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4월호

MB, 영화 한 편 보시지요

  • 입력2010-04-01 15: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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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정 스님이 떠나갔다. 찬바람 부는 아침, 대나무 평상(平床)에 누워 가사(袈裟) 한 장 덮으시고 떠나셨다. 관(棺)도 없고 수의(壽衣)도 없었다. “번거롭고 부질없으며, 많은 사람에게 수고만 끼치는 일체의 장례의식을 행하지 말고, 관과 수의를 따로 마련하지도 말며, 편리하고 이웃에 방해되지 않는 곳에서 지체 없이 평소의 승복을 입은 상태로 다비해주고, 사리를 찾으려고 하지 말며, 탑도 세우지 말라”던 스님 생전의 당부대로였다. 스님은 입적(入寂)하기 전날 밤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이 남아 있다면 모두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활동에 사용해달라. 이제 시간과 공간을 버려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스님은 그렇게 ‘무소유(無所有)의 법문(法文)’을 중생에 남기고 열반(涅槃)하셨다.

    하지만 소유가 집착을 낳고, 집착은 괴로움이라 한들 속세의 인간들에게는 쇠귀에 경 읽기다. 그들은 하나라도 더 소유하기 위해 몸부림친다. 권력, 부(富), 명예, 출세…. 세상은 욕망의 바다다. 오늘 한국 사회가 당면해 있는 누적된 갈등의 교착(膠着) 상태도, 어쩌면 그 밑바닥에는 욕망의 맨얼굴이 자리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3·1절 기념사에서 “다양한 생각은 존중하되, 작은 차이를 넘어 최종 커다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정신은 국민의 민생 향상을 위해 소모적인 이념논쟁을 지양하고 서로 인정, 존중하며 생산적인 실천방법을 찾는 중도실용주의 정신이기도 하다. 낡은 이념의 틀에 갇혀서는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고, 대립과 갈등으로 국민이 분열돼선 선진화의 길을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작은 차이를 넘어서는 커다란 조화.’ 아름다운 말이다. 그러나 일면 공허하게 들리는 것도 사실이다. 왜일까? 내가 이 대통령에게 한 편의 영화 감상을 권유하는 것은 영화 속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영화 제목은 ‘우리가 꿈꾸는 기적: 인빅터스(Invictus)’이다.

    팔순의 거장(巨匠)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은 1995년 월드컵대회에서 우승한 남아프리카공화국 럭비대표팀의 실화를 통해 기적이 어떻게 현실이 될 수 있는지, 기적을 현실로 만드는 소통의 리더십은 어떤 것인지, 진정한 화해와 통합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 지를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극단적인 인종차별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가 반세기 동안 지배해온 남아공에서 럭비는 백인의 전유물이었다. 27년간의 옥고(獄苦)를 거쳐 1994년 남아공 대통령에 선출된 넬슨 만델라는 뿌리 깊은 흑백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고심한다. 스포츠의 힘에 주목한 만델라는 흑백 인종 간 용서와 화해의 계기를 남아공 럭비대표팀 ‘스프링복스’의 월드컵 우승에서 찾으려 한다. 그러나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들어선 남아공 정부의 체육위원회는 럭비대표팀의 이름과 유니폼을 바꾸기로 결정한다. ‘스프링복스’는 오랜 세월 남아공 흑인들이 증오해온 백인의 상징이었기에. 소식을 전해 들은 만델라는 직접 위원회를 찾아가 흑인위원들에게 결정을 취소할 것을 설득한다. 그는 말했다. “백인들에게서 무엇이든 빼앗으려 하지 마시오. 그들로부터 뭔가를 빼앗으면, 빼앗긴 그들은 우리를 증오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남아공 국민 간 화해와 통합은 영원히 불가능할 것입니다.”

    오랜 세월 백인의 차별과 착취에 신음해온 흑인들로서는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제안이었다. 그러나 만델라의 도덕적 권위와 진정한 설득 앞에 체육위원회의 만장일치 결정은 취소된다. 체육위원회를 설득한 만델라는 ‘스프링복스’의 백인 주장 프랑스와 피나르를 대통령집무실로 초대해 1년 뒤 열릴 남아공 월드컵 럭비대회에서 우승해줄 것을 당부한다. 당시 최약체로 손꼽히던 ‘스프링복스’가 월드컵에서 우승한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만델라는 ‘나는 내 운명의 주인/ 나는 내 영혼의 선장’이라는 시(詩) ‘인빅터스(정복되지 않는)’의 구절을 들려주며 프랑스와에게 우승의 영감(靈感)을 불어넣는다. 그 영감은 주장 프랑스와를 통해 점차 ‘스프링복스’의 모든 팀원에 전이된다. 마침내 기적적인 우승. 눈길을 마주치는 것조차 꺼리던 흑인과 백인들이 서로 부둥켜안고 하나가 된다.

    결과가 예정된 단조로운 스토리임에도 이 영화가 감동을 주는 것은 관용과 설득, 이해와 감동이 화해를 이끌어낸다는, 한국 사회가 풀어내야 할 지긋지긋한 갈등과 반목의 해소 방법을 만델라의 위대한 리더십을 통해 보여주기 때문이다.

    남아공의 흑백 인종 간 적대(敵對)에 비한다면 한국 사회 세력 간 대립은 보다 적은 노력으로도 한결 누그러들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이 대통령은 ‘작은 차이를 넘어서는 커다란 조화‘를 위해 어떤 리더십을 구현해야 할 것인가. 수사(修辭)만이 아닌 구체적 행위를 통한 비판 및 반대세력에 대한 관용과 설득, 그리고 그 과정에서 다수 국민의 감동을 이끌어내야 한다. 성과와 효율만을 앞세워 절차와 과정을 무시하는 일방적 리더십으로는 비판 및 반대세력을 설득할 수도, 동의를 구할 수도 없다. 하물며 그들을 몽땅 ‘좌파’로 치부하려 한다면 국민통합은 요원할 수밖에. 물론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자유민주주의체제 자체를 부정하는 극단적 친북좌파세력까지 포용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한줌밖에 안될 그런 반체제세력은 절대다수의 국민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이 대통령이 말했듯이 ‘낡은 이념의 틀’에 갇혀 보수-진보, 우파-좌파의 이분법적인 잣대로 내 편, 네 편을 가르는 일이다. ‘좌파정권하의 잃어버린 10년’이란 프레임은 선거용으로는 유용했을지 몰라도 대통령 취임사에서 국민통합을 말하는 순간부터 폐기해야 옳았다. 다행히 요즘 들어 ‘잃어버린 10년’ 얘기는 쑥 들어갔으나 집권 측의 마인드까지 변화된 것인지는 의문이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는 얼마 전 한 토론회에서 “이명박 정부는 우호적인 세력에 대해서는 친(親)서민 중도실용을 앞세운 포섭전략을, 비판적인 세력에 대해서는 법치적 권위주의를 앞세운 배제전략을 내세우는 전형적인 ‘두 국민 정치’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 교수의 주장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두 국민 정치’에 적지 않은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는 게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라면 이 정부는 비판세력을 탓하기 전에 자신부터 돌아봐야 한다. 그렇지 않고 모든 비판이나 반대를 비판을 위한 비판, 반대를 위한 반대로 못 박는다면 ‘커다란 조화’는커녕 ‘거대한 분열’로 심화될지 모른다.

    민주주의를 위해 법치가 필요하고 중요하다는 데에는 국민 모두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법치가 비판이나 반대세력을 배제하는 수단으로 악용된다면 법치주의에 대한 신뢰는 심각하게 훼손될 수밖에 없다. 그런 법치는 법의 첫째 요소인 정의(正義)에서 멀어질 수 있으며, 결국 법의 안정성도 흔들리게 된다. 이명박 정부 2년 동안 한국의 민주주의가 후퇴했다는 비판이 공공연하다면, 정부가 법치를 자의적(恣意的)으로 운용한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법치가 공정성과 형평성을 잃는다면 과거 독재정권의 ‘위장된 법치’와 다를 게 없지 않겠는가.

    국가인권위원회는 지난 2월 용산참사와 관련해 “국가가 공권력을 행사함에 있어 위법한 행위에 대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경우에는 사회적으로 국가에 의한 범죄행위의 불처벌 현상이 발생해 법치주의에 대한 심대한 장애가 발생하게 된다”고 했다. 시위 철거민 진압을 위한 무리한 경찰력 행사가 사실상 위법이라는 의견을 내놓은 것이다. 돌이켜보면 참사 직후 무리한 공권력 행사를 시인하고 적절하게 수습했더라면 오히려 이 정부의 법치가 공정성을 인정받았을 것이다.

    ‘한 기관 두 위원장’ 사태가 장기화되고 있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경우는 법치가 이 정부의 발목을 잡은 격이다. 이른바 ‘좌파 적출’이란 소아병적 조급함에서 빚어진 과도한 권력행사에 대해 1심 법원이 위법 판결을 내렸으니, 아직 최종심이 남아 있다고는 하나 법치를 강조하는 정부가 불법을 저질렀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이러니 작은 차이를 넘어 커다란 조화를 이루자는 대통령의 말이 공허하게 들릴 수밖에. 하기야 지난 정권이라고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그들 또한 ‘코드 인사’에 연연했다. 그러나 지난 정권을 실패한 좌파정권으로 규정했다면 새로운 우파정권은 그들과는 뭔가 달라야 하지 않겠는가. 더욱이 중도실용을 국정철학으로 내세웠으면 이 정부부터 ‘낡은 이념의 틀’에서 탈피했어야 한다. 이 대통령은 이념형이 아닌 실용을 중시하는 CEO형 지도자다. 그런 대통령의 정권이 좌파 배제란 낡은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은 의아하고 유감이다. 대통령이 용기 있게 그 틀에서 벗어날 때 ‘커다란 조화’도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MB, 영화 한 편 보시지요
    全津雨

    1949년 서울출생

    동아방송 기자

    월간 신동아 편집장

    동아일보 논설실장·대기자

    現 경원대 초빙교수

    저서: 작품집 ‘하얀 행렬’ ‘서울의 땀’, 칼럼집 ‘역사에 대한 예의’


    천주교 주교회의는 최근 4대강 사업을 반대한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주교회의는 “우리 산하에 회복이 가능할 것 같지 않은 대규모 공사를 국민적 합의도 없이 법과 절차를 우회하면서까지 급하게 밀어붙여야 하는 이유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불교와 개신교, 원불교 등 종교계 전반의 반대 움직임도 본격화하고 있다. 그렇다면 4대강 사업을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는 사실상의 총책임자인 대통령이 4대 종단의 대표자들을 만나 ‘급하게 밀어붙이는 이유’를 설명하고 설득해야 하지 않을까. 만델라는 남아공 럭비대표팀의 이름과 유니폼을 바꾸려는 체육위원들을 찾아가 그래선 안 된다고 설득하고 도와줄 것을 호소했다. 상대 비교할 성격은 아닐지라도 4대강 사업이 남아공 럭비대표팀 문제보다 덜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 대통령은 지난 1월 “지금 4대강 사업의 반대자들이 완성된 뒤에는 지지자들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일방적 언명(言明)으로는 동의를 이끌어낼 수 없다. 도리어 비판과 반대를 강화시킬 뿐이다. 소통 없는 리더십으로 갈등을 해결할 수는 없다. 이 대통령이(가능하다면 주요 각료 및 참모들과 함께) 영화 ‘인빅터스’를 관람하기를 권유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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