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9월호

경매로 50먹 번 비결, “듣고, 만나고, 부딪치고, 협상했다”

  • 박성원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parker49@donga.com

    입력2005-09-06 17: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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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장님,이거 그대로 써도 됩니까? 2년 전 수중에 단돈 19만8000원뿐이던 사람이 현재 500억원의 자산을 일궜다고….”

    “왜 안 돼요?”

    “국세청에서 조사 나오지 않을까요?”

    “거리낄 것이 없는데요.”

    ‘신동아’가 9월호 권말부록으로 기획한 경매 마스터 코스는 ‘경매 귀재’로 불리는 김길태(金吉泰·54) 회장이 집필했다. 그는 경매 전문업체 지엔비 인베스트와 부동산TV, 지엔비 종합건설, 지엔비 주택관리, 법무사무소를 아우른 지엔비그룹 회장을 맡고 있다. 이 정도 직함쯤이야 부동산 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라면 그리 대단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가 보유한 자산이 500억원에 달한다니 부동산 업계에서도 손꼽히는 재산가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정작 놀라운 사실은 이것이 불과 2년 만에 일궈낸 자산이라는 점이다.



    ‘법무부 대학’에서 보낸 4년

    2003년 1월2일, 그의 수중엔 단돈 19만8000원이 있었다. 1998년 부동산실명제를 위반해 창원지검에 구속된 뒤 4년을 교도소에서 보낸 그에게 돈이 있을 리 없었다. 19만8000원은 교도소에서 지급한 돈. 그래도 마음은 가벼웠다. 죗값을 치렀고, 전 재산을 처분해 42억원의 추징금도 빠짐없이 납부했다. 그는 교도소에서 복역한 4년 동안 부동산 관련법을 줄줄 외우다시피 공부했다. 숱한 실전 경험도 깔끔하게 이론으로 정립했다. 다시 출발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희망에 부풀었다.

    그러나 비빌 언덕 없이 사업을 시작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구속 당시 이혼한 아내를 찾아갔다. 혹시 처가 재산까지 해를 입을까 우려해 위장 이혼했던 터였다. 그러나 환대해줄 것으로 믿었던 아내는 초인종을 누른 그에게 문도 열어주지 않았다. 머리가 멍했다. 추위도 잊고 한동안 집 앞에 서 있다가 근처 여관으로 일단 짐을 옮겼다. 뭔가 오해가 있으려니 했다. 다음날 다시 아내의 집을 찾아간 그는 아내가 이미 다른 남자와 함께 산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발길을 돌렸다. 피눈물이 흘렀다.

    김 회장은 오뚝이 같은 사람이다. 두 번의 큰 시련을 만났지만, 이를 이겨내고 사업을 이전보다 더욱 활짝 꽃피웠다. 그가 경매와 인연을 맺은 시기는 1979년 지인의 집이 경매로 넘어가자 이를 막기 위해 동분서주한 때부터다. 미국 브리검영대 법학과를 졸업한 뒤 율산실업과 삼환기업 기획실에서 일하다가 주택사업을 하기 위해 회사에 사표를 던진 즈음이었다. 당시 경매업계엔 조직폭력배가 들끓었다. 그러나 ‘듣고, 부딪치고, 협상하면서’ 경매가 위험하지만 수익이 높다는 것을 깨달았다. 명도가 쉬운 토지를 대상으로 경매에 참여하면서 그는 막대한 돈을 벌었다.

    1986년부터 김 회장은 경매로 모은 돈을 전남 화순의 온천개발에 쏟아부었다. 그때는 온천사업이 붐을 이뤘다. 하지만 돈 있는 서울 사람들이 가기엔 너무 멀어 이용객이 줄자 투자한 돈이 회수되지 않았다. 결국 부도를 맞았고, 그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빈털터리가 됐다.

    1994년 김 회장은 다시 경매사업에 매진하기로 결심한다. 경매 방식이 호가제에서 입찰제로 바뀌자 경매의 대중화를 직감했다. 조직폭력배가 설칠 여지가 많은 호가제가 입찰제로 바뀐 것은 경매 과정이 투명하게 집행되고, 실력으로 낙찰받는 시대가 열림을 의미했다.

    신문지 깔고 2시간 자며 강의 행군

    김 회장은 대학에서 경매에 관해 강의할 때 수강생이던 6명과 의기투합, 경매 전문회사를 차렸다. 자본금 3500만원을 마련한 이들은 소자본으로 경매에 참가할 수 있고, 상대적으로 경매 전문가가 적은 경상도에서 사업을 시작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사세를 확장하기 위해 김 회장은 경매로 피해를 본 임차인을 구제하는 데 힘을 집중했다. 채무자가 빚을 갚지 못해 부동산이 경매로 넘어가면 그 집에 세든 사람들은 최우선 변제금을 제외하고 돈을 못 받기 일쑤였다. 방법은 임차인이 경매로 나온 부동산을 낙찰받는 길뿐이었다. 김 회장은 이처럼 임차인을 도와주면서 6000명의 경매 회원을 모을 수 있었다.

    승승장구하던 사업은 1998년 검찰에 투서가 들어가면서 최대 위기를 맞았다. 직원 명의로 낙찰받아 부동산실명제를 위반한 것이다. 아내, 회원, 재산 등 그가 일구고 가꾼 모든 것이 그를 떠났다. 결국 그는 또다시 빈털터리가 됐다.

    그는 옛 동지를 찾아나섰다. 바닥까지 추락한 그에게 남아 있는 사람은 옛 동료밖에 없었다. 법과 경매이론으로 무장한 그는 옛 직장동료와 함께 재기 의 의욕을 불태웠다. 한때 오만하게 보였던 그가 교도소에서 4년을 보내고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나자 동료들도 그와 함께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에게 동료들은 경매사업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이들은 현장조사와 이해관계 조절, 명도, 환금성 분석, 수익성 분석 등 각자 맡은 전문 분야가 있다.

    그는 친구의 사무실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하루 2시간만 잠을 자며 대학에 경매 강의를 하러 다녔다. 경매 물건의 권리분석은 물론 ‘경매의 꽃’이라고 하는 명도(낙찰받은 부동산을 최종적으로 자신의 이름으로 등기하는 것) 방법, 그리고 리모델링까지 상세하게 강의하는 그에게 학생이 몰리기 시작했다. 경기대, 창원대, 매일경제TV, 부동산TV 등에서 인기를 얻은 그는 학생들과 함께 공동투자하면서 자금을 불렸다.

    25년 동안 경매 노하우 담은 강의록

    그가 노리는 물건은 전문가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복잡한 부동산이었다. 낙찰은 여러 번 됐으나 복잡한 위장유치권으로, 조폭의 개입으로 명도를 하지 못한 것들이었다. 전북의 한 병원을 인수하는 과정이 그랬다. 감정가만 240억원이던 이 병원은 네 차례 낙찰됐으나 명도가 이뤄지지 않아 입찰가는 18억원까지 내려갔다. 30억원의 유치권이 설정돼 있고, 유치권을 설정한 자는 조직폭력배였다. 김 회장은 유치권이 위장이라는 사실, 유치권을 설정한 인물이 채무자와 연관된 조폭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명도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형사고소할 것을 작정하고, 24억1100만원에 낙찰을 받았다.

    아니나다를까. 조폭의 협박전화가 이어졌다. 이 같은 상황을 예상한 그는 형사고소로 맞섰다. 산전수전 다 겪은 그에게 조폭 따위의 협박이 먹혀들 리 없었다. 결국 두 달 만에 유치권자는 고소 취하를 조건으로 유치권 행사를 포기하고 명의를 이전해주었다. 이렇듯 성공의 역사를 하나씩 써나가면서 그는 한국부동산TV를 인수하고 경매 관련 회사를 설립했다.

    7년 전, 그의 추락을 목격한 사람들은 그의 인생이 끝났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시든 인생을 경매 전문가로 다시 꽃피웠다.

    김 회장은 재기의 성공 비결을 이렇게 요약한다. “4년 동안 ‘법무부 대학’을 다니면서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어요. 바닥을 헤매던 내 곁에 있어준 사람이 누군지, 진심으로 마음을 열면 남도 내 사람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나락으로 떨어진 그의 인생을 구해준 경매, 그가 25년 동안 체득한 경매 성공의 강의록을 들여다보자. 돈 있는 사람에겐 재테크의 수단으로, 인생의 목표를 잃어버린 사람에겐 새 출발의 기회가 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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