 종결한 것이었다.



Q 32 그러면 대마도 번주는 1696년 1월 도쿠가와 막부 관백의 위의 결정과 명령을 즉각 수행하여 조선측에 통보했는가?

A즉각 통보하지 않고 시일을 끌면서 그해 연말에야 통보하였다. 그 사이에 안용복이 즉각 활동을 재개하여 조선정부는 에도의 도쿠가와 막부 관백의 생각과 결정을 대마도의 공식 사절이 오기 전에 알게 되었다.

Q 33 안용복은 또 어떠한 활동을 했는가?

A안용복은 1696년 봄에 조정의 허락을 받지 않은 채 제2차로 일본에 건너가서 울릉도와 독도(우산도)가 조선 영토임을 명확히 하고 울릉도·독도를 수호하려고 하였다. 이때 안용복은 1696년 1월 일본 도쿠가와 막부 관백이 울릉도와 그 부속도서 독도가 조선 영토이고, 울릉도·독도에서 일본 어민의 고기잡이 도해(渡海)를 금지한 사실을 알고 행동했는지 모르고 행동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안용복은 이전부터 대마도 일본인들과 통교가 있던 인물이고 일본어도 능숙했으므로, 도쿠가와 막부 관백의 결정을 미리 알고 출발했을 가능성도 높다.

안용복은 1696년(숙종 22년) 봄에 울산에 가서 울릉도에 가면 해산물이 많다고 하면서 순천 송광사의 장사꾼 중 뇌헌(雷憲), 글을 잘하는 이인성(李仁成), 사공 유일부(劉日夫), 유봉석(劉奉石), 김길성(金吉成), 김순립(金順立) 등 16명을 모아 울릉도에 들어갔다. 과연 울릉도에는 이미 일본 배들이 건너와 정박해 있으므로, 앞서 쓴 바와 같이 안용복은 “울릉도는 본래 우리 영토인데 어찌 감히 국경을 넘어 침범하는가. 너희를 모두 묶어 마땅하다”고 큰 소리로 꾸짖었다. 이에 일본인들은 “우리는 본래 松島(송도: 우산도, 독도)에 사는데 우연히 고기잡이를 나왔다가 이렇게 되었으니 마땅히 그곳으로 돌아갈 것이다”고 거짓말로 모면하려 하였다.

그러자 안용복은 앞서 쓴 바와 같이 다시 “송도(松島)는 곧 우산도(于山島)인데, 이 역시 우리나라 땅이다. 너희가 감히 여기에 산다고 하느냐(松島卽子(于)山島 此亦我國也 汝敢往此島)”고 꾸짖고 이들을 쫓아냈다. 안용복 등이 이튿날 새벽 배를 타고 우산도(于山島: 독도)에 들어가 보았더니 일본 어부들이 솥을 걸어 놓고 물고기를 조리고 있었다. 안용복 등이 막대기로 걸어 놓은 솥을 부수면서 큰 소리로 꾸짖으니 일본 어부 모두 배를 타고 돌아갔다고, ‘숙종실록’과 ‘증보문헌비고’ 등에 기록되어 있다.

안용복 등은 그 길로 일본 어부들을 쫓아 은기도(隱岐島: 玉岐島)로 들어갔다. 은기도 도주는 찾아온 이유를 물었다. 안용복은 큰 소리로, “몇 년 전에 내가 이곳에 들어와 울릉도·우산도(독도) 등의 섬을 조선 땅으로 정하고 관백의 문서를 받아가기에 이르렀는데, 일본은 정해진 격식이 없이 또 우리 영토를 침범했으니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라고 말하였다. 이에 은기도 도주는 안용복의 항의를 백기주(伯耆州) 태수에게 전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오래 기다려도 백기주로부터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이에 안용복 등은 분격하여 배를 타고 백기주(지금의 시네마 현)로 향하였다. 안용복 등은 스스로 ‘울릉·우산 양도 감세장(鬱陵·于山兩島監稅將)’이라고 칭하고 백기주 태수에게 사람을 보내 통고하니, 백기주 태수가 인마를 보내 맞이하였다. 안용복은 위의(威儀)를 갖추어 백기주 태수와 마루 위에 마주 앉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중간 계단에 앉았다. 백기주 태수가 일본에 들어온 이유를 물으니, 안용복은 “전날 두 섬(울릉도와 독도…인용자)의 일로 문서를 받았음이 명백한 데도 대마도 도주가 문서를 탈취하고 중간에 위조하여 여러번 사절을 보내서 불법으로 횡침하니 내가 장차 관백에게 상소하여 (대마도 도주의) 죄상을 낱낱이 진술하겠다”고 따졌다. 백기주 태수가 이를 허락하으므로 안용복은 이인성에게 상소문을 지어 관백에게 정납케 하였다.

당시 대마도 신·구 도주는 안용복의 문제 제기와 관련하여 두 가지 죄를 감추고 있었다. 그 하나는 도쿠가와 막부 관백이 백기주 태수에게 명령하여 써준 울릉도와 독도가 일본 영토가 아니라 조선땅이라는 문서를 빼앗아 없애고 도리어 일본 땅 죽도(울릉도)에 조선 어부들의 침범을 엄금해 달라고 문서를 위조한 죄가 있었다. 다른 하나는 교역상 조선측이 막부에 보낸 물품의 도량형을 속인 것이다. 조선은 쌀 15두(斗: 말)를 1섬으로 한 것을 대마도 도주는 7두를 1섬으로 했고, 조선은 베(布) 30자(尺)를 1필로 보냈는데 대마도 도주는 20자를 1필로 했으며, 조선이 보낸 종이 1묶음(束)을 대마도 도주는 3묶음으로 나눠 그 차액을 착복하였다.

이때 마침 대마도 도주의 아버지가 백기주 관아에 머물러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 백기주 태수를 찾아가, “만약 이 상소가 올라가면 내 아들은 반드시 중죄를 얻어 죽을 것이므로 이 상소를 올리지 말아달라”고 애걸하였다. 백기주 태수는 이에 안용복에게 그 상소를 올리지 말라고 권고하였다. 백기주 태수는 우선 울릉도·독도를 침범했다가 안용복에게 쫓겨온 일본 어부 15명을 적발하여 처벌하였다. 또한 백기주 태수는 안용복에게 “두 섬(울릉도와 우산도…인용자)이 이미 당신네 나라에 속한 이상, 만일 다시 침범하여 넘어가는 자가 있거나 도주(대마도 도주…인용자)가 혹시 횡침하는 일이 있으면, 국서를 작성하여 역관을 정하여 들여보내면 마땅히 무겁게 처벌할 것이다(兩島旣屬爾國之後 或有更爲犯越者 島主如或橫侵 竝作國書 定譯官入送 則當爲重處)”는 약속을 하였다.

백기주 태수는 안용복 등에게 식량을 공급해주고, 파견수행원을 정하여 호송해 주었으며, 화폐도 가지고 가라고 주었으나 안용복·뇌헌 등은 완강히 사양하고 귀국하였다.

Q 34 안용복이 제2차로 일본을 다녀온 후 조선정부와 일본정부 사이에 정식 외교 교섭과 논쟁 종결의 문서 교환이 있었는가?

A있었다. 도쿠가와 막부 관백(장군)이 1696년 1월28일 울릉도·독도를 조선 영토로 재확인하고, 일본 어부들 울릉도·독도에 고기잡이하는 것을 금지하는 결정을 내림과 동시에 이 재확인 결정을 대마도 도주가 대마도 형부대보(刑部大輔)를 조선에 보내 조선정부에 알리고 외교 교섭을 마친 후 그 결과를 막부 장군에게 보고하도록 명령하자, 대마도 도주는 돌아와 이 외교절차를 천천히 집행하기 시작하였다. 대마도 도주는 대마도에 돌아오자 곧바로 공식 외교사절을 파견하지 않고 대마도에 들어와 있는 동래부 조선역관에게 1696년 말에야 이 외교문서를 필사해 가도록 하면서, 먼저 막부 장군에게 조선정부가 보내는 감사의 서한을 대마도 도주를 경유하여 보내도록 권고하였다.

조선 중앙정부가 울릉도·독도를 조선 영토로 재확인하고 일본인이 국경을 넘어 이 섬으로 고기잡이 가는 것을 엄금하겠다는 일본 도쿠가와 막부 장군의 외교문서(대마도 도주가 대리 작성)를 접수하여 읽은 것은 1년 후인 1697년 2월이었다. 조선정부는 일본측에 회답문서를 보낼 것인가 접수만 할 것인가를 논의하다가 감사 서한은 보내지 않고 일본의 결정은 알았으니 우의를 돈독히 하자는 일반 외교서한만 보내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조선 예조참의 이선부(李善溥)와 일본 대마주 형부대보(刑部大輔) 평의진(平義眞) 사이에 두 차례 외교서한이 오고간 후에, 1699년 1월 일본측으로부터 조선측에 조선의 답서를 에도의 막부 장군에게 잘 전달했다는 최후의 확인 공한이 도착하여 외교 절차가 모두 종결되었다. 이로써 일본 대마도 도주가 장기주 태수와 결탁하여 조선의 울릉도·우산도를 탈취하려고 시작한 울릉도·독도 영유권 논쟁은 1696년(숙종 22년) 1월 도쿠가와 막부 장군이 울릉도·독도가 조선 영토이며 일본 어부들의 월경 고기잡이를 금지한다는 재확인 결정에 따라 논쟁을 완전히 종결하였고, 이에 관한 외교문서의 교환도 1699년 1월 최종적으로 모두 끝냈던 것이다.

Q 35 1696년 1월의 도쿠가와 막부 장군의 결정이 혹시 울릉도만 조선 영토로 재확인한 것인가, 아니면 독도를 포함하여 울릉도와 독도를 모두 조선 영토로 재확인한 것인가?

A물론 울릉도와 독도를 모두 조선 영토로 재확인한 것이다. 당시에는 조선측과 일본측 모두 울릉도와 독도의 가치를 오늘날보다 낮게 평가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측도 울릉도 주민이 몇 번 왜구에게 노략질을 당하자 섬을 비워 사람들이 살지 않도록 하는 ‘공도(空島)’ 정책을 실시했다. 일본측도 울릉도를 비옥하지 않은 작은 섬 정도로 저평가했다. 이러한 형편이므로 울릉도의 부속도서로 그보다 훨씬 더 작은 바위섬인 ‘독도’에 대해서는 울릉도에 포함하여 이름도 거론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 때문에 도쿠가와 막부 장군이 1696년 1월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 영토로 재확인하는 결정과 명령을 내릴 때에도 간단한 기록에서는 ‘竹島(울릉도)’로만 기록되고 자세한 기록에서는 ‘죽도’와 ‘그 외 1島’라고 한 다음 ‘그 외 1도’는 ‘松島(송도: 독도)’라는 작은 섬이라고 기록하였다. 그러므로 간단한 기록에서 이때 막부 장군의 결정을 ‘죽도’(울릉도)만 갖고 설명 기록하는 경우에도 그 부속도서인 ‘송도’(독도)가 포함된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는 사실을 일본 메이지 정부 내무성도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1696년 1월 일본 도쿠가와 막부 장군이 재확인한 조선 영토는 울릉도와 독도를 모두 포함한 것이었다.

Q 36 그렇다면 1696년 1월 이전의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일본측의 영유권 시비는 도쿠가와 막부 장군의 조선 영토 재확인 결정으로 모두 소멸되고 조선과 일본 사이에 영토논쟁은 모두 종결되었나? 도쿠가와 막부에서 미자(米子)의 일본 어부 두 가문에 허가한 ‘죽도도해면허(竹島渡海免許)’와 ‘송도도해면허(松島渡海免許)’는 모두 취소된 것인가?

A물론이다. ‘죽도도해면허’와 ‘송도도해면허’도 자동적으로 취소되었고, 막부 장군에 의해 조선 영토로 재확인된 울릉도와 독도에 국경을 넘어 들어가서 고기잡이를 하고 오는 일본 어부들은 발각되면 처벌되었다. 1696년 1월 도쿠가와 막부 장군이 울릉도·독도를 조선 영토임을 재확인한 결정에 따라 대마도 도주가 제기한 모든 영토논쟁은 완전히 종결된 것이었다.

Q 37 그렇다면 오늘날 일본정부가 ‘독도’를 ‘역사적으로 일본 고유영토’라고 주장하는 것은 전혀 근거가 없지 않은가?

A그렇다. 오늘날의 일본정부가 ‘역사적으로 독도는 일본 고유영토’라고 운운하는 것은 진실에 토대를 둔 발언이나 주장이 아니다. 한국측이 진실에 근거하여 ‘독도는 역사적으로 서기 512년부터 한국의 고유영토’라고 지적하니까 이에 맞대응하기 위한 억지주장에 불과한 것이다. 일본측 고문헌들까지도 ‘독도는 역사적으로 한국의 고유영토’임을 증명하고 있다. 일본측 고문헌에도 독도가 일본의 고유영토라고 증명하는 자료는 아직까지 단 1건도 없다.

Q 38 안용복(安龍福)은 두 차례나 일본에 건너가서 울릉도와 독도(우산도)를 지키는 데 큰 공을 세웠는데 조정은 그에게 제대로 포상했는가?

A포상은커녕 벌을 주려고 하여 대일 강경 대응파들이 간신히 그를 구해냈다.

안용복의 제1차 도일(渡日)은 일본의 오오다니(大谷) 가문 어부들에게 납치되어 간 것이니, 조선정부측으로서는 공도정책을 적용하여 들어가지 못하게 한 울릉도에 들어간 가벼운 죄만 물으면 될 것이었다. 그러나 안용복의 제2차 도일은 문제가 단순하지 않았다. 우선 당시에 이미 조선과 일본의 관계는 반드시 대마도 도주의 창구와 조선측이 대마도 도주에게 새겨서 내려준 도장에 의거하도록 약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안용복이 대마도 창구를 무시한 채 직접 백기주 태수와 외교 교섭을 했고 일본측이 이를 처벌하라고 강경하게 항의해왔기 때문이다. 또한 안용복의 제2차 도일은 납치됐거나 표류한 것이 아니라 안용복이 처음부터 목적을 갖고 준비 후에 정부 허가 없이 일부러 국경을 넘어 일본에 건너간 것이었다.

이 때문에 안용복이 귀국해서 강원도 양양에 정박하여 문서로 전후 사실을 보고하자, 조선 조정은 우선 안용복을 서울로 불러올려 가두었는데 이에 대신들 사이에 논란이 일었다. 좌의정 윤지선(尹址善)은 온건 대응파의 건의를 받고, 만일 안용복을 사형에 처하여 죽이지 않으면 앞으로 간사한 백성 중에 다른 나라에 들어가 일을 일으키는 자가 많아질 것이니 안용복에게 극형을 줄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였다. 사헌부가 이에 동조하여 극형을 주장하였다. 반면에 지사 신여철(申汝哲)은 안용복의 공이 죄보다 크므로 그에게 죄를 주어서는 안 되고, 즉시 석방하라고 주장하였다.

영중추지사 남구만(南九萬)은 안용복을 죽이면 대마도 도주만 기쁘게 할 뿐이지 나라의 약함을 보여 일본과의 외교에도 업신여김을 당할 것이라며 극형을 극력 반대하였다. 영의정 유상운(柳尙運)은 남구만의 주장을 지지하였다.

그리하여 쟁론 끝에 국왕이 남구만의 중간책을 채용해서 안용복을 사형에서 감형하여 귀양보냈고, 후에 강경 대응파가 그를 석방해주었다. 조선왕조 후기 실학파의 대학자 성호(星湖) 이익(李翼)은 안용복의 건에 대해 ‘성호사설(星湖僿說)’ 울릉도 조에서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생각건대 안용복은 곧 영웅호걸인 것이다. 미천한 일개 초졸로서 만 번 죽음을 무릅쓰고 국가를 위하여 강적과 겨루어 간사한 마음을 꺾어버리고, 여러 대를 끌어온 분쟁을 그치게 했으며 한 고을의 땅을 회복했으니, 부개자(傅介子)와 진탕(陳湯)에 비하여 그 일이 더욱 어려운 것이며, 영특한 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성호 이익 이후에는 오주(五洲) 이규경(李圭景)을 비롯하여 모든 실학자가 안용복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고 당시 조정 대신들의 단견과 어리석음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Q 39 17세기 말 일본과의 울릉도·독도 영유권 논쟁이 잘 해결된 후 울릉도 ‘공도정책(空島政策)’은 폐기되었는가? 울릉도 ‘공도정책’은 언제 왜 시작되었으며, 17세기 말 ‘울릉도·독도 영유권 논쟁’ 이후에도 공도정책이 계속되었다면 왜 그렇게 된 것인가?

A왜구(倭寇)의 침략과 노략질 때문에 조선 태종(太宗)이 1417년(태종 17년)에 울릉도 ‘공도·쇄환(空島·刷還) 정책’을 확정하여 채택하였다. 고려 말기∼조선 초기에는 왜구가 창궐하여 중국해안과 조선해안을 침노해서 노략질을 자행하였다. 특히 고려 말에는 왜구들이 깊숙이 내륙 오지에까지 침입하여 살육과 노략질을 자행하였다. 이성계(李成桂)가 민족의 영웅으로 부상하여 새로이 조선왕조를 개창하는 데 기반이 된 업적 중 하나가 전라도 지리산 아래 오지까지 침입한 왜구를 쳐부순 공로가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울릉도의 경우를 들면, 1379년(고려 우왕 5년) 7월에 왜구가 울릉도에 침입하여 주민을 살육하고 노략질을 자행한 후 약 15일간 머물다가 돌아갔다. 이에 태종은 등극한 직후인 1403년(태종 3년) 8월11일에 강원도 관찰사의 건의에 따라 울릉도에 들어가 살고 있는 백성들을 모두 육지로 나오라고 명령하였다. 태종이 울릉도 거주민을 육지로 불러와 섬이 빈 것을 알고, 대마도 도주 종정무(宗貞茂)가 1407년 3월16일 토산물과 그간 왜구가 잡아간 조선인 포로들을 돌려보내면서, 대마도 사람들을 울릉도에 이사하여 거주하게 허락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태종은 비록 섬이 비었다 할지라도 다른 나라 사람이 국경을 넘어 들어와서 살게 하여 분쟁의 씨앗을 만들 수 없다는 이유로 이를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태종은 1417년(태종 17년) 정월에 김인우(金麟雨)를 안무사(按撫使)에 임명하여 울릉도에 들여보내서 울릉도에 거주하는 백성을 모두 데리고 나오게 하였다. 그런데 김인우가 1417년 2월5일 귀환하여 올린 보고에 따르면 울릉도에 남녀 86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계속 울릉도에 살기를 청원하므로 대표격인 3명만 데려왔으며, 울릉도 부근에 부속도서로 우산도(于山島)라는 작은 섬이 있다는 것이었다.

태종은 이에 1417년 2월8일 우의정으로 하여금 정부 대신들을 모두 소집하여 대전회의를 개최해서 울릉도와 우산도의 관리정책을 논의하였다. 절대 다수의 대신들은 울릉도에 군사 진(鎭)을 설치하여 방어하면서 백성들을 계속 농사와 어업을 하며 거주케 하자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공조판서 황희(黃喜)는 이에 반대하면서 울릉도 거주민을 속히 육지로 쇄출(刷出: 데리고 나오는 것)하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책이라고 주장하였다.

태종은 황희가 제안한 ‘쇄출정책’이 좋다고 채택하였다. 울릉도에 거주하는 백성들을 쇄출해오면 울릉도는 비게 되므로 이것을 ‘공도(空島)정책’이라고도 부르는 것이다. 태종이 울릉도에 대해 ‘쇄출정책’, ‘공도정책’을 결정한 것은 1417년 2월8일이고, 독도에 대해 공식적으로 ‘우산도(于山島)’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도 이 무렵(1417년 2월5∼8일)이었다. 태종은 1417년 2월8일 ‘쇄출·공도정책’을 채택함과 동시에 김인우를 (우산·무릉등처안무사: 于山·武陵等處按撫使 독도·울릉도 등 지역 안무사)에 임명하여 다시 울릉도에 들어가서 울릉도 주민을 데리고 육지로 나오도록 하였다. 우산·무릉등처 안무사 김인우가 다시 울릉도에 들어갔다가 거주민을 모두 쇄출해 나온 6개월 후, 1417년 8월6일 왜구가 우산도(독도)와 무릉도(울릉도)에 또 침입하였다고 ‘태종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울릉도 출신 백성들과 유민들은 조정의 감시를 피하여 몰래 울릉도에 들어가 거주하는 일이 계속되었다. 우산도(독도)는 사람이 살지 않았지만, 울릉도(무릉도)는 사람이 살기에 적합한 지역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일본이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켰을 때 왜구들은 또 울릉도를 침노하여 살육과 노략질을 자행하였다. 이때 울릉도 거주민은 거의 살육당한 것으로 보인다. 그 이후는 동해안 어민들은 울릉도에 상주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계절적으로 고기잡이를 나가거나 배를 만들 나무를 베러 갔다가 돌아오는 것이 관행이었다.

1696년 1월 일본 도쿠가와 막부 장군이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 영토로 재확인하고 일본 어부들의 월경 고기잡이를 금지한 조치 직후에, 조선 조정은 울릉도에 대한 ‘쇄출·공도정책’은 그대로 지속하되, 1697년(숙종 23년) 4월13일 영의정 유상운(柳尙運)의 건의에 따라 ‘순시(巡視)제도’ ‘수토(授討)제도’를 채택하였다. ‘순시·수토제도’란 2년 간격(매 3년째에 1회)으로 동해안의 변방 무장(武將)으로 하여금 규칙적으로 순시선단을 편성하여 울릉도에 들어가서 순시·수토하고 돌아오는 제도다.

Q 40 일본측은 1696년 1월 도쿠가와 막부 장군이 울릉도·독도를 조선 영토로 재확인하고 일본 어부들의 월경 고기잡이를 금지한 이후, 이 금령을 준수하고, 울릉도·독도에 대한 조선의 영유권을 존중했는가?

A도쿠가와 막부는 울릉도·독도를 조선 영토로 재확인하여 존중하였고, 일본 어민들이 국경을 넘어 울릉도·독도에 들어가서 고기잡이하는 것도 비교적 잘 막았다. 그 결과는 여러 문헌과 고지도들에도 부분적으로 반영되었다. 예컨대 일본 실학파의 최고 학자인 하야시 시헤이(林子平, 1738∼1793)는 1785년경에 ‘삼국통람도설(三國通覽圖說)’이라는 책을 간행하면서 그 부록 지도 5장의 일부로 ‘삼국접양지도(三國接壤之圖)’와 ‘대일본지도(大日本地圖)’를 그렸다. 지도에서 국경과 영토를 명료하게 구분해서 나타내기 위해 나라별로 채색했는데, 조선은 황색으로 일본은 녹색으로 채색하였다.

하야시 시헤이는 동해 가운데 울릉도와 독도(우산도)를 정확한 위치에다 그려넣었고, 울릉도와 독도를 모두 조선색깔인 황색으로 채색하여 조선영토임을 명백하게 표시했다. 그렇게 해놓고서도 혹시 훗날 무지한 일본인들의 억지가 있을 것을 염려했는지, 이 지도들은 울릉도와 독도 두 섬 옆에다가 다시 ‘朝鮮ノ, 持ニ(조선의 것으로)’라고 문자를 적어 넣어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영토임을 거듭해서 강조하였다. 하야시 시헤이가 1785년에 그린 지도들에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 영토의 색깔로 채색하고 그 옆에 또 ‘朝鮮ノ, 持ニ(조선의 것으로)’라고 쓴 문자는, ‘독도’가 논쟁의 여지없이 조선 영토임을 일본측에서 증명하는 결정적 자료라고 볼 수 있다.

또한 같은 시기 도쿠가와 막부의 일본 지도인 ‘총회도(總繪圖)’라는 지도도 국경과 영토를 명백하게 구분하기 위하여, 일본은 적색으로, 조선은 황색으로 채색했는데, 울릉도와 독도를 정확한 위치에 그려넣고 울릉도와 독도를 모두 조선을 표시하는 색깔인 황색으로 채색하여 울릉도와 독도가 모두 조선 영토임을 명료하게 표시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 지도도 울릉도와 독도 옆에 문자로 ‘朝鮮ノ, 持ニ(조선의 것으로)’라고 써넣어서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영토임을 거듭 명확하게 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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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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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를 알면 대한민국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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