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7월호

클라이맥스에서 막내린 ‘양빈 신화’ 내막

신의주특구 미스테리

  • 번역·정리: 황의봉 동아일보 출판국부국장

    입력2004-06-30 17: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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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년 9월 북한은 신의주를 특별행정구로 지정하고 네덜란드 국적의 중국 부호 양빈(楊斌)을 특구장관으로 임명한다는 충격적인 발표를 한 바 있다. 그러나 발표 직후 양빈이 중국 공안당국에 전격 연행돼 재판에 회부됨으로써 신의주 개방이라는 북한의 야심만만한 시도는 순식간에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과연 북한은 어떤 의도에서 신의주를 특구로 지정했으며, 양빈이란 수수께끼의 인물은 누구인가. 북한과 양빈은 어떤 협상과정을 통해 신의주특구를 탄생시켰으며, 양빈이 체포된 후 상황은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가. 의혹과 궁금증이 가시지 않는 가운데 양빈의 부탁으로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기록해온 중국의 전기작가 관산(關山)이 최근 홍콩의 명보출판사를 통해 ‘불을 훔친 불행한 사람(不幸的盜火者)’을 출판했다. 이 책은 6월 하순경 두우성출판사에 의해 국내에서도 ‘김정일과 양빈’이라는 제목으로 번역출간될 예정이다. 두우성출판사의 허락을 얻어 주요내용을 발췌 소개한다.(편집자)》

    클라이맥스에서 막내린 ‘양빈 신화’ 내막
    2001년 1월15일부터 20일까지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중국을 비공식 방문했다. 방문 기간 김정일은 상하이(上海)를 4일간 시찰했다.

    김정일은 상하이 방문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는 베이징(北京)에서 가진 장쩌민(江澤民)과의 회견에서 “중국, 특히 상하이가 개혁개방 이후 이룬 경천동지의 거대한 변화는 중국공산당이 실행하고 있는 개혁개방 노선이 정확했음을 증명한다”고 소감을 피력했다. 김정일은 상하이 손교현대농업개발구를 참관하면서 유리온실에서 자라고 있는 각종 채소류와 천태만상의 화훼류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농업문제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북한 경제의 걸림돌이자 돌파구라는 모순을 안고 있다. 김일성은 생전에 북한이 언젠가는 농업현대화를 달성해야 한다는 염원을 가지고 있었지만 죽을 때까지 달성하지 못했던 것이다.

    김정일도 북한농업의 출구를 찾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러던 중에 상하이 손교현대농업개발구를 참관하게 된 김정일은 이것저것 자세히 물어보았다. 그는 유리온실 설비가 어느 나라에서 생산되는지에 대해 물었으며 1ha 경영에 돈이 얼마나 드는지도 물었다. 또 1ha의 유리온실에서 채소가 1년에 얼마나 생산될 수 있는지, 어떤 야채와 화훼류를 재배하는지도 물었다.



    김정일은 귀국 즉시 중국주재 북한대사관에 중국의 유리온실에 관해 자세히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보고자료가 신속하게 그의 책상에 도착했다. 그 중 한 보고서에 유리온실 설비와 기술의 최대 공급자는 네덜란드 국적의 중국인 양빈(楊斌)이라는 것이 나와 있었다. 게다가 그 인물이 현재 자금과 인력을 집중 동원해 선양에 네덜란드촌이라는 현대농업 생산기지를 건설 중이라는 내용도 적혀 있었다. 김정일은 관련 부문과 중국주재 북한대사관, 선양영사관에 지시해 양빈과의 정식 대면을 추진시켰다.

    국빈급 예우 받으며 평양 방문

    북한의 외국주재 한 무역회사의 사장이 먼저 네덜란드촌을 방문해 양빈을 예방했다. 그는 갓 완공된 면적 4ha의 유리온실을 참관한 뒤 양빈과 상세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며칠 후 그 사장은 선양주재 북한영사관 수석영사를 대동하고 다시 양빈을 찾아왔다. 그들은 북한 무역성과 경제협력추진위원회, 농업성, 원예총사를 대표해 양빈을 평양으로 초청했다.

    클라이맥스에서 막내린 ‘양빈 신화’ 내막
    2001년 4월, 양빈은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했다. 평양에 도착했을 때 양빈은 뜨거운 환대를 받았다. 그는 평양 모란봉호텔에 묵었다. 이 호텔은 북한정부가 각국 국빈을 대접하는 곳이다.

    양빈은 바쁜 일정 속에 북한의 주요 관리들과 몇 차례에 걸쳐 회담을 가졌다. 네덜란드유라시아그룹의 명의로 북한 원예총사와 합작하기로 하고 두 회사가 공동으로 투자하는 평양-유라시아 합영회사를 설립하기로 했다. 합영회사는 김일성기념당에서 멀지 않은 평양시 용성구 화성동에 북한 최초의 현대농업시범구를 건설해 김일성이 생전에 못다 이룬 북한 농업현대화 구상과 유지를 기리기로 했다.

    2001년 6월30일, 쌍방은 공동으로 평양-유라시아 합영회사의 규정을 완성하고 조직을 구성했다. 총자산은 2200만달러. 양빈이 자금과 설비, 기술을 투자하고 70%의 지분을 차지하기로 했다. 북한은 땅과 인력을 제공하고 30%의 지분을 갖기로 했다.

    2001년 7월20일, 쌍방은 평양에서 조인식을 가졌다. 마침내 양빈이 북한 농업현대화 계획에 개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양빈, 평양에 농업시범구 건립

    2001년 7월21일 양빈 일행은 선양으로 돌아왔다. 그는 곧 바로 유라시아그룹(歐亞集團)의 부총재인 리강(李剛)을 주축으로 평양에 농업시범구 건설을 추진할 팀을 구성했다. 그리고 MBA학위와 관리경험을 가진 거셴민(葛憲民)을 평양-유라시아 합영회사의 사장, 왕위민(王玉民)을 부사장으로 임명했다. 평양 농업시범구의 기술 총책임자는 구젠핑(谷建平) 교수 및 네덜란드인 전문가로 정했다.

    필자는 2002년 4월 평양을 방문해 처음으로 화성동 농업시범구를 참관했다. 이미 유리온실 구조물 설치가 끝나고 온실내부의 파이프 공사를 비롯한 관개(灌漑) 계통을 설치하고 있었다. 태양광선이 쏟아져 들어오는 유리온실 안에 토마토, 피망, 가지, 참외, 오이 등 각종 야채가 자라고 있었다. 주렁주렁 달린 열매들이 보는 사람을 기쁘게 했다. 북한 직원들은 채소를 따서 상자에 넣는 포장작업과 함께 이것들을 시내로 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온실들은 언제 완공됐을까? 물론 지난해 겨울에 시공할 수는 없었겠지? 엄동설한에 750무(畝, 1무는 6.6a)에 이르는 온실을 가득채운 모종을모두 어디서 가지고 왔을까? 의문이 줄을 이었다. 나는 참관을 마치고 간이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왕위민 부사장에게 물어보았다. 왕위민이 설명했다.

    “여기는 조선의 첫 현대농업시범구입니다. 보신 것은 제1기 공정 50ha뿐입니다. 유리온실은 6ha, 즉 6만㎡입니다. 양광온실(陽光溫室)은 76동, 동당 1무에 이릅니다. 이것은 산둥의 수광온실(水光溫室)을 모델로 삼아 개조한 것입니다. 양광온실 뒷벽의 토층은 수광온실보다 훨씬 두텁습니다. 온실 대문 바로 앞에 통일된 규격의 작은 집을 지어 정결하고도 아름다우며 따뜻하도록 만들었습니다.”

    클라이맥스에서 막내린 ‘양빈 신화’ 내막

    2002년 9월27일 중국의 선양 네덜란드촌에서 양빈이 한국기자들과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

    그는 온실 건설과정에 대해서도 상세히 설명햇다. “조선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하루라도 빨리 완공할 수 있겠느냐고 물어왔습니다. 평양 시민들이 겨울에도 채소를 먹을 수 있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이에 양 사장이 조선에서 시공을 책임진다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2001년 12월에 조선 군대와 노동자, 현지 농민이 동원됐습니다. 가장 많을 때는 5만명이 동시에 달려들어 부지 정리와 하우스 건설에 나섰습니다. 공터마다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붉은 깃발이 나부끼면서 조선 인민군 문공단 배우들의 춤과 노랫소리가 하늘과 땅에 울려 펴졌습니다. 이런 장면은 지금 중국에서는 볼 수 없죠. 1958년 대약진 때라면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정말 격동적이고 감개무량한 광경이었습니다.”

    2002년 3월부터 평양-유라시아 합영회사의 온실에서 자란 신선한 야채가 평양의 외국인들과 시민들에게 공급됐다. 이렇게 해서 유라시아그룹과 양빈의 이름이 평양에서 나돌기 시작한 것이다. 북한의 당과 관리들은 양빈을 대단한 인물로 보았을 것이다.

    양빈의 유라시아그룹과 북한 원예총사의 합작은 명의상으로는 합영회사였지만 실제로 70%의 지분을 소지한 양빈은 그곳에서 생산된 신선한 야채에 대해 1센트의 수입도 얻지 못했다. 북한에선 야채마저도 정부가 공급하기 때문에 평양-유라시아 합영회사는 생산한 야채를 시민들에게 팔 수가 없었다. 정부가 일부분 비용을 보조해주기는 하지만 평양시 정부는 달러로 이 비용을 지불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그냥 장부상에 기재만 해놓는 것이다. 북한 정부는 양빈에게 농업시범구 사업의 보조금을 지불하고 감사를 표시하기 위해서 다른 방법을 통해 보상하기로 했다.

    북한, 양빈에 신의주 경제특구 제안

    2002년 1월14일부터 22일까지 양빈은 리강, 볜서우제(邊守捷), 저우샹(周翔) 등 유라시아그룹 사람들과 네덜란드 농업전문가 제크를 데리고 평양을 방문해 농업시범기지의 건설상황을 시찰했다. 이어서 양광온실의 모종 생장상태를 확인하는 한편, 유리온실의 구조 시공에 관한 여러 가지 문제를 북한측과 협의했다.

    양광온실 안은 봄처럼 따뜻했다. 유라시아 농업기술자들의 세심한 관리하에 야채모종은 잘 자라고 있었다. 북한 관리들은 양빈과 함께 시찰을 마친 후 대단히 만족해 했다.

    1월21일 저녁, 북한 원예총사가 모란봉호텔 1층에서 양빈 일행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연회가 끝난 뒤, 김동규 사장은 2층 양빈의 응접실에서 대화를 나누었다. 김 사장은 앉자마자 말했다.

    “양빈 총재님, 당신은 조선인민의 친구입니다. 당신은 조선을 위해서 아무 대가없이 너무나 큰 공헌을 했습니다. 김정일 장군과 조선 정부를 대표해서 제가 감사를 드립니다.”

    양빈은 김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말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중국에서 자랐기 때문에 애국주의와 국제주의 교육을 받았습니다. 얼마 안 되는 돈과 힘을 보태는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김 사장은 큰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양 총재님은 정말 좋은 분이군요. 중조(中朝) 양국 인민들의 우의는 피와 불의 시련을 거친 것이죠. 총재님의 조선인민에 대한 감정 또한 진실한 것이며 시련을 거친 것입니다. 당신은 사업가입니다. 주기만 하고 받지 못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조선은 지금 대단히 빈곤합니다. 그래서 보답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김장군님도 양 총재에게 무슨 요구사항이 있다면 모두 말씀하게 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김 사장은 이 자리에서 북한 정부를 대신해 양빈에게 경악할 만한 제안을 했다. 양빈에게 신의주 지역에 27㎢를 선택해 경제무역구를 만들고 관리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잘되면 더 크게 확장할 수도 있다고 했다.

    양빈은 당시에 너무도 놀랐다. 한 번도 생각해본 일이 없기 때문이었다.

    허명규가 또 물었다.

    “특구의 관세는 얼마입니까?”

    양빈의 대답은 간단했다.

    “면세(免稅)입니다.”

    “그런데 특구의 여권은 어떻게 냅니까?”

    허명규의 물음에 양빈이 반문으로 대답했다.

    “이건 아주 중요한 문제인데 조선측의 의견은 어떠합니까?”

    “특구가 여권도 발급해야”

    특구의 여권을 북한 정부가 발급하도록 하면 특구의 업무효율이 떨어질 뿐만 아니라 특구 정부의 권위에도 손상이 갈 것이므로, 이 조항만큼은 반드시 특구 정부가 발급하는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아니나 다를까, 뤄교수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입장을 밝혔다.

    “이 문제는 중앙 정부가 여권발급권을 특구장관에게 수여하고 특구 정부가 발급하도록 해야 합니다. 조선 정부가 세계의 여러 나라와 대부분 수교하였지만 일본 미국 등 미수교국이 있는데 그런 나라 사람들도 특구 여권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특구 여권은 상업 거래에 편리한 것입니다.”

    양빈도 한마디 거들었다.

    “신의주 특구 여권은 특구가 발급해야 합니다.”

    그러자 이번엔 허명규가 발언했다.

    “중앙 정부가 발급권을 주면 특구는 하자 없이 잘 해야 합니다. 이건 다른 문제인데 특구에 왜 구기(區旗)와 구휘(區徽)가 있어야 합니까?”

    허명규의 물음에 뤄웨이젠이 한마디로 대답했다.

    “대외교류에 필요합니다.”

    허명규는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대외교류는 조선국기로도 될 것 아닙니까?”

    이 부분에서 줄곧 말문을 닫고 있다시피 하던 마닝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안 됩니다. 우리 특구와 조선이 국제교류에서 같은 조선국기를 써서는 안 됩니다.”

    뤄웨이젠이 한마디 덧붙였다.

    “어떤 나라는 조선으로는 가지 못하게 하지만 특구로 가는 건 허가합니다. 그러므로 조선국기를 쓰면 불편하나 특구 구기를 쓰면 편리합니다. 특구 여권과 같은 이치입니다.”

    양빈도 한마디 했다.

    “일본의 이토사(社)도 정부의 규제 때문에 조선산 과일, 채소, 화훼, 수산물 등은 수입하지 못하지만 특구 산품은 가져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김 사장은 한 걸음 물러섰다.

    “만약 필수적이라면 반드시 정당한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이 건은 우리가 중앙에 보고하겠습니다.”

    뤄웨이젠이 말했다.

    “국제적인 회의에 참가하고 회원이 되려면 표징이 있어야 하고 회기(會旗)도 필요합니다. 여권을 발급하는 목적은 특구 여권 휴대자와 조선 여권 휴대자를 구별하는 것이므로 특구의 휘장이 있어야 합니다.”

    “구휘, 구기, 여권에 대하여 우리가 중앙에 보고할 것입니다. 만약 중앙 정부가 특구의 기와 휘장을 비준한다면 귀측은 어떤 방안이 있습니까? 어떤 꽃을 상징으로 쓰려 합니까?”

    김사장의 질문에 양빈은 “진달래꽃이 좋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양빈, 50㎢ 더 요구하다

    3일째 회담은 네덜란드촌 암스테르담 기차역 3층홀에서 진행되었다. 회담을 시작하기 전에 양측 대표들은 2층홀에 설치되어 있는 모래로 만든 신의주특구의 전경 지도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이 모형은 북한측이 제공한 82㎢의 신의주특구 지도에 따라 설계한 것이다. 신의주특구 모형은 압록강 연안에 긴 녹화 벨트가 놓이고 시내구역은 세계적 수준의 고층 빌딩과 하이테크 구역, 별장 구역, 공항과 널따란 8차선 도로, 공원처럼 꾸며진 생활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북한측 대표들은 눈길을 떼지 못하며 찬탄해 마지 않았다.

    양빈이 북한측 대표단에게 신의주특구 모형을 구경시킨 것은 특구에 대한 북한측의 믿음을 확고히 하려는 목적 이외에도 항구와 향후 그 지역 거주민들을 이주시키는 문제를 북한측 대표들에게 인식시키려는 의도가 있다. 북한측이 제공하는 항구는 3000t급 화물선밖에 드나들지 못하는데 특구가 성공하려면 적어도 1만5000t급이 정박할 수 있는 항구가 필요하다. 우리가 희망하는 바는 주단도까지 끌어들여 항구, 창고 및 화학공업용지로 쓰려는 것이다. 신의주특구의 모형 앞에서 사람들은 직관적으로 압록강의 출해구와 항구 선택의 편의성을 읽을 수 있었다.

    항구기획설계 전문가 왕뤄가 모형 앞에서 북한측 대표들에게 항구 건설에 가장 이상적인 지점을 소개하였다. 나는 왕뤄가 이미 수차례에 걸쳐 양빈에게 항구 건설지점의 선택문제를 보고하면서 신의주특구 기획에서 우선적으로 항구 지점을 선정해야 비로소 설계에 들어갈 수 있다고 강조하는 말을 들었었다. 그만큼 항구를 건설하는 것은 대단히 전문적이고 복잡하며 중대한 공사다. 북한측이 제공한 항구는 수심이 얕은 천수(淺水)항인데 반해 신의주특구가 필요로 하는 것은 1만t급 이상의 화물선이 정박할 수 있는 심수(深水)항이다. 왕뤄는 또 항구 부근에 정유공장을 세울 것을 제안하였는데 그것 역시 유조선 부두와 창고의 용지 문제 등과 관련되는 것이다.

    양빈은 모두 얼마의 용지가 필요하냐고 왕뤄에게 물었다. 왕뤄는 5㎢면 된다고 대답하였다.

    “만약 정유공장의 폐기물을 현지 처리하고 여러 가지 화학공장도 함께 건설하려면 용지가 얼마나 더 들어야 하겠습니까?”

    양빈의 이 물음에 왕뤄는 웃으며 대답했다.

    “2배 가량이면 됩니다.”

    항구문제로 특구 50㎢ 확대

    여기에 한 가지 보충할 점이 있다. 양빈 대표단에 새로 참여한 챠오성리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는 나의 이십년 지기(二十年知己)다. 그는 중국공산당 선전시위원회 상무위원, 사구(蛇口)외자유치국, 사구공업구 이사회 부이사장 겸 사장을 역임하였고, 차오상은행(招商銀行)과 핑안보험공사(平安保險公司)를 창설했다. 사구 건설의 총지휘자로서 그는 청춘과 재능을 모두 사구특구에 바쳤다.

    북한측 대표들이 선양에 와서 제3차 회담을 하던 때 챠오성리가 자신의 친구 리자화(李家華)를 네덜란드촌으로 데려왔다. 리자화는 대 투자자로 이미 ‘거파이(殼牌)석유’ 등을 망라한 국제재단을 만든 인물이다. 그는 신의주에 30억달러를 투자하여 대형 정유공장과 유조선 부두 등을 건설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외국재단이 최초로 밝힌 이 거대한 투자계획에 양빈은 무척 고무됐다. 양빈은 초대형 벤츠로 나와 챠오성리가 리자화를 모시고 선양의 야경을 구경하게 하였다. 그 후 리씨는 9월23일 평양에서 거행된 양빈의 특구장관 선서의식에도 참석했다. 리자화의 투자구상에 따라 양빈은 북한측에 항구와 정유공장 용지 50㎢를 추가로 요구하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이런 연유로 인해 사흘째 회담은 항구선정 문제로 시작되었다. 양빈이 먼저 말문을 뗐다.

    “주단도를 결정할 수 있습니까? 부두는 특구에 너무나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주단도가 특구에 포함되지 않을 경우 항구는 반드시 심수항을 선택해야 합니다. 정유공장은 원유를 들여와야 하므로 유조선이 드나들어야 합니다. 항구는 반드시 만t급 이상 화물선이 정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특구에 중요할 뿐만 아니라 조선의 미래 경제발전에도 중대한 의의가 있습니다. 귀측의 화물도 드나들 수 있는 것입니다”

    “국제적인 부두는 우리에게도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김 사장이 이렇게 수긍하자 양빈은 한걸음 더 밀고 나갔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국제적인 투자 재벌그룹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그룹은 신의주에 30억달러를 투자하여 정유공장과 유조선 부두 및 후속 가공에 필요한 각종 화학공장을 건설할 계획입니다. 이 아이템은 우리 특구에 상당히 중요할 뿐만 아니라 조선의 에너지와 화공제품 공급에도 큰 역할을 하게 될 겁니다.”

    김 사장이 공감을 표했다.

    “아주 지당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아이템을 대단히 중시하고 또 지지할 것입니다.”

    “문제는 주단도가 결정되지 않아 항구를 다른 쪽으로 선택해야 하니 토지문제에 관련이 된다는 것입니다.”

    양빈의 이 말에 김 사장은 확실한 답을 주었다.

    “그건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곧 사람을 배치해서 새 항구가 들어설 지점을 선택하겠습니다. 그와 관련된 토지가 대략 얼마나 됩니까?”

    “50㎢입니다.”

    “돌아가서 최고 당국에 보고하여 해결하도록 하겠습니다. 국제적인 부두와 대형 정유공장은 우리에게도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후 우리는 북한 정부가 대계도(大鷄島) 부근 50㎢의 토지를 우리에게 주기로 하였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러니 원래의 82㎢에 50㎢를 합하여 신의주특구는 132㎢가 된 것이다.

    5월21일부터 23일까지 양측은 주로 기본합의서에 대하여 협상하였다. 북한측이 내놓은 기본합의서(토론용)는 모두 6장 54개 조항이었다. ‘조선 대외경제협력추진위원회’ 명의로 작성한 이 합의서의 상대측은 양빈의 ‘네덜란드유라시아무역공사’였다. 북한측의 법적 대표는 김용술이고 직책은 ‘경협회’ 위원장이었다.

    그런데 양빈 대표단이 내놓은 기본합의서 본문의 공식명칭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대외경제협력 촉진위원회와 네덜란드유라시아국제무역회사의 신의주 특별행정구 설립에 관한 기본합의서’ (초안)로 되어 있었다.

    5월22일 오후, 양측은 ‘합의서’의 큰 틀에 대하여 공감대를 형성하였다.

    합의서의 세부 사항에 관한 회담은 3월말부터 9월23일 최종 합의서에 조인하기까지 줄곧 진행되었다. 그러나 필자가 알건대 양측의 ‘기본합의서’ 회담은 ‘기본법’ 회담처럼 어렵고 길지 않았으며 비교적 순조로운 편이었다.

    양측은 회담에서 큰 틀을 다 짠 셈이었다. 양빈이 “김 장군님이 결재하게 합시다”란 한마디로 특구의 구역명칭 문제를 조선의 최고지도자에게 올려보냈고, 특구 장관이 삼권을 행사하는 부분에서도 큰 문제를 다 해결하였다. 동시에 특구의 땅도 50㎢나 더 얻어왔으니 제3차회담은 잘 끝났고, 특구의 미래를 위해 기반을 닦은 것이다. 다만 북한이 특구의 4개 요직, 즉 입법회 의장, 검찰장, 법원장과 경찰국장 직무를 북한측 인사가 담당할 것을 시종일관 주장하여서, 그것만은 다음번 회담 내용으로 남겨두었다. 이 문제는 그들 나름대로 파악한 게 있어 최소 2개 직위는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었다.

    5월24일은 북한 대표단이 선양에 체류하는 마지막 날이었다. 양측은 이미 달성한 합의결과에 따라 각자 수정한 기본법과 기본합의서를 정리하였다.

    북측, 중국에 ‘신의주’ 협조요청

    6월10일 챠오성리가 저명한 투자자 리자화와 함께 네덜란드촌을 방문하고 신의주특구에 정유공장과 유조선 부두를 건설할 아이템에 대해 구체적으로 상담하였다. 만찬 후 우리는 그들이 투숙한 별장으로 가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녁 10시30분 양빈이 전화를 걸어 나더러 그들을 모시고 자기가 거주하는 A9로 와 이야기하자고 하였다. 양빈은 우리를 만나자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어제(9일) 막 입수한 소식을 전했다. 그에 따르면 북한 외무성이 북한주재 중국대사를 만나고 싶다는 공식 통지를 보냈는데 마침 대사가 본국에 가 있어 대신 공사가 외무성으로 가서 한시간 반 동안 담화를 하였다는 것이다.

    담화내용은 세 가지로, 하나는 북한 정부가 평안북도 신의주에 특구 설립을 준비하는 데 중국측이 이를 이해하고 지지해달라는 것, 둘째는 네덜란드 국적의 중국인 유라시아그룹 총재 양빈씨가 조선의 농업현대화에 기여한 바 북한의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가 그를 알고 있는 점을 감안하여 그를 신의주특구 장관으로 임명한다는 것, 셋째는 중국내 양빈의 기업과 자금 및 개인의 안전을 중국 정부가 보장해줄 것을 희망한다는 것 등이다. 이에 대한 북한주재 중국공사의 대답은 돌아가서 즉시 본국정부에 보고하겠다는 것이었다.

    8월23일 오후 10시, 평양문화궁전 3층 회의실에서 제4차 회담이 열렸다.

    “법률문제는 여러분이 일치한 합의를 가져오기 바랍니다. 입법회 의장, 법원장, 경찰국장 임명문제는 아직 완전한 합의를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우리의 의견은 조선측이 추천하고 입법회가 임명하는 것입니다. 귀측은 외국인이 담임하게 하자는 주장이지요. 우리는 특구 장관 아래의 관원은 특구 거주민 혹은 내국인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국제 자본유치에 장애가 되지는 않겠지요? 특구의 총책임자가 외국인이니 입법, 법원, 경찰과 검찰을 우리 사람이 맡는다고 해서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유럽 사람, 싱가포르 사람이 이런 직무를 담임하면 경험은 있지만 현지실정을 모르기 때문에 관리를 할 수 없습니다. 홍콩과 마카오의 장관들 역시 현지 사람들 아닙니까? 이런 몇 가지 면을 고려해보면 그래도 우리가 추천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다른 시각이 있으면 제기해주십시오.”

    “투자자는 고양이와도 같다”

    북한 대표 김동규의 문제제기에 양빈이 대답하였다.

    “이 문제는 이미 수차 거론되었습니다. 목적은 바로 특구를 위한다는 한 가지입니다. 조선인으로 하여금 특구의 주요 직무를 담당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외국사람이 담임하게 함으로써 나진·선봉에서와 같은 그런 실패를 답습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목적은 외국인이 돈을 가지고 와서 투자하게 하는 것 아닙니까? 우리도 사실 부득이한 상황에서 이런 요구를 하는 것입니다. 외국투자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것이지요. 가령 경찰국장을 외국에서 청해오고 그 아래 직책을 조선사람이 맡게 한다면 그들도 특구가 조선의 여타 지방과는 다르다고 느끼게 될 것입니다.

    외국인이 이 몇 개의 주요 직무를 맡으면 국외에 좋은 이미지를 보여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기업은 이익을 추구하여 특구로 오는 것입니다. 특구가 그들의 욕망을 맞춰줘야 합니다. 투자자는 고양이와도 같아서 비린내를 맡아야 옵니다. 그런데 고기 겉에다 고춧가루를 쳐놓고 속에도 고춧가루를 넣어두면 고양이는 질겁하여 오지 않습니다.

    김 위원장님은 국외에 많이 다녀서 밖의 일을 잘 아시지요. 그러나 세계 인민은 조선의 실상을 알지 못하는 데다 적대세력들이 조선의 얼굴에 먹칠을 하여 일본과 미국의 투자자들이 감히 오지 못합니다. 누구를 그 벼슬자리에 앉히겠냐만 생각하지 맙시다. 요는 누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느냐 입니다. 사업을 하는 것 아닙니까? 5년 후 우리가 하는 것이 마땅치 않으면 조선측은 저의 직무를 해임할 수 있지 않습니까? 유리온실도 그렇지요. 우리가 먼저 시범으로 6㏊만 만들었는데 조선측은 지금 그 전력문제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어떻게 합니까? 전 종일 이 문제로 골머리를 앓습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양광온실입니다. 비로소 온실 채소재배문제가 해결된 것입니다.

    투자자는 흡사 시집가는 처녀와도 같아 시집가기 전에 조건을 내놓습니다. 그러나 일단 시집을 가서 신방에 들고 아이를 하나 낳으면 그만 매여서 달아나지 못합니다. 제가 선양에 투자를 많이 했습니다. 잘된 것이건 못된 것이건 저로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계속 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네덜란드촌을 메고 어디로 가겠습니까? 며느리를 맞아들이려면 처녀의 큰오빠가 어떤가, 작은오빠가 어떤가를 따지지 말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신부를 데려오는 것입니다.”

    허명규가 반론을 폈다.

    “외국 상인들은 기본법을 보고 투자하지 누가 장관인가를 보고 투자여부를 결정하지는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기본법이고 법률입니다. 투자환경의 핵심은 법률입니다. 우리는 기본법을 조속히 선포하기에 노력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과도기를 주시오”

    양빈이 다시 입을 열었다.

    “기본법에는 누가 장관을 맡는다는 점을 명기하지 맙시다. 저도 지금 조사연구를 하고 있는데 외국의 공안 법규는 조선의 것과 완전히 달라서 재산침해죄가 대부분입니다. 사람을 납치하고행패를 부려 시장을 독점하는 범죄는 흔히 회사 차원에서 저질러집니다. 이런 것들이 정부의 이익을 근본적으로 침해합니다. 지금 조선측 경찰은 이런 것들을 잘 알지 못합니다. 예를 들면 가짜 수표, 가짜 신용장, 은행금융사기죄 등입니다. 이런 복잡한 경제범죄 활동을 단속하려면 반드시 시장경제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특구에 와서 치안 요직을 담임하게 해야 합니다. 입법회는 쌍날칼입니다. 경찰국, 검찰원이 이런 쌍날칼을 쥐도록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쌍날칼을 잘 다루지 못하면 그 영향이 한 사람, 한 사건에 그치지 않고 특구 전반의 이미지에 미치고 특구의 미래발전에도 미칩니다.”

    양빈의 ‘고양이론’도 ‘시집가는 처녀’ 비유도 다 북한측을 움직이지 못하자 웡융시가 나섰다. 그는 시각을 바꾸어서 우리측의 견해를 풀었다.

    “우리에게 5년 내지 10년의 과도기를 줄 수 있습니까? 배구팀을 농구팀으로 고쳐 만드는 데는 시간이 걸립니다. 우리는 전세계에서 가장 효율이 높은 시스템이 무엇일까 하고 늘 생각을 해보는데 가장 전형적인 것은 해상의 기선입니다. 기선엔 단 한 명의 선장이 있을 뿐입니다. 기사나 기관장은 모두 선장의 지휘에 복종해야 합니다. 그것은 권력이 최고도로 집중된 일원적인 지도체계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기사가 일등항해사의 말을 듣고 기관장은 이등 항해사의 말을 들으면 배는 전진하지 못합니다. 사고를 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지요!

    다시 경찰국장의 예를 들어봅시다. 그가 상대하는 것은 전세계에서 가장 개방된 자유무역구입니다. 국제적인 마약밀수조직과 깡패조직, 경제사기 집단, 컴퓨터 범죄집단…이들을 두고 세계 여러 나라의 정부와 경찰국이 골머리를 앓고 있습니다. 우리의 국장이 이런 시끄러운 문제들을 다스리려면 경험이 풍부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국외에서 초빙해오는 것이 그 한 방법입니다. 하지만 역시 위험은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일을 전부 하급관리가 취급하게 하는 것 역시 극히 위험한 것입니다. 다른 장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에게 과도기를 주어서 한동안 우리가 그 일에 익숙한 사람들을 선임해 쓰게 하는 것이 가장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 면의 법률을 익숙히 알고 능력이 있으며 됨됨이가 성실한 사람을 선임하자는 것입니다.

    양빈씨가 할 일은 국장들이 자기의 직무를 충실히 집행하게 하는 것이고 하나는 하루 빨리 조선측 사람들을 양성하여 대체하게 하는 것입니다.”

    ‘개방’과 ‘보수’ 사이에 낀 북한대표

    웡씨는 사실 중간노선을 걷는 것이었다. 한쪽으로는 양빈이 마음놓고 일하게 하면서 다른 한쪽으로는 북한 사람들을 양성해 후일 대체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건의도 북한 사람들의 불만을 잠재우지 못했다. 허명규가 불만을 토했다.

    “웡 선생님의 말씀은 우리 조선사람들에게 그런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까?”

    오해를 해소할 의향에서 웡씨는 진일보의 해석을 했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저의 말은 경찰국장만이 아니라 신의주의 간부들이 모두 그런 전환과정이 필요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전 50년간 익숙해진 경험에서 익숙하지 못한 사업으로 전환해야 하는데 거기에 시간이 소요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조선측이 우리 특구에 과도기를 주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조선은 일부 경험 있는 사람을 선정해서 다른 국의 국장을 담임시킬 수도 있습니다. 사실은 저도 과거 이런 일을 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적응하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북한 대표단의 계승해 부위원장이 계속하여 말하였다.

    “우리도 좋은 모델을 만들고자 합니다. 귀측의 입장에서 고려해봤는데 귀측의 의견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신의주에 특구를 설립한다고 하니 깜짝 놀라는 사람이 많습니다. 세계 다른 나라의 반응도 들어 보았습니다. 당신들 중국의 특구에 외국사람이 장관을 합니까? 우리 김 장군님은 양빈씨를 믿고 신의주특구의 장관을 담임하게 하십니다. 그런 만큼 당신들도 우리 체면을 봐줘야 할 것 아닙니까? 법률을 선포할 때 특구장관과 주요한 관원이 다 외국인임을 알게 되면 조선사람들이 우리를 얼마나 조소하겠습니까! 때문에 우리는 입법, 사법, 경찰, 검찰은 반드시 조선 사람이 담임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계 부위원장의 말은 북한측 대표단의 공통된 생각을 대변한 것이었다. 그들은 김정일의 명을 받아 국문(國門)을 열고, 특구를 설립하고 개방정책을 시행하여 점차 국제사회와 접목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대표단의 구성원, 특히 주요 성원의 면면을 보면 모두가 50세 전후로 폐쇄적인 북한에서 50년을 살면서 주체사상에 따라 일해온 탓에 무슨 일에서나 그 흔적이 드러났다. 특구 설립에 대한 북한내의 다양한 견해는 그들에게 무형의 압력이 되었다. 그 때문에 ‘개방’과 ‘보수’ 사이에서 조심스럽게 평형을 잡아야 했다. 이 점이 바로 북한측 대표단 성원들의 심리상태였다.

    양빈의 간절한 호소

    6월24일,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논쟁이 벌어졌다. 북한측 대표 허명규가 포문을 열었다.

    “기본법의 순서에 따라 토론하겠습니다. 1장과 2장은 이미 통과되었습니다. 양 총재님께서 이미 토론된 부분에 대해선 지지해주시고 더 변동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검찰장은 조선측이 추천하여 특구 행정장관이 임명하는 것으로 합시다.”

    그에 대해 둥롄파가 의문을 제기했다.

    “전에 조선측은 입법회가 임명하게 하자고 하지 않았습니까?”

    허명규는 딱 잘라 말하였다.

    “의장과 법원장은 입법회가 결정합니다. 검찰장은 특구 장관이 임명합니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지시입니다. 당신들도 이전에 이미 동의하였던 바지요. 경찰국장은 누가 임명하게 하겠습니까?”

    이때 양빈이 급히 나서서 그의 말을 차단하였다.

    “4개 직무의 배치문제는 잠시 덮어놓고 다시 기본법 순서로 돌아갑시다.”

    그러나 허명규는 물러서지 않았다.

    “우리는 귀측의 토론안에 비추어 말하는데 그 안에 아직 경찰국장이 결정되지 않았습니다. 의장과 법원장은 입법회에서 임명하게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양빈의 대답은 이러했다.

    “제1기 입법회가 가장 중요합니다. 그것은 자유 개방사회의 교과서와도 같아서 외국인들이 눈을 부릅뜨고 볼 겁니다. 때문에 의장은 외국인이 담임하는 것이 좋습니다. 입법회 성원 3분의 1은 조선측이 임명하고, 3분의 1은 장관이 임명하며 나머지 3분의 1은 제1기 입법회가 저의 추천에 따라 임명하여 도합 15명으로 합시다. 거주민의 선거는 제2기부터 실시합시다. 선거는 아무래도 입법회 설립 후에 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특구 설립의 전단계는 모든 것이 다 금방 시작되어 시어머니가 하나만 있어도 저는 매일 설명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어떻게 외자유치를 하고 또 사업을 합니까? 물론 특구도 커질 수 없습니다.”

    “입법회 의원들도 특구를 위해 봉사하는 만큼 다른 목적이 있을 수 없습니다.”

    양빈은 허명규의 해석에 아랑곳않고 이렇게 말했다.

    “중국은 홍콩을 회수하면서 한 사람도 파견하지 않았습니다. 그 목적은 외자기업과 자금의 외부 유실을 방지하고 투자자들이 마음을 놓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특구가 일단 가동되면 필연적으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간의 모순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흡사 2명의 농구선수와 3명의 배구선수로 구성된 팀과 같아 이기기는커녕 경기 전에 팀이 먼저 혼란해집니다. 우리 의견을 정리하여 김 장군님에게 보고드릴 수 없습니까? 장군님이 결정하시게 합시다. 우리는 장군님이 지시하시는 대로 집행하겠습니다.”

    김동규는 동의하지 않았다.

    “우리는 견해 일치를 달성해서 김 장군님에게 보고드릴 것을 희망합니다.”

    김동규의 말에서 그들의 주장이 김정일의 의사가 아님을 알아챈 양빈은 즉시 말을 이었다.

    “저는 특구를 창설함에 있어 마음놓고 일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저의 수족을 옥죄는 건 융통성이 없는 방법입니다. 최선의 방법은 네 개의 요직에 모두 외국인을 임명하고 규칙에 따라 운영하는 것입니다.”

    허명구는 여전히 양보하지 않았다.

    “지난 선양회담에서 입법회 성원 15명 중 조선측 8명, 양 총재측 7명으로 하자고 합의하지 않았습니까? 당시 저는 분명 둥젠화 홍콩특구 장관은 입법회를 관장하지 않는데 양 총재는 삼권을 쥐니 걱정이 뭐냐고까지 하였습니다. 입법회 가결권과 거부권이 다 특구 장관의 손에 쥐어져 있습니다. 외국사람들은 아마 특구장관의 권력이 미국 대통령보다도 더 크다고 생각할 겁니다.”

    양빈은 이렇게 자기의 심경을 토로하였다.

    “저는 굉장히 모순을 느낍니다. 저는 진심으로 신의주특구를 잘 건설하고자 합니다. 여러분이 보시다시피 전 신의주특구 건설을 위해 이전에 사구특구 건설을 진두에서 지휘한 1인자 챠오성리 선생님까지 모셔왔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의사에 따르겠습니다. 두 가지 제도, 두 가지 방법인데 어떻게 할 것입니까? 조선측이 제게 일정한 과도기를 주기 바랍니다. 우린 사귄 지 수개월이고 이미 친구가 되었습니다. 김 장군님이 저에게 이렇게 막중한 짐을 지워주셨기 때문에 저는 잘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되는 대로 생각해서 할 일이 아닙니다. 반드시 이렇게 해야 합니다.”

    “초기 단계의 과도기에는 특구 장관에게 반드시 권리가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집중되어야 합니다. 그 권력이 없으면 안 됩니다.”

    김동규가 한 위안의 말이었다.

    “제1기 입법회에선 거주민이 선거할 의원을 장관이 임명하게 합시다. 단 한기만 말입니다.”

    양빈의 간곡한 이야기에 김동규는 분위기를 완화시키려는 듯 웃는 얼굴로 마닝을 보며 물었다.

    “마 선생님은 어떤 생각이십니까?”

    허명규도 농조로 한마디 끼였다. “우리 중앙이 마 총재님을 추천할 수도 있습니다.”

    양빈이 계속 자기 주장을 폈다.

    “우리가 3명을 추천합시다.”

    김동규는 곤경에서 벗어나려 듯 이렇게 말했다.

    “우리 모두의 최종 목적은 하나입니다. 모두 하나의 배를 타고 특구를 잘 만들자는 것 아닙니까? 우리 모두 신의주를 세상에서 제일 좋은 특구로 건설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니 서로 다투지 맙시다. 일방의 이익을 위해 다투지 맙시다. 김 장군님이 양 총재님을 믿으시니 양 총재님은 과업을 꼭 수행해야 합니다.“

    세금 문제 둘러싸고 격론

    6월26일, 이날은 제4차 회담의 마지막 하루다.

    회담은 여전히 평양문화궁전 3층에서 진행되었다. 내가 세어보니 북한측 참석대표는 13명이었다. 김 사장이 화제를 회담의 본론으로 끌어갔다.

    “기본합의서에 대하여 다른 큰 문제는 없는 것 같은데 양 총재님께서 별도로 보충할 것이 없는지요?”

    “세무문제가 있습니다.”

    양빈의 대답이었다. 챠오성리가 그 문제를 언급하였다.

    “특구 경제건설과 발전에는 두 가지 차원의 정책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는 조선 정부가 신의주에 대해 실시하는 큰 정책이고 다른 하나는 신의주특구 정부가 외자유치를 위해 펴는 특별 정책입니다. 주변의 문제들이 잘 풀린다면 바로 이 두 가지 문제가 남을 것입니다.

    홍콩의 경우 외자유치 여건이 아주 좋습니다. 하나는 경제가 고차원으로 발달했고 다른 하나는 정부사업에 경험이 구비된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홍콩의 지속적인 발전을 담보한 원인이었습니다. 홍콩은 영국사람들이 하던 방법대로 세금 종류를 간소화하고 세금 징수를 가볍게 하였습니다. 다만 한 가지 소득세뿐인데 세율이 15%입니다. 전세계 상인들을 홍콩으로 끌어들여 투자를 하게 하는 데 아주 효과적이었습니다. 투자환경도 좋고 결제 효율도 높습니다. 그래서 투자자들이 홍콩을 세계의 일류로 보는 것입니다.

    신의주특구는 장차 세계 각지의 좋은 방법들을 다 배워오고 가장 우수한 인재와 관리를 영입해야 합니다. 신의주특구의 세율은 홍콩 수준보다 높아서는 안 됩니다. 세금 종류도 많으면 좋지 않습니다. 더욱이 특구정부 설립 10년 내에는 과세를 과중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특구의 외자유치는 물론 특구의 건설과 발전에 불리합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조선 정부가 특구 세금징수에 별도의 배려를 해주었으면 해서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성공하기가 극히 힘듭니다.”

    이에 허명규가 “특구 세율을 15%로 정한단 말씀입니까?” 하고 물으니 챠오성리는 “10%가 가장 좋습니다”고 대답했다.

    “여러분의 의견을 중앙에 보고하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특구의 세율을 14%로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러시아는 35%거든요.”

    허명규가 자기 주장을 말하니 챠오성리는 재차 해석을 가하였다.

    “중국의 소득세는 3%입니다. 선전특구는 1%고요. 적은 세수 낮은 세율은 바로 물을 넣어주어 고기를 키우는 정책과 같습니다. 중국이 개혁개방 과정에서 펼친 이런 방수양어(放水養魚) 정책은 이미 효과적인 것으로 증명이 되었습니다. 특구 내의 모든 기업이 세금징수의 원천입니다. 저세율로 기업이 급성장하면 세금 징수의 원천이 확대됩니다.”

    북한 대외경제협력추진위원회 김용술 위원장이 발언하였다.

    “이익이 산출되는 때부터 세금을 징수하기로 하고 첫 10년간 기업의 소득세를 징수하지 않기로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특구는 감세정책을 쓸 수도 있습니다. 유치한 하이테크 기업에 세수 우대를 해주고 특구에 기여한 기업에는 4년 면제, 3년간 절반 감면하는 식입니다. 그러나 낙후한 기업에는 감세나 면세 혜택을 주지 않습니다.”

    허명규가 한마디 거들었다.

    “특구 활성화를 위해서 세금징수 문제는 재토론할 수 있습니다. 오늘 안건은 국가의 대외국투자자 세금 이윤법 문제입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양빈이 대답하였다.

    “하이테크 기업은 10%, 기타 기업은 14%로 합시다. 이만하면 낮은 것이지요. 공농업세는 3~5%에서 결정돼야지 더 높으면 안됩니다. 교역세와 영업세를 지방에 주는 것은 지방 재정을 유지하는 상례적인 방법입니다. 그렇게 해서 재정을 보장하는 것이죠.”

    그러자 허명규가 “이 문제는 입법회에서 토의합시다” 라고 하였다.

    20만 신의주 주민의 생활대책

    양빈이 말했다.

    “외국 상인이 신의주특구에 오는 데는 세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첫째, 기반시설입니다. 우선은 중국 단둥의 전기, 물, 열에너지와 통신시설을 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단기 혹은 일정 시기 동안만 단둥에 의지할 수 있으므로 반드시 자신의 것을 건설해야 합니다. 통신건설만 해도 2~3년이 걸립니다. 수백만 달러를 써서 가장 간단한 통신망을 만들어 쓸 수도 있습니다. 전체적으로는 총 1000만달러가 필요할 것인데, 기반시설 투자는 우선적으로 집행해야 합니다. 땅을 팔아서라도 총체적 기획에 들어가는 자금은 먼저 써야 합니다.

    둘째, 신의주 홍수방지 시설입니다. 투자자의 투자 모험과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토지가 홍수에 잠기지 않도록 국부적 홍수방지 시설을 만들어야 합니다. 또한 특구 설립 후 첫 2년은 거액의 자금을 들여 소독도 해야 합니다.

    셋째, 임시 운송통로 구축문제입니다. 단둥에서 신의주까지는 배가 연속 운행할 수 있는 부두를 건설해야 합니다. 이 일은 이미 단둥측과 협의가 되었습니다. 중조(中朝)대교도 3년이 걸려야 준공할 수 있습니다. 그때까지는 어떻게 강을 건넙니까? 이런 것은 모두 자금을 조달해서 풀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외자유치는 다 거짓말이 됩니다.”

    양빈이 말을 이었다.

    “20여만 조선 인민의 생활문제는 어떻게 합니까? 특구 건설 공사가 시작되면 조선 기업이 생산활동을 중지해야 하는데 신의주의 4만여 가정이 어떻게 삽니까? 한 가지 방법이 있는데, 특구에 2만개의 양광온실을 짓는 것입니다. 인민들이 거기에 야채를 심어 특구에 공급하게 하고 단둥에 수출하여도 됩니다. 이런 방법으로 1년에 2500달러를 벌 수 있습니다. 임대나 도급 방식을 채용할 수도 있습니다. 20여만 신의주 인민의 먹고 입고 자는 문제를 해결해줘서 그들을 안정시켜야 합니다. 조선군대를 동원해 온실을 지을 수도 있습니다. 생산물의 판매는 유라시아 회사가 도울 수 있습니다. 관건은 20여만 신의주 인민의 경제적 안정, 치안과 생활입니다.”

    김동규가 양빈의 말을 받았다.

    “양 장관은 김 장군님이 임명했으니 우리는 전적으로 지지할 것입니다. 우리가 다 한 집안이고 목적도 특구를 잘 꾸리는 한 가지란 걸 믿으십시오. 기본법과 합의서의 주요한 부분에 대해선 이미 상호 일치를 달성하였습니다. 어떤 문제는 아직 통일이 안 됐는데 계속 협상할 수 있습니다. 일부 우리의 권한을 초월하는 문제는 최고회의에 보고하겠습니다. 머지않아 우리가 다시 선양에 갈 때 여러분이 흡족한 결과에 만족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양빈 둘러싼 무성한 소문

    양빈은 네덜란드촌 건설을 정돈하는 일로 매일 분주히 보냈다. 그 즈음에 ‘네덜란드촌 건설이 중단됐다’ ‘양빈이 북한투자를 위해 자금을 이전한다’는 등의 소문이 무성했기 때문에 네덜란드촌 건설을 더 이상 내버려둘 수 없었다.

    소문이 점점 심하게 번지면서 선양시와 랴오닝성 정부 간부들까지 “도대체 어찌된 일이냐?”며 전화를 걸어왔다. 그런 질문에 양빈은 최대한의 인내심을 갖고 해명했다. 해명이란 듣기 좋은 말이고 그건 말 그대로 고역이었다. “있는 돈을 다 네덜란드촌에 쏟아부었는데 어찌 그걸 다 짊어지고 간단 말이요? 친구들, 왜 나를 못믿어?” 양빈은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이제 다른 해명은 필요없었다. 행동으로 그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양빈의 자금은 이미 바닥이 드러난 상태였고 더 지탱할 여력이 없었다.

    건축회사에 나머지 공사비도 지불해야 했다. 비율로 따지면 체불 공사비가 전체의 30% 정도였으니 많은 것은 아니었다. 중국에서 건축시공 공사비를 70% 지불할 수 있는 실력이면 대단한 기업이다. 그런데 유라시아그룹 종업원들의 2개월치 노임을 지급하지 못한 것이 문제를 크게 만들었다.

    신의주특구 노리는 사람들

    헤이그호텔의 종업원은 대부분 현지 농민들이었고 운수대의 운전기사는 상당수가 선양 시민이었다. 이들의 노임을 체불했으니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소문은 하나 둘 입을 거쳐 네덜란드촌과 선양시에 전염병처럼 퍼졌다.

    불리한 소식이 또 있었다. 그것은 대만의 류타이잉(劉泰英)과 마하티르 말레이시아 총리의 아들이 신의주특구에 끼어 들려고 북한측과 접촉하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것인가? 신의주특구 프로젝트를 위해 그동안 기울인 노력이 다 수포로 돌아간단 말인가? 양빈의 고문들은 ‘북한측 대표단’의 상당수가 북한 정부의 주요 관원들이고 또 지난 몇 개월의 접촉으로 봐서 인간성이나 일처리가 정직해 보였으며 어중이 떠중이 같이 신용을 버리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는 긍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9월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 54주년 맞이 국경연회가 열렸다. 양빈 일행도 초대됐다. 평양에 온 양빈 대표단 가운데 다른 일 때문에 베이징으로 돌아가야 했던 웡융시는 국경연회에 북한주재 중국대사가 꼭 참석할 것이라고 하면서 양빈에게 “중국대사를 만나면 북한의 신의주특구 건설계획을 설명하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양빈을 특구 장관으로 임명할 예정이므로 대사께서 중국 정부에 이 사실을 전달하고 전반적인 지지를 해줄 것을 부탁하라”는 당부를 했다.

    양빈이 국경연회를 마치고 돌아오자 마닝 등은 그에게 “중국대사님을 만났습니까?”라고 물었다. 양빈은 북한주재 중국대사가 마침 베이징 출장중이어서 연회에 참석하지 못했으며 대신 북한주재 중국공사가 참석했고 장진팡(張錦芳), 자오자밍(趙嘉明) 등 중국 신화통신과 인민일보 기자들이 참석했다고 말했다.

    드디어 기본합의서 체결

    양빈은 중국공사와 만난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사람들로 북적대는 연회장에서 중국공사를 어렵게 찾았다. 공사 앞에 다가선 그는 자기소개를 했다. 공사가 ‘나는 당신을 알고 있다. TV에서 봤다. 당신이 홍콩의 봉황TV방송국 쩡즈모 기자와 가진 인터뷰가 TV를 통해 40분 정도 방송된 적이 있다’고 했다.

    양빈은 공사에게 북한의 신의주특구 건설계획을 간단히 설명하고, 자신이 특구장관으로 내정되었으니 중국정부의 지지를 희망한다며 그 뜻을 중국정부에 전달해줄 것을 부탁했다.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무위원회가 ‘신의주 특별행정구 기본법’을 통과시킨 것은 9월12일이었지만 양빈이 정식통고를 받은 것은 9월18일이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9월13일부터 17일까지 양빈과 그의 고문들은 모란봉에서 한담으로 시간을 보내며 기본법이 통과되기만을 애타게 기다렸다.

    9월18일 북한측에서 양빈에게 ‘신의주 특별행정구 기본법’이 통과되었음을 통고했다. 양빈의 큰 웃음소리가 방안을 채웠고 그의 두 눈은 오랜만에 웃음으로 실눈이 됐다. 며칠 후 북한측은 양빈과 합의서를 체결하고, 양빈은 북한 최고인민회의에서 ‘특별행정구 장관’ 취임선서를 하기로 했다.

    양빈이 드디어 신의주특구 장관에 임명되었다. 1년이 넘는 기간동안 쏟아부은 심혈은 얼마이며 밧줄타기 같은 도박에 마음고생은 또 얼마였던가. 결코 짧다고만 볼 수 없는 1년여의 시간이었다. ‘고아에서 장관이’ 되기까지 30여년의 기나긴 세월이 걸린 승부였다. 양빈은 지금 이 순간 자신이 내기에서 이겼다고 생각했다. 이 순간만은 모든 것을 잊고 싶었고 자신이 특구장관이라는 사실만 기억하고 싶었다.

    그날 밤, 양빈은 만취해서 방으로 돌아왔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네덜란드에 있는 부인 판차오룽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양빈이야…당신 남편, 신의주 장관이 됐어!”

    그리고 그녀에게 애들을 데리고 평양에 오라고 했다. 그날 밤, 그의 기억은 여기까지가 전부였다.

    9월23일 북한 정부는 신의주를 특별행정구로 지정하고 개방정책을 실행할 것임을 공식 발표했다. 이날 북한측은 신의주 특별행정구에 관한 ‘신문공고’를 처음으로 외신기자들에게 발포했다. 북한측 대표단과 양빈의 고문들이 공동 제정한 ‘신문공고’는 외신기자들을 통해 순식간에 세계 각지에 전해졌다.

    오후 5시 정각, ‘기본합의서’ 조인식이 인민문화궁전 2층 소회의실에서 거행됐다. 양빈은 유라시아무역회사를, 김용술은 북한 대외경제촉진위원회를 대표해 합의서에 각각 사인했다.

    5시30분, 북한의 경제관료 출신 조창덕(趙昌德) 부총리가 인민문화궁전 회의실에서 양빈 등을 접견했다. 취재기자로 그 자리를 지켜봤던 홍콩 봉황위성TV의 쩡즈모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적었다.

    “양빈은 평소 즐겨 입는 흰색 캐주얼 T셔츠를 벗고 검은색 양복으로 갈아 입었으며 검은색 구두에 흰 양말을 맞춰 신었다. 양빈과 그 수행원들은 2000여만 북한 인민과 마찬가지로 빨간색 수령 배지를 가슴에 달고 있었다. 신의주가 아무리 철저한 자본주의를 시행한다 해도 빨간색 수령 배지는 이 곳이 여전히 사회주의 국가이며 주체사상을 지도방침으로 하는 북한이라는 사실을 깨우쳐주고 있었다.”

    클라이맥스에서 막내린 ‘양빈 신화’ 내막

    기본합의서 조인식에 참석한 양측 대표들. 앞줄 왼쪽이 양빈, 오른쪽이 김용술 북한대외경제협력추진위 위원장.

    9월24일 신의주 특별행정구 장관 취임선서식이 평양 만수대 의사당에서 거행되기로 결정됐다.

    취임선서식에 참석한 양빈의 법률고문 둥롄파 교수는 그날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9월24일 오후 5시경 우리는 양빈을 따라 만수대 의사당에 도착하여 귀빈실에서 잠깐 휴식하였다. 그때 북한 예빈관이 우리에게 취임식의 절차를 간단히 알려줬다. 정각 6시 선서의식이 시작됐다. 예빈관은 양빈, 마닝, 나, 리자화, 왕뤄, 리강, 스쥔, 볜서우제 순으로 회의실로 안내했다.

    조선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 김영남은 이미 좌정하고 입장하는 우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오른쪽으로 부위원장 양형섭(楊亨燮), 부위원장 김영대(金英大), 비서실장 김윤화(金潤華) 및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들이 앉아 있었다. 양빈 일행은 김영남(金永南) 위원장 및 기타 위원들과 차례로 악수를 하고 김영남 위원장의 좌측에 나란히 줄지어 섰다.”

    예빈관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신의주 특별행정구 장관 취임선서식 시작을 선포했다. 먼저 조선최고인민회의 위원장 김영남이 신의주 특별행정구 장관에게 임명서를 수여한 뒤 자리에서 일어나 북한 정부의 정령(政令)을 발표하고 북한 최고인민회의는 양빈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특별행정구 장관으로 임명함을 공식 발표했다. 이어 김영남이 양빈에게 임명서와 특구장관 직무증명서를 발급했다.

    양빈은 임명서와 직무증명서를 옆에 있던 통역 김호에게 넘겨주고 김영남의 맞은편으로 걸어가 마이크를 잡고 취임선서를 시작했다.

    “저는 선서합니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장군님을 따를 것이며, 어떤 시련이 덮친다 해도 장군님의 아들과 전사가 되겠습니다. 저의 자손만대는 조선과 생사존망을 같이 하겠습니다.”

    선서가 끝나자 양빈은 북한 최고인민회의 위원장, 부위원장, 상임위원들과 차례로 악수했다. 9월25일 양빈과 그 일행은 예정대로 전용기를 타고 선양에 돌아왔다. 이로써 양빈 신화는 막을 내리기 직전에 희극적인 클라이맥스를 연출했다.

    9월27일과 28일, 양빈 대표단 일행이 전국 각지에서 네덜란드촌에 모여들었다.

    9월29일 오전 9시, 우리는 네덜란드촌 여왕궁전 유라시아그룹 총본부 대청에 잇따라 들어섰다. 2층 대청 및 두 칸의 회의실은 국내외 기자들로 북적였다. 나와 둥롄파, 왕뤄 등은 사람들 틈을 비집고 가는데 안면 있는 외국 기자들이 내게 아는 체하며 무슨 소식이 없냐고 물었다. 양빈이 입을 열어 다음과 같은 요지의 말을 했다.

    “오늘 우리는 신의주특구 준비위원회 제1차 회의를 개최한다. 나는 선장이며, 선장은 오직 김 장군이 선택한 나 하나 뿐이다. 회의는 주로 조직구도를 연구하고 오늘 끝내려 하니 모두의 지혜를 모았으면 한다.

    나는 정치를 해본 적이 없다. 여러분의 도움을 바란다. 먼저 우리의 원칙을 말하겠다.

    첫째, 조선을 사랑해야 한다. 조선이 없으면 신의주특구가 없을 것이므로 중국과 조선 양국 인민을 평등하게 대우해야 한다. 둘째, 김 장군님을 열애해야 한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북한은 폐쇄적인 역사를 이어왔다. 대외의 거대한 압력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견지해오기는 쉽지 않다. 셋째, 반드시 능률적이고 청렴한 정부를 만들어야 한다.

    신의주특구를 위해 유라시아농업 상장 회사를 포함한 나 개인의 손실을 따지지 않겠다. 네덜란드촌도 위탁관리를 하겠다. 아내가 반대한다면 이혼할 수도 있다. 나는 평생 작은 이익에 연연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4월 선양에서 주기로 한 6억위안의 대부금을 안 주겠다고 할 뿐만 아니라 이미 받은 대출금까지 회수하려 하지만 나는 오늘까지 버텨왔다. 앞으로 어떤 난관이 있어도 이를 악물고 버틸 것이다.

    중국의 국가이익과 중국인민의 이익을 수호한다. 중국은 내 본가이고 조선은 처가라 할 수 있다. 잘산다고 해서 본가를 잊어서는 안 된다. 중국에 미안한 일을 해서는 절대 안 된다. 어머니가 아들을 오해하고 매를 쳤다고 해도 그건 아들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기 때문에 원망해서는 안 된다. 중국정부와의 문제는 합리적으로 해결하겠다. 누구도 이 원칙을 위반해서는 안 된다. 이 점은 공무원 준칙에 써넣겠다.

    특구정부 기구로 장관 산하에 사무청을 설치하고, 재정금융국 세무국 경제국 등 15개국을 두며 향후 필요하면 더 설치한다.

    그리고 둥롄파를 입법회 의장으로 임명한다. 앞으로 입법회를 통해 선거하겠지만 이번 임명은 조선측도 승인했다. 웡융시를 특구장관 보좌관으로 임명할 것을 제의한다.

    마닝을 특구 건설총회사 사장으로 임명하며 자본유치와 토지경매를 책임지운다. 오늘 저우젠핑(周建平)이라고 하는 또 한 명의 친구가 왔다. 원래 상장회사 사장이었다. 그는 마닝 수하에서 조수로 일하게 된다. 우리 모두의 밥 먹는 문제는 건설총회사에 달려 있다.

    10월25일 특구장관 취임식을 가질 것이며 신의주의 압록강호텔을 임시정부로 하고 그 곳에서 내각을 조직한다.

    아직 건설계획이 확정되지 않았으므로 10월중에는 건설작업이 없을 것이다. 하늘이 준 이 겨울 시간을 이용해 자금유치에 나설 수 있지 않은가. 중국의 단둥, 선양, 광저우, 다롄, 시안, 충칭, 상하이 등 지역에 자금유치사무소를 설치하고 위탁제로 운영할 생각이다. 또 일본의 도쿄, 한국의 서울, 미국의 동서부, 홍콩, 대만, 동남아 등 지역에도 자금유치사무소를 설립할 것이다. 내달에 시행에 들어가며 마닝이 책임지고 추진한다.

    나는 10월2일 신의주로 출발한다. 조선측이 현지 주민들을 동원해 성대한 환영행사를 하기로 했다. 10월7일 웡융시 선생과 마닝 선생이 나와 동행해 한국에 간다. 김대중 대통령과 면담을 가질 것이며 한국에서 다시 일본으로 갈 예정이다.”

    양빈, 전격 체포되다

    이처럼 특구의 정부기구와 이를 이끌 간부진 인선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됐지만, 우리 귀에는 이상한 소문이 들리기 시작했다.

    10월1일은 중국의 국경절이다. 나와 왕뤄, 양다융 변호사 등은 아침식사를 하기 위해 네덜란드촌에서 보내온 산타나를 타고 헤이그호텔로 향했다. 우리가 머무는 별장에서 헤이그호텔까지는 불과 1000m 정도의 거리다. 차가 호텔을 향한 도로입구에 들어서는데 경찰차량 한 대가 어디선가 나오더니 ‘검사’를 해야겠다며 우리 앞을 막아섰다. 그러나 경찰은 차 안을 들여다 볼 뿐 우리더러 내리라는 말은 안하고 운전기사에게 승용차 트렁크를 열게 하더니 쓱 훑어보곤 그냥 가라고 했다.

    호텔 음식점에 도착해 자리에 앉은 지 얼마 안 되어 챠오성리, 마닝, 왕후이둥 등이 따라 들어왔다.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일을 겪었음은 두말 할 것도 없다. 모두들 경찰의 ‘검사’에 대해 얘기를 했다.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그 자리에 모인 양빈의 고문들은 아무도 그 연유를 정확히 해석하지 못했다.

    10월2일 네덜란드촌에 경찰차량이 부쩍 늘었다. 네덜란드촌에서 밖으로 나가는 모든 차량은 반드시 검사를 받아야 했다. 10월3일이 되자 경찰차량이 더욱 늘었다. 양빈의 A9별장은 거의 포위된 상태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내가 신의주특구 장관이니까 급별로 따지면 조선 부총리급이니 경찰이 보호조치를 취하는 것은 당연하지…” 양빈이 모두를 위안하려는 듯 나름대로 해석했다.

    기자들의 질문에도 양빈의 대답은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그도 마음속으로 불안을 느끼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줄곧 그의 곁에 있었다. 친구나 기자를 만날 때 그의 눈빛과 표정, 목소리에는 긴장이 묻어 있었다. 양빈은 마닝, 웡융시, 왕후이둥에게 어찌된 일일까를 물어봤지만 그들은 “아니겠지” “지금 당신은 특구장관이니까!”라는 말만 할 뿐이었다. 그러나 마닝이나 웡융시, 왕후이둥 등은 양빈의 네덜란드촌과 농업 상장회사에서 발생한 일들을 모르고 있었다.

    당시 북한정부 관리 한명철씨도 양빈의 별장에 머물러 있으면서 선양 주재 북한영사관 총영사 및 평양측과 연락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양빈이 기업가 또는 친구를 만나거나 기자들의 인터뷰에 응하는 등의 활동에는 절대 참여하지 않았다.

    양빈이 9월27일 신문발표회에서 ‘9월30일부터 외국기자는 신의주특구에 무비자로 입국할 수 있다’고 분명히 밝혔으나 그것이 현실화되지 못하자 기자들이 이에 반발했다. 특히 세계적으로 유명한 신문 잡지 텔레비전방송 기자들이 네덜란드촌에 운집해 10월3일 하루종일 북적였다. 양빈은 별장에서 미국 영국 일본 한국과 홍콩 등 내외신 기자들과 따로따로 인터뷰했다.

    김 사장은 과거에 나진·선봉지역에서 경제특구를 실시해본 적이 있지만 그리 성공한 편은 아니라고 일러주었다. 그러면서 중국에서 자라고 서방교육을 받았으며, 다시 중국으로 돌아와 무역으로 성공한 사업가에게 이 작은 경제무역구의 정권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나진·선봉지역의 북한 관리보다 더 많은 권력을 주겠으며, 토지는 양빈 개인이 지배하고 거기에서 나는 이익은 양빈이 북한에 투자한 농업사업에 대한 보답으로 여기겠다는 것이었다. 기업과 자본금을 유치하는 일을 비롯해 모든 일을 그에게 맡기고 심지어 얼마간의 자본주의를 실행해도 괜찮으며 국제적으로 유행하는 ‘시장경제’를 실험해봐도 무방하다는 이야기였다.

    “양빈 총재, 지금 대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결심이 서면 저에게 일러 주십시오. 그러나 한번 대답하면 꼭 성공해야 합니다. 나진·선봉지구보다 훨씬 더 잘해야 됩니다.”

    양빈은 김 사장을 보낸 후, 혼자 앉아서 담배를 피웠다. 생각에 잠길 때면 그는 담배를 피곤 했다.

    다음날 양빈은 김 사장에게 북한 정부가 자신을 믿어주는 것과 김 장군의 두터운 사랑에 감사를 표시했다. 그는 북한 정부가 그에게 설립권을 보장해준 신의주 경제무역구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나진·선봉지구보다 잘하겠다고 결심했다.

    “달러를 뭉치로 털어놓게 만들겠다”

    다음날 양빈은 김동규 사장과 외무성, 무역성 관리들의 안내로 신의주를 답사했다. 북한측이 제공한 27㎢의 경제무역구는 압록강대교와 중국 세관에서 비교적 멀리 떨어져 있었고 교통도 아주 불편했다. 항구와 비행장이 없어서 국제 투자유치와 건설에 어려운 점이 매우 많았다.

    1차 답사를 마친 양빈은 북한측에 27㎢의 무역구는 반드시 새로 계획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국제표준에 의거해 건설해야만 외국기업을 유치할 수 있다고 일러주었다. 27㎢로는 각종 도로와 기초시설을 건설하고 나면 외국기업가에게 제공할 땅이 없으며, 국제적인 오피스텔을 건설하기는 더욱 힘들다고 말했다.

    “외국기업가들과 전문가들이 먹고 마시고 싸고 자는 곳은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들의 부인이나 애인이 오면 어디에서 잡니까? 서양사람이나 일본사람도 여자를 좋아한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양빈이 웃으면서 북한 관리들에게 말했다. 계속해서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던 북한 관리들도 그제서야 씩 웃었다.

    “샹젤리제, 힐튼 같은 오성(五星)급 호텔은 물론이고 별장도 있어야 합니다. 서양기업가나 관광객들에게 꼭 보여줘야 합니다. 조선 신의주 경제특구는 세계 어떤 자유무역구와 비교해도 질이 떨어지지 않을 뿐더러 훨씬 멋지다는 것을 말입니다.”

    양빈이 계속해서 말했다. “저는 신의주 경제무역구를 세계 일류로 만들겠습니다. 세계 각국의 기업가나 관광객이 이곳에 와서 풍경을 보고 싶도록 만들고 달러를 뭉치로 털어놓고 가게 하겠습니다. 동북아시아의 진주, 그 진주를 한국, 아 미안합니다. 남한이나 일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조선 신의주에서 찾도록 하겠습니다.”

    양빈의 연설은 열정적이고 유머러스했으며 선동적이었다. 북한 관리들은 잇달아 고개를 끄덕였다.

    양빈은 마지막으로 한 가지 방안을 내놓았다. 즉 비행장과 항구를 특구 안에 두고 무역구의 면적을 확충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북한측 인사들은 중앙에 보고해야 한다고 말했다.

    양빈의 갑작스런 제안에 북한측은 신속하게 대답해왔다. 김정일은 양빈 총재의 뜻대로 특구 면적을 82㎢로 확충하고, 북신의주 전부를 그 안에 넣어 신의주 경제특구로 명명하라고 지시했다.

    가난하게 자란 유년시절

    양빈의 경력에 대한 매스컴의 보도는 각기 다르다. 양빈은 2002년 3월6일 자신의 과거에 대하여 나에게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나는 불우한 운명이었죠. 부친이 병으로 일찍 세상을 뜨는 바람에 다섯 살 때 고아가 된 신세였죠, 그래서 할머니가 나를 키웠어요.”

    1963년 2월11일, 난징(南京)에서 태어난 양빈은 할머니에 의지해서 살아왔다. 이렇다 할 재산도, 수입이 없어 아이스크림 하나 살 돈도 없었다. 나중에 양빈의 할머니는 길가에서 한 컵에 1전씩 받고 차를 팔아 생계를 유지해나갔다. 어린 양빈은 늘 끼니를 굶어야 했다. 여덟 살 무렵엔 매일 오후 4시가 되어서야 할머니와 함께 시장에 가서 채소를 사왔다. 하루중 그때가 채소값이 가장 저렴하기 때문이었다.

    양빈의 친지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1981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양빈은 720공장에 취직하였고, 1982년 1월 해군 제2포병부대에 입대하였는데 그 포병중대는 다롄(大連)에 있었다. 1983년 9월 그는 부대에서 시험을 통해 해군 제2포병대학원에 입학했으며 ‘전자공학’ 전공의 전문대 3년과정 공부를 하였다. 1986년 졸업 후 군교에 남았으며 나중에 대학원 근무중대에서 병장이 되었다. 1988년 2월부터 1989년 11월까지 난징 690공장에서 근무하였다.

    1987년 12월 양빈은 군교에서 제대했다. 그러나 그는 취직을 서두르지 않았다. 당시 그에겐 제대할 때 받은 약간의 돈이 있었는데 그는 그 돈으로 먼저 난징대학의 단기 영어강습반에 참가하여 영어공부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당시 중국대륙에서는 출국 열기가 한창이었다. 그때부터 양빈의 마음속엔 해외유학이란 싹이 움트기 시작하였다.

    1989년 2월 양빈은 네덜란드 유학을 신청했다. 왜 하필 미국이나 유럽의 다른 나라가 아닌 네덜란드였을까? 아마도 난징대학에 유학 온 네덜란드 여학생과 관련되는 것 같다. 그들이 난징대학에서 서로 얼굴을 익혔기 때문이다. 양빈은 1989년 10월 네덜란드로 갔다.

    10월3일 밤 양빈은 마지막으로 홍콩 봉황위성TV의 유명한 사회자 쩡즈모에게 저녁식사를 대접했다. 그녀와의 인터뷰에 배석한 나도 어느덧 피곤이 몰려왔다. 밤 10시40분, 양빈의 A9별장을 나와 내가 머무는 별장으로 갔다.

    얼마나 잤을까. 다급한 전화벨 소리에 눈이 번쩍 떠졌다. 다짜고짜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양빈의 사관학교 동창생 왕자탕(王家堂)이었다.

    “관 선생님이세요. 전 왕자탕입니다. 양빈이 오전 5시10분경 선양경찰에 연행됐어요.”

    “알았어요. 곧 갈게요.”

    양빈의 큰 접견실에는 리강과 왕자탕, 천훙, 양빈의 고모 이렇게 몇 사람만 남아 있었다. 양빈이 연행되기까지 이곳에서 지켜봤던 사람들이었다. 천훙의 말을 듣고서야 어젯밤 이 곳에서 일어난 일의 자초지종을 대체적으로 알 수 있었다.

    “어젯밤 11시경, 한국에서 두 번째로 큰 우리은행 이종휘(李鍾輝) 부행장과 황규승(黃圭勝) 차장, 정준문(鄭俊文) 과장 등 일행이 벤츠 승용차 두 대를 타고 양빈의 별장에 왔어요. 모두 8명이었는데 한국인 6명과 이들을 안내한 중국인 2명이었습니다. 그들은 신의주 투자에 관해 논의하려고 양빈을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양빈은 큰 접견실에서 한국 손님들을 만났어요. 11시 반쯤 나와 리강이 돌아가 자려고 문을 열었는데 경찰이 막고 나섰습니다. 나갈 수가 없었어요. 양빈이 손님들과 상담하고 있는데 방해할 수도 없고 해서 고모와 왕후이둥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왕후이둥은 양빈을 옆의 작은 주방으로 불러내 지금 경찰이 별장을 완전 봉쇄하고 있어 아무도 나갈 수 없다, 한국 손님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 그들을 먼저 보내야 하지 않겠냐고 말했습니다. 양빈은 좀더 기다려보자며 큰 접견실에 가서 상담을 계속했습니다.

    그러는 중에 밤 12시30분이 되었어요. 모두들 의논 끝에 한국 은행손님들에게 이미 공안이 별장을 봉쇄하고 출입을 금지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로 했습니다. 한국의 은행가들은 휴대전화로 한국영사관에 전화를 걸어 그들이 이 곳에 묶여 있는 상황을 얘기했어요. 1시30분, 밖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렸습니다. 고급 경찰관과 랴오닝성 외사처 처장, 선양시 외사처 처장 등이 들어섰습니다. 그들이 한국인이 누구냐고 묻자 한국인 6명이 일어섰어요. 한국인을 안내해온 중국인 2명까지 합쳐 8명은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치열한 법정공방전

    2002년 10월26일 양빈은 공식 체포되었다. 다음날 신화사발(發) 통신은 양빈이 ‘허위 투자, 뇌물 수수, 사기, 농경 토지 불법 점용 등 경제범죄 활동’으로 해당 지역 공안국에 정식 체포되었다고 보도했다.

    양빈이 소환 심문을 당한 후 북한정부는 외교루트를 통해 ‘중국이 양빈을 잘 대해 줄 것을 희망한다’는 뜻을 전달하였다.

    그후 외국 언론에 ‘북한이 신의주특구의 수뇌를 바꾼다’는 소식이 떠돌았다. 그러나 지금까지 북한 의회에서 양빈의 직무를 파면했다는 소식은 없다. 북한의 핵문제가 복잡해져 북한, 미국, 중국 3국이 베이징에서 회담을 하고 있지만 북한측에서 공식적으로 신의주 계획과 신의주특구 수뇌 양빈을 포기한 적은 없다. 적어도 그들은 심사를 통해 ‘양빈 사건’이 명백해지기를 기다리고 있으리라!

    내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북한정부는 ‘양빈 사건’이 명백해지기를 기다리며 줄곧 특구 장관서리를 임명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어떤 언론에선 마닝을 특구 장관서리로 한다고 보도했다. 북한측은 과거의 경험에서 얻은 교훈을 통해 신중해졌을 것이다. 과거 언론에 자주 언급되었던 한국인이나 홍콩인 및 기타 사람들을 염두에 두지 않을 것이다.

    만약 북한 대표단(즉 양빈과 담판을 벌여온 북한 정부의 대표단)이나 양빈의 고문 중에서 한 사람을 특구 장관으로 선출한다면 그리 놀랄 것이 없다. 전하는 소식에 따르면 ‘양빈 사건’이 확실해진 후 북한은 임시로 북한 대외경제협력촉진위원회 제1부위원장 계승해를 신의주 특별행정구 장관서리로 임명하려 하였다. 그리고 양빈의 고문 중에서 한 사람을 선택하여 부책임자로 임명해서 신의주 특별행정구의 계획을 계속 추진하려 하였다.

    양빈이 랴오닝성 공안국에 구속된 후 네덜란드촌은 썰렁해졌다. 일꾼들도 거의 없다. 그들은 수개월간 봉급을 받지 못하여 다른 생계를 찾아 떠나버렸다. 일찍이 팔린 수십 채의 집에 입주한 사람들은 어떻게 그 추운 겨울을 지냈는지 궁금하다. 네덜란드촌에는 흰 백조와 검은 백조 수백 마리가 있는데 이 예쁜 동물들은 양빈 고모가 각별한 은혜를 베풀어가며 전문인력을 남긴 덕분에 보살핌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일본에서 수입한 백여 마리의 금붕어는 아마 살아 남지 못했을 것이다.

    선양시 공안국의 ‘기소의견서’에 적힌 양빈의 범죄혐의는 모두 6가지다. 1.허위투자 혐의 2.농경지를 불법적으로 점용한 혐의 3.계약사기 혐의 4.금융 증표 위조 혐의 5.기관에 대한 뇌물수수 혐의 6.업체의 뇌물수수 혐의 등이다.

    2003년 7월14일 선양시 중급인민법원은 양빈 및 그가 경영하는 기업의 범죄사건에 대하여 1심 판결을 내렸다.

    랴오닝성 선양시 중급인민법원은 14일 피고인 양빈과 그의 기업에 1심 판결을 내렸다. 피고업체 유라시아실업유한회사는 농경지 불법점용죄, 계약사기죄, 기관에 뇌물 준 죄 등으로 인민폐 560만위안의 벌금을 선고받았다. 피고업체 선양유라시아농업발전유한회사는 금융증표 위조죄로 인민폐 40만위안의 벌금을 선고받았다. 피고인 양빈은 등록자본금 허위보고죄, 농경 토지 불법점용죄, 계약사기죄, 기관에 뇌물 준 죄, 업체가 뇌물 준 죄, 금융증표 위조죄 등으로 실형 18년과 인민폐 230만 위안의 벌금이 선고됐다.

    그로부터 50일이 2003년 9월6일 랴오닝성 고급인민법원은 양빈 및 그의 회사가 선양시 중급인민법원의 1심 판결에 불복하여 상소한 건으로 개정 심리하였다. 중국의 법률에 따르면 이는 최종심이다.

    9월 6, 7일 이틀간의 심리에서 1심과 마찬가지로 양빈 및 그의 회사의 6가지 죄명에 대하여 법정 조사, 실증, 변론을 하였다.

    7일 오후 4시 법정 심사가 끝나고 법관이 잠시 휴식한다는 선포를 하였다.

    한 시간이 지난 후 주심 법관은 아래와 같이 선포하였다.

    “재판부에서 합의한 결과 원래의 판결이 정확하다고 인정한다. 그의 범죄 사실, 경위 및 사회에 끼친 손해 정도에 비추어 볼 때 양형(量刑)이 적당하고 재판 순서도 합법적인 것으로, 중화인민공화국 형사소송법 제189조례 제1약관의 규정에 따라 아래와 같이 결정한다. ‘상소를 기각하고 본래의 재판을 인정한다. 본 재판은 최종심이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양빈은 선양 제1감옥에 수감되었다.

    양빈이 네덜란드에서 ‘금노다지를 캐기 시작’한 것이나, 그가 귀국해서 경영에 착수한 일은 같은 맥락에서 이뤄졌다고 할 수 있다. 양빈은 네덜란드에서 품팔이를 해서 번 2만달러로 값싼 중국의 방직품, 생활용품을 네덜란드에 들여와 판 덕에 불과 몇 년 만에 부호로 변신했다.

    양빈은 창업에 첫걸음을 내디디면서 선택을 가장 중요시했다. 그는 자신이 네덜란드에 유학하고 있을 때 유럽을 유심히 관찰했으며 유럽을 충분히 이해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유럽보다는 중국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었다. 양빈은 사람들이 그때까지 눈을 돌리지 않은 분야를 선택하기로 했다. 거기에는 경쟁자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예리한 눈으로 기회는 이제 막 개방정책을 펴는 폴란드에 있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바르샤바에서 폴란드 사상 최초의 민영기업을 등록했다. 이 일은 당시 폴란드와 서방 매스컴으로부터 커다란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양빈은 국제무역을 하기로 결심하고 먼저 고향인 중국 난징으로 갔다. 그곳에는 동창이며 친구, 전우, 스승을 포함한 그의 인맥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계획을 여러 사람에게 이야기했다. 친구들은 아이디어를 내가며 그에게 장쑤성의 실크-방직수출회사의 사장과 경리들을 소개해 주었다. 덕분에 그는 장쑤성(江蘇省) 일대의 향진기업(중국의 鄕은 한국의 면, 鎭은 읍에 해당됨)에서 싸고 질 좋은 의류, 일용품을 살 수 있었다.

    양빈의 사업은 점점 번창했다. 그는 중국의 생활용품, 완구, 면직물, 실크류들을 동유럽과 독립국가연합체(CIS) 국가로 계속해서 운반했다. 불과 2년 만에 그의 총자산은 2000만달러로 불어났으며 네덜란드에서 ‘네덜란드유라시아’ 회사를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1996년 양빈은 농업에 투자하기로 결정하고 네덜란드 농업모델을 중국에 들여오기로 했다. 그러자 유럽에 있던 중국인 친구들은 모두 그의 결정에 의아해했다. 왜 중국으로 돌아가서 농민 노릇을 하려고 하는가? 그때 유럽에 살던 100만 화교 중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들은 모두 선진적인 기계업, 컴퓨터업이나 화공산품 사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양빈은 진지하게 해보고자 결심한 일은 꼭 해내는 사람이다. 그는 화훼시장과 녹색농업 분야를 정확히 내다보았다. 그는 먼저 중국내 유명 도시의 무역도매시장에 파고 들어 수요와 공급 사정을 파악했다. 중국 사람은 화초를 무척 좋아해서 화훼도매시장이 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그는 차츰 화훼 상품이 대부분 전국 각지의 온실에서 재배된다는 것과 그 온실 설비가 아주 허술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화훼 사업자들은 하루빨리 첨단설비를 들여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정보는 그가 중국 농업에 투자하겠다는 결심을 하게끔 하였다. 그는 개혁개방 후 중국 사람들의 생활수준이 빠르게 향상된 데에 흥분했다.

    1996년 말부터 이듬해 초까지 그는 자본 운영을 통해 네덜란드에서 2개 회사를 사들였는데 그 중 하나는 70년 역사를 지닌 온실기업이었고 다른 하나는 냉장회사였다. 결국 그 두 회사가 네덜란드 농업을 중국에 끌어들이는 기반이 되었다.

    그는 베이징, 상하이, 다롄, 광저우, 청두 등지에 있는 도매상들과 공급계약을 체결하고 곧바로 밤을 새워 네덜란드로 돌아가 수출화물을 선적했다. 며칠 후 1000만달러 상당의 네덜란드 화훼와 모종, 종자가 속속 고객의 손으로 들어가 불티나게 팔렸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네덜란드촌

    2002년 3월6일, 필자는 처음으로 선양의 네덜란드촌을 방문했다. 한낮의 네덜란드촌은 정말 아름다웠다. 건물과 정원이 유럽 고전주의 스타일로 꾸며져 있었다. 외관은 네덜란드 역사에서 유명했던 건축물을 그대로 따왔으며 자연과 지형이 조화를 이루는 네덜란드의 공원들을 전면적으로 본땄다.

    해적선과 풍차는 네덜란드 왕국의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네덜란드촌의 입구에 서있는 해적선과 풍차는 촌중심에 있는 시티광장과 네덜란드 여왕궁과 잘 어울렸다. 우리는 우선 이름난 네덜란드촌의 국제컨벤션 센터를 찾았다. 이곳은 암스테르담 기차역을 그대로 본따 1대1의 비례로 건축한 것이다. 양빈은 이 공사에 2억위안(元)이 넘는 투자를 했다. 로비를 지나 2층에 도착해보니 전체 네덜란드촌의 미니어처가 마련되어 양빈의 예술 걸작품을 한 눈에 볼 수 있었다. 현대 도시농업과 유럽식 공원이라는 주제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네덜란드촌은 동서로 나뉘어 있었다. 동쪽은 별장지대, 빌라, 3성급 호텔이 들어서 있었고 5성급 하이야대주점, 금융빌딩, 피트니스센터, 사우나, 가라오케, 쇼핑몰, 우체국, 학교 등의 시설도 갖추려고 했다.

    서쪽은 하이테크농업산업원과 농업관람, 관광구역이었다. 암스테르담 기차역-국제컨벤션센터는 바로 관광구역 안에 있었다. 해외 바이어클럽은 네덜란드 헤이그 국제재판소 건물을 1대1의 비례로 건축했다. 건물 내부의 1층 로비는 2차대전 후 나치를 재판하던 모습 그대로 설계됐고 2,3층엔 초현대식 엔터테인먼트 시설을 갖춘 고급 객실과 세계의 유명 미식센터가 들어와 있었다. 이것은 답사, 관광, 투자차 방문 온 바이어들에게 우수한 상담환경과 비즈니스 환경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었다. 대형 화훼 전시센터는 철근유리구조로 둘러싸여 햇빛이 유리관을 비출 때마다 황금빛으로 번쩍여 장관을 이루었다.

    클라이맥스에서 막내린 ‘양빈 신화’ 내막

    선양 네덜란드촌 입구에 세워진 풍차. 양빈은 네덜란드촌의 외관을 네덜란드 역사상 유명했던 건축물을 그대로 모방해 만들었다.

    선양에 돌아온 후, 양빈은 여러 가지 사업을 준비하느라 쉴 새 없었다. 홍콩에서 유라시아 주식회사를 돕고 있는 리잉저우(黎瀛洲) 변호사, 저명한 컨설팅회사 화쥔(和君)의 이사 겸 사장인 리수(李肅), 홍콩과 마카오 경제특구의 기본법을 만든 마카오대학 법학원의 뤄웨이젠(駱偉健) 교수 등을 초청해 경제특구의 법률문서를 만들 준비를 하였다.

    3월6일 저녁, 양빈은 네덜란드촌의 ‘백조의 호수’ 옆 열대우림홀에서 미국 MGM의 아시아 부총재 일행을 맞았다. 그들은 여행 합작 프로그램의 타당성을 조사하기 위해서 온 것이다. 유라시아의 부총재 리강, 스쥔 및 외지에서 온 마닝, 베이징 수도공항의 젊은 전문가 등이 동행했다. 필자는 작가로 초청을 받아 오른쪽에 앉았다. 그 자리에서 나는 마닝과 왕뤄(王諾)를 처음 만났다.

    3월7일 새벽 3시경, 양빈, 스쥔 및 마닝, 왕뤄와 베이징수도공항의 엔지니어 일행은 열차를 타고 선양을 출발하여 아침 7시경 단둥에 도착하였다. 단둥시 책임자가 기차역에서 일행을 마중하였다. 이들은 함께 아침식사를 하고 신의주 경제특구 건립에 쌍방이 합작하는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두 시간 후 양빈 일행은 압록강을 건너갔으며 북한 원예총사 김동규 사장이 외무성, 무역성 등 정부관리와 함께 북한 세관에서 그들을 영접했다. 양빈 일행은 신의주에 단 하나뿐인 외국인 접객업소인 압록강호텔에 묵었다.

    북한측은 이미 지도를 준비하여 82㎢ 둘레를 붉은 선으로 그려놓았다. 기획책임자인 왕뤄는 후에 필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조선측은 우리에게 지도를 보여주었습니다. 붉은 선으로 표시한 82㎢는 북신의주와 압록강의 몇 개 섬 및 바다와 인접한 지역을 포함합니다. 우리는 차를 타고 지도상의 붉은 선을 따라 한바퀴 돌면서 지형, 공항, 항구 등을 관찰하였습니다. 공항은 원래 일본 사람들이 건설한 군용이었으나 북한측은 특구를 위해 민용공항으로 바꾸려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항구는 크지 않아 3000t급 화물선이 정박할 정도였습니다. 나는 무역 항구로는 미흡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국제 해운에서는 적어도 1만5000t급 이상의 화물선이 정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곳은 수심이 깊지 않아 큰 배가 들어올 수 없기 때문에 발전 가능성이 없습니다. 반드시 수심이 깊은 다른 곳을 택하여 항구를 건설해야 합니다.”

    그날 저녁, 북한측 대표단(원예총사의 김 사장을 수석대표로, 외무성, 무역성 등 부위(部委)급 및 과학원 경제전문가들로 구성되었다. 이후 신의주특구에 대한 협상은 모두 이 대표단이 추진하였다. 북한측 대표는 나중에 몇 명 추가됐다)이 양빈 일행을 초청했다. 협상에서 북한 대표단은 3월 하순에 네덜란드촌을 방문하여 신의주경제특구 문제를 다룰 첫 회담을 진행하기로 하였다.

    2002년 3월8일 양빈 일행은 신의주에서 선양으로 돌아왔다. 양빈은 법률전문가들에게 경제특구와 관련된 서류를 준비하도록 요청하는 한편, 3월7일 북한측에서 제공한 지도에 근거하여 신의주 경제특구의 모래지도 모형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이 신의주 모래지도 모형은 순전히 양빈의 구상에 따라 만들어지는 것으로 2주 안에 완성하여 곧 방문할 북한 대표단에게 보여주게 될 것이다.

    필자는 4월에 이 모형을 처음으로 보았다. 이 모형을 보면 신의주 경제특구가 유럽풍의 매우 현대화된 도시로 구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도시는 넓은 길을 경계로 동서 두 부분으로 나뉘었는데, 서쪽은 높은 건물과 아파트가 숲처럼 솟아 있으며 압록강변의 큰길은 녹지대로 이루어져 있다. 동부는 공항, 현대화된 공장, 농업기지 등이다. 모형 위에는 특별히 교회와 사찰을 표시해 두었으며 기독교를 믿는 서양 사람들과 불교를 믿는 동양사람들이 각기 자신의 신앙을 추구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는 모두 양빈의 세심한 배려였다.

    2002년 3월, 양빈은 랴오닝성 친구의 소개로 랴오닝대학 법학원 부원장으로 국제법 전문가인 둥롄파(?連發) 교수를 초청해 홍콩의 리잉저우 변호사, 마카오의 뤄웨이젠 교수가 함께 작성한 법률서류에 대하여 국제법 측면에서의 조언을 요청하였다. 둥롄파 교수는 양빈의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었다.

    2002년 3월31일, 북한 대표단 12명이 선양에 도착했다. 양빈은 마닝, 리강, 스쥔, 저우샹 등과 유라시아그룹 관계자들과 함께 도선공항에 마중나갔다. 북한 대표단이 도착하자 대기중이던 젊은 여성들이 손님들에게 꽃다발을 안겨주었다. 북한 대표단을 태운 승용차의 긴 행렬은 기세 당당하게 공항을 빠져나와 선양 환성(環聲)고속도로를 통해 네덜란드촌으로 향했다.

    4월2일, 홍콩기본법과 마카오기본법의 초안 작성에 참여한 적이 있는 마카오대학 법학과 뤄웨이젠 교수가 선양에 도착했다. 양빈이 초청한 국내외 각 방면의 전문가가 모두 네덜란드촌에 도착한 셈이다. 이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마닝, 왕후이둥, 리수, 저우팡성, 리잉저우, 뤄웨이젠, 왕뤄, 둥롄파, 양다융, 추이양 등이다.

    경제특구인가, 특별행정구인가

    북한 대표단은 모두 12명으로 구성돼 있었다. 10명의 대표 중 수석대표는 원예총사의 김동규 사장이고 수석대표 비서와 통역이 포함돼 있었다.

    북한 대표단은 북한 무역성, 외무성,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법제위원회, 과학원, 원예총사 사람들로 구성됐다. 그러나 북한 대표단은 시종일관 북한 대외경제협력추진위원회 명의로 회담에 나섰다. 왜 그랬을까? 왜 정부 명의를 쓰지 않았을까? 아마도 양빈이 네덜란드 유라시아국제무역회사의 명의, 즉 사실상 개인자격으로 나섰기 때문일 것이다.

    양빈측 대표단은 모두 양빈이 친구로부터 추천받고 소개받아 초청한 사람들로 중국 각처에서 왔다. 양빈과 마닝처럼 네덜란드 국적 소유자도 있었지만 이들을 제외하면 모두 노란 피부에 검은 머리를 한 중국인이므로 북한측에서는 중국측 대표라고 불렀다.

    제1차 회담 때 양빈측 대표단은 모두 11명이었다. 대표 8명, 변호사, 비서 2명에 통역 김호(金虎)가 동행했다. 수석대표는 양빈이고, 부대표는 마닝이다. 첫 회담이 끝난 후 왕후이둥(王惠東), 웡융시(翁永曦), 챠오성리(喬勝利) 등이 연이어 대표단에 가담했고 작가인 나는 언론고문 명의로 참석했다.

    양빈대표단은 신의주특구 문제에 대한 법률문서 즉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신의주 특별행정구 기본법’(토론용)을 제출했다. 이것은 둥롄파 교수의 기본법에 홍콩 리잉저우 변호사가 작성한 ‘합의서’ 내용을 보충해서 만든 기초 문서였다.

    4월4일 오전 10시, 쌍방 대표단은 네덜란드촌의 유라시아그룹 오피스텔(일명 네덜란드 여왕궁) 4층 회의실에서 첫 회담을 진행했다. 양빈은 환영사를 마친 후, 간단하게 신의주기본법을 작성한 목적과 그 배경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기본법은 미래의 특구 대법(大法)으로 중국의 홍콩기본법과 마카오기본법처럼 전세계에 공포하고 집행할 법률문서라고 말했다. 이 기본법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헌법규정에 의거해 신의주특구에 실행할 제도를 마련하여야 하며 국가가 신의주특구에서 실시할 기본방침과 정책을 보장해주어야 한다, 중앙정부는 신의주특구에서 필요로 하는 모든 것에 대해 지지하고 협조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오후에 회담이 계속되었다. 북한 대표단은 표정이 엄숙했다. 북한측 수석대표가 먼저 발언했다.

    “신의주특구는 당신네 홍콩, 마카오와 다릅니다. 홍콩과 마카오특구는 자본주의를 50년 동안 계속 실행하기로 했습니다. 그것은 홍콩과 마카오가 과거 영국과 포르투갈에게 강제 침략당해 100년의 식민지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네는 제국주의의 손으로부터 그것을 회수해 조국에 반환시킨 것입니다. 그러나 신의주특구는 주권국가의 영토의 일부를 타인에게 양도하여 관리하는 것입니다. 이는 세계적으로 둘도 없는 일입니다. 신의주 경제특구의 이런 점을 고려해야 합니다.”

    북한 대표단의 법률전문가가 계속해서 말했다.

    “우리의 의견으로는 특구의 이름에 특구의 성격이 반영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경제특구라고 부르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리나라 헌법의 해석으로는 특수한 경제구역입니다. 나진·선봉무역구는 조선에서 조선법으로 관리합니다. 신의주 경제특구의 경제책임자는 양빈 총재로 그가 전체 지구를 관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양자의 관리방식이 다른 것입니다. 경제활동은 양빈 총재가 책임지는 것이고 우리는 간섭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치안은 조선측에서 책임집니다.”

    화려한 신의주 특구 모형도

    북한측의 태도는 명확했다. 신의주를 특별행정구로 부르지 않고 경제특구로 부르며 양빈더러 경제활동만 책임지라고 했다. 북한이 그 외의 정치, 즉 국가기구를 맡겠으며 법률제정과 집행도 맡는다는 것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북한이 치안, 검찰, 법원을 맡는 것이었다. 특구의 모든 활동은 북한 헌법의 구속하에 있고 독립적인 행정관리권이나 입법권, 사법권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사실상 제2의 나진·선봉무역구로 장관만 북한 사람 대신 네덜란드 국적의 중국인 양빈을 앉히는 것에 불과했다.

    그럴 경우 양빈은 신의주에 외국기업가를 유치하고 경제건설과 무역활동을 책임지면서도 아무런 법적인 보증을 받지 못하게 된다. 특구의 기본법이 없고, 입법·사법·행정 3권이 없기 때문이다. 북한은 다만 행정관리권의 일부분만 양빈에게 주는 것이었다.

    그러자 양빈 대표단은 일제히 양빈이 신의주의 경제활동만을 책임진다면 나진·선봉경제특구와 다를 게 무엇이냐며 의견을 말했다. “사실, 나진·선봉이 성공하지 못한 원인으론 그 지리적 위치와 북한관리가 책임자였다는 점 외에도 최대의 문제점으로 국제자본과 대기업의 투자가 없었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외자를 유치하려면 반드시 법률로 보증해주어야 합니다. 외국인은 법률로 판단하지 사람을 보지 않습니다. 이 점에 관해서 북한 대표단이 진지하게 고려해주시기 바랍니다.”

    4월5일 쌍방 대표단은 회담을 속개했다. 북한 대표단의 법률전문가 허명규가 먼저 발언했다.

    “주신 기본법을 다 읽어 보았습니다. 우리는 입법권과 사법권은 최종적으로 국가에 귀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신의주 특구의 법률도)중앙에서 제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양빈 총재가 경제특구에서 더 많은 권력을 행사하고 외국기업을 유치할 수 있도록 중앙에서는 일부의 입법권과 사법권을 양빈 총재에게 부여할 수도 있습니다.”

    양빈은 미래의 신의주특구가 어떤 모습으로 가야 할지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설명하였다.

    “조선친구들이 네덜란드촌에 도착하자마자 신의주특구의 모래판 지도를 보셨습니다. 이 82㎢의 토지 위에 세계에서 가장 완벽하고 멋진 특구를 건설하려면 그 건축은 유럽 풍격을 따라야 합니다. 저는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건축 설계사들을 불러와 설계를 시킬 계획입니다. 영국 풍격, 프랑스 풍격의 건축물과 세계에서 가장 현대화된 고층건물을 짓겠습니다. 제네바처럼 나무와 잔디밭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환경보호형 특구로 가꿀 것입니다. 5년 내에 초보적인 형태의 공사를 마치고 10~15년에 걸쳐 완성할 예정입니다.

    자금이 얼마나 들까요? 아마도 초기에 500억~1000억달러가 필요하고 건설을 완전히 마칠 때까지는 4000억달러가 들어갈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 양빈은 돈이 얼마 없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모든 기업가를 찾아가 투자를 유치해도 500억~1000억달러를 채울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금은 어디에서 나오겠습니까? 세계 각지의 기업가와 자본가를 불러 투자시켜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세계은행과 아시아은행을 포함한 세계금융자금의 융자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아무런 까닭도 없이 우리에게 자금을 빌려주거나 투자할까요? 불가능하지요. 그들은 이익이 있어야 움직입니다.

    그러므로 우대정책과 세계에서 가장 낮은 세율, 가장 좋은 투자환경이 필수적입니다. 무엇으로 세계에서 가장 좋은 환경을 보장할 것입니까? 바로 법률입니다. 그들이 인정하는 법률입니다. 우리는 세계의 각종 법률체계, 여러 나라 경제특구의 법률을 연구한 후 세계 각국의 자본이 깜짝 놀랄 만한, 좋다고 외칠 만한 ‘신의주 특별행정구 기본법’을 제정해야 합니다.”

    회담은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됐다. 4월12일 쌍방 대표단은 기본법 중 17가지의 문제에 대해 논의를 했다. 비록 견해가 일치되지는 않았지만 회담은 시작됐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평양서 열린 2차 회담

    평양에서 개최된 제2차 회담은 평양문화궁 안에서 세 차례 진행됐다. 4월24일 첫날 회의가 열렀다.

    김동규 사장의 환영사에 이어 양빈이 답사를 했다.

    “나는 중국에서 자라면서 애국주의와 국제주의교육을 받았다. 어려서부터 조선과 중국이 우호적인 이웃이라는 것과 ‘항미원조(抗美援朝)’에 대해서 잘 안다. 지금 우리는 조선에 와서 신의주특구를 건설할 것에 대해 담판하고 있다. 우리는 모두 한가족이다. 그러므로 겉치렛말은 하지 말자. 신의주특구는 잘 건설해야 한다. 관건은 기본법이다. 외국 사업가의 가장 큰 관심은 기본법의 내용이 어떤 것이냐 하는 점이다. 그걸 알고 나서야 그들은 투자를 할 것이다. 기본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삼권(三權)이다. 외국인들은 사법의 공정성 여부, 입법으로 투자자의 안전과 이익을 보호해주는지 여부를 중요시한다. 삼권이 보장되지 않으면 기본법도 있을 수 없다. 삼권이 특구 장관에게 귀속되면 그것은 특별행정구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내가 개인적으로 무슨 권력을 얻고 싶어서가 아니라 외국 사업가를 유치하고 특구를 잘 건설하고 관리하기 위해서다.”

    북한 대표단의 한 사람이 양빈의 말을 중간에 끊었다.

    “양빈 총재, 이름만 특구로 하고 실제로는, 그러니까 내용상으로 특별행정구의 구조를 취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둥롄파가 말했다.

    “특별행정구라고 하면 행정·사법·입법권이 있으므로 이름만 들어도 납득이 갑니다. 그러나 특구라고 하면 모호합니다. ‘삼권’의 개념을 포괄할 수 없지요. 경제특구라는 이름은 명확하기는 한데 경제 행정관리권은 있으나 사법·입법권이 없습니다. 조선이 처한 현재의 특수상황하에 만일 독립적인 사법권·입법권이 없다면 어떤 외국 대기업이나 은행이 신의주에 투자하겠습니까? 우리가 마련한 ‘기본법’과 ‘기본합의서’는 지리적 우월성을 지니고 있는 신의주를 세계에서 가장 이상적인 투자환경구역으로 만들기 위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즉 대형 외국 투자기업들을 유치해 신의주를 금융, 무역, 현대화 산업, 오락의 중심으로 만든다는 목적으로 작성한 것입니다.”

    北, “이름만은 경제특구로 하자”

    둥롄파 교수가 말한 기본법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신의주 특별행정구 기본법(건의용)’을 말하는 것이었다. 회담중에 북한측 부수석대표가 말했다.

    “특별행정구는 아직까지 우리나라에 없습니다. 홍콩과 마카오를 특별행정구라고 부르며 50년동안 변화없이 일국 양체제로 가는 것은 합당한 일입니다. 신의주에 관해 말하자면, 우리가 반복해서 토론해봤는데 지역명칭을 특별행정구로 할 경우 당신네 홍콩과 마카오와 같아져 식민지 색채를 띠므로 특구가 좋다고 생각해 그 이름을 경제특구로 하려 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특별행정구를 고수한다면 우리는 최고회의에 다시 보고하겠습니다.”

    그러나 양빈측 전문가들의 생각은 아주 실제적이었다. 북한이 폐쇄돼 있어 외부세계와 각종 국제 관례를 모른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먼저 북측 대표단을 이해시키려고 노력했다.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초까지 중국정부의 고급관리들이 개혁개방과 국제관례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으며 머릿속에는 여전히 계획경제 시대의 낙인이 깊이 찍혀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양빈측은 북측 대표단이 자신들의 관점과 생각을 상부에 반영하는 것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둥롄파, 뤄웨이젠 두 교수가 북한측에 국제관례를 소개하고 참을성 있게 설명했다.

    4월26일 평양문화궁 3층에서 회담이 속개되었다. 2개 팀으로 나뉘어 한 팀은 ‘기본법’, 다른 한 팀은 ‘기본합의서’내용에 대해 토론했다.

    회담은 4월27일에도 열렸다. 이 날은 팀을 나누지 않고 ‘기본법’에 관해서만 토론했다. 양빈은 명칭을 ‘신의주 특별행정구’로 하고 행정권·사법권·입법권이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북한측은 특구에 일정한 행정권·사법권·입법권을 줄 수 있지만 이름만은 ‘경제특구’로 하자고 했다. 특구에 사법권과 입법권을 준다는 데 대해 북한측이 처음으로 동의한 것이다. 그러나 자세한 설명이 뒤따르지는 않았다.

    2002년 5월17일, 일정을 앞당겨 네덜란드촌에 도착한 양빈 대표단 일행은 북한 대표단을 영접해 제3차 회담을 할 준비를 하였다(공식회담은 3월에 북한 대표단이 처음 네덜란드촌을 방문하였을 때가 제1차, 4월22~28일 양빈 대표단의 평양 방문이 제2차였다. 5월 18~25일까지의 회담은 제3차가 된다).

    5월18일 오후 1시 정각, 북한 대표단은 평양으로부터 비행기 편으로 선양에 도착했다. 북한대표단은 별장에 안내되어 휴식을 취하였다.

    5월19일 오전 9시30분, 회담은 네덜란드촌의 암스테르담 기차역 3층 대청에서 진행되었다. 양빈 대표단의 성원은 15명이었고 북측 대표단에 대한 공식호칭은 ‘신의주 특별행정구 개발건설 지도소조’였다.

    이날 회담은 주로 신의주 구역명칭에 집중되었다. 이는 양측에게 가장 골치 아프면서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의제였다. 양빈 대표단은 신의주 특구를 국제사회가 받아들일 수 있게 하고 외자유치의 토대를 만들기 위해서 반드시 ‘특별행정구’라는 명칭을 써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회담은 양측 수석대표의 대화로 시작되었다. 북한측 수석대표 김 사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 회담의 의제가 어떤 것들입니까? 귀측이 먼저 신의주 구역명칭을 말씀해 보십시오. 가급적이면 이 문제를 조속히 결정하도록 합시다. 앞서 평양에서 귀측이 제출한 특별행정구란 명칭에 대해선 우리가 연구한 후 최고회의에 보고하였습니다. 우리는 양빈 총재님에게 3권이 있다고 인정하는 대신 구역명칭을 신의주특구라고 제안할 수는 없으신지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우리는 구역명칭을 여전히 신의주 특별행정구로 할 것을 주장합니다. 이는 오로지 외자유치를 위한 목적입니다.”

    양빈의 대답에 김 사장은 북측 제안을 이렇게 해석했다.

    “명의상은 특구지만 사실상, 또 내용상은 특별행정구인 것입니다.”

    이 말은 북한 대표단이 처음으로 특구의 내용, 즉 양빈 대표단이 제기한 ‘3권’의 정치구조에 동의함을 명확히 시사한 말이라고 봐야 한다. 둥롄파 교수가 즉시 법률적 엄밀성과 표현의 측면에서 해석을 더했다.

    “행정관리권과 입법권과 사법권을 가지면 그것은 사실상 특별행정구입니다. 이 명칭은 3권과 함께 묶여 있는 것입니다. ‘특별행정구’하면 대번에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특구’라고 하면 그 의미가 명확치 않고 3권의 의미도 포함되지 않습니다.”

    북한 대표단에는 ‘기본법’ 담판에서 주역을 맡았던 법률전문가가 있는데 그는 북한대표단 명단에 ‘대외경제협력추진위원회 법률담당 부위원장’으로 적혀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허 부위원장’으로 호칭했다.

    북한측 대표들이 잇따라 구역명칭을 ‘특구’로 하여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러나 중국측 대표들은 ‘특구’ 명칭에 동의하지 않았다. 양빈이 말머리를 슬쩍 다른 데로 돌렸다.

    “우리는 한 집안 사람끼리 의견을 나누는 것이니 무슨 생각이든 그대로 다 내놓아 보십시오. 그래야 공통점을 찾고 차이점을 유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아니겠습니까. 저는 후반생을 모두 조선인민에게 바치고자 합니다. 저는 우리가 신의주특구를 하는 것은 오로지 신의주와 조선의 쾌속 발전을 원하기 때문이란 것을 알리고자 합니다.”

    양빈은 자기 곁에 앉은 ‘중국측 대표’들을 가리키며 김 사장 등에게 웃으며 말하였다.

    “오늘 이 자리에 앉은 분들은 미래에 특구 임원으로 선출될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임원은 60%가 박사이고 40%는 석사인데 모두 저와 함께 자신의 한 몸을 조선인민에게 바치려고 합니다. 이번에 우리는 ‘같은 점을 찾고 다른 점을 유보’하려고 합니다. 더 반복하지 맙시다. 저는 조선인민의 아들이며 김 장군의 아들입니다. 장군님이 어떻게 하라고 하시면 어떻게 할 것입니다. 우리는 조선인민의 감정을 존중합니다.

    관건은 어떻게 외국자본이 신의주로 들어오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외국상인을 호텔에 든 손님이라고 할 때 우리가 만든 음식이 그들의 구미에 맞아야 하는 것과 같은 도리입니다. ‘기본법’은 호텔 식당의 메뉴이고 신의주는 호텔 식당과 같은 것입니다. 전세계 자본이 모두 이 식당으로 오게 해야 합니다.”

    김정일, ‘특별행정구’를 수용

    김동규 사장은 양빈의 말을 이렇게 받았다.

    “식당에 들어가면 메뉴가 중요하지 식당 이름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양선생님은 명칭에 유독 민감한데 제가 보기에는 그래도 ‘특구’라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3권’이 있지 않습니까. 양선생님은 특구의 행정장관이니 그 권력은 장관급의 권력보다 더 큽니다. 부총리라도 3권은 없지 않습니까.”

    “그럼 조선은 저에게 부총리급 노임을 줄 겁니까?”

    양빈이 웃으며 하는 말에 양측 대표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이번엔 허명규 부위원장이 입을 열었다.

    클라이맥스에서 막내린 ‘양빈 신화’ 내막

    2002년 9월23일 평양 인민문화궁전 2층에서 거행된 ‘기본합의서’ 조인식에서 국토개발승인서를

    “우리는 양빈 총재께서 특구와 특구행정부 장관을 맡아주시길 바랍니다. 홍콩의 둥젠화(董建華) 선생은 특구 수반이 되었지만 2기밖에 연임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양 총재님에게 50년을 맡깁니다. 둥젠화 선생은 아마 입법회를 소집하지 못하겠지요?”

    양빈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잠깐 휴식을 취하자고 제의하였다. 양빈과 김 사장은 휴식시간에도 계속해서 이야기를 하였다.

    휴식 후 양빈은 회담 전략을 바꾸어 문제를 상부로 올려 보내는 방식을 구사했다. 신의주특구의 구역명칭을 김정일이 결정하게 하자는 것이다. 북한 대표 김동규가 말하였다.

    “홍콩에 하나의 행정권밖에 없는데 양 총재에겐 세 가지 권력이 있습니다. 구역의 존엄과 기구를 생각하여 양 총재가 또 하나의 명칭을 제기하였는데 거수로 가결하는 것이 어떠합니까?”

    “김 장군의 의사입니까? 그렇다면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양빈의 물음에 김 사장은 그런 것은 아니라고 부인했다.

    “아, 아니, 그런 것이 아니고 이건 우리가 생각한 것입니다.”

    “만약 장군님이 결정한 것이라면 더 상의할 것 없이 그대로 집행합시다.”

    양빈의 말에 모두들 박수를 쳤다.

    양빈은 “김 장군님이 결재하시게 합시다”라고 한마디 더 하였다. 박수소리는 더욱 높아졌다.

    북한 대표단이 양빈이 특구장관이 되는 데 동의하고 3권까지 부여하면서 굳이 특별행정구 명칭을 거부한 이유는 무엇일까? 북한측 대표는 “다른 사람이 썼던 명칭은 쓰고 싶지 않다” “그런 명칭은 낡아빠졌다” “식민지 색채가 있다”고 하였다. 그런 이유들에서 우리는 북한 관리들의 의식과 고충을 엿볼 수 있었다.

    당시 우리는 김정일이 ‘신의주 특별행정구’ 명칭에 동의하리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김정일은 진작부터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을 수도 있다.

    ‘3권’과 ‘영주권’에 대한 논쟁

    구역명칭에 대한 논쟁을 “장군님께서 결재하시게 합시다”로 마무리하자 회의 분위기가 금세 환해졌다. 북한측 수석대표 김동규가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회담을 끌어나갔다.

    “3권을 다시 의논해봅시다. 특구장관은 행정부·입법회·법원을 책임집니다. 특구장관은 조선 최고회의로부터 임명받고 중앙정부에 선서해야 합니다. 입법회는 특구의 관련 법률과 법규를 제정합니다. 입법회 의장, 법원장, 검찰장, 경찰국장은 중앙정부의 추천과 특구장관의 지명 및 입법회 선거를 거쳐 확정됩니다. 입법회 의원은 몇 명으로 구성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15명이면 어떨까요? 중앙이 5명을 임명하고 특구장관이 5명을 임명하고 지역주민이 5명을 뽑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북한측 박성호의 통역을 들으며 나는 “입법회 의장, 법원장, 검찰장, 경찰국장은 중앙정부의 추천과 특구장관의 지명, 입법회 선거를 거쳐 선정됩니다”라는 대목에서 그 4개 직위는 북한측이 선정하고 파견하겠다는 의도를 명백히 감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양빈 대표단 성원들은 내부 논의시 이 4개의 요직은 모두 외국인이 맡고 북한인은 차석에 앉는 것이 좋다고 의견을 모은 바 있다. 북한인이 입법회 의장, 검찰장, 법원장, 경찰국장이 되면 투자자들이 겁에 질려 신의주특구로 올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고, 서방의 투자자들이 절대로 수천만 내지 수억달러의 거금을 신의주에 투자하지 않을 것이란 점이 지적되었다. 양빈은 특구장관 이외의 요직에 모두 북한사람이 앉으면 북한 본토와 아무런 차별이 없게 되며, ‘특구가 특별치 않고’ ‘국제적 성격이 없으’면 외자유치는 실패로 돌아갈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양빈은 우리와의 내부 모임에서 의장과 대법관(법원장)으론 유럽인이 가장 적임일 것이라며, 공정한 법집행으로 명성이 높은 네덜란드 대법관이나 국제 대법정에서 은퇴한 저명한 법률전문가를 선임하면 좋을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또 경찰국장은 서방 법률을 숙지하고 아시아 각국의 법률에도 능통하며 경험이 많아 분쟁을 야기시키지 않을 싱가포르나 홍콩 인사가 적임이라고 말했었다.

    북한측은 입법회 성원을 15명으로 제안하면서 북한측과 양빈이 각기 5명씩 지명하고 나머지 5명은 지역주민 선거로 뽑자고 하였다. 이럴 경우 현지 주민이 선출하는 5명이 입법회 의원 비례에 결정적 영향을 주게 된다. 제1차 입법회를 소집할 때는 아직 거주권을 지닌 외국인이 없으므로 결국 현지 주민은 모두 북한사람을 입법의원으로 뽑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북한사람이 10명이나 되고, 양빈측은 단 5명뿐인 입법회가 구성된다. ‘사회주의의 법제’에 길들여진 10명의 북한 의원은 서방식 법률의 실시를 주장하는 5명의 양빈측 의원보다 압도적인 다수가 되는 것이다.

    양빈의 수석법률고문 둥롄파 교수는 머리가 굉장히 좋은 사람이다. 그는 북한 대표의 말을 맞받아 토론하지 않고 중대한 인사 결정과 관련되는 문제는 수석대표 양빈의 말을 들어보자면서 ‘현지주민 5명을 선거’하는 문제에 대해 자기의 견해를 밝혔다.

    “제1차 입법회에서 현지주민이 선거하는 정원은 어떻게 결정되는 것입니까? 특구정부 설립 초기엔 외국인이 영주권을 가지지 못하는데 그럼 외국인의 권한은 어떻게 합니까?”

    그러자 양빈이 자신의 의견을 내놓았다.

    “마땅히 투자자들의 몫이 있어야 합니다. 의회에 반드시 그들의 이익 대표자가 있어야 하는 것이죠. 이렇게 합시다. 장관이 3명을 지명하고 조선측이 2명을 지명합시다.”

    허명규 대표가 다른 의견을 말했다.

    “25만 조선 영주민에게 2명뿐이란 건 너무 적습니다. 조선측이 3명, 장관이 2명을 지명하도록 합시다.”

    양빈이 한 발짝 물러서 이렇게 대답했다.

    “좋습니다. 일단 큰 틀을 짜놓고 봅시다.”

    이렇게 해서 입법회 의원 구성 비율 문제의 돌파구가 마련되었고, 결국은 북한측이 8명, 양빈측이 7명의 의원을 지명하는 것으로 했다. ‘우리측’ 대표들은 서로 얼굴만 쳐다볼 뿐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양빈이 “일단 큰 틀을 이렇게 짜놓고 봅시다”라고 한 데서 필시 ‘훗날 다른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입법회 직능과 의원 정원을 둘러싼 토론은 의장 인선문제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양빈이 먼저 이 문제를 꺼냈다.

    “특구의 국제적 특성을 봐서 의장과 법원장은 외국인, 특히 변호사 경험을 지닌 사람을 선임할 것을 희망합니다. 의장은 네덜란드 사람이 어떻습니까? 예를 들면 국제법 경력자 말입니다. 부의장은 홍콩이나 싱가포르 사람 한 명과 조선측 한 명으로 하면 될 것 같습니다. 특구에 투자하는 외국인들은 주로 법률의 공정성과 투명성에 주목합니다. 때문에 저는 입법회 인선에 있어 국제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느냐에 중점을 두고 고려했습니다. 이 점에서 저는 사심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저는 중국에 있는 제 친인척이나 동창은 한 사람도 특구의 요직에 취임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사법의 공정성과 행정의 청렴성을 담보할 것입니다.”

    김동규가 “우리가 돌아가서 양 총재님의 뜻을 보고하겠습니다. 다음 문제를 말해봅시다”라며 넘어갔다.

    그날, 양빈은 심기가 무척 좋았다. 저녁에 양빈은 네덜란드촌 ‘백조의 호수’에서 성대한 연회를 베풀었다. 양측 대표들은 서로 술을 권하며 축복의 말을 나누었다. 연회가 끝난 뒤에는 특별히 기획된 불꽃놀이가 진행되었다.

    밤하늘에 오색영롱한 불꽃이 휘날렸다. 어떤 불덩이는 공중에 높이 날아 올랐다가 다시 터져 작은 불꽃으로 부숴져내렸다.

    이 때 양빈이 한마디 외치니 홀연 호수 맞은편에 조선글로 김정일에 대한 불꽃 자막이 나타났다. 그 불꽃 자막은 밤하늘에 오래도록 지지 않고 빛을 뿌렸다. 북한 대표들은 환호하며 박수를 쳤다. 나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양빈이 이토록 기발한 구상을 할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양빈은 짧은 시일에 어디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불러와 불꽃을 피워 올렸을까.

    기본법의 조속한 선포 희망

    5월20일 오전 9시30분, 양측 대표는 회의장에 입장하였다. 좌석에 앉자 북한 수석대표 김 사장이 벙글거리며 먼저 입을 열었다.

    “양 총재님 엊저녁 불꽃놀이 야회에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불꽃 자막이 나올 때 얼마나 감격했는지 모릅니다. 심심한 사의를 표합니다.”

    북한 대표들이 뜨거운 박수로 양빈과 우리측 대표단에 사의를 표했다.

    북한측 허 부위원장이 의문을 제기하였다. “특구가 국제기구에 가입할 수 있습니까?”

    뤄웨이젠이 대답하였다.

    “국가 단위로 가입을 요구하지 않는 국제기구엔 가입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위생, 문화, 체육, 경제분야 기구입니다. 참가하면 여러모로 특구에 유익하지요.”

    “화폐 문제는 어떻게 합니까?”

    양빈이 대답하였다.

    “조선측의 의사를 존중하겠습니다.”

    현재 북한의 외국인 전용 호텔과 상점들에선 달러화, 엔화, 위안화, 유로화 등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화폐를 쓰고 있다. 홍콩달러도 평양에서 대량 유통된다. 그러나 북한화폐는 외국화폐와 직접 태환하지 못한다. 북한은 과거 중국처럼 태환권을 사용해 간접적으로 외국화폐와 태환한다. 미래 신의주특구에선 주로 달러화, 위안화, 유로화, 엔화, 캐나다 화폐, 호주 화폐 등이 사용될 것이다. 북한의 화폐와 직접 바꾸지 못하며 북한의 금융정책에 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이다. 때문에 양빈은 “북한측의 의사를 존중한다”고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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